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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1체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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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영사운이란? (17) 등록일 2016.02.16 21:55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508

바/영/사/회-"[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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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비극, 인간고의 뿌리

인생이 처음부터 이러한 비극적인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이런 비극적인 존재로 하나님이 만드셨을 리 만무하다. 인생이 스스로 불러들인 화근이요 자업자득이다. 위에서 말한 바 사랑의 원리를 어김에서 비롯된 결과 즉 범죄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원리를 말씀하시는 것은, "행복한 삶은 한 몸됨에 있어 내가 머리로서 너를 사랑하니 너는 네 머리가 되는 나를 사랑하여 머리로서의 지시를 잘 듣고 네 이웃을 위하여 사는 것이 네가 사는 길이다" 하고 가르치심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아담]은 영악한 다른 피조물[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더 믿고 그를 따라 자기 욕심을 앞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 이 지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고 벌을 주셨다기보다 그 말씀 듣지 않은 것이 '원인'이 되어 그 '결과'가 이렇게 된 것이다. 즉 먹으라고 하시는 것을 먹고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먹지 말아야 하는데 시건방진 생각이 들어 제 잘났다고 그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을 먹어 바로 그 먹은 결말인 것이다.

그 먹지 말라고 경고하신 선악과를 먹은 결과 아담 부부의 몸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자연계의 생물체[특별히 동물]가 자기 종족 보전을 위해 자동적으로 자기를 위주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그렇게 장치가 되어 있는 대로의 본능을 따르는 작용이므로, 그런 본능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동물들에게는 적합하고 이상적이나, 자기를 부인하는 가운데 의식적으로 한 몸의 이치대로 살도록 되어 있는 인간에게는 그것이 도리어 죽음의 자기중심으로 치닫게 되는 근원이 되는 까닭이다.

이것이 성경에 말하는바 “육신”[롬 7:5-8:13] 곧 “죄의 몸”[롬 6:6]이다. 그렇게 영구적으로 나쁜 성향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나무가 곧 선악과 나무였던 것이다. 그 나무의 과일을 먹은 것이 오늘날 이와 같은 자기 위주로만 나가는 저주스러운 인간 성향으로 굳어져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전의 영광스러운 영생의 신령한 몸을 잃어 버리고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급전직하한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믿고 지켰더라면 이런 비극은 애당초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범죄하기 전 아담의 영광의 실상을 제대로 인식해야 현재의 우리의 처참한 비극적 양상 곧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참상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를 모르니 무턱대고 이 세상에서 소위 하나님의 축복 받아 잘 산다는 마귀의 거짓말과 속임수에 현혹되는 것이다. 저주 받은 세상, 진노 아래 있는 실상을 알고서 세상 삶을 사랑할 수 없다. 이러한 이 세상 삶이기에 이런 한 때뿐인 생애는 철저히 통제되어 있는 것이다. 3운법칙이 그 증거다.

이렇게 통제되고 제약된 인간 생애라는 사실이 드러나진 것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의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요 12:25] 말라는 준엄하신 경고다.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행색일 뿐이다. 각본대로 감독이 시키는 대로 주연, 조연, 엑스트라를 다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흉내 내는 것이지 그 스스로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니 이 세상이 꼭 그와 같은 것이다. 진정한 삶 그리고 죽음은 오는 세상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그 삶이냐 죽음이냐 하는 생사의 판가름이 내 스스로 내리는 자유 선택의 결과물이라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진실로 떨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신비한 나무 열매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후에 이런 자연계에 속한 세상이 아닌 별도의 세상을 만드시고 거기 살게 하신 것이니, 에덴낙원은 바로 영계였던 것이다. 아담의 몸 즉 육신은 현재와 마찬가지의 자연계에 속한 흙의 성분으로 지으셨으나 그 안에 별도로 영혼을 조성하심으로 인하여, 여기에 부합하게 이런 별다른 세상[영적인 세계]을 만드셔서 거기 살며 거기서 나는 별다른 과일을 먹음으로써 그 몸 역시 신비한 [우리가 아는 이런 육체가 아닌] 썩지 않는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신령한 육신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창조의 순서였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으로 만드신 까닭에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공중의 새처럼 우주 공간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닐 수 있어야 하고 물 속의 고기처럼 바다 밑이라도 얼마든지 들어가 지낼 수 있는 육신이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래서 그런 신령한 몸이었던 것이다. 사람이란 육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함께 있어 영계에 속하는 영적 존재이므로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만 자연스러운 것이다.

만일 지금처럼 하늘은 날고 싶은데 못날고 그래서 높은 데에서 떨어지면 속절없이 죽어야 하고, 바다 속을 마음껏 유영하고 싶은데도 못하고 물에 빠져 죽는 판이라면 처음부터 사람이 새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며 물고기보다 낫다고 할 것이 무엇이며, 어찌 물고기와 새를 다스릴 수 있다고 하겠는가. 또한 이런 욕망을 못이루어 한없이 아쉽게만 여기는 인생을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만드실 리 없지 않은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것도 고통이다. 이런 고통을 받는 인간을 처음부터 만드실 이유가 없다. 그렇게 만드실 바에야 차라리 그런 것을 희구하는 욕구조차 없도록 만드셨을 것이다. 오직 이렇게 된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의 자업자득에 의한 것이니 그렇게 못먹을 것이니 먹지 말라는 경고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써 된 비극적 결과요 그 당연한 응보였다. 버섯도 먹는 버섯이 있고 독버섯이 있는데 먹지 말아야 할 독버섯을 그렇게 경고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고집대로 뻗대어 먹고 저질러 사고를 만나면 이를 두고 응분의 결과라 하지 않겠는가.

제 잘났다고 방정맞게 군 결과이나 그 결과가 엄청난 것이다. 인간이 이런 나쁜 성향으로 한번 돌아선 이상 그 아름다운 세계에서 더 이상 존속할 수 있겠는가. 이런 자기 집착이라는 나쁜 성향은 죄와 악으로 불 타오르는 불덩이로서 그 아름다운 세계를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그런 상황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담을 죽게 만듦으로써 그 짓을 한 것이다. 당연히 지체 없이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쫓겨나서 쫓겨난 것이라기보다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어 버렸으니 영계에 남아 있을 수가 없다. 생명과를 먹으면 되나, 죽게 되어 있는 자가 다시 신령한 몸을 입는다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못할 일이다. 그래서 생명과 나무를 먹지 못하도록 자연계로 추방하신 것이다. 이미 한없이 나약해진 인간인데 그렇게 그룹과 스랍을 두어 엄중히 지키게 하실 이유가 무엇인가 하겠지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을 경계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조화(造化)로 인간이 생명과를 먹게 함으로써 더 큰 불상사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그와 같이 생명나무로 통하는 길을 아예 차단하신 것이다. 거룩한 천사들이 있지만 더 큰 능력의 그룹과 스랍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신 뜻이 그 때문이다. 천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면 밤낮없이 악령들과의 대판 전쟁이라도 날 것이 아닌가. 그런 전쟁은 마지막 때 일어나기로 작정되어 있었던 것이다[계 12:7]. 그룹과 스랍은 이미 '6일 창조' 전부터 창조하심을 입은 피조물들이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은 그 적수가 되지 못함이다.

그러면 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은 진작부터 쫓겨나지 않았던가 할 것이다. 그것은 그 영계가 원래부터 자기네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창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자연계에 속한 흙으로 지으심 받아 영혼이 조성되면서 그 영계[영적 존재가 된 인간을 위해 창설된]에 들어 갔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그 일당은 영구적으로 추방된 것이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대 충돌 사건으로 판명 나 있다.

또 인간이 추방된 이유도 분명히 밝혀져 있다. 그런 상태에서 생명나무 과일을 먹으면 다시 신령한 몸으로 복구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하심이었다. 왜냐면 스스로 그렇게 해서 신령한 몸으로 다시 환원되면 아담은 영구적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될 것이고[자기 스스로 자기를 위하여 무엇이든 하게 되므로] 그러면 당연히 멸망뿐일 것이기에 그런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악령들이 생명과 나무 실과를 따다가 아담에게 먹일 양이면 인생들은 아주 구원의 기회를 놓치고 말 것은 자명하다.

또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범죄하는 자는 반드시 죽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렇게 범죄하여 일단 죽음에 이름으로 해서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된 이상[에덴낙원에 아직 남아 있을 때부터 아담의 신령한 몸의 특징은 사라지기 시작하고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변해 간 것이다], 범죄의 대가는 필연적으로 죽음이니 생명의 세계인[인간으로서는] 에덴낙원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처지다. 그래서 자연계로 쫓겨나 장차 나타나실 그리스도의 구원의 때를 기다리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자연계에 살도록 되어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연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량하고도 처참한 운명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사노라니 한숨이요 탄식이고 눈물뿐이라 이를 일컬어 옛사람들은 고해(苦海)라 했다. 설상가상으로 인간의 이 자초(自招, 自取]한 자기중심의 성향으로 인해 인화(人禍)로 말미암는 고통이 극에 달해 있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고 빼앗고 울부짖게 만드는 아비규환의 난장판이 이 세상이요 하늘에 사무치는 한과 피에 얼룩진 인간 역사다.

차라리 인간 "죄악사(罪惡史)"라고 해야 걸맞는 표현이다. 성경은 사람이 태어나자 살인극부터 먼저 벌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형이 아우를 그것도 자기보다 양심적이고 훨씬 더 나은데도 죽여 버렸으니 이유는 아무 것도 없고 아우에 대한 시기심이었다. 이런 것이 자기중심의 본질이다. 자기가 우주 중심이므로 자기 위에 올라서는 그 누구든 용납을 못하니 아비라고 해서 아들이 못 죽일 것도 없다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러하니 먼저 차지하고 남 앞서 저지르는 놈이 장땡이다. 그러니 언제 인간사회에 평화가 오겠는가. 망했어도 벌써 망했을 것을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구원 받을 사람은 다 받도록 하시려고 오래 참으시고 강권 발동으로 억지로라도 세상을 붙드시기 때문에 이 정도로도 지탱해 가는 줄은 모르고, 세상은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잘도 굴러가는 것으로만 모두들 착각한다. 그 강권 발동의 하나가 3운법칙[trini homo]인 것이다.

이제 곧 이런 난장판의 세상을 더 이상 참아 줄 필요가 없다 보시고[구원 받을 사람은 이제는 없다고 판단하실 때] 마감하시려는 단계에서 이제 그 마지막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문은 아직 열려 있으니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은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의 영을 받아 모시는 이 절체절명의 기회를 놓치지 말 일이다. 하나님의 영을 모시지 못하면 영원히 멸망의 고통과 고난[계 14:11] 가운데 지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람은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물은 영혼이 없으나 사람만은 있어 각 개인은 세상에서 자기가 육신으로 행한 모든 언행을 따라 그 결판이 나는 것이다. 마지막 때의 심판에서다.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다시 새 사람으로 나는 방법을 마련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를 거부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거역하게 될 때 미치게 될 응보는 자명하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거룩한 천사와 같은 영물이든 인간이든 자유 의지를 주시어 자유 선택으로 자기 삶을 살아가도록 하셨기 때문에[삶은 사랑이고 사랑은 자유 의지가 그 핵심이므로] 선을 행하느냐 악을 행하느냐 하는 것으로 처음부터 자기 운명을 가름하게 하신 것이다.

영물들은 이미 그런 선별 작업이 완료되었다. 인생들만이 남은 것이다. 그것도 첫 사람이 범죄하여 죽음의 고통 가운데 "죽은 자"로 있으면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악인[여전히 죽은 자로 있는 경우]과 선인 또는 의인[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더 다시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가 되어 산 자로서 살아가는]이 가려지는 작업이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신 그대로, 여기에 하나님으로서는 일절 관여하시지 않는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들로 구원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나, 강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께서도 간섭하시지 않는데 일개 피조물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무엇이라고 간섭하랴] 어디까지나 인간의 동조(同調)하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순수하게 우리 인간 자신의 선택 여하로 좌우되는 일이다. 물론 에덴낙원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담을 꾄 것과 같은 그런 갖가지 속이는 것, 거짓말 및 거기 준하는 모든 것은 유감없이 작동된다. 이런 일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인간이 피동적으로 거기에 속절없이 넘어가는 일은 없으니 어디까지나 자기 스스로의 자기중심으로 자기의 자유 선택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자기중심과 합일되어 맞아 떨어질 때에 한하여 속아넘어가는 것이다.

인생들을 자유 의지, 자유 선택의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자기중심을 스스로 선호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능히 자기 부인에 이를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각자는 인도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기 부인은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이 세상에서 고난을 통해 발현되는 것이니[히 5:6] 명심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조물주이신 관계로 자모(慈母)와 같은 측면에서는 그 사랑 가이없으시나 엄부(嚴父)로서의 측면에서는 용서가 없다.

생명의 법칙으로 엄정히 다스리심이다. 법은 그것이 존중되어 지켜질 때 한해 긍정적인 효력을 발생하므로 그 법을 지키고 지키지 않음에 따른 차이는 확연히 구분될 필요가 생김은 우리의 상식으로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지금은 용서의 때이나, 이후로는 용서가 없는 것은 이제까지 용서를 해 오신 마지막 끝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하나님은 참아 주신 것이다. 참으셨다는 것은, 이 세상 삶이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사람 삶의 터전이 아니고 삶의 제고장이 아니므로 오직 이 세상 존재의 의미가 있다면 하나님의 영을 받고 사람답게 이 세상에서 보람찬 일을 하다가 영원한 생명의 삶에 들어가는 데에 있기에 그렇다. 이런 모든 점을 감안하여 모든 사람이 모쪼록 회개하기를 기다리신 때문이다.

보람찬 일이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영을 모셔 능력을 받아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되었으니 내 이웃 즉 모든 사람들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라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달하고 그들 역시 사람답게 살면서 보람된 일을 하다가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도록 일심으로 기도해 주는 일 그리고 말씀을 전달해 주는 일이니 곧 하나님 앞에서의 제사장의 역할이다. 그리고 사람 살리는 차원에서의 선행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인생 삶이 70이라면 하나님께서 그 철들면서부터 나이 칠십에 이르기까지 그 사람에게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신[행 17:27] 의미가 오로지 이 때문임이 드러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자기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한 대로,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을 지내야 하는지 그 방법이 명확히 밝혀져 있다. 그런데 어째서 위의 성경 구절에서 우리말 번역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산 것"이라 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산 것"이라 했는가.

하나는 현재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분명 과거를 말하므로 차이가 확연하다. 의아하게 생각될 것이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하여 죽으심"을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억지 해석하는 번역한 것과 같은 번역자의 신학이 개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구원을, '현재의 삶'으로 바로 이해하지 않고 '일단 믿기로 작정했던 과거의 결심'에다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이다. 즉 그렇게 믿음으로써 구원 받은 사실을 묘사하여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서 착각하고 있음이다.

처음 믿기로 작정했던 [그래서 구원 받았다고 믿는] 당시의 상태를 그렇게 나타낸 것으로만 당치도 않게 오해하고 있으니, 이는 바울이 의미한 것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다. 번역자 일개인의 사견(私見)이 아니라 온 세계 소위 "기독교"를 풍미하고 있는 '신학적 사조'를 대변하고 있음이다. 즉 올바르게 사는 것과는 완전한 괴리(乖離)다.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니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16]에 대한 완전한 몰이해 때문이다.

지금까지 설명해 왔지만,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율법과 오신 이후의 율법 개념이 다르다는 차이를 간과한 탓이다. 물론 하나님의 영원한 계명으로서의 율법은 불변이다. 그 내용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다"[마 5:17] 하신 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전보다 더 "온전하므로" 더 엄격하다 할 것이니, "모세 율법에서는 그렇게 말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 5:21,22].

"새 계명"을 주신다 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사랑하라"[요 13:34] 하신 것이 바로 그와 같다. 이는 다른 의미가 아니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요일 3:16] 한 그대로다. 즉 자기 부인이니, "형제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고후 5:15]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므로 우리 산 자가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14,15]이 함이 다름아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함이라는 것은 초등학교 학생이라도 제대로 알 수 있는 문구의 의미다. 그럼에도 이렇게 천방지축 허둥지둥 뒤죽박죽이 되어 있음은 오직 이 세상 살고자 하는 욕심 탓이다.

이 세상 삶의 낙을 누리면서도 영생을 얻고자 하는 당치도 않은 욕심 때문인 것이다. 자기의 죽으심을 말씀하시면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가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다"[요 12:25] 하신 그리스도의 경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말씀대로 따르지 않으면서 어찌하여 감히 그 영생만을 욕심 내는가. 누가 그런 형편에 영생을 준다던가.

이 자기 부인의 진실을 가리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 하시고,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을 것이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실 것이라"[:26] 다시 확언해 주신 것이다. 영생만을 욕심 내는 것은 사랑은 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사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망각하고 사랑하는 상대만이 그 염두에 있기 때문에 영생을 탐내는 욕구가 없는 법이다. 영생을 싫어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만이 그 마음에 차 있다는 그 뜻이다. 사랑이 그 모든 행동의 원동력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곧 사랑의 삶이다. 과거의 일정 행동이 아닌 현재의 삶이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 받음의 증거인 것이다. 이 사랑이 없으면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밖에 되는 것이 없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범죄한 것은 이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악과 죄, 불법, 불의의 특성이다.

때문에 바울은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빌 3:13,14] 한 것이다. 이미 한 일, 이룬 일, 지나간 일에 집착하는 것이 멸망에 들어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음이다[마 7:22]. 과거 아닌 현재이기 때문에 항상 앞으로 달려가는 자세일 수밖에 없다.

과거에 안주하는 것이라면 상을 바라고 달려가는 것이 있을 수 없다. 혹자는 더욱 황당하게도 이 상이 개인적인 상급을 의미한다고 착각하는데 그 상이야 받으면 좋기는 하지만 안받아도 그뿐이고 나의 영생 또는 구원에는 무관하니 그렇게 허위단심 달릴 이유가 없다. 이 달려가는 자세가 다름아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이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딤후 4:7]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다시 말해 그 달려감으로써 얻는 상이 곧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인 것이다. 현재의 삶 곧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갈 2:20]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나의 현재의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니, 지금까지 설명해온 대로 끊임없이 나를 나의 주님[주인님, 나를 소유하신 소유자님]께 드리는 삶이다.

주인께 종으로서 복종하는 것이 자기를 그와 같이 바치는 쉴 새 없는 동작이 아니면 무엇인가. 과거 한번 드리고 바쳤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현재를 중시하는 사랑의 삶의 특징이 있는 것이다. 왜냐면 과거 한번 사랑했다가 지금은 얼마든지 마음이 떠나다고 사랑하지 않을 수가 얼마든지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마음의 영역이므로 마음은 유동적이니 그래서 말 그대로의 "자유"다.

미워할 수도 있는 자유, 사랑할 수도 있는 자유를 항상 구사할 수 있음이니 진정한 사랑은 과거 한 때 내 마음을 주었다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후 연속적으로 자기의 마음을 끊임없이 주는 데에 있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것이 내가 구원 얻은 증거다. 과거의 증거가 아니라 현재의 증거다. 미래의 것도 아니고 오직 현재가 사랑의 기본 자세다. 미래에 아무리 사랑하겠다고 약속해도 현재 사랑하지 않는 한 그것은 한낱 거짓말이요 속임수에 불과한 것임을 뉘 모르랴.

영생을 가졌다고 그 영생을 누리기를 원하는가? 매일 매시 그리스도를 향유(享有)하라.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생명이시다. 생명의 의인화(擬人化,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에 비겨 표현하는 것, 인격화)가 아니라 실제 생명이시다[골 3:4/요 14:6]. 먹고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것이 생명이라 한다면, 그리스도 친히 바로 그 먹는 것 마시는 것 즉 "참된 양식이요 음료"[요 6:55]라 하신 것이다.

이 역시 우리가 구원된 사실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으로 그친다고 착각하지 말 것이다. 실제 현재 그리고 영원히 이어지는 삶 자체를 말씀하심이다. '현재'는 다른 말로 '영원'을 말한다. 과거라면 영원과는 불가분이 아닐 수 있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미래의 어느 시점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를 강조할 때는 그 자체가 영락없는 영원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처럼 나 혼자의 삶이 절대로 아니고 될 수도 없음을 마음 깊이 각인시킬 일이다. 이것이 생명이다.

즉 항상  먹고 마시는 동작을 그치지 않음이니 생명이 그러하고 내게 그리스도의 의미가 그러하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사심이다. 내가 사는 것이라면 과거처럼 나 혼자 살면 그뿐이다. 내 마음대로[자기중심의 즉 자기를 위함이 죽음인 줄도 미처 알지 못하고] 함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와 의젓이 하나가 되어 있으니 나는 항상 그리스도를 앞에 모시고 사는 '둘이 하나'로서의 삶이다.

그러면 '내가 사는 것'은 어디로 갔느냐. 영광의 그리스도를 보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일절 모두가 바로 나를 위해 사시는 것이므로 '나를 사는 것' 자체가 되어 있다.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삶의 영원한 원리인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둘이 하나되어 사는 사랑과 생명의 영원한 법칙이다. 지금까지 계속 설명해온 사랑의 동시성이요 양면성이다. 이는 구원의 양면성이요 동시성이다. 사랑이나 구원이나 생명이나 다 같은 범주에 속하는 같은 의미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둘이 하나되어 사는 삶의 특징을 그리스도 친히 그 말씀으로써 충분히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시니 요한 복음에서 그 사실이 아주 적나라하게 밝혀져 있다. 이렇게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들 안에 아버지 계심과 같은 동일한 원리를 따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는 것이다. 구원 받음과 구원 받기 이전이 이와 같이 180도 전환의 차이가 뚜렷하다. 삶의 일대 변혁이다.

나 혼자,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하는 노력이 아니라, 무한 아름다우시고 영광스러우신 그리스도를 모시고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삶의 영원한 짝을 이루어 사는 사랑의 찬가(讚歌)가 넘치는 평안과 희열의 삶, 하루하루 엮어져 영원까지 이어져 가는 삶이니 이것이 곧 영생인 것이다. 그래서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이 아니요 너희 안에 있다 하심이 이 때문이다[눅 17:21]. 그리스도를 모신 내 안에 있음이다.

이 말씀을 하실 때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할 것이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23]고 경고하셨다. 아주 가까운 장래에 출현할 적(敵) 그리스도[anti-christ]의 분별법이다. 적 그리스도가 그런 식으로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적 그리스도가 아무리 재주[능력]를 피워도 사람 안에 임하여 올 수는 없는 것이다. 즉 "내 안의 천국"을 모방할 수 없음이다.

천국이 다름아닌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만유 안에 계시고 만유를 관통해 계시는 하나님이 천국이 아니신가. 그 이상의 천국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시므로 어디서나 언제나 만드시면 바로 거기가 천국이다. 바로 그 뜻이다. 에덴낙원을 여러 수천 수만 개라도 만드시면 되는 것이다. 바로 그 하나님을 내 안에 모셨으니 내 안에 바로 천국이 아니고 무엇인가. 생명[영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친히 내 안에 계시니 그것이 생명[영생]이다[요일 5:12].

그리스도 안에 아버지께서 계시니 '아버지 계심' 바로 거기가 천국이요 바로 그것이 생명이다. 그래서 그 천국의 기쁨, 그 생명의 평안이 항상 변함없이 넘치셨기 때문에 십자가로 나아가시는 초두(初頭)의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비록 "내가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막 14:34] 하실 정도였지만, 그런 천국이 아직 마음 가운데 있지 못하여 낙담 중의 제자들에게 '내 평안을, 내 기쁨을 너희에게 준다" 하신 것이다[요 14:27/15:11/16:33.

고난 받으신 후 성령으로 각 제자에게 임하시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갖가지로 기적을 남발하고 속여넘기는 비상한 수단의 거짓말을 만들어내어도 오직 이 한 가지 특징 즉 마귀가 흉내 낼 수 없는 이 사실 하나만을 만세반석으로 삼고 있어도 그 어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다. 곧 내 안의 천국, 내 안의 생명이니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to receive]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막 10:15] 함이 이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 "어린 아이가 천국을 어떻게 받드는가?" 할 것인데,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예수님] 나와 함께 계시고 사시는 것을 일상생활화함이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항상 의식하며 생각하며 기뻐하고 사랑하여 한 마디로 내 안에 있는 천국을 누리고 즐기는 것을 말함이다.

이렇게 사람 안에 천국을 만들어 주고 생명이 되어 직접 오는 것만은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에 "이마에 혹은 오른손에 짐승의 표를 받게"[계 13:16] 하는 것이다. 즉 모방하는 것이다. 인간 안에는 오지 못하고 오는 것으로서 가장(假裝)하는 것이다. 이것이 확실함은 성령 받는 것을 가리켜 "이마에 하나님의 인(印) 맞은"[9:4] 것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사(類似)한 묘사로써 그 날에 대비하도록 성경은 경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다시 오시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으심을 가리켜 "너희가 인자(人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할 것"[눅 17:22]이라 하셨으니 왜냐면 이제는 더 다시는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는 영원히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자의 날 하루"의 의미이다. 왜냐면 신령한 몸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설명하시기를,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 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할 것이다"[:23] 하신 것이다.

신령한 몸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각자 안에 천국을 형성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아무리 신령한 몸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육체 안에는 임하여 올 수가 없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오실 수 있기 때문에[비록 나와 같으신 완전한 사람이시지만 즉 육체로 계시지만] 내 안에 오시어 영원히 계시고 나와 함께 사실 수 있음이다. 그러므로 이런 일은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에, 그리스도로 가장하여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해도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경계하신 것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어 그 능력으로[내가 그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과 장사 지내진 것으로 수용하고 또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되 과거 내가 나를 위하던 때보다 더 잘 나를 위하시는 등] 내가 보내심 받은 대로[요 20:21,22] 그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게 되니[4:34] 이제는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을 넉넉히 지키고도 남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율법보다 더 엄격한 "새 계명"[요 13:34]을 너끈하게 지키는 것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즐길 수 있게 됨이다.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을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는다 하고 끙끙거리며 그런 것을 의식하면 먹고 마시는 사람은 천하에 아무도 없다. 특수한 경우 즉 병들어 입맛이 없어도 억지로 먹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는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내게 그러하시다. 얼마나 우리가 알아 듣기 좋게 최적의 용어와 표현을 사용하시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 사심"[갈 2:20]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설명해 주신 것이 이와 같은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서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심이다.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생명의 최대 최고의 낙 자체이다. 그러나 이 낙이라는 것이 낙을 누려도 되고 안누려도 그만인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다. 먹고 마시지 않으면 죽으니 실로 사활이 달린 문제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사활이 달려 있는 그 본질적인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사뭇 마냥 실컷 줄곧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니 "먹기 위해서 사느냐 아니면 살기 위해 먹느냐" 할 정도로 되어 있지 않은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이와 같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살면 즉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롬 8:13]. 그러면 그렇게 죽지 않으려고 끙끙거리고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겠다고 발버둥치고 몸부림치고 자기 부인을 하고 매일 십자가를 진다고[눅 9:23] 얼굴에 비장한 기색을 나타내고 하는 그런 것인가? "먹고 마시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던가? 오히려 희열이 만면(滿面)이다.

앞서 소개한 북한의 그 "21바울 형제"가 그렇게 살고 있었음을 우리에게 그와 같이 본으로 보여 준 것이다. 주위 환경의 날씨야 궂든 개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땡볕이 나든 말았든 내 안의 천국 날씨는 춘삼월 맑게 갠 종달새 노래하는 화창한 봄인 것이다. 그래서 내 입술에서는 그리고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주님께 대한 온갖 그리움을 담아 내는 노래 가락이 끊이지 않게 된다["making melodies in your heart to the Lord"엡 5:19].

바로 이것이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빌 4:4]는 의미이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 하면서도 기뻐할 것을 그야말로 신신당부하고 있는 당당한 사유인 것이다. 모순도 아니고 자가당착도 아니다. 진실 그대로, 현실 그대로의 적나라한 거짓 없는 표현이고 묘사일 뿐이다. 구원 받음의 실상을 모르기 때문에 모순되다 하여 성경을 억지로 풀어 믿지 않는 이들의 웃음거리, 조롱거리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그렇게 만들고 하나님께 대한 인식을 그렇게 만드는 크나큰 죄까지 범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 천지, 상(賞) 타려고 하는 사람이 "두렵고 떨기까지" 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 억지로 자기 비위에 맞게 해석함으로써 자멸에 이르는 것뿐이다[벧후 3:16]. 자기를 부인하겠다고 용을 쓰느라 수심(愁心)이 만면인 사람은 단언하거니와 구원의 "구"자도 모르는 사람으로 알면 틀림없는 진단임을 알 것이다. 

진실로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자 하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 3:7-9] 하는 것은 천만금을 확보하고 그 하늘을 찌르는 듯한 희열을 주체하지 못해 내지르는 쾌재의 함성인 것이다. [돈을 사랑한다고 필자를 오해하지는 말 것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춰진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과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자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다"[마 13:44-46] 하심 그대로다.

그런 사람은 그 결과 겉으로는 빈털터리로 지내도 개의치 않고 기세 당당하다. 그만이 아는 희열과 평안 속에 살기 때문이다. 남이야 자기를 어떻게 알아 주든 거기 아랑곳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저절로 판명 날 것이기에 전혀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는다. 우리가 바로 그러하다. 때가 되면 우주 천하의 일체가 나이 것으로 대령하도록 되어 있음이 아닌가. "내 마음대로 안되니 내 것이 아니고 내 것이 없으니 내가 없다"는 그런 꾀죄죄하고 궁색하기 짝이 없는 논법을 동원하지 않아도 현실과 실상이 그러하니 어찌하리요.

그러나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즐기고 기뻐하고 사랑함으로써 이루는 모든 "선을 행함"[롬 2:7,10]이나 이 "내가 가진 의(義)는 율법[을 지킴]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다"[빌 3:10]. '그리스도 없이' 내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됨으로써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은[고후 5:15] 결과이므로, 시종일관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은혜의 구원에 바탕을 둔 그것을 토대로 하여 지어진 건축물이 나의 이러한 "선을 행함"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제발 바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  세상 만물 만상을 보든 인간 안에 있는 양심이라는 것을 보든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명하는 것인데도 미련하게 자기 일에만 골몰하여 하나님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서 그렇지, 얼마든지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는 것이 사람의 한평생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 삶이란 것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사람 사는 곳으로 들어가기 위한 전(前) 단계의 준비 과정으로서의 가설(假設) 무대인데도 사람 삶의 본 고장처럼 착각한 것이다.

애초 사람 사는 곳[영계로서의 에덴낙원]에 들어갔으나 범죄함으로써 추방되어 이런 꼴로 전락했으므로 다시 그 사람 사는 곳으로 들어가야 사람 삶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사람 사는 곳으로 착각하는 이 모두 각자 자기 탓이다. 사람 안에 공통으로 있는 엄격한 도덕률로서의 양심의 존재와 천지만물의 법질서 등으로 보아 조물주의 계심이 분명한데도 그래서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으면 이렇게 비극적으로 지으실 리 없고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 명백하므로 그 사유를 캐기 위해 죽을 지경에 이른다손 치더라도 "찾고 구하고 두드려야" 과연 이성적인 사람답고 옳은 것이다.

양심이 있되 양심대로 살고자 하는 이는 별로 없는 것을 보아도 확실히 인간 자신에게 그 까닭이 있음이 분명하다고 잠정적으로라도 결론을 내렸어야 미련하지 않다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사람이 정함 없이 죽어 나가 유소년, 청장년 짬도 없이 죽어 버리는 현상 등은 저주 받지 않고는 이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이런 사실을 감안한다면 필시 인간의 악행에 대한 저주요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쯤은 어느 정도 윤곽적인 상식으로 알 수 있는데도, 자기 욕심대로 살려는 어리석음에 눈이 가려 이런 근본적인 데에 관심을 가지지 못한 불찰이 너무나 그 대가가 크다.

그런가 하면 또 한 편으로는 세상 종교에 의지한다. 그래서 자기는 그래도 극락에 가고 천국에 간다는 미신에 사로잡히면, 더더욱 관심이 없어 그런 자기 합리화에만 도가 통해 있게 된다. 여기서 세상 종교의 허구성을 자주 지적하는 것이 그 때문이다. 그런 단잠에서 난폭하게라도 흔들어 깨워야 자기의 위급함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한 몸 구조를 이루고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불 같은 미움을 무릅써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중의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해낼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평생의 고난이나 죽음도 불사하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의 개신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대로 영생 외에 상까지 타 먹기 위한 욕심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위함이 아닌 다시 말해 이기주의가 아닌 이타주의에서 이것이 사람 삶의 도리라고 믿기에 하는 모든 일들이다. 지금까지 설명해 오지 않았던가. 사람 삶은 머리를 중심으로 하는 한 몸 체제 외에는 없다.

그런 체제를 무시하고도 세상이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그런 것이 없어도 얼마든지 인간 삶이 가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친히 강제적인 통치력으로 당분간 얼마 동안은 즉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 받을 사람은 빠지지 않고 구원되도록 하시기 위해 그 동안만큼은 인간 세상을 시한부로 억지로라도 붙들고 계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강제 통제를 위한 방편 중의 하나가 3운법칙이라고 설명했다.

지금은 그런 '시한부'가 종결되어 가고 있는 때다. 그리고 아직도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있는 당신이 지금 말도 못하게 속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이 3운법칙이다. 하나님 같은 것은 없다고 속아 왔으면 하나님의 실존을, 성경이 한낱 인간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속아 왔다면 성경의 진실성을, 예수 그리스도가 한낱 한 종교의 교주라고 속아 왔다면 당신을 창조하신 어버이로서의 한량 없으신 사랑의 구원의 손길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는 것이 3운법칙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핑계할 수 없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다[롬 1:20]. 이렇게 일년, 이년, 십년, 몇 십년이 되도록 참고 기다려 주고 또 기다려 주셨건만 그래서 "이만하면 충분하지" 하심에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으니 이제는 한번 더 용서하고 말고가 없는 영원한 심판의 멸망만이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아직은 죽지 않았으니 살아 생전의 기회는 남아 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널리 용서하실 것이요 그리스도를 모시게 될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내용이 진정 무엇인가? 비판을 하더라도 알고 비판해야 지성인으로서의 격에 맞다. "알 필요가 없다"고 할 것인가? 그러면, 만의 일이라도 그 안에 내가 찾는 진리가 들어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보다 더 큰 실수, 어리석은 일이 있겠는가. 성경을 알고 새 사람이 되어 새 삶을 영위한다는 증언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성경이 인간 삶의 어떤 측면을 소개하기에 그런 것일까. 우리가 성경을 소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특정 종교의 경전이라는 의미로 <책>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영원한 친구"가 되어 계시는, 되실 수 있는, 되셔야 하는 가장 아름다운 이상적인 <한 사람>을 소개함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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