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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영사운이란? (18) 등록일 2016.02.16 21:57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27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사람은 홀로 살 수 없고 홀로 살게 되어 있지도 않다. 만일 인간이 아메바에서 진화하여 절로 생성된 것이라면 너끈하게 홀로 살 수가 있으리라. 왜냐면 무(無)에서 시작한 것이니까 자기 외에는 전혀 아무도 없더라도 절대로 외롭다는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까닭이다. 이 점 우리가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인간이 고독을 알고 혼자일 경우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인간이 아무 것도 없는 데에서부터 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인격적 존재로부터 파생(派生)된 피조물임을 입증함이다.

이는 다시 말해 인간 삶이 사랑과 불가분임을 뜻한다. 단독의 존재에서는 사랑 역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기를 부모의 사랑보다 극진한 사랑은 없다, 태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 하는데 부모가 왜 자기 낳은 자식을 사랑하느냐, 자기의 분신(分身)임을 본능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이 본능은 짐승도 마찬가지인데 물론 짐승이 무슨 이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런 본능을 조물주께서 주셨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판단으로, 그렇게 해서 자기 종족을 유지하고자 하는 원대한 미래의 꿈을 가지고 제 새끼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순수한 본능적 작용이다. 그런즉 사람이나 짐승이나 세상에 날 때는 자기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본성적으로 알게 된다. 자기보다 먼저 존재하는 이가 있다는 현실에 눈 뜨게 된다. 아담이 처음 창조될 때에도 하나님이 계심을 알았던 것이다. 그와 같이 홀로일 때 자기 홀로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이야말로 자기 홀로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인데도 이를 알아채지 못하는 무신론자나 진화론자는 무던히도 눈치가 없다.

미물인 각종 곤충이나 거미 같은 것만 보아도 그 스스로 생겨나지 않은 사실을 드러낸다. 여하한 바람에도 찢겨지지 않는, 그것도 허공에다 근사하고 튼튼한 그물 함정을 쳐놓고 먹이가 걸려 들기를 능청맞게 기다리는 거미는 천재적인 공학적 두뇌를 가져서 그런 게 아니다. 그런 일을 순식간에 해낼 수 있도록 거미 자신과는 관계 없는 장치가 자동적으로 작동되는 까닭이다. 그런 이지적인 계산을 해내어 거미 속에 그런 본능이라는 기계장치를 해둔 지능, 이 이지(理知) 작용은 인격성을 지닌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솜씨다. 곧 조물주의 지성(知性)이다. 이래서도 성경은 하나님 계시는 것은 "그 만드신 만물을 보고 알게 되어 있다"[롬 1:20] 한 것이다.

사람이 조물주에게서 창조되어 나올 때 결코 홀로일 수 없는 즉 사랑과 불가분의 존재로 세상에 나오는 관계로 "사람"과 "사랑", "삶" 또는 life, love 등이 유사음역(類似音域)으로 한데 모아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 인(人)'자의 형상이 서로 기대어 사랑으로 살아야 되고 홀로 살 수 없는 사람 삶의 이치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이 사실은 이미 법질서로 정해져 있음을 드러낸다. 홀로 살 듯이 해서는 안된다,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이 자체가 벌써 법인 것이다.

때문에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 2:18] 하신 것이다. 인간을 생육시키고 번성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자부터 창조하셨을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말 성경은 "배필"이라고 하여 남녀 관계를 의미했을 것이라는 선입견으로 해서 번역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영역에서 나타나는 대로 도와 주는 이 곧 "helper"이다. [그렇다고 우리말 번역이 오류투성이라는 뜻은 아니니 이 글에서 지적하는 대로만 그런 줄 알면 된다].

사랑[love]을 '법질서[law]' 차원에서 인식해야 함이 중요하다. "사랑"-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런 개념일 수도 없다. 철두철미 질서 정연한 이 우주에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미가 거미줄을 쳐도 철저히 자연법칙에 맞추어 그 원리를 따라 하는 것을 보면 사랑 역시 예외일 수가 없다. 원리가 있어 그 원리대로 작용된다. 이 사랑의 원리는 곧 대칭 원리 더 정확히 말해 삼위일체의 원리가 그 토대다.

이런 법질서 아래 움직이지 않는 그야말로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사랑을 생각해본다고 쳐보자. 그래서 세상 종교가 주장하는 것처럼 사랑으로 모든 것이 통합되고 통일되어 영원한 행복 세계에 들어가 산다고 가정한다면 그렇기 위해선 조건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조건이란, 모든 사람이 한 기계에서 뽑은 것처럼 똑같은 일정 규격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그런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법칙 차원에서가 아닌]으로서의 "사랑"이 가리키는 행복의 조건이다.

다시 말해 내가 가진 것 너도 가지고 네 가진 것 나도 똑같이 가지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할 때, 불가능이다. 비현실적인 얘기다. 왜냐면 인간은 어떤 기계의 부속품도 아니고 기계로써 기계로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자주 독립적인 존재로서 저마다 자유 의지를 향유하고 개성이 있어 제각기 자질이 다르기에 그렇다. 따라서 똑같지 않으므로, 남의 것이 탐 나고, 탐 나면 마음이 편치 않고, 편치 않은 마음에 사랑이 우러날 리 없다.

고로 그런 곳은 절대로 이상향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사랑과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소위 '사랑'은 본질상 같은 것이 아니다. 전자는 우주의 법질서를 말함이고 후자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으로서 주먹구구식일 따름이지 전자의 모방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런 막연하고 추상적인 사랑의 개념으로 말하는 소위 '이상향' 이른바 '행복한 세계'는 한낱 인간의 공상에 불과하고 실존할 수도 없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로써도 입증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서로 탐내지 않도록 똑같은 규격품이어야 함을 전제하게 되는 것이다. 핵심은 인간 욕심, 욕구라는 마물(魔物)에 있으니 왜 '마물'이냐 하면 모든 인간 불행이 이 욕심에서 시작되는 것이기에 그렇다. 곧 자기 중심이다. 그래서 성경에 욕심이 죄를 낳고 그 죄가 자라나 결국 죽음, 멸망으로 성장한다 했는데[약 1:15] 이 욕심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이 주제(主題)일 수밖에 없다.

저마다 자기 특성을 지녀 자기 고유의 색깔을 지니는 것이 인간의 다양성이다. 그래서 그런 자기 개성을 따라 일터이면 빨강, 노랑, 파랑 등 각종 현란한 색깔을 창출하게 된다. 해서 가령 나는 빨간색인데 내 이웃의 저 파란 색이 기막히게 좋아 탐 난다는 것이다. 내 것이 아니니까 탐 나게 되어 있다. 욕심을 내게 되어 있다. 나만 아니라 서로가 욕심을 내게 되면 인생 비극은 그 소위 극락 세계에서도 다시 시작된다.

따라서 "사랑"은 여기서는 빈 말이 된다. 욕심을 내게 되고 시샘하게 되고 부러워 죽겠는데 그래도 사랑이 생길 리는 없다. 같은 떡이라도 훔쳐온 떡은 더 맛이 있다는 말과 같다. 나는 참더라도 사람마다 다 참는다고 볼 수 있는가. 그러면 인간을 모두 그런 욕심 안내는 기계처럼 만들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앞에서 미리 가정을 해 본 것이다. 사람의 사람됨은 그 자유 의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좋은 성향으로 풀리든 나쁜 쪽으로 풀리든 어쨌든 자유 의지가 그 인격을 형성한다. 이런 것이 없으면 인간이라는 그 어떤 존엄스러운 의미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사람을 강제적으로 그런 욕심을 내지 못하도록 하지 않는 한,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이 이룬다는 이상세계는 완전 허구라는 사실을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비현실적인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세상 종교가 표방하는 것이 모두 그렇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사랑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우주의 운행을 보면 그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고 찬탄을 불금하게 되는데 어디 우주뿐인가, 지극히 미세한 원자 구조도 마찬가지다. 그 최소의 세계도 다름아닌 이 광활한 우주의 축소판이지 않은가. 바로 그런 일사불란함, 그런 모양새 그대로를 이 사랑의 세계에서 목도하게 된다. 다시 말해, 앞서 설명한 대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실을 각자 수용함으로써 각자 안에 그리스도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계심으로써다.

그래서 아무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여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 안에 성령으로 계신 그리스도를 머리로서 사랑하는 삶이니까,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 삶의 중심축이 되어 바로 이 중심을 둘러싸고 모든 인간 삶이 일치하게 일사불란한 통일된 일정 궤도를 따라 움직이게 되어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는 질서를 유지해 나가는 아름다움이다. 한 머리 안에서 한 몸을 구성하고 있으므로 그 파랑, 빨강, 노랑 등 현란한 색깔이 모두 나와 일치하도록 되어 있어 다 내 것이 되어 있음이다.

왜냐면 말 그대로 한 몸은 하나이기 때문이니 너와 나라는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평화란 것은 질서요 조화다. 평화가 깃드니 행복은 절로 따라오게 마련이다. 이런 일사불란한 체계에서의 완벽한 조화(調和)가 바로 진정한 사랑이다. 사랑은 조물주에게서 나왔으니 조물주라는 뿌리를 무시하고서는 설명할 수도 누릴 수도 없다는 것,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 조화의 근거가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바로 내 이웃을 사랑함이니, 나처럼 내 이웃 역시 그 안에 성령 곧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성령, 한 머리의 지시를 따라 모두가 나를 사랑하게 된다. 분명히 다양성이 존재하지만 통일된 조화로 하나를 형성하는 각양각색의 찬연한 색깔들이다. 내 이웃을 보는 것은 그런 다양성을 띤 한 분 그리스도를 보는 격이 되므로 완벽한 조화 통일이므로 다시 말해 그 모두가 나 자신이 되어 있는 터라 어느 구석에도 욕심이 발붙일 틈이 없다. 왜냐면 사랑의 대칭 원리에서 나는 너의 삶을 살고 너는 나의 삶을 살아 네 것은 내 것이요 나의 것은 너의 것이니 내 이웃의 것은 원천적으로 모두 내 것인 까닭이다.

이것이 한 몸으로서의 각 지체로서 존재하는 모든 인간 삶의 <하나>로서의 조화다. 한 몸이 되어 있으면 내가 눈일 때 코도 나의 것, 발도 나의 것, 모든 지체가 바로 나 자신이다. 이런 한 몸 관계는 각자 안에 그리스도를 공동의 머리로서 모시고 있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이치다. 그러므로 영원한 행복 세계에서 내 이웃의 숫자가 여러 억(億)이라면 그 모든 하나 하나가 다 나를 위하는 바로 내 지체, 바로 나 자신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내 것인데 내 것을 욕심 낼 사람이 어디 있는가. 바로 나 자신인데 그 나 자신들을 사랑하지 않고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그 이웃이 모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상대인 자기 이웃을 위하니 그 이웃 중에 당당히 내가 있다. 그러므로 필요한 대로 그 내 이웃을 나의 삶을 살아 주는 형식이고 내용이고 일체다. 내 이웃이 수억이라면 나는 그 <수억 배로 확장된 나 자신>을 사는 삶이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니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 그러하다.

"그런 머리야 만들면 되지 않는가" 하고 세상 종교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세상 나라들이 서로 아옹다옹 싸우지 않는가. 적 그리스도가 곧 그런 "머리"로서 자처하고 출현할 것이다.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의 창조신이라 하고 그렇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러한 머리가 되어 계심을 여러 가지로써 설명하였다.

머리로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렇게 계심이 논리적으로도 조리 정연한 것이 되어 진실로서 입증되어 있고 그래서 과연 현재와 같은 상황이 벌어져 있지 않을 수 없다는 실상을 알았으므로, 이와 같이 밝히고 있는 성경을 기준으로 해서 적 그리스도의 위장성(僞裝性)은 얼마든지 간파해낼 수 있음을 앞에서도 지적했다. 무엇이든 정확한 판단의 기준을 정하고 거기 확신을 가질 일이다.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왜 그런가 하고 치열하게 생각하여 해결을 구하여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가르치심을 구할 일이다.

이렇게 세상 종교와는 차원이 다르고 본질도 다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인생 구원의 희소식이다. 그런데도 이 생명의 법질서를 근거 없는 인위적인 가공의 상상 속에만 있는 종교와 동일시하거나 그런 종교의 형태를 띠고 그런 모양새를 오히려 모방하려는 것은 극도의 어리석음으로써 자해(自害) 행위다. 종교가 아닌 오직 자연 그대로의 삶과 그 삶의 원리원칙을 성경은 말하는 것이다.

필자가 만일 "기독교"라는 종교의 이름으로, 단지 "기독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타 종교를 이와 같이 말한다면 모든 사람들로부터 매도되어 마땅하다. 독선, 아집, 위선, 편협하기 이를 데 없는 구시대적 작태, 등등 별소리를 다 들어도 마땅하다. 그러나 종교로서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종교와 분명히 구별해서 말할 때는 차원이 아주 다르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한 가지 내용의 말씀만 하시지 일부러 여러 종교의 이름으로 그것도 아주 동떨어진 내용으로 인간 구원의 방법을 헷갈리게 말씀하실 리 만무하다.

필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독교"라 부르지도 않고 "교인"이란 말도 쓰지 않는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종의 종교로 간주하여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일반 세상 사람들이 쓰는 말이기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요 차별화하기 위해서다. 종교는 특정 시기, 장소에서의 종교행위로 끝나고 일상생활에 적용되지는 않는 것이 그 특징이다. 물론 일상생활에 적용하려는 노력은 있다. 그러나 노력 자체로 그칠 뿐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인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은 인간 삶의 규범이자 생활의 법도요 영원한 법질서다. 그리스도의 말씀 전달은 정상적인 인간 삶을 위한 의식 교육이요 의식화 운동이다. 물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를 모방한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말할 때는 현세에 한하고 영원세계는 제외됨이니 영원한 생명 세계에서는 악령이든 악인이든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겉은 흉내 내어도 그 골격, 그 실질, 그 바탕은 모방하지 못한다.

그는 우리와 같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고 사랑도 없으므로 그래서 불가능하다. 다만 속임수로 겉모양만 따와서 지식면으로 이론(물론 실질상 허구이나)만을 깔고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인간 구원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런 것에 매력을 느끼지만(왜냐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절묘한 구조와 조화를 모르니까), 정작 성경에서 밝히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아는 이에게는 당장 드러나지는 거짓일 뿐이다.

겉모양만 모방하는 것이 예컨대, "각 사람 안에 불성(佛性)이 있다" 식이다. 그렇게 무조건 "원래 내재(內在)한다"는 식이지 그렇게 내재하게 된 과정, 까닭 등 그런 내재의 뼈대가 되는 내용은 말하지 못한다. 왜냐면 원래부터 실속 없는 가정(假定), 가상(假想)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 그 구조를 합리성 있게 설명을 못하는 것이다. 덮어놓고 "각 사람 안에 있다"고 말만 한다 해서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철두철미 법질서 아래 관장되고 있는 이 우주에서 그런 가공(架空)의 무질서, 무법(無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정한 구성 원리를 나타내지 못하니 무질서요 무법이다. 합리적인 설명을 못하면 그것은 허구라는 자체 증명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 그렇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설명은 못해도 정작 그 생명은 누릴 수 있는 것이 생명의 신비다. 여기서 말하는 '합리적 설명'은 그런 설명을 할 수 있는 그런 주장의 논리적 체계를 말한다.

우주만물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것이 진리인데 그 진리를 어렵게 설명하는 것 자체가 진리 아닌 것을 설명하려 드는 무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진리는 평범한 데에 있다는 말의 뜻이 여기에 있다. 복잡한 문제는 어린 아이의 생각으로 돌아가 풀면 의외로 쉽게 풀리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평범한 데에서 진리를 찾아내는 이치를 따름이다. 솔로몬의 지혜가 그 예다. 두 창녀가 한 날 거의 동시에 사내 아이를 낳았는데 그 하나가 부주의로 아이를 깔고 뭉개 죽어 버렸다.

그러자 옆에 자는 여자의 아이와 자기의 죽은 아이를 바꿔놓고 시치미를 뗐다. 결국 둘은 서로 네 아이니 내 아이니 다투며 솔로몬 왕 앞에까지 가게 된다. 어떤 아이가, 이 때 만일 솔로몬의 자리에 앉아 이 광경을 보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기를 둘로 쪼개어 둘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면 된다고 했을 것이다. 아이이므로 도덕이니 하는 따위는 생각 못하고 둘이니까 하나를 둘로 나누면 된다는 식이 아닌가.

솔로몬이 바로 그렇게 한 것이다. 칼로 아기를 쪼개어 둘에게 나누어 주라 명했더니 문제는 당장 풀리고 말았다. 왜냐면 이 명령을 듣고 생모(生母)는 울며 불며 "제발 죽이지는 말고 저 여자에게 주라" 하였고, 반면에 죽은 아이의 어미는 "네 것도 내 것도 되지 말게 죽이는 것이 좋다" 했으니 누가 보아도 생모가 어느 여자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성경에 나오는 대로의 솔로몬의 명판(名判)이다.

만물, 만사, 만상의 대칭성 구조를 나타내는 삼위일체의 원리는 우리 눈이 가 닿는 곳마다 볼 수 있고 알 수 있다. 이 원리가 창조주 하나님께서 계시는 모습을 따라 되어진 것이니 그래서 설명이 아주 간단해지는 것이다. 때문에 성경에,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 댈 수 없으니 이는 그 만드신 만물에서 똑똑히 보여져 알 수 있게 되어 있는 까닭이라"[롬 1:20] 했다. 삼위일체의 원리를 증명하는 3운법칙이 기막히게도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음도 같은 이치라 할 것이다.

여기서 '내재'한다, "안에 있다"라는 말 뜻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형체를 가지신(이미 '사람'이 되셨으므로) 한 인격(人格)으로서의 전체 개체가 몽땅 내게만 와 계시듯이 계시는 의미를 말한다. 공기처럼 또는 무슨 기(氣)처럼 그렇게 모든 사람 안에 퍼져 계시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그렇게 <내게만> 와 계시는 그런 의미가 모든 사람 모든 개인에게 똑같은 의미의 실상(實相)으로 개별적으로 계시는 바로 이 사실을 두고 일컫는 말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말의 뜻이다.

완전한 의미에서의 또 다른 "나 자신"이 되어 계시는 의미다.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데 그 어떤 피조물도 피조물로선 이런 일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가 되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니, 다시 말해 갑과 을이 하나라는 사실을 설명하여 갑 안에 을, 을 안에 갑이 있다고 표현하는데 그리스도께서 설명하신 바로 그대로다. 이렇게 갑 안에 을이 있고 을 안에 갑이 있을 때는 반드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로서 갑이든 을이든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이라는 특정 사실을 통하여 이럴 필요가 생기고 절대 필수적이게 된 이유는, 이 우주에서의 유일한 존재인 '나'란 개체가 생명의 법질서를 범한 죄의 대가로 인해 죽음에 이른 불가항력적 운명에 따른 것이니, 여기서 조물주의 위엄(威嚴)을 보게 된다. 무릇 원리원칙에 철저하려면 이런 위엄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사랑'만 아니시고 "소멸(燒滅)해 없애는 불"(consuming fire-히 12:29)이시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조물주 하나님의 양면성이다.

이미 지적한 대로 사랑만 강조되는 것은 이 광활한 우주의 생명의 법질서를 주재하는 주재자로서는 있을 수 없는 또 있어서는 아니 되는 일방적 불균형이 된다. 범법행위를 묵과하거나 간과하는 법질서란 아예 존재할 필요조차도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렇게 간과할 바에야 법과 질서란 것이 처음부터 생겨나지를 않는 것이다. 이런 양대 요소 중의 하나를 무시하여 사랑만 말하고, 그 원리원칙을 무시함으로 야기된 인간 범죄에 대한 책벌을 논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거짓이요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 된다.

사랑은 생명의 기본 원리이기 때문에 이를 어기는 것은 바로 죽음이다. 오늘 인간세계에 죽음이 군림하고 있는 것이 이 때문인데 이를 무시하고서 될 말이 아니다. 죽음에 처한 인생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새 창조, 다시 출생하게 하는 것"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의하여 그 '원인'이 사랑이 되어 있으니 그 '결과' 역시 사랑이어야 즉 나의 사랑이 화답하지 않는 한 그 하나님 사랑은 내게 무의미한 것이다. [인과율이니, 삼위일체 원리는 이 인과율이 엄연한 법칙으로 존재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즉 사랑에 의한 하나님의 구원과는 나는 원천적으로 무관하게 되는 것이다. 오직 죽음의 영원한 멸망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은, 죽을 것은 마땅히 죽어야 하기 때문이고 그리고 난 다음에야 다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므로 "새 창조", "다시 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 다시 나고 새로 창조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 됨으로 이루어짐이니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영원히 임하여 계심으로써 '영혼'과 '육체'의 이중 관계로서 불가분성을 이룸으로써 되어지는 일이다.

앞에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시는 이유를 밝혔거니와, 그 정하신 때 이전에는 오시면 안되는 것이니, 이제는 우리 각 사람과 영원히 불가분이시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 몸이 되어 그 몸의 각 지체를 이루어 있으므로 우리가 그 남으신 고난 중을 우리 몸에 채우고 있는[골 1:24] 중이어서 죽음의 고난이 진행 중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는 관계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 몸된 우리가 마저 채우는 일을 하고 있음이다.

우리가 그 몸으로서 남은 고난을 마저 채우는 역할을 하도록 그래서 그 고난을 다 받지 않으시고 우리 위해 남겨 두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와 하나로 계시므로 우리만 고난 받는 것이 아니라 머리되신 그리스도 친히 우리와 함께 고난 받으시고 함께 일하심은 자명(自明)하니[고후 6:1] 우리 몸을 통해 그리스도 친히 우리 안에 계셔 그 남으신 고난을 채우시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우리의 '머리'로서 그리스도 친히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나 그 '몸'된 우리와 하나되심을 인하여 아직도 죽음의 고난 가운데 계심이다.

이제는 영구적으로 그리스도 홀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우리와 하나 되신 모습으로 존재하시는 까닭에 우리가 아직도 주님의 남은 고난 중에 있는 한, 우리와 더불어 함께 부활하시는 모양새를 갖추어야, 부활이 비로소 "부활"로서의 진정한 모습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단독으로 부활하시면 되는 것이 아니라 순서를 따라 그 몸도 이제는 함께 부활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 각자가 "새 피조물", "새 생명" 가운데 있어 "새 사람"으로서 산 자가 되어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그러하고, 나머지 육체적인 의미로서 겉으로 드러내어져야 하는 부활이 있으니 이 둘이 함께 나타나야 양면성의 이치에서도 부합하다. 우리 각 사람과 그리스도께서 불가분의 하나가 되어 계시므로 이제는 그 몸된 '우리를 따라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실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그런 순서요 단계다. 즉 그 몸으로서의 우리들이 그 죽음의 고난을 온전히 우리 육체에 채우게 되는 과정이 완료되어야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모습이 세상 중에 나타나게 되어 있음이 그리스도의 재림(再臨) 곧 다시 오시는 이유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세상 중에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셨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살다가 더 이상 세상과 더불어 머물러 있지 못하고 먼저 사라져 간 것은 죽었기 때문이다. 죽지만 않았다면 일단 세상에 태어난 이상, 이 세상이 존속하고 있는 동안은 그대로 세상과 더불어 함께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죽었기 때문에 우리 이전의 사람들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하게 그렇게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이시다.

그러하다면 당연히 이 세상과 함께 그 다시 살아나신 모습으로 오늘까지 머물러 계셔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대로 있는데 이 세상과 더불어 한 때 사람으로 태어나셔서 살아 계시다가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셨다면서 마치 다른 모든 사람들의 죽음처럼 즉 다시 살아나지 않은 이들처럼 사라져 종적을 감추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시 살아나셨으니 반드시 이 세상과 더불어 함께 여전히 산 자로 계셔야 마땅한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을 반영하게 되어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재림]인 것이다. 왜 그동안까지는 세상 중에 나타나지 아니하셨느냐 즉 다시 오시지 않았느냐 하면, 이제는 그리스도 홀로 계시지 않고 반드시 그 몸된 교회와 함께 나타나시든 않든 일체의 일에서 '하나'로서 '하나'의 모습으로 움직이시게 되어 있으므로, 그 몸된 교회가 아직도 죽음의 고난 가운데 있는데 머리되신 그리스도 홀로 부활의 모습 그대로를 나타내신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머리가 영광 중에 나타나시면 그 몸된 교회도 일제히 영광 중에 나타나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야 할 것이기에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마너 채우며 사람 살리는 일이 중단되거나 폐기되어 버린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되는 그 시점에 이르러서야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심이다. 그러므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반드시 세상과 함께 머물러 계셔야 하는 것은 필연이다.

그러나 그 몸된 교회 즉 구원 받은 우리들 모두와 함께 그 부활된 모습을 드러내셔야 하는지라, 마지막 한 사람이라도 구원되어야 할 사람은 다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아직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피 흘림이 없이는 죄 용서가 없으므로"(히 9:22) 즉 죽음의 고난 없이는 사람들의 구원이 불가능하므로] 중에 있기 때문에 그 몸된 교회가 아직 죽음 가운데 있어 부활하는 순서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즉 이 세상이 없어지기 전에 그렇게 다시 살아나셨던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그 부활하신 몸으로 다시 나타나셔야 옳은 것이다. 이 또한 색다른 면에서의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증거는 때가 되어야 나타나게 되어 있으므로 단지 현재로는 우리가 목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 차이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 중에 유일하게 부활하셨으므로, 반드시 그 부활하신 그대로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한다 즉 세상과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 정도로 강조함으로써 사리에서 벗어난 어떤 구석도 찾아볼 수 없는 성경이니, 진실 그대로의 기록이요 거짓이나 꾸밈이나 지어낸 것이라고는 한 오라기라도 찾아 볼 수 없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만일 이런 재림의 사실[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현재는 사실이 아니라 약속이기도 하지만]이 없이, 그냥 부활하셨다고만 하고 그래서 곧바로 심판대에서 심판하시는 재판장으로서만 모든 인간에게 나타나게 되어 있다고 한다면 이상 설명한 대로 판단하건대, 그 부활이 정말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 아닌지 충분히 의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누가 말하게 되어도 답변할 근거를 찾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그렇게 부활을 의심해도 그 의심 자체가 충분한 타당성이 있다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거짓말일 수도 있다 함이다.

그러나 비록 현재 그 증거가 우리 눈앞에 드러나지는 않았더라도, 그렇게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확언하고 있는 것만으로 해도, 성경이 한낱 속임수요 거짓이요 일부러 지어낸 소리라는 비평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고 허용하지 않는 빈 틈 없는 철두철미한 진실 그대로의 모습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음을 여기서 우리는 재차 확인하게 된다. 그렇게 확언하고 약속을 했으니, 그렇게 약속한 것이 이루어지는 그 때가 오기 전에는 그 누구도 감히 비판할 수 없게 되어 있고 또 그런 비판이 무의미하게 되어 있다는 그 뜻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모두가 즉 조물주 하나님이시든 피조물이든 함께 한 몸 체제로서의 고난[죽음의 영역에 속한] 중에 있는 때로서 그 누구든 삶의 낙을 찾는 시기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오직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눈 가림으로 인해 실상대로 바로 보지 못하는 이 세상 인생들이나 그런 착각 속에 있어 어찌하든 살기 위한[삶의 낙을 누리기 위한] 헛된 몸부림으로써, 구원 받을 막중한 가치의 기회에 있으면서도 그 귀중한 시간들을 허송세월로 다 날려보내고 있을 따름이다.

이미 소개한 "21바울 형제"의 기도 응답을 통해서도 이 사실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이니, 곧 "내가 능력이 없어 너희들이 이 북한 땅에서 죽음의 고통을 받도록 방치하고 있는 줄 아느냐" 하시는 응답을 받고 그 뜻을 따라 그냥 그 죽음의 고난 속에서 지내기로 결정하였다고 하지 않는가. 그의 대답 즉 "내 이름을 알아 무엇하려오?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 내가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소이다" 하는 것도 같은 의미다[갈 6:14].

다시 말해 모두가 다 살고자 하고 삶의 낙을 누리려 하고 자기중심이 되어 있는 세상에서, 이 때가 모름지기 죽음의 고난 받는 때인 줄 알고 스스로 죽음에 뛰어드는 형국임과 동시에 실질적인 내용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써, 그 영원하신 영광과 생명을 역시 나의 것으로 누리게 되어 있는 이 은혜가 무한 자랑스러운 것이다. "세상이 내게 대하여 죽고 내가 세상에 대하여 죽어" 있어 오직 주님의 뜻을 따라 사람 살리는 일에 동참하게 되는 하나님의 이 능력이 무한 자랑스러운 것이다.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됨 즉 둘이 사랑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음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갈 2:20]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으로서 이중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죽음이요 동시에 삶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위의 설명과 같이 지금은 한 몸된 이치로 죽음의 고난에 처해 있는 이들을 구원하고자 함이 첫째 의미요, 둘째는 나 자신으로 볼 때 자기중심으로 살던 옛 사람의 죽음을 의미하므로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는 자유 해방을 누림이다. 첫째 의미를 설명하여,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고난 받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는다"[살후 1:5] 하였고,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운다"[골 1:24] 함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우리가 항상 예수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님을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한다"[고후 4:10-12] 한 것은 첫째 및 둘째 의미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는 것이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잡힌 바가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빌 3:10-12] 함과 같다.

두번째 의미로는,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될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롬 6:4-6]이라 함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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