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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1체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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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영사운이란? (19) 등록일 2016.02.16 22:01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22

바/영/사/회-"[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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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 3:3] 했으니, 이 감추어진 것이 나타날 때 즉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4].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육체와 관련된 자기 중심의 성향]를 죽이라. 곧 음란[fornication/immorality]과 부정[uncleanness/impurity]과 사욕[passions/lust]과 악한 정욕[evil desires]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다.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5,6] 했으니,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무 것도 상속 받지 못하는 것이다[엡 5:5,6].

그리스도와 내가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이는 둘이 하나됨의 의미로서 이 둘이 하나됨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함이다. 이것이 나의 실제 생활로서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사는 것이니 내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계심이다[요 15:7].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사는 나의 현재의 일상생활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나로 말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갈 2:20] 즉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내가 사는 것이요, 그리스도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죽으셨으니 그런즉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홀로 사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 내가 사는 것"이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전적으로 나를 위해 사심이기 때문이다.

갑과 을이 둘이서 하나되어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살아난 결과가 갑 안에 을이 살고 을 안에 갑이 사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이를 가리켜 "갑 안에 을이 있고 을의 안에 갑이 있다" 함이다. 이것이 둘이 하나됨의 구조다. 갑과 을이 서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갑이 어디 있느냐 하니 을의 안에 있고 을은 따라서 갑 안에 있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 '하나'가 갑일 수도 있고 을일 수도 있는 그런 모양새다.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로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시고 그리스도와 나와 하나되어 있는 모습 즉 나의 구원 받은 상태인 것이다. 그런즉 나는 구원 받은 즉시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게 되어 있음이다[고후 5:15]. 믿는 것이 바로 이런 내용이므로 이를 충분히 알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 자리에 이르기까지도 모르고 있다가 그 때 가서 모든 진상을 알고 돌이키려고 해보아야 때늦은 것이다.

그리고 자기 부인이 생명의 법칙의 핵심으로서 천국 다시 말해 생명의 정상 상태에서는 이 자체가 무한한 생명의 낙이 되지만 이 세상에서만은 여기가 자기중심의 세계이다보니 도리어 죽음과 고난 고통의 화근(禍根)처럼 여겨지는 것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 그 증거다. 그런즉 내가 이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나의 생명으로서, 그리스도의 뜻은 처음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과 같이 나를 세상에 보내심에 있으니 즉 사람 살리기 위해 죽음의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기 위함이다.

내 안에 나의 영혼처럼 계시는 그리스도 친히 그 남으신 고난을 내 육체를 통해 채우심이다. 그리 함과 동시에 하늘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영광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그 안에 위치해 있으므로 바로 내 모습으로 그렇게 계심이다. 이것이 나의 구원의 양면성이다. 나는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인 것이다. 이것이 자기 부인의 모습이다. 즉 둘이 하나되어 있는 구조에서만 가능한 것이니 상대가 나를 위해 주니 나 역시 상대를 위해 줌으로써 즉 자기를 위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부인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주님께서 고난 받으시기 전에 이 자기 부인 곧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를 것을 미리 경고로서 말씀하신 것은[눅 14:25-33] 그렇게 자기 부인을 해야 믿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 누구든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의당히 하게 되어 있는 이 "자기 부인"이 영원한 생명의 법질서의 핵심 곧 삶의 낙 그 자체이지만, 이 세상에서만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마저 채우는 의미가 되므로, 여기서 위축되지 않도록 하시려는 한없이 자상스러우신 마음에서 그런 경고를 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실상대로 말하면 무슨 엄청난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상식 수준이고 따라서 당연한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러나 어린 아이들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되시어 두 번 세 번 연거푸 일러 주듯이 하는 섬세한 사랑으로 경고를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바로 이와 같은 어머니의 심정으로 자세하게 풀어 일러 주시는 모습이심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엄부(嚴父)로서의 [하나님으로서의, "영존하시는 아버지(eternal Father)"-사 9:6] 특성은 심판대에서 유감없이 드러나게 된다. 지금까지 계속 설명해온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항상 이렇게 양면성을 두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고 또 정확한 것이다. 일방적으로만 생각하려는 데에서 불필요한 오류와 혼돈이 생기는 것이다. 그만큼 삼위일체의 원리가 중요하다는 뜻이 되겠다. 이 원리를 증명하는 것은 3운법칙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라 즉 나란 것도 없고 너란 것도 없고 사람이란 것도 없고 사람이 오래 산다는 것도 없고 영생한다는 것도 없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도 없다고 가르친다. "마음의 조화"일 뿐이라는 것이다. 철부지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에 대하여 역시 어린 아이의 사고방식대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어린 아이의 논리가 최고도로 순결한[정직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즉 내가 없으면 내 마음 역시 없다. 마음이 없는데 어찌 "마음의 조화"란 것이 있을 수 있느냐.

진정한 "내가 없다"는 결론은 자기 부인에서 찾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이다. 죽었으니 없다고 해야지, 두 눈 멀쩡하게 뜨고 있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의식하면서도 없다고 치부하려 하니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다. 이것은 숫제 우격다짐으로 억지로 꾸겨 넣는 식이다.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것을 자가 세뇌시키려 하니,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입산(入山) 수도(修道) 정진(精進)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이는 매양 다람쥐 쳇바퀴 돈다는 그 뜻이다.

내 욕심이 만사를 그르치는 장본임을 아는 것까지는 옳고 따라서 좋은 것이다. 그래서 "내가 없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까지야 그렇다 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내 스스로 하자니까 불가능한 일이 되는 것이다. 왜냐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욕구하는 것 자체가 욕심이니 이런 자기중심에서는 탈피를 못하고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인데도 피조물이 아니라고 이를 억지로 부정하혀니 그런 무리가 아니 나올 수가 없다.

내가 없어야 하고 내 스스로 욕심을 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 즉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내'가 아닌 '우리'가 있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 전체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그 뜻이다. 우리 전체를 위하여 산다는 애매 모호한 의미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내 스스로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다. 이런 간단한 이치로 접근하면 되는 일을 가지고 야단스럽게 "내가 없다"고 억지로 자신에게 주입시키려 하니 배[boat, ship]가 산으로 가지 물로 갈 턱이 없다.

그런 식의 접근은 일상생활에서 '이순신 정신'으로 사는 것보다도 못하다. 이공 순신의 주인[주체] 의식은 나라[임금, 조정]를 비롯하여 그 누구도 도와 주지도 않지만 오히려 반대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만 컸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그 스스로 거북선을 3척이나 만들어 미리 대비한 데에서 훌륭하게 드러나고, '나'원균으로 인한 우리 수군 전멸에서 사기가 완전히 땅에 떨어진 겨우 13척의 패잔 병력으로도 사기 충천의 왜적과 맞설 때 마치 달걀로 바위 치기와 같은 상황이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짜내어 대비했던 명량 해전의 대승리에서 유감없이 드러난다.

그렇게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논리를 가지고 "내가 없다"는 식으로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이런 이순신 정신으로 살 것을 권하고 가르치면 이 세상은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힐 수도 있는 문제다. 사람 사는 법이 바로 이런 것이기 때문이다.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우리 의식, 공동체 의식으로 사는 것으로만 해도 결과가 이렇게 아름답기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처음부터 하나님 정하신 사람 사는 도리이고 법질서이기에 그런 것이다.

이렇게 철저한 공동체 의식을 가르치면 구름 잡듯 안개 움켜 뒤듯 하는 그런 불교 교리보다야 훨씬 낫고 어른스러움이 된다. 더군다나 그런 막연한 추상적인 것에다 난데없이 "영생하고 죽지 않는다"는 군살을 붙이니까 종교가 되는 것이다. 종교는 현실 생활과는 본래부터 괴리가 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알쏭달쏭 이상야릇한 논리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훌륭한 현실 감각이 있는' 이순신 정신으로 사는 것보다 못하다 한 것이다.

백마디 설법, 설교보다 배고픈 자에게는 한 조각 떡이 눈에 번쩍 띄는 그야말로 고마운 선물인 것이다. 다 함께 흥하든지 아니면 다 함께 망하게 되어 있는 그런 공동체 의식, '우리' 의식이 사람 사는 도리라고 해서 그래서 사사로운 욕심을 따르지 않고 '우리' 정신으로 전체 우리를 위해 산다고 해서 그 자체가 영생을 주는 것이 아님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모름지기 인간은 영생을 해야 온당하고 합당하다는 생각에서 하나님은 젖혀놓고 제 스스로 그 원인 규명을 한다고 나대나 인과 관계에서 제일 원인이신 하나님을 모시하니 그런 시답잖은 논리로 많은 인생들을 결과론적으로 속이는 것이 되어 있음이다.

하나님을 시인한다 해도 성경으로 나타내어져 있는 대로의 하나님을 믿는 그런 논리적인 단계를 무시하니[이슬람의 경우], 역시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결과밖에 없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경우[천주교나 개신교]에도 이미 지적했다시피 스스로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위하는 데에서는 모두 똑같고 차이가 없다. 이런 경우[천주교나 개신교]에도 적으나마 이순신 정신 같은 것이라도 생각할 줄 안다면 한결 진리에 접근하는 수단이 될 수 있으련만 또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

가장 상식적인 이런 공동체 의식이라도 수용 못하니 그 허구성이야 불교와 똑같은 것이다. 오히려 불교는 인간의 무상함을 강조하여 이 세상 삶에 집착하지 말라 하고 이 세상이 고해이므로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의미에서의 자비심을 강조하는 데에서 그런 기독교보다는 몇 배나 낫다는 것을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다. 기독교는 사랑을 말해도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수직적이고 받기만 하는 수동적인 사랑만 알지 그 사랑을 나누어 흘러 보내려는 수평적인 능동성과 적극성이 없다. 따라서 역시 지어낸 하나님을 믿는 것이어서 사람 사랑은 불교만큼이라도 역점을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 사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정하신 것으로서 한 몸 체제[구조]에서의 공동체 의식에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데에 있어 사사로운 욕심을 따르지 않고 머리를 중심하여 '우리 전체'를 위하여 사는 것이나, 이미 인생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현재 죽은 자이므로 영생과는 별개로서 이 세상 삶만 끝나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그 핵심 부분으로서의 '영생하는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 '사람 사는 방법'을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부인인 것이다.

"새 술(酒)은 낡은 부대(負袋; 종이, 피륙 등으로 만든 큰 자루. 포대)가 아닌[혹 찢어지면 새 술을 다 버리게 되므로] 새 부대에 넣는다"는 말씀대로 전혀 새 판을 다시 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다. 새 창조요 다시 출생함이니 곧 인생의 재출발인 것이다. 새로운 창조라는 것은 창조주[하나님의 아들] 자신께서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다. 범죄의 결과[代價]로 죽을 것은 당연히 죽게 하셔서 삶[처음 창조의 결과물]을 끝내게 하신 다음, 사람되신 하나님 친히 그 사람되심을 근거로 실질적으로 나와 하나되심으로써 나를 새로 창조하심이다.

그리고 다시 출생하는 것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서 그리스도 친히 그 성령으로 내 안에 내 영혼처럼[혹은 새 피조물에서의 내 영혼으로서] 임하시어 나와 불가분이 되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까닭에 이는 다시 말해 "성령으로 출생함"[요 3:6]이다.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육체로 나는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나는 것은 영이다[:6]. 육체로 난 것은 "옛 사람"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받아 모심으로써[영원하신 선물로] 이렇게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살아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나는[:9] 것이니 곧 다시 남[:3]이다. 이렇게 다시 남, 성령으로 남의 특징은 아담의 범죄하기 전과 같이 한 몸 의식에서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고후 5:15]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위함이니 바로 공동체 의식으로 사는 것이다. 이순신 정신이라는 것은 그 구체적인 예로서 우리가 설명하는 것이고, 보다 철저하고 완벽한 것을 요구함이니 곧 자기 부인이다.

이순신 정신은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서 통하는 사람 삶의 방법이니 동일한 사람 삶의 도리이므로 그 모양새는 같으므로 곧 공동체 의식,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순신 정신을 강조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의가 무엇이고 선이 무엇이며 죄와 악이 무엇이냐 그 윤곽을 그 실상(實相, 實狀)과 그 구체적인 실증(實證)과 함께 정확하게 그려내어 주고 있는 실로 희귀한 역사적 실례(實例)이기 때문이다.

철두철미하지는 못하고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완전한 자기 부인은 아니지만 '우리' 의식에서 자기의 사사로운 것을 추구하지 않고 전체의 유익을 구하는 정신만은 자기 부인의 그림자요 또렷한 윤곽이기에는 충분한 것이다. 이런 상징적인 교훈이 한 사람 이공(李公) 순신(舜臣)이 구현해낸 '이순신 정신'으로 완벽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만큼 사람 삶의 도리로서의 의미가 우리에게 화끈하게 다가오는 것이기에 그리고 이런 명백한 결과가 나타나는 예를 인류 역사상 이와 같이 대규모로 나타나 있는 것은 좀체로 볼 수 없는 것이기에, 이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자랑스럽게 말하고 온 세계에 알리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살면 올바르게 사느냐 할 때 만천하가 알 수 있도록 쉬운 예를 들라 하면 이순신 정신[공동체 의식,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으로 이공 순신으로 말미암아 나타났던 것]으로 사는 것이라고 단언하게 된다. "올바르게 사람 사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떤 것이냐?" 할 때 "이순신 정신으로 사는 것"이라고 우리가 확실하게 그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 점이 감사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부인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이는 "성령으로 다시 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왜 성령으로 출생해야 하느냐 하면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야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은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반드시 신령한 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몸은 신령한 몸이 아니라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므로 내일이라도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

내일 죽을 바에야 오늘 아무리 이순신 정신으로 산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리요. 오늘만이 확실한 것도 아니다. 이 시간 이후 내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니 오늘 자체도 불확실하여 인생은 '오늘'도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 인생이 갓 태어나 죽고 10, 20대에 짬도 없이 죽어 나가는 것이 그 증거다. 세상 종교는 이런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도 마치 영생할 수 있는 듯이 대중없이 아무런 논리적 설명도 못하는 그저 막연한 소리만 내고 막연하게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소원만 피력하는 것으로 끝난다.

사람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존재인데 이런 식으로 기만하고 있고 또 어리석게도 이런 식의 바람 잡는 소리에도 잘도 넘어가고 있는 것이 인생이다. 이는 이 세상을 휘어잡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존재와 활동을 증명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런 막연한 소리 곧 안개 잡듯 바람 잡듯이 하는 소리를 낼 리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와 같이 "육으로 나는 것은 육일 뿐이요 성령으로 나는 것은 영"[요 3:6]이라 하시고 현재와 같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와 대칭으로 영적인 몸이 있어 이런 몸이 되어야 영생한다고 분명히 설명하신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인간은 원래부터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어 영생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 본디의 위치이었음을 밝히신 말씀이신 것이다. 범죄로서 이렇게 죽은 자 즉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다시 설명하시기를, "살리는[영생하게 만드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자연법칙 아래 있어 영생하게 못하므로]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63] 하셨다. 무엇을 제자들에게 이르셨는가 하면 자기를 부인하시는 내용의 말씀을 하신 것이니, 곧 "내 살을 너희 먹을 양식으로 내 피를 너희가 마실 음료로 준다"[:55] 하신 것이다.

자기 부인은 되풀이하는 설명이지만 둘이 하나되어 있는 구조에서만 가능한 것으로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居)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는[사는] 것이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으로써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 것이다"[:56,57] 하심과 같다. 이렇게 갑과 을이 둘이서 갑은 전적으로 을을 위하고 을은 전적으로 갑을 위하는 관계를 말씀하심이다.

이렇게 둘이 하나되어 있어야 자기 부인이 가능함을 가리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으로써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이라 하셨고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산다" 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이치 그대로임을 밝히심이다. 이렇게 '갑 안에 을이 있고 을의 안에 갑이 있음'을 다른 말로 "갑은 을을 보내고 을은 갑을 인하여 산다"는 것으로 표현됨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성령 받게 됨 즉 구원되는 사실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20:21,22]는 말씀으로 나타내셨다. 이 말씀을 듣고 "어렵다" 하여 많이 물러가 버린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이 구원인 줄 모르고 단지 영생을 주시면 받고 그냥 천국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착각한 탓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역시 이런 식으로 해석하여 이 착각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은 없이 그대로 안주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은 믿지 않고 세상 종교로 그리스도의 복음[구원의 희소식]을 오해하고 있는 이유다.

그러면 그렇게 떼지어 물러갔던 당시의 제자들이 그 말씀이 구원이고 영생인 줄 알았다면 그대로 남아서 그리스도를 따랐을까?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내신 사람으로서 하나님 가르치시는 말씀이신 줄 처음에는 알고 따랐으나, 이제 다시 그 가르침의 내용을 자세히 듣고 보니 하나님이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도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떠나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상상 속의 하나님만 알고 자기가 만들어낸 하나님만 믿은 것이다.

이것이 당시나 오늘이나 언제나 화근(禍根)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인생들이 모두 죄와 죽음 가운데 놓여 죽은 자가 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창조하신 대로의 산 자이기는 하나 단지 영생하는 방법만을 말씀하심이 인생 구원이라고 스스로가 만든 인위적인 종교 교리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이다. 실체로서의 그리스도를 그림자로서의 모형(模型)으로써 전달했던 모세가 결코 그런 식으로는 가르치지 않았건만, 한 마디로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었고 모르면 배우려고 해야 하는데 배울 마음도 없었기에, 그런 내용의 가르침이라면 즉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면 절대로 수용할 수 없다고 해서 물러가버린 것이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그런 자기 부인을 강조하는 것은 성경의 축자(逐字) 해석이라"고 딱지를 붙이고 몰아세우고 귀를 닫아 버리면 그만이다. 더 이상 아무리 설명해도 마이동풍(馬耳東風)인데 어이 하리요.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지 않고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는데 자기 부인이 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곧바로 죽으라는 소리 같이 알아듣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오늘날 그런 많은 사람이 자기 부인을 사형선고나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도 당연하니 왜냐면 그리스도와 하나된 역사가 없는 까닭이다.

즉 말로는 아무리 자기가 구원 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구원된 일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 따로, 나 따로다. 각각으로 분리되어 있음을 가리켜 구원 받지 못했다 하는 것이다. 왜냐면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을 말하기 때문이다. 모든 원인은 이 세상의 죽음과 죄로서의 실상, 자신의 죽은 자로서의 현 위치를 하나님께로부터 제대로 배우지 못한 까닭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을 차별하여 가르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로부터 배우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은 제외하고 다른 이들은 가르치셨다는 말이 아니라, 똑같이 배웠음에도 이를 귀 담아 듣지 않아 마음에 새겨 두지 않음으로 그 가르치심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다는 그 뜻이다.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죽은 자임을 자각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 무슨 말씀을 하시든 성경에 그 어떤 내용이 있든 왜 이를 버리고 다른 데로 가겠는가. 그래서 아무나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오는 것이 아님을 그 때 이미 천명 아니, 선언하신 것이다[요 6:44,65].

죽음에 직면하여 오직 살고자 하는 이는 의사가 주는 약이 쓰든 달든 그 수술이 힘에 겨울 정도로 고통이든 아니든 그것을 가리지 않는다. 오직 살겠다는 일편단심에서 그런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그런 저런 불평을 할 여유가 아예 없다. 그래서 병든 자라야 의사를 찾고 목마른 자가 물을 찾는다 하신 것이다. 광야에서 불 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자만이 모세가 높이 매단 놋으로 만든 뱀을 쳐다보고 살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그런 사람에게만 구원이심을 명백히 하신 것이다[요 3:14/민 21:9].

단순히 죽지 않고 영생하겠다는 욕심만 있다고 그래서 믿는다고 소위 신앙 고백한다고 해서 영생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디. 현재의 죽음과 죄의 인간 실상을 충분히 인식하지 않고는 단연코 단정하거니와 절대로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올바른 사람 삶의 도리 즉 '이순신 정신'으로 산다고 그것이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그런 정신으로 사는 것은,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는 절망의 탄식을 그 심령 깊이 내뱉는 자가 구원 받아 비로소 죄와 의의 성격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에게만 해당된다. 그럴 때에 확실한 참고가 되는 것뿐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죄가 무엇이고 그 반대 개념으로서의 의의 순종이 어떤 것인가 그 대략을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것이다" 하고 족집게처럼 집어 설명할 필요가 있을 때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교과서적 사례(事例)인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이 너무나 잘 아는, 잘 알지마는 실천하기는 어렵다고 자탄(自歎)해 오는 공동체 의식인 것이다. 즉 머리와 몸의 한 몸 구조로서의 생명의 체제이다.

그렇게 어렵게 보이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완전히 그 문제가 해결되고 기쁨과 환희 속에서 실질적인 일상생활로 끌어당겨 살 수 있는 삶의 직접적인 지침으로서의 자기 부인이 그 실체임을 깨닫게 해 주는 역할인 것이다. 이공 순신으로 인하여 나타난 그런 엄청난 공적이 그런 한 개인의 올바른 자세에서 창출될 수 있고, 반면 우리 중 대체적으로 그 누구나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해하는 '나'원균의 평소의 안일한 자세가 그 반대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데에서 우리는 성경에 말하는 '죄'와 '의'의 참 모습을 충분히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갑과 을의 둘이 하나되는 관계 즉 상호 대칭[상칭, 대립] 관계에서는 반드시 대소, 주종, 인(因)과 과(果)의 관계라고 했거니와 큰 자와 작은 자의 구분으로서, 큰 자가 작은 자를 위하게 됨으로써 생기는 결과를 가리켜 '갑으로 인하여 을이 산다'는 말로 표현하고, 을이 갑을 위하는 결과를 가리켜 '갑이 을을 보낸다'는 것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을이 갑에게 "복종한다"고도 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한다고 할 때 바로 이 뜻이다.

그러므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룬다"[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함이 언제나 이런 뜻이다. 갑이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시니 을로서의 내가 갑에게 마땅히 할 몫을 다하라는 것이다. 다하지 않으면 둘이 하나되는 관계가 이루어질 수도 없고 한 때 이루어져 있다 하더라도 영속되지 못하고 이내 와해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갑이 을을 위하고 을이 갑을 위하는 관계로서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됨이 구원인데 이는 다시 말해 갑은 을을 위해 살고 을은 갑을 위해 사는 것으로써 항상 의식적으로 자기 자유 의지로[선택으로] 하나를 유지해야 되는 것이고 결코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되는 하나됨은 아닌 것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따라서 내가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적극적으로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이루는 것이 없을 때 이 하나됨은 더 이상 유지 존속될 수 없다. 그런즉 "항상 복종하지" 않을 때는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되고 그리스도를 위하지[고후 5:15] 않는 것이 되므로 내 스스로 구원을 이루지 못함이 된다. "내 스스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의식적으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을 나타냄이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므로 내 구원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을 인하여, 그리스도를 한 몸 구조로서의 교회의 머리로 모시고[골 1:18], 모든 피조물을 총망라하는 영원한 나라의 왕으로 모시고[요 18:37], 우리 각자 개인으로는 '영혼'과 '육체' 관계로서의 영원한 짝으로서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되어 사는 삶이 구원 받은 일상생활인 것이다. 세상 종교는 밑도 끝도 없이 무턱대고 "영생"이다. 그래서 거짓이요 속임수라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속이고자 해서 속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것을 가르치고 그런 것으로써 남을 인도한다 하니 자기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는 것이다.

둘이 하나되어 있는 관계의 특성은 동시성에 있고 어느 일방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똑같이 동시에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쪽이든 그 상대를 위하는 움직임을 멈추면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고 따라서 둘이 하나됨은 와해되며 이것이 범죄이고 그 대가는 여지 없는 죽음이다. 왜냐면 생명은 둘이 하나됨 즉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한 몸되어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영혼과 육체 관계도 둘이 하나됨 즉 한 몸되는 체제임에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공동체 의식, '하나' 의식, '한 몸' 의식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진리는 원래부터 간단명료한 것이다. 알쏭달쏭 알 듯 모를 듯 생각이 헷갈리어 분간할 수 있을 듯하면서도 얼른 분간이 안되는 그런 무엇으로는 절대로 나타나는 법이 없다. 그런 식으로 나타나면 그것이 진리가 아니거나, 아니면 그 진리를 자기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불교를 비롯해 천주교, 개신교 등 세상 모든 종교가 이에 속한다. 여기서 "개신교"라 할 때는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을 인하여 우리가 육신[롬 7:5-8:13] 중에 살아도 즉 자기 자신을 위함으로써 자기 부인이 없어도 구원은 받는다"는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오류 가운데 있지 않을 때는 즉 이상의 설명대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여 믿는 경우에는 "개신교"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우리는 구별한다. 같은 "기독교"로서 세상에서 인정되어도 천주교는 그런 구분이 불가능한 것이니 왜냐면 그 교리의 중심에 "마리아"가 위치하여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마리아"는 일찌감치 벗어던지고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길 것이나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도 분명히 선언하지만 '바영사회' 운동은 기존의 그 어떤 교회 집단과도 연계되어 있지 않다. 비슷한 교회 운영 체제를 갖추고 성경대로 따른다는 그 어떤 집단과도 무관하다. 소위 "Brethren"이나 "Mennonites[메노나이트]" 등과도 일절 관계가 없다. 예컨대 집총[또는 병역] 거부를 교리로 삼지도 않는다. 실제 전장에 나가 전투함으로써 부득불 살상 행위를 하게 될 때는 당시의 상황에 처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을 따라 대처하면 될 일이지 국민으로서의 기본 의무를 저버릴 이유는 없다[롬 13:1,6]. 가장 기본적 태도는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해내는 데에 있는 것이다.

에덴낙원의 비극적 사건[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에 속아 아담 부부의 범죄로 인한]으로 인간은 신령한 몸을 잃은 것이다. 처음부터 사람이 육으로 나기도 하고 성령으로 나게도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애초의 신령한 몸을 범죄로 인해 잃었기 때문에 성령으로 나는 방법을 하나님 친히 마련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이 하나되는' 관계에서 그리스도 친히 미리 그리고 먼저 그 본을 보이신 것이 바로 우리 위해 죽으심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나 위해 죽으심이니 곧 두 가지 면으로서의 의미가 있어 하나는 나를 죽은 자로부터 산 자가 되게 함 즉 흔히 말하는 대로 구원하심에 있고 다른 하나는 내가 그렇게 산 자가 되어서는 마땅히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그 본을 보여 주심이니 곧 자기 부인으로 살라 하심이다. 대칭 관계에서 갑과 을이 하나될 때는 반드시 대소, 주종 그리고 인과 관계를 이루어 큰 자는 작은 자에게 본을 보이고 작은 자는 이 본을 따라 큰 자를 따르는 관계이다.

아들께서도 아버지의 본을 따라 행하시는 것임을 이미 천명하신 바다[요 5:19].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고 이를 가리켜 "복종"이라 하는 것이다. 살면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그 본을 보여 주는 본보기가 되어 있음이 큰 자의 몫이다. 때문에 성령을 주심은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라 한 것이다[행 5:32]. 성령을 주신다는 것[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심]은 갑과 을의 관계에서 큰 자가 작은 자를 위함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종은 작은 자가 큰 자를 위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이 신령한 몸이 되는 데에는 당시는 아직도 인간을 위한 영계[에덴낙원]가 창설되기 전이므로 단계를 순서대로 밟아감으로써 아담은 신령한 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범죄로 인해 그 신령한 몸을 상실하게 되면서부터는 그런 방법은 그것으로 완전히 끝나 버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친히 사람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성령으로 나게 하시는 방법 외에는 없는 것이다.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우리가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아 인간으로서의 육체가 조성되는 것과 같이[이것이 "육으로 나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의 성령을 "물려받아" 우리 각자 안에 그리스도의 영[그리스도, 성령]을 영원히 모시게 됨으로써 "성령으로 나게" 됨이다. 이것을 가리켜 "다시 출생한다"[요 3:3] 하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성령으로 난다 할 때의 "성령'을 그리스도와 분리시켜 이해함으로써 오해가 많은 것이다.

성령이 곧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핵심은 그리스도의 희생 양으로서의 죽으심으로 인한 우리의 영생 얻음이 아니라, 나와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에 있음이다. 이를 간과하기 때문에 각종 문제가 생기게 된다. 성령을 가리켜 그래서 "그리스도"[롬 8:10], "그리스도의 영"[:9]이라 하는 것이며, 그리고 아들께서 항상 아버지와 둘이 하나로 계시므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이의 영[아버지의 영]"[:11] 그래서 "하나님의 영"[:9] 곧 성령 등으로 성경이 더 이를 데 없이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의 친히 가르치심을 따라 배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사람의 가르침을 더 중하게 여김으로써-막 7:7) 제대로 된 성경 진리에 미흡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가르치심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지도 않는데 가르치실 리 없고 문이 열려질 수가 없다. "두드려야 열린다"고 하셨으니 이미 이것은 약속의 영역에 속하고 따라서 약속을 따르지 않으면 언제 가도 여러 수천 년이 흘러도 굳게 닫힌 철문(鐵門)일 수밖에 없다].

첫 사람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많은 인간 육체가 탄생하게 된 것처럼 한 사람 마지막 아담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성령으로 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육체는 죽어 썩으면 흙으로 돌아감을 인해 부득불 낳고 낳으며 낳아짐으로 해서 여러 세월에 걸쳐 많은 인생들이 태어나지만, 성령으로 나는 것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모심으로써 되는 것이므로 언제 가도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역사적 탄생이다.

세상 창조 이래 인간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건만 누구든지 자기 의지를 따라 순종할 의사가 있어 회개할 때 이 "다시 출생하는" 역사(役事)는 이루어지게 된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모든 사람 개개인의 이름으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는 등 일체의 과정과 순서와 단계를 거치시고 마치신 그대로 내 안에 임하여 오시어 나와 영원히 하나되어 계시므로, 그렇게 나와 하나되심을 전제로 하여 이루신 모든 것이 바로 내 것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그렇게 구원 받을 인생들 하나 하나를 위해 그 인간의 수효만큼 여러 수십 억 차례의 죽음이 아니라 단 한번의 죽음으로 끝낼 수 있고, 죽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죽은 후에는 다시 살아나야 하므로 누가 여러 수십 억개의 목숨이 있어 그 일을 할 것인가. 조물주 친히 그런 ‘사람’이 되시는 길밖에 없고 그래서 그렇게 죄다 이루신 다음에 성령으로 각 사람 즉 내 안에 임하여 영원히 나와 더불어 함께 '존재하시게' 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 부활 등이 모두 내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것이 된다.

이런 경우에도 조물주께서 단 한 분이시면 그 역시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다. 왜냐면 '죽음'이란 것이 이 우주의 생명 세계에서 완전히 끊어지는 것을 의미할진대 아무리 조물주이시지만 일단 "인간 위해" 죽으시는 의미인즉 다시 살아나시면 안되는 일이다. 이것이 "원리원칙"이다. 이것이 "위해서 죽는" 죽음의 의미가 갖는 무게다. 따라서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시어 나를 위해 죽으신 다음 살아나신 것은, '아버지의 아들'이시기에 더욱더 '아버지와 하나로 계셨기에' 가능했다는 이 사실이 중요하다.

이미 설명한 대로 삼위일체 원리에 의한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바로 그 원리다.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독생자(獨生子) 하나님"이시라 했는데 아들이 하나뿐이시라는 단순한 그 사실을 가리키고자 함이 아니라 바로 이 같은 진리, 이 같은 인간 구원의 절묘한 골격 바로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삼위일체의 원리에 의해 사랑으로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하나님(둘 사이의 일이므로 셋, 넷일 필요도 없는-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시다), 따라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실 수 있는 그 근거를 무언중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최후 발악의 단계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적(敵) 그리스도를 등장시키려 하는 시점에서, 아무리 인간을 파괴시키려 안달이 나 그럴 듯하게 속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만 이런 것을 감히 모방할 수는 없다. 그저 얼렁뚱땅 겉모양만 꾸며대어 사랑을 표방하지만 '사랑'의 이치, 그 과학적 구조는 어물쩍 넘어가, 어찌하든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그 죽으심을 희석시키려고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寶血)', 희생 제물로서의 흘리신 피야말로 '나'를 위한 그같은 '죽으심'을 증명하여 인생 구원의 핵심을 이루는 엄연한 진실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가 내 죄를 씻으신다"는 성경적 표현이 그토록 실감 날 수 없다. 지금도 "남은 고난 중에 계시니" 아직도 그 피 흘리심이 유효하다는 의미요[요일 1:7], 그 거룩하신 '남은 고난'에 그 몸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므로 교회 초창기부터 오늘까지 교회사는 피로 얼룩진 수난사요 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고난 받는 인생과 더불어 함께 고난 받으시는 모습이 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참 조물주 상(像)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하나님께서는 "나그네"라 하시면서 "나도 너희와 함께 나그네가 되어 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레 25:23/시 39:12]. 이 점에 관해서 '레 25:23'에서는 영역으로 KJV["you are strangers and sojourners with me"]는 위와 같은 의미로 번역하고 있는데 반해 NIV는 약간 다르게 나타내고 있으나, '시 39:12'에서는 KJV는 역시 일관되게 번역하고 있고["I am a stranger with you"], NIV는 "I dwell with you as an alien, a stranger" 했으니 의미는 같다. 즉 나그네가 된 너희와 내가 함께 살고 있으니 나도 너희가 함께 나그네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친히 우리와 함께 한 몸 체제로 친히 우리의 머리가 되어 계심으로써 우리가 당하는 모든 것에 함께 하신다는 뜻이니 우리 위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이는 확인되고 있다. 사랑은 함께(together) 하나(one) 되는, 그래서 고난도 함께 받고 영광도 함께 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롬 8:17]. 사랑의 원리는 삼위일체 법칙의 대칭[상칭, 대립] 원리에서 오는 것이니, 가령 여기 둘이 있어 그 중 하나가 고통을 100으로 받으면 그 상대편도 똑같은 <양과 질>로 100의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다. 우리 피조물을 대하시는, 우리를 만드신 어버이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와 같다.

§  하나님 지으신 자연만물의 모든 아름다움은 이 '사랑의 아름다움'의 외적(外的) 표현이다.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가리켜 이 지상 그 어느 인간의 아름다움보다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니셨다고 했는데 그 아름다움으로 장차 세상에 다시 나타나실 것이다. 이 지구가 모든 인간[살아 있는]이 딛고 선 자리인 이상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영원히 살아 계시는 '사람'이시므로 불가불 이 지상에 그 본연의 위엄과 미(美)의 극치를 드러내시며 나타나시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그리스도의 재림[다시 오심]이다.

이제는 영원히 사람이셔서 우리들 인간 중에 그 일원이 되어 계시므로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사람이시라는 점만 제외하고는 우리와 아무 특별하신 바가 없다. 그리고 사람이시더라도 "마지막 아담"이시기 때문에 그 점에서는 또 우리와 다르시니 즉 아담의 실질적인[범죄하기 이전의] 모습으로 계셔야 하므로 현재 아담으로 인한 죄 값으로서의 죽음을 다 치르신 다음이라 신령한 몸으로 계시는 것이다. 부활하실 때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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