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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영사운이란? (20) 등록일 2016.02.16 22:03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22

 

다시 말해 범죄하기 전의 첫 사람 아담의 모습이신 것이다. 아담이 그러한 몸으로 있다가 범죄함으로써 즉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이와 같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전락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과 하나도 다르지 않게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사람에 되시어 세상에 처음 오셨으니 이제 그 모든 죽음의 대가를 지불하시어 신령한 몸[아담의 범죄하기 전 상태]으로 복구되신 이상 바로 그런 몸으로도 세상에 나타나셔야 제격이고 이치에도 맞다. 그래서 바로 그런 신령한 몸으로 세상에 다시 오시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제까지는 나타나시지 않았느냐 하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해 계시므로 [자연계에 속한 몸이시라면 물론 하늘에 계실 수 없으나] 하늘에도 얼마든지 계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속 그렇게 하늘에만 계실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계실 때 일단 죽으셨다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까닭에, 그 부활하신 몸으로 마땅히 이 지상에도 계속 계셔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특정 목적이 있어 하늘에 "받아들여져"[행 3:21] 계시다가 때가 되면 반드시 나타나시게 된다.

그 때가 아직 이르지 않은 까닭에 나타나시지 않았을 뿐이다. 목적 중에 하나가 이미 설명한 대로, 우리 모든 믿은 사람들과 하나되어 계시는 고로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그와 한 몸이 되어 있는 모두가 다 일제히 그와 같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는 까닭에 아직은 그렇게 될 상황이 아니라는 데에 있는 것이다. 다시 나타나시는 바로 그 순간이,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를 또 하나의 '영원한 자기'로서 영접해 모시는 모든 사람의 진정한 자기 모습 그 실상이 동시에 드러나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모습은 나와 하나되심으로 인한 영원한 <나 자신의 모습>이시므로 그런 것이다. 그리고 한 몸이므로 같은 육체[신령한 몸]의 같은 모양일 수밖에 없음이다. 즉 신령스러운 "영광의 몸"[빌 3:21]이다. 성경은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을 "낮은 몸",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영광의 몸"이라 하고 있다. 더 다시는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 아닌[더 이상 고난 받을 필요가 없으므로] 이 우주의 주인으로서의 모든 영광을 극(極)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까닭이다.

그래서 때가 아니라는 것은 아직도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이 남아 있고 따라서 그 때까지는 우리의 고난 받음이 지속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더 이상 구원 받을 사람이 없을 때 그 때 나타나시는 것이니 왜냐면 그 때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는 모두가 그리스도와 같은 신령한 몸이 되는 순간인즉 그 이전에 나타나시게 되면 안되는 것이다. 믿는 사람이 모두 그렇게 변형되면 그 영광스러움을 보고 세상에 믿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성경이 강조한 대로 악인을 걸려내고 솎아내시는 작업이 불가능하게 된다. 모든 악인도 모두 그 때만은 또는 이 세상 한 때만은 자기중심을 버리고 무조건 자기 부인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이 극력 경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인들이 이기적인 목적으로 즉 영생과 영광만을 욕심 내어 '자기중심'의 모든 악을 버리는 줄 아시나, 피조물들은 그런 사정을 알 리가 없는 고로 "저 사람은 자기 부인의 삶을 철저히 살았는데 왜 구원 받지 못하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므로 그런 의혹 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악인들을 걸러내는 작업은 이미 믿는 자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니, 왜냐면 중도에서 그 처음 믿음을 버리고[또는 처음의 사랑을 버리고-계 2:4] 악인으로서의 본색을 드러내는 수가 허다하기 때문이다[마 7:22]. 아무리 악인이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받아 주신다는 의미가 되고 또 동시에 아무리 의인으로 지금까지 왔어도 오늘 시험을 받아 악을 선호하게 될 때[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세를 취하고 회개하지 않을 때] 그는 악인으로 분류되어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의미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하여 죽으셨다"[성경은 이런 의미로 말한 적이 없으니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해석한 결과다]고 하여 "육신으로 행함"[롬 8:13]으로써 얼마든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도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선언하신 이상 하나님 앞에서 의인되어 있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지어낸 종교 교리이다. 인간이 만든 종교라 하더라도 성경은 믿지 않고 지어낸 것이 있고, 성경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여 "이것이 성경의 내용이라" 하고 만드는 종교 교리가 있는데 후자에 속한다.

성경에 가르치는 것은,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니까[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의인이다. 물론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고 그것이 곧이 곧대로 말하는 '정직함'이다. 의인은 의를 행하기 때문에 의인이라 하는 것이지 의를 행하지도 않는데 즉 누가 보아도 죄를 짓고 있는데도 의인이라 선포하시면 그러면 하나님도 거짓말하시는 분이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거짓말하시면 거짓말이 아니고,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거짓말이 된다는 것인가. 그런 법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진리를 나타내심이다.

어제까지도 아니, 믿는 오늘 이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자기중심이어서 나 자신을 위해 살았으므로 내가 지은 것은 죄밖에 없는 죄인이었는데도, 지금 이 시간이라도 내가 그리스도를 믿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리라 다시 말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고후 5:15] 않으리라 굳게 결심할 때 즉 회개할 때 내가 의인이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나를 의롭다 하시는데 바로 그와 같이 의인이 되어 있는 것은 왜 그런가.

여기서 유일하게 차이가 있다. 즉 여전히 죄를 지어 육신 가운데 살아 죄인인데도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줄로 믿는 사람들은 회개가 없다는 점이다. 말은 회개한다고 해도 단순히 자기가 죄인인 줄 안다는 것으로만 그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의가 없음을 말한다. 이 결의가 없으면 회개가 아닌 것이다. "악함을 버림"[행 3:26]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지만 그런 경우 회개도 아니고 따라서 죄 용서도 되지 않는다. 구원이 될 리가 없다. 사람이 지어낸 잘못된 성경 해석으로 종교 교리만 믿고 자기는 믿고 구원 얻은 것이라고 해도 성경대로 하면 구원이 아니니 여기서 진위(眞僞)가 가려진다. 물론 그들은 자기네가 성경대로의 해석이라고 한다. 그러면 서로가 옳은 성경 풀이라고 주장하니 최종 판결은 누가 해 주는가. 물론 성경이다. 그리고 각자의 양심적 판단이다.

바로 그 양심적 판단을 돕기 위해 지금까지 계속 되풀이하여 설명해온 것이다. 그래서 위의 설명을 이어, "어째서 과거 의인으로서의 일정한 아무 행함도 없었는데 지금 단지 믿기만 한다고 의인이 되어 나를 의롭다 즉 의인이라 하시는가에 대한 답변이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었다는 이 사실은 분명하고 불변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비로소 의인이 생겨나는 것이다. 물론 믿은 후 더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면 의인이다.

그러나 처음 믿을 때부터 의인이 되는 것이니 그 근거가 어디 있는가. 물론 이 경우 위에서 설명한 대로의 회개가 없는 경우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왜냐면 계속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합리화하고[롬 7:24가 믿은 후의 바울 자신의 체험을 피력한 것이라는 주장으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런 억지 해석을 하지 않고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는 경우라도, 지금 당장 내가 단지 믿기만 하고 회개의 세례를 받는 것으로만 어찌 의인이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믿어 즉 그리스도와 내가 함께 죽었기 때문에 과거 죄를 죽음으로 청산했기 때문에 그래서 과거 죄를 용서 받았으므로 죄인이 아니니 죄인의 반대 개념인 의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무덤에 묻혔으므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을 것이기에[나를 위해 살 그 '나'라는 존재가 이제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으므로] 지금부터 의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니 또한 죄인일 수 없고 죄인이 아니니 의인이다.  

이와 같이 어느 면으로 보나 의인이 되어 있기에 의롭다 하시는 것이니 내가 이를 믿음으로써 즉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을 것이기에 이러한 나의 믿음으로 인하여 나를 이와 같이 의인으로 만드셨은즉[새로 창조하셨은즉] 나를 의인이라 하시지 죄인이라 하시겠는가.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나의 죽음을 믿지 않고 여전히 앞으로도 나 자신을 위해 살 수밖에 없다고 여길 때는 물론 의인일 수가 없다.

그래서 이 경우 나를 의롭다 하실 수 없는 것이고 당연히 나는 구원과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나는 죄인이고 의인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도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성경이 말하는 것이다. 성경이 그토록 명백하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롬 6:8/골 2:20/딤후 2:11/갈 2:20/5:24/6:14]을 그리하여 이 "함께 죽음"을 다시 강조하여 "함께 장사 지내졌음[무덤에 묻혀 버림]"[롬 6:4/골 2:12]까지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나 위하신 죽음'을 설명하고 역설하고 있는데도, 어찌하여 이를 간과하고 또는 무시해 버리고 "나를 대신하신 죽으심"이라 여전히 고집하는가.

사랑이시면서도 원리원칙대로 하시는 하나님, 엄정한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하시면서도 그런 여지 없는 법 집행에 대해 모든 피조물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시는 자상하신 하나님이시므로, "너희는 무조건 내가 하는 일을 믿으라" 하시지 않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시는지 또는 말씀하시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공개하시고 한 점 의혹이 없도록 하시는 측면에서, 용납 아니하실 것은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정 사실에 대하여 무지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약속하신 대로 "찾고 구하고 두드리지" 않은 까닭이니 전적으로 나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알려고 문을 두드리지는 않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실을 내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하는 것은 아주 외람된 것이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멀리 하시고 겸손한 자만을 가까이하신다는 것은 철칙이니 명심할 일이다. 에덴낙원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한껏 교만하여 그와 같은 불행한 결과를 모두에게 끼쳤던 것이다.

바르게 삶으로써 영원히 산다

다시 말해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인간답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에 부합하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 달리 의미가 있을 수 없다. 피조물을 지으시되 자기를 위하시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지으시고 지으신 목적에 부합하게 살라 하심은 최대한의 행복을 누리면서 살도록 하심인 것이다. 행복하게 살게 하심이 아니라면 우리를 애초 지으실 리가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인간을 영생하도록 만드셨다는 확증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면 이성이 있는 존재치고 영생하기를 원치 않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의 종교화가 아닌 생활화이다. 일상 생활을 말함이니 곧 자기를 부인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 최대 행복을 보장하고 약속함이다. 갑과 을의 둘이 하나 됨에서 오는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에서 작은 자가 큰 자를 위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인데, 이는 동시에 또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큰 자로서의 하나님께서 작은 나로서의 우리를 위하시는 것으로 나타남이다.

그러므로 특정한 날, 특정 장소, 특정 의례에 따라 특정인이 집전하는 그런 것이 예배가 아니라 삶 자체가 예배이다. 그렇다고 뿔뿔이 흩어져 있는 개인 생활로 만족한다는 뜻이 아니니, 삶은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 모든 사람들의 한 몸 체제를 영위함에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성경은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 했고[히 10:25] 그리고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피차 권면하여 죄의 고집스러움에서 면하라고 경고하고 있다[3:12].

주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도 내가 거기에 있다” 하셨다[마 18:20]. 모이되 전체가 다 모여야 할 필요가 있으면 그렇게 모이기도 하겠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다만 몇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교회로서 모이는”[고전 11:18] 것이 된다. 그렇게 서로 함께 모여 합심 기도하고[마 18:19], 말씀을 가르치고 피차간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행 2:42].

따라서 이미 교회당[예배당] 건물을 소유하였으면 그것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365일 24시간 개방하여 활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또 그런 건물이 없는 경우 굳이 그런 것을 가지려고 할 필요도 없다. 가정 집에서 모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집에 있는 교회”[고전 16:19/몬 1:2/골 4:15]라고도 하는 것이다. 명심할 것은 생명의 일은 규격화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형식과는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형식이 필요할 때는 당연히 형식을 갖춘다. 그러나 획일화는 아닌 것이다.

즉 특정 건물이 없다고 해서 교회가 아닌 것이 아니고 특정 건물을 고집한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 아닌 것이 아니니, “교회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로서 모이는[as a church(NIV, NKJV)]” 것이 성경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들이 모이면 그것이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교회이다. 필요해서 모이는 것이요 따라서 자진 자발적으로 모이는 것이다. 한 아버지를 모시는 같은 아들들이니 정든 가족보다 더 나은 삶의 분위기는 없다.

분명한 것은 열두 사도 아래 초대 교회는 당시 "하나님의 성전"[행 2:46]에 날마다 모였다는 것이다. 스데반이 이 성전 문제로 인하여 유대인들의 돌팔매 아래 죽음을 당하였지만, 스데반의 성령 충만으로 한 말은 다름아니라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즉 이방 여러 나라의 하나님[구약 성경에서 가르치는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라도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 와야 예배가 되고 하나님 섬김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심이 된다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했던 것이다[요 4:21].

그러나 성전이 있는 동안에는 거기 꾸준히 열심히 모인 것이다. 그 성전이 기원 후 70년에 완전히 훼파되었을 때 그러면 그 모이던 성전이 없어졌다고 해서 새로 지어 올린 것도 아니다. 물론 유대인들이야 그렇게 하려 했겠지만 당시 사정이 모든 유대인은 로마인들의 철저한 압제 아래 산지사방 뿔뿔이 흩어지는 판이었으므로 불가능해서 다시는 성전을 지어 올리지 못한 것이다. 그 사정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지금 이스라엘이 건국한 지 오래 되지만 이제는 독립국임에도 불구하고 율법대로 레위계 혈통을 찾지 못해[거의 2000년 세월에 나라 없이 지낸 까닭에] 성전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건물만 세운다고 “성전”이 아니라 “모세의 법”대로 “레위 사람”들이라야 제사장을 할 수 있는데 제사장이 없으니 성전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왜냐면 그런 "성전" 개념은 이제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실질적으로 그 필요가 사라진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 공화국으로 건국한 해가 1948년인데 그 후로도 성전은 세워지지 않았으니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로 모세 율법으로서의 일체의 의미가 영원히 종결되고 소멸됨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엄연히 살아 계시는데 따라서 건국하자마자 성전을 세우도록 하셨을 것이다. 장차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면 그런 레위 족속을 발굴해내어 그런 성전 흉내를 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적 그리스도는 유대인 계통에서 나와 "메시아"로 가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60년대 초 동아일보 세계 '가십'란에 중동 어느 마을에 유대인들의 메시아가 탄생하리라는 소문에 그 일대의 젊은 여인들이 한창 흥분해서 들떠 있다는 짧은 기사가 나타난 적이 있었다. 적 그리스도의 출생과 관련이 있는지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그런 식으로 세상에 태어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밝힌 바와 같이 그리고 친히 경고해 주신 대로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며 아무리 그럴 듯하게 나타나더라도 결코 "거기에 가거나 그를 따르지"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 모세 율법 시대의 유물이라 해서 초대 교회가 예루살렘 성전의 존재를 의식적으로 무시하거나 격하시킨 것이 아니라 그대로 활용한 것과 같이, 현재까지의 교회 건물이 종교적 잔재라고 해서 버리는 일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단지 그것을 종교 전당처럼 신성시하거나 성전(聖殿)으로 대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전은 오직 믿는 각 사람의 몸이 아닌가.

그리고 건물을 장식하거나 거대하게 증축한다거나 하는 일이 불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세상은 삶의 정착지가 아니라 일하는 마당으로서 일함에 따르는 전쟁[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일당과의]을 치르는 곳이니, 이 일만 끝나면 세상 자체를 접게 되어 있는데 무의미한 일을 굳이 고집한다는 것은 육신에 속하는 일로서 죄악시되어 마땅하다. 왜 죄가 되느냐 하면 이 세상은 마귀의 지배 아래 놓여 있어 어느 때든 그 모든 건물과 부속된 일체가 강제 접수될 수밖에 없고 어느 순간에든 그렇게 될 수 있는 판에 하나님의 일을 위해 바쳐진 헌금이 그런 무익한 일에 쓰여진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음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성경을 잘 알지 못해 그런 종교적인 의식 아래 다듬고 가꾸고 지어 올린 건물이라면 오늘날 그것을 그 이유 때문에 버릴 것은 없다는 그 뜻이다. 아깝다기보다 버리는 것 자체가 역시 무의미하기에 그렇다.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하고 현실에 맞추는 것뿐이고 생명의 일은 그런 규격에 의한 형식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므로, 앞에서의 지적대로 그런 것이 있다고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니고, 없다고 해서 생명인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하는 데에 생명력이 있음이다.

건물만 아니라 교역자의 직제도 그렇다. 베드로가 명시하고 바울이 밝힌 대로 목자는 오로지 하나님의 양 무리의 본이 되는 것이 핵심 과제다. 그렇게 본이 되는 이들이 교회 양 떼를 맡아 목자장이신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라 양육하면 되는 일이다. 신학교에서 양성하여 배출된 이들이 일률적으로 그와 같이 철저히 본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면야 제도권 교역자로서 얼마든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터득함이 세상의 학문처럼 연구하고 배워서 될 일이 아님은 지금까지의 사례들이 웅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도하여 믿음의 제자들을 모았으면 그렇게 해서 복음 활동을 한 본인이 교회 목자(牧者)로서의 일을 함이 당연하고, 그러나 대개 그런 전도인은 또 다른 데에 가서 같은 복음 활동을 하여 특정 장소에 머물지 않으므로[바울 사도가 그랬다], 그렇게 해서 전도를 받고 형성된 교회는 자체적으로 결성되어 그 가운데에서 본이 되는 이를 목자 또는 대표로 세우든지 하여 운영하면 될 일이다.

바울이 그렇게 해서 각 교회에 목자들["장로, 감독" 등의 명칭으로 성경은 설명하고 있다]을 세운 것이다[행 14:23]. 선교사로서의 바울은 그렇게 전도하여 각지에서 자기가 세운 교회 장로를 세울 때 금식 기도하고 안수(按手, 머리 위에 손을 얹는 것)를 했었다[:23]. 우리도 마땅히 금식 기도를 할 일이다. 그리고 그들을 떠날 때 "그들[전도를 받은 이들]이 믿은 바 주님과 그 말씀께 부탁했다고 했다[20:32].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신다"는 확신 가운데에서 바울은 그들을 안심하고 떠나 다른 곳에서의 활동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바로 "그 말씀"이 오늘날 성경으로 고스란히[성령의 감독과 지혜 아래]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것이다. 물론 초대 교회 당시 사도들이 가르쳤던 그대로의 말씀이다. 그 필요한 내용 중에 성령께서 빠뜨리는 것이 있도록 방치하셨을 리도 없다. 자세한 것은 성령께서 여러 세대를 통하여 계속 가르치실 것이므로 아무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전통, 전통" 하여 지금까지의 전통에 매달리는 것을 능사로 삼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뭉칠 일이다. 인쇄 기술도 없어 지금처럼 각자가 성경을 소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히 사도들의 입으로 가르친 것에만 의존하던 당시였는데도 그렇게 교회 운영을 전적으로 그 믿은 바 주님과 그 말씀에 의탁했다[to commend, to commit]는 것은 극히 중요한 대목이 된다.

다시 말해 교회의 운영자는 살아 계시는 '사람' 그리스도시다. 사람이시지만 하나님이시므로, 성령으로 각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의 실질적인 운영자시다. 성경을 통해 운영하시니 성경에 각자가 숙달되어 있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은 물론이다. 항상 염두에 둘 것은 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 친히 그 모임의 머리시요 목자시요 좌장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합심 기도 중에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성경의 가르침대로 행하면 교회로서는 완벽하다.

극심한 핍박 아래의 북한 교회가 그 좋은 본보기다. 북한 교회가 받는 핍박이 장차 걷힌다 하더라도 왕년의 그 핍박 받던 교회의 모습이 항상 이상적인 교회 전형(典型)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처음부터 끝까지 즉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는 이 세상의 지배자[王, 임금-요 14:30]이므로 계속하여 '핍박 받는 북한 교회'는 생겨날 것인즉 그 자신이 교회의 핍박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로서 모일 때 거행되는 의식은 믿을 때의 세례와 모일 때의 성례뿐이다. 그 외로는 일절 아무 것에도 구애당할 일이 없다. 안식일 개념은 하나님의 날[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을 섬김에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날이 주님의 것으로서, 특정한 날을 정해 놓는다는 것은 구시대적인 '모세 율법'식 발상이니 그리스도 복음에 무지가 된다. 초대 교회가 매일 모였다는[행 2:46] 것은 매일을 안식일로 삼았다는 뜻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그렇게 모인 것이다[히 10:24].

하기야 안식일의 의미를 알면 모든 날을 안식일로 삼는다는 말도 하자는 없다. 그러나 안식일이기 때문에 지킨다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주인 의식으로 모인다는 데에 차이가 있으므로 굳이 "안식일 운운"할 것은 없다. 우리의 예배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일상생활화가 그 핵심이므로 필요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 이상, 이하의 의미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무슨 절기를 지켜야 된다거나 그것이 구원과 관계가 있다거나 하는 것은 그야말로 “행위로 얻으려는 구원”이 된다.

믿을 때 세례 받고 모일 때 성례를 행함은 주님께서 그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는 성령[그리스도의 영, 아버지의 영]께서 친히 주재하시던 교회다. 그러므로 성탄절이니 부활절이니 오순절이니[요즘은 신흥 이단 종교로 유월절을 지키는 것도 출현했기에] 하는 따위의 소위 교회 절기는 완전 배제된다. 새벽 기도는 언제 어디서든 권장할 만한 일이다. '가정 집 교회'에서는 이런 것이 대개 불가능하다.

따라서 ‘바영사회’의 취지에 동조하는 사람도 그 인근 교회[당]의 ‘주일 예배’에 참석하든 않든 그것은 자유이나 혹 참석하지 않더라도 그 교회 새벽 기도회에 나간다고 해서 이상히 볼 것은 없고 도리어 자연스러운 일이 됨은 초대 교회 당시 사도들이 성전에서 계속 모인 것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영사회’에 동조하는 교역자도 그대로 믿음의 형제들이니 그 직분[교역자] 그대로 맡고 그 형식대로 ‘주일 예배’를 드리고 하는 것은 자유다. 차별화할 이유가 없다.

앞에서 강조한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을 규격화하고 제도화하는 것은 절대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자체가 종교화가 되어 버리는 것이니 이런 사례를 우리는 그동안 누차 보아 온 것이고 그것으로 학습 효과는 충분하다. 따라서 그런 전철을 답습할 이유가 없다. 그런 속박에서 완전 해방되되, 그런 것으로 스스로를 속박하는 일만은 과감히 끊어 버려야 하는 것이다.

즉 조금이라도 종교적인 인식을 심어 줄 수 있는 것은 말 그대로 자승자박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력과 종교는 절대로 하나로 화합, 융합될 수 없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바영사회’는 규격화하고 제도화하는 것을 배격한다. 기존 체제와 건물 등을 선호하면 그대로 할 것이요 원치 않으면 새로 출발하는 것이요 기존 체제로 머무는 것을 이단시할 것도 없고 그 체제를 무시하는 것을 두고 경원시할 일도 아니다.

바울 사도가 성령의 지혜로 미리 경고한 것처럼, 특정한 날을 중하게 여기면 그대로 할 것이요 중하게 여기지 않고 모든 날을 똑같이 여기면 그대로 할 것이다[롬 14:6]. 단 어느 편이든 그 다른 편을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서, 이를 위해서는 기본 원칙이 세워져야 하는데 이 기본 원칙만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다. 그 기본 원칙이라는 것은, “우리 중에 그 누구든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다”는 이 점이다[롬 14:7-9/고후 5:15/갈 2:20/빌 1:21].

이렇지를 못할 때 근본이 다르므로 더 이상 이런 지엽적인 문제로 갑론을박할 것이 아니라 근본 문제를 해결함이 시급하므로 당자는 자기의 믿음 없음을 자각하는 것이 급선무이고 주변의 사람들은 그를 믿음으로 인도해내기 위해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 이상으로 할 일은 없다. 그러므로 바르게 산다는 것은 이전처럼[그리스도를 믿기 전]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 전체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것이니 그 지시를 받아서 함께 지체되고 그 지체의 각 부분이 되어 있는 이웃들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사는 이가 없다. 그런즉 이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는 이도 없다. 한 머리를 모시고 한 몸 체제에서 사는 것이 진정 사는 것이고 한 몸의 체제에서 사니 방금 지적한 대로 그 누구든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없어야 하는 까닭이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바로 이렇게 사는 삶의 시범 현장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는 이가 없다는 것은, 가장 시급한 일이 사람들을 다시 나게 하고 새로 창조되게 하는 일에만 매달리고 그 외의 일로는 시간이 없는 까닭이다.

때문에 혼자 사는 것을 바울 사도는 성령의 감동으로[고전 7:40] 적극 권장하였고 형제가 실족하게 되면 고기를 절대로 입에 대지 않으리라는[고전 8:13] 결의까지 내비칠 정도였다. 사람이 짝을 이루어 살고 그리고 먹는 맛으로 산다고 하는데 식욕, 성욕 기타 모든 것을 버리는 판에 무슨 낙으로 이 세상의 생명을 누린다고 하겠는가. 왜냐면 그렇게 하는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함이니 형제들을 실족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든지 주님 말씀대로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는[마 19:12] 일이라든지 하는 것이 모두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또 그리스도께 관한 믿음을 지키도록 하기 위한 목적인 까닭이다.

이 세상에서 바르게 산다는 것은 자기 부인을 말함이고 오직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함에 있음을 다시 강조한다. 이런 '일하기' 위해서만 현재 이 세상에 존재하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고 현재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등의 삶의 지침을 성경이 세워두고 있다[히 13:5/딤전 6:8]. 즉 살기 위함이 아니라 일하기 위한 차원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신 대로 고난 받음으로써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니 이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의 지배자[王, 임금-요 14:30]와 신(神)으로 군림해 있어 사람 구원의 일을 방해하여 교회를 적대시하고 핍박하는 것과 맞물린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핍박을 통해 우리는 말하자면 전화위복의 계기를 이룸이다. 사람 구원하는 일을 게을리 하여 사는 낙에 파묻히지 않도록 스스로를 편달하고 자극하는 데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일종의 도움을 준다고 할까. 고로 항상 쉬지 않고 주님께 기도하여 그 인도를 받는 중에 일거수일투족을 하는 것이, 다시 나고 새로 창조된 우리 모두의 모습이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우리로서 산다는 것은 일하는 것이요 고난 받는 것이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에서 싸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고난 없이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가[딤후 2:3]. 내 자신의 개인적인 성취[우승], 이김[소위 "상 타기" 위함]을 위하여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이상 말한바 우리의 머리되시는 주님의 인도와 지시를 따라 구원 받을 사람들은 구원해내고 구원 받은 이들을 사랑 가운데[기도와 말씀으로 그리고 기타 선행으로써] 지켜 보호하고 완전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해 줌에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각자의 개인적인 이김이요 성취가 된다.

왜냐면 앞에서도 이미 지적한 대로 무릇 하나님의 피조물 된 자로서[저절로 생겨나지 않은 다음에야] 자기를 위하고 자기 개인적인 것을 추구하는 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없음이다. 그렇게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비정상이요 생명 아닌 죽음에 있기 때문에 그러하니, 이 세상이 바로 그러하다. 따라서 사람들을 이 죽음에서 건져내는 것이 현재로서 가장 필요한 일이요 급선무다. 이 일이 끝나면 이 세상은 종료되는 것이므로 더 이상 다른 것을 거론할 여지조차 없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산다는 것은 영원히 산다는 것을 의미함은 당연하다. 왜냐면 그 바르게 사는 것이 하나님 뜻이기 때문에 그렇게 뜻대로 하여 하나님과 일치되어 있으니 이는 생명[영생]과의 일치가 됨이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영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영생 자체가 핵심이 아니고 바르게 사는 것이 모든 일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상호간 사랑 안에서 한 몸의 원리로 사는 것이다.

여럿이 존재하지만 마치 하나인 것처럼 한 몸처럼 사는 것이다. 다른 말로 공동체 의식이다. 인간의 모든 윤리 도덕, 사회적 규범들이 모두 이 범주에 속한다. 그렇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물론 개중에는 번문욕례란 것이 있어 인간 삶을 향상시키기커녕 도리어 속박하는 악법도 있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법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한 욕심이 법의 테두리 안으로 억지로 끼어 든 것이니, 법의 형태를 취하고는 있지만 법 정신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사이비이지 법은 아니다. 모든 사이비가 가짜인 것처럼 그런 사이비도 법이 될 수는 없다. 비정상적인 세상이므로, 그런 정상이 아닌 것도 법으로 행세한다는 그런 현실일 뿐이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서 “일용(日用)할 양식”을 구하는 것과 같이 확실한 것은 오늘뿐이고 내일 어찌 될 것을 알지 못하는 인생이다. 오늘도 이 시간뿐이다. 다음 시간 나는 어찌 될지 모른다. 오늘 죽지 않았으니 살았는가보다 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성경에 “너희는 안개”[약 4:14]라고 했다. 세상은 고해(苦海)라는 말과 같이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14]는 말은 내일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것이 인생인데 이것을 어떻게 가히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으리요. 정신을 차릴 일이다. 단지 단명해서 죽는 사람이 비교적 흔하지 않는다는 한 가지 사실만을 근거로 마치 오래오래 살듯이 착각하는 것뿐이다. 날 때부터 언제 죽는다는 것을 써 붙이고 다니지 않으니 그리고 사람은 똑같다는 의미에서 보면 갓난애 시절에 죽은 인생이 바로 나의 인생이라 해도 그런 결론에 아무 하자는 없다.

나는 그렇지 않으리라는 요행수에다 자기 일생 혹은 인생을 거는 것은 퍽 이성적이지 못하고 지성적이지도 않다. 그러므로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는 것을 위하여 하라”[요 6:27]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어떻게 하면 영생하는 것인가 하고 그 문제부터 풀려고 하는 것이 이성을 가진 지성인의 마땅한 자세다. 그 외는 모두 정신 나간 것이라고[전 9:3] 일언지하에 즉답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인식을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 주님 말씀에 “네 오른 손, 네 오른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찍어 버려라, 한 손,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 두 눈 다 가지고 영원 멸망에 들어가는 것보다 낫다” 하신 것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홀려 정신 없는 일에 빠지지 않게 된다. 이 세상 한 때 고통을 못참아 영원한 생명과 맞바꾼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인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있으니 그래서 "두렵고 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현세에서 각종 구원을 베풀어 준다고 해서[예컨대 병고(病苦)에서의 해방 각종 인생 고뇌로부터의 자유 등] 거기 매달려 자기 영혼을 파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특별히 세상 종교에서 그런 현상을 많이 보게 된다. 이 세상에서의 그런 고통은 영원한 생명을 찾게 하는 자극제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그 결과 영원한 안식과 희락을 찾아 얻게 되면 그야말로 무한 가치가 있는 것인데 이를 생각하지 못한다.

내일 목숨도 기약 못하는 이 세상에서 한 때뿐인 고통을 해결했다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영생하게 되는 것을 외면하는 것은 차마 못보아 줄 일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나병을 고침 받은 10명 중에 오직 한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제대로 된 도리를 다했다는 것이 이를 나타낸다. 병 고침 기타 그 어느 문제 해결보다 가장 먼저 자기 생명부터 구하고 볼 일이다. 나머지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일은 언제 어디서나 무엇에서나 마찬가지지만 하나님의 뜻이 최고 가치를 지닌다. 나는 어디까지나 몸의 지체 역할이요 머리께서 모든 일을 만사태평 만사형통으로 처리하시기 때문이다. 고로 머리의 뜻과 지시에 전적으로 일임하여 일치시킴이 생명이다. 이 세상에서 단명하다고 그것이 서러워서 하나님께 하소연하여 마침내 15년이나 연장된 목숨을 산 보람도 없이 히스기야 왕은 그 연장된 목숨으로 므낫세 같은 망나니 같은 아들을 낳아 나라를 온통 뒤범벅으로 만들어 득보다 손실이 컸으니 우리 모두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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