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HOME

3위1체 원리

  • 관련 자료 모음
  • 바영사운

Home > 3위1체 원리 > 관련 자료 모음

제목 바영사운이란? (21) 등록일 2016.02.16 22:06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11

바/영/사/회-"[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
--------------------------------------------------------------------------------------------------

하나님의 뜻은 완벽주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짐이 최고다. 우리가 구원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善, 좋은 것, 유익한 것]을 이루게 된다는 말씀 그대로다[롬 8:28]. 그런데 이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내게 맞지 않는다 하여 믿지 않는 결과로 모두 자멸(自滅)에 이른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는 것도 그렇다.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여 고난 받고 죽음까지도 불사하겠다는 나의 의지(意志)가 중요하고, 실제로 믿음을 위해 순절[순교]하고 않는 것은 하나님의 소관사다.

왜냐면 "은혜"에 속하기 때문이다[빌 1:29]. 그리스도의 좌우편에 앉는 것 역시 그리스도처럼 가장 고난을 많이 받은 결과를 놓고 하나님 친히 정하시는 자리임을 명백히 하신 것과 같다[마 20:22,23]. 이 의지는 사랑에 있으므로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고전 8:3].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게 되므로 고난 아니라 그 이상의 것도 무엇이든 기쁨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고 구원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변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랑도 항상 유동적인 것이다[계 2:4]. 때문에 나의 마음은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이다[잠 4:23]. 믿음을 지킨다는 말의 의미도 여기서 나온다. 마음으로 믿고[롬 10:10] 마음으로 배반한다[요 13:2].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경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마음을 지키라는 것 외의 딴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이에 따르는 행위가 있게 마련이니 곧 순종으로서, 그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온전히 이룸이다[요 4:34].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되는 위치에서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위하는 지극히 아름다운 조화다. 이런 아름다운 몸과 머리의 기본 소양을 갖추기를 바라시는 것이지 결코 무슨 완벽주의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열매 맺는 것을 보아도 혹자는 100배이면 어떤 이는 60배 또는 그 1/3인 사람도 있다.

그리스도의 좌우편에 앉을 사람도 있는가 하면 나머지는 결국 그렇지 못하니 그런 차이는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100프로 완전을 기하라는 것이 아니니, 최소한 최저한의 기본 바탕 위에서 시작하기를 바라심이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것이다[고후 5:15]. 여기가 '의인'과 '죄인'의 분수령인 것이다. 머리와 몸 관계를 보면 명확해진다. 머리든 몸[의 각 지체]이든 자기 자신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자기를 위해 살면 한 몸을 구성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이기 때문이다.

"내 자신 저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의 구원을 원함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이것이 그치지 않는 마음의 고통과 큰 근심이 되어 있음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언하는 바"[롬 9:1,2,3]라 했던 바울이요, 역시 같은 심정으로 기도한 모세다[출 32:32].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고 "나 자신을 구원하라"[딤전 4:16] 경고한다고 내 구원이 목표인 즐 결코 착각하지 말 것은, 우리 구원이 다시는 아담이나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되지 않고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머리의 지시를 받아 복종하며 사는데 있기 때문이다.

복종 않으면 구원 자체가 무의미, 무효가 됨이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위해 살면 한 몸 관계가 더 이상 지속될 리가 만무하다. 복종은 지체(肢體)가 머리께 순응함이다. 머리의 지시를 받지 않고 몸이 한 발짝인들 움직일 수 있는가. 장 핵심되는 것 중 하나이므로 이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최소한의 것이다. 그 나머지는 우리 자신이 나타내는 사랑의 열심과 열성 여하에 따라 천층만층으로 구별이 생기는 것이다.

§  보이지 않으시는 영으로 계시는 조물주께서 <보이는 형상>으로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 것이 이 모든 피조물 창조이다. 따라서 조물주께서는 이 모든 만물 위에 계시고[above all], 안에 계시고[in all], 그 구석구석이 충만하게 스며(through all) 계신다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다. 충만하게 계시지만 인간의 마음은 그 자유 의지를 속박당하지 않는 관계로 인간의 마음 안에서만은 인간 스스로가 자진하여 사랑으로 모셔들이지 않는 한 강제로 계시지 않는 그런 특징이 있다.

그래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도 영원히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시지 않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다시 말해 그 독자적인 자유 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존재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는 것은 조물주이시기 때문이니, 이는 성경에 거짓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모든 거짓과 속임수란 것은 그 거짓을 말하는 자의 사사로운 욕심에서 나오기 때문이니, 그런 욕심이 동기가 되지 않으면 어떤 속임수도, 거짓도 있을 수가 없는 까닭이다. 거짓말도 필요해서 하는 것인데 조물주께는 그런 거짓을 말씀하실 아무런 필요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조물주께서 무엇이 부족하고 아쉬워 거짓말을 지어 내시겠는가, 이는 상식에 속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더라도 그 말씀을 나타내는 인간은 혹 거짓말을 할 수 있지 않으냐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성경을 그 말씀으로 확정해 두신 터에 감히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거짓말을 끼워 넣어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도록 방치하시겠는가, 이 또한 상식에 속한다. 여럿이 제각기 자기가 진리라 할 때, 진리는 하나요 여럿일 수 없고 나머지는 필시 가짜요 속임수다. 세상에 종교 경전은 여럿이고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성경도 그 중 하나이지만, 그 중 어느 것이 진리이냐 할 때 그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을 풍성하게 확실히 하고 있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우선적으로 집중해서 파고 들기 시작하면 그르침이 없다.

성경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성경이 그러한 진실성을 두고 훌륭히 자체 증명을 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면, 이 성경과 어긋나는 것은 다 속임수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경전을 기록한 사람들이 그런 거짓을 지어냈다고는 보지 않고 그렇게 거짓 것을 보여 주고 말해 준 인간 외의 존재 즉 악령들이 그 배경에 있어 그런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그 뜻이다. 그러므로 그런 속임수에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보여 주고 말해 주는 대로 기록하면 그 기록하는 당사자는 정직하고 거짓이 없고 속임수가 물론 없지만 그 내용만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것이므로 거짓이요 속임수라는 결론이 아닌가.

§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영원한 존재인 영혼을 지어 놓으시고도 그 육체를 영원히 존재하지 못하게 하신다면, 육체로서는 원래가 영원하지 못하므로 자연스러운 결론이라 아무 불평도 없겠으나 영원한 영혼에게는 지극히 불만스러운 일이 되므로 그와 같이 막무가내로 인간을 죽음으로 종결 짓게 하신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된다. 단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를 않아 전체 피조물을 망가뜨리는 일을 할 때는 죽음으로 조처하실 수 있어도, 아브라함이나 노아 같이 그 뜻을 잘 받드는데도 죽음에 처하게 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은 영원히 살도록 신령한 몸으로 되어 있던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된 것임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롬 5:12]. 그리고 자연계의 동식물은 그 개체적인 면에서는 죽음이나 전체 그 종류의 생존에는 하등 변화가 없어 오히려 신진대사에 해당되므로 죽음일 수가 없다. 영혼이 없는 까닭에 그 종(種)이 바로 그 생명 격이라 창세 당시의 개, 고양이 또는 백합화는 지금도 생존해 있는 터이므로 수명(壽命)이 장구(長久)하다. 그러나 유독 인간은 영혼이 있기 때문에 이런 육체의 소멸을 "죽음"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자연계의 동식물도 죽음이라 하는 것이니[레 11:8,25] 왜냐면 육체 면으로 볼 때는 인간이 자연계의 동물과 똑같아 필경 흙으로 돌아가므로 흙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는 사람과 짐승을 구별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일괄적으로 사람이나 짐승이나 흙을 돌아갈 때는 죽는다는 말을 쓰게 되나 원래는 그렇지 않아 인간에게는 죽음이 없었다. 아담의 범죄로 비로소 그렇게 된 것이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불가분인데 그 한쪽인 육체가 죽으니 영혼 역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아담]의 생명은 영원하고 따라서 육체도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닌 신령한 몸이었으나 선악과를 먹음으로 그 육체가 다시 이 자연계에 속한 것으로 도로 돌아와 버렸다는 데에서 이를 가리켜 “죽음”[창 2:17]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과 죄가 인간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성경은 가르친다[롬 5:12].

그러므로 바르게 산다는 것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 가운데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어 모두가 '한 몸'된 구조에서 각 지체 각 부분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는 뜻이요 따라서 필연적으로 이는 영원히 살 수밖에 없으니 머리이신 하나님께서 영원히 계시기 때문이다.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 몸의 역할이다. 그리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숫자가 <하나>를 이루고 살자면 <하나됨 즉 한 몸의 구조와 체제>가 필연적이다.

하나가 되지 못하면 서로 제각기 자기가 유일한 '하나'임을 내세워 자기 외의 그 어떤 존재도 자기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을 수용하려 들지 않고 용납하지 않으므로 알력과 분란과 쟁투가 끊이지 않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처럼 살상(殺傷) 행위가 끊일 새 없다는 것이 가인의 살인행위로 이미 입증되어 있음이다. 단순히 막연하게 나를 좋아하면 사랑하고 미워하면 싫어하는 것, 이런 것이 삶의 법칙으로서의 사랑이 아닌 것이다.

고로 이 사랑의 법칙은 절대적이다. 만고불역(萬古不易, 오랜 세월을 두고 바뀌지 아니함)이다. 그래서 이 사랑의 법칙의 그림자인 공동체 의식이 인간사회의 모든 법질서의 모태가 되어 있다. 이 생명의 법칙을 사랑의 법칙이라고도 하는 것이니 만유 생성과 존립 원리인 삼위일체 법칙의 대칭성 또는 인과론에서 나오는 까닭이다. 불교의 교리는 이런 몸과 머리와의 관계를 말하지 못한다.

생명이 처음부터 있는 것일진대 그러면 머리도 처음부터 존재해야 하므로 그 머리가 다름아닌 조물주일 수밖에 없어 그리 되면 조물주를 인정하는 격이 되어 차마 그런 논리를 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논리를 따라 말하다가는 자체적인 붕괴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한 몸 체제 외에는 인생들이 이상적으로 살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는데 어찌하리요. 누가 감히 이를 부인하랴.

법 준수 정신이 투철해야 그 사회의 선량한 시민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의 기본 정신은 바로 이를 실천하여 지키기를 힘쓰는데 있다. 사람 삶은 피동적으로 살아지니까 사는 것이 아니다. 자유 선택의 자기 자유 의지로써 완전 자유의 자유인으로서 사는 것이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힘쓰고 애쓰는 삶이다. 더군다나 이 세상이라는 시험 무대에서는 특별히 그렇다. 항상 사랑의 법질서를 따라 살고자 노력함이다.

사람답게 사는 일에서의 자기 완성을 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들이시라도 고난을 통해 순종하심을 배워 온전하게 되셨다[to be perfect] 함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히 5:8,9]. 같은 의미로 바울도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한 것이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빌 3:10-14] 한 것이다. 이것이 "누구든지 온전히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마땅한 자세라고 하였다[:15]. 줄곧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쳤고 이를 또 강조했으니, "우승하기 위해 달려가는 자처럼 하라"[고전 9:24]한 것이다.

이 사랑의 법질서는 '사랑을 유지함' 곧 '하나됨을 유지함'이요 여럿이 이런 '하나를 유지함'에는 그 누구든지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위하지 않음 즉 자기 부인이 그 골자다. 조물주께서도 일단 피조물을 만드신 다음에는 자기 자신을 위하시지 않음이 그 모든 하시는 일의 철칙이 되어 있으니, 이전에 홀로 계셔서 피조물을 만드시지 않았을 때는 자기를 위함이 자기 존재의 기본이셨으나 일단 자기 외에 이제는 당신께서 지으신 피조물이 존재하게 된 마당에는 결코 자기를 위하심이 없다.

'자기를 위하시는 것'은 이제는 '그 피조물을 위하시는 것'으로 완전 탈바꿈하신 것이다. 이를 성경은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그 확고한 영원한 증거다. 이렇게 당신께서 지으신 피조물을 위하시니까 논리적으로도 이제는 자기를 위하실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피조물들 역시 자기를 위하지 않고 오로지 조물주를 위하게 되어 있다. 조물주를 위하는 차원에서 각자 자기 이웃들을 위하는 것이다. 이것이 조물주와 피조물이 아울러 하나가 되어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비결이다.

바로 이 같은 영원한 법질서를 어기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죄'이다. 공동체 의식을 어기고 사사로운 욕심을 따른 사람들을 인간 사회가 '죄인'이라 규정하고 형벌을 가하는 것과 같다. 인간사회와 그 법질서가, 조물주께서 우리를 지으신 그 모든 양상대로 되는 것이므로 달리 형태를 취할 리가 없고, 별개의 모습일 수 없으니 그것이 물 흐르듯 하는 자연스러움이기 때문이다. 조물주의 본을 따라서도 물론 그러하지만 조물주 하나님 친히 그렇게 해서 나만을[나를 기준해서 보면] 위하시기 때문이다.

또 내 이웃을 기준해서 보면 그 이웃만을 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특성이시다. 전체를 위하심과 동시에 낱낱이 위하심이 가능하시어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인지(認知) 하에 그 허락 없이는 결단코 떨어져 죽지 않는다고 명백히 말씀하신 그대로다[눅 12:6]. 우리는 하나님을 마치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신 양 우리의 눈 높이에서 이해하려는 것이 항상 탈이다. 물론 그렇게 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때도 있으니 이를 분간하지 못하는 불찰이다.

이같이 여럿이 하나 됨을 유지하여 존재할 때에는, "나(自己)"를 기준하여 보면 나 외에 ‘또 다른 나의 존재’가 그런 동일한 숫자[이웃의 숫자만큼이나]로 존재함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부인을 삶의 최고도의 지혜라 한다. 다시 말해 갑, 을, 병 등 제각기 자기 특성을 지닌 사람들이 10억이 된다고 하면 나는 갑, 을, 병, 정 등등 여러 제각기의 이름을 한 나 자신을 10억이나 더 소유하게 되는 실상을 보게 되는 놀라움이다.

왜냐면 다 자기를 위하지 않고 모두 나를 위하니까 이보다 더 이상적인 '나 자신'이 있을 수가 없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이 사랑의 관계에서 나는 그 대신 10억 명의 나 자신을 향유하게 되는 복된 결과를 이룸이다. 그 10억 명이나 되는 개개인들이 자기를 위하지 않고 조물주를 위하는데 조물주께서는 바로 나를 위하시니까 그 조물주의 뜻을 받들어 모두가 나를 위해 주는 아주 이상적인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비록 그 숫자가 천천 만만일지라도 모두 조물주 안에서 통일을 이루어 <하나 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 모두가 나를 위하니 나는 무한대로 확장, 확충, 확대된 거대한 나 자신의 삶을 누리게 되므로 이 얼마나 풍성한가[요 10:10]. 진정으로 과연 ‘내 세상’이 아닌가! 나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제각기 “내 세상이다!” 하고 신바람 나게 외칠 수 있어도 물 흐르듯이 태평이고 평안이고 기쁨만이 충일한 세계다.

또한 문자 그대로의 완전한 자유 평등이다. 이것이 '한 몸'이 된 체제로서의 신묘막측함이다. 억지로 무리하게 통제하고 간섭함이 없어도 저절로 물 흐르듯이 흘러 만들어지는 완전 자유와 풍요의 세계다. 오직 비결은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음이니 모두가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머리되신 하나님을 위하고 그 지시를 따라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결과다. 그래서 한 몸되어 사는 자기 부인이 생명의 법질서의 핵심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문자 그대로 가능한 현실로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괜스레 만들어 짜맞추어진 이론이나 공리공론이 아니라 무척이나 행복스러운 현실 그 자체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바 그리스도의 나라요, 하나님의 나라요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서의 천국이다. 이 이상향의 생명은 장차 나타날 세계가 오면 비로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세계에서도 누리는 생명력이 되어 있다.

이런 삶의 이치는 그리스도 이후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아담이 범죄하기 전부터 확립되어 오는 생명의 법질서다. 아담이 이 법질서를 어김으로써 죄가 오고 죽음이 온 것이다[롬 5:12]. 그러므로 이렇게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인생들에게 한해서 이루어진 새 창조로서의 새 질서일 뿐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확고히 다져진 삶의 새 법질서가 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이 확립되어 있으면 이로써 충분 만족한 것이지 새로 그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

적(敵) 그리스도가 나타나 아무리 비슷하고 그럴싸한 것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이미 이와 같이 완전무결하게 이루어져 있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 이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모두가 필요 없는 것이기에 가짜요 속임수인 것이다. '현재' 누리고 있는 생명력이므로 "구원 받았다"는 표현이 현실이 되어 있으나 단지 이 세상 자체가 죽음의 고난 고통이라는 일정 기간의 일정 윤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까닭에 거기 보조를 맞추어 있는 것뿐이다.

말하자면 고난과 고통 중에 함께 하나가 되는 것을 배움으로써 즉 순종을 배움으로[히 5:8,9] 장차 영원한 생명에서 생명의 낙 가운데에서의 하나가 되는 기틀을 마련하는 중에 있음이다. 이 고난을 기피하고 이 생명의 틀에서 뛰쳐나가는 이들이 있다. 성경의 모든 경고는 이런 가능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 이미 범죄하였고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이미 그 선례를 보여준 터이다. 그 전철을 얼마든지 밟을 수 있으므로 밟지 말라는 애절한 충고다. 그러나 이 애절함도 이 세상 한 때뿐이다. 그래도 벗나가는 사람에게는 엄정하고도 냉혹한 죽음의 장막만이 영원히 드리워져 있을 것이다.

사랑은 이같이 <하나 됨>이요 함께 함이므로 고통 중에서도 하나 됨 곧 함께 함이요 영광 중에서도 함께 함이다. 울 때면 함께 우는 것이요 웃을 때는 더불어 같이 웃는 것이니[롬 12:15], 그 사랑의 실상이 오늘날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고난으로서, 왜냐면 모두가 하나이요 한 몸처럼 되어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하나만 고통당하고 다른 여럿은 안락 속에 있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기에 그렇다.

만물이 다 인간 범죄와 죽음을 인하여 극심한 고통 즉 해산(解産)하는 진통(陣痛) 속에 있는데도[롬 8:22] 더군다나 하나님 친히 머리로서 그 피조물 인간을 위해 고통 중에 계시는데[행 9:4] 인간만은 예외일 수가 없다. 실상은 우리 인간들 때문에 그와 같이 모두 고통 중에 있음이다. 그런즉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이요, 올바른 삶의 토대요 방법이요 그 능력이다. 종교 같은 것은 필요가 없다.

그렇게 바르게 살면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살면, 그리스도의 일을 하면, 자연적으로 그리스도[우리의 머리되시는]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되어 있는데 따로 종교를 만들 이유가 없음이다. 일상생활이 중요하다. 그래서 일상적인 삶을 강조하는 것이다. 생명의 능력을 유감없이 맛보는 그 기쁨이요 평안을 말함이다. 넉넉하고, 든든하고, 그득하고 느긋한 나날을 보내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삶의 '이 세상에서의 특징이자 핵심'이다.

이 영원한 삶의 뼈대가 나를 위하지 않음에 있으니 이는 나를 위해 존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삶, 그의 일을 하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의 일이란 멸망과 죽음의 바다로부터 사람 건져[낚아] 올리고 살려내는 일이니, 밀 알 한 알이 그냥 편안하게 있으면 외톨로 자기 혼자 존재하다가 곧 썩어 버리는 것으로 끝나지만 죽어 땅에 묻힘으로써 여러 배의 자기 자신을 재생(再生) 또는 부활시키는 생명의 자연법칙에 따라, 앞에서 설명한 대로 여러 수십억의 나 자신을 탄생시키는 엄청난 그리고 영원한 희열 그 자체를 양산해 내는 것이다. 그 즐거움이 바로 주님께서 맛보신 "앞에 있는 즐거움"[히 12:2]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된 구원의 소식이 세상 종교로 변질되어 자기 세력을 팽창시키고 확대하려는 사악한 인간 욕심의 도구로 전락하여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의 구원인 것처럼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은 유감이다. 이 세상이 인간들만의 세계로서 오직 조물주 하나님과만 상관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나 인간의 적대자인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력으로 좌지우지되는 세상이므로 이러한 현실인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목적은 사람들로 구원 얻지 못하게 함에 있다. 구원만 얻지 못하면 기독교가 아무리 왕성해도 개의지 않는다. 20세기에 들어와 중세기 당시처럼 또는 초대교회 이후 300년처럼 핍박이 자심하지 않다고 해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기가 죽은 것도 아니고 어떤 이들이 믿는 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완전히 그리스도의 교회를 자기의 종교로 만들었다고 보기 때문에 핍박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서다.

왜냐면 절대 다수가 종교를 믿는 것으로서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오해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구원이 없다. 구원이 될 수 있는 상태라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얼마든지 핍박의 칼날을 들었을 것이다. 과거에는 천주교를 그와 같이 자기 장중에 넣더니 이제는 개신교 역시 완전히 자기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실제 그러하다. 이제 다시 하나님 말씀대로의 구원의 복음 운동이 일어나면 필연적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무자비한 보복 극을 벌일 것이니 이에 대비하는 것이 지혜다.

인간이 이 죽음의 인간 세상의 주체가 아니니 음으로 양으로 이 지배자[王, 임금-요 14:30]의 간섭을 받아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거의 하나도 없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자기의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만 자기 의지대로 결정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반면, 그 외의 것은 철저한 통제 아래 놓여져 있는 인간 비극. 이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 악한 영물들이 우리 눈에는 안보이니까 마치 우리가 독립된 존재로 자기가 자기 일을 스스로 꾸려 나가는 것처럼 보여, 일이 잘 풀려 나가면 자기 힘으로 이룩한 줄 알고 기고만장 우쭐대지만 실상은 눈 가리개를 당하고 쇠사슬에 묶여 이끄는 대로 끌려[고전 12;2] 돌아다니는 비참한 노예 양상이 인간의 실상이다. 이런 악한 영들이 이 세상에서 신(神)으로 날뛰는 판이니 자기의 정체를 밝혀 탄로시키는 그 무엇이든 그들이 용납할 리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만이 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데도 이를 전혀 믿지 않으니 또는 믿도록 악령들이 방치해 두지 않으니 어찌 하리요. 그러나 각자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분명 열린다고 약속하셨다. 그럼에도 스스로 두드리지도 않으니 어찌 하랴.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일만은 간섭 받지 않는다. 때문에 두드리라, 찾으라, 구하라 하셨고 그리고 약속하신 것이다[눅 11:9,10].

인간과 이 우주와 그런 영물들을 애초 지으신 하나님만이 그 사랑의 은혜와 능력으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그 말씀을 인간에게 전달하게 하셔서 그 말씀이 되어 있는 성경이 이와 같은 처참한 진상을 폭로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이런 실상을 밝히고 있는 것은 오직 성경뿐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이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감히 이를 어찌하지는 못하지만, 그 대신 이 악령들은 그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2:17] 만드는 술책을 써서 인생들로 하여금 혼돈을 느끼게 하고 믿지 못하게 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이 전쟁에서 우리의 제사장으로서의 기도가 필연 필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중 누가 진실로 하나님을 찾고 진리를 목말라 하는지 잘 아시므로 그같이 찾고 두드리고 구하는 사람에게는 풍성하게 주시고 찾게 하시고 문을 활짝 열어 주시는 것이니, 이렇게 하실 때에는 악령들은 감히 손도 댈 수 없다. 물론 그런 사람들까지도 기회만 있으면 속임수로 넘어뜨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각자의 자유 의지, 자유 선택이 이처럼 스스로의 생사를 가름하니 따라서 그 중요하기가 이를 데 없다.

이 세상의 사악한 모든 사건 배후에서 인간을 조종하는 것이 이 세상 신(神-고후 4:4) 악령들이다. 성경에서 밝히는 하나님 외의 모든 초능력과 존재들이 그런 범주에 속한다. 엄밀히 말하면 악한 인간과의 합작(合作)이다. 인간이 동의, 동조하지 않는데 악령들이 날뛰지는 못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할 때는 천사들의 능력을 말한다. 천사들이 활동하는 것도 똑같은 수준의 합작이니, 왜냐면 의인들이 스스로 자기 결단으로 의와 선을 행하지 않는데 천사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도울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모두 이와 같이 자유 의지의 인간들과 영물들이 합동하여 악이면 악, 선이면 선으로 활동 양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악을 행해 온 사람도 얼마든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으니 우리가 기도에 힘쓰고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전달에 힘쓰는 것이 이 때문이다. 즉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하려 함이다. 자기 자유 의지로 악을 행했으나 믿기 전의 사도 바울처럼 모르고 악을 행한 경우 역시 자기 자유 의지로 진리로 얼마든지 돌이킬 수 있음이다.

천사들은 모두 자기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다. 원래 모든 피조물이 그러하다. 우리 역시 이전에는 우리 이름으로 하여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어서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함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니 말에나 일에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골 3:17]. 이것이 정상이다. 과거에는 비정상으로 죽은 자의 죽음의 짓거리였었다.

악인이나 악령은 자기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요 5:43].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 자기 부인 아닌 자기중심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되면 자기 이름으로 오는 것이고 그러면 사람들이 그를 환영할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이름으로 오시지 않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환영하지 않는다 하심이 그 때문이다[요 5:43].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음에서 입증되는 것이지[:42] 말로만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뜻은 범죄함으로써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인생 구원을 인하여 고난 받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 이름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행하는 경우 고난이든 죽음이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즐거이 이 뜻을 따르려 하지만,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이들 즉 자기 이름으로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 이들은 이런 고난을 기피하는 것이야 당연하다. 이런 데에서도 그 두 가지 양상은 충분히 판별 나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함"[:44]에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하신 것이다[:44]. 다시 말해 각자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여 하나님만을 위하여 사시는 관계로 자기 자신을 위하는 악인들과는 전혀 어울려지지 않고 보조가 맞지 않기 때문에 따르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으니 무관심으로 일관하게 된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으려고는 하지만 영생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오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 온다는 것은 그리스도 친히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고난 받는 것으로서 우선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아닌 다른 방법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을 하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살아도 구원을 얻는 그런 일을 찾는데 이 우주 아래 그런 방법이 있을 까닭이 없다. 오직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 말미암은 멸망의 속임수만 "그런 방법"이라 자처하면서 있을 뿐이다. 바로 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속고 있다고 성경은 밝히다[계 12:9].

그래서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므로 너희가 영접치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할 것이라"[:40] 하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한다"[:41]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시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신다는 말씀인데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하는 것과는 일절 상관이 없으시다는 말씀이요, 오직 하나님을 위하시니 사람들에게서 영광 받기를 바람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과 무관함을 천명하심이다.

자기만을 위하는 적 그리스도가 올 때 사람들이 그를 환영하는 것은 적 그리스도나 그들이나 다 같이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하는 데에는 일치하므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나타낼 그런 소위 "최고 능력자"를 빙자하여 각자 그러한 자기중심의 실속을 챙기려 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만을 위하시고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도 자기를 위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위할 것을 요구하는 까닭에, 생리상 도저히 맞지를 않아 그리스도에게로 오지를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 앞으로 와 그 제자가 되었어도 결국 상당수가 떠나 버리는 것이요[요 6:65] 심판대에 이르기까지 제자라고 자처하고 있어도 결국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마 7:21/25:45]. 그리스도께서 오심은 구원자로서만 아니라 심판자로도 오심이니 마지막 심판만 아니라 이미 믿고 믿지 않음에 따라 사람들은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들에게 걸림 돌이 된다 하셨다. 이 돌에 부딪쳐 산산이 깨어진다고 했다[롬 9:32/벧전 2:7,8].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18] 하신 대로 믿지 않는 이들은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 이유는 "빛이 세상에 오셨으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므로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기 때문"[요 3:19,20]이라 하셨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하신 것은 십자가에 죽으심을 의미하심이니, 심판자로 오시면 죽으실 이유가 없음이며 또한 심판은 먼저 우리 위한 구원을 이루신 다음에 오는 순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마지막 심판을 말하는 것이기는 하나, 마지막 심판이 되기도 전에 이와 같이 믿지 않는 이들은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심판의 본질은 어느 경우에서나 같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 선택에서 '그리스도' 아니면 '심판'밖에 없는 까닭이다.

물론 한번 믿기를 거부했다고 해서 이미 심판 받은 자로 낙인 찍혀 다시는 믿을 기회가 없다는 뜻은 아니고[벧전 3:1] 그렇게 심판의 대상이 되는 이유를 설명하심이다. 따라서 끝까지 자기중심을 회개 않고 여전히 고집하여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이들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이들은 설혹 믿는다고 해도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하지 못함이니 실제 그는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믿기를 거부해도 어느 때든지 권하심을 받고 회개하여 돌이키면 얼마든 구원이 된다.

위의 말씀대로 하면 믿음은 자기중심을 "회개하여" 자기 부인으로 시종일관함을 가리키기 때문이다[고후 5:15].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요 3:15,16]이다. 전자에 초점을 두면 자기를 위해 살아도 무방하고 구원만은 받는다는 식의 생각을 할 수 있지만, 후자인 경우 시종일관 자기를 부인하시어 하나님만을 위하시고 우리 각자를 위하심에서 우리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의미가 되므로 그리고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하시므로 나 역시 하나님만을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하지 않아야 함은 불문가지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한다는 뜻이요 이는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살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고후 5:15]. 서로 영광을 구하는 것은 자기 영광을 구하고 자기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하는 것이니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15] 것과는 반대 방향이다. 자기를 위해 살아 각자 자기 영광을 구하면서 어떻게 "서로 영광을 구하느냐" 하면, 유일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므로 앞에서 말한 대로 자기 영광을 구하는 일에 적당히 나누어 먹기 식으로 하거나, 그 중 힘센 자가 나서서 독차지 한 다음 나머지를 배분해 주는 식으로, 지금까지 인류 역사가 전개되어 온 대로의 바로 그런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되풀이인 것이다.

이런 방식이 원래부터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가인이 아벨을 까닭 없이 죽음으로써 이미 입증된 것이니 아벨이 의인으로써 가인의 악에 대해 악으로 대응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당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고 만일 똑같이 가인처럼 반응했더라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서로 죽도록 싸워 둘 다 망했을 것이 아니랴. 어쨌든 그런 식으로 상호간 살상(殺傷)하는 세상이 오래 지속될 리 만무하다는 얘기다.

때문에 3운법칙과 같은 하나님의 강권 통제가 작용하기에 지금까지 이 세상이 간신히 버티어 온 것임을 모든 사람들은 알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기계적인[강제요 간섭이니까] 통제로 겨우 꾸려져 가는 세상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무의미한 까닭에 구원 얻을 사람 모두 구원 얻은 그 시각 세계는 미련없이 종료되도록 정해져 있음이다. 지금 그 종결이 눈앞에 박두해 있음을 보고 있다.

이상 사실로도 삶의 근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즉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 같이 움직이는 한 몸의 체제이니 머리는 몸의 영광을 구하고 몸[의 각 지체]은 머리의 영광을 구하니 비로소 조화되고 통일되어 '하나' 즉 '한 몸'이라는 최고 행복을 누리는 최대의 지혜가 가능해지는 것이지, 뿔뿔이 제각기 자기 영광을 구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면 삶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 이와 반대 방향으로 나간 것은 소위 '실험 정신"이 농후하여 기존 질서를 따르지 않아도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시건방진 교만이 마음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하나님의 생각을 능가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할 것인가. 이런 교만은 실상은 그 자체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성경이 "바보[a fool]"라고 한 마디로 규정해 버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시 53:1].

창조주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악령들이 하는 짓거리들을 혼동하지 말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그 말씀인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따라서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고 그 말씀을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체의 것이 말하자면 악령들이 자기 이름으로 자기 영광을 구해서 나타내는 것임을 "눈 감고라도"[그 자세한 전말을 살피려고 할 필요도 없이] 정확히 짚어낼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는 것임을 항상 명심할 일이다.

간단명료한 것에 능력이 있다. 모든 복잡한 기계도 압축하면 간단한 원리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갈래로 분화하고 진화한 결과이다. 처음부터 단순 명료하지 않고 아리송하고 애매 모호한 것은 원래 그것이 진리, 진실에 입각하지 않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세상 종교의 모든 교리와 주장이 그런 것이다. 알쏭달쏭 애매 모호한 것은 그 이치가 심오해서가 아니라[그들은 그렇게 가장하여 말하지만], 빈 껍데기를 붙들고 겉으로만 돌다보니 일어나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이 세상을 죽음이라 하고, 인생들이 "죽은 자"라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인생고를 말하고 세상사가 모두 덧없다[無常] 하여 "모든 것은 생멸 전변(生滅轉變)하여 상주(常住)함이 없으므로" 욕심을 끊는 것이 자유요 지혜라 하는 불교의 주장도 세상을 죽음으로 보고 인생들은 죽은 자로 보는 것에 비하면 어정쩡한 표현이 된다. 검으면 검다고 해야지 희색이라 하면 희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검다고도 못하므로 양다리 걸치기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것에는 정확히 "희다' 하는 명백한 대답이 나올 수가 없다. 진리에는 흑백 논리밖에 통하지 않는 법이다. 그렇지 않고 각종 색깔로서의 채색일 때는 속임수요 거짓말이라는 증명이니, 거짓이라는 것은 원래부터 그런 매혹적이고 현란한 것으로써 그 속성을 가장하여 그렇게 표현하는 법이다. 다시 말해 "있다" 아니면 "없다", "그렇다"가 아니면 "아니다" 하고 말하는 것 이상으로 더 말하려 하면 검은 속셈을 말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마 5:37].

세상이 죽음이요 인간이 죽은 자이므로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아담이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었으므로 세상이 자연 죽음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을 지배함으로써 죽음의 권세를 쥔 자가 되어 있음은 당연하다[히 2:14]. 이런 실상을 유일하게 밝히고 있는 성경을 믿지 않으니 해결이 날 리가 없다. 딴에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결론에 이르려고 온갖 비이성적인 말을 동원하여 꿰어 맞추려 하나 단지 그 엉성함만 스스로 노정시키는 것뿐이다.

죽음의 세상을 탈피[해탈]하여 산 자가 됨이 급선무요 유일의 최대 관심사다. 성경의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탈출이 이를 처음부터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런즉 그로부터 진행되는 황야에서의 모든 사건들은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이 "광야 교회"[행 7:38]라 말함과 같다.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과 같이 교회로서의 그런 한 몸 체제를 당시 구성했다고 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전원 모두 무사했느냐 하면 그 정 반대였다.

글쓴이    비밀번호   
보이는 순서대로 문자를 모두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