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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영사운이란? (22) 등록일 2016.02.16 22:08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269

 

비율로 따져 엄청난 숫자가 탈락되어 성경은 역시 이를 가리켜 "하나님께서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셨다"[고전 10:5]고 명백히 한 것이다. 왜냐면 처음 믿음을 끝까지 견지하지[히 3:14] 못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으로 삶의 방향을 자기 멋대로 바꾼 탓이다. 우리가 얻은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곧 새로 창조하시어 다시 나게[출생하게] 하심으로 주시는 것이되, 오직 조건이 있으니 순종하기로 약속을 전제하는 다시 남[출생]이기에, 마지막까지 사람 사는 도리를 제대로 지켜 올바로 사람답게 사는 경우에 한한다.

즉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어야[:15]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에 부합함이니[롬 14:7-9], 머리를 위함으로써 한 몸의 체제를 유지하게 되고 그 한 몸의 일원으로서의 자기 위치를 유지 확보하는 것이 첫 창조 때부터의 영생이기 때문이다. 새 창조 역시 그러함은 성경은 밝히고 있음이다[고후 5:15]. 영원히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 몸되는 각 지체 각 부분으로서 "다시 남"이 가능하고 그 다시 난 "새 생명"을 유지 보전함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왜냐면 생명은 이 한 몸 체제를 이룸으로써만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한 몸으로서의 구조가 아니고는 생명 자체가 존립하지 못함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임과 같이 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담 부부를 죽음에 빠뜨림과 같이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가 자행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머리되시는 하나님께 절대적인 순종을 전제로 하고 주시는 영생이요 구원이다. 이렇게 순종하기로 약속하는 우리의 회개를 전제로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기에 회개의 세례다[행 2:38].

따라서 세례 받음으로써 과거의 죄가 용서되면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니, 성령을 주실 때도 다시 이 사실을 거듭하여 성경은 강조함으로써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주신다" 한 것이다[행 5:32].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하심은 아버지 친히 또한 아들로 말미암아 내게 임하여 오심이니 아들께서는 아버지와 하나로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영원히 함께 사시게 된다[요일 2:24/요이 1:9].

내가 하나님과 함께 산다고 하니 굉장하고 어마어마하여 도저히 수용하거나 납득하지 못할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나 실상인즉 나와 같은 사람으로 계시니 얼마든지 안심할 일이다[히 4:15]. 사람이 되어 계시므로 사람으로서 계시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그 당시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기거동작을 함께 하며 지내던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시니 이 곧 "임마누엘[Immanuel]"[마 1:23]의 의미다.

그리고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 하셨으므로 아버지께서 계심은 그렇게 사람으로 계시는 아들의 모습으로 아들을 통하여 내 안에 계심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렇게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가정하면 '한 사람'으로서의 모습이실 것이다. 다시 말해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시는 '한 모습'이시다. 하나님으로 계시나 사람으로 계시나 계시기는 일반이고 같은 의미라 할 것이나. 사람으로 계시니 막연하지 않고 구체적이고 그리고 현실적이다. 따라서 주님을 사랑하여 그 뜻이면 무엇이든지 행함으로써 그 뜻을 나의 뜻으로 삼고 이루겠다는 확고한 결의가 있는 이상 아무런 꺼림이나 거리낌이 있을 수가 없다.

§  우리의 인생사에서 병 고치는 것도 시급하고 인생사의 여러 가지 문제 해결하는 것도 화급하다. 그러나 더 절박한 것은 우리가 죽은 자의 영역을 벗어나 가장 먼저 무엇보다도 산 자가 되는 데에 있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산 자가 되고 나서 보는 데에 있다. 여타 모든 문제는 그 다음 순서다. 목적을 건강에도 두지 말고 이 세상 사는 것에도 두지 말고 기타 그 어느 무엇에도 두지 말 것이다. 그런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생명 자체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는 데에 있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 주신 것을 누리는 데에 있으니 그 누리는 방법이 오직 그 뜻대로 행함에 있고 그 뜻은 다름아닌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하심이다. 따라서 그 뜻을 따르지 않음은 불행한 삶을 자초(自招)하는 것이니 불행하게 살 바에야 영생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러므로 영생을 원한다고 내가 무엇을 함으로써 영생하는 줄로 당초부터 생각하지 말 일이다.

그런 것이 세상 종교다. 무엇이든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법칙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사람 삶의 법질서부터 먼저 배워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람 사는 법은 오직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하고 한 몸을 이룬 각 지체로서의 나의 이웃을 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고난을 수반하는 것이면 그 고난을 그대로 받는 것이 순리다. 그 고난을 회피하려 하는 것이 무리가 된다. 사는 길이 아니라 도리어 죽는 길이 된다.

이 세상은 현재 모든 피조물이 함께 고난 받는 때임을 성경이 분명히 하고 있다[롬 8:22]. 한 몸으로서의 생명의 원리를 따름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렇게 한 몸 체제에서의 사람 사는 법이 확실하고 착실하게 다져진 것이다. 왜냐면 나를 위해 죽으신 즉 나를 구원하신 이유가,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죽으시어 나를 위해 다시 살아나신 주인[나의 소유주]님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머리이심이 영구적으로 확립되었기에 전적으로 이 머리의 지시에 따라 살게 하려 하심에 있기[고후 5:15/롬 14:7-9/갈 2:20/빌 1:21]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유일무이하게 사람으로서 그리고 현재 이 세상에서 할 일이다. 이 외에는 의미 있는 일이 전혀 없다. 왜냐면 세상은 처음부터 시한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그 종막을 고하려는 시점에 있다. 때가 마지막 때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다.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니 그 때 끝이 올 것이다”[마 24:14] 하신 그대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듯이 이 진상을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이 당장 우리가 직면해 있는 원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이기고 이 세상에서 바르게 영원히 사는 삶에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인정하지 않는 이른바 “위대한 인물”의 모든 사상도 발상도 이 세상을 주름 잡고 있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아래 있어 그 속임수에 속한다고 해야 옳다. 성경에 어긋날 때 반드시 그렇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통제 아래 있지 않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고로 성경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말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벗어나는 것은 생명 밖으로 빗나가는 일이다. 로마서 7장을 소위 바울 사도의 개인적[믿음에 들어온 다음의] 체험이라 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현실에는 해당하지 않는 이상적인 기준을 말함이라고 우기고, 우리의 실생활이 그 기준에 미달함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요 따라서 자기가 자기를 위하면서도 그래서 “육신대로 살아도”[롬 8:13] 구원은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은혜로 얻는 구원>이라 선전하는 사이비 기독교 사상에 물들지 말 것이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독아(毒牙)다.

"이제 더 이상 죄 속에서 살지 말라, 더 이상 어둠 속에서 살지 말고 빛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라"는 소리를 아무리 해도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롬 14:7-9/고후 5:15]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된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은 각자 해석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으로써 자기를 부인한다는 의미는 그 누구도 다른 해석을 붙일 수 없으니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인 줄 알기 때문이다.

죄를 짓지 말라고 한다면 살인, 도둑질, 간음 등 드러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줄로 일반적으로 알지만, 성경에서 "죄를 짓지 말라"[요일 2:1/3:6-10/5:18/고전 15:33,34/벧전 4:1/히 2:14,15] 할 때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을 의미하므로 완연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산중에 들어가 좌선하면 명상하고 일절 남에게 해를 끼치기커녕 사람 중에 끼이어 참견하는 일도 마음 상하게 하는 일도 일절 없어도 그렇게 하는 목적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심판 받기에 충분한 죄요 악인 것이다. 왜냐면 자기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 때에는 결국 어느 때든지 자기중심의 해악(害惡)이 드러나게 마련인 것이다. 모든 악의 뿌리가 자기중심이기 때문이다.

"바/영/사/회"[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운동][4]
  
인간의 모든 사사로운 욕심을 합리화하는 그런 "억지 해석"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 "바르게 영원히 사는 삶" 운동은 시급히 요청되는 시대적 요망이 되어 있다. 인생 사는 것과 구원 얻는 것[혹은 영원히 사는 것]을 별개로 구분 지어 독립해서 생각할 일이 아니다. 사는 것 따로 있고 구원 받는 것 따로 있지 않다. 바르게 살면 즉 사람답게 살면 다시 말해 조물주 하나님께서 애초 피조물을 창조하신 대로 그 원래의 뜻을 따라 살면 그것이 곧 영생하는 것이다. 

인간 구원이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말할진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사는 것이 영원히 사는 것이 되고 그것이 곧 구원이 되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인간이 지극히 비정상적으로 살아왔음을 입증함이다. 비정상으로 살아왔다면 이제 정상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죄를 지음으로써 죽음이 왔고[롬 5:12] 그래서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다면,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 된다.

성경이 “죄의 몸”[롬 6:6]을 말하고 “육신”[7:5-8:13]을 말함이 그 때문이고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8:13]고 경고하고 “그런즉 우리가 어찌 죄 가운데 살겠느냐,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겠느냐”[6:1,2] 하고 강하게 부정하는 것이 이와 같이 그 사유가 분명한 것이다. 각종 사도들의 편지 가운데 나타나 있는 모든 내용이 이와 일치한다.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고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라"[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는 것이니 곧 사람답게 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정상으로 사는 것이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 그 이유는 인간을 창조하신 그 첫 창조가 인간 스스로에 의해 망가졌고 한번 망가진 것은 조물주 하나님으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이 폐기하는 수밖에 없으므로[이것이 하나님의 일사부재리다] 인간 자신의 노력은 물론 하나님 쪽에서도 현재의 상태대로는 인간을 다시 정상적으로 되돌리실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셔서 피조물 세계를 지으신 것은 원리원칙에 의해서이고 이 원리원칙을 무시하고서는 이 피조물 세계가 존속될 수 없기 때문에 이 원리를 어긴 인간은 그 어긴 만큼의 대가를 고스란히 수용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음이다.

원리원칙을 어긴 인간을 그대로 수용하여 살 길을 열어 준다면 그것이 선례가 되어 원리원칙을 어기고도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피조물들이 하게 됨으로써 뒤죽박죽이 되어 버릴 것이기에 그렇다. 고로 이런 원리원칙을 따르고 지키지 않으면 우주 자체가 존립될 수가 없다. 하나님은 결코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무섭도록 정확하게 운행되어 가는 자연법칙의 모습이 바로 이를 가리킨다.

인간 역시 예외가 아니니, 그래서 범죄하였으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 하는 것이다[롬 5:12]. 그래서 이전 것은 죽음을 통해 완전 종결 처분하고 새 창조로 말미암아 인생 삶을 새로 시작하게 하신 것이다. 때문에 친히 사람이 되셔서 나를 새로 만드시는[창조하시는] 작업에 착수하시고 이를 완수하신 것이니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부터 모든 인생은 새 시작, 새 삶, 새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고 이렇게 될 때 인생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게 됨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이 뜻을 따라 지금부터 살면 영생은 절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뜻을 따라 살면 영생이라기보다,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영생의 내용이니, 영생을 얻었으면 얻은 그대로 '사는 것'을 말함이고 그렇게 뜻대로 살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는 증거가 되고 이 경우 영생을 얻은 적이 없다고 말해야 정확하다. 그래서 명칭을 붙여 “회개운동”이라 하는 것이고, 뜻은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살자는 것이다.

바르게 살면 그것이 인생 삶이고 영원히 사는 것이니[원래 처음부터 사람에게 '산다'는 것은 영원히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구원인 것이다. 구원 얻는 일 따로 있고 인생으로서 사는 것이 따로 있을 수 없음을 다시 강조한다. 따로 구분할 이유도 없고 구분되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무턱대고 만드시지 않았다. 반드시 목적이 있어 만드셨다. 그래서 그 목적대로 사는 것이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 피조물로 만드신 방안이 확정되어 천하 모든 사람이 이 새 창조를 따라 살라고 선포하신 이상 그 뜻대로 살아야 당연하다. 그러면 영원히 사는 일은 저절로 되는 것이다. 영원히 살기 위해 지금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새 창조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심을 따라 사는 것, 새로 창조하신 대로 사는 것이니 구원을 목표로 사는 것이 아님이다. 문제는 이 뜻대로 사는지의 여부가 기계적으로 자동적으로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곧 의지로써 좌우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 뜻대로 사는 것을 자연계의 동물들처럼 기계적으로 정해 놓으시거나 장치해 두신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우리 마음의 결정으로 이루어지게 하신 것이다. 즉 사랑함으로써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전적으로 달린 것이다. 왜냐면 그 '사랑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하나님이시라고 해서 우리 마음에 심어 주실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아담을 창조하셨지만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음으로써 죽음에 이른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사랑하고 좋아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인간[아담]을 죽게 하시려고 만드신 것은 아닌 것이다. 그 스스로 죽을 일을 하니 하나님도 이를 막지 못하심이다. 막으셔도 안되고 막아서 될 일도 아니다.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이하 악령들도 그 스스로 정한 운명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처음부터 멸망의 운명에 들어가도록 만드신 것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이 처음부터 우리의 ‘새 창조’[구원]도 오직 각 사람의 마음에 완전 일임하신 것이니 그래서 믿어야 구원되고 믿지 않으면 그림 속의 떡일 뿐이다.

이것이 자유의 의미다. 우리를 '자유인'으로 만드신 것이다. 자유인으로 만드셨으나 인간[아담] 스스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얽매이기를 결과론적으로 바랐으므로[왜냐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에 동조하였기에] 그래서 그에게 매인 노예가 되어 있었지만, 이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자유인으로 되돌아온 것이다[요 8:32,36/고후 3:17]. 이성적(理性的)인 피조물에게는 자유는 생명과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다. 왜냐면 사랑의 핵심이 자유 의지에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 개념을 사람들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무한한[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운명까지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니 이 이상 가는 자유가 없다] 독립성만 마음에 두고 그와 더불어 마땅히 따르는 '무한' 책임은 간과하기 때문이다. "무한 책임"이란 말은 자기의 영원한 운명까지 자기 스스로 좌우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무조건 기뻐 뛰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니 "두렵고 떪"[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이 따르기 때문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항상 양면성을 균등하게 골고루 인식함이 지혜다. "선 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함과 같다.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넘어지는 것 역시 동시에 생각함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요일 4:8] 사실과 동시에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을[히 12:29] 동시에 생각함이다. 구원을 받았음을 확신함과 동시에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룰 것을 생각함이다. 빛은 입자라는 사실을 생각함과 동시에 전혀 다른 성질로서의 파동이라는 사실을 생각함과 같다. 높음이라는 개념을 떠 올릴 때는 반드시 낮음이라는 정반대의 개념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제대로 인식할 수 없음과 같다.

구원 얻는 믿음도 우리 각자의 마음에 달린 것이고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지 여부도 우리 마음에서 좌우된다. 그 뜻을 행하는 것이므로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지 여부다[요 4:34].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심을 가리켜 세상에 우리를 보내심[20:21,22] 즉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심과 같이" 보내심이라 하셨으니 곧 그 뜻을 행하게 하심이요 그 일을 온전히 이루게 하심이다[4:34]. 따라서 이 뜻을 행할 의지가 없는 사람은 아예 믿을 수도 없거니와 구원부터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세상 지배자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는 "하나님의 이런 뜻을 행한다"는 의미를 쏙 빼어 버리고 믿음의 의미를 날조하여 전혀 엉뚱한 것으로 만들어 “믿음”이라 하여 세뇌를 시키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배도(背道)"[살후 2:3]의 실상이다. 이런 인위적으로 된 "믿음"을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믿음으로 착각하여 그 스스로를 구원 얻은 사람이라고 자기 기만을 하고 있는 이들이 오늘날 부지기수다.

그것이 진실로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라 가짜라는 증거는 그렇게 “믿은” 다음에 전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기색이 없는 것으로써 증명된다. 씨라고 해서 땅에 묻었더니 싹이 나지 않으니 그 씨는 자연 그대로의 씨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 모조품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믿음이면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것이 없고 오히려 죄를 지어도 그래서 여전히 죄인으로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은 받아 있다는 어이없는 거짓말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사람을 농락해도 분수가 있지 이럴 수도 있는가 하고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인간 구원은 새 피조물됨으로써 이뤄지는 것이고 새 피조물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조물주의 독자적인 창조의 행위인 까닭에 피조물로서의 우리가 관여할 아무 것도 없다. 손톱만큼도 없으니 하나에서 백까지 모두 조물주 홀로 이루신 창조의 역사이므로 우리는 단지 이 사실을 믿으면 되고 받으면 되므로 "믿음으로써 은혜로 받는 선물로서의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의미를 엉뚱하게 내 스스로 죄인으로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 얻는다는 망상(妄想)으로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아담은 죄를 지어 죽음에 이르렀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왜 지금 멸망의 운명에 있다는 것인가. 불공평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흠잡고 트집잡기를 좋아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를 두고 좌시하겠는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도 그럴 경우 항변할 것이 아닌가. 항변할 수 없는 것은 말 그대로 항변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아담이나 그 누구든 범죄하는 자는 죽기로 되어 있는 일관성에서 하나님이 한 걸음도 비켜 나시지 않고 철저히 원칙 그대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 피조물을 다루시고 있는 까닭이다.

그들의 무리한 주장대로 하면, 하나님의 속죄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 사실을 근거로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라 한다. 또 말하기를 과거에는 전적으로 죄가 좋아서 저질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고 최대한으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짓는 경우가 있으므로 그래서 죄인이라고 말한다. 죄가 무엇인지부터 먼저 성경을 통해 정확히 알고 나서 무엇이든 논할 일이다.

과거에 죄가 좋아서 지은 사람은 처음부터 구원에 해당되지도 않는다. 해당부터 되지 않는 사례를 여기에 끄집어내어 말할 필요는 없다. 좋아서 하는 것과, 주위 분위기에 젖어 그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자기 욕심을 따라 행한 것과는 다르니 혼동하지 말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 자"[요 3:19,20]와, "빛으로 오는 진리를 따르는 자"[:21]로 구분되는 것이다.

후자에 속하는 사람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내 속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되 내 육신이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체험하는 이들이다[롬 7:24]. 이런 사람을 위해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그런 내부 갈등으로부터의 완전 자유, 해방을 말하는 것이다[8:2].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데 대한 면죄부를 주려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그렇게 되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인간을 하나님께서 차별하시는 것이 된다. 또 그렇게 되면 모든 인간은 자동적으로 구원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니 여기서는 또 사람마다 차별하시는 것이 된다. 이런 모순점이 명백하기 때문에 또 억지 말을 만들기를, "구원 받는 자는 우리는 알 수 없는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정당성이 의심 받을 수 없는 특정 사유[이것을 그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 한다]로 인해 처음부터 구원 받을 사람으로 택해 놓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만을 구원하신 결과"라고 강변한다.

말이야 얼마든지 만들면 되는 것이다. 이런 “말씀의 혼잡”[고후 2:17]은 초대교회 당시부터 있었다. 성경은 귀에 달면 귀고리 코에 걸치면 코걸이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귀고리면 처음부터 귀고리요 코걸이라면 처음부터 코걸이일 뿐이다. 설명이야 어찌 되었든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아무 문제가 될 리 없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서도 믿는다고 하기 위해 그런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우리가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에 한하여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신다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상식 수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식을 벗어난 그 어떤 말씀도 그 어떤 일도 아니하신다. 그래서 상식을 통해 사물을 판단하도록 인간을 만드신 것이다. 우리의 상식대로 판단하지 못할 것이라면 그러면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사람이 없을 것이니, 이렇게 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아무런 소통도 교제도 불가능하게 된다. 그럴 바에야 애당초 상식적 판단력 자체를 우리 인간에게 주시지를 않았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욕심을 부리는 것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죄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그런 어쭙잖은 변명의 괴상야릇한 면죄부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죄 짓는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요일 3:8] 위함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심은 “다시는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하려 하심”[고후 5:15/롬 14:9] 다시 말해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심이라고 명백히 한 것이다.

여기에는 면죄부 따위의 궁상맞은 의미란 찾아보려야 볼 수가 없다. 그런 것은 오직 인간을 죽음에 빠뜨리려는 해묵은[에덴낙원에서 이미 써 먹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술책이요 속임수일 뿐이다. 그런 까닭에 어찌 하셨는가, 죽을 자[아담]는 철저히 죽음에 처해지게 하신 것이다. 가차없는 죽음이다. 인정사정도 없다. 여기에는 추호의 자비도 없는 무자비다. 오죽하면 그리스도 친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셨으리요.

'나와 함께' 그리스도를 죽음에 처해지도록 버려 두신 사실에서, 그렇게 나의 위치에서 부르짖으신 것이다. 그리스도 친히 나를 안으시고[아기를 안은 엄마처럼] 그 죽음의 세례, 죽음의 물 속으로 뛰어드신 것이다. 아기는 어차피 죽는 몸이고 엄마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아기를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실 때에는 여전히 아기를 꼭 껴안은 그대로의 모습이셨다. 그래서 엄마 덕분에 아기도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이제 영원히 그리스도의 모습은 아기를 안고 놓치지 않는 엄마의 모습 그대로다.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여 오심도 바로 그 모습이시기 때문이다. '엄마'로서 어찌 그 '아기'를 떼어놓으실 수 있으리요. 아기를 위해 목숨까지 버린 '엄마'였지 않았던가. 고로 영원히 불가분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나의 하나 됨이다. 내가 성령을 받아 모실 때 이와 같은 사실이 구체화, 현실화하는 것이다.

아들과 하나 되어 계시는 아버지이시므로 아버지 친히 바로 그렇게 죽음을 맛보신 아들 안에 계셔서 아들께서 당하신 그 모든 죽음의 고난을 자초지종 다 함께 당하셨으니 곧 아들의 모습이셨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의미이시다. 즉 아버지 친히 아들을 통해 그와 같은 모든 일을 치르시기 위함이었다. 아들을 가리켜서도 성경은 “아버지 품속에 계신다” 하였다[요 1:18].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의미가 바로 그와 같으니 곧 그리스도 친히 내 육체를 통해서 그런 '엄마'로서의 남은 일을 하심이요 구원 받아 마땅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하심이다. 이 경우 그 다른 사람은 '아기'요, 엄마의 고통은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친히 나의 고난 받음을 통해 나타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고전 7:32/고후 5:9/살전 2:4/4:1/골 1:10/엡 5:10] 해 드린다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가 나의 고난 받음을 통해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죽든지 살든지 기꺼이 주님을 위해 산다[롬 14:7-9]. 더 다시 나 자신을 위해 살 그 나 자신이 없다[고후 5:15]. 죽어 사라졌다. 죽어 땅 속에 묻혔다. 장사 지내졌다.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없으니 당연히 주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주님 위해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라 한 것이다[고후 5:15].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으니 아기에게는 엄마보다 가까운 존재는 세상에 없다. 엄마 외에 그 누구도 없다.

그래서 “하늘에서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 외에 내가 사모할 분이 없다” 하였다[시 73:25]. 엄마가 아기를 위해 모든 일을 하니 아기가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은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성경은 “순종”이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함도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 되는 관계를 지칭하는 것이다.

순종을 하면 무사태평이다. 그러나 순종하지 못하도록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우는 사자와 같이 호시탐탐 우리로 말하면 밤잠도 자지 못할 정도로 노리고 있는 것이다[벧전 5:8].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룸이다. 순종하지 않음으로 오는 결과가 너무나 엄정하여 일면 혹독하기까지 한 것이니, 아담의 죽음에서 이것이 실증(實證)되었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이하 악령들의 멸망의 운명에 처해진 것으로 확증된 것이다.

순종하지 않을 때 앞에서 설명한 엄마와 아기 관계는 한바탕 꿈과 같고 물 거품과 같이, 단지 환상(幻想)이었던 것처럼,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다. 왜냐, 내가 나 자신을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살 때에는 더 다시는 엄마 품의 아기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발로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롬 6:6/10:29] 괴물의 형상으로 바로 내 자신이 되어 버리는 조화를 부리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품속의 아기가 악마로 변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새 창조를 믿고 그 이루어진 사실대로 살아가고 생활해 나가면 그것이 곧 구원이니 우리가 구원이라 해서 특별히 취할 행동이 필요하지 않다. 특별히 종교라는 범주를 정해서 특화[特化]할 이유가 없다. 새 창조에 따른 삶, 생활 자체가 구원이다. 그러므로 '사는 것'이요 생활하면 되는 것이지 특정한 날을 정하고 특정 장소를 택해서 거기서만 어떤 신을 위한다, 경배의 대상을 위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 결단코 정상이 아니다.

새 창조를 따라 살면 되므로 그 '사는 것'이 '정상'인 것이다. 우리 스스로의 공과 노력을 들여서 우리가 영생 즉 구원 얻은 것이 아니니 우리를 영생하도록 새롭게 창조하시는 과정을 밟아 다시 출생하면 되는 것이고 그 과정을 마쳤으면 또는 마치는 과정에서 그 규범을 따라 살면 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쉽게 설명을 시도해도 같은 내용, 같은 말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새 창조에 의해 이제 인생이 영원히 사는 것이 되었는데 영원히 살면 무엇을 하나, 행복하게 살아야 삶이라 할 것이다. 조물주 하나님께서 본래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는 행복하게 살 것을 목표하고 모든 것을 지으신 것인데 이 원래의 뜻을 피조물이 어김으로 해서 불행이 닥쳤고 이런 죽음이 임한 것이다. 그러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무엇이냐. 한마디로 사랑이니 한 몸 체제 아래에서의 하나 됨이다.

사랑 없는 이 세상에서 사랑이 없음으로 인해 갖가지 불행이 닥치는 것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신물이 나도록 목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욕심, 자기 집착 또는 자기중심이 이 모든 인간 불행, 인간고, 인위적인 해와 악과 죄의 근본 뿌리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물주 하나님의 새 창조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인생 구원에서 이 자기중심을 척결하는 것이 영원히 사는 것과 마찬가지의 중요 주제가 되는 것이야 당연하다.

당연히 이 문제를 하나님께서 완전히 해결해 주신 것이다. 즉 자기 부인을 말하는 것인데 각자 이 자기 부인이 온전히 이루게 되면 자기중심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은 명약관화다.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남을 위해 사는 것이니 이미 설명한 대로 그 이상으로 이상적인 인간 삶이 없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의 이상향의 행복한 삶이다. 행복의 조건은 이것뿐이다.

개인적인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기를 생각하지 않고 남을 자기처럼 생각하기를 피차 그렇게 하되 항상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의 지시대로 하면 문자 그대로 한 몸으로서의 삶이 되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 각자가 한 몸의 한 지체의 한 부분이 되어 있으면 모두가 자기 몸이므로 남을 즉 이웃을 해치거나 악하게 할 이유가 없고 할 수가 없다. 이보다 더 확실한 안전장치가 있겠는가.

그래서 자기 부인을 않으면 아예 처음부터 천국 즉 그 이상향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한 몸이라는 사실을 토대로 하면 그것이 바로 행복한 삶의 확실한 보장이 된다고 했지만 한 몸으로서 원활히 작동하는 데에는 머리의 역할이 중요하다. 머리가 누구냐, 이에 따라 모든 것이 또한 결정된다. 고로 누가 머리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고로 이 새 창조에서 예수 그리스도 친히 그 머리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 문제가 없다. 몸은 머리의 지시대로 움직인다. 즉 머리의 이름으로 서로 교류, 교환하는 것이니 이는 당연하다.

우리가 머리와 몸의 관계를 잘 알지만, 머리의 부재[不在] 또는 부실(不實)은 온 몸 각 지체의 혼란, 혼돈을 야기시킨다기보다 일체 작동 중지가 되어 버린다. 총 스톱이 된다. 따라서 신체 각 지체 각 부분에는 머리와 직결된 신경조직이 되어 있어 여러 지체를 단 하나의 유기체로 통합, 조화시키는 것처럼 각자가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영원한 선물로서 받아 모시기 때문에 가장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즉 한 머리 안에 있는 한 몸의 조직이다.

때문에 각 사람은 자기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와 하나를 이루어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로 자기 이웃을 사랑함이니 왜냐면 하나님께서 나와 똑같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차원에서 이웃을 사랑하므로 자기 자신의 호, 불호나 취사선택이 용납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는 개념에서 이웃을 대하므로 공평무사, 항구여일한 사랑이 가능하다.

요한 사도가 말한 대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요일 3:16] 한 그대로다. 즉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가리킴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그리스도를 머리로서 성령으로 모시지 않는 이는 이 한 몸됨의 적용을 받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그 어떤 한 몸의 이치를 외치고 사랑을 논해도 그런 것은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생명의 원리원칙을 사랑하여 고집불통, 외고집, 고지식하다느니 늘품 없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어도 좋으나, 그런 중에서도 피동적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주인 의식에서 행하는 것을 말함이다. 즉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겉옷까지 필요하면 벗어 주고 누가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 대며 억지로 5리를 가자 하면 그와 10리도 동행해 주는[마 5:39-42] 주인으로서의 여유 있는 재량권을 행사함이다. 한 마디로, 사랑의 여유요 능력이다.

그리고 생명의 거룩하고도 엄정한 법칙을 가지고 가볍고 헤픈 마음으로 노닥거리면 절대로 안될 일이다. 괴력사(怪力士) 삼손은 들릴라와 노닥거리다가 뼈에 사무칠 회한(悔恨) 거리를 만들어 우리에게 교훈이 되고 있다. 주님의 말씀대로, 그렇다면 "그렇다", 아니다면 "아니라"고 명확하게 자세를 정해야지[마 5:37] 어정쩡한 몸가짐으로 처신하다가는 반드시 삼손처럼 될 수밖에 없음을 명심할 일이다.

그러므로 "바르게 영원히 사는" 운동도 반드시 그리스도 구원의 복음[희소식]을 믿어 그 삶의 이치로 살아야 가능하므로 "회개하라"는 말을 필수적으로 덧붙이게 된다. 이 머리와 몸 관계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는 성경의 이 이치는 세상에서도 말하는 '우리' 의식 곧 공동체 의식이므로 절대로 생소한 의미도 알아 듣기 힘든 것도 아니다. 이 세상 삶의 모든 규범이 이 공동체 의식을 고양함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법질서가 그러하니 아무리 자기중심의 불법이 판치는 이 세상이라 하더라도 그 질서와 존립에는 같은 규범에 의해 규율되고 관장되는 것은 당연하니, 이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무릇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 질서를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 자체가 죽음이므로 본질은 갖추지 못하고 그 형상만 지니고 있음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런 '형상'만으로서의 결과라 하더라도 그 나타나는 이해득실의 차이는 임란 당시의 이공 순신의 삶에서 그와 같이 선명하게 부각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고로 이와 같이 명백히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와 같이 살면 그것이 구원이니 구원을 생활화함에는 특별한 종교 의식이나 행사를 요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생활하면 되는 것이다. 그냥 산다고 해서 이전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므로 그래서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확립된 사랑과 생명의 법칙을 따라 사는 정상적인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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