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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1체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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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영사운이란? (23) 등록일 2016.02.16 22:11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21

바/영/사/회-"[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그리스도 구원"의 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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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구원의 골자

그런즉 자기의 구원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어 있는 바탕에서의 삶이니 따라서 이제는 이웃의 구원을 위해 그 근본적인 안녕(安寧) 다시 말해 영생과 관계된 일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우리의 구원 문제가 완전 해결되었다는 것은 죽으실 이유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친히 죽으셨고 이 죽으심이 따라서 나를 위한 죽으심임을 성경이 밝혀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 죽으심이 바로 나의 역사적 현실로서의 죽음인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 죽으심이 어째서 나의 죽음이냐 하면, 그렇게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후 성령으로 내 안에 '육체'에 '영혼'처럼 '몸'에 '머리'처럼 되어 오시어 이제는 나와 영원히 불가분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영혼과 육체를 나눌 수 없고 몸과 머리를 나눌 수 없음과 똑같은 이치로 이와 같이 계심을 둘이 하나 됨 즉 "한 영으로 합[연합]함"이라 하는 것이다[고전 6:17]. 바로 이와 같이 나와 하나되심으로써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 그 다시 살아나심이 나의 부활이 되시기 위해 그렇게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나를 위해 부활하셔야 하는 것은 다시 말해 그렇게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으심만 나를 위하신 죽음일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시지 않으면 우리 구원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15:14-18], 다시 살아나시지 않으면 나와 그와 같이 하나되실 수 없고 그리 되면 그 죽으심이 나 자신의 죽음이 절대로 될 수 없는 까닭이다. 소위 "그리스도의 나 위한 대신 죽으심"은 이와 같이 나와 그리스도와의 하나됨["한 영으로 합함"-6:17]을 말하지 않으므로 우리의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15:14-18] 공리공론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으면 나와 하나가 되실 수 없음이다. 여기서 이른바 "대신 죽으심"의 맹점이 드러나는 것이다. 일단 "우리 대신하여 죽으시면", '다시 살아나시는 것'과 '우리 구원'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성경이,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을 것"[고전 15:14,17,18]이라고 말할 까닭이 없다.

그러면 현재 내가 구원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있으면 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처럼 되지는 못하고 현재의 이런 나약한 자연계에 속한 육체 그대로냐 할 것인데,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시는"[요 20:21,22] 것이 바로 나의 구원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져 있음과 동시에 이 세상에 함께 와 있기 때문이다.

왜냐면 그리스도 친히 하늘에 그렇게 앉아 계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동시에 성령으로 이 세상에 임하시어[행 2:3] 지금까지 교회의 머리로서 활동 중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역시 그리스도와 이제는 연합하여 하나가 되어 있으므로 이런 동시성을 지니는 것은 당연하다. 즉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육신으로는 하늘에 계시고 그 영 곧 성령으로는 이 땅에 계심과 같이, 나는 그와는 반대로[그래야 대칭(對稱, 相稱, 對立)이 되는 것] 나의 영으로는 하늘에, 나의 육체로는 이 지상(地上)에 있음이다.

그리스도와 나의 불가분성으로는 그렇게 되어야 마땅하다. 나의 영으로는 내가 하늘에 있다는 것은 사실 그대로이요 절대로 허구(虛構)가 아니니, 그리스도의 영께서 현재 나와 "한 영"[고전 6:17]이 되시어 내 육체 안에 계시니 하나님 우편에 육체로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 역시 내 안에 계시는 성령과 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안에 계시는 모습이나 하늘에 계시는 모습이시나 영[성령]의 측면에서는 똑같은 동일한 성령이시고 한 모습이시고 하나도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라 하는 것이니, 하나님으로서는 온 우주 만유에 충만해 계시므로 즉 육체 같으면 우주에 꽉 차 계시는 것과 같은 모양새이시기에 하늘에 따로 계시고 땅에 별도로 계시는 일이 없으시다. 육체이시라면 한 육체로 하늘과 땅 위에 꽉 차 계시고, 영이시니 영[성령]으로 그렇게 꽉 차 계시기 때문이다. 육체인 인간 같으면야 시공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하늘에 있으면 땅에는 없고 땅에 있으면 하늘에는 없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것이 없으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이시라 하신 것이다[요 4:24].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오신 것과 같은 이치로 그리스도 친히 우리 각자를 세상에 보내시는 것이 우리 각 사람에게 성령을 주심이라 하셨으므로[요 20:21,22],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는 아버지께서 친히 하실 일을 아들께서 하시고 그 친히 주실 모든 말씀을 아들이 하시게 하심이었다. 이 사실은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 친히 하신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양면성 즉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자 하나님되심은 아버지와 하나되심에서 확고히 되어 있는 것이었으니, 이는 우리 각자가 현재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는 위치에서 위의 설명과 같이 내 영으로는 그리스도[의 육체]와 하나되어 하늘에 있고, 내 육체로는 성령과 하나되어 즉 성령을 모시고 이 육체 가운데 있음과 똑같은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되어 있는 이치를 따라[17:22]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심이라 하는 것이다.

즉 성령을 모심으로 되었으니 "성령으로 출생함"[3:5,6]이요 따라서 이전 육체로 출생함과는 달리 "다시 출생하는"[:3] 것이요 이런 일이 과거에는 일절 없었으니 새로운 하나님의 창조 역사(役事)라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친히 사람이 되신 아들로 말미암아 자기 일을 하신 것과 같이[요 14:10], 이제 나의 경우에도 그리스도 친히 나를 통하여 자기의 남으신 일을 하시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운다 함이다[골 1:24].

그러니 당연히 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 하는"[빌 3:10,11] 것이니, 왜냐면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계실 때 하시던 일이었으므로, 그 남으신 일을 우리가 이루는 것이므로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셨던 그 발자취를 따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일을 함이다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나와 함께 일하시고 나의 육체를 통하여 이렇게 일하시니 성경이 이를 가리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고후 6:1] 함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고[골 3:3] 우리가 "죽었다"[:3]고 하는 것이다. 왜냐면 이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을 때의 모습과 동일한 것이고 동일하실 수밖에 없으니,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우리 위하여 죽으시게 되어 있는 "죽은 자", 죽기로 작정되어 있는 자 즉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오셨으나, 하나님으로서의 영원하신 생명은 하나님[아버지] 안에 하늘에 감추어져 있는 모양새를 띠셨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빌 1:29]을 견디며 나를 세상에 보내신 그리스도 뜻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온전히 이룸으로써 그 결과로 부활에 이르기 위하여,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이니,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3:12-14] 함과 같이 우리도 달려가는 것이 현재 위치인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는 것도 아니고 우리 구원 받음을 인하여 받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 친히 우리 육체를 통하여 그 남은 일 곧 사람 살리시는 일을 친히 이루시도록 함에 유일한 목적이 있는지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1:29]임을 명시한 것이다. 이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을 "은혜"[:29]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음"[롬 8:17]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 받아 당당히 현재 하나님의 친 아들들이 되어 있지만 이런 연약한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그대로 지니어 핍박자가 핍박하면 우리 육체는 고통을 받고 죽음의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는 것이므로, 이렇게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고난 받기 위한 목적임이 명백해진다. 살기 위함이 아니라 일하기 위함이요 삶의 낙을 누리기 위함이 아니라 그 반대인 고난을 받기 위함이라는 것이 대낮 같이 밝혀져 있지 않은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육체를 가지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처럼 아무쪼록 편하고 안락하게 살아 삶의 낙을 누리려 하고 더군다나 이것을 무엄하게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그렇게 된다"고 선전하는 것은 구원 얻는 믿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미친 마음"[전 9:3]이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미친"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기커녕 구원 얻게 하실 리도 만무하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서 그와 같이 죽음 가운데 계시어 하나님의 일을 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현재 하나님의 은혜로 어느 모로 보나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들이지만[요일 3:1,2],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밟아 가신 발자국을 따라 즉 같은 모양새로 인생 고난을 통하여 거룩하고 갸륵한 하나님의 일을 함이니 이 은혜 지극히 망극하시다. 이상이 바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아주 산뜻하게 명료한 골자다.

이 세상은 원래 인간의 범죄 여파로 구성되어 있는 죽음의 영역이고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 자체가 죄의 결과 곧 죽음의 모습이므로 우리가 가히 더불어 함께 하여 살 만한 살 터가 되지 못하는 것임을 다시 강조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생명의 낙을 누리며 사는 곳이란 오직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천국 즉 신령한 세계, 영계다. 처음 그 신령한 세계였던 에덴낙원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의 결과 우리는 잃어 버린 것이다.

이런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는 감히 그 곳에 들어갈 엄두도 못내는 비참한 결과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계심으로써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기반이 확고하게 다져져 모든 문제가 이 새 창조에 의해 일거 소멸되고 또한 해결된 것이다. 그러므로 믿을 때의 세례 받음과 믿은 후 교회를 구성하는 구성원으로서 함께 모일 때 베푸는 성례[성찬예식]가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사람이 다소간에 모여 구성되는 교회이므로 영적으로나 또는 재정적인 일로 그 일을 전담하는 일꾼이 필요하여, 장로[영적인 인도]와 집사[재정적인 업무 전담]로 구별하여 봉사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섬기는 자로 있을 따름이다. 그 외에는 특이한 아무 것도 없다. 가급적이면 종교 행위, 의식 같은 것을 멀리하는 것이 우리의 기본 입장이다. 세상 종교와 같은 인상을 세상에 주는 것을 적극 회피함이니 이런 것은 위에서 설명한 구원의 차원에서 인간답게 사는 삶에 방해가 되고 지장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교회라 자처하면서 이 모든 요구,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더 이상 거기 머물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모두 그런 종교 형태를 버리란 것도 아니다. 선용하고 활용하면 되는 것이지 어떤 고착화한 것은 없으니 만일 그런 고정된 무엇을 새로 고집한다면 그 역시 하나의 종교 형태가 되기 때문이다. 종교 형태를 취하든 않든 구애됨이 없이 여기서 지금까지 역설해온 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을 따라 "생활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활하는 것을 방해하고 종교적인 의미를 강조하여 종교로 남아 있기를 고집하는 그 어떤 것이든 그것은 종교 형태이므로 그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판정하는 것이다. 인생 구원은 그 구원 받은 사실을 따라 지금부터 영원토록 인간으로서의 정상적인 삶을 살고 생활하는 데에 있는 것이지, 구원을 얻기 위한 특별히 노력하는 세상 종교와 같은 것이 아님을 거듭 강조한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기로 작정하는 사람들이 모이기로는 수천 명도 좋고 수백 명도 좋고 수십 명도 좋고 단 둘 또는 셋이라도 좋다.

모이는 숫자가 문제 아니라 그렇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때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핵심이 되시는 까닭이다. 고로 "내 이름으로 두서넛이 모여도 그 중에 내가 있다" 하셨으니 바로 그것이 교회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계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께서 계시니 그리고 모인 형제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의 제사장들이요 동시에 희생 제물이니 그리고 각자가 다 성령이 계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므로 모든 조건과 의미는 다 갖춘 것이다.

'바영사회' 운동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여금 종교 형태 또는 그 굴레에서 자유롭게 되도록 하여 그 순수성을 지키도록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일주일 일일만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1주 7일 모두를 하나님께 바친 날 또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서의 원래 의미로 돌아간 삶으로 사는 것이요, 십일조 즉 수입의 10할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백 퍼센트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요 나의 것이란 존재할 수 없음을 인정하기에 이를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종교 생활을 하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말하는 그런 종교 활동의 속박에서 벗어나기커녕 오히려 더 엄격하고 엄중한 측면이 있다 할 것이다. 주님께서 구원의 희소식을 전파하실 때 "살인하지 말라 하였으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가 살인자로서의 사형 감"이라 하심과 같다.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 즉 삶의 낙을 누리고려는 것부터가 허용되지 않는다. 허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각자 스스로 판단해도 너무나 무의미한 것이 이 세상 살고자 하는 마음이기에 스스로 그런 마음을 먹을 생각부터 않고 사갈시(蛇蝎視)함이다.

자기가 원해서 하지 않는데 누가 무어라 하리요. 누가 막을 것인가. 그러므로 처음부터 이 세상에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우리의 '바영사회' 운동이 사형선고와 같은 내용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자기 부인하라고 하실 때 듣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 당시 많은 제자들이 물러가고 다시는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았던 것과 같다. 그러나 실상을 말하면, 우리 인간은 범죄로 인하여 이미 사형선고 아래 처해 있는 위치다. 이 실상을 모두가 모르기 때문에 "아무나 누구든지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요 6:44,65]고 경고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 그리스도 안에서의 산 자는 여전히 그 사형 선고 아래 있는 처지가 아니라,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죽은 자들의 그 죽음에 동참하고 있는 위치로서 의미로 따지면 실로 하늘과 땅의 차이다. 쉽게 말하면 함께 여러 사람이 물 속에 빠져 있다가 내 자신 먼저 구출된 다음에는 그 나머지 물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건지기 위해 물 속으로 다시 뛰어 듦과 같은 형국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물에 들어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하나는 조난자요 다른 하나는 구출자이다. 구출 작전에서 여차하면 구조작업에 나선 자 자신이 목숨을 잃는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이 경우 목숨을 잃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빌 3:10] 것이 된다. 그런즉 인식 변화가 항상 강조되는 것이니 이 세상을 사람 사는 곳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되는 간단한 문제다. 사는 곳으로 착각하여 남들처럼 살려고 하여 자기를 중심하니까 활달하고 원기 왕성한 믿음의 행보(行步)가 한마디로 불가능인 것이다.

그래서 "육신" 타령이 나오게 된다. 첫 믿음의 단계에서부터, 잘못된 인도와 안내를 받은 탓이다. 지금부터라도 성경으로 돌아가 성령께서 친히 가르쳐 주시는 것으로 직접 배워 정상적으로 단계를 밟아갈 일이다. 일하고 싸우는 때요 장소일 뿐인 이 세상이다. 작업 중이고 전투 중에 있으면서 어찌 안락을 누리기를 감히 바라리요. 이 악령들과 인간의 전쟁은 이미 에덴냑원에서의 아담의 비극으로부터 시작된 것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

종교란 것은 이 세상 삶을 살면서 즉 삶의 낙을 누리면서 특정일과 장소 등을 구분함으로써 자기 구원에 대해 시간을 할애하는 정도로 인식하는 것이 그 특징이지만, 그리스도의 '구원의 희소식'[복음]은 이 세상 삶을 삶[생명]으로서는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바울의 표현처럼 "세상 밖으로 나가 살라"는 것이 아니니, 그 관심사가 이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리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평생 죽을 고생을 하더라도 주위 사람들을 구원하여 건져내겠다는 일편단심의 소신에 따른 삶 곧 일상생활에 있음이다.

모든 날이 그러하고 일상생활이 그러하므로, 여기에다 특별히 안식일이니 십의 일조니 하여 덧붙일 필요도 이유도 없다. 그리고 모이는 장소도 구별하지 않는다. 오직 그 장소, 그 건물만이 예배의 처소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전'된 사람들이 모이는 곳 어디서나 그 곳이 '모이는 장소'일 뿐이다. 그리고 신학교같은 특수 정규 교육 같은 것을 인정하지도 않으니 앞서 설명한 대로 복음을 깨닫는 것이 "산뜻하게 간명하기" 때문이다.

또 이렇게 복음을 아는 일은 인간의 지식으로 전승되거나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는 것이어서, 인간 지식이나 교육이 별달리 소용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체적으로 장애가 되어 왔음이 드러났으니, 지금까지의 이런 체제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 핵심 부위를 장악해 버리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의도대로 휘어잡아질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음을 오늘까지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음이다.

부모나 처자식을 주님보다 더 사랑해도 그것은 세상 일을 염려함에 속한다[고전 7:34/눅 14:26/마 10:37].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는 그 모든 일이 그대로 넘어가 묵인되었으나 이제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시어 각 사람과 함께 하나가 되심으로써 우리가 구원 얻고 새 피조물이 되어 있는 이상, 세상에서 말하는 부모처자 관계보다 더 밀접한 인간 관계가 주님과의 관계로 정착이 된 터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함이 곧 하나님을 사랑함이니 아버지께서 항상 아들과 하나로 계시기 때문이다. 고로 아버지를 위한다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위해야 하는 것이고 아들을 위하고 사랑하는 것은 곧 아버지를 사랑하고 위하는 것이 되므로, 구약시대와 같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더 이상 이 신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호칭되지 않으시는 것이 이 때문이다. 오직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으로 충분한 것이니, 아버지께서는 따라서 "그리스도의 아버지" 그리고 "우리 아버지", "그리스도의 하나님" 그리고 "우리 하나님"으로 호칭되심으로 충분한 것이다[요 20: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시대에 있는 것과 같은 착각과 혼동을 일으켜 아직도 "여호와"라는 이름을 즐겨 사용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소위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사이비 집단도 그러한 종류다. 그러므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는 모든 관계의 새로운 설정이다. 그리스도를 중심한 인간 삶이요 일상생활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더불어 하나가 되어 사는 각 사람의 삶이다.

이 궤도를 벗어나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 헝클어진다. 중심을 빼어 버렸으니 바퀴 축을 빼어 버린 바퀴와 같음이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한 머리를 중심으로 하는 철저한 공동체 의식으로 영위해가는 삶을 말하는 것이고, 이 머리되신 이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시니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리스도의 일을 하며 그렇게 다시 출생한 사람들이 교제하여 한 몸 의식으로 하나가 되어 있을 때 그것이 교회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니 그런 육체와 더불어 ‘외형적인 상징성’을 띠게 되는 의식이 있다는 것이야 자연스러운 일이나 그것도 '세례'와 '성례' 두 가지로 한정된다. 그 외에는 없다. 그리고 현재는 보이시지 않으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체 즉 한 몸을 구성하고 있는 교회이므로, 먼저 믿고 신앙생활에서 본이 되는 이가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목자(牧者)[성경에서 말하는 "장로" 또는 "감독"]와 같은 구실을 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 세상에서 육체로 사는 우리로서 먹고 입고 거주하는 등의 일을 생략할 수 없으므로 이런 재정적인 업무 즉 구제의 일을 전담해서 살펴보는 집사의 직분이 있을 뿐이다.

집사와 목자[장로 또는 감독] 둘 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여 다른 형제들에게 본이 되어야 함을 기본 요건으로 하기 때문에 어떤 직분도 우열의 차이는 없으며 한 사람이 두 역할을 겸할 수도 있고 또한 모이는 사람의 수가 많을 때는 성령의 은사로 받은 역할[지체(肢體)로서]이 다르므로 그 은사를 따라 역할 분담을 하면 된다. 즉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 지혜의 말씀을 나타내는 은사 등 바울은 여러 가지 은사를 소개하고 있다.

다시 간추리면, '바영사회' 운동은 초대교회가 활동하던 모습 그대로를 닮고 그 원형을 따르고자 하는 것 이상으로 의미가 없다. 이를 복음 운동이라 해도 좋고 교회 활동이라 해도 좋다. 특정 신흥 종파라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굳이 '바영사회'라는 이름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이상 설명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이들로서 그 어떤 다른 이름으로 자기네를 나타내어도 우리는 형제로서의 교제의 악수를 할 것이다.

교회는 모이고 흩어지는 일을 되풀이하는 성격을 지닌다. 핍박을 받아서도 그렇지만 더 많은 사람 또는 더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그리스도께 인도해내기 위해서도 필수적이고 또한 불가피한 현상이다. 그리고 세상의 안목에서의 있는 자, 높은 자, 존귀한 자들끼리 또는 그 반대되는 이들[없는 자, 천한 자 등]끼리만 모이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것은 목자장(長)이신 그리스도의 뜻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직업별, 성별 등으로 해서 전도의 목적으로 그렇게 모이는 것은 타당하나 그렇게 모이는 것 자체를 두고 '우리 교회'라 여기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없는 자와 있는 자, 소위 높은 자와 낮은 자 등이 한데 어울려 한 몸 의식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오직 한 분 하나님, 한 분 주님을 모시는 그 한 가지 이유에서 서로 형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각양각색으로 여러 사람이 있는 것은 그 색깔을 따라 유효적절하게 전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다. 전도하기 위해 그런 다양성 있는 색깔의 사람들로 끼리끼리 모이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끼리만 모인 것을 두고 '교회'로 인식하는 것은 경계할 일이다.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고, 없고 천한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가 높아져 있음을 자랑할 일이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본을 따라 '바영사회[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운동]'는 합심 기도에 주력한다[행 2:42]. 그리고 핵분열과 같은 확산으로 전도에 전념한다. 역시 모이기를 힘쓰는 것은 형제들의 영적 성장을 위함이기도 하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선물, gift]를 주신 것은 이렇게 한 몸으로 성장, 육성되게 하려 하심이다. 여러 은사를 주신 것은 여러 가지로 교회 육성에 이바지하도록 하려 하심이다.

남녀평등에 관하여

세상이 향상되거나 바뀐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마귀의 지배 아래 있어 그 의도대로 움직여지는 터이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천하를 꾀어 인생들로 구원 얻지 못하게 하려는 전략을 세우고 그것을 집요하게 이행해 나가는 것을 우리가 아는 이상, 그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책동에 의한 소위 양성평등을 우리는 경계한다. '여권(女權) 신장'(伸張)에서 접근해도 될 일을 왜 무리하게 '평등' 차원에서 하는 무리 수를 두는가.

남성우월주의가 아니라 남녀 조화에서 오는 일치를 믿기 때문이니 이것이 성경의 가르치심이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질서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와 같이 양성평등을 내세운 것은 이러한 질서를 가르치고 있는 성경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되심을 어찌 하든 훼손시키고자 함이 그 목적인 줄 알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의 머리임을 가르치는 성경[남자가 먼저 지으심 받고 여자가 남자를 위해 지으심 받은 사실에 근거]에 대한 정면도전이 이 양성평등주의다.

악한 인생이라 남자가 그런 태생적(胎生的)인 특점을 악용하여 그 악한 욕심을 따라 여자를 압박해온 죄악사는 우리가 한스러워 하나, 그렇다고 여자까지 덩달아 남자처럼 역시 무법하고 불법적인 일을 하여 남자와 평등해지려는 것은 가정의 규율, 사회적 질서, 국가와 세상의 모든 질서 즉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근본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이므로 이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남자가 여자의 머리인 이상 여자를 구박하여 다스려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먼저 선악과를 먹고 남자에게 주어 역시 먹게 한 결과-딤전 2:14]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모든 남자가 다 자기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하셔서 교회를 건져내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이며 여자는 또 그 남편에게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처럼 순종하라는 것이니[엡 5:24,25]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조화 일치이기 때문이다. 평등에 의한 일치가 아니라 사랑의 조화에 의한 일치로서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문제 해결책이다.

오늘날 교회가 속화하여 이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교묘한 속임수에도 불구하고 함구(緘口)로 일관함에 비추어, '바영사회'는 이와 같은 풍조가 성경을 '낡은 구시대적 사상의 골동품'인 양 매도하려는 흉계인 줄 알아 이를 단연 배격하는 자세를 취함은 마땅하다. 무조건 옛 사람, 옛 것이라 하면 현대보다 상대적으로 미개한 것처럼 인식하나 이는 무지의 결과다. 과학적 지식의 측면에서는 물론 현대와 그 이전 시대가 같을 수 없어 감히 비교될 수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다니엘의 예언[단 12:4]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성[人性] 면은 점점 보다 인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뒷걸음질 쳐 야수성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가뜩이나 자기중심에다 첨단 지식까지 가세하다보니 그 자기 위주의 성향이 휘발유에 불을 붙인 격이 되어 더 맹렬한 기세로 변하고 있는 오늘날의 추세요 실정임을 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인간성은 사실상 점차 퇴화해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 중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이 소위 이 양성평등이다.

이 남녀 한 몸됨은 조물주 하나님의 만유 창조의 근본 바탕이다. 서로 대칭[대립]되는 것끼리의 조화요 ‘둘이 하나 됨’이다. 만유의 존재 질서가 바로 이와 같으니 다시 말해 서로 짝을 이루지 않음이 없다. 짝을 이룸으로써 서로 대응되는 것이 조화 일치를 이루어 만물을 구성하고 있음이다. 그런데 이 대칭되는 둘이 하나를 구성하는 필수 조건이 있으니 그것은 둘이 대등하지 않다는데 있다.

하나는 작고 다른 하나는 반드시 크다. 하나는 주도하고 다른 하나는 종속된다. 하나는 원인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그 결과로서의 위치다. 만일 대등하면 그 둘이 하나가 될 수 없고 서로 싸우고 다투다가 끝나게 된다. 머리와 몸의 관계는 주종 관계다. 그 많은 지체가 있지만 머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조화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남녀도 먼저 있고 나중 있는 순서에 따라 그리고 먼저 있는 것을 돕기 위해 나중에 그 다른 하나가 생성된 이치를 따라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차이는 그냥 그대로 내리닫이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 역시 여자의 몸에서 나는 것인즉 여자가 반드시 남자 아래 있다고도 할 수 없는 사실을 바울은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고전 11:12)이라고 분명히 했다. 즉 남자나 여자 모두 하나님에게서 났다는 사실에서는 '평등'이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이 자연계와 같은 남녀 구별이 없다. 구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 즉 자연계에 있을 때 남자로 있었고 여자로 있었던 그 어떤 흔적 같은 것도 없겠느냐 하겠지만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남자로 세상에 나타나셨으니 남자만의 흔적을 지니시게 될 것이니 여자가 되어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단연 불공평 불공정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그런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 같은 주님이신데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인데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남자 되신 증표를 지니신다면 언어도단이다.

그러므로 이런 저런 구별도 천국에선 필요가 없다. 필요치 않은 것은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머리가 있고 몸이 있듯이 천국에서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그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을 이룬 의인(義人)들만이 있는 것이다. 몸이 있고 머리가 있듯이 남녀 한 몸됨에서도 머리가 있고 그 몸 역할을 하는 구별이 엄연한 것이다. 천국에서는 없을지라도 이 자연계에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엄연히 존재하는 것을 일부러 부정하려 들면 필연적으로 무리가 따른다.

자연계에 속한 이상 현재의 남녀 질서를 따름이 옳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고 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는 관계가 없어지면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신랑에, 교회를 그 신부에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남자는 크고 여자는 작은 대소 관계를 이룬다. 남자는 앞서고 여자는 따르는 주종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남자에게 여자가 났기 때문에 인과론(因果論)의 기본 모습 중 하나다.

이것은 남자가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하다는 의미와는 차원이 다르다. 자연계는 조화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 이러한 남녀 관계는 자연의 조화다. 이 조화가 깨어질 때 그 닥치는 무질서의 재앙은 크다. 이 자연 이치를 깨달은 동양에서는 음양조화라는 이치로서 정리했다. 과학자가 자연의 이치를 구명해내어 과학적 지식을 창출한 것과 같이 그렇게 만물의 이치를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물의 이치 그대로 관찰하고 결론 내린 것이니 그 이치는 정확한 것이요 실상 생각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를 수 있게 되는 결론이다. 즉 양은 반드시 크고 음은 반드시 작아야 하는 것이니 이렇게 작고 크기 때문에 둘이 하나 되고 이 하나 됨을 일컬어 '양'도 아니고 '음'도 아닌 '음양조화'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그대로 여자가 목자[혹은 장로, 감독] 일을 맡는다든가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유일한 정신문화 운동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복음

인간 삶의 철칙과 지혜라는 뜻이니, 무슨 말이냐 하면 단순히 내세에 대한 대책으로서의 그리스도 복음이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삶의 지혜로서의 그리스도 복음을 인식하는 시각을 말함이다. 이는 사람 삶에 대한 사랑의 유용성을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세상 종교도 그런 식으로 접근할 줄은 안다. 모두 인애와 자비를 부르짖고 그 실천을 신도들에게 강력히 권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구원의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차별화가 되는가.

조물주 하나님을 근본 즉 머리로 하는 한 몸으로서의 공동체 의식을 가장 이상적인 인간 삶의 절대 조건으로 인식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새 삶의 새 세계를 선전하여 알림에 그 존재 가치가 있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이 정도 설명으로는 그리스도 복음의 진리 면에서의 유일성을 나타내지 못한다. 그러면 그 자세한 내용은 무엇이냐. 그 핵심 요체가 자기 부인이다. 모든 인간 악의 중심이 자기중심에 있다면 자기 부인은 이론상으로도 그 완벽한 해결책이다.

선한 동기든 악한 것이든 무릇 자기중심, 자기 위주, 본위는 무조건 알력, 다툼, 불화, 증오로 이어지고 그것은 타 생명 파괴 행위 즉 살인으로 끝나 버리기 때문이다. 직접 살인이든 간접 살인이든 타 생명 파괴의 본질은 같음이다. 그런데 이 자기 부인은 현실적으로 나 자신이 죽어 버리지 않고는 달성할 수가 없는 숙명적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이 자기 부인을 이루는 인간은 없으니 따라서 이 자기 부인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다.

그래서 성경에 "의인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고 하나도 없다" 하였다. 때문에 이상론으로만 그칠 뿐이지 현실적인 얘기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 이 자기 부인의 특점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 이전의 결론이다. 이런 결론은 그리스도를 모를 때 한해서 할 수 있는 소리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희소식이 되는 소이는 이 자기 부인이 현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리는 데 있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다고 앞에서 전제하였으므로 그러면 그것은 인간이 아닌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새 창조로써 가능해졌다는 그런 의미도 된다.

앞에서 말한바 자기 부인이 현실적이지 못하고 이상론으로만 그치는 것은 완벽한 자기 부인은 나 스스로가 죽어 버리는 것인데 죽는다면 물론 자기라는 존재가 완전히 부인된 상태이기는 하나, 그렇게 죽어 버리면 자기 부인이고 자기중심이고 도대체 나에 관한 한은 아무 의미가 없다. 내가 죽어 버렸는데 그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내가 살아야 그래서 현실적으로 존재해야 자기 부인이 좋다는 둥, 자기중심이 나쁘다는 둥의 가치 판단 역시 살아 있을 것이 아닌가.

죽어 없어졌는데 나쁘고 좋은 것이 도대체 의미가 없음이다. 그러니 나란 존재가 일단 죽었다가 반드시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조물주의 창조 행위이다. 이런 가장 필요하면서도 가장 묘한 조화가 창조주 하나님의 새 창조로써 현실화한 것을 알리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희소식, 복된 좋은 소식]이다. 이렇게 되면 이상세계는 이미 실현된 것이다.

현실일 수 없고 존재할 수 없다고 해서 ‘유토피아’라는 이름까지 붙은 것이지만 이제 실제로 실현이 되었으니 말도 못할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회개하라 외쳤고, 그리스도께서도 천국이 이제 완성 단계에 있으니 회개하라 하신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이 그 뜻이다. 이제 그 천국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실현이 되어 이제 그 구성원을 널리 모집하는 시점에 이르렀으니 곧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다.

구원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자격은 별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고 사랑할 줄 아는 이면 "누구나"이다. 사랑을 알고 사랑할 줄 안다고 하니 싱거운 말 같이 들릴지 모르나 실은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고, 쉬운 말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예로부터 적다. 사랑, 그것 하나에 모든 것이 매달려 있건만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는" 사람이 소수인 것을 보면 그런 현실을 절감케 한다.

사랑은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사랑의 핵이 자기 부인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나와 그와의 둘 사이의 사랑에서 나는 나 자신을 부인하게 되어 있음이 쌍방의 공통적인 특징이 된다. 이 자기 부인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자기 부인이 없으면 자기 이익과 욕심을 위하여 상대를 단지 이용해 먹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사랑이 가장 금기시하는 독소이다. 왜냐면 이것은 사랑과는 정반대 방향이기 때문이다. 상대방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인 것이다.

여기서 사랑의 참 모습 즉 그 원칙이 나타난다. 즉 갑과 을이 둘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니 이 하나 되는 이치는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고 그래서 갑은 을의 것 을은 갑의 것이 되는 데에 있음이다. 따라서 갑을 위하는 것은 갑 자신이 아니라 을이기 때문에 둘은 서로 불가분이 아니 될 수 없다. 따라서 둘은 항상 분리해서 존재할 수가 없다. 자기 부인이 핵심이 아니 될 수가 없다.

갑 있는 곳에 을이 있고 을이 있는 곳이면 거기 반드시 갑도 함께 있음이다. 때문에 자연적으로 갑의 모습은 을의 모습이 되고 을의 모습이 곧 갑의 모습이 된다. 갑이 을이 되어 있고 을이 갑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둘이 하나 됨'이라 하는 것이다. 구성 인자(因子)는 분명 '갑'과 '을'로서 둘이지만 실제의 모습은 '갑'도 아니고 '을'도 아니면서도 '갑'과 '을'이 동시에 포함되어 하나를 구성하고 있는 구조이니 이를 별개의 의미로 호칭하여 '병'이라 한다. 이것이 공동체 의식, '하나' 의식, 한 몸 의식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인간 새 창조의 실상이다. 그러면 현실화된 하나님의 새 창조는 과연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아들께서 또 하나의 '내'가 되시는 데에 그 핵심이 있다. 이것이 앞에서 지적한바 자기 부인이 현실화하는 근본 틀이다. '내'가 현재 실존하고 있는데 이 '나'와 똑같은 또 하나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조물주 하나님께는 가능하다. 이같이 모든 사람에게 제각기 자기와 같은 또 하나의 자기가 생길 수 있도록 하는 창조주의 방법은 친히 나와 같은 사람이 되시는 데에 있다.

그런 다음 그 영으로 각 사람 안에 즉 내 안에 계심으로써 되는 것이다. 창조주께는 이런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시니 왜냐면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같은 육체가 아니라 처음부터 영이시기 때문이다. 영으로 계신다고 해서 우리처럼 영혼과 육체로 분리되어 계심이 아니라 영[성령]으로 오셔도 육체로 오심과 똑같다는 사실이니,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특성으로서,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이시라는 이 점이다.

따라서 성령[하나님]으로만 계셔도 그것은 육체[인간]로 계심과 같고 육체로 계셔도 이는 사람이 아니신 하나님이시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되어 계시는 것을 가리켜 “그리스도[유대 곧 본 고장 말로는, ”메시아“, 기름 부음 받은 자]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 피조물인 인간의 모양을 띠시고 모양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모든 특징을 남김없이 다 지니시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즉 영원히 사람이 되신 것이다.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처음에는 하나님으로 계셨다는 의미다. 처음부터 하나님이셨으므로 이 하나님되심은 변치 않고 그대로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까지 되셨으므로 한번 하나님께 하신 항구불변이다. 그래서 영원히 사람이시다. 이렇게 한번 친히 사람이 되시면 그 결과는 영원히 변할 수가 없는 것이 하나님 창조의 질서이다. 고로 영원히 사람이시고 따라서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됨 역시 영원하다. 우리의 구원의 불변성을 말함이다.

한번 정해놓으신 일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어야 그 세계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시니 그 하시는 일마다 영원하지 않는 것이 없다. 영원하지 않는 것은 만드시지도 이루시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 영원한 것을 만들어 가시는 과정에서 어떤 순서가 있어 그것이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일 때는 그 잠정적으로 존재하던 것을 폐기하실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원래의 목적에 부합한 것은 영원히 존속하는 것이다. 그런 잠정적인 것으로서 폐기될 운명의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세상이다.

그리스도와 나 이렇게 둘이 짝을 이루어 하나가 되어 있는 구조를 가리켜 "새 창조"라 하는 것이니, 이전에는 이런 구조로는 그 어떤 인간도 피조물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그리스도 즉 그리스도의 영을 자기 안에 모시고 있게 되니 모든 사람의 ‘공통점’이 바로 이 그리스도시다. 이는 한 몸의 이치에서 몸의 각 지체가 머리를 상대로 하여 그 머리를 중심으로 하나 곧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이치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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