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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영사운이란? (24) 등록일 2016.02.16 22:12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733

 

마지막 아담에 의해 이렇게 각자가 둘이 하나되어 짝을 이루고 있는 구조는,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각 사람이 '남자'와 '여자'라는 짝으로 구성되어 있었음과 상칭(相稱)된다고 하겠다. 왜냐면 영원한 천국에서는 남녀의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라는 것은 아담의 육체로 말미암은 것이고, 이제 그리스도와 나와의 둘이 하나됨으로써 이루어진 짝은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육체'와 '영혼' 관계로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와 영원한 '둘의 하나'관계 즉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 되어 있음이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이 부부를 이루어 삶으로써 대개 '남편' 없는 '아내' 없고 '아내' 없는 '남편' 없듯이, 천국에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도 우리 각자는 '영혼'과 '육체' 관계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짝을 이루어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해 평소의 삶에서 남편은 아내를 의식하며 살고 아내는 남편을 의식하며 사는 것과 같이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를 의식함이 없이는 살지 못하는 삶이 되어 있다.

우리가 영혼을 의식하지는 못하는 것이니 영혼을 보거나 듣거나 만지거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기야 우리 자신이 영혼이니까 그렇다고도 하지만 어쨌든 육체는 육체이고 영혼은 영혼으로서 제각각이지만 영혼을 우리가 우리 육체의 오감으로 인지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영혼으로 우리 각자 안에 우리와 함께 사시니 우리가 현재 주님[주인님, 나의 소유주]을 우리 오관(五官)으로 인식하지 못함은 당연지사로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내 영혼과 육체 모두]을 '육체'로 삼고 나의 '영혼'이 되어 계시니, 이 '육체'와 '영혼' 구조는 나라는 사람[나 자신]과 나 외의 '또 다른 사람['제2의 나 자신'으로서의 그리스도]'이 함께 하나를 이루어 있음으로써 영원히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고 계시므로, 우리가 육체로서 아내/남편을 의식하고 인지하듯이 그렇게 의식하고 인지한다는 사실은 동일하므로 이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에 하나님 두는"[롬 1:28]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께서 모든 사람 안에 계시니까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한 신경 계통, 한 혈관으로 되어 있는 구조와 같은 셈이다. 그래서 한 몸을 구성하는 형상인데, 몸의 모든 지체가 한 머리의 지휘 계통을 따르는 것처럼 그래서 한 몸으로서 하나같이 움직이는 것과 같이, 우리 각 사람이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으므로 완전히 한 몸 즉 하나로서 움직이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입이요 당신이 손이라면 손더러 입이 말하기를, "당신은 나의 몸의 한 지체로서 당신은 나와 모양은 다르지만 한 핏줄, 한 신경으로 통일되어 있고 동일하신 머리에 속한 한 몸인즉 당신은 나의 한 부분이니 바로 나의 지체이다. 곧 내 머리의 명령에 따라 나와 함께 움직이니 우리는 완전히 남남이 아니고 제살붙이다" 하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손이 입에게 하는 말도 마찬가지의 내용이 됨은 물론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머리가 되시는 또는 마땅히 되어야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지으신 조물주이신 까닭이다. 조물주이시기 때문에 영이시고 그리고 영은 모든 육체 안에 즉 우리 안에 개별적으로 계실 수가 있음이다. 그러나 사람이시므로 영이신 조물주로서 계신다기보다 한 사람 즉 나와 똑같은 다시 말해 ‘또 하나의 나’로서의 육체로서 계심과 같은 것이니 곧 나의 영원하신 짝으로서 나와 함께 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시므로, 부활하시어 오늘날 살아 계시는 것이 아니라면, 결단코 이와 같이 내 안에 계실 수가 없음은 물론이다. 또 죽으시지 않고는 다시 살아나실 수 없고 따라서 이와 같은 새 창조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은 나의 구원에 절대 필요불가결한 요소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과 같은 죽음 일방의 의미로는 아무 의미도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으로서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스스로 다시 살아나신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나와 말 그대로 똑같은 사람이실 수가 없다. 왜냐면 사람은 너나없이 다 죽게 되어 있는데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그것은 보통 인간이 아니라 특별한 인간이실 수밖에 없으니 특별한 인간이라면 '나와 같은' 인간이 되실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원래 그런 특별한 인간은 아닌 것이다.

여기서 "특별하신 인간이 아니라" 함은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특성을 말함이 아니다. 그 사람되신 측면에서[하나님으로서의 측면이 아닌], 나와 같은 완벽한 인간 즉 사람되시기에 조금도 결격 사유를 갖추지 않으셨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어느 인간도 죽었다가 스스로 다시 살아나는 일은 없으니],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리심으로써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나 역시 아버지께서[롬 8:11][혹은 그리스도께서-요 6:54] 나를 살리심으로 살아나게 되어 있으니 그리스도나 내가 똑같은 사람이고 아무 차별화가 되어 있지 않음이다.

유일하게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사람으로서의 영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이시라 하는 것이다. 육체는 사람이시나, 영은 사람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그렇지 않다. 오직 사람이 영혼일 뿐이다.

바로 그런 차이다. 그러나 성령[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시는]을 우리 각자가 받음으로써 이 차이는 최소화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친자(親子)이시고 우리는 그 양자(養子)다. 그리스도께서는 맏아들이시고 우리는 그 아우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 피조물이다. 그래서 이런 차이가 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임에는 아무 하자가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을 계속 논하건대, 사람으로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 죽었다는 사실이 원천적으로 무의미가 된다. 죽었다가 스스로 다시 살아날 바에야 누가 그것을 죽은 것으로 취급하겠는가. 단지 죽은 척하기만 했지 실제로는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죽으셨다면 실제 죽으셨고 다시 살아날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나신 것은 아버지께서 그 죽으신 아들을 다시 살리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해서 그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다시 살리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으로서의 필수 요건도 충족하셨고 원래 하나님이시라는 것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다시 말해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사실로서의 조건도 충족된 것이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시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다시 살릴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능력으로 하나님 아들로 인정되셨다[롬 1:4] 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하나님이신 측면이다. 또 인간은 한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고 다시 살아나는 재주가 없으니 이는 사람이신 측면이다. 모든 인간의 죽음은 육체만이 죽어 썩음으로써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 영혼은 영원하여 결코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과 육체로서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으므로 육체가 없으면 그 영은 산 자의 행세를 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경우 그 영은 성령이시고 하나님이시므로 그래서 그 영은 그대로이시나 그러나 일단 사람이 되신 이상 여늬 인간들처럼 육체가 없어지면 그 영혼은 제 모습을 나타낼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 역시 육체를 되찾아야 비로소 산 자의 세계에 복귀하실 수 있음이다. 그래서 다시 살아나셔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다시 살아나시어 영원히 사시는 분으로 내 안에 그 영으로 오셔서 나와 영원히 짝이 되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하나되심을 인하여 아버지 친히 아들을 살려 주심으로써 그 육체도 살아나 신령한 몸이 되셨고 또한 그렇게 일단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으므로 영원히 죽지 않으심이니 아담처럼 또는 영물로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범죄하지 않는 이상 죽음 곧 멸망당할 이유가 없다. 원래 하나님은 그 본성이 죄를 짓지 않으시니 다시 말해 조물주로서 그 피조물만을 위하시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이상 사람으로서의 그 신령한 몸에 변동이 있을 수 없고 영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는 나 자신이, 전적으로 피조물로서 조물주 하나님을 위하는 이 사랑과 생명의 법질서에 머물고 있는 한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라(계속하여 살라)"고 성경이 경고하고 있는 대로-롬 11:22] 나의 영생 곧 구원 받아 있음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영생이 상대적이어서 갑이 을을 위하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을 역시 갑을 위함으로써 구성되고 구축되는 일이므로, 내 자신 시험을 받아 [이 시험에 내 마음 역시 흔들려 악에 동조함으로써] 더 다시는 갑을 위하지 않고 을 자신을 위하여 사는 자세를 취할 때, 나의 영생 곧 구원 받아 있음은 더 이상 존속 불가능하게 됨은 자명하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이와 같이 을이 갑을 위함]으로써 두렵고 떪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룰"[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것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음이다. 그러면 이 사실과 앞에서 말한 자기 부인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할 때, 단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온전한 자기 부인을 목표함이 핵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인간은 죄인으로서 죄인은 죽어야 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이 필수이다. 그러나 이 함께 죽음은 함께 다시 살아나지 않는 한 전적으로 무의미하다[고전 15:17,18]. 그러나 이 함께 '다시 살아남' 역시, 우리에게 자기 부인의 의미가 되지 않으면 일절 무의미한 것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자기 부인은 우리 육체로 빗대어 말하자면 완전히 자기가 죽어 있는 것인데 그러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어떤 설명이 가능해지는가 하면, 여기서 자기 부인의 필수 요건을 알게 된다. 즉 ①자기가 죽음으로써 달성되는 것이 아니면 자기 부인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는 것, ②그리고 자기 부인이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자기 이외 자기만큼이나 또는 그 이상으로 자기를 위해주는 상대가 있을 때 그런 완벽한 자기 부인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①에서는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됨으로써 즉 그리스도 친히 그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심으로써 그 죽음과 장사 지내지심이 나의 죽음, 나의 장사 지내짐이 되었으므로 완벽하게 성취된 것이다. 그런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이와 같이 나와 하나 되시기 위함이니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대로 "나를 대신하는" 죽으심이 아닌 것이다. 의미도 전혀 다르거니와 여기서 죄를 이기고 죄를 짓지 않게 되니 현격한 차이가 벌어진다.

②에서는, 자기 부인에는 그 상대가 반드시 있어야 함이니 즉 '둘이 하나됨'이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설명에서 보듯이 아들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위하심으로써 아들을 반드시 살리실 것을 아시고 계셨으므로 가능해진 일이다. 죽으신 다음에는 반드시 살고 싶으셔서가 아니라, 우리 위해 일단 죽으시면 그것으로써만 우리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반드시 살아나시어 우리 각자와 하나되심으로써만 그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될 수 있고 그 부활이 나의 새 창조, 다시 출생함으로 나타나 이것이 가능해져 비로소 구원이 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우리 대신해서 죽으심만이 우리 구원의 골자가 된다면 굳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리실 이유도 없다. 물론 그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논리상 그렇게 된다. 왜냐면 대신 죽은 자는 영원히 살아나지 말아야 그 대신 죽음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니 "대신"이라는 말 그대로, 갑의 을 위한 대신 죽음으로 을이 살아나 있는 관계로, 그렇게 죽은 갑이 살면 을의 살아남[갑의 대신 죽음 덕분에 살아 있게 되어 있는]이 무효, 무의미가 되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갑이 살았으니 을이 이제는 이전처럼 죽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을이 영원히 '살아 있기' 위해서는 갑은 반드시 영원히 '죽어 있어야' 한다는 그 뜻이다. 이것이 상식이고 말의 조리이니 즉 논리가 서는 것이다. 따라서 "대신 죽음'의 교리는 불교의 '열반, 해탈에 의한 인간고 척결'이라는 교리처럼 모순이 된다. 이런 자가당착 속에서는 그 어떤 진리도 존재하지 않으니 그런 데에서는 진실이 부지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아버지'이시니까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서 물론 '아들'을 살리셔야 마땅하나 우리의 구원에 관해서만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니 그렇게 되면 위의 설명처럼 애당초 죽으셔야 할 의미가 사라지게 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아들께서도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 우리 구원이라면 절대로 살아나시지 않아야 한다. 왜냐면 말 그대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셨으니까 그 죽음은 그 죽음대로 영원히 끝나 버려야 우리를 대신하신 죽음이라는 의미가 영원히 살아 있게 됨이다.

다시 살아나시면 죽으셨다는 형식만 취하신 것이 되지, 말 그대로 우리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의미가 전혀 없게 된다. 형식만 취하시는 경우가 되므로 바로 그런 것이 '모순'이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양식 있는 사람은 그런 잘못된 '그리스도 구원'의 의미를 듣고 "왜 그렇게 인간 위해 죽으셨다면서 살아났는가?" 하는 그 의문을 풀지 못해 다시 말해 논리적인지 못해 선뜻 믿음에 나서지 못한다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맹목적으로 믿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미신일 뿐이지 달리 의미가 없음이다. 여기서도 우리 대신하신 죽음이 우리의 구원이 될 수 없음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죽으심[우리 대신하신]만으로는 우리 구원이 되지 않고 다시 살아나셔야 비로소 우리 구원이 되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셔야 했고[고전 15:17,18], 그것도 스스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리심으로써 살아나신 것이다.

하나님이시므로 스스로 살아나시지 못할 것도 없지만 그렇게 되면 논리적이지 않고 이와 같이 합리적이지 않고 타당성이 없는 것은 진리로서 존재할 수 없음이며 더더군다나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근거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실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죽은 시늉만 하신 것으로 끝나는 의미가 되는 까닭이다. 또 스스로 살아나셔도 안되니 아들 자신을 위한 일은 사랑과 생명의 법칙 곧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에서 갑이든 을이든 그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없는 까닭이다.

또 우리 구원을 위해 위의 설명처럼 반드시 살아나셔야만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 각자를 대표하시는 의미도 되시므로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위해 살아나는 의미가 되지 않도록 하심에서도 아버지께서 살리셔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이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더라도 우리 스스로 살아나지는 못할 것이기에 우리의 본으로서 그렇게 '스스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살리심을 받으심으로써 살아나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죽으심만으로는 우리 구원이 될 수 없는 사실 혹은 우리 위해 대신 죽으심이 우리 구원이 되지 않음을 가리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라"[:14] 했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17,18]고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고 우리 역시 이를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대신 죽으심이 아니라 나와 함께 죽으심 곧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이기 때문에 죄를 이기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니, 여기서 또한 내 편에서의 "자기 부인"의 실체와 그 근거 그리고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아버지께서 자기를 살리실 줄 아시고 아들께서 우리 위해 죽으셨다고 했지만, 이와 같이 자기 부인은 나를 위해 주는 상대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②. 나와 짝이 되어 계시는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하신다는 믿음으로써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을 부인하여 나를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있음이다[고후 5:15].

다시 말해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온전해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다[히 5:8,9]. 우리는 지금까지 세상에 오직 나 하나만이 나를 진정으로 위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왔었다. 나 하나밖에는 나를 진정 위할 수 있는 이가 없으니 부득불 내가 나 자신을 위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 하는 논리로 살아 왔다. 그렇게 되면 언제 가도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격이 되어 결단코 이 자기중심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불교의 가르침이 이런 자기중심의 폐해를 절감하는 데에서는 백 프로 우리와 동조하나 그 자기중심을 척결하는 방법론에서 근본적으로 빗나가니 창조주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항상 그와 같은 제자리 걸음을 면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여 왔다. 자기 구원을 목적하여 처음부터 시작했으니 원인이 그러하면 결과도 그러하여 자기중심이 굴레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음이다.

고로 내가 나를 위하지 않아도 즉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도록 그렇게 나를 위해 줄 또는 나보다 더 잘 나를 위해 주는 누군가가 분명 존재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나는 나를 위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므로, 내가 직접 나를 위함으로 야기되는 자기중심의 폐해가 영원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즉 자기 부인이 가능해짐이다. 불교는 그런 상대가 없이 혼자 스스로 해결하려 하니 실제적으로 그 '해법'이라는 것이 현실이 되지 못하고 오직 탁상공론에만 그치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비로소 아담을 비롯해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부인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니, 이미 아담의 범죄 후 죽은 자가 되어[롬 5:12] 자기중심이 포로가 되어 있는지라[롬 7:24] 그렇게 자기중심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가리켜 "자기를 부인하는" 것으로써 표현하신 것이다. 범죄하기 전의 아담은 자기중심일 수도 없었고 자기 부인이라는 말도 당시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충동을 받아 범죄함으로써 자기중심으로 비로소 빗나가게 되었고, 그리고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됨으로써 완전히 그 자기중심이 고착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소위 열반, 해탈을 통해 자유인이 되었다 하나 자기 개인적인 인식으로 그렇게 여기는 것일 뿐이지, 그들의 주장 그대로 그들 식의 '일체유심조'다. 마음으로 그렇다고 생각하니 그렇다고 여겨질 뿐이요 그래서 실제 그런 것이라고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일체유심조라는 말도 해당될 때와 경우에 한해서 그런 말을 써야 하는 것이다.

해당되지도 않는데 무리하게 적용하려 드니 항구적인 억지요 모순이 됨을 면할 수가 없다. 나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배격하고 배제하니 올바른 이성적(理性的) 결론이 내려질 까닭이 없다. 인과론에서 인을 무시하고 과만을 아무리 열띠게 논해보아야 결론이 내려질 까닭이 없다. 마치 부모에게서 난 자식이 부모를 부인하고, 품속의 아기가 엄마의 보살핌 없이 그 스스로 무엇을 하겠다고 설쳐대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렇게 나를 위해 주는 이가 과연 존재하고 있는가. 우리가 아는 한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처럼 극성스럽게 나를 위해온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가 불교의 논리다.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을 그들은 그렇게 해석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를 밝히는 것이 성경이다. 그것은 우리를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이시다. 분명히 존재하시는 것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과(果)이다. 인(因)이 있지 않고는 과(果)가 생겨날 수가 없다는 것이 인과율이다. 삼위일체 원리가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나를 낳은 부모가 어린 아이인 나를 위해 주는 그런 이치가 바로 조물주께 해당되는 것이다. 조물주께서 나를 만드신 것이나 부모가 나를 낳으신 것이나 이치는 동일하다. 부모는 육체인 인간을 생산했다는 것뿐이고 따라서 그 자신이 육체이므로 그 범위가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만 한정되는데 반해 조물주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그만큼 광의(廣義)고 광역(廣域)이라 그 지으신 모든 피조물, 모든 인간에게 골고루 다 미치시는 그런 차이다.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그 부모가 아기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한다. 아기 스스로가 자기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바로 그런 이치다. 내가 나를 위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위하시는 것이 조물주시다. 다시 말해 나를 진정으로 그리고 나 이상으로 나를 위하시는 분이 분명 존재함이니 곧 나를 존재하게 하신 조물주시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내가 나 자신을 위할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고 그것이 또한 이치에 닿지도 않는다.

나를 위하시는 분이 엄연히 계시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나를 또 그것도 서툴게 위한다는 말인가.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이 조물주께서 나를 위하시는데 비하면 서툴기 짝이 없다. 왜냐면 조물주께서는 나를 지으셨기 때문에 나를 잘 아시므로 그렇지만 나는 그 피조물이므로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실질적으로 아는 것이 없다.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아이가 자기를 위할 수 있는가. 그럴 힘도 없거니와 자기에 대한 지식도 없으니 방법도 알 턱이 없다. 그래서 그 부모에게 완전 일임되어 있는 그런 것과 같다.

우리가 육체로 태어날 때 스스로 생겨나지 않았다. 부모의 알뜰살뜰 보살핌 속에서 이렇게 성장해 왔다. 그렇다면 맨 시초 인류의 첫 부모가 누구였나 생각함이 마땅하다. 불교는 이런 점에 눈에 가지 않은 불찰이 크다. 그래서 인과 관계를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연기생(緣起生)"은 주장하면서도 같은 뜻, 같은 이론인 인과론(因果論)은 배척하는 그런 치명적 자가당착이다. 그들은 물론 이를 인과율이라 한다. 그러면 당연히 제1 원인이신 조물주는 왜 인정하지 않는가.

다시 말해 그 첫 부모가 저절로 생겨난 것이라면 우리 역시 저절로 생겨나야 하는 것이요, 그렇지 않고 우리가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태어났고 그 보살핀 주체(主體) 곧 부모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므로 그 최초의 부모 역시 누군가 보살펴 주는 주체로 인(因)하여 생겨난 결과(果)라야 마땅하다. 불교의 교리가 이런 가장 초보적이고 기초적인 논리 위에도 서지 못하니 그런 황당무게가 어디 있는가.

죄는 다름아니라 이렇게 조물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는데 이를 무시하고 자기가 자기를 위한답시고 어쭙잖게 행동하여 어리석은 짓거리를 하여 자기도 망치고 자기와 이웃한 남들도 온통 망치게 되어 버리는 것을 말함이다. 이것이 악이며 불법, 불의다. 우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누구나 이기적인 사람을 싫어한다. 이웃에게 미치는 폐해가 이기적인 데에서 비롯됨을 잘 알기 때문이다. 아담 부부에 대한 에덴낙원에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짓거리가 바로 그 증거다.

그런데도 묘한 것은 자기가 그런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경우 이를 자제하려 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당시하고 변명하려 들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양심의 가르침을 받아 남의 허물은 잘 보이는데, 자기 허물은 잘 인식되어지지 않는 것이니 같은 양심의 소리이건만 이를 억눌러 온 관습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기중심의 속성이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맹점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고로 무조건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자기 일은 반드시 자신이 아닌 남이 즉 다른 이가 담당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의 원칙이고 정석(定石)이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도록 우리를 위해 주시는 것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다. 즉 아기에 대한 엄마의 역할이다. 몸의 각 지체에 대한 머리의 몫이다. 우리를 지으실 때는 어머니가 품속의 자식을 거두듯이 하시기 위해 창조하신 것이다[마 6:8,32].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사랑과 보살피심이 확증되어 나타났다[롬 5:8]. 이제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그리스도]을 통하여 그렇게 증명하시고 영원한 증거로서 그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심이다. 다시 말해 영원히 나를 위하시는 위치에 계심이다. 아들과 함께 아버지 친히 그렇게 나를 위해 위치해 계심이다. 바로 나 자신의 '영혼'처럼 나를 '육체'로 삼으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새 피조물"[고후 5:17]로서의 '영혼'과 '육체'라는 새로운 이중 구조를 형성하고 계심이다.

그러므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모름지기 죽게 되어 있으니, 영생하는 별도의 신령한 몸을 입어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바로 이 죽음의 과정부터 철저히 이행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모든 것은 합법적으로 정상적으로 완벽하게 '종료'가 되어야 함이다. 즉 죽어야 하는 것이니 그래서 나 위해 죽으신 것이다. 이 '나 위한 죽으심'은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이 아니라 '나와 함께 죽으심'이라는 점을 항상 명심할 일이다.

왜냐면 내가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는데 이 죽은 자로서의 나를 대신하여 죽는다는 것 역시 말이 통하지 않는다. 내가 죽은 자가 아닌 산 자가 되어 있어야, 나 대신해서 누가 죽음으로써 산 자로서의 나의 위치가 그 '대신 죽음'을 인해 유지된다는 것으로 뜻이 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음에도 나를 위해 죽으실 때는 그 '대신 죽음'의 의미가 전연 없고, 오직 이 경우 '함께 죽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렇게 함께 죽으실 때는 다시 살아나실 때에도 '나와 함께' 다시 살아나시는 것으로 당연히 나타나게 되고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실은 어느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양면을 이루어 우리의 구원을 구성하는 절대적 의미가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과거의 죄 용서가 되고 이 죄 용서의 바탕 위에서 성령 친히 내게 임하심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그리고 이 함께 죽음과 함께 다시 살아남은 자기 부인의 굳건한 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으로써 내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한다는 논리는 성경에 그리스도 친히 우리 인간을 "죽은 자"[마 8:22]라고 명백히 하신 말씀을 완전 무시함에서 오는 순전히 인위적인 종교 교리이다. 이 말씀을 받들어 성경은 우리가 "허물로 죽었다"[엡 2:5] 했고 "우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우리가 죽었다"[골 2:13]고 한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마리아가 자식 남매들을 두었다는 성경의 언급을 천주교에서 묵살하고 평생 동정녀였다고 우기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와 같이 가벼이 여겨 업신여기는 마당인데 거기에 무슨 진리가 있을 것인가. 내가 지금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있으니까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은 완전 결별하고 새롭게 신령한 몸을 입기 위해서도 죽음은 불가피하니,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너는 죽을 것이라" 하셨으므로 그대로 되지 않으면 안되고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음이다. 여기서는 천하가 무너지는 한이 나도 변경 사유가 없다.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골 2:13] 한 그 “육체의 무할례[바울의 로마서 7장의 "육신"이 이를 설명한다]”로 인한 죽음과[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죽음의 선고를 받았으니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어-롬 5:12], 우리의 범죄[우리 자신의 허물과 죄]로 인한 죽음이, 이로써 모두 척결됨이다. 이와 같이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인생들이므로, 소위 "대신 죽으신다"는 의미는 전혀 맞지도 어울리지도 않고 연결될 수도 없는 아주 완전한 별개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대신 죽음은, 죽게 되어 있는 상황에 처했을 때, 죽지 않도록 대신 죽어 준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게 되어 있는 상황이 아니라 이미 죽어 있는 "죽은 자"로서의 실태(實態)다. "우리가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신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살게 되는 것이라 강변한다면, 그러면 그 "대신 죽음"에서의 "죽음"의 의미가 "멸망"이므로 그리스도께서 당치도 않게 "멸망하셨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멸망은, 그 어느 인간도 영물도 마지막 심판 때까지는 유보되어 있다. 그 때까지는 그 어느 누구도 멸망에 들어 있지 않다. 멸망은 마지막 심판대에서 멸망으로 판정을 받아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아직 마지만 심판이 지나지 않았으므로 멸망할 사람도 없고 그런 때도 아니다. 그런즉 완벽한 한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 즉 사람으로서 오신 그리스도이시니까 여기서 예외이실 수가 없다. 예외가 되시면 우리와는 특별히 다르시다고 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렇게 되면 우리와 똑같은 일개의 한 인간이실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다른 아무런 특별한 의미가 개입될 여지가 없는 우리가 아는 대로의 자연 법칙에 따른 죽음이실 수밖에 없다. 즉 우리를 대신하시는 멸망으로서의 죽으심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기 때문에 혹 그런 의미도 담겨질 수 있지 않으냐 하겠지만, 앞서 설명한 대로 어디까지나 그 사람되심은 완벽한 사람이심에 있음을 거듭 강조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으로서 그런 멸망의 의미를 지니시는 것이라면 분명 그 점에서는 우리들 보통 사람과 다르므로 우리와는 특이한 사람이지 우리처럼 똑같은 사람이실 수 없다.

완벽한 사람이시라는 것은 우리와 하나도 다름이 없는 사람이시란 그 뜻인 것이다. 즉 멸망까지 당하질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사람이시라면 절대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실 수 없고 초인(超人)이시니 우리는 결단코 초인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시나 동시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초인이 아니시냐 하겠지만,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완전한 사람이시자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뜻으로 이 둘을 겸하신다는 뜻이지, 하나님이시라고 해서 완전한 사람되심에 영향을 준다는 의미도 아니고 주어서도 안되는 것이며, 사람이시라고 해서 완전한 하나님되심에 티끌 만한 영향을 주어서도 또 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이신 측면은 어떤 점에서 나타나느냐 하면, 그 완벽하신 사람이신 그대로 각 사람 안에 거하심으로써 완벽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육체로서의 사람은 다른 사람 안에 비록 영혼만이라도 들어가는 일이 불가능한데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 안에 계실 수가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 안에 똑같이 계실 수가 있음이다. 이는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하신 일이다. 또 그렇게 각자 안에 계시면 아버지 역시 똑같이 아들과 함께 그렇게 계심이다. 이는 진실로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로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그 죽으심이 멸망을 의미하든 이런 자연계에 속한 우리가 아는 대로의 죽음이시든[바로 이 죽으심이 우리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똑바른 의미인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결코 우리를 대신하시는 죽으심일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 죽으심이 자연계에 속한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우리를 대신하는 죽으심이라면 그러면 우리 믿는 사람들 중 아무도 죽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잘 믿은 바울도 지금까지 살아 있지는 않다.

이미 우리가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위치인데 이 기정 사실이 취소되거나 말소될 수 없다. 따라서 반드시 죽음 다음의 다시 삶이 우리의 현재 새 생명 안에 있음, 새 사람이 됨, 새로 지으심 받음, 다시 출생하는 것이므로, 그 죽으심은 우리와 함께 죽으심이요 함께 다시 살아나심 이 외에 달리 의미가 있을 수 없다. '함께 죽으심'일 때는 '대신 죽으심'과는 전연 별개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기독교를 박해한다고 경고를 하셨는데, 기독교가 이렇게 왕성해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핍박하지 않는 것을 보아도 "보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없지 않으냐!" 하는 이들이 많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며 인간의 경배를 받는 데에는 전혀 흥미가 없다. 장차 적 그리스도를 출현시켜 스스로 하나님으로 가장해도 오지 목적은 인생들을 구원 얻지 못하게 함에 있고 스스로 신이 되어 인간의 경배를 받자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지금까지 절대 다수를 믿지 못하도록 움켜쥐는 데에 성공했다. 이제는 좀 더 방법을 고도화하여 전혀 색다른 것으로 하려는 것으로서 이것이 그의 모든 기만 술책 가운데에서도 최고 작품이 될 것이다.

이는 오래 전부터 성경이 미리 경고해오고 있고 또 초대교회 당시부터도 마귀가 성급하게 시작하려고 덤볐던 일이다[살후 2:7]. 지금까지 막아 왔던 것이나 이제 오늘날 그 장막이 걷혀지고 있는 때다. 대대적으로 핍박이 기다리고 있다. 3운법칙이 드러나고 삼위일체의 원리를 증명하고 있다 해서 모든 세계가 하나님 앞에 돌아온다고 착각하지 말 것이다. 이미 세계는 무신론의 가면이 벗겨지고 유신론의 원래의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또다른 가면을 새로이 쓰고 있는 것이다. 모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짓거리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적 그리스도를 출현시켜야 하고자 함이니 그 발판을 깔아주려 하는 까닭이다.

단지 삼위일체의 원리와 3운법칙이 나타난 것은 이제 마지막 때를 당하여 여전히 믿을 사람은 제대로 믿도록 하기 위하여 그 믿음을 확실하게 공고히 하기 위함이니 성경의 진실성을 알아도 일찌감치 바로 이 때 완전히 알도록 할 것이며 이 세상의 실상의 전모를 파악한 뒤에는 좌우 돌아볼 것 없이 일편단심 일로매진하여 나갈 일이다. 더 다시는 세상에 미련을 가지지 말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어버이]가 되심을 예수 그리스도로써 알리고, 인생 삶의 원 고장은 이 세상이 아니라 영계로서 영원히 사는 곳이 사람 사는 나라임을 알리고, 머리와 몸 관계에서 한 몸을 이루어 사는 것이 사람 사는 기본 도리임을 천하에 알리어 사람 살리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 기울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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