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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1체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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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영사운이란? (끝) 등록일 2016.02.16 22:18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821

 

그래서 그 에덴낙원이라는 영계에서 아담은 자연스럽게 신령한 몸을 입게 됨과 더불어 아담이 혼자 살지 않도록 다시 말해 짝을 이루어 살 수 있도록 그런 돕는 자를 만들어 주시기 위해 에덴낙원의 식물을 먼저 창조하신 다음 동물들을 지으신 것이 우리가 보통 말하는 영물[천사]들이다. 영계라 본래 자연계의 대칭[상칭, 대립]이 되므로 자연계에서처럼 거기도 동식물이 있어야 마땅하고 그리고 그 지으신 순서도 먼저 식물이고 다음이 동물이다.

그런 그 동물[영물]들 가운데 아담의 마음에 차는 자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되어 있어 극히 아름다우므로 아담의 눈 높이에 그들 각종 동물들이 아무리 현란하게 아름답다  해도 제대로 맞추어질 리 없다. 그 때문에 아담과 똑같은 아담 자신을 닮아 있는 여자가 창조되니 이래서 결국은 자연계에서처럼 식물, 동물, 인간의 창조 순서가 이루어진 셈이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이런 순서를 따라 정하셨다기보다 자연적으로 되어지는 현상들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봄이 타당하다. 여기서 넷째 단계가 완료되었다 하겠다. 이제 마지막으로 다섯째 단계는 아담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인생들을 선과 악으로 분류되는 때만 남은 것이다. 영물들이 그렇게 분류되어 거룩한 천사들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악령들로 현재 영원히 정해져 있는 것과 똑같은 양상을 보이게 되어 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새 창조에서 아담으로 말하면 그 첫째, 둘째, 셋째 그리고 넷째까지 포함해서 마지막 다섯째 단계에 이르기까지 일괄적으로 한꺼번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이를 순서대로 설명하면,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는 나의 현재의 상태가 아담으로 치면 영혼이 생기기 전 자연계에 속한 '육체'만으로 되어 있는 바로 그런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인간 구원의 "새 창조"의 현장인 것이다. 이렇게 영혼이 조성되기 전의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만 존재했던 당시의 아담에 해당되는 것이 우리 모든 사람의 현재 위치인데, 이제 새 창조는 그 '육체'에 '영혼' 격으로 그리스도 친히 그 성령으로 우리 각자['육체']에게 임하여 오심으로써 이루어 지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죽은 자인데, 그러면 아담이 당시 영혼 없는 육체로만 먼저 창조되었던 상태가 '죽은 자'였던가?" 한다면, 대답은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로서는 산 자이나 영원히 사는 신령한 몸도 아니고 신령한 몸은 영원성을 띠는 영혼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당시는 영혼이 아직 조성되기 전이므로 영원한 생명체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을 기준으로 하면 영원히 살아야 사는 것이지 그렇지 몫하고 죽으면 죽은 것이다.

자연계에 속하는 육체가 되어 버린 아담의 선악과 먹은 결과를 두고 이래서 "죽음"[창 3:3]이라 하고 이와 같이 우리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는 상태를 "죽은 자"[마 8:22]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시는 즉 새로 창조하시는 방법으로서, 바로 아담이 당시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중 구조였던 것과 같이 새 창조에서도 육체[나 자신]와 영혼[성령으로 임하여 오신 그리스도]이라는 새로운 이중 구조로써 하신 것이다.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은 영생하지 못함 즉 영원히 생명의 낙을 향유하지 못함을 말하는 것이다. 아담 역시 영혼이 조성되기 이전의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말하면 '영생'에 비하면 '죽은' 것이었다. 왜냐면 영생을 못하는 것이므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영혼을 조성하실 때 성경은 이를 가리켜 "아담이 산 영["a living being, a living soul"-창 2:7]이 되었다 한 것이다. 여기서 "산다[living]"는 것은 영생한다는 것을 의미함이다. 왜냐면 영혼 자체가 영적 존재로서 영은 본시부터 영원성을 띠기 때문이다.

아담에게 영혼이 조성되면서부터 아담이 비로소 산 자로서 움직였다는 의미가 아니니 영혼이 조성되기 전에는 자연계에 속한 동물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그런 움직임은 당연히 있는 것이었다. 물론 아담이 영혼이 조성되기 이전에 그렇게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는 말은 아니니, 아담을 그렇게 육체로 만드신 다음에 곧장 그 코에 숨을 내쉬시어 영혼을 조성하셨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산 영(靈)이 되었다 함은 영생하는 영혼이 육체만으로 된 아담에게 그 육체와 함께 이중 구조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런즉 영혼이 없던 당시의 이 자연계에 속한 아담의 육체가 영생하지 못함을 인해 영생의 측면에서 보면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것이나, 현재 우리가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것이나 영생하지 못함을 인해 죽은 자의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은 동일하다. 고로 아담을 애초의 창조하신 목적대로 영생하도록 하시기 위해서는 영혼을 주입(注入)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를 영생하게 하시는 데에는 같은 방법으로서의 영혼 주입이다.

"영혼 주입"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영을 아담 안에 불어 넣으시는 것을 말함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숨[생기(生氣) , the breath of life]을 입으로 불어넣으시니 영혼이 조성되었다. "성령을 받으라" 하시면서 이런 숨을 내쉬시는 형용을 위하신 것이 이 때문이다[요 20:22]. 우리의 새 창조 역시 우리 각자 안에 친히 우리의 '영혼'['육체'에 대한] 격으로 오시는 것을 말함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구원을 아담에게 영혼을 조성시켜 주시던 동일한  단계[두째 단계]로 삼으심으로써 이루시니, 곧 나 자신을 '육체'로 보시고 그 육체의 '영혼'으로서 성령을 주심이다. 때문에 "성령을 받으라"[요 20:22]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는 동작을 나타내 보이셨는데[:22] 이는 당시 아담의 코에 숨을 불어넣으시던 바로 그 모습이시요 바로 그 장면이었던 것이다[창 2:7]. 즉 우리 각자[아담 창조의 경우 영혼이 아직 없었던 그런 육체로 간주하시어]에게 영혼을 조성시키시는 모습을 취하심이었다.

그러나 친히 이렇게 우리 각자에게 '영혼'으로 오시는 것으로써 되는 우리 구원은 아니다. 나와 똑같은 한 사람이 친히 되시어 그와 같이 마치 내 영혼처럼 오셔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신' 유일하신 존재이시므로 영혼처럼 오셔도 이는 영락없이 육체 그대로 오시는 의미와 똑같음이다. 바로 그런 의미로 오셔야 우리의 구원이 된다. '형식'은 육체에 대한 영혼으로 오시는 것이나 그 '내용'이 우리 구원에 절대적인 불가결의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 내용이 다름아닌 죽을 것은 먼저 죽고 난 다음에야 새 창조의 새 생명이 유입될 수 있다 함이다. 그래서 그 필요한 '죽고 그리고 다시 살아나는' 과정을 마치시고 뿐 아니라 신령한 몸이 되심과 동시에 하늘[아담 당시의 에덴낙원(영계)에 해당되는]에 오르신 이후 오순절[고난 받으신 지 50일만의]에 다시 성령으로[그리스도께서] 당시 다락방에서 모여 기도하던 120명 정도의 각 사람에게 임하셨던 것과 같이 바로 그 성령을 나도 받음으로 이 새 창조로서의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가 내게 성립되는 것이다.

이는 내 스스로가 아담처럼 창조되어 아담처럼 신령한 세계 곧 에덴낙원에 있음과 같은 의미가 된다. 왜냐면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심은 내가 바로 그렇게 하늘에 있는 것과 같음이다. 이래서 단계별로 설명했던 아담 창조에서 나는 그 첫째, 둘째, 셋째, 넷째[왜냐면 그리스도 친히 내게 영혼처럼 되시어 육체와 영혼 관계라 영원하신 나의 짝이 되어 계시므로] 단계를 다 거치고 이제는 다섯째 단계에 있음이니 곧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요 20:21] 것이 그것이다.

이 다섯째 단계에 위치해 있는 것이 그리스도 오신 후 우리의 이 세상에 처해 있는 위치이다. 즉 선악간에 모든 인생들이 분류됨이다. 처음부터 믿지 않는 이는 악으로 이미 분류되어 있다. 이는 물론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얼마든지 믿을 수 있는 기회는 충분히 있으므로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믿으면 즉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기로 작정하면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는 은혜를 입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한번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의 복음[복된 좋은 소식]에 접한 다음에도 차일피일 믿음의 결단을 미루거나 무관심으로 대하면 설혹 백년을 산다 해도 마지막이 단 하루처럼 다가설 것이므로 때 늦은 후회를 해보아야 소용 없는 도로무공이다. 그래서 어느 때든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하게 되면 그 때부터 다섯째 단계로 즉각 돌입하게 된다. 즉 세상에 보내심을 받는 위치에 서게 된다.

다섯째 단계에서 그 먹으면 죽는다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보내심 받는 의미인 것이다. 왜냐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보내신 일을 충성스럽게 당연히 하게 되어 있는데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그 이유는 반드시 자기중심으로 우리 마음이 돌아섰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자기중심의 마음이 되어 그 선악과를 먹은 것이나, 우리가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데에 더 신경을 씀으로 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지 않음으로써 자기중심의 마음이 되는 것이나 결과는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 결말은 죽음이다. 아담은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돌아가는 것으로써 그 죽음의 의미가 한정된 것이지만 우리는 이제 성령을 받음으로써 모든 지식[사람 삶의 도리에 대한]을 알게 되고도 범한 죄일 뿐 아니라 앞서 설명과 같이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다시는 용서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는 용서가 없다 하니 얼마나 두렵고 떨 일인가. 그래서 "두렵고 떪"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가 직접 몸과 마음에 와 닿는 절실함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그냥 영생 얻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양자의 영을 받음"[롬 8:15]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 것이 우리 구원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 독자, 외아들)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된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아들 친히 우리를 세상에 보내심이니 이는 곧 아버지께서 그 아들들인 우리를 세상에 보내심과 같은 의미다.

왜냐면 아들[그리스도]과 아버지께서는 하나로 계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아들[그리스도]의 일[나머지 남은 일 곧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움으로써 사람들을 인도하여 구원해내는 일]을 하라고 그리스도께서 처음 세상에 오심과 같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는 중대한 의미이니 이런 큰 사명을 띠고 오는데 신령한 몸으로 세상에 우리가 나타날 리가 없다. 고난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므로 나약한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육체와 똑같은 육체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와 같이 그 의미가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져 달라진다. 전혀 다른 의미의 육체인 것이다. 그리스도 친히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천한 육체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하늘 영광[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는-엡 2:6]을 일시 뒤로 하고 세상에 임하여 와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다[고후 6:1].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천지 개벽이 일어났으니 이 경우 '인간 개벽'이다. '죽은 자'의 현실로부터 '산 자'의 현실로 뒤바꿈의 혁신(革新)이다.

새로운 창조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경고하시던 것과 같은 그런 최종 단계[다섯째 단계] 또는 과정에 우리가 현재 위치해 있는 것이 된다. 아담에게는 그 에덴낙원 자체가 시험 무대였다. 우리는 이 세상이 바로 그 시험무대인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당시 시험하는 자 역할[이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시키신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나]을 한 것과 같이 오늘날도 역시 시험하는 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다.

이렇게 우리의 새 창조와 관련되어 시험하는 과정이 필요 불가결하므로 이런 필요성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 모든 악행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여전히 남아 있어 활동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즉 이 세상은 믿지 않던 때에 몰라서 착각하고 있던 것과는 달리 이러한 시험하는 무대로서의 실상인즉 혼동함이 없어야 마땅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아들들로서 아버지의 일이 실제 우리 자신의 일이니 왜냐면 모든 것을 상속 받은 상속자들이기 때문이다-고전 3:22]을 하는지 여부로써 이 시험 기간을 통과하는지 여부가 밝혀짐이다.

당시 아담이 선악과를 먹느냐 안먹느냐 하는 것으로써 '산 자'와 '죽은 자'의 갈림길에 서 있었음과 똑같은 양상이다. 물론 당시 아담은 산 자로서 영생하는 자였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죽은 자가 되었기에 이런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 역시 이 시험 기간에서 상황은 마찬가지이니 당당히 하나님의 아들이나 하나님의 아들과 아들이 아닌 것과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 현지의 우리 위치인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아담이 '산 자'로서 당당히 창조된 본래의 위치를 지키느냐 못하느냐, 즉 사느냐 죽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다. 영생하는 자들로서 영물들이 창조되었으나 이 사느냐 죽느냐 기로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한 악령들은 죽음의 길을 택했고, 거룩한 천사들은 생명의 선택을 한 것과 같다. 아무도 죽음 길인 줄 알면서도 택하는 일은 없다. 단지 엉뚱한 생각이 들어, '자기중심이면 죽는다'는 경고 혹은 지식을 헤프게 생각하고 심각하게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는 오만함이 화근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번 구원을 받았다고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성경을 모르는 데에서 빚어지는 치명적인 것이 된다. 아담도 거쳐야 했고 영물들 즉 천사들도 마땅히 거쳐야 했던 과정인데 어찌하여 우리 곧 새 창조의 피조물된 자들로서 그 과정이 생략되리라 감히 생각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막중한 의미의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창조다. 그런 만큼 하나님 아들 친히 인간이 되시고 인간의 모든 고통을 짊어지시는 등의 말할 수 없는 고초 가운데 이루어진 구원인데 어찌 가볍게 다루어지겠는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도리로서 더 심한 시험도 불사할 터인데 최소한 동등한 수준의 시험은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 아닌가. 하기야 우리라고 해서 그 어떤 가혹한 연단이나 심한 시험 같은 것은 일절 없다. 죽은 자로서의 모든 인생들이 다 함께 받는 그런 정도의 시련이요 시험일 뿐이다. 이마저도 장차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생과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롬 8:18/고후 4:17].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면해 있는 하나님의 일은 사람 살리는 일 외에 아무 것도 없다. 얼마나 보람차고 자랑스러운 일인가.

공짜라는 말에 솔깃해하지 말 일이다. 이는 노름판에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그런 망상과도 같은 것이다. 당당히 노력하여 얻으라는 것이 하나님 뜻이다. 이는 천국이 값진 진주를 만아 그것을 자기 전 재산을 들여 구입한 장사꾼과 같다고 하신 데에서 잘 드러낸다. 내 편에서의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이것이 천국 가는 것은 내가 스스로 침입해 들어가 쳐서 빼앗는 것이라고 설명하신 이유이기도 하다[눅 16:16/마 11:12].

아담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다가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거기 걸맞게 육체도 신령한 몸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담을 위해 별도의 세계 즉 신령한 세계가 창설되어야 했으니, 그러면 이제 우리의 경우 아담이 영계(靈界)에 들어가는 것에 해당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두 가닥으로 생각할 것이 있다. 양면성의 이치라고도 할 수 있는데,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두 가지 측면이다.

즉 영적으로는 이미 나는 아담처럼 에덴낙원[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신 바 됨]에 있다가 다시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상태이니 이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그러나 육체적으로는 아직 내가 하늘의 에덴낙원은 구경도 못해본 상태다. 그러므로 이 경우, 아담 당시의 에덴낙원에 해당되는 것이 다름아닌 주님의 다음 말씀이신 것이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處所, 있을 곳, 살 곳)를 준비하러 가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할 것이다"[요 14:2,3].

그러므로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은 그 처소[아담 당시로 말하면 에덴낙원에 해당]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뜻한다. 그 "처소"가 넓게 보면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이고, 좁게 보면 우리 "몸의 구속"[롬 8:23]이다. 아담이 에덴낙원에 들어감으로써 그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환된 순서와 같이 함이다. 이 "몸의 구속"을 "양자됨"[:23]이라고 다시 못박은 것이다. 이미 양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아바 아버지"[:15]라 하는 것이 현실인데 다시 양자됨이라 한 것이다.

이는 우리가 구원을 받았음에도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이룸"[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이라고 경고한 것과 같다. 이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친히 우리를 구원하셨으나 이 구원이 피동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에 능동적인 것이 되도록 함에 있는 것이니 앞에서 설명한 대로의 시험 기간에 시험의 대상이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시 말해 덮어놓고 영생하게 하심이 목적이 아니라 영생하는 법질서를 사랑하는 자 다시 말해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자에 한해 영생을 주심이다. 바로 이 저울질에서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은 미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담은 그가 들어가 살 처소로서의 에덴낙원을 그 자신이 준비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우리의 마지막 아담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친히 그 처소 즉 우리가 들어갈 영계를 준비하시는 것이다. 새 창조에서도 그리스도는 여전히 아버지의 형상으로서 창조주이시다. 그래서 그와 같이 성령을 받으라 하실 때 아담의 경우 그 코에 숨을 불어넣으시는 형상을 친히 해 보이신 것이다.

또한 아담을 위해 에덴낙원을 창설하셨던 것처럼 친히 우리가 거할 처소를 마련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새 창조에서도 창조주의 위치에 계시기 때문이다. 여전히 아버지께서는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를 새로 창조하시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아들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셨다. 이 일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때는 이미 그 "처소"가 완료되어 있음을 의미하므로, 그 곳에 직접 들어가지 않아도 이미 우리 몸은 그리스도와 같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는 아니니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자들에 한한다. 나머지는 그 때 부활하지 못하고 마지막 심판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아담이 에덴낙원에 들어가 그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환했듯이 구원 받은 모든 사람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 받은 후라도 이렇게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남아 있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이기는 하지만, 그 중에도 차이가 있으니, 이는 열매를 맺어도 혹자는 100배, 혹자는 30배에 그치는 경우와 같다.

이제 우리는 천국 그 완전한 삶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만 남았다. 그러나 아담 당시와는 환경의 여건만 아니라 차원부터 다르니 아담은 에덴낙원에 아담을 두심으로써 신령한 몸이 되게 하셨지만, 우리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우리가 구원 받은 자답게 행동하느냐[롬 2:7/고후 5:9-11] 여부를 따라 "몸의 구속"이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아담은 그렇게 신령한 몸이 되었어도 범죄로써 죽음에 이르렀고, 우리는 아담처럼 범죄하게 되면 신령한 몸이 되는 것부터가 불가능해지는 것으로 가름된다.

구원을 받은 자답게 순종하는지 여부는 "선을 행하는지" 여부로써 드러남이다[롬 2:7]. 그래서 이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리켜 무릇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천국으로 쳐들어가[침입하여] 빼앗아 차지하게 된다고 명백히 하신 것이다[마 11:12/눅 16:16]. 내 스스로 그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고 않고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나의 영원한 운명은 내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하나님 친히 내 운명을 정해 주시는 것으로 구원을 착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인데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연히 우리를 구원하셨지만 구원의 양면성에서 내 스스로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아담이나 영물[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이 그 자신이 들어 자기 생명을 잃어 버리는 결과를 낸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 사실을 두고, 그들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낸 거룩한 천사들이 그 스스로를 영원히 살도록 창조했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과 같이, 우리 스스로 아무리 "조심하여"[고전 10:12]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었다"[빌 2:12] 해도 우리 자신이 들어 우리를 구원하였다, 또는 영생에 들어가도록 스스로 정했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에 달렸다 주장하는 것은 항상 강조하는 대로 "기독교"라는 세상 종교의 교리일 뿐이다. 아담은 그렇게 신령한 몸이 된 다음에도 그런 자유 선택의 결정을 하게 되어 있었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자기의 생사를 가름한다는 점에서는 아담이나 우리나 똑같다. 영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아담 스스로의 그러한 '결정'으로 인한 부정적 결과[범죄]에 의한 죽음을 물려받아 오늘날 구원에 이르렀은즉, 우리는 그런 '결정'을 천국에 들어가기 전 이 세상에서 하도록 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즉 아담처럼 범죄하면 아예 그 천국에 들어갈 필요조차도 없다는 의미가 된다. 아담처럼 범죄하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아담의 추방[에덴낙원으로부터의] 사유에 해당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담이 추방되던 것과 같은 처분을 아예 추방되기 전에 즉 천국에 들어가기도 전에 처음부터 받는다는 뜻이다. 양면성이다. 앞의 설명처럼 신령한 세계로서의 영계 곧 에덴낙원에 들어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아담의 모습을 우리가 취함과 동시에, 에덴낙원에 있으면서 최초[시초]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명령을 지켜 순종하는지의 여부를 시험하시던 때의 아담의 위치, 이 둘을 한꺼번에 우리는 거쳐가고 있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를 설명하면,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된 몸으로서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한 터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은 내 자신이 바로 그렇게 현재 위치해 있음과 같다[엡 2:6]. 아담으로 치면 이미 에덴낙원에 가서 위치해 있는 격이다. 나와 하나 되어 계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렇게 충분히 설명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둘이 하나 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바로 나 자신이 그렇게 되어 있음을 반영함이다. 고로 이미 나는 영계에 들어가 있는 몸이다.

그런 몸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다시 자연계의 몸으로 복귀한 셈이니[요 20:21,22] 곧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실 때 내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 와 현재의 육체를 새로이 받은 의미가 되고,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면서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위치해 있는 바로 그런 모습이 되어 있음이다. 이는 아담이 에덴낙원에 있으면서 절대로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명백히 알게 되는 순간과 같다.

이렇게 우리 구원의 양상(樣相)은 아담과 똑같이 되어 있는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담이 그 때 당시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고 이행하지 않음을 인해 영구적으로 에덴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한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이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으로써 이루지 못하는 경우, 아담이 영계로부터 축출당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는 것임을 다시 강조한다. 우리가 언제 그런 영계에 있었느냐 하겠지만, 우리의 현재 상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하늘에 앉힌 바가 된 신분으로서[엡 2:6]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니까 그러하다.

그러므로 아담처럼 축출당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이 하나 됨에서 쫓겨난다는 의미이다. 내가 쫓겨난다는 것보다 내 스스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의 아들을 발로 밟는 망동을 하는 것임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다[히 6:6/10:26,29]. 보내심 받은 자세가 되어 충성할 때 그래서 모든 시험을 이기고 있는 단계가 바로 범죄하기 전 아담이 에덴낙원에 들어가기 위한 대기 상태에 있던 것과 같은 양상이 된다. 아담처럼 추방당하는 경우가 되지 않으려면 나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복종의 자세가 필수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기꺼이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룸을 가리켜 누구든지 천국은 침입하여 들어가 빼앗아 차지하는 것으로 표현하신 것이다[눅 16:16/마 11:12]. 왜냐면 사랑이 모든 것의 관건이니 사랑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주인 의식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거룩한 천사"들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이나 우리 자신이나 모두 그렇게 선과 악으로 자기 스스로를 나누는 것이 필연적이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아담의 허리에서 나오는 모든 인간들이 그런 영물들처럼 에덴낙원에서 그 선과 악이 나누어질 것이나 불행하게도 첫 사람 자신이 범죄로 죽음에 이름을 인하여 그 시험 무대[선과 악을 다루어 보는 또는 선과 악을 자유 의지로 선택하는]가 에덴낙원이 아닌 이 세상으로 바뀌어져 있다는 그 차이다. 그 외에는 기본적으로 달라진 내용이 있을 리 없다. 우리나 그들이나 똑같은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이라 한 것은, 세부적으로는 다르다는 뜻이니 즉 우리는 이러한 첫 사람 아담의 죄와 죽음을 물려받은 상태에서 원상 복귀하려니까 부득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제반 절차가 필수적이어서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을 지칭함이다. 이 사실을 제대로 파악 못하고 혼동하여 [성경이 명백히 이 사실을 밝히고 있음에도 성령의 계시를 의존하지 않고 인위적인 교리나 교훈을 의지하고 있는 탓으로] 오늘날 많은 사람이 구원을 단순히 영생을 공짜로 받아 누리는 것쯤으로만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착각은 논리적으로도 모순되고 자가당착이 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임을 그 자체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에도 외고집에 끌려 이를 눈치채지를 못하고 있다. 마치 불교 교리가 평범한[이 평범함을 절대로 과소평가하지 말 것이니 단순 명료한 평범함이 진리의 최대 장점이요 강점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상식이 용납하지 않는 공리공론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 천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양상이다.

이 말은 인간 자체가 어리석다는 것이 아니니 원래 어리석게 인간을 창조하시지는 않은 것이다. 인간 각자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에 끌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에 말려들어간 비참한 결말임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에게 자유 의지의 선택권을 부여하시어 처음부터 자유인으로서 창조하신 것처럼, 어디까지나 나의 주도하에 나의 주인 의식, 주체 의식으로 이루어지는 일체의 일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이나 시험도 나의 의지 여하에 따라 작용되는 부차적인 것이다.

악이든 선이든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유 의지를 구사하는 피조물들이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절대로 원하시지도 않고 용납하시지 않는다. 왜냐면 본래 그렇게는 인간을 창조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올바른 방향]이든 악[그 반대 방향]이든 피조물 자신의 자유 선택에 의한 처신에 달렸다. 범죄 행위도 스스로 선택하여 이루어진 비정상적 행위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 자신의 선택에 의해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는 믿는 자는 적고 믿지 않는 자가 더 많다. 억지로 믿게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강제나 간섭은 일절 배제된다. 위협도 회유도 아니하신다. 이슬람처럼 강제로 믿게 하거나 또는 현세에서의 축복 등으로 그런 것을 과시하면서 믿게 하는 따위의 일체의 것은, 성경으로 난 것이 아니라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부터 난 것임을 아주 단정해 버려도 진실에서 벗어남이 없다. 하나님이 가르치시고 오게 하여 주시고 이끄셔야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도[요 6:45,65] 그런 강제나 회유를 가리키심이 아니라, 이미 설명한 대로 자기중심을 따르지 않고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할"[히 1:9] 줄을 미리 아시는 차원에서 그런 사람들을 믿도록 하신다는 것이지[행 13:48], 처음부터 이 사람은 선호하여 믿도록 만드시고 저 사람은 불문곡직 미워하시어 버리시는 그런 뜻이 아닌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공의(公義, 정정당당하고 공명정대 공정공평한 기준으로서의 판단)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인가[롬 6:3]. 아담의 범죄로 이미 죽어 있는 자를 살려 산 자로 만드심은 당연히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자동적으로 다 산 자로 만드시지는 않으니 말씀을 듣고 믿는 자 즉 순종하기로 작정하는 자에만 한하여 나타나는 구원이다. 이는 "믿는다"는 의미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었으니 이제부터는 그 사랑에 전적으로 순응하여 향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하나님 뜻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겠다는 의지 표명이 당연히 수반됨을 말하는 것이다.

그 증거가 다름아닌 회개이다. 회개 없는 믿음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 것이 이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되는' 사실을 알리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구원자로 이제 세상에 오셨음'을 알리는 세례 요한의 유일한 메시지가 오직 "회개하라"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당연히 세상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믿으라"가 아니라 "회개하라"는 것임을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가르친 바울 자신이 강조한 바다[행 17:30].

회개함으로써 믿는 것이니 따라서 회개 없으면 믿음이 아니다[행 17:30/20:21/26:20/눅 13:1-5]/히 6:1/벧후 3:9]. 이리하여 회개함으로써 순종하기로 작정한 다음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 됨에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처음부터 나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 즉 주인 의식일 수밖에 없으니 왜냐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즉 동시에 움직이는 ‘둘이 하나 됨’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사랑으로써 역사(役事)하는 믿음"[갈 5:6]이라고 성경은 단정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관계의 특성상 주님은 미리 경고하시기를 “나를 시인하면 나도 시인할 것이요 나를 부인하면 나도 부인할 것”[마 10:32]이라고 명백히 하신 것이다. 이상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심은 우리가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주님을 위해 살도록 하려 하심이라는 사실과 일치한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서 살아 자기를 위하는 경우 구원 받은 자의 대열에서 탈락하는 것이다.

'아담의 에덴낙원 추방'이 이제는 내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자기를 위하지 않을 때는 오직 나를 보내신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하는[요 4:34] 일에만 진력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정상 궤도에서의 삶의 법질서다. 즉 누구든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즉 일껏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러 죄 용서 받고 성령 받고 망극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왔으나 그 스스로 자기 자유 선택으로 얼마든지 옛 생활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성경이 그토록 숱한 경고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경고 말씀이 있을 까닭이 없다. 아담은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 거기서 신령한 몸으로 있다가 범죄함으로써 이 자연계로 축출되었지만, 우리는 그런 아담의 범죄의 결과로 이 자연계에 있는 몸이므로 아담과는 그 근원이 다르니, 우리 자신은 물론 영계인 에덴낙원에 있어본 적이 없지만 우리의 근본으로서의 아담은 이미 영계에 있어 신령한 몸으로 있었던 관계로 아담과는 달리 이 자연계에 속한 세상에서 우리가 아담과 같은 시험의 대상이 되어 있음은 대칭 관계에서 서로 조화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첫 사람 아담과는 달리 영계에 들어가기 전에 이 시험을 거치게 되고, 아담처럼 범죄하게 되면 신령한 몸을 입지도 못한 채 즉 '몸의 구속"[롬 8:23]에서는 제외되고 천국에는 영원히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상의 설명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논리 정연하고 가장 합리적이고 타당성을 띠는 더할 수 없는 조화 통일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발산하고 있다. 개개의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어느 하나도 어긋나 있는 것이 없고 전체 하나로서의 완벽한 작품으로 그 위용을 빛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특징이다. 인간을 그와 같은 논리적인 판단의 존재로 창조하셨으므로 그 말씀 역시 그러한 것이다.

오직 조물주 하나님만이 진정 나를 위하시는 분으로서 내가 나 자신을 위함보다 더 잘 완벽하게 위하실 수 있다는 원천적인 진리를 깨달아 다시는 과거와 같이 자기 자신을 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하심이 우리의 구원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신 것을 가리켜 “마귀의 일[죄 짓는]을 멸하려 하심”[요일 3:8]이라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기 부인은 문자 그대로 성취된 것이다.

이미 성취되어 있는 것을 '믿음'으로 따르는 것이지 내 스스로 자기 부인을 이루는 것이 아니니 스스로 이루어서 될 일이 아님이다. 오직 하나님의 새 창조에 의해서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사실'대로 행함에 있다. 이 사실을 똑바로 깨닫고 그 믿은 대로 살아가면 즉 행동하게 되면 그것으로 이상세계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각 사람의 장래는 비로소 희망이 가득한 것이고 분명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죄와 무엇이고 불의, 불법을 무엇이냐, 공동체 의식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이다. 공동체 의식은 '하나' 의식, '우리' 의식, '한 몸' 의식이다. 따라서 죄는 이런 정신에서 벗어나 자기 한 몸의 욕심대로 나가자는 이기주의, 개인주의이다. 세상의 모든 윤리 도덕[공중 도덕을 포함해서], 법률 기타 등이 그 근간 골자가 이 공동체 의식인 것이다. 인간이 혼자 살지 않고 여럿이 사회를 이루어 사는 이상, 이 공동체 의식은 필수 불가결이다.

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다.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자기 이웃을 그 한 몸 구조에서의 자기와 같은 지체로 인식함이다. 인간 사회에서도 이런 공동체 의식을 이렇게 최고 가치로 치고 이기주의를 가증한 것으로 보는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랴. 그런 철저한 공동체 의식이 어떤 결과를 내고,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이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개인주의 또는 이기주의가 어떤 결말을 초래하느냐 하는 것은 임란 당시 이공 순신과 '나'원균의 행적에서 아주 극적으로 명확하게 입증되고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사람으로서의 죽음을 당하시기까지 하시면서 인간을 새로 창조하시는 마당에서 이런 극히 기초적이고 초보적인 것 하나 해결하지 못하셔서 인생들로 하여금 여전히 "육신"[롬 7:14-8:13] 가운데 있어 죄인으로 죄를 짓고 있음에도 의롭다 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생각을 감히 품는다는 말인가. 불교와 같은 세상 종교의 헛된 주장도 마찬가지다. 한 몸됨의 이치만 잘 생각하면 결코 진리는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자기 코앞에 있음을 알게 된다.

즉 공동체에는 머리가 있게 마련이니 한 나라에 임금이 있고 조직에 그 단체 장이 있듯이 우주 만물과 모든 세상 나라를 한 몸으로 구성하는 데에는 그 머리로서 인간 아닌 인간보다 크시고 초월하시는 존재가 있게 마련이다. 이는 세상 나라들이 저마다 최고 통치자 또는 지배자를 두고 있음을 보아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인간끼리 서로 자기가 세상의 우두머리가 되려 하니 분란이 일어나고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고로 인간이 이 인간 세상의 머리가 애당초부터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반드시 조물주 하나님의 존재를 아니 인정할 수 없는 결론에 쉽게 도달하는 것이다. 어려운 숙제도 아니고 난해한 수학 공식도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상식 수준에서 그와 같이 누구나 판단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간단 명료한 일을 가지고 복잡하게 생각하여 고민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악신(惡神)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 아래 되어지는 일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한 것이다. 하물며 사회 조직의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이 되는 가정에서 어찌 머리가 없는가. 양성평등은 머리가 둘 있다는 망상이니 한없이 어리석은 무리가 된다.

인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황당한 주장은 논리적으로도 통하지 않거니와 자연법칙마저 무시하려 드는 까닭에 그런 미신도 없다. 한번 죽으면 그 육신이 썩어 흙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라는 자연법칙마저 무시해 버리는 비과학적 주장으로 일관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의 실태를 동시에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런 인간의 행복한 세계를 방해하려는 자가 있다는 현실에 똑바로 눈떠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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