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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1체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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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영사운이란? (8) 등록일 2016.02.16 21:40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12

 

④그리고 나의 지나간 죄는 다 용서되었다는 근거 역시 확고 부동한 사실로 정착되어 있어야 자기를 위하지 않는 자기 부인이 가능한 것이니, 역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내가 죽어 장사 지내졌으니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은 완전히 치러진 것이다. 그래서 내 죄가 용서되고 다시는 이전 죄 때문에 고민하거나 불안해 할 모든 요인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일절 나 자신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근거가 아주 완전하게 소멸되어 있다. 다시 말해 내 죄 용서를 위하든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하든 나 자신을 위함으로부터는 완전 해방되어 초연해진 자유를 구가함이다.

그리고 이 자기 부인은 영원한 법질서이므로 천국에서나 이 세상에서나 엄격히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나, 이 세상에서는 이상 설명과 같은 생명과 사랑의 법질서 차원에서 나를 위해 주는 이가 교회 외에는 없으므로 '자기중심으로 사는 세상'에서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일종의 자살행위로 인식되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그들을 위하나 그들은 나를 위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을 기준하는 안목으로는,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 미련한 것으로 자기 부인은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그래서도 사는 곳이 아니라 오직 일하는 곳일 따름이라 하는 것이다. 왜냐면 근본적인 사람 삶의 요건이 갖추어져 있기 않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영원한 영계가 아니고 우리의 몸이 신령한 몸이 아니라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그렇다는 결론이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 하더니 원숭이 잡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원숭이 손이 겨우 빠듯하게 들어갈 만한 정도의 아가리를 가진 허리 불룩한 단지 안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것을 넣어두고 기다리면, 원숭이가 와서 그 항아리 속에 손을 집어 넣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한 줌 쥔 채 손을 빼려고 하면 주먹을 쥐었을 때와 손을 폈을 때가 완연히 달라 손을 차마 탁 펴지를 못해 버둥거리다가 결국 잡히고 만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 원숭이와 무엇이 다를까. 욕심 즉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생각하고 위하는 것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기중심'을 미련 없이 탁 손놓고 버리면 한정도 없이 크고 많은 것을 얻게 되는데,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코앞의 욕심에만 매달리니 어리석기 한도 없다. 욕심으로 꽁꽁 움켜 쥔 '자기중심'의 주먹을 탁 풀고 손놓아 버리면 하늘과 땅이 온통 자기 차지가 되는데 이 진리를 알지 못하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함정에 그대로 속절없이 걸려 드는 수밖에 없다.

한편 진리를 믿고 진리대로 이렇게 자기 부인 일변도로 나가는 이들은 자기중심 일변도의 세상에서 생활이 고달플 수밖에 없으므로, 적은 무리지마는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믿음의 형제들이 서로를 위하도록 되어 있으니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사업에 전심전력으로 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는 누구든지 자기 가진 바 재산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없이 모두가 공동으로 사용했다고 되어 있다[행 4:32].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데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 되어 한 몸을 이루어 인생 구원의 공동 작업을 펴고 있는 한 식구들인데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뿔뿔이 자기중심으로 나가고 자기 부인을 철저히 외면해 온 결과다. 지금까지 설명해온 것 모두가 누구든지 양심적으로 판단하면 이해 못하는 바가 하나도 없다. 단지 문제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과연 그것이 이 세상에서 통하는가?" 하는 데에 있다.

사람이 되어 있는 이상 마땅히 알 만한 것이고 따라서 누가 말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양심상으로 스스로 알고 있는 것들을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위에 말한 자기 부인의 사람 삶의 도리다. 새삼스럽게 알게 되는 것도 아니다. 한번 들으면 다 납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단 성경을 아는 사람만 아니라 하나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는 사람도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닌 것이다. 양심이 다 증언하고 있는 것을 말하기에 그렇다.

문제는 "이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그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외면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들어도 본성으로 다 알고 있는 것이지만 단지 이 세상에서 죽고자 하면 몰라도 살고자 할 때는 탁상공론이라는 데에 모두가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믿음 유무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 얻는 믿음'이, 바로 이런 '문제'점 즉 세상과의 충돌 더 분명히 말해 시험하는 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창 3:15]에서 그 '여부'와 '유무'가 구별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점을 노려 혹은 틈을 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 세상 삶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처럼 살아도 살고자 해도 삶의 낙을 어느 정도 누리더라도 영생만큼은 얻을 수 있다는 색다른 "복음", "다른 예수"[고후 11:4], 다른 구원, 세상의 "기독교"를 만들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성경대로 믿기이냐 아니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지어낸 인위적인 교리의 세상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택하기냐 하는 양자 선택이다. 여기서 믿음이 '있음'과 '없음'의 분기점이 세워지게 된다.

이 대목에서 헤쳐 나가는 유일한 길은 오직 '자기 부인'이다. 이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싸움에서 완전한 정신무장이다. "하나님의 완전무장"[엡 6:11]으로 아무리 자신을 갖추어도 다시 말해 군인이 아무리 첨단 무기로 완전무장해도 그 정신 상태가 해이해져 정신무장이 되어 있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음과 같은 이치다. "자기 부인을 못해서 문제가 되어 있는데, '자기 부인이 그 해결책이라'고 말하면 하나마나한 소리가 아닌가" 하겠지만, 그래서 믿음이 있고 없음이 모든 것을 판결 낸다 하는 것이다.

즉 믿음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 있는 나의 이 자기 부인을 사실 그대로 수용하느냐의 여부로 가름되어져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그것이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 즉 나를 위해 죽으심의 의미 다시 말해 내가 부인된, 자기 부인이 되어 있는 사실을 정확히 성경의 관점대로 보는 것이 필수적이니, 그냥 단순히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죽으셨다 즉 '내가 이미 죽은 자인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첫째 시점(視點)이다.

그 둘째 시점이 되는 것이 따라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인정함이다. 셋째 시점이 "세상이 내게 대하여 나는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함이다[갈 6:14]. 내가 죽은 것이 분명할진대 이는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써 내가 세상을 대하는 새로운 시각(視角)의 근거와 토대가 된다. 즉 다시는 이 세상을 산 자의 세계로 착각하지 않고 죽은 자의 죽음과 죄의 세계로 정확히 인식함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유일한 요건으로 바로 이 자기 부인을 미리 말씀하신 것[우리가 전도할 때 이 사실을 미리 말해 주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즉 망대 비유로써 그 점을 명확히 하신 것이다[눅 14:27]. 다시 말해 인간을 애초 영생하는 자로 만드셨음에도 범죄하여 우리가 죽은 자가 되어 있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게 해 줌으로써, 죽은 자가 산 자 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지, 처음부터 아담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살던 중 범죄하여 영적으로 하나님과 절연(絶緣) 상태에 있다가 이제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 우리 구원의 의미가 아님을 분명히 알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앞서 지적한 첫째, 둘째, 셋째의 의미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확인하는 것을 말함이다. 곧 스스로 죄인됨을 인식함이니 이는 죽음과 직결되어 자기가 죽은 자가 되어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 되고 여기서도 이미 자기가 부인되어 있음[왜냐면 '죽은 자'가 되어 있기 때문]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시각이 믿음이다. 그런즉 자기 부인은 영원한 생명의 법질서의 핵심임과 동시에, 이 죽음의 세상에서 구원에 이르는 생명의 힘찬 첫 시동(始動)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정상적으로 사물을 보는 안목이 열려짐이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께 오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신 것이다[요 6:65]. 앞서 망대 비유를 말씀하심과 같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한동안 따르다가도 많은 제자가 미련없이 물러간 것이다[:66]. 이런 현실을 똑똑히 직시해야 제대로 된 믿음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즉 이 세상 살고자 하고 사람 사는 세상으로 착각하면서 영생하고 싶은 마음이라면 그런 사람은 구원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들 "많은 제자들"처럼 나도 그리스도를 떠나게 되어 있다. 아니면 이미 떠난 상태에서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고후 11:4]을 받아 심판을 자초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시할 것은, 성경이 이러한 여러 사람이 인식하는 대로의 "비현실적인"[그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자기 부인을 말하면서도, 그냥 그렇게 자기 부인을 하게 되어 있는 까닭을 말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바로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믿기를 포기하고 물러서게 될 것을 성경이 미리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런 가르침이 '이 세상 삶'에서는 절대 통용되지 않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따라서 절대 다수가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며 상대적인 극소수만이 이 가르침을 따를 것을 충분히 예견하고 믿음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성경이 적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자체 증명한다

이런 "인기 없는" 즉 절대 다수의 대중들로부터 외면 당하는 것을 성경이 미리 가르치며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성경의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 중의 하나임에 유의할 일이다. 다시 말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임을 정직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거짓말은 원래부터 그 성격에 부합하게 대중에게 영합되는 내용이 아니면 말하지 않는 법이다. 그것이 불특정 다수를  상대할 때 더욱 그러하다.

원래부터 속이는 것이 목적이고 속여도 절대 다수를 속이려는 데에 있으므로 절대 다수에게 영합이 될 수 있는 말을 하는 것이지 거꾸로 절대 다수는 외면하고 극소수만이 수용할 수 있는 내용은 절대로 하는 법이 없다. 하나님의 진리 말씀이시기 때문에 세상 사람의 환심(歡心)에는 아랑곳 않고 믿고 안믿고 하는 것을 계산하지 않고 오직 진실 그대로만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다. 그것도 만물을 지으신 어버이의 심정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니 더욱 그러하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고"[딤전 2:4], '오래 참으시어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면서도"[벧후 3:9] 그러하실 때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와 하나됨에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자기 부인이니, 왜냐면 자기를 위하고는 그렇게 둘로서 하나를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냥 일시적으로 의기(意氣) 투합(投合)할 뿐이고 그래서 한 때만 함께 할 수 있을 뿐이지 영원히 함께 살지는 못한다. 영원히 둘이서 '한 존재'를 이룩하려면 절대적으로 갑과 을은 사는 것 자체가 갑은 을을 위함이어야 하고 을은 갑을 위함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불가분이 아닌가. 왜냐면 갑 없이는 을이 못살고 을 없이는 갑이 존재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이것이 '한 몸'의 구조이다. 즉 머리를 떠나서는 몸이, 몸을 떠나서는 머리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꼭 그대로의 체제인 것이다. 즉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둘이 하나됨은 속박이요 구금이인 것이다. 그 어느 쪽도 이런 부자유를 견뎌내지 못한다. 오직 사랑이라야 언제나 어느 경우에서나 영원히 그렇게 하나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자기 부인[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지 않고 상대를 위하는 것을 생명 자체로 여기고 즐거워하므로]이 없이 사랑을 논하지 말고 구원을 말하지 말고 언감생심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즉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음을 즐거워하고 사랑하고 이것이 없이는 절대로 못산다는 그런 심경이 아니라면, 자기가 과연 믿음에 있는지 시험하고 확증할 필요가 있다 함이다[고후 13:5].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항상 기뻐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것이 이 때문이다[살전 5:16-18].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는데 즉 주님께서 "나를 지키시므로 악한 자가 나를[혹은 주님을] 만지지도 못하는데"[요일 5:18] 악한[좋지 않고 나쁜] 것이 감히 내게 접근하겠는가. 그것이 비록 죽음이고 고통 고난일지라도 내게 유익하기 때문에 닥치는 모든 것이 아닌가. 이미 소개한 그 "찬송 한번 실컷 불러보는 것이 소원"이라 하여 북에서 탈출했던 21세기바울이 얻은 기도 응답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내가 능력이 없어 이제까지 너를 고생시켰겠느냐, 네게 좋은 것만을 시키는 나의 뜻이기 때문이 아니냐"가 아니셨던가. 그래서 범사에 매사에 감사 찬송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런 믿음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주님의 광야 시험에서 보는 바와 같은 그 시험의 특징인 것이다[눅 4:9].

나의 이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나와 같이 지켜 주시는 것 하나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둘이 하나됨으로써 그렇게 하시는 것인즉 이 둘이 하나됨을 나 자신 스스로 지키지 않는 한 이 둘이 하나됨은 더 이상 존속될 수 없는 까닭이다. 나의 몫 즉 내 스스로 지키는 것은 무엇인가.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바로 그것이니 즉 나는 어떤 경우에서도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자기 부인을 영원히 지속시킨다는 전제 아래 이루어지는 모든 은혜요 축복인 것이다.

언어의 유희(遊戱) 또는 희롱(戱弄)

불교에서, “모든 것은 덧없고, 덧없는 것은 괴롭고, 괴로운 것은 내가 없다”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외고 있는데, 이는 가령 어떤 것이 있을 때 그것이 나의 소유라면 내가 그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있고 이런 자유가 있을 때 괴로움이 없는데, 이생의 삶에서 괴로움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실체이므로 이는 그것이 나의 소유가 아니라는 증거인즉, ‘모든 것’이 괴로운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확증이 된다는 논리를 편다.

여기까지는 그냥 넘어간다고 하자. 그런데 왕청스럽게도 “그러기 때문에 괴로운 것은 내가 없다는 증거"라고 하는 결론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인가. "나 자신도 생로병사의 덧없음에 속하여 괴로운 것이고 나 자신도 내 마음대로 하는 자유가 없어 괴로운즉 따라서 [나 자신이] 내 것이 아니다" 하는 억지 논리의 망상으로 비약하는가 하더니, 급기야는 왕창 곁으로 새면서 정상 논리의 경계[한계]까지 훌쩍 뛰어넘어, “나 자신이 내 것이 아님이 드러났은즉, 그러므로 나는 없다”는 '기상천외의 결론'이 바로 '불교의 논리'인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교리의 핵심으로 내세워 노상 주장하는 “무상(無常)”의 실체라고 그들 스스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의 '무상'은 영원성과 대립되는 시한성(時限性) 정도로 알고 있는데 그들은 여기에다가 인위적인 교리를 하나 더 만들어 얹어 놓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다름아닌 “괴로운 것은 내가 없다”이다. 그러니 한 마디로 논리 부재, 이성 부재, 지성 부재이다. 오직 인간의 감성 위주다. 감정에 좌우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우리의 다반사(茶飯事) 일상생활에서 증명되는 바가 아닌가.

그래서, 모든 인간고의 해결책이 자기 부정이라고 그들은 결론 짓고 있다. 자기 부인[self-denial]과 자기 부정은 다르니 하늘과 땅 차이다. 후자는 생판으로 '있는 것'을 "없다" 하고 '없는 것'을 "있다" 하고. '가는 것'을 '오는 것'으로 알아듣고 '오는 것'을 '가는 것'으로 해석하는 광란 아니면 아무리 좋게 이해해도 자가 최면, 자기 세뇌다. "괴로움"이 어째서 "내가 없음"이던가. 아무 사람이나 길 가는 사람을 남자건 여자건 붙들고는 느닷없이 "당신은 나의 부친이요" 하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한 반응은 "이 사람 되게 미쳤네" 하는 흘기는 눈뿐이다.

다시 반복하지만, "필설(筆舌)로 형용할 수 없다"는 말도 있듯이 인간의 언어는 극히 한정적이다. 언어 구사는 무슨 예술의 영역도 아니고 정직하게 고지식하게 표현되는 것이 생명이다. 있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있다는 것이라는 외고집으로 나가지 않으면 언어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언어의 유희나 농락처럼 치사스러운 것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니, 괴로운 것을 괴롭다고 인식하는 것이 나라는 주체일진대, 내가 없다면 어떻게 그런 것이 인식 가능해졌는지 그것부터 묻고 싶어진다.

내가 없다면 남도 없는 것이요 그런 식으로 나가면 모든 있다고 하는 것은 실제는 없는 것을 있는 줄로 착각한다는 것이니, "있다" "없다" 하는 말부터 없애야 그런 논리가 혹 정당성을 인정 받을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는 한 궤변으로 통할 수밖에 없음을 먼저 지적하고, "어떤 것이 있어 그것이 나의 소유이면 그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에 괴로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 설정 자체가 우리의 일상생활과는 동떨어진 비상식적인 것임을 지적한다.

나의 소유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요 한없이 유치(幼稚)하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범 새끼 한 마리를 우연히 데려다 키웠는데 당연히 그것은 누가 훔쳐 갈 수 없는 나의 소유이다. 그런데 그것이 자라서는 나를 물어 버려 내가 불구자가 되었다고 했을 때 나는 과연 '괴로움'이 없는가? 수천 년 세월로 전승되어 온 불교 교리가 이 정도로 엉성한 것이라면 우리는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처음 시작이 그런 식으로 나가니 그 결론이 어떨 것이야 명약관화, 불문가지다. 그런 전제부터 지금에 와서 정정할 것인가 하는 화두부터 던져 주고 싶다. 괴로움은 즐거움의 대립 개념이다. 고(苦)가 있으면 반드시 낙(樂)이 있는 법이다. 세상이 괴로움만 있다고 보는 것 역시 너무나 피상적이다. 수박 겉 핥기요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이다. 그리고 고(苦)만 있다고 가정했으면, 고가 아닌 낙(樂)만이 있을 수도 있음을 얼마든지 시야 넓게 가정해 보는 안목쯤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한 곬[결론]으로만 무작정 끌고 가려는 무리함이 흠씬 배어 나오는 섬뜩함을 어찌할 수 없다. 왜냐면 무작정 일방적으로 몰아가는 회오리바람과 같은 성질이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일체의 이성과 논리를 말살하고 모든 인간을 한 곬으로만 의도적으로 몰아붙여 세뇌시켜 독재하고 조종하려는 깊은 수렁이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논리에서 벗어나는 그 무엇이든 이를 강조할 때 그리고 수용할 것을 요구할 때, 결말은 광란이 된다.

이런 일방적으로 휩쓸어가 속박하려는 의도가 엿보이지 않는가. 자유는 건실한 논리의 결정(結晶)이요 산물(産物)이다.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 합당한 것을 따르고 그렇지 않은 것을 배척하는 자유 선택이기에 그렇다. 고로 왜 '낙'만이 있지 않고 '고'가 그 대신 있게 되었는지 그 이유부터 규명해 보려고 해야 과학적 탐구 자세다. 불교 교리에서는 이런 것이 전혀 없다. 세계적 종교[역사와 전통이 오래고 많은 인구가 거기 흡입되어 왔다는]라는 중압감 때문에 이런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의문 제기조차 실제 사람들은 하지 않았던 것이 명백히 이로써 드러난다.

아니면 이 세상 신이요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지배자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단단히 홀린 탓이라는 이유밖에 없다. 그는 인간의 이성이든 지성이든 마음대로 꺼두를 수 있기에 그렇다. 일언이폐지하고, 인간고를 해결하는 방책에서, 이미 소개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한 몸 의식으로서의 생명의 법질서 아래에서의 그리스도의 구원과, 불교에서 말하는 그런 막연한 추상적인 구도(構圖)를 비교할 때, 어느 것이 지성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의 마음에 더 와 닿는가. 아무리 그럴 듯하게 ‘불생불멸’을 이루었다고 외쳐도 때가 되면 고스란히 아주 정직하게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현실밖에 남는 것이 없다.

그리스도 부활의 진실성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실 때 자연계에 속한 몸은 죽고 사라졌으니[무덤에 묻혀 장사 지내졌으니], 다시 살아나실 때는 당연히 이런 자연계에 속하지 않는 몸으로 살아나심이 필연적 귀결이다. 왜냐면 여전히 이런 죽어 썩어질 몸으로 살아나신다면 자연계의 속성 그대로인지라 자연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다시 되풀이하여 죽는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논리적, 상식적으로도, 한번 죽었는데 여전히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하게 되면 이 역시 자연법칙을 무시하는 말이 될 뿐이다.

왜냐면 죽으실 때 자연법칙을 따라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죽으실 때는 자연법칙에 순응하여 죽으셨고[가령 피를 너무 흘리시어] 살으실 때는[자연법칙을 초월하는 신령한 몸으로써가 아니라 여전히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부활하셨다고 가정하게 되면] 자연법칙에 순응하지 않으셨다는 결론이 되니 이 역시 뒤죽박죽이 되어 논리적 선명성이 없어진다. 한 가닥이라도 이런 불분명하고 어색하고 논리에서 벗어난 것은 최소한 하나님 친히 하시는 일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관련된 일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세상에 계실 때 나사로나 나인 성의 과부 아들 등을 살리셨다. 죽은 사람 살리실 뿐 아니라 기타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이런 기적은 자연법칙에서는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이는 무엇인가. 단순히 인간으로서 하신 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서 하신 일이기 때문이니, 자연계의 자연법칙에 구애당하지 않는 영계에 속한 능력[영계에서는 가능한 영계의 법질서를 따르는]으로 하신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자연계의 자연법칙을 어기시면서까지 그런 기적을 나타내셨다고 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서 철저히 원리원칙주의로 나가신다기에 하는 말이라"고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만일 인간이 지어낸 것이라면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를 고려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전제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토대로 그냥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부활하였다고 둘러대지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만들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자연계에 속한 몸 그대로 부활하였다 하고 사흘만에 부활한 것과 같이 적당히 한 사흘 동안 제자들에게 부활한 모습을 드러냈다가 천사들의 호위 속에 하늘로 들려져 올라갔다 해도 충분한 것이다. 일부러 신령한 몸으로 부활했다고 할 필요가 없다. 왜냐면 신령한 몸은 그 때 당시나 오늘날의 우리에게나 도대체가 너무 생소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럴 경우 제자들이 유령을 보고는 부활한 것으로 착각했다는 의심을 충분히 받을 수 있으니 더더욱 그런 모험[신령한 몸으로 부활했다고 말하는]은 할 수 없는 법이다.

뿐 아니라 승천(昇天)하기 전 40일간 지상에 지체했다는 말도 역시 군더더기다. 40일간 지체했다면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다는 설명이 뒤따라야 하겠기에 그런 거짓말 역시 만들어낸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골치 아프게 거짓말을 지어낼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과연 그 40일간 무엇을 하셨는지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밝히시지 않았으니까 기록이 없을 수밖에 없다.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다음에 곧장 승천하시지 않고 그렇게 오랜 날 지상에 머물러 계셨으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 하셨을까 모두가 궁금해 여길 것임에도 단지 그 사실만 적어놓고 그 외에는 아무 설명도 없다.

사실 그대로이니 거기서 뺄 것도 거기에 더 보탤 것도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진실 그대로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부활이 그와 같이 진실이라면 하나님이시니까 그렇게 하신 것이므로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 모두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 중의 하나다. 그리스도 부활의 "믿을 만한  증거"[행 17:31]는 이와 같은 평범한 대목에서도 충분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앞의 설명처럼, 아담이 처음 범죄하기 전 신령한 몸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상태로 마지막 아담으로서 회복하심을 나타낸 것이라는 설명도 성경은 덧붙이지 않았다. 오직 생긴 사건 그대로 듣고 본 바를 정직하게 기록하여 후세에 전달하려는 마음뿐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죽으신 다음에 다시 살아나실 때에는[다시 살지 못하면 그 죽음으로써 그만이지만] 그 부활은 반드시 이 자연계와는 별다른 세계에 속한 몸으로 살아나시게 되어 있다는 그 뜻이다.

왜 그러냐, 애초의 인간[아담]이 신령한 몸이 되어 살다가 범죄의 대가로서의 죽음으로 인해 이런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이 죽음이 범죄의 결과라는 증명이 된다. 범죄하지 않았다면 죽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함이다[롬 5:12]. 따라서 범죄의 결과로 죽는 죽음을 이제 종결하고 일단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난다면 그 모든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을 다 치렀다[지불했다]는 의미가 되니 다시 살아날 때는 더 다시는 이런 ‘죽음’의 자연계에 속한 몸일 수가 없고 이전의 그 신령한 몸을 당당히 입게 된, 범죄 전 당시의 몸으로 회복된 형태로 다시 살아남이 당연하다.

우리의 이와 같은 부활을 마지막 아담으로서 즉 우리의 대표 또는 본으로서 나타냈으니 우리 또한 장차 그렇게 될 것을 미리 보이심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가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현재 다시 출생[요 3:3]한 것이 되어 있으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남이 없으면 다시 출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이다. 여전히 죽은 자로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산 자로서 새롭게 창조하심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날 때에는 다시 살아남과 동시에 다시는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왜냐면 죄를 지음으로써 죽음이 왔으니[롬 5:12] 이 죽음을 벗어나 산 자가 되어 있는 마당에 또 죄를 지으면 어찌 되는가. 또 죽을 수밖에 없다. 또 죽을 바에야 왜 다시 살아나는가. 우리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고후 5:15] 한다는 것 즉 죄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 즉 자기 부인이 필연이고 필수라는 사실은 이와 같이 여러 모로 따져도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결론밖에 얻을 것이 없다. 핑계를 대고 도망할 탈출구가 없다. 꼼짝없이 성경에서 경고하고 강력히 역설하고 있는 대로 "죄를 지을 수 없다[요일 2:1/3:6-10/5:18/고전 15:33,34/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이 바로 이 같은 의미인 것이다.

고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역시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나의 현재 몸은 이전처럼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이 아니요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몸처럼 신령한 몸이어야 하나 이 역시 정해진 순서와 단계가 있으니 이를 따름이다. 어떤 단계냐 하면, 나의 몸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는 하나 현재 신령한 몸일 수는 없으니 세상에 다시 보내심을 받은 몸이기 때문이다. “다시”라는 말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승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나의 현재의 위치, 신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는 하늘에 계시므로 나 역시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거기 그 자리에 함께 하늘에 위치해 있음이 사실이나, 현재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시어 나와 또한 하나가 되어 계시므로 나 역시 양면으로 위치해 있음이니 하나는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요 다른 하나는 이 육체 가운데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하나됨이다. 때문에 현재 내가 이러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남아 있는 것은 그리스도 친히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기 위해 이러한 육체를 입으시기 위해 사람으로 태어나신 그 형상 그대로를 나 역시 유지하여 나타냄이다. 

죽 죽음의 고난 받음을 목적함이니 고난 받아 죽음에는 이러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써야 가능하지 신령한 몸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왜냐면 죄인과 하나됨이 이런 고난 받음의 내용이므로 우리가 구원해야 할 이웃들은 여전히 나와 같은 이런 육체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당시 오순절에 오신 것처럼 이제 내 안에 성령으로 임하여[내게 주시는 영원하신 선물로서] 오실 때에는 지금부터는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불가분성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으므로 나 역시 당시 오순절 때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에 오는 바로 그 의미가 적용됨이다.

그래서 이에 걸맞게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게"[빌 3:10,11]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음은,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아버지, 아버지의 영]께서 임하심으로써 이전과 같이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서 다시 존재하시게 되는 상태로 회복되심과 똑같은 의미가 된다.

그 전에는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지 않은 것이니 아버지께서 아들을 우리 위해 “내어주신[to deliver]” 상태가 되어 아버지와 분리되어 계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내어주실 때는 아버지는 당연히 포함되시지 않는다. 아버지와 하나 되심으로부터 아들께서는 당연히 분리되심을 뜻한다. 그래서 아들께서 홀로 사람이 되신 것이고 여기에는 아버지께서 포함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아버지의 영, 아버지]께서 임하시기까지는 아버지께서 함께 [하나로] 하시지 않은 상태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는 역시 우리 자신을 나타내심이니 우리가 이전에는 죄인이요 죽은 자로서 생명이신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었으나 그리스도를 믿어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이제는 "화목하여"[롬 5:10] 화합하는 상태를 보임이다. 따라서 이 주님의 세례 받으심은 마치 죄가 있으셔서 그 죄를 씻기 위함인 것과 같은 형상이 되어 있지만, 우리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우리 죄를 짊어지시되 우리와 함께 짊어지심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치 죄인처럼 취급 받으심을 나타내셨고 따라서 '나의 죽음과 함께 하심'으로써, 오늘날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의미하는 뜻으로써 내가 세례 받는 것과 일치시키려 하심이었다. 그리고 그 성령 받으심은 내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령을 또한 받아 모시게 됨을 나타내는 것이니, '한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는 어디까지나 나의 모습이시기 때문이다. 고로 이제 나는 성령을 받음으로써 2000년 전의 그리스도의 의미가 오늘의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됨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 보내심을 입는 것이니[요 20:21,22] 그리스도 친히 그 날 세례 받으실 때 아버지의 영[성령]이 임하셔서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신 대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시게[요 4:34] 되는 것을 나 역시 따름이다. 말하자면 그 이전까지는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내어주심"[롬 8:32]은 되셨으나 "보내심"은 받지 않은 상태였으나 이제 성령을 받으심으로써 [우리의 구원 그리고 세상에 보내심 받음을 상징하는]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것이라 할 것이다. 왜냐면 우리가 그렇게 보내심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례 받으신 때부터 본격적으로 아버지의 일을 하기 시작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세례 받아 성령을 모심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일을 하시 시작하는 것이다[행 1:8]. 그 때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임하실 때, 이미 사람의 육체가 되어 계시는 아들 안에 임하여 오신 것처럼, 나의 경우에도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 가운데 있는 나에게 그리스도 친히 임하여 오시는 것이고 동시에 '아들과 하나 되어 계시는 아버지' 또한 임하여 오심이 된다.

그래서 이 사실을 분명히 하여 요한은 우리 각자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고 있다 하였고[요이 1:9] 따라서 우리 각 사람이 아들 안에 있다 하고 아버지 안에 있다 한 것이다[요일 2:24]. 아들 안에서 살고[거(居)하고] 있고 아버지 안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당시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께서 임하여 오실 때 비록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계시어 오직 우리 죄를 지시는 몸으로 죄인의 형상을 하셔서 죄인처럼 죽으심을 예고하고 있었으나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음과 같이, 나 역시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았으므로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입고 있을 뿐으로 실상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되어 있는 몸으로서 원칙대로 하면 하나님 우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신령한 몸을 입고 있는 위치요 상태이다.

단지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셔서 아버지의 일을 하다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같이 나도 주님의 일을 하며 그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다가”[골 1:24] “어찌하든지 부활에 이르려 함”[빌 3:11]이니 똑같은 이치다. 고로 그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요 그가 다시 살아나심이 나의 부활이 되는 것인즉 이제 비로소 나는 영생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수 있게 된다. 왜냐면 그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므로 나는 이 자연계의 법칙과는 완전 결별해 있어 그의 다시 살아나심이 나의 다시 살아남이 되어 있기에 나 역시 이 육체가 죽은 다음에는 그렇게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방적인 것은 없다. 하나님 일방적으로 나를 살리시고 구원하시고 천국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생각부터 청소할 일이다. 그렇다고 내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 것이다. 언제나 강조하는 대로 하나님의 은혜이니 왜냐면 이 능력 자체가 하나님께서 나를 은혜로 구원하신 다음의 결과인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친히 그 선물이시요 그 능력이시다. 성령으로 계시기 때문에 "성령의 선물'[행 2:38]이시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심으로써 성령이 임하여 오시기 전에는 아무 일도 아니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비로소 산 자가 되어 산 자로서의 일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홀로로서는 즉 둘이 하나되어 있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이치를 나타내심이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 되어 있지 않고는 산 자로서의 아무 일도 할 수 없는[요 15:5] 죽은 자일 수밖에 없음을 드러냄이다.

이래서 나는 다시 출생한 자로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천국에 들어가는 행보(行步)를 이어 가는 것이다. 단 보내심을 받은 대로 일치하게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경우에 그러하고[마 7:21], 만일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살아"[고후 5:15]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할"[빌 3:18] 때는 그렇지 못하고 "멸망"[:19]밖에 없음이니, 천국은 산 자만이 들어가는 곳으로서 산 자라는 것은 반드시 자기중심이 아닌 자기 부인으로써 한 몸 체제에서의 머리를 위하는 몸의 지체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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