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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1체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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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영사운이란? (9) 등록일 2016.02.16 21:39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91

바/영/사/회-"[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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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창조주 하나님의 새 창조에 의해서 내가 새 피조물이 되어야만 영원히 살 수 있게 되는 것이지 이런 과정 없이 인간의 의지 하나로 스스로 영원히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이성적인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황당무계의 망상이요 미신에 불과한 것이다. 때문에 행함 즉 행위로써 구원 얻지 못하고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이니, 행위로 구원 얻지 못한다는 말을 바르게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 편에서의 새 창조 없이 내 스스로 나타내고자 하는 일체의 선행이 '행위로 구원 얻으려 함'이다.

그러나 새 창조를 거친 다음의 새 피조물로서의 선행은 필연이고 필수이니 만일 그런 선행이 없다면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이는 내가 새 창조를 입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다. 왜냐면 새로 창조되어 다시 출생함의 '원인'이 있었으니 반드시 '결과'가 나타나야 하는 법인데 그 결과가 없으니 원인도 없다 함이다. 이 경우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 자체가 행함이 반드시 수반하는 것이므로 믿음으로 구원 받되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 ‘행위로 구원 얻지 못하고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을 당치도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곡해하여 새 피조물된 다음의 행위까지 부정해 버리는 그야말로 순수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에 농락당하고 있으니 이 미망과 미신에서 하루 속히 탈피할 일이다. 원인만 말하고 결과는 빼놓으니 동전의 양면에서 한 면만으로는 화폐 가치가 없음과 같은 이치다. 그렇게 되면 죽음뿐이다. 성경의 경고대로 육신으로 행하면 죽음만 있으니[롬 8:13] 이 경우의 죽음은 멸망이다[빌 3:19].

성경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 신이요 왕[지배자]임을 밝히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마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실존하지 않는 것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움 그 자체이다.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다. 선교사로 나온 이들 중에도 귀신들의 존재까지도 믿지 않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도대체 성경의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가. 입맛대로 믿고 골라서 믿는다는 말인가.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는 그 부분만 믿고 다른 것은 함부로 자기 멋대로 달리 해석해 치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무엄(無嚴, insolence)함이 그들에게 전혀 구원 얻는 믿음이 없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세상 종교로서의 기독교 교인일 따름이다.

믿는다는 사람은 많고 기독교교인은 세계적으로 많은데 거의 전부가 이런 식이다. 바로 이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증거다. 성경은 믿고 하나님은 믿고 그리스도도 믿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는 믿지 않으니 구원이 있을 리가 없다. 바로 이렇게 만든 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실존의 가장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이다지도 성경을 믿지 않을 수 있을까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 대목이 바로 이것이다. 이 믿지 않음, 눈 어둡게 함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 배후가 아니고는 이 정도로 이럴 수가 없는 까닭이다.

바울은 그 편지에서 교회를 위하여 충정 어린 경고를 하기를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전 7:1] 하고 "나와 같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8] 하였고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26] "육체에 고난이 있을 것이므로 너희를 아끼는"[:28] 마음이라고 절절하게 호소하듯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렇게 혼자 지내기로 작정하는 이들을 보지 못한다. 필자는 내 아무리 양심껏 판단해도 믿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이런 고마운 충고를 들으니 이 정도까지는 당연히 들어야 할 것이 기본이 아닌가 하여 80이 다 가는 나이지만 여태까지 결혼하지 않았다. 

이것도 하나의 믿음이라면 이 믿음으로 노아의 950년 생애를 단순히 신화가 아닌 실화라 보았기에 3운법칙의 SN형이 탄생되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내가 만일 노아의 생애를 실제 인물의 역사로서 인정하지 않았다면 SN유형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3운법칙이나 삼위일체의 원리는 세상에 드러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정도로까지 세상은 성경을 믿지 않는다. 그렇게 하고도 성경을 믿는다고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충격이라면 이런 충격도 없다.

그 엄청난 결과 중의 하나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라는 교리다. 이것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있을 수가 없다. 피니가 비록 장로교 목사로 위임을 받았지만 이런 점에 대해 그 반(反) 성경적임을 강조했던 결과, 오늘까지도 이를 지적하여 그를 "사이비"로 공격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 자신이 사이비가 되어 있는 줄을 모르는 것이다.

'두 사람'이 '하나'로 '겹쳐질' 수 있는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때문이다. 또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나와 하나가 되실 수 있는 것은 사람으로서 하나 되심이지만, 나에게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일제히 그리고 충분히 동일하게 이렇듯이 하나가 되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말 그대로 완전히 한 몸의 머리가 되심이다. 그리스도를[하나님을] 성령을 모신 사람마다 그 머리와 함께 된 한 몸의 지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와 '그 영'으로 하나 되심이, '육체[사람은 육체이므로]'로 임하셔서 나와 하나 되심과 같은 동일한 의미와 결과를 낼 수 있는 것 역시 하나님이신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보이지 아니하시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나와 함께 사시고 계심이다. 사람이라 하면 다 볼 수 있는데, 오직 한 분 '보이시지 않는 사람'이 계시니, 바로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고 사람이심과 동시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시다.

왜냐면 사람은 그 육체를 떠나서 영 단독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 육체 그대로 내 안에 오는 것 자체도 불가능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동시에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은 영이시라 육체를 떠나신 영 단독으로 즉 성령으로 얼마든지 그 역할을 하실 수 있고 또 아무 하자가 없는데다 여전히 사람으로 계시므로 내 안에 영으로 계심에도 불구하고 마치 육체를 그대로 지니신 한 사람으로서 계심에 결격 사유가 전혀 없으신 '유일한 사람'이시다.

따라서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특성이 이와 같이 나와 그리스도와 영원히 하나가 되게 하는 그리고 넉넉히 될 수 있는 완벽한 요건이 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는 모습은 내가 어떤 사람과 함께 항상 하나가 되어 있는 바로 그 모습 그대로다. 원래 인간은 육체만으로서의 인간인지라 문자 그대로 하나가 되기는 불가능한 일이니 가장 육체적으로 가깝고 관련성이 짙다고 할 남녀 관계도 그렇게 온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남편은 미국에 있고 아내는 중국에 가 있어 떨어져 있으면 그렇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가장 완벽하고도 이상적인 그런 하나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이다.

이렇게 해서, 내가 영원히 살게 되는 문제는 완전 해결되고 확립되어 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영원히 살되 행복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는 일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죄요 악이다. 그래서 성경에 이웃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이루는 것이라 했다[롬 13:8]. 실상을 따지면 인간이 영원히 살지 못하고 이렇게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구차하게 끌고 내일 죽을지도 모를 인생 여정[旅程]을 걷는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니 곧 하나님 앞에서 죄인되어 버린 다시 말해 자기 부인 없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산"[고후 5:15] 결과다.  

그러면 말하기를 "지금이라도 내가 그렇게 사랑의 삶을 살면 영생을 얻는가"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음을 앞에서 설명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먼저 새로이 창조가 되기 전에는 그런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영생 자체가 불가능하니, 불가능한 이유는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 자체가 불가능하다. 죽은 자이므로 산 자가 되도록 먼저 새로이 창조하심을 입지 않으면 안된다. 이 새 창조는 우리가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니 이 죄 값[죽음]부터 먼저 치러야 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나서 다시 난[출생한] 자가 되어야 함이다.

자기 부인은 그렇게 정식으로 산 자가 되어 있어 그 삶[생명]을 유지하는 방법인 것이다. 산 자가 되어 있으니 자기 부인이 얼마든지 가능함이다. 왜냐면 살 수 있도록 마련하신 것이 하나님이 창조이시니까 죽은 자로부터 나를 산 자로 만드셨다는 것은 그렇게 산 자가 되어 산 자로서 살 수 있는 방법인 자기 부인을 넉넉히 하고도 남을 수 있도록 모든 장치를 다 해놓으셨다는 증거이다. 곧 나와 함께 죽으시고 함께 살아나심의 둘이 하나됨으로써 내 안에 성령으로 영원히 나와 함께 계시고 사심이다.

하나님의 법질서는 이렇게 철저하고 엄격하시다. 바늘 구멍이라도 빈 틈이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죄 짓고는 절대로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 필살(必殺), 필멸(必滅)이다. 새 창조가 필요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시지 않으면 안된 것도 그 때문이고 이제 우리가 다시 난 자로서 죄를 지어서는 안되는 것 즉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고후 5:15] 모두 이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런 엄정하심은 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죽으심에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고 입증된 것이니 곧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 친히 죽으시지 않고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 앞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두려워하고 떨지 않을 수 없게 된다[시 2:11]. 물론 이 세상에 한해서다.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사람만 추려내는 곳이다. 당시 영물들이 그렇게 분류된 것과 같은 이치다.

스승과 제자

죄를 짓지 않는다, 죄를 지을 수 없다. 죄를 지으면 안된다는 성경의 경고를 구원과 결부시키기보다 이미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어 있는 산 자로서의 마땅히 사는 법도(法度)와 연관시켜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죽지 않고 사는 방법이다. 살았으니 그런 것이 필요하다. 죽은 자에게는 필요치 않는 것은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고로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필요치 않았고 의미도 없었다. 죽은 자였기에 그렇다.

이제 산 자가 되어 있으므로 마땅히 살아야 하는 법대로 사는 것, 올바르게 사는 것이 당연히 모든 것의 중심이다. 그래서 단순히 영생하도록 만드시는 것이 구원의 도인 줄 잘못 이해할까 싶어서라도 주님께서는 땅 끝까지 나가 "제자들을 삼으라"[마 28:19]고 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경도 사도들이 전도하여 구원 얻게 된 이들을 가리켜 "제자들"[행 18:23]이라 하였다. 스승과 제자 사이라는 것은 우리가 다 잘 아는 대로 현실의 삶을 토대로 한 그 지혜를 가르치고 배움이다.

거저 막연하게 "죽어 좋은 데로 가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세상 종교가 그들의 신도를 제자들로서 표현하는 예는 거의 없다. 왜냐면 고난과 죽음과 불행의 현재를 벗어나 보다 나은 미래를 지향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러한 미래를 지향하면서도 어디까지나 현재의 산 자로서의 마땅한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선을 행함"[롬 2:8,9]을 강조하게 된다. 각 사람은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심판 받기 위해"[고후 5:10]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즉 선을 행했느냐, 악을 행했느냐 하는 판가름이다. 처음부터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당연히 악을 행한 것으로 분류된다. 왜냐면 믿지 않는 것도 자기 의지로써 된 것이므로 이는 그 스스로 "불의를 좋아하고"[살후 2:12] 빛을 미워한 것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요 3:18] 상태이기 때문이다. 믿고 구원 받았다는 이들은 당연히 선을 행하게 되어 있는데도 악을 행했을 경우 그 악을 행함으로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마 7:21/25:45].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바/영/사/회]을 출범시키는 것이다.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고 소크라테스가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것처럼 사람 삶의 지혜를 가르침이다. 물론 스승은 살아 계시고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그리스도시다.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신 유일하신 보이지 않으시는 사람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는 없으나 분명히 존재하시는 우리 모두의 스승이시고 지도자이시다[마 23:7-11].

여기에는 그 스승의 "대리자"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오직 그 한 분 머리 아래 한 몸을 이룬 각 지체의 역할 뚜는 구실의 각양각색의 자기 몫일 따름이다[고전 12:28]. 그러므로 "첫째는 사도"라 했지만 당시 초대교회의 역할이었을 따름이다. 지금은 모든 사도가 세상 떠난 지도 이천 년이 넘었으니 우리 세대에 적합하게 "교사" 또는 "서로 돕는 것" 등으로만 해도 족하다. 따로 정해진 고유의 직책이 아니고 오직 성령께서 필요하신 대로 사람들을 세우시면 되는 것이다. 모두가 다 '올바르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소를 돕기 위한 수단 방법일 뿐이기에 그렇다.

§   우리 몸이 이 자연계에 속하여 죽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은 바로 죄 값을 인함이다[롬 5:12]. 죄의 대가는 사망이라고 한 그대로다. 불법을 선택하여 얻는 대가가 조물주 하나님의 진노요 죽음이다.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이는 필연적이다. 불법이란 법을 어긴 것을 말하고 법이란 것은 생명의 법질서다. 생명의 법질서란 것은 다름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피조물된 자는 자기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서는 안되는 데에 있다. 이것이 둘이 하나되는 비결이고 원리다. 한 몸 체제에서의 삶이기 때문이다.

하나로서 즉 홀로 존재할 때에는 물론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이 당연하고 정상이다. 그러나 홀로가 아니라 둘만 되어도 더군다나 여럿일 때에는 절대로 각자는 자기를 위해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위한다는 것은 다시 강조하지만 오직 홀로 있을 때 아무도 없이 혼자 존재할 때에만 가능해지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낳으셨다. 즉 자기와 똑같은 존재를 만드셨는데 이렇게 아들을 낳으시는 순간 이미 하나님은 홀로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둘로서의 하나이셨던 것이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시므로 더 다시는 그 누구도 즉 아버지시든 아들이시든 자기가 자기를 위하시지 않게 된 것이다. 이로써 홀로 존재하지 않고 둘 또는 여럿이 존재할 때의 생명의 법질서가 확립된 것이다. 그렇지 않고 둘 또는 여럿이 존재하면서도 자기가 자기를 위하게 되면 그것은 다시는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각각이 되므로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경쟁하는 사이가 되고 다투게 되고 따라서 미워하게 되고 거기에는 생명의 행복 대신 죽음의 멸망과 불행만이 깃들게 된다.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자기중심이 악이요 죄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와 같은 하나님 정하신 삶의 법을 무시하고 자기 나름의 교만한 생각을 처음부터 했기 때문에 그런 경쟁심리로서 하나님을 묘사해 주는 간교함을 에덴낙원에서 아담의 분신(分身)인 여자를 속이면서도 드러낸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그렇게 거짓말을 하신다고 한 것이니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그런즉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을 확고히 하여 거기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써 단순히 결정할 일이지[그리스도께서 광야 시험에서 바로 이러한 본을 보여 주셨으니 말씀으로써만 대응하신 것이다] 절대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보조(步調)에 맞추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자처럼 속절없이 아니 넘어갈 수 없게 된다. 마땅히 경계로 삼아야 할 일이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이 생명에 반하는 일이요 죽음의 대가를 부른다고 했거니와 이 자기를 위한다는 것이 모든 악과 죄의 뿌리인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누구나 이기주의를 미워한다. 이기주의는 자기만 알고 남에 대해서는 오불관언의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 '남'이라는 것에 자기가 속해 있기 때문에 이기주의를 미워하지만, 자기가 그 '남'에게 속하지 않을 때는 그것을 이기주의라는 말로 부르지 않는 것이 인간 이기주의의 공통 심리다.

그 대신 자기 방어의 본능이라는 말로 미화하게 된다. 자기중심을 버리지 못한다는 증거다. 이 본능이라는 말은 육체적인 것과 상관된 용어로서 일반 동물들의 기계적인 생존 본능을 말함이다. 이것을 인간에게 갖다 대어 자기 합리화를 꾀하는 것이 이기주의의 특성이다. 즉 자기를 두고 얘기할 때는 사랑이라 미화하지만 그것이 남을 두고 말해질 때는 추문(醜聞)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롬 2:1,21].

그리스도의 몸이 부활하실 때 신령한 몸이셨다는 사실은 첫 사람 아담이 애초에는 신령한 몸이 되어 있었다는 방증이 된다고 했지만, 만일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아담의 범죄야말로 인간이 신령한 몸을 입게 되는 과정의 필요악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그렇다면 인간을 그 죄로 처벌하실 수 없는 결과가 되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에덴낙원은 영계요 아담은 거기서 신령한 몸을 입고 있다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이 자연계의 육체로 되돌아와 버린 비극이라고 바로 알아들어야 올바른 성경 이해다.

이상과 같이 우리의 구원이 아주 완벽하고 합리적인 것이나 단지 오직 하나의 걸림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면 이 세상에서의 시련이니 곧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인한 갖가지 불이익, 핍박 받음, 고난과 죽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상에서 결코 낯선 것은 아니다. 세상 역사를 훑을 때 멀리 가지 않아도 얼마나 많은 인생들이 같은 인간들에 의해 핍박의 대상이 되어 참혹한 죽음과 고난의 대상이 되어 왔던가! 뿐만 아니라, 성공이든 또는 일의 성취이든 그것을 이루기 위한 험난한 노력과 시련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다[고전 9:25].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받는 것은 자기 자신의 구원이나 스스로의 어떤 이익을 위함이 아니고 순수하게 남을 위함이니 이기적이 아니고 이타적이라 이는 갸륵하고 거룩한 일로서 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 모든 것의 목적이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의 구원을 위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죽은 자'로서의 사람들을 새 피조물이라는 아름다움의 한 작품으로 만들기 위한 예술(藝術) 활동을 하고 있는 격이다.

이런 거룩한 일이지만 인간 구원을 사력을 다해 방해하는 이 세상 신(神) 악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아담]을 꾀어 죽음에 빠뜨리게 되는 에덴낙원에서의 범죄의 결과로 저주를 받을 때 여자와 여자의 후손 및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후손 사이의 전쟁을 선언하신 것이다[창 3:15]. 선언하셨기 때문에 원수 사이가 되었다기보다 인생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그 악령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함을 나타내신 것이라 보아 하자는 없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하는 자로서의 수고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사람 구원해내는' 일이 반드시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움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일이 그 몸된 교회로 말미암아 건실하게 그 명맥이 유지되어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필요성 그리고 당위성에서 오는 것이다. 피 흘리심이 없이는 속죄 사업이 불가능하므로[히 9:22]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도 고난 없이는 남은 사람들을 건져냄이 사실상 불가능함이다.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이지[요 4:34/20:21] 삶의 낙을 누리기 위함은 아니니, 삶의 낙을 누리려면 원래의 모습대로[아담의 범죄하기 전] 신령한 몸으로 누리는 것이지 이런 죽음의 육체로 누리려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사람은 구원되는 즉시 세상에 보내심을 받는 것이지 나머지 여생을 이전처럼 내 마음대로 살고자 함이 아니다. 더 더군다나 하나님 믿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잘 살고 형통한다는 것을 세상에 내보이기 위함이라는 망상은 완전히 정신 나간 것이요 성경에 대한 전적인 무지이다. 오늘날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득세하는 것은 악령들이 나타내는 초자연적 현상[이것을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이라 하나 성경은 "거짓 기적"[살후 2:9,10]이라 정의하고 있다]을 등에 업고 그러한 것이다.

산 자에게 주시는 경고

살면 화끈하게 살고 그렇지 않으면 철저히 삶의 낙을 외면하라는 것이다. 오로지 일에만 매달리라는 것이다. 살면 신령한 몸으로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지 왜 이런 초라하고 구차한 몸으로 내일 목숨도 담보 받지 못한 상태에서 어정쩡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하는 것도 아닌 것으로 양다리 걸치기를 하려는가. 하나님은 이런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절하지 않고는 살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광야 시험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내게 절하라” 하고 협박조로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세상 권력과 영광을 다 보여 준 다음에 그렇게 한 것이다[눅 4:7]. 권력과 영광 없는 삶이 무슨 낙이 있는가. 그러므로 그와 반대 현상인 죽음과 고난과 같은 것만이 몫에 태인다는 뜻이다. 사실 그렇다. 일하려면 비록 이상 설명과 같은 현실이 아니더라도 삶의 모든 낙을 반납하고 화끈하게 일에 뛰어들어야 하는 법이다. 그것이 정상이다. 세상 어느 기업체에서든 그런 사람을 채용하기를 원한다. 하물며 하나님 일에서랴.

일하는 자가 어떻게 삶의 낙을 누리면서 일하려는가. 전투에 임하는 자가 어떻게 세상 잡사(雜事)를 다 생각하면서 싸울 수 있는가[딤후 2:4]. 이미 목숨을 바친 상태가 아닌가. 그래서 "손에 쟁기를 잡은 자로서 뒤를 돌아다 보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 하셨다[눅 9:62]. 어느 누구에겐들 합당하겠는가. 우리를 구원하심은 세상에 보내심이니[요 20:21,22] 세상에 보내실 때는 일하라고 보내심이지 다른 뜻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다.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라고 보내신 것이다[4:34].

그리고 다시 경계하시기를 “새는 둥지가 있고 여우는 굴이 있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눅 9:58] 하셨다. 이 세상은 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말씀이시다. 새나 여우 등 동식물의 서식처가 이 자연계다. 인간의 보금자리는 영계(靈界)인 것이다. 때문에 인간에게 감히 비하지도 못할 들에 핀 한 송이 꽃만도 못한 것이 솔로몬의 온갖 영화로도 입은 옷이라고 말씀하셨다[12:27]. 왜냐면 서로의 영역이 다른 것이다. 꽃은 이 자연계가 제 세상이고 인간은 이 자연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니 영계에 속한 존재다.

전래되어 내려오는 설화처럼 죄를 짓고 벌을 받아 천상(天上)으로부터 쫓겨 내려온 소위 ‘신선’, ‘선녀’의 신세와 같다고 하면 알기 쉬운 예화일까. 단지 차이는 그들은 형기(刑期)만 마치면 자동적으로 환원될 수 있었으나 인간은 새 창조 외에는 영구적으로 그런 길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신선, 선녀, 선계(仙界)라는 것은 요즘의 소위 "UFO"처럼 마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을 농락하면서 과거에 지어낸 것들이다. 요즘은 "ufo"로써 대체되고 있다.

악령들은 그런 소위 "선인"으로 스스로를 가장하여 옛 시대에는 인간에게 나타난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니 시대에 맞추어 요사이는 "UFO"로 속이는 것뿐이지 그렇지 않다면 여전히 선녀, 신선이라는 속임수를 쓰고 있었을 것이다. 과학의 발달은 인간 삶을 윤택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축복이나 배려가 아니다. 내일이라도 신령한 몸이 되는 날에는 이런 모든 소위 과학 문명의 이기(利器)들이 한낱 장난감으로 전락할 것인데 그런 필요없는 일을 하나님은 아니하신다.

오직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마지막 때의 대대적인 전 세계적 속임수를 위한 것이다. 앞의 말씀은 세속적인 영광을 바라보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하신 것이다[9:57]. 그리고 다시 강조하여 경계하시기를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셨다. 이 세상은 죽음의 세계요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모두가 죽은 자 일색(一色)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이 유일하게 산 자이다. 그리고 이 죽음의 세상에서 산 자가 되어 있는 자는 모름지기 할 일이 이 ‘죽은 자를 산 자가 되게 하는’ 하나님 나라 전파에만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 하신 말씀과 일치한다. 양다리 걸치기를 하지 말고 확실히 태도를 고쳐 잡아야 하는 것이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자는 하나님께서 토하여 내치실 것이다[계 3:16].

미지근하니 구역질이 나 토하여 내침을 당할 수밖에 없음이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고 이 일을 위해 그리고 주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이상으로 다른 데[세상 일]에 신경 쓰는 것을 경계하심이다[눅 9:61]. 산 자로 만드심은 그런 죽은 일에 마음을 쓰라 하심이 아니라 산 자로서 마땅한 도리를 다하고 산 자의 일을 하라는 경고이신 것이니 곧 우리 인간의 대표이신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신 바로 그 일이다.

인생은 갓난이로 죽는 이, 10, 20, 30대에 짬도 없이 죽는 이로 점철되어 있다. 그들이 얼마든지 나 자신일 수 있다. 내가 얼마든지 그 중 하나일 수 있다. 나는 죽지 않았으니 요행이라 할 것인가. 사람 삶을 그런 요행수에 둔다는 것은 얼마나 불확실성의 인생 삶인지 단적으로 증명함이다. 불확실성은 바로 무가치, 무의미를 입증함이다. 한마디로 삶이 아니라는 것이니 삶이 아니라면 죽음이다. 이런 죽음에서 삶을 생각한다는 것은 완전히 “미친 마음”[전 9:3]이다.

미친 마음을 품지 말고 경고를 받으라는 것이 우리의 복음 전파의 메시지다. 영원을 두고 후회할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것을 죽음이라 바로 보지 못하고 삶의 낙이라 착각하니 불의를 좋아하게 되고[살후 2:12] 불의를 좋아하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에 소리 없이 말려들게 된다. 이 세상은 악인들을 추려내고 의인들을 구별해내는 역할밖에 없다. '바영사회' 운동을 통해 또는 'CITHM'[집 교회 운동]을 통하여 또는 삼위일체 원리나 3운 법칙[trini homo]이 세상에 알려짐을 통하여 이미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올바른 뜻은 세상에 널리 전파되었으니, '진리를 사랑하는 이들'과 "불의를 좋아하는" 이들은 즉각 분류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 오늘이다.

이 전파된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진정으로 믿어 자기 부인을 하는 이들은 "불의를 좋아하는" 이들로 낙인 찍히지 않을 것이나 그렇지 않은 이들은 곧 나타나게 될 적 그리스도의 농락에 성경의 예언대로[:11] 일제히 넘어가 심판을 자취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시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심판은 시작된 것이다[요 3:18]. 이후 어느 시대에서나 무릇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될 때는 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것을 여기서 지적해두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성경적인 구원"이라고 속아 왔던 것과 '바영사회' 운동을 통해 전파되는 성경적인 구원과의 차이는, 이미 설명한 대로 소위 "그리스도의 대신 죽음"에 근거하여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경고를 하나님의 경고로 인식하지 않고 "상급(賞給) 타는" 정도로 착각하여 이 중추(中樞)되는 가장 심각한 경고를 거의 모든 "교회" 강단에서 일절 발설하지 않는 데에 있음을 다시 강조한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구원을 이루라" 했으니 구원을 이루라고 알아들으면 간단한 일이다. 언어(言語) 그대로를 수용하지 않는 것은 모두 거짓말로 직결된다. 왜냐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 원조(元祖)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실을 "거짓의 아비"[요 8:44]라는 말씀으로 규정해 주셨다. 에덴낙원에서 아담이 들었던 "죽는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죽지 않는다"는 소위 뜻 풀이를 해 준 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기 때문이다.

불교가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라 하여 멀쩡하게 살아 있는 '나'라는 실존(實存)을 "내가 없다" 하는 궤변으로 자기를 기만[기망]하도록 만드는 것보다 더 거짓된 것이 개신교의 이런 거짓이니 바로 이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를 구원을 이루라는 말이 아니라고 무리하게 설명하려 드는 궤변이 그것이다. 후자의 경우 하나님의 말씀을 그와 같이 대접하니 하나님 앞에서 죄과가 더 크다.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이라는 해괴한 교리를 만들어 낸 것이 만일 모세 율법시대 제물로서의 동물의 죽음을 근거로 하는 것이라면, 이미 성경은 그런 짐승의 제물이 그리스도를 단지 상징한 것뿐인 "그림자"로서 제대로의 의미를 나타내지 못함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을 왜 기억하지 못하는가. 짐승이 사람의 목숨을 대신할 수 없다고 하는 바로 그 '대신함'의 의미를 그리스도에게까지 적용하려는 무리한 시도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소위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 있는 것'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고후 5:14/갈 2:20 등].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그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난 다음 단계로서의 함께 다시 살아남에 있는 것이다. 그런즉 자기중심의 옛 삶에 대해서는 죽음이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삶으로 사는 것이니, 이 삶은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됨의 삶이므로 다시는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갑을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자기 부인이다. 더 다시는 자기중심으로 살지 않고[고후 5:15]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15] 것이므로 곧 자기 부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우리 대신하신 죽으심이라 하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을 생뚱맞게 전혀 다른 의미로 왜곡하든 어쨌든 자기 부인으로 일관되게 나가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리고 자기 부인을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즉 구원과는 무관하게 된다고 믿으면 된다. 해석하는 것이야 어떻든 올바르게 사는 데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런 해석은 필연적으로 자기 부인을 부정(否定)하고 자기중심으로만 나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자기 부인에 관해서도 설왕설래할 필요가 없는 것은, 마틴 루터가 이 한 구절만 남겨 있으면 다른 성경 다 없어도 좋다고 했다는[그러나 이 얼마나 경솔한 발언인가-약 3:1,2] 그 한 구절인 요한 복음 3장 16절["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을 기록하여 소개한 요한이 다름아닌 요한일서 3장 16절에서 이 말씀의 뜻을 명백히 하고 있기 때문이니 곧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한 것이다.

즉 요한복음 3:16은 요일 3:16을 내포하고 있는 의미임을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세상에 소개한 장본인 요한 사도 자신의 설명인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하심과 같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하라고 하셨으니 즉 자기 부인으로써 사랑하라는 말씀이시다. 따라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다"[:35] 하셨으므로,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이냐, 자기 부인으로써 하는 것임을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안다"[요일 3:16]고 함으로써 요한 자신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을 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으로써 그가 참으로 구원 받은 상태이냐 그 여부를 판별할 수 있게 됨이니,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주인, 소유주]가 되려 하심이다"[롬 14:7-9] 함과 같다.

무릇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이로서 자기 부인을 하지 않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단정이다.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 자기 부인이 아닌가. 그리고 자기 부인하는 것 자체에 뜻이 있다고 또 오해하지 말 것은 삶[영생]은 사랑에 있는 이 사랑이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알고"-요일 3:16] 자기 부인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을 하라는 말씀은 서로 사랑하라는 뜻이요 사랑의 참된 의미는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삶으로써[고후 5:15] 함께 한 몸이 되어 있는 이웃[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함인 것이다.

다시 말해 서로 사랑하는 것 따라서 자기 부인을 하는 것, 이것이 생명[영적 존재로서 영원한 존재인 인간에게는 영생이 아니면 생명이라고 가히 말할 수 없으니까]의 영원한 법칙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심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이 영원한 생명의 법질서를 지키도록 하심에 있으니 이 생명의 법질서 차원에서 죽으신 것임을 명확히 인식할 일이다. 단순히 영생을 거저 주시기 위해서가 아닌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죄]이 용납되지 못함을 이미 아담의 죽음으로써 확인시켜 주셨으나 다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써 확증해 주신 것이다. 죽음이 아니고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자기중심으로 사는 삶의 결말인 것이다. 즉 자기 부인을 하지 않아 생명의 법질서를 지키지 않음으로 인(因)한 필연적인 결과[果]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생명[구원]으로 직결되는 것임과 더불어 자기 부인하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사는 삶에 대한 최후 확정적인 경고이기도 하다. 가차없이 죽음[멸망]밖에 없다는 추상 같은 하나님의 위엄인 것이다.

§   원래부터 하나님 창조하신 대로의 '사는 것'을 두고 말할 때, 모두가 한 몸 구조에서 각자 지체 역할을 하면서 살아야 그 사람 사는 것이 나를 위해 사는 것이 되고 나는 그를 위하여 사는 것이 되어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모두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되므로 나 혼자 사노라고 사는 것보다 그 이웃의 숫자만큼이나 배가(倍加)되어 사는 방법이 되어 만 가지를 골고루 맛보며 먹을 수 있는데, 왜 한 가지 맛만 보며 맛본다고 하려는가.

이 세상에서 그런 훌륭한 삶의 모습을 구경이나 할 수 있던가. 그런 것을 인위적으로 강제해서 할 수 있던가. 할 수 있으면 이 세상이 벌써 오래 전에 보다 나은 인간 세계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산다고 하면 순전히 자기중심으로 살아 원수 마귀에게 절하며 타협하고 굴종하는 것인데, 그래도 그런 지조도 팔고 양심도 팔고 살자는 것이니 그 삶과 동시에 당신 생명은 그 마귀와 함께 영영한 불 못에 들어가는 운명에 처해지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는가.   

과거 우리가 믿기 전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산다고 해서 살아온 것은 실상 사는 것이 아니었음을 지금은 너무나 잘 아는 터이다[롬 6:21]. 진실대로 말하면 지금 그 어느 '피조물'도 생명의 낙을 누리는 자는 없다. 하나님을 위시해서 모두가 인간 범죄로 인한 인간 구원의 역사(役事) 가운데 있어 고난, 고통 속에 잠겨 있는 시기다[롬 8:22]. 그것도 보통 고난이 아니라 여인이 아이 낳을 때 당하는 그런 극심한 고통의 '해산(解産)의 진통(陣痛)'이다. 현재의 실상이 바로 그러하다. 우리말 번역 “탄식”[:22]은 바로 이런 진통 속의 신음을 말하는 것이니 잘못된 번역이다.

그러므로 오직 인생들만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눈이 가려져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까닭에 그리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충동으로 인하여 마치 살 만한 때에 제대로 사는 곳인 양 허위단심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데에 열을 올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과연 사는 것인가. 조금이라도 이성적인 머리를 굴린다면 갓난이로 죽고 10, 20대 청춘에 죽어 나가는 꼴을 보고 결코 생명일 수가 없다는 진실의 한 구석이나마 감(感)을 잡을 일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 모두 예외 없이 그렇지를 못했다. 주위 분위기에 휩쓸려 산답시고 허둥대다가 그나마 짧은 인생 허송세월로 날려 보낸 다음 때 늦은 후회를 해본들 일장춘몽이었다. 뒤늦게야 이제 진상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으니 절대로 그런 어리석음을 두 번 다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진실을 가르치고 있는 성경의 모든 경고와 훈육의 말씀을 무시하고 제 멋대로 해석하여 이 세상에서 여전히 살고자 하기 때문에 죄에게 포로되어, 육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느니 하는 아주 반(反) 성경적 넋두리에 빠져 지내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 자신 정작 구원 받았는지 지극히 의문시되므로 스스로 판단하여 그리스도께서 과연 그 안에 계시는지 점검하여 확증할 필요가 있다[고후 13:5].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롬 14:7-9/고후 5:15] 생각한다면 그는 ‘구원 얻는 믿음’ 가운데 있지 않으며 “성령은 없는” 사람이다[유 1:19]. 자기 자신을 위해 살 때에는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됨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거룩하고 의로운 삶의 원동력이 되는 자기 부인은 세상 종교에서와 같은 그런 자기 수양과 피 나는 공덕 덕분이 아니라 이미 이뤄진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신 은혜의 창조 작업을 단지 믿고 그 사실과 그 지식에 자신을 일치시켜 행동하는 것뿐이나, 이 행위라는 것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을 기반으로 한 자유 선택에 의함인즉, 할 수도 있고 아니할 수도 있고, 부지런할 수도 있고 게으름을 피울 수도 있는 것이 순수하게 나 자신에게 달려 좌우되는 일이기에, 힘쓰고 애쓰라는 주문이 붙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눅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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