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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영사운이란? (10) 등록일 2016.02.16 21:38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08

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운동[3]

사람답게 살고 영원히 사는 것, 그래서 행복하게 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 구원의 복음 활동의 취지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삶의 핵심은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함에 있고 그 모든 뜻을 행함에 있다. 그래서 함께 한 몸을 이룬 각 지체로서의 나의 이웃들을 사랑함에 있으니, 이웃 사랑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각 지체 사이의 일이다. 따라서 믿음의 형제들에게 한하는 형제 사랑이다. 그 외의 사람들은 가장 먼저 사람 건져 올리는 어부(漁夫) 역할의 대상이다.

그뿐이다. 달리로는 앞의 설명처럼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이 세상에 결코 살기 위해 삶의 낙을 누릴 목적으로 있는 것이 아닌 것만 확실히 할 일이다. 이상 목적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 받고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다[롬 14:8]. 이상 설명한 것 외에는 따로 별달리 정해진 종교 의식 같은 것이나 절차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있다면 처음 그리스도를 믿을 때 받는 세례가 있고 믿는 사람들이 "교회로서 모일 때" 주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떡과 잔을 나누는 예식만 행할 뿐이다.

교회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로서 모이는["to come together as a church"(NIV)] 것이니 이것이 성경의 표현이고 우리말 번역과 흠정영역("to come together in the church")은 잘못된 것이다[고전 11:18]. 그리고 이렇게 모이기를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음이니[히 10:25] 이는 교회라는 공동체 생활에서 필수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존재가 어찌 홀로일 수가 있는가. 한 몸을 이룬 각 지체 역할인데 어찌 홀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모일 때에 분명히 의식해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합석(合席)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로서' 모이는 것이 아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내가 거기 있다"는 분명한 언질을 주셨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엇이든 구하면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사실을 의식하며 모이는 것이 "교회로서 모이는 것[come together as a church]"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개념은 주님께서 합석하심을 의식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둘 이상의 사람이 모인다는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교회"라는 것은 한 머리를 모셔 한 몸을 이룬 지체(肢體)들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고로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각 사람은 그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이다. 그 지체들이 어떤 형태이냐 혹은 모인 숫자가 얼마냐 하는 것 등은 물을 필요가 없다. "지체"라는 의미가 몸과 하나를 이루어 있는 한 몸이라는 사실에 있으므로, 육체가 아닌 성령으로 그렇게 한 몸이 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각자가 모시고 있음으로써 확인, 확증되는 것이다.

모인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으므로 그렇게 모인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머리로서 함께 계심은 명약관화다. 이렇게 되면 교회로서의 구성 요건은 충분한 것이다. 그리스도[사람]께서 계시는 자리는 아버지[하나님] 친히 함께 임하시는 자리이므로 그 자리가 곧 성전이다. 각 사람의 육체가 성전이니 그 자리가 성전이라는 데에 아무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따로 건물을 지어 “이것이 성전이라” 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초막이든 궁궐이든 들판이든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의 갑판이든 그렇게 모인 곳이면 그 자리가 성전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모신 각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각자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자기 몸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제물”이기 때문이다[롬 12:1]. 자기 스스로가 제사장이고 제물이며 그리고 자기 안에 하나님이 계시니 곧 성전인지라 말하자면 각 사람은 걸어 다니는 [구약에서 상징하여 나타내었던] "하나님의 성전"이다.

구약 개념으로서의 성전이라는 것은 장차 나타날 참 것에 대한 그림자적 역할이므로 그렇게 성전을 상징하는 건물이 있었고 그리스도인 제사장을 상징하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이 있었고 그리스도인 각자의 육체를 상징하는 각종 제물과 예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전이시고 제사장이시고 제물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그런 그림자로서의 상징적인 의미가 사라지고 그 모든 것을 모두 완벽하게 함축하신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시고 있는 우리 믿는 사람 각자 안에서 개별적으로 그 모든 것이 이루어져 그 참 것을 나타내고 있는 터이다.

이제 각자가 제사장이요 제물이요 성전이다. 그리고 이런 개인이 함께 모여 교회를 이루므로 그 교회[건물이 아닌 모임 자체]가 또한 성전이다[엡 2:22]. 그러므로 강조되는 것은 종교적인 형태나 의식이 아니라 삶 곧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일상생활이다. 즉 우리 몸을 통해 나타내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요 1:1]이시므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우리 언행을 통해 나타냄으로써 모든 것은 완벽한 것이다. 더 이상 그림자적인 요소에 매달려 있을 이유도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참 것으로서의 역할에 장애와 방해가 될 뿐이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실 수 있기에 하나님을 믿어"

이는 왜 하나님을 믿는가에 대한 답이라고 말하는 것 중의 하나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피상적인 관찰일 뿐이다. 근본 핵심되는 것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답이다. 하나님께서 왜 피조물을 지으셨는가를 모르고 하는 대답이기에 그렇다. 그저 심심하시니까 심심풀이로 만드셨는가? 아니다. 성경은 교제 즉 피조물과의 사귐을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귐에는 사랑이 그 핵심이고 사랑에는 자유 의지가 그 요체이다. 사랑은 둘이 하나 됨이다. 하나 됨이라는 것은 갑과 을 둘일 때 갑은 을의 삶을 살고 을은 갑의 삶을 사는 데에 있다. '한 몸' 구조에서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위하는 삶의 영원무궁한 체제이다. 즉 갑은 을이 되고 을은 갑이 되어 갑은 을의 것이고 을은 갑의 것이 되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해 사는 체제로 영원히 사는 것으로서의 하나 됨이다.

갑과 을이 분명히 구별되어 있는 개체이나 갑이 을이 되고 을이 갑이 되는 것은 다름아니라 갑은 을의 생각을 헤아려 그 뜻대로 해 주고 을 역시 갑의 생각을 헤아려 갑의 뜻을 행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과 생명의 법칙임은 앞에서 누누이 강조했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으나 만드셨다고 해서 마음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만드심'이 부모가 자식을 '낳을' 때의 그 '낳으심'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정확하다.

무릇 무엇을 만드는 제조자가 그 만든 것에 대해 애착을 안가질 리 없지만 사람이 자식을 낳을 때 그 애착이란 남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 그 '지으심'이 이같은 '낳으심'이라 생각하면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즉 만드시고는 그냥 재미로 두고 보시는 정도가 아니라 전심전력의 사랑을 가지고 그 피조물들을 대하시고 위하심이다. 우리의 부모의 마음은 바로 이 하나님의 마음을 닮았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넣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보다 강하신 분으로서 우리를 친히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최종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최고 권위 또는 근본만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함으로써 그 하나님 위하는 자세로 우리 이웃을 위하는 그런 사랑의 주체의식, 주인 의식이 중요하고 또 이런 것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다. 즉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면서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나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니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하여 삶으로써 우리 모두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그 뜻을 이루는 차원에서 내 이웃들을 위해 사는 것으로 시종일관함이다.

'나를 위하는 일'은 하나님 친히 나를 위하심으로써 그리고 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내 이웃들이 나를 위해 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니 바로 이 영원한 진리, 사람 사는 법도를 아는 것이 제일 첫째로 중요하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이 이 생명의 법질서를 어김으로 우리가 현재 이와 같은 죽음의 불행 속에 빠졌으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친히 나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 주셔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고 또한 영원히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으로서 내 안에 계시니, 애초 나를 지으신 그 목적을 따라 나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만을 위해 살게 해주신 것이 인생 구원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애초 우리를 지으신 대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원리원칙으로 다시 복구, 환원시켜 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모두의 머리로서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사랑함이다. 이것이 삶의 기본 법질서다. 하나님을 사랑함과 사람 사랑인데[마 22-37-40] 이 모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집약되어 있다. 하나님이시자 사람으로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으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이 말씀을 지키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요 14:15].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계명을 지키게 됨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시는 것을 증명하셨기 때문이다. 그 증명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치신[갈 2:20] 즉 나에게 당신 자신을 영원한 선물로 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받으심이다. 그러므로 나도 주님을 그와 같이 사랑하는데 그 사랑하는 방법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나 아닌 다른 내 이웃도 그렇게 사랑하셨으니 나도 내 이웃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남은 당연하다.

다시 말해 이들을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되어 이들을 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원수도 사랑함이요 악을 선으로 갚음으로써 이기는 것이니 다시 말하면 '사울'[행 7:58/9:2/갈 1:13]을 '바울'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인내에 동참함이다. 이렇게 사랑의 법도를 따라 사는 것 자체가 무한한 사랑의 낙인 것이다. 이것은 생명과 사랑의 세계에서만 그런 것이고 현재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이 세상 역시 비록 사랑 아닌 모든 불법과 무법으로 충만해 있어 그 생명과 사랑의 법대로 하면 자연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 같이 되고 또 용납이 되지 않는 구조이기는 하나, 참고 견디면 그 결실을 거둘 것이므로 그 결과는 영원하고 극히 만족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도 우리와 똑같이 사랑하시어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셨으므로 우리도 그와 같이 해야 마땅하지 않으냐" 한다면, 차이는 우리는 그 뜻에 호응하여 그 한 몸이 된 체제 안에 들어 와 있고 그들 즉 믿지 않는 이들은 그렇지 못하니 같은 체제 안에 들어 와 있지 않은 데에 있다. 그러므로 시급한 것은 그들을 우리가 속해 있는 한 '우리'[fold] 안으로 인도하는 일이다. 다른 것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물론 그들을 구원의 진리로 인도해내기 위해 최소한의 선행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선행 즉 먹이고 입히고 삶을 윤택하게 해 주는 것이 우리의 본무가 아니니 선후사를 구분해서 순서를 따라 집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 그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믿어 절대 복종하기로 작정하여 우리와 같이 한 몸으로 되어 있을 때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니 한 몸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경고하시기를 "나를 믿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마 25:45] 것으로 판단되어 그렇지 못한 경우 마지막 심판대에서 멸망으로 분류된다.

때문에 초대 교회에서는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보람은 비록 이 세상에서라도 부분적으로는 얼마든지 느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의 실상을 안다면 모든 되어지는 일들이 너무나 당연한 것뿐이고 아무 것도 이상스러울 것도 없고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도 없다. 모든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순서를 밟아 진행되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 지배자[王, 임금-요 14:30]이고 인생들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으니 그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미워할진대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핍박 받지 않을 수 없음도 당연하다. 즉 세상 종교들처럼 종교 형태를 갖추고[대규모의 건물을 짓고 세상의 정상적인 교육기관처럼 신학교를 세우는 등] 버젓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세상 종교는 세상의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대접 받을 뿐 아니라 증오와 박해의 대상이 될 수 없으므로 얼마든 그런 종교 형태를 취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혀 다른 것이다. 기독교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고 헛된 세상 종교가 아니라는 그런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은, 속임수와 거짓이 판치는 세상으로서 거짓의 고수(高手)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런 짓을 하여 사이비를 많이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성경으로써 그런 사이비와, 사이비 아닌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를 식별하는 법을 알 수 있다. 대제적으로, 자기 부인이 그 식별법이다.

세상은 사람들이 구원 받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 구원 받는 일을 막기 위해 사력(死力)을 다하는 것이고 구원 받을 사람 다 구원 받으면 이 세상은 끝나는 것이다. 하나님 쪽에서 볼 때도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무작정으로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구원 받을 사람이 남아 있는데도, 무작정 세상을 끝내시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미리 택하심이 그 효용(效用)을 발휘하게 됨을 이미 설명했다.

즉 그런 사람들을 미리 아시는 고로 그 사람들이 온전히 자기 자유 의지로 믿음에 들어오기까지는 결코 세상을 접지 않으시는 것이다. 미리 아시는 일이 없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고 무작정 기다리시든가 아니면 성급하게 불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빈 틈 없이 일을 하시는 분이시니 이런 미리 아시고 미리 택하심이 바로 그런 하나님의 능력 중의 하나다. 특별하신 능력이라기보다 인간 역시 무슨 물건을 제작하면 그 물건의 장래에 미칠 효용을 미리 재단하고 만드는 그런 것과 같다. 차이는 하나님께서는 자유 의지를 갖춘 생명체를 제작하신다는 것뿐이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세상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그 실상을 드러내었으니 즉 핍박 중에 탄생하여 그 후 한 300년간 세상 권력으로부터 끊임없이 박해를 받은 것이다. 그 후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번에는 세상 권력도 권력이지만 주로 사이비 기독교로부터 역시 마찬가지의 핍박을 받은 것이고 오히려 더 심하고 잔악하게 받았으니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어 세상 권력을 등에 업고 그리스도의 복음 박멸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무릇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는 이러한 세상의 실상을 똑바로 알아, 그리스도를 믿는 즉시 세상과는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에 돌입함을 알아야 하고 따라서 오직 사람 살리는 일에 즉각 투입되고 있음을 제대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는 자로서의 기본 상식이다. 왜냐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만 아니라, 세상이 내게 대하여 내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실은, 내가 그렇게 못 박힌 것만 아니라 나와 같은 인생들로 구성된 이 세상도 같은 모양새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 말씀대로,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는 없다. 이웃의 따돌림을 받는 것만 아니라 각종 세상 권력[그것이 정치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으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고 재산 몰수는 물론 목숨까지도 잃는 각오로 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박해가 없거나 그리 심하지 않다는 것은 교회가 세상 편이 되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세상의 정치권력도 예로부터 그리스도의 복음에 우호적이었던 예가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에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세상인데 우호적일 수가 없다. 우호적으로 보일 때는 협박의 수단을 버리고 더 간악한 회유의 방법을 동원하고 있기 때문이지 달리 이유는 없다. 오늘날 소위 자유 세계의 교회가 북한이나 중국 등지의 핍박 받는 교회보다 생명력이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권력의 본질 자체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롬 13:1]. 그러나 세상의 권세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손에 있으므로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정의롭게 나타나지 않음이니, 만일 정의대로라면 이 세상에 왜 이상향이 없다고 자조조[自嘲調]의 말이 나올 것인가.

따라서 언제든지 기약 없이 핍박의 칼날이 번뜩일 수 있고 교회당 및 그 관련 건물들이 파괴되거나 강제로 접수될 수 있다. 이렇게 방해와 핍박의 좋은 표적이 되도록 일부러 건물들을 지어놓을 필요도 없을뿐더러 그런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건재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또 그렇게 할 이유도 없다. 세상에 복음의 원수들이 얼마나 많은가. 많다기보다 이 세상 전체가 그러하다. 세상의 지배자[王, 임금-요 14:30]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자신이기에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건물을 장대하게 지어 올리고 신학교 건물을 세우는 등등의 일은 "나 여기 있으니 보기 좋게 공격하여 '하나님의 것을 우리가 공격해도 하나님은 가만 있지 않으냐, 그러므로 보라! 하나님이 대관절 어디 있다는 것이냐' 하고 실컷 조롱하여라" 하고 일부러 그렇게 챙겨 주는 의미밖에 없다. 아니면 이 세상에 대한 무지, 성경에 대한 철저한 불신 때문이다. 교역자들 중에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들이 상당수이니 어떻게 성경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이 같은 "이유 없는" 미움과 무차별의 박해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는 변치 않게 되어 있다. 적[敵]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시대이니 오히려 이전보다 더 심하고 악랄하였으면 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시대 양상을 보면 이미 그 시대에 접어들었음이 확인되고 있으므로, 세상에서 교회당이 그대로 보존될 수 있다고 믿고 핍박은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세상에 속한 종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라 아주 단정해 버려도 좋다.

교회는 항상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그 특징이므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데 그런 사실을 알리시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로 성령의 인도가 아닌 전혀 별개의 것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너무 늦기 전에 각성하고 회개할 일이다. 사도행전에 초대교회 성도들이 날마다 "성전에 모였다"[행 2:46]는 기록이 있다. 지금 와서 그것을 곡해하여 "그러므로 우리도 성전에 모인다" 할 사람은 구원 얻은 자로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라면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 성전이 약 40년 후 로마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그 "성전"을 대신하여 다른 성전을 지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가정 집에서 모인 것이다. 어디서든 모일 수 있지만 당시 성전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므로 또 당시는 그리스도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의 분기점이 되는 시점이었기에 단지 편의상 "성전"에 모인 것이다. 유대인의 모세 율법을 따라 "성전"이기 때문에 그래서 성전에 모인 것은 아니다.

하기야 요즘 사람들이 "성전"이라고 여기는 곳에 성경 기록처럼 "날마다"만 모여도 칭찬들을 만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날마다 모이는" 일은 아니하면서도 "성전에 모인다"는 말만 따와서 활용한다면 아전인수 격으로 자기 입맛대로만 해석하는 것이니 이런 자의적인 해석은 바른 해석, 생명에 이르는 해석일 수 없고 억지 해석이 되어 베드로가 경고한 것처럼 자멸로 이어질 따름이다[벧후 3:16].

그렇게 "날마다 성전에 모였다"고 해서 그 "성전"에 모이는 것이 항구적으로 계속되었던가 하면 그 역시 그렇지 않다. 곧 이은 스데반 집사의 순절(殉節)로 핍박이 일어나 사도들만 남기고는 모든 형제들이 산지사방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성전에 모이는" 것이 끝나 버린 것이다. 예루살렘 자체가 로마군에 의해 주님의 예언대로 완전 폐허가 되고 "성전"도 함께 사라진 것은 앞에서 지적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기록에서 "날마다 성전에 모였다"는 것은 그 곳을 여전히 "하나님의 성전"으로 대접했다는 것이 아니라, 모이는 장소로서 그 어디든 적합한 곳이면 모였다는 그 '모임' 그리고 특별히 '날마다' 모인 사실에 주된 의미가 있다. 하나님을 섬겨 경배하는 곳으로서 유대인들이 만천하에서 인정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마다할 이유가 당시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영사회[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운동]'는 교회당 건물을 죄악시하는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그런 기존 건물을 활용하라는 것이다. 단지 그것을 세상의 종교적 개념으로 "성전"으로 삼지는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건물을 짓는다든가[특별히 거창하게] 하는 것은 문제가 다르다. 세계적인 적 그리스도의 핍박을 눈앞에 두고 있다 보아도 과히 틀리지는 않는 시기에, 그런 것이 과연 성령의 지시를 따름인지 확실하게 정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은 것이다. 다수가 회집할 필요가 있으면 그 동안만 일시 임차해서 사용하면 될 일이다.

우리는 명칭을 "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이라 하여 한 기치 아래 모일 것을 권하지도 않는다. 어떤 종류의 세력화도 꾀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필요 없는 것이다. "바영사회" 외의 다른 이름으로 얼마든지 할 수도 있다. 오직 성경에 가르치시는 대로만 일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만 힘쓸 일이다.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없다는 사실만 확인하면 된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지배하는 세상

우리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있는 현실을 감추고 그런 지식이 있어도 그 사실을 잊어버리게 하는 것 역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전술 중의 하나다. 자기 정체를 감추어 노출시키지 않고 마음 놓고 공작을 펴거나 작업하는 것이 반은 이기고 들어가는 비법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드러내어 자기 권력과 능력을 자랑하는 자쯤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착각하는 이가 많은데 그것은 너무나 철부지 생각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목적은 철부지 인간들처럼 자기 자랑이나 허풍 떠는 데에 있지 않고 인간 파멸에 있다.

자기중심임에는 마찬가지나 더 근본적인 데에 그 신경이 집중되어 있으니 인간처럼은 어리석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만 전력투구하는 자이다. 그는 자기 자랑 같은 것은 엄두에 둘 여지조차 없다. 적이 강하면 나도 강하지 않으면 대치하기 어렵다. 대치가 안되면 일방적이 되어 전투 자체가 되지 않는다. 무슨 말이냐, 이 세상의 지배자[王, 임금-요 14:30]로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전력을 다해 인생 구원을 막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 역시 전력을 다해 오로지 인생 구원하는 일에만 전 존재를 걸고 시종일관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를 않고 이 세상 사는 재미에 빠지거나 거기 만족을 느끼거나 양다리 걸치기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한다면 이미 그 수족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족쇄가 채워져 있다고 보아 틀림이 없다. 혹자는 이런 말을 한다. 즉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므로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조종하시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제아무리 이 세상 신(神)이라 하지만 하나님은 만물의 주재(主宰)로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일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데 감히 하나님의 교회를 건드릴 수 있느냐 한다.

그러나 다음 사실을 많은 사람이 간과하고 있다. 즉 원리원칙의 하나님으로서 원리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미 합법적으로 인간으로부터 그 지위를 물려받은[일종의 찬탈 행위지만] 것이니 인간 스스로 그 꾐에 빠져 그 속임수에 말려들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번 그렇게 된 이상 하나님께서도 공정 공평의 차원에서도 그것을 간섭하시게 되어 있지 않다.

단지 때가 있으므로 그 때가 되기까지 그런 것을 전화위복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인지라 그 지혜를 따라 역사하시는 것이야 우리가 얼마든지 기대할 수 있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 안에서는 만사 형통임을 우리는 아는 것이다. 왜 때를 기다리시느냐 하면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통해 아직 구원 받을 사람이 속속 생겨나고 있는 것을 아시는 까닭이다. 그런 사람 단 하나라도 남아 있을 때 세상을 접으실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 최후의 마지막 사람이 제대로 구원에 이르는 것을 확인하시는 그 때가 바로 세상의 끝이다.

그러므로 현실은 현실이다. 때문에 "세상이 나를 미워하였으니 너희를 미워할 것이요 나를 핍박하였으니 너희도 핍박할 것"이라 하셨다.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셨는데도 어째서 핍박을 받지 않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조종하시니 신경 쓸 것이 없다고 하는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스스로 말려들어가지 않고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마치 영원히 핍박 받지 않는 것처럼, 이 세상을 사랑해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런 그물에 걸려 들지 않게 하시는 것처럼, 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인식들을 하니 그런 어리석음도 없다.

우리는 지금 전쟁 중에 있다. 영적인 전쟁이므로 육체의 전투와는 달라 오직 우리의 신념과 신조를 어떤 육체적 약함에도 굴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승리이다. 육체적인 면 즉 물리적으로는 인간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영물에게 적수가 되지 못한다. 그는 영이요 우리는 육체이므로 상대가 되지 못한다. 물론 같은 영물로서의 천사들이 인간 편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물들끼리의 싸움이 아니라 인간 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싸움인 것이다.

미가엘을 위시한 천사들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우두머리로 하는 악령들과의 싸움이 요한 계시록에 예언되어 이미 그 예언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패퇴하여 지금 그 휘하 모든 세력들이 이 지상에 내리 쫓긴 것으로 판가름 나 있다[1908년의 시베리아 퉁구스 대 충돌 사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성을 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으니 지상(地上)에 화가 있다" 한 계시록의 예언대로[계 12:7] 오늘날 그 엄청난 재앙을 우리가 목도하고 있다. 천사들이 아무리 악령 일당을 제압했다 하더라도 우리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일대 결전은 여전하다. 그리고 승패는 순수하게 나 개인에게 달린 것이다.

신학교 설립도 그렇다. 주님은 처음부터 교회 기둥 같이 될 열둘을 택하실 때 모세 율법에 정통한 학자들이나 율법사, 서기관 같은 부류는 단 하나도 부르시지 않았다. 오히려 글도 잘 모르는 무식한 고기잡이들, 당시 죄인으로 취급 받던 세리, 이런 사람들을 택하신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린 아이라도 믿고 구원 받을 수 있는 인간 상식에 기초한 것으로서 극히 간단, 간명한 것이기에 따로 학문으로 취급하여 연구해서 알도록 되어 있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권위를 당시 초대교회에서 인정한 것은 항상 주님의 주변에 있으면서 직접 그 말씀과 하신 일을 보고 들은 증인들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고 그 외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그들이 기록한 복음서나 편지문들로 해서 모든 필요한 자료를 물려받고 있는 우리이니 이 성경을 직접 읽고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아 누구나 깨달으면 되는 것이고 그리고 함께 모일 때 그 깨달은 것을 서로 말하여 공유하면 되는 것이니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계시 즉 성령께서 친히 우리 각 사람에게 가르치시고 알리시는 것으로써 우리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문의 범주에 넣어 특수한 사람들만이 접근 가능한 그런 소수인의 점유물처럼 인식되게 하는 것, 그런 식으로 유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오히려 신학자라 해서 그 신학이라는 권위를 내세워 성경을 부정하고 창세기의 기록을 진실로 믿는 대신 인본적인 접근으로 신화의 일종으로 취급하는 것 등은 오로지 백해무익으로 흐른다는 것은 이미 입증된 바다. 그런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상투 수법이다.

사도들의 서간문이 기록되던 당시 상황 같은 부수적인 정보는 누구든지 그것을 연구한 사람이 한두 권 서책으로 펴내어 교회에 알리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요 만족스러운 것이지, 그것을 무슨 학문처럼 떠벌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위장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사이비가 세상 종교로 그 본래의 색깔을 드러내면서 속임수 차원에서 신학이라는 것을 설정해서 그런 것이요 처음부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리 없다.

진리는 항상 평범한 데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과 같이 진리의 이해는 인간으로서 아무 어려운 것도 복잡한 것도 없다. 인생 구원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한 권의 책에도 미치지 못하는 분량일 뿐이다. 이천 년 넘게 신학을 붙들어오면서도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관한 것은 지금까지 풀지 못한 미제(未濟) 주제로 남겨 둔 채로 있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간단 명료하지만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알게 하여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알 사람이 없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즉 성경에 있는 바로 그 구절, 이 구절, 저 구절이 바로 그 찾고 있는 해답인데도 이를 매번 간과하고 지나쳐 버리는 것이다. 성령께서 친히 짚어 주시지 않는 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 몇 만년이 흘러간들 같은 현상만 반복될 뿐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에게만 진리의 문이 열려진다 하신 것이다[마 11:25]. 아버지는 아들 외에는 아는 자가 없고 아들을 아는 것은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없다 하셨으니[요 6:44,45,65/ 16:12-15/눅 10:21,22/고전 2:9/고전 2:13,14/마 11:25-27/16:17] 그 어떤 인간도 모른다는 말씀이시다. 안다고 해도 제대로 알지 못함이니 "안들" 무슨 소용인가.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두드리고, 찾고, 구하지 않는 한 그 진리를 계시 받지 못한다는 사실 역시 철칙이다. 왜냐면 이미 그렇게 약속으로 정하셨기 때문이다. 성령께로부터 직접 배우려고 두드리고 찾고 구하지는 않고 도리어 인간 학문처럼 착각하여 거기 매달리는 데에서는 주님의 말씀과 같은 "두드리고 찾고 구함"이 있을 리가 없다. 찾지도 두드리지도 구하지도 않는데 진리의 문이 열릴 까닭이 없다.

그러므로 지금은 성경적 표현대로의 "장로" 즉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자라 해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 진리는 이제 누구나 그 핵심되는 것을 다 알고 있는 터이므로 오직 누가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으로 그래서 성령 충만으로 '본이 되어 있느냐' 하는 거기에 권위 유무가 달린 것이고 바로 그런 면에서 본이 되어 있는 형제가 교회를 대표하기도 하고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자로 추대되거나 선출되는 것이 온당하다.

그렇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주님의 직접 인도 아래 살기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받는 말씀도 정확하고 확실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장로', 또는 '감독' 또는 '목자'가 될 일이다. 사도시대라 해서 별다른 것도 없었다. 베드로는 그 편지에서 목자는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벧전 5:3] 함을 첫째 자질로 꼽고 있다. 첫째가 그렇고 둘째도 그렇고 셋째도 그렇다. 다만 당시는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주님에게서 직접 듣고 본 증인으로서 "사도"라는 자리가 중요했고 또 그런 사도들에게서 직접 가르치심을 받은 그 사람들이 또한 교회 안에서 중용되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성경이 오직 그 교과서이고 성령께서 그 가장 확실하고 친절하신 교사이시니 이것 저것 굳이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초대 교회 당시나 지금이나 “본이 되는” 사람이 이끌어가게 되어 있다. 고로 목자(牧者)에 관한 한 오직 핵심이 되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여 다른 형제들에게 모범이 되느냐의 여부에 있다. 그런 사람들은 누구에게서나 드러나게 되어 있는 터이므로 그런 형제를 만장일치로 추대하거나 혹은 숫자가 많아 그 중에 하나를 택할 경우에는 가룟 유다로 궐이 났을 때 맛디아를 사도로 선출할 때처럼 성령의 인도를 믿고 제비 뽑기를 하든가 하면 되는 것이다.

소위 민주적이라 하여 다수결로 할 때는 파당을 일으키기 쉽고 부패의 근원이 될 수 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시험할 틈을 제공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주관하시므로 제비 뽑기로 공정을 기하는 것이 지혜롭다. 아니면 만장일치로 추대함이 사리에 맞다. 그리고 능력 있는 사람들 즉 동일하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이들은 국내외로 나가 거기서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게 함이 유익하다.

주님께서 본을 보이신 대로 열둘 정도로 사람을 모아들이다가[본인을 포함하면 13명 정도] 그래서 그 정도의 수효가 채워지면 세포 분열처럼 둘로 쪼개져 다시 그것이 자라면 또 계속 쪼개지고 하는 등의 일을 반복함으로써 확산해 가는 일이 이상적이다. 그리고 '바영사회'는 올바르게 즉 의롭게 사는 것에 중점을 두므로 그리고 모든 권력은 하나님에게서 난다고 한 바울의 가르침대로 국가 권력에 협력하는 좋은 시민이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 복음의 일을 적극 방해하는 정권이 아니라면 성실한 납세자, 국민으로서의 성실한 의무 이행자로 일관하는 것이다. 오히려 공동체의식으로 사는 사회생활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니 약방의 감초 같은 존재들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알아 주면 주는 대로 알아 주지 않으면 또 그런 대로 우리가 거기에 괘념할 필요는 없다. 세상이 볼 때는 고도의 도덕적 생활을 하는 것이니 자기 부인을 그 철칙으로 삼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급시키고 확산시키지만 세상에서 인정 받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오직 우리의 관심사는 인생들 구원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 소위 "복음"이라 하는 것을 대개 보면 회개 없는 믿음, 바르게 살지 않아도 구원은 받는 것으로 믿는 그런 피상적인 것을 가지고 복음이라 하는 경향이 너무나 짙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세례 요한도 외치고 주님 역시 그렇게 선포하신 대로 회개운동이라 명명하는 것이고 회개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바르게 삶으로써 즉 거룩함을 이룸으로써 영생에 이름을[롬 6:22] 선전하는 것이다.

각자 구원 받은 사실을 믿는 믿음을 근거로 거룩함을 이룰 때 그 종국점이 영생이라는[롬 6:22] 사실을 이런 '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운동'으로 표명함이다. 이런 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런 이름이지, 그 모습이야 엄연히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다. 교회라고 해서 교회라는 이름을 붙여야 하는 아무런 의무 규정도 있을 수 없다. 교회로 인식하면 되는 것뿐이다. 오히려 교회라는 간판 아래 얼마나 사이비가 발호하며 심각한 불법이 자행되고 있는가를 안다면 그런 이름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고 하는 인식이 되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으니 이제는 세상을 하직하고 세상과 결별해도 좋다. 따라서 어서 죽어 좋은 세상으로 가야 되겠구나” 하는 것이 구원 받은 자의 정상적인 자세가 아니다.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구원 받은 사실을 망각함이다. 앞에서 강조한 대로 우리의 구원 얻음은 세상에 "보내심을 받는 것" 그대로의 의미다.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그 강도처럼 되지 않는 바에야[그렇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 오히려 이 세상에 더 남아 더 고생하고 끝까지 분골쇄신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건지겠다는 일념으로 스스로를 다지지 않는다면 그의 구원 받은 사실조차도 문제시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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