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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영사운이란? (11) 등록일 2016.02.16 21:38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61

바/영/사/회-"[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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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 사는" 것

하나님 앞에서 이 ‘바르게 산다’는 것은 아직 그리스도께 나아오지 않은 불신자에게도 주는 일정 메시지가 있고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자처하는 이들에게도 중대한 메시지가 있다. 불신자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 바르게 살라는 것은 인간이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바르게 살 수 없는 현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대관절 무엇이냐. 자기중심으로 살지 않는 것 즉 자기를 부인하면서 사는 것을 말함이다.

그런데 이 자기 부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반드시 조물주의 계심에 대한 확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조물주께서 각자를 위하시니까 즉 내가 나 자신을 위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위하신다는 믿음 가운데에서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과 한 몸의 지체로서의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이것인데 이것은 자기 부인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는 당연하니 하나님은 머리시요 이웃은 한 몸을 이룬 각 지체들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는 바로 나 자신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집단화한 나 자신, 거대하게 확장, 확대, 확충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위하기도 하고 동시에 내 이웃도 나 자신처럼 위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실제 불가능한 일이다. 이 말씀의 뜻은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또는 내 자신으로서 사랑하는 데에 있을 뿐으로 단지 결과론적으로 내가 위해진다는 이 뜻이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과 같다[엡 5:28].

내가 나 자신도 위하고 내 이웃도 내 자신처럼 위할 때에는 이론상으로는 그럴싸할지 몰라도 실제는 불가능한 것이니 왜냐면 나와 남이 같은 방향으로 나갈 때는 문제가 없으나 서로 충돌할 때 즉 둘 중 어느 쪽이든 하나만을 골라야 하는 불가피성이 대두될 때 과연 나를 위하겠는가 아니면 남을 위하겠는가. 만이면 만 사람 모두 자기를 위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왜냐면 내가 있고 나서 남도 있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내가 있으니 남도 있는 것이지 내가 없으면 그 남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나도 위하고 동시에 남도 위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 된다. 나를 위할 수밖에 없으니 자기중심을 벗어날 길이 없다. 그러므로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너를 직접 위하지 말고 네 이웃을 위함으로써 결과론적으로 너를 위해지는 방법을 취하라는 것이다. 내 이웃을 위해도 결국은 나를 위하는 것이다.

왜냐면 나의 이웃들도 역시 나를 위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한 몸으로서 하나이기 때문에 결국 그 결과는 내게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그냥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몸의 지체를 두루 거쳐서 한꺼번에 임하는 것이므로 내가 나를 직접 위하는 것보다 몇 만 배[구성원 수가 그 몇 만이라고 하면]로 확대, 확장되어 내게 안겨지는 것이다. 내가 직접 또는 스스로 나를 위하면 나라는 '하나'라는 분량밖에는 더 채울 수 없는 것과 사뭇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렇게 내 이웃을 위함도 머리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위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을 위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그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시는 사실을 전제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비로소 할 수 있는 말이다. 하나님은 나를 위하시지 않는데도, 무조건하고 내가 하나님을 위해야 되는 것처럼 말씀하실 하나님이 아니시다. 앞에서도 하나님의 어버이 사랑을 지적했다. 이미 설명한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되는 관계 또는 머리와 몸과의 관계 즉 생명의 영원한 법질서 차원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부모가 자기 분신인 자식을 극진히 사랑함이 바로 하나님 사랑이 반영되고 투영된 것이라 했듯이, 내게 대한 전폭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전제하고 그 사랑을 토대로 하여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위하는 것이며 순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가 위해진다는 것은 의식하는 것이지만 그 방법을 말함이다. 그 방법이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나의 상대를 위해 사는 것임이다. 그러므로 더욱 행복스럽게 가장 충만하게 사는 삶의 지혜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모든 것을 잃음으로써 모든 것을 얻는 것이니 이야말로 '불교식 어법(語法)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것은 실제가 아닌 가공(架空) 상태에서 말만 그렇게 하는 것으로서 속이 없는 껍질뿐이다. 진실의 토대를 갖추어 그런 말을 해야 먹히는 법인데 아무런 그런 근거도 없이 하는 말의 잔치일 뿐이다. 말은 비슷한 것 같이 보여 실제 결과가 같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을 머리로 하여 모두가 한 몸 체제 안에서의 지체 역할로서 그런 확실한 토대를 구축하고 있는 터이다. 그러나 불교는 머리로서의 하나님조차도 인정하지 않으니 어찌 가상(假像, 假想), 가공이 아닌가.

따라서 내가 내 이웃을 사랑할 때 자기 부인으로 임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위하는 것은 하나님[머리는 몸을 위하는 구조이니까]이시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가능해지는 일이다. 그래서도 먼저 하나님 사랑이요 그 다음이 이웃 사랑이다. 그리고 첫 계명이나 둘째 계명이나 자기 부인이 그 밑바탕을 이룸은 앞서도 지적했다. 왜냐면 하나님이 나를 친히 위하시므로 내가 나를 위할 필요도 이유도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이렇게 인정할 때 자기 부인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그리스도와 이미 아주 이상적으로 하나 되어 있는 까닭에 그래서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하시는 자리에 위치하시고 그리고 나라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 지내졌으므로 더 이상 "욕심"[약 1:15]이 있어 나를 괴롭힐 여지가 없다.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실 때에는 머리의 지시를 받들게 되어 있는 몸의 각 지체로서의 내 이웃들을 통해서 하심은 물론이나 나를 위하시는 머리의 절대적 의지(意志)이시기 때문에 모든 우주 전체가 나를 위함이다.

자기 부인이 아니면 모두가 한 몸처럼 하나 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한 몸처럼 하나 되어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이 행복스럽게 서로 가랑 가운데 사는 것이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그 소리이다. 바보 같은 소리일 수밖에 없지만, 인간이 저절로 났다고 가정해보자. 어떻게 자기를 부정할 수 있겠는가. 자기를 위해 주는 이는 오직 자기 하나뿐인데 어떻게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면 또 그렇게 해서 여럿이 어찌 되었든 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데 모두들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위한다고 서로 약속한다고 치자. 과연 그 약속이 지켜지겠는가. 내가 상대를 믿을 수 있는가. 그럼 나는 믿는다고 치자, 상대가 나를 믿어 주겠는가. 그리고 어디 우리 단 둘뿐인가. 여럿이 나의 상대, 나의 이웃이 되어 있는데 한 두 사람은 내가 믿어줄 수 있다 치더라도 그 외 나머지 사람은 내가 믿을 수 있는가. 그들은 또 나를 믿을 수 있는가.

이와 같이 한마디로 불가능한 것이다. 자기 부인은 있을 수 없고 자기중심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당연히 남는 것은 파멸이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지금까지 이 세상이 굴러오지 않았느냐 할 것인가. 한 사람이라도 구원 받아 마땅한 사람 구원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시기 위해 인생들을 강력 통제하시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3운법칙이다. 그런데 무슨 수로 영원한 낙원, 행복하게 사는 세계를 구상(構想)할 수 있기에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떠나서 “왕생극락, 천당, 운운” 하는가.

그것이 실험적으로 가능할 수가 있다면 벌써 오래 전에 이 세상 어느 구석에 그리고 이 장구한 역사 기록의 어느 한 페이지에 그런 이상향이 있었노라는 글귀 하나라도 적혀 있을 법도 한데 과연 그런 것이 존재하던가. 소위 과학 문명은 발달하는데도 상대적으로 인간 심리는 더욱더 영악해진다는 것이 오늘날 입증되고 있지 않는가. 인간 사회가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퇴화 일로이다. 이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임을 입증하는 근거다.

중심

우주의 모든 사물이 그 중심이 없이는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리고 그 중심은 다른 모든 것에 비해 확고부동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모든 것이 그 확고부동한 무엇에 의지하여 공고한 하나의 체계를 이룬 체제가 된다. 그렇지 않고는 그런 한 뭉치, 한 덩어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모두가 따로따로라면 그런 중심이 필요할 리도 없다. 그러나 이 세상, 이 우주를 두고 누가 따로 논다고 하겠는가. 완전히 하나로 뭉쳐져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 중심, 핵심되는 무엇이 반드시 있고 또 그것을 "조물주"라 하는데 그것이 그토록 이치에 닿지 않아 조물주를 부정하느라고 야단인가. 이치에 어긋나서가 아니라, 자기 욕심대로 살고자 하는데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있어 이 자기 욕심을 막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기서 부자유를 느껴 반항 의식에서 변명을 위한 변명, 핑계를 위한 핑계를 둘러대기 때문이다. 아닌게아니라 하나님은 이런 자기중심의 욕심을 미워하시므로 "회개하라"[to repent] 하시는 것이다.

인간과 같이 인격성이 없는 그런 물질만의 세계라 하더라도 반드시 그 중심이 있는 법이다. 가령 사람이 짓는 집만 해도 반드시 그 주춧돌[礎石], 머릿돌이 있어 흔들림 없이 자리를 잡아 주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 집이란 것도 사람이 그 집을 처음부터 머리에 상상하여 설계하고 그래서 짓기 시작하는 것이다. 집이 이러한데 하물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이 우주이랴. 생물이 아닌 물건을 그렇게 지어도 그러한데 하물며 인간과 같은 고도의 지성이 있는 이지적인 인간이 존재하는 이 세상을 비이지적이고 비이성적인 그 무엇이 그 중심이 될 수 있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미친 마음이라 하고[전 9:3]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를 바보[“fool”-시 14:1]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이 "바르게 살라" 즉 자기 부인하라는 것은 조물주 없이는 인간 삶이 도저히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다. 또 조물주 하나님을 시인하더라도 그리스도 없이는 역시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는 동일함을 가르치던 것이 모세 율법이었다. 창조주 하나님을 시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데도 어째서 불가능하냐 하면, 아담이 죄 중에[죄인된 상태에서] 우리 인간 후손을 낳기[시 51:5] 시작한 까닭에 바울이 설명한 대로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려"[롬 7:14] 있기[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때문이다.

즉 스스로의 범죄로 아담이 죽은 자가 되어 죽은 자들로서의 우리 인생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를, 아담의 분신(分身)으로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아 죽은 자로 났기 때문이다. 왜냐면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서의 “죽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아담에게 경고하셨던 그 죽음은, 아담의 신령한 몸이 현재와 같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돌아감을 의미했던 것이다.

그리고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이니, 이 죄라는 것은 여럿이 한 몸의 원리로 사는 것이 삶의 법질서인데 마치 자기 홀로 사는 듯이 자기 자신을 위함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생명의 '한 몸' 구조에서 이탈함이니 생명의 체제가 한 몸 구조인데 거기서 벗어나니 당연히 죽음밖에 없다. 그런데 아담에게 이 죽음은 영원 멸망이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있던 것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도로 회귀해 버리는 상태를 말함이었다.

왜냐면 시한부 목숨으로서의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시간만 지나면 노쇠하여 기진해져 숨지고 숨지면 썩기 시작하여 흙으로 돌아가는 까닭이다. 육체와 영혼의 이중 구조이므로 육체가 없어지면 영혼은 제대로의 삶을 절대로 누릴 수 없다. 그렇다고 그냥 어정쩡하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 들어가는 멸망으로 결국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네가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창 3:19] 하신 것이다.

죽음의 저주로서 이런 말씀을 하셨으니 범죄 전에는 흙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 상태 즉 신령한 몸으로 있었음을 의미함이다. 다시 말해 아담의 목숨은 자연계에 속한 것과 영계에 속한 것과의 이중 구조였는데 영원한 것을 잃고 시한부 생명으로 환원되어 버린 것이다. 애초에 이 시한부 목숨의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지으심을 받은 까닭이다. 만일 아담이 처음부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혹은 기타 영물들]처럼 신령한 몸으로 지으심 받았다면 당연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영원 멸망에 처해지는 것이 그에게 "죽음"의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였기 때문에 그 육체가 애초에는 영혼을 따라 신령한 몸이 되어 있었으나 범죄로 인하여 죽게 되자 혹은 선악과를 먹는 것 자체가 그런 죽음 즉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리는 작용을 한 까닭에 일단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머무는 정도로 되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결국 회개하지 않으면[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악령들처럼 멸망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죽음으로서의 의미는 마찬가지다.

다만 모든 인생이 이렇게 자연계에 속해 있으면서 그 스스로 선이냐 악이냐 그 갈림길에서 자기 운명을 정하도록 함이니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면 아담 때문에 모든 인생이 아무 이유 없이 덩달아 죽어서는 안되는 까닭이다. 자기도 아담처럼 스스로 결정하여 죽음이면 죽음, 생명이면 생명을 선택하도록 해야 마땅함이다. 이는 성경이 밝히고 있는 그대로다. 즉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롬 5:12] 함으로써 죽음의 근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모든 인생 각자는 아담처럼 죄를 짓느냐 아니 짓느냐 하는 결정을 그 스스로 내리게 되어 있고 그 응분의 조처 즉 죽음이냐 생명이나 하는 결과가 나타나도록 하는 새 기원(紀元)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으로서 세상에 오신 의미이다. 이런 사실을 세상이 알고 그리스도 오신 날을 기원으로 삼고 오늘날까지 정한 것은 아니다. 이는 명백히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것으로서 하나님 정하신 것을 이 세상 신(神)이라고 해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막을 권한은 없다.

다시 말해 "서력 기원"[Anno Domini, the Christ's(Christian) Era]이라는 말과 같이 지금은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시대다. 향후 영원히 그러하다. 왜냐면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훼손된 하나님의 첫 창조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구적으로 복구된 상태가 그리스도 오신 후로부터의 오늘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복구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다. 영물들이 선과 악으로 분류된 것처럼 인생들 역시 그런 분류 작업이 완료되어야 완전한 복구가 되는 까닭이다. 말하자면 첫 창조를 첫 사람 아담이 들어[범죄로써] 망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담이 범죄하지만 않았다면 오늘날까지도 살고 있었을 것이니, 그러면 자연 법칙 아래에서는 육체가 썩어질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영생한다는 말인가 할 때 그러므로 신령한 몸으로 있었다는 결론이 된다. 따라서 에덴낙원이 영계였다는 것이고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 "생명나무"나 "선악과 나무" 같은 식물이며 사람과 말로써 통하는 '뱀"이다. 이 "뱀"이 저주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배로 다니게 되니 그러면 저주 받기 전에는 사람처럼 직립보행이었음을 명백히 성경이 밝힘이다.

사람처럼 말도 하고 걸어 다니는 뱀을 구경한 일이 있던가. 그래서 그를 가리켜 “용(龍)”이라 하는 것이다. 이는 민간 설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된 요한 계시록에서 그렇게 명시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용”에 대해 사족(蛇足)을 달기를, 동양에서 의미하는 용과 서양에서 말하는 용은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계시록은 “옛 뱀”이라고 분명히 했다. 두 번씩이나 강조했다[계 12:9/20:2]. “옛 뱀”이라 했으니 “창세기에 나오는 그 뱀”이라는 뜻이야 초등학생이라도 알만 하다. 이미 설명했지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스스로를 감추기 위해 짐짓 그런 여러 가지 다른 모양으로 자신을 인생들에게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   이미 설명한 대로 신령한 몸과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같을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내 육체 안에 아무 선한 것이 없다[롬 7:18]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이 육체는 영원히 하나님과 화해할 수 없는 것이니[롬 8:5-8]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고 죽어야 무슨 해결이든 나게 되어 있다[7:24,25].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육체가 단죄(斷罪)된 것이다[8:3]. 즉 범죄에 대한 형벌로 죽어 장사 지내지고 무덤 속으로[그리스도께서 장사 지내지신 바가 바로 이런 뜻이 되기 위함이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육체를 따르지 않고[죽어 버렸으니까] 그래서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것을 지양할 수 있게 되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로서 "율법의 요구를 능히 이룰"[롬 8:4]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명 다시 말해 바르게 사는 삶의 도리를 따르는 법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롬 8:4]. "성령을 따라 행한다"[:4]는 것은 성령은 아버지와 함께 하나로 계시는 아들의 모습을 가리킴이니 즉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나가는 새 피조물로서의 삶을 가리킴이다.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생각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법이 없다. 그래야 인생들이 믿든지 말든지 결판을 내릴 것이 아닌가.

애매모호한 말씀이라면 누가 목숨을 걸고 따르려 나설 것인가. 또 어떻게 마지막 심판 날에 정확히 구분하여 심판을 내리실 수 있겠는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다는 것도[:14] 같은 의미다. 바울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므로 이는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대신하여”라는 우리말은 번역자의 편견에 의한 오역이니 “on behalf of”, “instead of”가 아닌 단순히 “for”이다]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15) 한 것이다.

우리의 몸도 영도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되었으니 주님의 것이요 내 것은 없다. 그 대신 주님의 것이 모두 내 것이 되어 있으니 주님 친히 내 안에 내게 주신 영원하신 "선물"[요 4:10/행 2:38]로서 이제는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조화인가. 아주 완벽한 이상적인 사랑의 삶으로서 자기 부인이 온전히 이뤄지니 이것이 곧 '바르게' 사는 것이다. 성경에 말하는 "선을 행함"이고 "의를 행함"이다[요일 2:29/요삼 1:11].

그래야 영생으로 보답됨을 바울은 분명히 하였다[롬 2:7,8/계 20:12,13 /딤전 4:16/고후 5:9-11/행 3:26]. 성경에서 말하는 이 “선을 행하는 것”은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는 것으로서 그래서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바탕 위에 행해지는 모든 것이다. 자기를 위하지 않으니 자연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밖에 없고 그리스도를 위하니 그 뜻을 따르고 그의 일을 하는 것밖에 없고[요 4:34/20:21] 따라서 우리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치신 대로 우리도 따라 행하여 내 이웃을 위하는 것밖에 없으니 선을 행함이 아닌가.

이와 반대로 나가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으로서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약 1:15]다. 그러므로 내가 내 몸을 아낀다면 그것은 과거처럼 내 것으로서가 아니라 주님의 것으로서다. 이제는 온전히 주님의 뜻을 따라 내 몸을 관리하는 것이다. 원래부터 우리 피조물이 하나님의 소유이지 우리 자신의 것은 아니다. 원래 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써 생겨났으니 내 것이 어디 있던가.

내게 힘을 주시고 힘을 낼 수 있는 장치를 해 주시니 내가 힘을 내어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 힘이 하나님 주신 것이지 내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의 새 창조[구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과 생명의 법칙으로 설명해도 하나님의 지으신 것이 모든 우리의 것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으신 것이 우리의 것이지만[만물을 다스린다는 것이 그런 뜻이기도 하다] 정작 우리 자신의 것은 우리 것이 아닌 것이다.

방금 언급한 사랑의 원리에서 갑은 을의 것, 을은 갑의 것이므로 조물주되신 하나님의 것이다. 원래 하나님의 것이지만[창조에 의해] 다시금 사랑의 차원에서 내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이다. 또 하나님의 것이므로 당연한 논리로 동료 피조물들인 내 이웃의 것이기도 하다. 왜냐면 나는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것은 내 이웃의 것이므로 나는 내 이웃의 것임이다. 그래서 모든 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지키며 순종하게 되어 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법질서로서, 하나님 친히 머리로서 우리 모든 피조물 가운데 계시어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이다.

몸의 각 지체가 머리의 지시를 따름으로써 한 몸으로서의 평균된 하나로서의 행복을 함께 누림이다. 우리의 머리로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생각하시는 것 모두가 우리 피조물들을 위하심이지 당신 자신을 위하심이 없다. 그리스도 십자가 죽으심이 그 증거다[롬 5:8]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것이 우리 피조물이라면, 우리가 감히 무엇인데 무슨 힘이 있어 조물주를 위해 드리겠는가 하겠지만, 앞에서 지적한 대로 사랑 차원에서 나 자신을 드림이다.

원래부터 하나님의 것이지만 내게 주셨으므로 내 것인데 이 나의 것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는 절차가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다. 생사가 좌우된다. 다시금 드리는 것이 자기 부인이요 그렇게 하지 않고 내 것이라 하여 움켜쥐고 내어놓지 않으려는 것이 자기중심이다. 나 자신을 드림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오직 그 뜻을 따라 그 뜻에 맞추어 그 말씀을 잘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 바로 하나님 위해 사는 것이 그 뜻이다.

이는 아기가 그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이 엄마가 시키는 대로 따라 주는 것뿐임과 같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홀로 계시던 분이시기에 무엇이 부족하여 피조물로부터 당신 자신을 위해 바라시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오직 "너희 피조물끼리 서로 위하고 아껴 사랑함으로써 행복하게 살라"는 그 뜻을 이루어 드림이 하나님을 위함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셨으니 그 방법대로 따르기를 힘씀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부인이다.

지금 이 시대를 분별해야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아무리 역설해도, 하나님의 실존을 믿는 것만이 대수가 아니다. 왜냐면 오늘날 단계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직접 창조주로 가장하기 시작하려는 때이므로[살후 2:3-12] 그 스스로 자기가 지금까지 공들여 쌓아오던 무신론의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유신론이라는 새 탑을 신축 중에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성경에서 강조하는 ‘자기 부인’까지 모방하려 들 수도 있다. 왜냐면 속임수 즉 거짓은 그 수명이 언제나 단기간이니까 그 짧은 동안에는 무엇이든 모방하지 못할 것이 없는 까닭이다.

가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런 ‘자기 부인’과 비슷한 그 어떤 것을 고안해서 나타내더라도, 그런 거짓의 구조로는 영원은커녕 단 얼마라도 지탱할 수 없다는 그 근원적인 허점(虛點)을 간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모든 거짓은 시간[세월]이 해결해 주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거짓임이 폭로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시간이 오기 전에 먼저 거짓에 넘어가 버려 일을 다 그르치고 난 다음이니, 그럴 경우 시간이 아무리 와 준들 소용이 없다는데 있다.

에덴낙원에서의 아담이 그랬다. 거짓인 줄 알 때에는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이 세상 인생들 모두가 모든 진상을 그 스스로 저절로 알 때가 오지만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완전히 때늦은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완전히 속았다는 것을 누구 하나 예외 없이 깨달을 때가 오지만[계 12:9] 그럴 때는 이미 원상 회복이 영원히 불가능한 때다. 이러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을 간파할 수 있는 힘은 다름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부인의 구조에 대하여 충분히 숙지함에 있다.

소가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항상 음미하고 묵상하는 데에서 가능해진다.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동작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항상 감사함"[살전 5:18]에서 오게 된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며[:16] 즐거워하고 사랑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아무리 천하의 그 무엇이라 해도 현재의 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새 창조로서의 자기 부인 외에는 삶의 길이 절대로 있을 수가 없다는 그 확신에 있다.

이렇게 성경을 제대로 알고 나면 아무 것도 막힐 것이 없다. 시원하게 뚫려 있는 고속도로처럼 또는 시원스럽게 흘러가는 물과 같은 순리, 순조로움만 있을 뿐이다.  상식적으로도 당연하고 논리적으로도 합당하고 어디 한 군데 구긴 데가 없고 비뚠 데가 없는 것이 우리의 자기 부인이다. 아무 불평, 불만도 없고 아쉬워할 것도 없다. 가장 이상적인 짜임새가 하나님의 진리다. 더 이상 이상적일 수가 없는 것이다.

더 이상 무엇을 보태면 오히려 흉물스러운 것이 된다. 이것이 모든 완벽함의 특징이다. 거기에다 다시 군 살을 보태거나 빼면 그 모든 아름다움과 장중함은 당장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를 아는 것은 하나님 친히 가르쳐 주시는 것 즉 계시[revelation]로 말미암는 것이지 그 외 다른 어떤 경로나 통로로든 통하지 않는 것이기에, 주님 말씀하시기를 "아버지를 아는 자는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없다" 단언하셨다[마 11:27].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지혜 있는 자에게는 진리를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어 주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에 관한 한 유식한 자라는 인상을 의식적으로 남들에게 심어 주려고 하는 그런 의도성이 있는 이들에게는 가르쳐주시기커녕 도리어 감추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그런 어린 아이 급(級)에 속하여 자기의 무식함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다.

세부적이고 세밀한 것보다는 가장 기본되고 뼈대가 되는 것을 가르쳐 주심이다. 그것으로 항상 충분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열두 사도의 성분에서 이는 잘 드러난다. 이 역시 세상 지식이 아닌 하나님의 진리의 특성이다. 성경에 관한 지식, 진리에 관한 정보를 세상 지식과 결코 혼동하지 말 것이다. 세상 따라 소위 학문이라 해서, ‘신학’이니 또는 ‘신학박사’니 하는 따위는 결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아님을 알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세상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영생하도록 보존한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사형수가 자기의 사형 형틀을 지고 형장으로 가는 것처럼]" 등 "세상"이 성경에서 금기시되는 것은 세상이 자기중심화하여 있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은 교만과 직결되고 교만하기 때문에 소위 지혜 있다고 자처하는 자의 지혜를 멸하신다 하셨다. 때문에 어린 아이들에게 진리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

처음부터 범죄하여 자기중심으로 출발하기 시작한 악령들이 이 세상의 지배자[王, 임금-요 14:30]로 공중에서 인생들을 철저히 장악하고 조종하고 있다. 모든 인생이 완전히 그 장중에 있어 속고 있기 때문에 이런 노예 생활을 자유롭다 하고, 도리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는 예속된다, 노예생활이라, 속박된 삶이라 하게 된다. 죽음을 생명처럼 착각하고 있으니 생명의 도리가 죽음으로 밖에 비쳐질 수 없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 자신을 창조신으로 가장하고 그 씨[후손-창 3:15]를 “하나님의 아들”로 분장시키고 “다른 짐승” 곧 “거짓 선지자”[계 20:10]는 세례 요한과 같은 역할을 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인륜, 도덕의 최고 화신(化身)처럼 자기를 치장하여 사랑, 자비, 인애를 역설하고 스스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을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써 그야말로 기적 칠갑을 해놓고 기적으로 우열[성경에 나타나신 대로의 그리스도와 적 그리스도와의 차별화]을 가름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그런즉 이른바 ‘사랑’ 그리고 초자연적인 능력[신의 증명으로서의]에서는 아주 비슷할 뿐 아니라 오히려 월등하니[일시적인 거짓이므로 그 한계를 모를 것이기에] 무엇으로 그 진위(眞僞)를 가려낼 것인가. 지금까지 지적한 바와 같은 지식 또는 학문에만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복음의 우월성'을 믿어 왔다고 자부한 사람들은 당장 그 기준을 버릴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적 그리스도가 등장할 때 100프로 그에게 넘어갈 것을 단언할 수 있다.

왜냐면 세상 지식에 기준을 두면 그 지식으로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당해낼 자는 천하에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영물인지라 지식면에서는 그 무엇으로든 반드시 굴복시킬 능력이 있기에 그렇다. 적 그리스도의 출현을 독재자나 폭군, 악마와 같은 개념으로 착각하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술책에 말려드는 것이다. 그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소위 성인(聖人) 중의 최고 성인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선을 행한다”[롬 2:7]는 말의 개념 정리부터 해야 하는 것이다. 막연히 자비를 넘치게 베풀고 사랑을 나타내어 강조하고 하는 것 등이 성경에서 말하는 선이 아니다. 자기 부인을 하는 것이 선이고 이 자기 부인은 ‘생명과 사랑의 법칙’을 따를 때에만 가능하고 이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자기 부인을 하면 자연적으로 선밖에 행하는 것이 없게 된다. 이런 자기 부인이 없이 행하는 선을 선으로 착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부인이다. 그리스도를 부인 또는 부정하면 이는 자기 부인을 밑동부터 뒤집어엎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이런 원칙과 법칙을 강조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따라서 얼마든지 자기중심의 ‘사랑’[실제는 물론 사랑이 아닌]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속임수의 ‘사랑’이다. 장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나타낼 적(敵)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바로 그런 양상이 될 것이다. 인생을 멸망으로 빠뜨리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그런 위장된 사랑, 자비, 인애가 가능하다. 물론 한 때의 자기 목적을 위한 일시적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거짓은 세월 앞에 버틸 장사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 사람은 저와 같이 희생적인 사랑을 베푸는데 악인일 수 없다, 따라서 진리가 아닐 수 없다”고 속단함은 철부지 생각이다.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벌이는 연극에 눈물 흘리는 것과 같은 양상이다. 무대 위의 일들이 실상 실제의 현실은 아닌 것이다. 실제인 것처럼 꾸미는 말 그대로의 연극이다. 따라서 그런 연극을 벌이는 그 한 때만의 일이지 일단 막을 내리면 현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 연극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벌이는 것이다.

문제는 앞의 지적과 같이 그 연극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의 마음이 선동되어 일생일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어리석게 저지른다는 것이다. 즉 이마나 오른손에 짐승의 표를 맞게 된다는 것이 아닌가[계 13:16].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것이 "진리[생명의 법질서] 사랑"이다. 억지로 자기를 부인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무식이니 진리부터 아는 것이 시급하다. 제대로 믿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을 사실로서 시인하는 것과 그 사실이 가리키고 있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다. 둘을 화합시키는 것이 '구원 얻는 믿음'이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화합함이 없이 따로 생각하면서 스스로 구원 받은 자로 자처하는데 이는 폭발물을 지고 불로 뛰어듦과 같다. 이 글에서 시종일관 법칙과 원칙을 강조하는 것이 이 까닭이다. 법칙과 원칙을 사랑하는 것은 그 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을 우리 모두의 머리로서 인정하지 않는 그 어떤 하나 됨[하나 됨이 사랑이다]도 그 정체는 사이비인 것이다. 그런즉 성경을 사랑하고 원리원칙 가운데에서의 사랑, 자기 부인에 심취할 일이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기필코 불의를 좋아하는 것으로[살후 2:3-12] 통하므로 때 늦기 전에 자신을 정비할 일이다. 자기 부인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을 ‘영원한 삶의 법질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법질서를 말하기 때문에 “두렵고 떪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것이다. 그 경고가 여기에서 정당성을 찾게 된다. 법에는 사정(私情)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강을 바로잡는 데에 있으므로 공명정대 공정공평을 생명으로 한다. 과거 아무리 태산 같은 공적이 있다 해도 현재 오늘 그 법질서에서 이탈될 때는 가차없는 응보가 불가피하게 된다. 모든 것이 사랑이 그 핵심이고 사랑은 현재 곧 오늘에 있는 까닭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할 것이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을 것이다”[겔 33:13] 하심과 같다. 우리가 과거 지은 죄가 아무리 태산 같아도 오늘 믿고 회개하여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모든 죄가 하나도 기억도 되지 않는 이치와 똑같다[:14]. 사랑은 영원한 현재이기 때문이다.  
  
때만 무르익으면, 다니엘이 예언한바 “신속한 내왕과 고도화한 지식”[단 12:4]의 최첨단 첨병이 되어 있는 지금까지의 모든 소위 문명의 이기(利器)들이 총동원되어 적 그리스도의 활동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전 세계를 완전 장악함은 오직 시간 문제가 된다. 구원 받을 사람들을 최종 준비를 시키시려는 하나님의 강권에 의해 잠깐 지연되었기 때문에 아직 이런 '적 그리스도 쓰나미'[지진 해일의 일본 말]의 엄습이 현실화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만큼 각자는 최대한 관심으로 이에 대처해야 한다는 진단이다.

그러므로 진위를 가려 내는 최고 판별법은 성경에 있다. 성경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사랑이 그 핵심이 된다. 성경의 합리성과 그 논리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그 권위는 그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다. 다시 말해 그 어떤 무엇으로 그 진실성을 증명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그 자체의 내용으로써 충분히 그 진실성이 인식되게 하는 그 능력을 충분히 음미하고 있어야 함이다.

예를 들어 성경의 진실성에 대해 혹자는 "과학적 증거"를 내세울지 모르지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런 지식쯤은 얼마든지 무기력화할 수 있을, 그 어느 인간도 따라올 수 없는 충분한 능력을 확보하고 있음을 앞에서도 지적했다. 그러나 성경의 이런 자체 증명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만세반석의 확고한 반석 위에 서 있게 된다. 이런 힘은 오직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 그 맛을 제대로 아는 자에게만 부여되는 은혜다.

성경이 그 자체 내용으로써 그 진실됨을 확증하고 있으니 따라서 거짓말이 없고 속임수가 없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리 없는 까닭이다. 거짓말의 속성은 약자의 것이다. 즉 자기 마음대로 안될 때 쓰는 얕은 꾀이다. 강자는 일방적인 힘으로 밀어붙이므로 거짓이나 속임의 수단을 쓸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약자이시던가. 그러므로 성경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닌가 하는 것부터 먼저 판별할 일이다.

"그러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생에 비해 약자인가?" 하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약자이고 거룩한 천사들의 강대한 힘이 맞서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이 확정되면 성경에 반대되는 모든 것은 거짓이고 속임수임이 자동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자체 증명이라는 것은 다름아니라 거짓말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말할 수가 없고 그런 내용이 담겨질 수가 없다는 바로 그런 논점(論点)에 있다. 그렇게 거짓말할 리가 없는 성경이 그렇게 온갖 거짓 기적으로 세상에 임할 악한 자를 미리 예고하고 있기 때문에, 앞에서 지적한 그런 온갖 기적이 나열되더라도[살후 2:3-12]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정확히 진단할 수 있고 거기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영계로부터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전락해 있는 터라 각종 영적(靈的) 현상 그리고 기적에 대해서는 몹시 약하다. 왜냐면 그런 초자연적인 것은 우리 육체를 압도한다는 느낌에서 위축되어 퍽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양이 앞에서의 쥐의 행세라 할까. 그래서 "놀랍고, 놀랍고 또 놀랍다"는 탄성뿐이고 이는 곧 경배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짓거리는 그것뿐이고 그것만 노리는 것이지 오묘한 이치는 없다.

거짓을 말하는 것이므로 오묘하기는 고사하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이 있을 리도 없다. 있다면 궤변의 조합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런 황당한 것이라도 기적적인 능력이 실리면 그대로 권위로 작용하니 사람들은 무턱대고 그것을 따르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무조건 믿으라고 충동하고 선동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 자체가 진실이고, 우리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는 분이시므로, 덮어놓고 “믿어라”는 말로써 전도해도 통했으니,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하는 경우이면 구원의 역사는 그대로 진행되어 온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전과 같지 않다. 영물들 특유의 고조된 능력으로써 공격 수준을 높이는 관계로 상대적으로 열악해 있는 육체로서의 우리들로서는 이에 맞설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확고하게 뒷받침되어져 있어야 함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요 법칙이기 때문에 이런 합리성과 논리성은 간결하면서도 장엄하고 정밀하고 그지없이 우미(優美)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논리가 정연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이 자연계가 나타내 주는 웅장한 자연미(自然美)와 같다. 위에서도 지적했지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이런 것이 있을 턱이 없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런 점을 스스로 잘 아는 까닭에 성경부터 공격해 오기를 처음부터 쉬지 않았다. 오늘날의 소위 양성평등도 그런 계책의 일환이다. 왜냐면 아담이 처음부터 남자로 창조되지 않고[남자로 되었다면 아담의 영혼을 조성하시기 전 먼저 여자부터 만드셨을 터] 여자가 생기면서 남자가 되었으므로 원형(原形)으로서의 아담을 기준하다보니 아담이 남자이므로 그에 따라 하나님도 “아버지” 그리고 “아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뿐이다.

인간 관계의 가장 친근한 것이 어버이 자식 관계인데 하나님을 그와 같은 최고도로 친숙한 관계로 표현함이 마땅하여 아버지 아니면 어머니라 해야 하지만 원칙대로 [첫 사람 아담의 대표성을 따라] 아담을 기준해야 하므로 자연스럽게 남성으로서의 표현이 불가피함이다. 남자에게서 여자가 난 것을 부정하거나 회석시켜 성경을 남성 우월주의의 전근대적 사고방식이라 매도하려는 또는 경원시하게 하고 경시하도록 만드려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획책이 이로써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사실 하나만 놓고 보아도 영원 세계에서는 애초 창조된[여자 없이] 아담의 '온전한' 상태로 모든 인간이 회귀(回歸)할 것임이 분명하다. 신령한 몸으로서의 천사들[그리고 악령들]이 현재 그렇다. 성별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의 자녀는 천사와 같다 하신 것이다[눅 20:36]. '온전하다'는 것은, 애초 홀로 있던 아담이 여자가 생김으로써 남녀 양성으로 나누어졌으므로 상호 보완 관계가 되어 남녀 어느 쪽으로든 개별적으로는 그만큼 불완전하기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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