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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영사운이란? (12) 등록일 2016.02.16 21:37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28

 

남자 여자를 각기 따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남자를 소재(素材)로 하여 나온 여자이기 때문이다. 즉 분파(分派) 또는 파생되었으므로 남자든 여자든 개별적으로는 '온 것[whole]'이 아니라 '반쪽[part]'이라는 뜻이다. 남녀 결합해야 '반쪽'이 아니라 '온 것'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원 세계에서는 더 이상 성별도 없고 거기에 따르는 호칭도 없다. “아버지”나 “아들”이 아닌 다른 새 이름이 등장할 것이다.

만일 성별이 계속 존재한다면 하나님을 무엇이라 부르겠는가. 계속 아버지라 부른다면 그야말로 남성우월주의가 되고 여성 비하가 될 것이다. 여성에게는 차별 대우다. 하나님의 일에서나 하나님의 세계에서나 이런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평균되고 균형되며 공평 공정하게 다루어진다. 말 그대로 평등이다. 주님의 좌우편에 앉는 자리를 부정하시지는 않았으니 그런 면에서의 차이는 있다 할지 모른다.

그런 가장 낮은 자리에서 종으로 섬긴 자가 그런 자리에 앉는다는 조건을 말씀하셨으니 그런 고하(高下)의 개념이 절대 공명정대 공정공평하지 않다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런 사실을 보아서도 성별은 존재하지 않음이 명백하다. 남녀라는 대칭 개념 자체가 필요 없는 까닭이다. 현재의 주님의 부활하신 신령한 몸도 애초 여자가 생기기 전의 아담의 형상처럼 온전하신 몸이지 부활하시기 전과 같은 남자의 몸이 아니시다.  

§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모든 인간에게' 나타나시는 것이지 중간에 혹은 마지막 때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 말씀은 창세(創世) 때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늘까지 성경이라는 형태를 통해 줄곧 그 권위를 유지해 오고 있는 터이다. 구약성경이요 그리고 신약성경이다. 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께서 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계심을 충분히 증명해 보이는 데에, 3운법칙[트리니 호모], 대칭성 원리, 인과율, 삼위일체 원리에 의한 생명과 사랑의 법칙 등이 강조되어 설명되는 의미가 있다. 오늘과 같은 마지막 때를 대비해서다.

그런즉 무엇이든지 충분히 철저히 음미할 일이요 종전과 같은 애매 모호한 태도는 버릴 일이다. 정히 지금은 화끈하게 다잡아 믿고 행동할 때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발톱에 언제 채여 갈지 모르는 급박한 시국이 되었다.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바로 받아들여야 빛을 빛으로 보는 것이지 어두움을 빛으로 여긴다면 필시 빛은 어두움으로 착각될 것이다. 인생이 죽은 자임과 이 세상이 죽음임을 바로 인식할 일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바로 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야 빛을 빛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죽음으로 바로 인식하도록 함이다. 그래야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앞에 비로소 나아올 수 있음이다. 그렇지 않고 단지 영생이 욕심 나서 혹은 세상 종교보다 수월하다 하여[믿기만 하면 되고 은혜로 거저 얻는 구원이라니까] 그래서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은 그 나아온 데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세상 종교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고 하나님을 칭송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데 왜 세상 종교로 취급하느냐 하면, 이상 설명과 같이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보지 않고 죽음을 죽음으로 바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상은, 그런 사람들이 잘못 아는 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 종교가 제시하는 것보다 수월한 것은 없다. 진리에 바로 들어서지 못한 사람에게는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는 것이다. 죽은 자와 산 자와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세상 종교에서도 사랑을 논하고 자기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이루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당연하고 상식적이어서 누구나 인간이면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그럴 뿐이다. 양심이 있으므로 그런 측면에서 인간은 본성으로 다 알고 있다. 양심이 가르치기 때문이다. 사랑이 삶의 핵심인데 사랑하지 않고 즉 선행 없이 생명을 누린다는 것은 언어도단인 것쯤은 그래서 누구나 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속말로 공짜로 얻어 챙기면 되는 구원인가? 물론 아니다.

"선행"[롬 2:7,10] 없이 영생하는 수는 없다. 선을 행하라 즉 사랑하라는데 이에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담이 영생하는 자로 있다가 즉 산 자였다가 죽은 자가 된 것은 악을 행했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선례(先例)가 있어 증거가 명백한 것이다. 악이라는 것 즉 죄를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부터가 잘못이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 즉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악이요 죄다. 자기를 위하기 때문에 결국 남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일방적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당했고 그 어느 피조물에게든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그것이 악이 아닌 것이 아니다. 죄가 곧 악인 것이다. 남을 해치는 것은 자기를 위하기는 자기중심이기 때문이다. 까닭없이 가인이 아벨을 미워하고 죽이는 것을 보라. 까닭없이 미워하였다는 것은 아벨이 일절 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함이다. 그런즉 남이 자기에게 해를 입히든 입히지 않든 미워하고 미워하여 죽이기까지 하는 것이 죄와 악의 본질이다. 아담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무슨 해를 입혀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담을 죽음에 빠뜨렸던가?

그러므로 악을 행하면서 영생을 누릴 사람은 없다. 악을 행한다는 것은 남에게 해를 끼쳐 불행하게 만드는데 어찌 다른 이들과 섞일 수 있고 함께 살 수 있는가. 그렇게 이웃을 해침으로써 자기를 이롭게 하는 자는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각자의 양심으로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새 계명"[요 13:34]이 바로 이 평범한 사실을 가르치시고 가리키심이다. 따라서 이 악한 세상에서 이 악을 "참아내고 선을 행해야 영생으로 갚으신다"[:7]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 역시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자가 영생으로 들어감을 가르치는 것은 마땅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식 차원이다. 진리가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것이다. 다만 "선을 행한다" 할 때의 그 "선"을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세상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당연하니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 있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든 배우려고 하지 않는 까닭이다.

성경에 가르치는 선은 자기 부인을 기반으로 하여 한 몸 체제에서 지체 역할을 함을 말한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시는 하나님[또는 그리스도]을 위해 삶으로써 함께 지체된 이웃을 위해 사는 것이 "선"이다. "선"에 관한 한 세상의 인식은 양심에 과히 어긋나지 않게 행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은혜가 되고 그 구원이 선물이 된다고 해서, 선을 행하는 것을 구원과 결부시켜 말하면 큰 일이나 나는 것처럼 여기나,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데도 성경을 모르기 때문이다[롬 2:7-9].

그런 것은 성경 지식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교리다.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구원 받는 자가 적습니까?" 하고 제자들이 여쭈니 "좁은 길을 통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 하셨다. "힘쓰라"는 말씀에 주목할 일이다. 자기를 따라오는 많은 군중에게 "나를 진정 따라오는 것이 어떤 의미이고 어떤 대가가 따르는 것인지를 알려 주마" 하시는 의미에서 그 "자기 부인"을 말씀하신 것이다. 즉 "망대"[눅 14:28] 비유다.

자기 부인은 생명의 세계에서는 그 자체가 생명의 낙으로 통하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이 죽음과 어두움의 세상에서는 도리어 죽음과 어두움으로 비쳐지는 대목이다.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보지 않으니 빛이 도리어 어둠처럼 여겨지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나를 따르기 전에 먼저 앉아 그 대가를 충분히 감지하고 미리 각오하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이것이 과연 수월한 구원의 길인가? "그 문으로 들어가기를 구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 하셨는데 간단한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고 자기 선입견이나 구미에 맞도록 무리하게 뒤틀어 엉뚱한 해석을 내려 지금까지 가르쳐오고 있는 것이, “구원은 택함 받은 자의 것이고 인간의 의지와는 별개”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왜 힘쓰라고 경고하셨는가. 힘쓴다는 것은 강력한 의지 작용을 말함이다. 그래서 천국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힘껏 밀치고[press] 들어가는 데라 하셨고 침노하는 자가 침입하여 강탈하는 것이라 하신 것이다[마 11:12/눅 16:16]. 전혀 의미가 다르지 않은가.

혹자 말하기를 “그 힘쓰는 것은 택함 받지 못한 자를 지칭하시는 것이라” 한다면 그러면 왜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택하심에 있다고 당신들은 말하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하면 구원은 "힘쓰는"[눅 13:24] 데에 있는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되는 일이다. 이 둘은 각기 다른 뜻이 아니라 한 뜻, 한 의미이다. 성경의 경고대로 힘쓰게 될 줄 미리 아시고 그 힘쓰는 대로 되도록 미리 정하신 것을 미리 택하셨다 하는 것이다. 역시 구원의 양면성이요 동시성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나 자신은 힘쓰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미리 아시고 택하심을 따라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결단코 내 힘쓰는 대로 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왜냐면 장애가 많기 때문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일 없이 시험하는 자 역할을 하겠는가. 이 장애를 미리 치워놓으시는 것이 미리 택정(擇定)하심의 의미다. 단 이 힘씀이 직접 자신의 구원을 목적함이 아님을 앞에서 누차 설명했다.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었으므로 시험을 받아 죽은 자가 되지 않기 위한 즉 산 자의 일을 하고 죽은 자의 짓을 하지 않기 위한 힘씀이다. 산 자가 되어 왜 죽은 자의 짓을 하겠는가.

죽은 자의 짓거리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을 말함이다. 만일 내가 나의 구원을 목적한다면 자기를 위하는 것이고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이 자기 부인을 힘쓰고 자기중심으로 나가지 않도록 스스로를 편달하고 닦달하고 그래서 "힘쓴다" 함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이다. "조심하는"[고전 10:12] 것이다. 아담 역시 산 자로서[산 자로 창조되었으므로] 죽은 자가 되지 않게[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경고하셨으므로] 조심했어야 했다.

스스로 엉뚱한 마음을 먹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교만해서 아니면 호기심이 동해서 선악과를 먹을 수도 있으므로 자기 마음을 엉뚱한 데로 돌리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는 것이 "힘씀"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엉뚱한 생각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여자에게 넣어 주자, 여자가 "넘어졌고"[:12] 넘어진 여자는 그런 엉뚱한 생각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서 받은 그대로 남자에게 차례로 넣어 준 것이다. 어떤 엉뚱한 생각이냐, 나의 현재 상태[우리로서는 나의 구원된 상태, 아담으로서는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되어 있는 자기의 신령한 몸의 상태]를 나 스스로 지키는 자세를 일거에 무너뜨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생각이었다.

내 스스로 나를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일체의 모든 생각이 그런 "엉뚱한" 생각이다. 오직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 그 말씀만을 전적으로 복종하게 되어 있는 자기 자신의 위치[혹은, 분수]를 떠난 것이다. 천사의 범죄도 자기 분수를 지키지 않고 떠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유 1:6]. 새 창조를 입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의 위치, 우리의 분수(分數,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는 무엇이냐.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해 사는"[고후 5:14,15] 바로 이것이다.

바로 이 분수대로 살기 위해 조심하고 힘쓰는 것이다. 아담은 그렇게 하지 않아 죽음에 이른 것이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 역시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지금 영원 멸망에 처해져 있는 것이니 우리는 저들을 거울로 삼아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이요 "힘씀"[히 4:11/눅 13:24/고후 5:9]이고 "더욱 힘씀"[벧후 1:10]이다. 그러므로 이 힘씀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 위해 혹여나 시험을 받아 나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되어 그리스도[하나님]를 위해 사는 마음에서 이탈함으로써 "믿지 아니하는 악심(惡心)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함"[히 3:12]인 것이다.

그래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죄의 유혹으로 굳어진 마음이 되는 것을 면하고자" 하는 것이니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아야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기"[:13,14]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노력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이니, 이 둘을 함께 조화시켜 생각하려 하지 않고 왜 각기 독립된 의미로만 해석하려 고집하는가. 그래서 내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시종일관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또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 일색일지라도 내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되지 않는 것은 나를 기계적 생물로 만드시지 않고 사랑을 알고 사랑할 줄 아는 이지적인 자유 의지를 구사하는 존재로 처음부터 만드신 까닭이다. 그래서 믿어야, 그리고 사랑으로 순종해야 구원된다 함이다.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는 것은 곧바로 멸망이니(벧후 3:16) 성경을 자기 취향대로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조심할 일이다].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치 아니할”[벧후 1:10] 것이라 한 것은, 자기 구원을 위해 그렇게 힘쓰라는 의미가 아니니 이미 구원 받은 자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된다 함은 그런 하나님의 은혜 없이 인간 스스로 무엇을 하는 것이 한마디로 불가능함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아담의 범죄와 우리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현재 '죽은 자'로서 '산 자'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음도 한 가지 중요 이유이지만, 우리가 구원 받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으므로 이 하나님의 은혜 곧 거저 주신 능력은 영원히 나를 위해 작동되기에 나 자신의 힘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산 자'라 하더라도 인생의 근본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 피조물들에게 거저 주신 선물로서의 생명력으로써 우리가 비로소 움직일 수 있음이다[행 17:28]. 항상 이런 인(因)과 과(果)의 관계를 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미 설명한 바 사랑과 생명의 법칙에서 피조물을 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므로 따라서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우리[및 모든 피조물]의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마땅한 도리를 다하라는 것이 성경의 경고이다.

이 경고를 무시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후 5:15] 때 아담처럼 또는 악령들처럼 되는 운명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사실에서도 명백해지는 것은 이 때의 “더욱 힘쓰는” 것이 자기 구원이 그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가리킴이다. 결과론적으로 자기를 구원함이 된다는 그 뜻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목적하는 것'과 '결과론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생명이 한 몸됨에 있고 이 한 몸으로 하나 됨의 원리가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에 있음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그 무엇이든 사람으로서 하는 모든 일의 의미는 하나님을 위하는데 있고 하나님을 위함으로써 자기 이웃을 위함이다. 자기 자신을 위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없어서 없을 뿐 아니라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일이다. 한다면 그것은 곧 죽는 일이기에 그렇다. 왜 죽느냐 하면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에서 을이 갑을 위함을 멈추면 갑 역시 을을 위함을 멈출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이것이 둘이 하나됨의 철칙이다. 우리 구원의 동시성이요 양면성이다. 사랑의 동시성이요 양면성이다. 일방적인 사랑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머리와 몸 관계가 작동되는 이치다. 머리든 몸이든 그 상대를 위하는 동작을 멈추면 더 이상 한 몸으로서의 기능이 마비되기 때문이다.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위하는데 어느 쪽이든 그렇게 위함을 멈추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대를 위하니 상대에게 해를 가할 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담을 죽게 한 것과 같은 일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선을 행함"[롬 2:7,10/요 5:29/계 20:12,13/딤전 4:16/고후 5:9-11/행 3:26]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어떤 힘씀이든 애씀이든 노력이든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것[자기 구원을 목표하는 것도 포함해서]은 용납되지 않는다. 생명의 세계에서 죽음이 용납되지 않는 것과 같다. 용납되면 그것은 죽음의 세계이다.

죽기로[멸망하기로] 작정되어져 있다면 그것은 필연 자기를 위해 살았던 결과이다. 자기를 위해 즉 자기 구원을 목적하여 무엇이든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므로, 우리가 은혜로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 구원부터 먼저 받은 것이 아닌가. 따라서 "더욱 힘쓰라"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우리 구원 받은 자의 본연의 책무를 다하기에 전력을 다하라는 뜻이다.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도 마찬가지 뜻이다. 인생의 마땅한 도리, 삶의 원칙인 하나님 위하고 이웃 위하는 일을 함으로써 선물로 얻은 자기 생명을 스스로 보전하라는 의미다. 일절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의미로서[rhgn 5:15/fha 14:7-10] 은혜로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을 받아 놓고, 이제 와서는 과거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여전히 산다면 자살 행위가 아닌가.

그런 어리석음을 극력 경계하라는 것이다. 그런즉 하나님의 택하심도 사실이고 인간의 힘씀 즉 의지 작용[이것은 그 특성상 항상 자유 의지를 지칭한다]도 엄연한 현실이다. 그럼 이 둘의 조화는 무엇이냐. 앞에서의 설명처럼 하나님께서는 미리 보신다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이시든 인간이든 무엇을 만들 때는 그 작용과 결말 등을 미리 예상하고 거기 맞추어 만드는 법이다. 인간은 생물을 만들 수가 없기 때문에 이해가 잘 안될지 모르나 인격성을 갖춘 생명체 즉 그 자유 의지를 구사하고 그 의지를 따라 행동하도록 되어 있는 피조물을 만드시는 데에는 그들의 전모(全貌)를 미리 내다보시는 안목이 필요하게 됨은 당연하다.

그래서 그 미리 보시는 결과 자기 자유 의지로써 하나님을 사랑하여 시종일관할 수 있는 인간은 그렇게 함에 아무 지장이 없도록 제반조처를 미리 강구해두실 필요가 생긴다. 바로 이것이 택정[擇定]하심의 의미임을 앞에서 지적했다. 이들은 모두 예외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경고를 따라 스스로 힘쓰고 스스로 경계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이루는 자임을 미리 아신 것이다.

따라서 택하심 받았다고 특별 예외 조처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똑같이 공명정대 공정공평하게 같은 출발점에서 뛰는 것이다. 고로 우리가 어떤 이를 가리켜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한 바울의 말처럼 "그의 택하심을 안다"고 말은 할 수 있어도 그리고 베드로처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는 할 수 있지만 택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안심한다"거나 "안심하라"거나 그런 말은 할 수는 없으니 말에 조심할 것이다. 택하심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로서 하나님의 몫이지 우리가 이렇다 저렇다 관여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오직 두렵고 떨림으로써 힘쓰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는 것만이 있을 따름이다. "나는 천국에 들어가도록 택하심 받았다"고 내 스스로 말할 수 있다면 "두렵고 떨면서까지 구원을 이룰" 이유가 없지 않은가. 또 택하심 받았다는 의미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우리가 아무리 힘쓰고 애쓰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내 힘으로 그렇게 하였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니, 오직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심을 따라 제반 조처를 취하여 그렇게 되도록 하신 그 은혜의 결과라 할 때는 내가 자랑할 아무 것도 없게 된다.

다시 말해 내가 구원 얻은 것도 그렇거니와[그리스도 친히 나 위해 죽으심으로 되었으니], "내 스스로 구원을 이루는" 것 역시 내가 힘쓰고 애쓴 결과가 아니라 실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나의 의지를 따라 될 수 있도록 만반 조처가 미리 취해진 때문이므로 시종일관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의 사랑의 의지만 작동시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바로 핵심이 되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아무 것도 자랑하거나 뽐내거나 다른 이들보다 더 낫다는 식의 교만은 영원을 두고도 용납되지 않고 또 그럴 아무 근거도 없다.

§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as yourself"] 사랑하라"는 말씀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미가 되는 것은, 주님께서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데에서 확정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니 주님께서 자신을 생각하셨으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심으로 목숨을 바쳐 그것을 내게 통째로 주실 리가 없다. 자기 자신을 위하심이 일절 없으셨다.

자기 자신을 전부 내게 "선물"로 주신 것이[갈 2:20]다. 이것이 어찌 자기 부인이 아닌가. 자기를 부인하셨기 때문에 자기의 전부 즉 생명을 나를 위해 바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 나를 강요해서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니니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하셨다[요 10:18].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부득불 목숨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아들의 뜻이니 왜냐면 둘이 하나 되어 계시는 관계로 아들의 일은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있고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룸에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일은 아들을 위하심이다.

억지로 강요에 의해 목숨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목숨을 버리실 수도 있고 다시 얻을 수도 있는" 자발적인 주인 의식에서 하시는 일이지만, 동시에 이를 가리켜 "아버지께서 주신 계명"[:18]이라 하셨으므로,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 되어 계심은 저절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명령과 복종 관계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즉 아버지께서는 본을 보이시고 이 본을 따르라고 명령하시고 아들께서는 그 본을 충실히 어김없이 따르심으로써 복종하시는 관계다[요 5:19,20].

이는 다름아니라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하나되는 관계이지만 둘이 대등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대소, 주종, 인과 관계로서의 본질을 말씀하심이다. 즉 머리와 몸 관계이니 이런 질서 없이 천하 그 어떤 관계도 성립이 될 수 없음이다. 왜냐면 이런 만유의 존립 이치가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비롯되어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 가정에서의 질서도 남자가 여자의 머리됨에서 이루어져 있으므로[고전 11:3] 양성평등이라는 것이 전혀 합리성을 잃고 있는데도 세상의 양식은 이를 간파하지 못하니 완전히 이 세상 신(神)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농락에 놀아나고 있다는 증거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남자가 여자의 머리가 아닌가. 자식이 부모에게서 났으니 부모가 머리요 자식은 그 몸과 같은 이치다. 애초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든 남자가 여자에게서 났든 둘 중 하나가 아닌가.

여자 남자가 동시에 생겨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면 자연계 생물인 동식물의 암수 양성(兩性)을 보아도 생식을 위한 것이다. 생식을 목적으로 처음부터 양성으로 된 모든 동물 또는 식물이 인간을 포함해서 생겨난 것이면 사전(事前) 고안, 기획, 설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 사전 기획의 지성(知性) 또는 기획자를 우리는 최초의 원인 즉 창조주 하나님이시라 한다. 지성을 갖추었으니 인격성을 지니심은 당연하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되어 계시는 이 이치를 따름이니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됨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짐이 아니라 나의 절대적인 복종으로 되는 것이기에 "회개하라"고 명령하심이다[행17:30]. 다시 말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되, 예를 들어 갑이 크고 을이 작아 갑이 원인이 되고 을이 결과가 되어 있는 관계이므로, 큰 자가 작은 자에게 "명령한다"고 하고 작은 자는 큰 자에게 "복종한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둘이 하나되는 관계, 또는 몸과 머리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처음부터 생명의 본질이므로 우리가 구원 받았다 또는 영생을 얻는다 할 때의 의미는, 단지 특정 사실[그리스도께서 나 위하여 죽으셨다는 등]을 사실로서 수긍하고 인정하기만 함으로써, 주시고 우리는 또 그것을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되는 그런 영생이 아닌 것이다. 생명 자체가 어떤 물건이나 물질이 아니라 '상호 관계'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생명 자체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스도와의 관계이니, 내가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됨에 있고 이런 관계는 반드시 본을 보이고[계명, 명령] 본을 따르는[복종] 대소, 주종, 인과 관계로서 대등 관계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 것은 반드시 이런 복종하는 자세를 말함이요 따라서 회개가 전제되어야 함이다[행 2:38].

이는 우리가 구원 얻는 믿음의 본질을 말함이다. 즉 절대적 복종이다. "스스로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하신 것은, 그렇게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스스로 다시 사신다는 뜻이 아니라,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심을 의미하심이니, 실제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리시는 것이지만 그 하나 되어 계시는 의미로써 주님 친히 스스로 살아나시는 의미에도 해당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면 말 그대로 아버지와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인하여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함께 장사 지내진 것이요 함께 부활하여 함께 승천하였고 함께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현재다. 또 하나 됨으로써 그리스도 친히 이 세상에 성령으로 임하실 때 나 역시 세상에 보내심을 받는 몸이 됨이니, 이 하나 됨의 의미가 또한 이와 같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 아버지께서 아들과 하나 되심의 이치를 따라 된 것이고 주님 친히 이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요 14:20].

그러나 앞에서 이미 설명했지만 그리스도 친히 "내 스스로 다시 살아날 권세도 있다" 하신 대로 우리도 그와 같으니, "내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 한다"[빌 3:10,11]는 표현이 그것이다. 즉 사랑에서는 일방적인 피동성이 용납되지 않는다. 피동성과 동시에 적극성, 능동성이다. 곧 주인 의식이다.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나를 위하셔서 나를 살려 주시는 것이지만 나는 그대로 받기만 하는 것으로 그칠 수 없으니 다시 드리는 자세를 항시 유지함이 사랑의 특성이다.

그럼 이 경우 나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무엇인가. 내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하여 부활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나를 부활시키시나, 나는 나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다시 말해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을 위해 부활하는 자세를 취함이다. 적극적으로 나의 의지를 발동시킴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왜냐면 내가 일단 죽은 자의 영역을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로 산 자가 되어 있는 이상 아주 완전히 나 자신을 위하는 것과는 담을 쌓고 절연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으로[고후 5:15] 영원히 확정 지어졌기 때문에 달리 그 어떤 것도 용납이 되지 않는 까닭이다. 이는 강제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즉 하나님께서 억지로 나를 그렇게 하도록 만드셔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자진해서 취하는 행동이다. 이것이 사랑인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하나됨, 한 몸으로서의 이치를 따르므로 우리가 자기를 부인한다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해 이웃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그 목숨이 버려지는가 하면 결코 버려지지 않으니 주님께서 나와 하나 되어 계시기 때문이다. 버려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소모적이지 않다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생산적이니,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자기를 더 확장, 확대하는 방법이 자기 부인인 까닭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죽으실 일에 대해 말씀하실 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하시지 않았는가. 자기 부인은 다시 말해 적극적인 생산 활동인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방법, 바로 그것이다. 산 자로서의 살아 있는 활동이다. 산 자는 항상 움직이므로 그 움직임은 전체가 생산하는 것이고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이 산 자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여 이웃을 사랑하라, 또는 자기를 부인해야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신다. 그래서 “새 계명”이라 하셨다. 새 것이니 묵은 계명이 있는 법. 즉 모세의 율법을 통해 나타난 것인데 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첫째 하나님 사랑하고 둘째 네 이웃 사랑하라는 말씀이었다. 첫째 하나님 사랑하고 둘째로는 네 이웃 사랑하라는 것이 지금도 똑같은 내용인데, 어째서 새 것과 묵은 것으로 갈라지느냐 하면 그리스도 오시기 전과 오신 후로 나누어지는 성질의 현격한 차이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이전에도 분명 하나님의 계명이다. 그러나 그 계명은 똑같은 내용의 계명이기는 하지만 지킬 수 없었던 계명이다. 지킬 수 없는 계명을 주실 수도 있는가. 그렇다. 그 계명은 지키도록 함이 목적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목적이냐. "하나님, 저는 지킬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함이 그 목적이었다. "고로 저는 도리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하고 토설케 함이 목적이었다.

곧 바울의 로마서 7장 설명이 대변해 주는 바로 그 탄식이[롬 7:24] 나오도록 함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되고 그리스도 오실 때 그리스도를 믿게 하심이 그 계명을 내리신 목적이었다. 이러한 역할은 그리스도 오시기 전 그림자로서의 의미로 충분히 다한 것이다. 그리스도 친히 이를 반복하여 설명하실 이유도 없다. 실상 그런 일이 있어도 안되는 것이니 그리스도 자신께서 구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오신 후 하신 모든 말씀은 그런 이전 것과는 달라 능히 지킬 수 있는 직접적인 명령이 되신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신 것이 그 때문이다. 모세를 통하여 그 말씀하는 것을 지키라 하신 것은 기껏해야 일정 형식과 예법과 기타 상징[장차 오실 그리스도께 대한]되는 것들을 통한 외면[내면 즉 심령을 통한 것이 아닌]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이 차이를 설명하여 "그 날 후로는 저들과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곧 내 법을 저들의 마음에 두고 저들의 생각에 기록할 것이라"[히 10:16] 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石碑)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心碑)에 한 것"[고후 3:3]이 되는 셈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즉 모세 당시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흉내만 내는 격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법칙을 지키게 되어 있는 단계에 마침내 이른 것이다.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들의 생각에 두고 저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할 것이라”[히 8:10] 하심과 같고, “오직 이면적(裏面的)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 것”[롬 2:29]이라 함이 그 뜻이다. 그래서 내용은 같은 것이지만 그 계명을 새롭다 하신 것은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밝히신 것처럼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 명시해 주신 데에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자기 부인의 본을 보이신 대로 우리도 자기 부인으로써 그 계명을 이제 비로소 지킬 수 있게 됨이니 비로소 '지키는 것'이 목적이 되어 그 방법을 말씀하시게 된 단계에 이름이다. 이제는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니 그 방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음으로서의 자기 부인이 그 방법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부인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내가 자기 부인을 함으로써 내 목숨을 아무리 버리고 또 버린다 해도 종국적으로는 결코 버려지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열매 즉 한 생명으로만 그치지 않고 더 많은 생명으로 번져 확대 재생산되는 것으로 정상적으로 발전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모세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죄인 즉 죽은 자 되어 있음으로써 산 자만이 지키게 되어 있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음을 자각하게 함, 다시 말해 하나님의 계명을 통해 우리가 산 자가 아닌 죽은 자가 되어 있음을 알고 오직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하셨음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오해하여 하나님의 계명 자체가 우리 인간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니 이런 황당함은 모두 인생들로 아무쪼록 구원 얻지 못하게 하려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오해를 해도 유분수지 이런 식으로까지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다. 이는 에데낙원에서 이미 그 본성을 드러낸 대로 엉뚱하게 거짓말을 지어내어 아담 부부로 하여금 자기 죽을 짓을 태연히 감행하도록 만든 것이다.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런 확실한 선례가 있는지라[이미 맛을 들인지라] 자신이 붙어 끝까지 이와 같이 속이는 짓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 자이다. 또 실제 그런 속임수가 효과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에까지도 결코 이런 시도를 버리지 못함을 성경은 처음부터 예언하고 있다[계 20:9]. 그리고 그 때도 많은 인생들이 그 꾐에 넘어가 자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을 미리 밝히고 있다.

그 때의 사람들이 하나님 순종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경우처럼 사정이 열악해서가 아니라 정의가 강처럼 넘치는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에도 역시 마찬가지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바로 이 증거를 위해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때나 지금이나 과거에나, 그리고 영물이나 인간이나,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자기 부인을 꺼려하는 데에서는 거의 일반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로써 우리에게는 더 큰 경계심이 촉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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