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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영사운이란? (13) 등록일 2016.02.16 21:32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08

바/영/사/회-"[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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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자유의 의미

자유 의지와 선택에 따른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이 이다지도 큰 것인가. 이런 욕심을 부질없는 것이고 악한 것이라 가르치는 세상 종교 역시 오히려 자기중심이 되어 '자기 스스로 욕심을 내지 않겠다'는 '색다른 욕심'에 도리어 사로잡혀 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 아닌가. 스스로 해탈, 열반을 통해 "자유를 얻겠다"는 가당찮은 욕심인 셈이다. 내가 나를 위해 자유를 얻겠다는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든 그것은 '칭찬받을 만한 장(壯)한 의지(意志)'가 아니라 곧바로 악으로 직결됨을 아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상대를 사랑하여 상대를 위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닌 그 무엇이든 악이고 죄이다. 순수하게 그런 마음이어야 하는 것이고 단 1%라도 그런 자기를 위하는 것이 개재되어 있을 때 그것은 무조건하고 악이 된다. 실상은 1%가 아니라 100%인 것이다. 빙산 일각처럼 보이는 것뿐이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부터 먼저 해 주시고 산 자부터 먼저 만들어 주시는 터라 하나님의 은혜라 하고 우리 구원을 선물이라 하고 믿기만 하면 된다 하는 것이다.

일단 산 자가 되고부터는 힘씀과 노력과 전심전력을 다함이 필수적이고 필연적이 됨이니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한 몸 체제에서 머리를 위하고 함께 지체된 내 이웃을 위함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손가락도 움직이지 말되 하나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해서는 죽을 힘을 다 기울여도[롬 9:3] 좋은 것이고 마땅하다는 이 차이를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로써 분명히 갈라져 있는 분수령을 동시에 인식해야 하는 것이니, 즉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그 어떤 것도 아무리 남을 위한 것이라 표방해도 절대로 남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를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와 같이 이웃을 위하는 것이 가능해짐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해방을 구가할 수 있음이다. 진정한 명실상부한 자유인이 됨이다.

그리스도의 복음[희소식]은 자유케 하는 진리를 앎으로써 즉 이미 이루어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자유를 그대로 믿고 받아들여 누리기만 하는 되는 것일 뿐이다. 내가 자유를 욕심 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불교처럼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내 것이 아니고 그러니 내가 없다는 식으로 거꾸로 무리하게 논리를 세워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를 창조해 주시니 만유를 내 것으로 삼은 소유주, 주인 곧 하나님의 상속자(相續者)가 됨이다.

또 "내 것"이라고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니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피조물 세계에서는 도대체 그 누구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내 것도 없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도 없다. 모든 것을 소유한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그래서 모든 것이 내 것이면서도 내 것은 없다.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불교식 용어라 했지만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말을 진실되게 사실을 토대로 하여 정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만유(萬有)가 내 것이라는 말도 진실되고 내 것이 아니라는 것도 사실 그대로인 것은 사랑과 생명의 법칙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에서 그리 되는 것이다. 내 것이라 함은 실제로 내가 누리고 있는 내 것임은 사실이고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것이 아니라 함은 내 스스로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내 것은 단 하나도 없다 함이다. 나를 위함이 없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무소유(無所有)다.

다시 말해 나는 오직 주는 것뿐이다. 왜냐면 남이 내게 끊임없이 주기 때문이다. 고로 내 스스로 가지려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내 스스로 가지려 하지 않아도 내 이웃이 내게 주되 내 이웃의 숫자만큼이나 주기만 하니 나는 그들이 주는 것만으로 해도 파묻힐 판이다. 따라서 나는 부지런히 흩어져 주는 것으로 일관한다. 이런 것이 자유이다. 어느 것에든 누구에게든 매이지 않는 자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자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아니하는 자유다.

바로 이러한 자유인의 삶을 각자가 평등하고 균등하게 살도록 하심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옛 창조에서나 새 창조에서나] 뜻인 것이다. 그러니 불교에서 희구하는 바가[비록 논리적이지는 못하고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인간 망상에 연유한 것이기는 해도] 바로 여기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그 본연의 의미대로 완전히 성취되는 것이 아닌가. 불교라고 특정해서 지적할 것도 없다. 이런 것은 모든 인간이 희구하고 염원하는 이상적 삶의 유일한 지혜이다.

그러므로 "내 것이 아니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내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부터가 첫 단추 잘못 끼운 것이다. 전제를 올바르게 놓지 못하니 이하 전개되는 모든 것과 최종 결론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없다. 처음부터 허공에다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허공인데 무엇이 손에 잡혀질 리가 만무하다. "그러면 그런 이상 세계가 이 세상에서 구현되느냐?" 하는 식의 질문은 하지 말 것이다. 그에 대한 설명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수없이 반복해 왔다.

§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우리의 본이 되어 계시므로 당신 자신을 위하심이 없다고 이미 누차 설명하여 강조해온 바다. 오직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되어 있는 것이 무릇 생명의 일관된 본질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나타난 진리의 논리성은 간단 명료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그렇게 귀결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생각컨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그리스도의 나 위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게 된]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고후 5:14,15]이라 함과 같다.

그리고 다시 강조하지만 또 하나의 강력한 논리는 그렇게 나 위해 죽으신 이께서 사람이시면서 하나님,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시라는 데에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첫째 하나님이시므로 원천적으로 전체 인류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누구든지 끝까지 순종하기로 하고 회개하는 이들은 다 구원하시는 까닭에 그렇게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그 하나다. 그러나 동시에 또한 사람이시다.

사람은 원래 개개인을 상대하도록 되어 있는 한정성을 지니므로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그렇게 자신을 주시어 나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갈 2:20] 분이라는 것이 그 둘째 의미다. 하나님이신 측면과 사람이신 측면을 혼동해서는 안되고 양면을 동시에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신["to give Himself for me"]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20]임을 성경이 명시한 것이 이 때문이다. 특별히 강조한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 즉 함께 죽음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20]이라는 결론을 얻기 위함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그런즉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 한 대로 그리스도 친히 나의 영원한 소유가 되어 주시어 오직 나를 위해서만 사시는 결과를 맺기 위함이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 되어 있고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그 안에 사는 것이 되어 있는 영원한 영광스러운 맞바꿈의 삶이 되어 있는 것이다. "둘이 하나되어" 있는 관계의 의미가 이러하다. 그러므로 이 양면성을 갖추어야 완전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 되는데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양면성에서 일면만 즉 첫째 의미만 염두에 두고 그 나머지 둘째 의미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다리가 하나 없는 절뚝발이가 되어 온전한 행동이 불가능하다. 천국은 모든 것이 완전한 아름답기만 한 하나님의 작품들만이 사는 세계이므로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영적인 것이든 불구자는 들어가지 못하는 데다. 만일 그런 불구가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께 불경스러운 것이 되니 왜냐면 그런 불구자를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므로 능력이 부족하셔서 그렇게 만드셨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용납이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에게 당신 자신의 전부를 영원하신 선물로 주신 증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 앞에서 스스로 감동 받지 못하고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고 영원히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겠다고 충성의 서약이 없는 심정은 실로 영원한 불치(不治, incurability)에 가깝다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기다려 주시지만 그러나 그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아무 희망이 없다.

이런 양심의 마비 상태를 눈물로써 그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고하고 슬퍼하며 탄원하는 중보자의 기도가 그리스도 앞에서의 제사장의 기도다. 치유 불가능으로 보이더라도 그래도 어느 한 구석 가망이 있으면 그 눈을 열어 달라는 기도가 중보자의 기도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이유다[롬 8:26]. 이 경우 성령은 그리스도를 가리키심이다. "성령께서 기도하신다" 하면 성령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하나님께 기도하느냐 할 사람도 있겠기에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든 쏠림이 없이 완전한 평형을 유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거니와 한 사람으로서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어 그 자신 전부를 나를 위해 바치셔서 영원히 선물로 주심으로써 이제 전적으로 나를 위하여 사시는 분이신데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고 여전히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라면 어찌 내가 무사하리요. 그리스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어 영원히 외톨로 남아 있을 것이 아닌가. 영원한 불 못은 인간이든 영물(靈物)이든 그런 영원한 외톨들만이 수용되는 곳이다.

왜냐면 '외톨이가 됨을 부정하는 것'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저절로 만물이 생긴 것이 아니라 창조의 결과요 산물(産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명의 체제 혹은 구조는 반드시 한 몸을 이루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한 몸을 이룬 상황에서는 철저한 자기 부인만이 용납되고 자기중심은 발 붙일 데가 없다. 그럼에도 자기중심을 고집할 때 그 결말은 생명에서의 이탈이다. 곧 죽음이다. 죽음은 영원한 외톨로서의 상태를 말함이다.

생명은 삶의 낙[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말함이므로 무릇 삶의 낙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죽음에 속한다. 고통이 죽음의 영역에 속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죽음의 특성을 표현하는 것이 "불 못"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이와 같이 대칭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사랑도 너와 나와의 둘이 하나 되어 있는 관계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이런 '너와 나와의 사랑'의 관계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아무 희망도 없다.

"그리스도와 우리"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의 그 다음 단계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이 '그리스도와 나'인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그저 막연히 '그리스도와 우리' 관계에서 구원을 잘못 인식하기 때문에 영생만을 욕심 내는 이기주의 그대로 남아 자기 부인의 의미를 영원히 모르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의 설명처럼 나와 너와의 맞바꿈의 삶이 사랑인데 여전히 내 것은 내 것이요 나의 삶은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 외의 그 어떤 의미도 모르니 생명[영생]에 영합될 리가 없어 영원한 외톨로만 남을 뿐이다.

§   이 세상에서 자기 부인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느냐 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거둔 결과로 나타남이니, 곧 모든 구원 받을 사람 다 구원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탄생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내 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고 하는 것이다[골 1:24]. 왜냐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주는 의미 곧 많은 생명의 구원으로 열매가 맺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땅 끝까지 나아가 복음을 전하여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니, 바로 이 목적 즉 그들의 구원을 위해 모든 사람들을 위한 제사장으로서의 쉬지 않는 기도와 말씀 전달을 의미하고 형제들을 사랑하여 그 영적 안녕과 형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질적인 유무(有無) 상통(相通)도 여기에 기인하는[한 몸을 이루어 있으니까] 것이다.

물질적인 유무 상통이 믿는 형제들끼리 실행한 것이고 전체 모든 사람들 상대한 것이 아님과 같이,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함은 한 머리로서 현재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믿는 형제들끼리의 사랑을 말함이다. 왜냐면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진정한 한 몸의 구조에서만 나와 같은 지체(肢體)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 몸의 체제 안에 들지 않은 아직 믿지 않는 외인(外人) 들에게는 오직 위하여 기도함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에 모든 노력을 기울임이다. 오직 이 일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전도 차원에서 필요한 선행을 행함이다.

이 세상에서 이런 일을 하고 여기에 전념하다보면 이 세상 삶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마련이다[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세상에서 살고자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지 않더라도]. 그러므로 세상에서 살고자 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이들은 우리의 구원이 '보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일을 온전히 이룸'[요 20:21,22/4:34]에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기 때문에라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는 분부를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행 1:8/마 28:19/막 16:15]. 왜냐면 자기의 구원 자체를 부정해 버리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삶에만 몰두하고 있는 세상 사람의 안목과 인식으로는, 그렇게 사람들을 구원해내기 위해 허위단심 노력하는 것이 생명이건만 정작 생명이 아니라 죽음으로 나타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마치 사형수가 자기 죽을 형틀 곧 십자가를 매고 가는 것과 같은 형국으로 나타나지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실상을 그대로 말씀하신 것이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할 것이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人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다"[눅 9:23-26]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 "너희는 나를 누구라?" 물으시고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는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직후 "인자(人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3일에 살아나야 할 것"[:22]이라 하시면서 함께 말씀하신 경고인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할"[요 12:25]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직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버림 받고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신"[눅 17:25] 그 분의 모습이시니, 노아가 당시 세상에서 그와 같이 버림 받은 것과 같이 우리가 그러한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자처하고 있는 한[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한 이상] 역시 그와 같이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 것"[:26]을 단단히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세상이 환영하고 우호적으로 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서 위장하고 가장한 소위 "기독교"일 뿐이다.

그런 종교는 세상에 속하였으니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하는"[요 15:19]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성경대로 믿고 구원 받아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20:21]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느라[4:34]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부득불 "세상을 악하다고 증언하는"[7:7]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므로 세상이 미워하는"[15:19] 것은 이치적으로 마땅한 것이니 이상할 것은 없다[벧전 4:12].

여기서 필자의 일을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느끼기는 하지만 그러나 피력할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기에 하는 말이지만, 처음부터 필자가 성경을 읽기 시작할 때에 이러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세상에서 핍박과 배척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줄 직감하고 있었기에 성경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 작정하기를 성경의 모든 말씀이 진리라고 확신되기만 하면 그 어떤 고초도 감내하리라 작정하고 그리고 그런 고난 받음은 가치 있는 일이라 마음을 다잡고 매번 성경을 대했던 것이 기억 난다.

지금도 역시 그런 각오와 자세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각오로 처음부터 임했기 때문에 여기서 소개하는 모든 내용을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이라고 믿음에도 역시 변함은 없다. 초대 교회에서 사람들이 죽을 각오를 하고 믿었고 오늘날 북한 땅에서 그런 죽을 각오를 하고 믿는 것과 같은 심경으로 지금 이 글도 작성하고 있는 것이다. 결단코 이 세상에서 이 모든 설명에 대한 '장미 빛' 반응을 기대하지 않으며 절대로 환영 받지 못할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오직 세례 요한처럼 "광야에 나가 외치는 소리"이기만을 바라는 한 가지 마음뿐이다.

다만 몇 사람이라도 진리에 이른다면 그것으로 보람은 충분한 것이라 믿는 것이다. '바/영/사/회' 운동을 하지만 과연 이에 동조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것도 계산에 넣지 않는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요 우리는 오직 우리의 할 일만 다하는 것뿐이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세상을 악하다고 증언하는 자이므로 즉 "불교도 천주교도 개신교도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있다"고 기탄없이 말하고 있으므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리라.

생각하건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으로서 믿는다면 그래서 사람이 일부러 되실 아무 이유도 없고 따라서 비참한 그 십자가 고통 중에 죽으실 까닭도 없으면서 죽으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던 잠에서라도 깨어 벌떡 일어날 만한 '놀라운' 사실인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자세다. 이렇지 못하면 실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믿지 않는 것이다. 천하없이 좋은 말을 하더라도 이를 믿어 주지 않으면 그림의 떡일 뿐이다. 아무 소용이 없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살라[거(居)하라]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서 사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서 살 것이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는 것이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할 것이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나, 너희를 친구라 하였으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다"[요 15:9-15].

이상 말씀을 하셨으니, 나를 최고도로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그런 사랑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나를 위해' 그렇게 사람이 되시고 죽어 주신 것이다. 이 사실을 "믿는" 다음에야 어찌 목석(木石)이 아닌 이상 반응이 없고 감동이 없으리요. 믿어지지 않으면 과연 그것이 진실인가 하고 '알려고'라도 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렇게 태무심(殆無心, 아주 무심하여 거의 마음을 쓰지 아니하는 것)일 수가 있다는 말인가.

지금까지 자못 장황할 정도로[사람에 따라서는] 번거롭게 긴 설명을 해오고 있지만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마 18:3] 있는 사람이라면 몇 마디만 해도 충분히 납득이 되는 일을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사랑"이 아닌가. "어린 아이들"에게는 "사랑"은 긴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말로보다 느낌으로 마음으로 벌써 직통으로 와 닿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을 들어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3] 경고하신 것이다.

"우셨다"["He wept."]

"결단코"[never], 이 말씀에 혼신의 주의를 기울임이 마땅하다. 사랑은 억지로 되지 않는다. 말로 아무리 설명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억지로 될 일이 아닌 다음에야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이 없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신"[눅 19:41] 까닭이 여기에 있다. 더 어찌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진실로, 부디 눈물 어린 눈으로 이 대목을 읽으시라. 사람이 되신 것은 고사하고 우리 위해 죽으시는 고사하고라도, "우셨다"["wept"]. 남자가 아닌 여자로서 오셨다면 몸부림치고 우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신 것이다. 아버지께서 우신 것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아무 가감없이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일말(一抹)의 거짓말, 속임수라도 있다는 것인가. 도대체 세상의 어느 종교 경전(經典)이 울었다는 기록을 남긴 일이 있던가. 이것이 진실로 만물의 창조주시라는 증거다. 역설 같지만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다.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애타는 어버이 심정 그대로이시기 때문이다. 어느 부모가 자기가 낳은 자식에 대해 애타하는 마음이 아니던가.

어린 아이가 실종되어 있을 때 침식도 거의 잊고 몇 년, 몇 십 년을 직장도 팽개치고 자식 찾기 위해서만 몸부림치는 광경들을 보라. 솔로몬이 지혜는 하나님 친히 주신[대하 1:12] 것이기에 이를 입증했었다. 창녀들로서 두 여인이 한 집에 사는데 둘이 함께 3일 간격으로 아이를 낳았는데 하나가 밤에 잘못 눕는 바람에 그 아들이 깔려 죽었다. 그러자 밤중에 일어나 다른 하나가 잠든 사이에 그 아들과 바꿔 치기를 했다. 그러나 진짜 어미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자기 아들이 아니므로 둘이 다투다가 솔로몬 왕 앞에까지 와서 호소를 한 것이다.

둘이 서로 여전히 다투므로 이 때 솔로몬 왕은 "칼을 내게로 가져 오라" 하고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 하였다. 그러자 그 산 아들의 어미가 되는 여인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왕이시여, 산 아들을 저 사람에게 주십시오. 아무쪼록 죽이지만 마십시오" 하나, 그 다른 여인은, "내 것도 네 것도 되지 말게 나누게 하라"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진짜와 가짜가 드러난 것이다[왕상 3:16-27].

이 경우와 같이 눈물은 진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이 당신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므로 확실한 구원을 인생들에게 베푸심에도 이에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것을 눈물 없이는 못보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렇다고 회개하지 않는데도 구원하실 수는 없다. 그리 되면 에덴낙원에서의 비극보다 더 큰 비극을 낳는 것이다. 이 "우신" 사실에 대해 우리가 더 논의할 것이 있다고 하겠으나 여기서는 한 가지만 지적할 수 있다. 그것은 다시,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다.

만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지어낸 거짓이요 속임수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막강한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의 아들로 설정해놓고는 그가 "울었다"고 이야기를 꾸며 만들어낼 수는 도저히 없다는 데에 있다.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자는 태어날 때 울고 부모 상(喪)을 당해 우는 등 울지 않는 것을 남자의 강함과 미덕으로 인식해온 것이다. 운다는 것은 속수무책임을 뜻한다. 속대로 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울 리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운다는 것은 약하고 능력의 한계를 드러냄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거짓말쟁이도 이런 경우 "울었다"고 이야기를 만들어놓을 재주는 없다. 그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 거짓말쟁이는 신(神)이지 인간은 아니다. 신이라면 약한 인간을 상대하는 일에서 그 신으로서의 능력으로 밀어붙이면 간단한 일을 가지고 연약하게 거짓말을 하는 등의 다랍고 잡되고 시시하고 쩨쩨하고 잣단 일을 하지 않는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 신(神)이지만 그는 인간들에게만 강자이지 인간 배후에 있는 거룩한 천사들의 막강한 힘을 상대할 경우에는 문제가 전연 다르다. 그래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도록 인생들을 속이기 위해 혈안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떠한 거짓말쟁이도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언행이 진실 그대로가 아니라면 그렇게 성경의 주인공을 잘게[굵직한 인물이 아닌] 그려놓을 이유가 없다. 그런 울보[blubber, crybaby]를 누가 하나님의 아들로 신뢰할 것이라고 그렇게 우는 것으로 꾸미겠는가. 진실이고 사실 그대로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거짓말이 아닌 진실일진대, 하나님[의 아들]으로서 그렇게 우셨을 때 역시 속수무책의 능력의 한계를 느껴 그렇게 우셨던가? 그러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개념과 모순되는 일이 아닌가.

위에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어버이 심정'이신 것이다. 동시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원리원칙의 엄정한 법질서 앞에서는 진실로 어찌 하실 수 없는 사랑의 무기력하심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하나님 속성의 양면성을 말함이다. 법질서 집행 차원에서의 "소멸하시는 불"[히 12:29]이시면서 사랑이시다. 사랑은 언제나 약한 것이다. 부모 사랑의 약함이 자식들을 뻗가게 만들 수 있으므로 예로부터 자식 사랑은 엄정한 회초리와 더불어 나타나야 한다고 되어 있다.

"사랑의 무기력"이라고 억지로 말을 만들어보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하면 모든 인간들을 다 자동적으로 살려놓으시고 구원하시고도 남을 그런 진실로 모든 것을 품에 품는 자비, 인애, 불쌍히 여기시는 자정(慈情)의 마음이시다. 그러나 그렇게는 할 수 없는 것은 그렇게 해보아야 범죄한 자는 역시 아담처럼 죽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용납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두 품성이 서로 다툰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조화 일치하시는 것이다.

그런 조화 속에서 사랑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눈물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신 것이다. 불쌍히 여기시되 그 이상 어찌 하실 수 없는 그런 인자하심이다. 어찌 하실 수 없다는 것은 엄정 엄격하신 원리원칙주의와 공평공정과 공명정대하심을 또한 그대로 드러내심이다. 무한하신 사랑[그 증거가 십자가 죽으심이니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우리 각 사람에게 쏟아 부어 주신 것이다]과 그 엄격하심이 조화되어 그 자연스러운 결과로 "우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신 것도 사실 그대로의 진실된 기록일진대 하나님은 철저히 원리원칙과 공명정대하심이 그 특징이신즉 그 말씀에 티끌만한 거짓말이나 속임수와 같은 인간의 다랍고 잡되고 시시하고 쩨쩨한 것이 개입되도록 용납하실 리가 없는 것이다. 믿지 않는 인생들이 절대 다수라 할지라도 이렇게 우신 데에서 드러나듯이 그들을 도저히 구원하실 수 없어 그런 심경을 드러내셨을진대 그런 사람들을 억지로 믿게 하려고 거짓말을 하고 속임수를 쓸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만으로도 천하를 뒤덮고도 남을 정도의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인 것이다.

§   주님께서 경고하신 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이 세상에서의 동물적인 삶에 지나지 않는 이생 살이에 몰두하는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 일에 코를 박고 전전긍긍하는 삶으로써, 이런 사람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 노릇도 못하고 제사장으로서의 충분한 기도 생활도 못하고 형제의 처지를 내 처지처럼 돌볼 마음의 여유도 없고 한마디로 '산 자'의 삶이 아니라 죽음의 생활이다.

이런 사람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지면 줄곧 "육신" 타령만 하게 되어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세상에서는 살았다는 이름이 있고 기세 좋게 즐겁게 신바람 나게 사는 것 같아 보여도 영원한 미래를 앞두고 하나님 면전에서 살필 때 죽음 바로 그것인데 이 사실에 눈뜨지 못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사람들은 전연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력이 없는 까닭에 "우리는 비록 죄인이라도 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대신 죽으심 덕분에 영생 얻는다"는 인간의 종교 교리에 심취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지배자[王, 임금-요 14:30]요 이 세상 신(神-고후 4:4)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복음 전하는 자들을 가만 버려둘 리가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복음 전하다가 죽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온갖 수모를 밥 먹듯이 하면서 수고하고 애쓰는 것이다[살후 3:8/딤전 4:10]. 바울의 고난 받음이 바로 이 때문임을 성경은 밝히지 않는가. 그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 그럴 열성이 없었다면 그렇게 고난 받았을 이유가 없다.

어떤 장애를 무릅써서라도 복음을 전하려 했기 때문에 갖가지 고난 고통을 당한 것이다. 또 그렇게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람들을 구원해내겠는가. 그리고 이렇게 고난을 받음으로 해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서 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죽으심으로 확정되어 있는 마당에 더 다시 우리가 달리 논급(論及)할 것도 없는 현실이 되어 있다. 식구가 있든 혼자 지내든[고전 7:8] 오직 목적은 주님의 일을 함에 있다.

각기 은사(恩賜-gift)를 받은 대로[:7] 자기 역할을 하되 오직 목적은 사람 건지는 어부[漁夫, fishers of men-마 4:19]의 일이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목자(牧者) 역할이다[요 21:17]. 베드로에게만 목자 임무를 주신 것이 아니니,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한 형제로서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므로 서로를 돌보아 주게 되어 있음이다[히 10:24]. 물론 그 안에는 대표 목자가 있어 성경은 이를 "감독" 또는 "장로"라고 부르고 있지만 원천적으로 각자는 한 몸 안에서의 지체 역할로써 몸 전체에 봉사함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각종 그런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각자는 한 몸 체제에서 역할이 서로 다른 지체들이기 때문이다. 교회 내에서의 이런 지체 역할 외에 기본적으로 하는 일이 기도와 말씀 전파 그리고 전도 차원에서의 선행이다. 교회 안에서의 목자 역할과 교회 밖에서의 "그리스도의 증인"[행 1:8]으로서의 전도 임무 그리고 하나님 앞 제사장으로서의 끊임없는 기도 등을 총칭하여 "선을 행함"[롬 2:7,10/요 5:29/계 20:12,13/딤전 4:16/고후 5:9-11/행 3:26]이라 하는 것이다.

일하는 자로서의 자세이지 이 세상에서 살고 삶의 낙을 취하는 것이 아니니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생활 자체가 완전히 구분된다. 한데 어울릴 수가 없다. 삶의 목표가 다르고 따라서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 방법이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알고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며"[벧전 4:7]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고자 하는데"[:2], "음란[debauchery/lewdness]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revelries/orgies]과 연락(宴樂, drinking parties/carousing)과 무법(無法)한 우상 숭배"에 여전히 빠져 있는 세상 사람들이 "저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젖어들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비방하는"[:3,4] 것은 당연하다.

내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요이 1:10] 사는 까닭에 당당하고 의젓하고 넘치는 평안과 기쁨으로 확신에 넘치게 그리고 넘치는 활력으로 일하는[우리에게 '사는 것'은 '일하는 것'이다] 것은 물론 말할 필요도 없으나, 그렇다고 자신 만만한 태도를 취하는 것과는 다르니 다시 말해 "두렵고 떠는"[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것이요, "조심하는"[고전 10:12] 것이요 "더욱 힘써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우리 스스로 굳게 하는"[벧후 1:10] 데에 있음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함"[빌 4:4]과 "두렵고 떠는"[2:12] 것을 잘 조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극과 극의 양면성 또는 동시성이라 할까. 주시므로 받으니 "항상 기쁘고", 그 받은 것을 내가 마땅히 주기를 더욱 힘쓰게 되니 혹 이 주는 일에 차질이 있지 않을까 하고 "두렵고 떪"이라 할까. 왜냐면 내가 "준다"는 것은 내 스스로 "주님의 죽으심에 동참하여 그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 하는"[3:10,11] 내 스스로 이뤄야 마땅한 과정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일하는 자세를 버리고 세상과 더불어 나 자신의 일을 도모하여 주님께서 내게 하라고 분부하시어 세상에 "보내심"[요 20:21]으로써 맡기신 일을 소홀히 함이 없을까 이를 두고 "두렵고 떠는" 것이다. 아담은 그 본분을 망각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그 말씀의 척도를 따라 주변 영물[천사]들을 다스리게 되어 있는 자기 본분을 망각하고 오히려 자기 자신이 그 말씀을 어기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양면성' 혹은 '동시성'이라는 것은, 항상 기뻐하는 것이 원동력이 되어 두렵고 떪으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룰 수 있게 되고, 두렵고 떪으로써 나 자신의 구원을 제대로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그 결과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게 되는 것을 가리켜 표현함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써 이것이 있는 것이다.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은 이 원래부터 존재하고 만유의 기본 질서로서 작동되고 있는 이 양면성, 동시성의 원리를 말함이다. 즉 삼위일체의 법칙이다.

불자(佛子)들은 이 뼈대를 제대로 갖추고 있으니 다시 말해 몸통은 있으나 머리는 진작부터 갖추지 못했으니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실존을 이제는 겸허하게 수용하고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믿으면 그 이상 더 좋을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다.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들의 그런 이치도 그들만의 "연기론"으로만 그치고 만유의 기본 질서의 골격을 형성하는 삼위일체의 원리에는 접근도 못할 뿐이다. 도대체 머리 없는 몸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실속 없이 그 윤곽만을 말하니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격일 뿐이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바울은 말했다. 우리가 몸 담은 이 자연계는 잠시다. 그러나 영계는 영원하다. 영혼이 있는 영적인 존재로서의 우리는 영계가 제 고장이다. 이 자연계는 한시적 생명의 동식물의 서식처일 뿐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이미 인간의 범죄로 인해 저주 받은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저주 받은 것은 그 무엇이든 계속 존재할 수 없고 사라지게 되어 있다.

구원 받을 자 다 구원 받은 다음에는 이 세상은 여지없이 폐기되어 없어진다. 저주 받은 것은 자취를 감추고 새 하늘과 새 땅이 곧 전개된다. 물론 그 전에 이 세상 신(神)의 최후 발악적인 잠시 동안의 일대 속임수 따라서 일대 소란, 소동이 오게 되어 있다. 대 환란의 시기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계는 일분 일초도 틀리지 않고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잠시 동안의 세상에 모든 관심을 둔다는 것은 자살행위가 되는 것뿐이다.

범죄하기 전 아담의 신령한 세계인 에덴낙원에 있을 때의 그 화려한 몸의 영광에 비하면 오늘날 이 자연계에 속한 인간의 육체가 얼마나 처참한 몰골인가. "심한 통곡과 눈물[strong crying and tears]로 간구와 소원을 드려야 마땅한 그런 인간 실상이다[히 5:7]. 이를 가리켜 성경은 우리의 대표이신[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육체[자연계에 속한 이런 죽음의 몸]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이 대목에서의 어조(語調)는 이런 자연계에 속한 비극적인 실상을 의미한다]에서 능히 구원하실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하셨다고 했다[:7].

제사장으로서의 기도이니 이 제사장 역할은 처음부터 함께 죄인된 모습으로서 하게 되어 있음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다"[사 53:12] 함과 같다. 의인으로서 그러한 죄인의 모습인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현재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신분이니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나약한 육신의 제사장으로서의 모습인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이런 제사장의 위치에서 어찌 살기를 바라고 삶의 낙을 추구하리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랴[요 12:25]. 하나님의 진노 아래 처한 세상의 모습이기를 바랐으니 그 결말은 응당 하나님의 진노밖에 있을 것이 없다. 인생들이여, 이 사실에 제발 눈뜰 일이다. 이 사실에 관해 하나님께로부터 배우지 않는 한[요 6:46] 그리스도께 나오기가 심히 어렵다. 나왔더라도 당시 많은 제자가 물러갔듯이 스스로 떠나게 되든가 아니면 심판 날에 사형 선고를 받을 것밖에 없다[마 7:21/2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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