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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영사운이란? (14) 등록일 2016.02.16 21:35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407

 

모든 것은 사랑이 열쇠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하나님께서 사랑이신 까닭은 조물주이시기 때문이다. 이 조물주로서의 사랑의 그림자가 인간의 어버이 사랑이다. 그리고 새끼에 대한 각종 포유류 등이 나타내는 본능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이야 오죽하시랴. 그 증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하나님의 아들[우리를 지으신 창조주]께서 이토록 고난 받으신 것은 이 사랑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신 것 그리고 아들을 통하여 함께 친히 그 고통을 맛보신 것 오직 이 사랑 때문이다.

사랑이 그러한 결단과 그런 모든 인내를 낳은 것이다. 아침에 눈 뜰 때마다 그래서 의식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맨 첫 시간, 이 사랑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이 사랑에 대한 감사 감격을 토로하며 말씀 드림이 좋다. 이것이 삶 자체, 삶의 기본 원동력, 기본 동작이 되는 까닭이다. 생명체가 있음은 조물주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뜻이요 조물주께서 만드셨다는 것은 그 생명체에 대한 사랑이 넘쳐 흐른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대하실 때 얼마나 사랑스러워 하셨겠는가. 그 사랑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시다. 그래서 우리더러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니신가. 그래서 사랑이 모든 것의 열쇠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리고 얼마든지 되풀이해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라는 것이다. 고로 사랑을 떠나서는 생명이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니, 사랑이 즉 생명이요 생명 곧 사랑이다.

사랑을 제외하고는 생명을 논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첫째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둘째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율법]이니 곧 우리가 행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으니 주 하나님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올바르고 사리에 합당한 것]를 행하며 인자[사랑을 행하는 것]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同行, to walk with]이 아니냐"[미 6:8] 하심과 같다.

조물주로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 이상으로 있을 일이 없다. 우리가 아무 것도 따로 해드릴 필요가 없이 모든 것이 풍성하시고 모든 것을 풍성히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만은 자유 의지가 그 핵심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만은 어찌하실 도리가 없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드려야 우리가 이웃 곧 내 주변의 같은 피조물된 이들을 사랑할 수 있고 그 뜻을 비로소 이루어 드리게 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은, 하나님 친히 우리와의 이 사랑의 교제를 위하여 우리를 만드시기도 하셨거니와[엄마와 아기와의 관계도 사랑의 교제이니 아기와의 교감(交感), 교류에서 엄마는 얼마나 흐뭇해하는가], 우리가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뜻대로 즉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는 가운데서 그 지시를 받음으로써 이웃 지체(肢體) 상호간의 유기적 관계가 원활히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다시 말해 하나님 친히 그 내 이웃을 사랑하시니까 나도 그 뜻을 따라 그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이치를 따름이다. 예를 들어 내 기호에 따라 혹은 개인 사정에 따라 어떤 이는 더 사랑하고 따라서 다른 이는 덜 사랑할 수 있게 마련인데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그 위치에서 나도 내 이웃을 대하게 되니 그런 개별적인 차별이나 구별이 없게 된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눈으로 내 이웃을 대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그 내 이웃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내가 내 이웃을 대하게 됨이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잘못된 행동에 대한 회개를 간절히 바라시는데 그래서 그가 돌아오기만을 바라시고 여전히 사랑으로 대하시는데 나도 그 뜻에 맞추어드려야 당연하지 내가 만일 원수를 갚아 버리면 그의 회개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소원은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다” 하시는 것이다. 바울이 교회를 핍박한다고 해서 당시 형제들이 바울에게 원수를 갚아 버렸다면 대사도 바울은 어떻게 탄생할 수 있겠는가. "원수 사랑"도 이 세상에서나 통용되는 것이다. 천국에서 무슨 원수가 있고 무슨 악이 있어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이길 필요가 있는가. 모두 이 세상 곧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바라시는[딤전 2:4/벧후 3:9] 이 세상의 일에 해당됨이니 곧 그들을 모쪼록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따름이다.

우리가 사람 구원에 나서는 기본 메시지가 무엇인가. 사랑의 조물주 우리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선물을 주셨는데 그 선물은 물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지만, 우리가 범죄로 인하여[이상 설명과 같이 모든 죄는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저버리고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을 망치는 결과가 되므로] 더 다시는 이 하나님의 생명의 세계에 발붙이지 못하고[사랑이 없는데 사랑하지를 않는데 어찌 사랑하게 되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 곧 생명 세계에 살 수 있는가] 폐기를 당하는 위기와 비운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선물을 주심으로써 해결하신다는 그런 내용이다.

그러면 그 선물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또 하나의 나 자신을 만들어 주심이니 곧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내 이름으로 하는 즉 오직 나만을 위해 모든 것을 하시는 그런 존재가 친히 되어 주심이다. 과거에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오늘날의 우리 현실에 따라 이치에 부합하게 원리원칙을 따라 하시고자 함이다. 원리원칙대로가 아니면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실 수 없는 까닭이다.

이런 일은 사람이 친히 되심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창조 행위이신데 이전에 없던 것을 있게 함인즉 이전에 없던 한 사람을 만드심이다. 그러면 첫 사람 아담처럼 그렇게 만드심인가? 아니다. 모든 사람을 상대하여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또 하나의 자기"가 되어 주어야 하므로 '한 사람'으로서의 아담처럼 만드실 수는 없다. 즉 한 사람이면서도 여러 사람 몫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니 모든 사람에게 그 "또 하나의 나 자신"이 되셔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친히 사람이 되시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그래서 아들 친히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사람이 되신 것이다. 이 "또 하나의 나 자신"이란 말은 성경에는 없는 표현이나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아담이 자기 몸에서 난 즉 하나님께서 자기 몸을 소재(素材)로 하여 만드신 여자가 바로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라" 하고 다른 영물들 이름 짓듯이 이름을 지을 수가 없었다. 왜냐면 바로 "또 하나의 자기"였기 째문이다.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이므로, 자기 이름은 아담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따로 이름 지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하나뿐이니 그 하나뿐인 것을 사람이라 하지, 달리 이름을 지어 부를 이유가 없음이다] 그래서 자기는 남자라 하고 그 ‘또 하나의 새로 생긴 자기’는 여자라 했을 따름이다. 즉 둘은 다 같이 아담의 이름으로 통한 것이다. 아담의 경우, 이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은 육체로 그리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나의 경우처럼 "한 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몸됨"이었다.

때문에 바울이 그 편지에서 설명한 대로[고전 7:1-40], 남자[남편]의 몸은 여자[아내]의 것으로서 여자가 좌우하고 남자 자신이 자기 마음대로 못하니 즉 자기가 원한다고 하여 자기 아내 외의 다른 여자와 그 몸을 결합시키는 행위를 할 수 없다. 여자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 해서 둘은 한 몸이다. 마찬가지로 한 영으로서의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내가 나의 삶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주님께서 주장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주장하신다고 나를 주님 마음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나 자신을 주님께 드림으로써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이루게 되어 있는 그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육체 관계도 다 각기 자기 자유 의지가 있고 좌우간의 일을 자유로 선택할 수 있으므로 그런 한 몸이 되어 있어도 남자 또는 여자가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유로이 이렇게든 저렇게든 할 수 있음이다. 그래서 자기 욕심대로 행하면 남자든 여자든 간음죄가 되는 것과 같이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을 때 그것이 모든 범죄의 뿌리다.

또 주님은 영원히 내게 본을 보이시는 위치에 계시므로 주님 마음대로 사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하여서만 하시고 내가 원하는 내게 필요한 그 모든 것만을 이루시는 삶이시다. 내게 대하신 이러한 주님의 자세는 나를 위한 십자가 죽으심 즉 나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바치심으로써 이미 확증하신 바다. 이렇게 한번 굳혀진 일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어 영원히 주님은 그렇게 나를 위하시는 존재로 나와 하나가 되어 계심이다.

나를 위해 사신다고 내가 마땅히 할 몫까지 대신하는 의미는 아니니 이를 혼동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즉 내가 할 나의 몫이란 것은 내가 주님을 위해 사는 즉 주님을 믿고 복종하는 그것이다. 이는 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로서 이것까지 대신하실 수는 없으니 만일 그렇게 되면 나와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이 실질상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나의 몫을 충실히 하는 바탕 위에서 내게 먼저 본을 보여 주셨던[십자가 죽으심으로써] 주님 역시 다시 나를 위해 움직이시는 과정을 취하심이다. 그래서 동시성이고 양면성이다.

원래부터 조물주께서는 그 피조물을 위하시고 자기 자신을 위하시지 않는 것이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인데 이로써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당하심으로써 재차 확증해 주신 것이다. 고로 나는 영원히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요[고후 5:15], 내게 사는 것이 주님 예수 그리스도요[빌 1:21],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이다[갈 2:20]. 이것은 강압적으로 나를 그렇게 만드심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 스스로 결정해서 나의 의지로 자진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이루는 사랑 안에서의 일이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을 때 그래서 오직 나를 세상에 보내신[요 20:21]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어 나갈[4:34] 때 그렇게 되는 것이다. 내가 좋아서 자진해서 하는 것이니 이것이 '자유'의 의미이다. 내가 나 스스로를 위해 나 자신의 자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니[이런 말이 성립이 될지는 몰라도]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내 욕심일 뿐으로 자기중심이다. 그것이 외면적으로는 아무리 긍정적인 의미라 하더라도 무조건 내가 나 자신을 위할 때는 자기중심이므로 악[나쁜 것]이지 절대로 선[좋은 것]일 수가 없다. 올바른 것[義, 의]일 수가 없다.

여자가 남자의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이 된 것은 육체적 측면에서였다. 영혼은 그렇지 못했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지 못하여 여자는 남자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선악과를 자기 멋대로 따 먹고는 도리어 남자에게 먹으라고 주기까지 했다. 연륜으로나 경험으로나 무엇으로 보나 남자에게 물어보고 의논하고 합동으로 움직였어야 할 일이다. 하나님 친히 만드시지 않고 아담 자신이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소재로 하여 여자를 만들었다면 여자 남자 관계가 아니라 부모 자식 관계로서 상하가 엄연하다.

그것도 자기네에게 유익한 일을 그렇게 남자에게 권하고 부추긴 것이면 또 무엇한데 죽음에 이를 것을 여자가 권한 것이다보니 그래서 이 둘 사이는 아주 불편한 관계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말하자면 아담으로서는 여자에게 대한 실망이 큰 것이다. 그러나 자기 역시 스스로 결정한 것이지 여자가 강제한 것은 아니니까 같은 수준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자로서는 그런 중대한 일을 남자와의 상의 없이 스스로 결정하고 더군다나 남자가 자기를 따라오도록 했다는 그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말하자면 무릇 모든 대칭 관계가 그렇듯이 남녀 대칭 관계 역시 주종, 대소, 인과(因果) 관계인데 이런 순서대로 하지 않음으로써 하극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담 아래 있던 영물로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담에게 저지른 짓도 하극상이요 여자가 남자에게 보인 태도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다스리게 되는데 이와 같이 여자가 남자를 넘보려 하기 때문에 “너는 여자를 다스리라” 하신 결과이니 결과론적으로 보면 양편에게 모두 저주다.

모두 범죄로 말미암아 야기된 저주다. 즉 남자가 먼저 창조된[혹은 남자에게서 여자가 난] 그 위계 질서를 여자가 무너뜨리려 하므로 남자는 여자를 그렇게 못하도록 강제로 여자를 제압하는 의미가 이 저주의 요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저주는 범죄의 결말인 것이다. 범죄의 대가가 죽음임과 동시에 이런 저주를 필연적으로 낳은 것이다. 선악과를 먹으려 해도 순리대로 하면 여자가 남자와 먼저 의논하고 그 결과에 의해서 합동으로 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다 더군다나 죽는다는 경고이신데도 불구하고 여자 단독으로 결행하고 도리어 남자가 여자인 자기를 따르도록 권유했으니 이는 남자를 넘보려 하고 위계 질서를 무너뜨리는 결과로 나타나진 결말인 것이다.

남자 역시 아무 주견도 없이 무턱대고 따랐고 하나님께 반드시 여쭈어 일을 처리할 생각을 않았으니 여자나 남자나 죄질은 같다. 어쨌든 피차간 불편한 사이가 된 것만은 사실이다. 범죄 곧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 즉 "욕심 내는 것"[약 1:15]은 모든 면으로 부정적인 결과밖에 내는 것이 없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를 위해 창조된 애초의 하나님의 의도 즉 상호간의 동반자적 관계가, 여자의 범죄로 인해[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권유를 따른] 그리고 여자의 권유에 따른 남자의 범죄로 인해 아주 빗나가 버린 것이다. 범죄로 인하여 모든 것이 뒤틀려진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 관계는 더 이상 그런 파탄이 나 버린 관계가 아니고 그런 육체 면으로서의 하나 관계는 종결되어 버린 것이고 새 차원에서의 하나 됨이니, "한 영"으로서의 하나 관계 즉 철저한 삶의 원리로서의 자기 부인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하나 관계로 새로이 형성됨이다. 이제 그리스도와 나는 합하여 한 영이다[고전 6:17].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영원하신 선물로서 영원히 나와 함께 계셔서 사랑 가운데에서 하나가 되어 계시므로, 주님 안에 계신[그리스도께서는 지금은 영원히 사람이시므로 나처럼 육체를 지니시므로] '주님의 영도 성령' 곧 하나님의 영이시고 '내 안에 계신 주님의 영도 성령'이시니 그래서 "한 영"이라 함이다.

유대인들은 성경에서도 드러나듯이 사람 수를 세어도 남자 머리 수만 세지 함께 한 여자는 포함시키지 않는다. 이는 이런 저주의 까닭이 아니라 반드시 남자와 여자는 한 몸되는 것을 전제하고 그리고 남자는 그런 한 몸 관계에서 대표성을 지닌다는 의미다. 이는 합리적인 산법(算法)이라 할 수도 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위의 설명과 같이 남녀 한 몸되는 관계가 애초 여자가 창조할 때처럼 더 이상 이상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파탄의 연속이었다는 불행한 사실을 지적함이다. 

남녀 관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는 '범죄'의 총체적인 결말인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 오신 후로 시작되는 "마지막 때"에 이르러서는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되는 이도 있으니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마 19:12]는 선언에 이르시게 된다. 바울도 이 취지를 따라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전 7:26] 한 것이다. 따라서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여'[:29], "아내에게 매였으면 놓이기를 바라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으면 아내를 원하지 말라"[:27] 한 것이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다시 말해 교회에서 바울 사도에게 어떤 질의를 했기에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역시 같은 의미로, "여자가 남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가 되겠다] 했는지는 모르나[고전 7:1], 그 대목에 이어 나오는 내용으로 판단하건대, 남녀 결혼 자체를 이제는 그리스도 오시기 전과 같이 반드시 인류 증식을 위한 필요 조건으로 인정하지 않는 그런 뜻처럼 들린다. 인류 증식 자체가 이제는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그런 뜻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 자체가 세상 끝까지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되어 있다면 그리스도 친히 천국을 위해 고자되는 자도 있으니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 하실 리도 없고 바울 사도가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다고 교회에 심각하게 권유할 리가 없다. 하나님의 처음 말씀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이 말씀은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 친히[아버지께서는 아들로 말미암아] 당시에 하신 말씀이셨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이 세상 마지막"에 와서는 첫 사람 아담의 시대가 아니라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시대다. "세상 마지막"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오신 후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원래 '이 세상'이라는 것은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에덴낙원이 인간의 세상이요 나라가 되어 있었을 것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오심은 그러한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이후의 세상'의 종결을 의미한다고 할 때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이천 년이나 넘게 지금까지 세월이 흘러 왔고 그 후로 계속 인간은 생산되고 더욱이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되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 아닌가 한다면, 세상 마지막 때라는 의미가 이상 설명과 같이 그리스도 오시기 전과 이후의 의미로 가를 따름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세상 종말과는 다른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지자(先知者, 예언자) 다니엘도 이 때를 가리켜 "마지막 때"[단 12:4]라 한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의 "마지막 때"라 할까.

마지막 때라도 초기, 중기, 말기가 있는 법이다. 지금은 그 말기 즉 종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 시대적으로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 할 때, 그 때로부터 많은 사람이 천국으로 침입해[눅 16:16/마 11:12] 들어가지 않았는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첫 사람 아담의 시대로서의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 임하신 것이고, 지금은 그리스도의 시대로서 이 역시 양분(兩分)되는 바 그리스도께서 항상 말씀하셨던 "이 세대[this generation]"와 '다음 세대'이다.

다시 말해 "이 세대"의 마지막 때가 지금인 것이다. 장차 오는 '다음 세대'가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이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구분을 무시한다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나라[요 18:36]로서의 기간과 그리스도의 나라로서의 두 기간으로 양분되는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나라의 마지막 때가 지금으로서 다니엘이 예언하여 지목한 바로 이 때다. 왜냐면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床)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한다"[눅 22:30] 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천국 자체를 가리키심이 아니니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린다" 하셨으므로 천국에서는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누구에게 다스림을 받는 위치가 아니고 불 못에 수용될 사람들이 그 대상이 되지 않는 것도 물론이다. 거기에 "이스라엘 지파"가 있을 아무 의미가 없다. 물론 이런 시대적 구분을 수용하든 않든 각자 자유다. 이런 것이 우리 구원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참고 정도로 생각해볼 것뿐이다.

단지 말의 요점은, 남녀 관계가 앞서 설명한 대로의 그러한 파탄[범죄로 말미암은 저주의 결과로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는 등]으로 인하여 애초 창조 당시처럼 축복된 관계가 아니므로 더 이상 중요시되지 않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창조와 더불어 각자가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한 영"으로서의 새로운 짝의 개념이 형성되었다 함이다. 중요시되지는 않으나 일단 남녀 짝을 형성한 이들은 반드시 그 한 몸됨의 법칙[고전 7:4]을 지켜야 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아내/남편이 남편/아내를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해 줄 것인가 하는 것을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 하는" 것으로 대체하는 일대 변혁을 고린도 교회에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 남편 관계보다 인간 관계에서 더 우선적인 것이 없는데 이보다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관계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시대의 특징이다. 첫 사람 아담의 시대와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다.

물론 그렇다고 남녀 관계가 폐기되는 것도 아니다. 천국에서는 완전히 없어진다. 또 천국을 위해 고자가 되는 것도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것은 아니고 오직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고 하셨을 뿐이다. 그러나 누구든 받을 수 있는 자는 받는 것이 바울 사도의 권유에서도 보듯이 "더 복이 있으니" 여러 면에서 훨씬 나은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믿음의 잣대로 보아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이니,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恩賜, gift)가 있어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기"[고전 7:7] 때문이다.

가정을 두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자기의 가정 일에 충실하면서 하나님께 얼마든지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일이다. 미혼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또 그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면 그보다 이상적인 것은 없다. 독신으로 있다가 결혼을 해도 이는 바울이 명백히 한 대로 "죄 짓는 것은 아니니"[고전 7:36]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26]는 바울의 권고를 심각하게 생각해볼 것은 지금 이 때가 그 어느 때보다 바로 그러한 때이기에 그렇다.

지연계에 속한 모든 생물들 가운데에서 사람[아담]이 최종적으로 그 정점[climax]으로서 창조되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지으심 받음으로써 만물을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자연계 생물이 우두머리만 아니라 자연계와 대칭[대립, 상칭]되는 영계도 아울러 다스려야 하므로 먼저 영혼이 조성된다. 그리고 영계로서의 에덴낙원이 창설되고 그런 다음에야 "사람[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 하셨다. 그러면 그 때 여자를 만드셨느냐 하면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므로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로 계시는 모양새를 따라 아담도 그와 같이 둘이 단짝으로 지내게 될 그런 존재를 하나 만들어 주시고자 함이었으니 그래서 영물[천사]들을 지으시고 그 중에서 아담 마음에 드는 자를 짝으로 맺어 주시려 한 것이다. 짝이라는 개념은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둘이 하나되어 사는 관계를 말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영물들 중에는 아무도 아담의 마음에 차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부득불 여자를 창조하시게 된 것이다. 영물들은 자연계의 각종 동물들과 짝이다. 자연계의 동물들과 육체 면에서 사람은 머리와 몸의 관계다. 머리와 몸 관계는 머리는 하나이고 몸은 각 지체로 구성되어 있듯이 홑수[단수]와 겹수[복수]와의 관계다. 머리는 하나이고 몸의 각 지체는 여럿이다. 하나님은 하나이시고 피조물은 다중(多重)이다. 영물들과의 관계에서도 사람은 영혼의 측면에서 머리로서의 위치다. 엄연히 머리[하나]와 몸[여럿]과의 관계다.

이러한 몸과 머리 관계이기는 하나 그 중에서 '둘이 하나될' 수 있을 만한 관게를 형성할 영물을 찾았으나 아담이 마음에 드는 자가 없으므로 부득불 여자를 창조하신 것이다. 아담은 영물들의 수장(首長)이기도 하므로 처음에는 자연계의 생물이 암수 양성으로 되어 있는 신체적 구조를 따르지 않기로 하셨으나 아담의 마음에 드는 자가 없어 그 생김새대로 별명과 같은 이름을 다 지어버림으로써 양에 차지 않음을 드러낸 마당에 그래서 부득불 여자를 창조하시되 똑같은 모양새 즉 닮은꼴을 만드시기 위해서는 자연계 동물들을 암컷과 수컷으로 나누어 만드신 것과 같은 방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닮은꼴이 나오기 때문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신 대로 인간 생식을 위해서는 처음부터 아담의 육체가 자연계에 속한 것이었고 그러다가 영혼이 조성되고 영계에 들어옴으로 인해 신령한 몸이 되었은즉 영적 몸의 막강한 능력으로 얼마든지 아담[이 때 아담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야말로 완전한 육체였다] 혼자서 주변 영물들의 도움으로 영적인 방법에 의해 자식 생산이 가능했던 터였다. 첫째 이유로 아담이 처음부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자식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이요, 둘째로는 신령한 몸이므로 막강한 능력으로 그 일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 홀로 많은 영물들을 상대로 '머리' 역할을 하는 것이었으나 둘이 하나됨을 위해 즉 대칭 관계를 위하여 아담 자신의 단짝이 필요했던 것이다. 머리와 몸도 물론 대칭[상칭] 관계이기는 하다. 그러나 범위를 좁혀 '둘로서의 하나' 관계를 이루어 주시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범죄로 인해 그 둘의 정상적인 관계가 파탄이 나고 여자는 남자를 넘보려 하고 남자는 여자를 다스려야만 되는 비극의 운명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런즉 이 역시 저주의 결과이니 한번 저주 받은 것은 영원한 저주라 영구적으로 존속할 의미를 이미 잃은 것이다. 그래서도 남녀 관계는 천국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함이다.

이런 범죄와 저주의 결과가 현재의 남녀 관계이므로 남자가 출생해도 7일을 부정(不淨)한 것이었다. 여자는 그 배(倍)였다. 이는 그리고 출산(出産)을 위한 몸에서 나오는 분비물까지 모세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는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다"[딤전 2:14]는 그 허물이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렇게 되도록 정하셨으면 절대로 이 자체를 부정하다고 하실 리가 없는 것이다.

에덴낙원에서 여자가 이제는 자녀를 낳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아담은 이제는 남자가 되어 있으므로]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방식이 아닌 영적인 몸의 방법을 따르므로 그럴 경우 하나님께서 절대로 이런 출산 작용을 부정하다 하시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말의 요점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모양새를 따르는 것이 나와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이므로 그 어떤 인간 관계보다 기본이고 중심이라는 것이요, 반면에 자연계에 속한 남녀 관계는 이제는 모든 인생들이 생겨날 대로 다 생겨났고 더 이상 출산될 이유가 없으므로 천국에서는 영원히 폐기된다 함이다.

]§   그리스도와 내가 영원히 하나가 되어 있어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니, 하나라 하는 것은 주님의 영이 마치 내 자신인 것처럼 그렇게 위치해 계시기 때문이다. 아담의 경우 육체로서 한 몸 즉 하나인 반면 그래서 남자는 또 하나의 자기 자신으로서의 여자와 한 몸이 되어 있었던 것에 반하여, 나는 육체이므로 역시 또 하나의 나 자신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육체 곧 사람이셔야 하는 측면도 물론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히 2:14].

하나님은 영이시고 나는 육체인데 영과 육체가 하나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육체로 하나 됨과 동시에 영으로 하나 됨과 같으니 왜냐면 그리스도 친히 육체로 계시는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근본은 하나님이시므로 그 영으로 내 안에 오셔서 영원히 나와 함께 사셔도 이는 곧 그 육체로 나와 함께 계시는 의미와 똑같기 때문이니, 이는 동시에 하나님 동시에 사람으로 계심이다. 그러나 남녀가 육체로 '한 몸"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니 그래서 "한 영"이라 하는 것이다.

나의 이와 같은 새 피조물로서의 구조는 천국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영원히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되었으므로 이 사실은 영구적이기 때문이다. 고로 육체만의 사람으로서는 그 누구도 육체로서의 다른 사람과 육체로 한 몸되는 관계 외에는 하나 될 수 없지만 오직 한 사람 그리스도와는 그 영으로 나의 영과 함께 계시는 까닭에 하나 됨이 가능하고 또한 그 숫자가 얼마가 되든지 간에 모든 사람과 하나를 이루시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육체로 계시지 않더라고 육체로 계시는 것과 똑같게 함께 계시는 의미가 되는 유일무이의 사람이시다. 그리고 믿는 모든 이들과도 그러하니 그래서 한 몸의 체제요 거대한 일가족의 형성이다. 왜냐면 아버지 친히 아들 안에 계시어 우리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를 이루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즉 아담의 범죄 이후 육체로서의 하나 됨은 자녀 생산을 위한 필요 조처일 뿐으로서 천국에서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으므로 남자와 여자로서의 성 구별도 없음은 이미 지적한 바다.

그래서 당시 인간[아담]은 그 주변의 천사들 앞에서 자연계의 동물들처럼 암수 구별을 하고 있는 육체적 구조임을 부끄러워하여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앞을 가린 것이다. 이는 인간이 원래부터 천사 곧 영물들과 상관하며 살았던 영계의 존재이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다. 천사들이 없었다면 에덴낙원에서 아담 부부는 그렇게 앞을 가리는 일부터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장 먼저 한 일이 그 일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설명을 따르면 여자의 긴 머리도 권세 아래 있다는 표징으로 하는 것이라 했으니 이는 비록 여자가 아담의 분신(分身)으로 창조되었으나 그 전에 먼저 창조된 영물들 곧 천사들이 있으므로 바로 그런 창조상의 서열을 의미하는 것이다[고전 11:10]. 마지막 아담께서는 영물들보다 먼저 계시니 왜냐면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천사들보다 나중 난 존재들로서 천사 아래 있기는 에덴낙원에서의 여자돠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은 여자이므로 창조 서열상으로는 천사 아래 있었지만 아담의 분신으로서 위계상으로는 영물들 위에 있었던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즉 그 신부(新婦)로서의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의 양자들인 것이다. 하나님 친히 만드셨다는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아들들"인 그들 영물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니,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즉 거룩한 천사들은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내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보다 먼저 창조하심을 입은 그들이므로 천사들을 결코 가볍게 대하지 못함도 사실이다. 이와 같이 평형을 이루었던 것이 당시 에덴낙원에서의 여자와 영물들의 관계였다.

§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되심도 엄연히 하나의 창조인 것이다. 왜냐면 ‘사람’이라 하면 아담과 아담 이하 그 허리에서 나온 모든 인간을 의미하는데 별도의 '한 사람'께서 영원히 존재하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으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렘 31:22) 하신 그대로다. "여자가 남자를 안았다" 할 때의 그 "안았다"는 뜻은 여자 자신에게서 남자가 나셨다는 의미이다.

원래 인간은 아담에게서 나는 것이다. 즉 남자에게서 나는 것이고 여자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여자도 남자에게서 났고 남자가 먼저 있었고 그래서 근본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오늘날 이 세상 신(神)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리스도를 아주 말살해 버리기 위해 여자를 남자의 수준에다 끌어다 올려놓고 평등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퍼뜨리고[이 세상은 철저히 그의 지배 아래 있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있지만, 양면성의 대칭[상칭] 관계에서 평등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반드시 대소(大小) , 주종(主從), 인과(因果) 관계이니 왜냐면 대칭 관계에서 반드시 먼저 나고 나중 난 차이 또는 먼저 난 것에서 나중 나는 것이 파생(派生)하는 의미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본형이 먼저 있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그 대칭형이 생기는 법이다. '여권(女權) 신장'(伸張)에서 접근해도 좋을 일을 왜 무리하게 '평등' 차원에서 시작하는 무리 수를 두는가. 이는 성경과 그리스도를 말살하려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음모 차원에서만 해석이 가능한 일이다.

성경대로 하면 “여자가 낳았다”는 식의 표현을 쓰지 않고 그 아버지에게서 그 아들이 나온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마 1:5) 하는 식으로 여자가 그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로 말미암아 아들을 낳았다는 표현을 쓴다. 어머니가 딸 자식을 안으면 "여자가 여자를 안았다", 아들 자식을 안으면 “여자가 남자를 안았다”는 의미로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이, "여자가 남자를 안았다"고 하였을 때는 “남자로서의 아들을 안았다”, “여자가 한 아들을 안았다”고 해석하는 법이 아니고 "남자 없이 여자 단독으로 인간[아들]을 낳았다"는 그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아들"이라 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자세한 내막[동정녀 탄생 등]을 모른 채 하는 소리이고[요 6:42] 성경은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님이 나셨다"[마 15:16]고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성경을 응하기 위함인데 다시 말해 요셉에게 양자(養子)가 되심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됨을 상징한다. 아버지의 친생자(親生子)로서는 오직 그리스도뿐이시므로 그러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족보를 복음서는 두 갈래로 나타내고 있으니 하나는 친생자로서의 요셉의 세보(世譜)이고 다른 하나는 양자로서의 것이다. "낳고, 낳고"[마 1:16] 한 것이 친생자 계통이고 "그 위는, 그 위는"[눅 3:23] 하고 나가는 것이 양자 계보다. 여자에게서 난 아들 즉 여자가 낳은 남자 또는 여자가 낳은 사람으로서는 지금까지 세상에 없었고 그리스도께서 처음이자 나중이요 그래서 유일하신 것이다.

아담을 두고 말하면, 남자[아담]에게서 여자가 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담에게서 여자가 나서 아담이 그 때 비로소 남자가 된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경우 여자에게서 남자가 난 것이다. 왜냐면 인간 여자의 태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친히 세상에 오심으로써 "태어나셨기" 때문이다. 아담에게서 여자가 났으니 여자가 아담에게는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이 되어 있음은 사실이나, 신체 구조상 여자가 남자는 아니며 남자 또한 여자가 아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믿는 각 사람에게 자기 영이 거하시므로 사람의 육체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신다는 구조에서는 동일하지만[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사람으로서 그 육체가 있으시니까 그래서 영원히 사람이 되어 계시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의 영 + 육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 + 나의 영 + 육체, 이렇게 되므로 양자(兩者)는 동일하지 않고 각기 다른 측면도 있으니, 이는 아담의 영과 여자[하와]의 영이 각각이라는 사실과도 통한다.

또 그리스도의 경우 육체의 측면으로도 우리는 남녀의 구별이 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고난 받으시기까지는 당연히 남자이셨으나 이제 성령으로 우리와 하나가 되시는 때에는 같은 육체로 계시는 사람이시기 때문에 하나되는 것인데, 신령한 몸이 되시고도 여전히 남자의 육체로 계시면 내가 남자일 경우 또는 여자일 경우와 차별이 생기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현재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온전한 사람이었던 첫 사람 아담[여자가 생기기 전]처럼 온전하신 사람[남녀 구별이 없는]으로 계심이라 함이 옳다.

따라서 우리 역시 부활 후에는 이런 구별이 없어진다. 여자의 머리가 남자라는 차별이 없어지니 머리는 오직 한 분이시고 우리는 남녀를 불문하고 한 몸을 이루어 평등하고 공평하다. 그리고 "여자가 남자를 안았다" 하신 표현은 그 남자가 단순히 아들 곧 그리스도께서 한 남자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가리킨다기보다 첫 사람에 대비되는 마지막 아담이심을 가리키심이다. 다시 말해 인간 여자가 "마지막 아담"을 안았다[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사람이시니까 생로병사에 적응되시니 어린 아기 시절을 거치실 터이므로]는 의미인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여자가 생기기 전의 처음에는 남자도 여자가 아닌 '온전한' 몸이었으나 그 후 여자가 창조되었으므로 "남자"로서 정착되어, "여자의 머리는 남자"[고전 11:3]라든가, "남자에게서 여자가 났다"[:8]는 표현 등이 모두 가능해지는. 시종일관 남자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가 창조된 이후 사람으로서 성별이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만 한하고 천국에서는 우리 역시 그런 성별이 없어질 수밖에 없으니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러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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