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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영사운이란? (16) 등록일 2016.02.16 21:52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505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게 해 주심은 나 스스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찾을 수 있도록 하심에[빌 3:8,9] 목적이 있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심은 그 스스로 그리스도를 더욱 알도록 하심에 있고, 새 사람으로서 새 생명 가운데 있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부활] 은혜를 맛보게 해 주심은 그 스스로 그리스도의 죽으심 즉 고난에 동참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도록 하려 하심이다.

그 스스로 하려 하지 않으면 그렇게 하도록 은혜를 베푸시어 구원하심이 의미가 없게 된다. 왜냐면 그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여 그 뜻대로 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필연적으로 시험하는 자[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가 와서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가도록 충동하여 유도할 것이므로 어차피 빗나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즉 능동적으로 나가지 않으면 피동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 피동적인 것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악용하는 까닭이다.

물론 악으로 능동적으로 나가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작용할 필요도 없이 그 스스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한 통속이 되어 있으므로 함께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는 것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니 범죄를 해도 자기 스스로 자주적으로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행해도 자기 스스로 자기 자유 선택에 의해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면 그 뜻을 행하게 되고 시험하는 자가 시험하는 대로 그 쪽을 따라 가면 그것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라 하지 않아도 자기가 사랑하기 때문에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면 그 뜻을 행하게 되어 있으니 곧 복종이다.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그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죽어도 하지 않게 되어 있다. 이를 가리켜 구원의 능동성이라 한다. 이미 피동적인 측면에서의 구원은 되어 있음이니, 창조된 피조물이 능동적으로 자기가 창조되고 싶어서 창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피동적인 창조의 측면을 가리켜 은혜라 하고 값없이 주시는 구원이라 하고 따라서 믿기만 하면 되는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

고로 능동적인 측면이 반드시 따르므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 구원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니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이미 구원을 받아 새롭게 창조되었으나, 나를 창조하신 뜻을 행해야 나를 새로 창조하신[즉 구원하신] 의미 그리고 보람이 나타나는 것이다. 창조하신 목적이 있어 그 목적을 가리켜 성경은 명백히 설명하여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해 사는”[고후 5:15/롬 14:7/갈 2:20/빌 1:21] 것이라 하였다.

왜냐면 바로 그렇게 하는 것 즉 자기 부인이 하나님께서 이 모든 피조물 또는 인간을 만드신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목적이라 함은 그 만드신 피조물 하나하나가 모두 한 몸 체제 안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을 말함이니, 이 목적을 어길 때 에덴낙원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을 죽음에 빠뜨려 자기도 저주 받고 인간들 역시 죽음의 고통을 받고 이 때문에 모든 피조물이 한꺼번에 고통 중에[롬 8:22] 빠지는 결과를 빚게 된 것이다.

왜냐면 연대 관계로 한 몸으로 서로 통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고통을 야기시키는 자는 걸러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피조물들을 만드신 것이 애당초 잘못된 것이라고 하나님을 감히 힐난할 것인가. 지음을 받은 자가 지으신 이보다 지능면으로나 이성적으로 월등할 리가 없다. 우리가 그렇게 판단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은 [만일 그 일이 옳지 못하고 마땅하지 않아 하나님 탓이 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생긴 탈이라 한다면] 우리보다 먼저 아시고 조처하신다.

그렇게 하실 것으로 아는 것이 지성인으로서의 올바른 이성적 판단이다. 그러므로 우리 분수에 넘치는 지나친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지혜다.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 지금과 같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간섭이나 조종이나 압제를 받지 않고 순수하게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게 될 때가 올 것이니 그 때 판단해도 아무 것도 해될 것도 불리할 것도 없다.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발견하려 하는 것,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나도 부활에 이르려 하는 것[빌 3:8-11] 모두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와 이미 하나 되어 있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 구원을 받아 있음 즉 산 자가 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니 따라서 산 자로서의 마땅한 일을 하는 것을 말함이다. 살았으니 산 자의 일을 하는 것이야 마땅하다.

전에는 죽은 자였기 때문에 산 자의 일이 해당되지 않아 산 자의 일을 할 수 없었던 것과 대조된다. 그 때는 산 자로서의 일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단지 죽은 자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왜냐면 죽은 자임을 알아야 그리스도께 나아와 산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산 자가 되면서부터 즉 구원 받으면서부터 이제는 산 자로서의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 산 자가 되었다는 측면에서만 머물고 산 자로서 산 자답게 움직이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까닭에 결국 구원에서 탈락된다. 즉 앞에서 이미 지적한 구원의 양면성에서 그 피동적인 것만 알고 능동적인 것을 동시에 성경이 밝혀 가르치고 있건만, 그 스스로 사랑[하나님께 대한]이 없어 거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영생 하나에만 집착하는 자기중심인 까닭에 의식적으로 그 후자를 기피하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믿음이 있어 나환자 열 사람이 모두 나음을 입었으나 단 한 사람만이 자기가 행할 마땅한 도리를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은[눅 17:12] 확실히 비극이다. 바로 이 점에서 구원을 받고서도 많은 사람이 걸러 내어지고 솎아지고 추려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악인들을 선별해서 의인과 분리시키시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영광 돌리려고 온 자가 이 하나뿐이냐”[:17]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광을 챙겨 주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생명과 사랑의 법칙이다.

내 스스로 영광을 취하니[행 12:23] 죄요 악이요 불의요 불법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생각이 없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영광을 취하려는 생각밖에 없다는 것이니 자기중심이라는 증거다. 병이 낫게 될 수 있을 정도로 한 때 믿음은 있었으나 그 믿음의 본질적 의미 곧 사랑은 없었으니 병으로부터의 구출보다 더 근원적인 죄로부터의 구출[마 1:21]이 없음은 당연하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 받은 자는 적다 하셨다.

왜냐면 자기의 생명 하나에만 집착해서 영생 얻었다는 사실에만 만족하고 사람 삶의 기본 원리인 삶의 법칙을 따라 올바르게 사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결국은 그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마저 없어지게 된다는 경고를 하셨으니, 한 달란트 받은 자가 그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두었다가 결국에는 그것마저 뺏기게 된다는 말씀으로 이를 명백히 하신 것이다[마 25:30/눅 19:28]. 일만 달란트 거액의 빚을 진 신하를 탕감해 준 임금이, 그 신하가 밖에 나가서는 임금의 은혜는 저버리고 그보다 훨씬 적은 빚을 진 동료를 빚 갚으라고 잡아 가둔 것을 알고는 왕이 그 탕감해 준 것을 모두 취소해 버렸다 하심과 같다[마 18:23].

여기서 주님은 한번 베푸신 은혜라고 영원히 취소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 취소하실 수 없음을 명백히 하신 것이다. 구원을 하셨지만 그 구원이 중도에서 취소되는 것이다. 이는 순수하게 그 구원 받은 자 당자에게 달린 문제다. 정승 감사도 제 마다하면 그만이다. 더구나 구원의 경우에는 자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정도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방치해 두면 남까지 해를 입히는 것이기에 격리 차원에서 그 구원은 취소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의인들과 똑같이 구원 받아 천국에 간다고 생각해보라. 끔찍한 일이 아닌가.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은 탓이고 바로 그것이 탈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에 미치지 못함이다. 그 목적을 따름이 그 뜻을 행함이다. 능력 문제가 아니라 의지가 문제요 사랑이 문제다. 능력이라면 하나님께 책임이 있지만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당자가 악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범죄로 멸망의 운명에 처해졌고 아담은 범죄로 죽음에 이른 것이다. 죄를 지으라고 즉 하나님 지으신 동료 피조물들을 망치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을 창조하시지는 않은 것이다. 에덴낙원에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소행[아담 부부를 죽음에 빠뜨린]을 보아서도 이런 죄의 속성을 알 수 있다. 죄를 용납하시면 일껏 만들어 놓으신 피조물을 가리키시며 “너 가서 내가 만든 저 피조물들을 모두 망가뜨려라” 하시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므로 절대로 용납되지 않음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죄를 지으면서도 그래서 여전히 죄인으로 있으면서도 구원을 얻는다는[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망상 그런 조리 없는 생각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 속임수에서 온 것임이 드러난다. 2000년래의 신학 논단, 신학교, 신학교수 등이 만들어낸 것이 겨우 이런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뿐이었다. 하나님의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외면한 엄숙한 교훈이요 결과다[눅 10:21,22/고전 2:9/요 6:44,45,65/고전 2:13,14/마 16:17].

지혜 있고 슬기 있다고 자처하는 자에게는 “숨기신다”. 하나님 친히 숨기시는데 세상 어느 천재가 그 머리로써 이를 찾아내겠는가. 그 대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신다”.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 고기잡이 무식자들을 선정하신 의미를 무시하니, 그들 역시 완전히 무시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에서만은 완전히 따돌림을 당하고 일자 무식꾼과 똑같은 취급을 당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째로 완전히 내 것으로 포용해 들이는 것을 말함이다. 사랑이 원래 그런 것이다. 하나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생과 영광과 함께 그 고난의 의미, 죽음의 의미도 여과 없이 내 것으로 받아들임이다. 이것은 취하고 저것은 버리는 취사선택은 여기서만은 통하지 않는다. 이것이 구원이다. 그래서 순종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들이시라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고[히 5:8,9] 한 대로 고난을 통해서 이 순종이 완결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그리스도를 위해 한 말이 되는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 성경이 그런 설명을 하고 있음이다. 다시 말해 순탄할 때의 순종보다 역경일 때의 순종이 가치가 더한 것이고 진실되고, 모든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온전하게 된다”[:9]는 말이 나오게 된다. 그리스도 따로 나 따로 해서, 나는 단지 그리스도의 은혜 덕에 영생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자기중심의 악함일 뿐이니, 이런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앞에서 지적했다시피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러므로 힘써 그리스도를 알려고 하는 것이[빌 3:10] 항상 우리의 기본 자세이다. 성경을 직접 읽음으로써 배우고 모이기를 힘씀으로써 배우고[히 10:25]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써 스스로 배우는 것이다. 끝까지 나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있도록 만드는 것은 나 자신이다. 하나님 은혜가 기계적으로 자동적으로 그렇게 해 주시지 않는다. 내 스스로 움직여야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 함께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는 사실을 가리켜 "그리스도께 붙잡힌 바된 것"이라 한 것이다.[빌 3:9,12].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한 바울과 같은 말을 하고 생각을 하도록 바울의 본을 받기[고전 11:1] 위해 힘쓸 일이다.

영생 자체가 사랑 일색이다. 따라서 사랑 없이 영생을 누리려고 하지 말 것이다. 그런 영생은 하나님 지으신 이 우주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 됨이 없이 한 몸을 이룸이 없이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는 완전 이탈자, 이단자, 국외자가 됨을 명심할 일이다.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구원이 그리스도의 구원이다. 새 피조물됨이요 다시 남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지 않는 자는 아들이 아님을 스스로 입증함이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7:21].

우리의 구원은 아버지의 아들되는 구원임을 제대로 음미할 일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시작할 것이니, 시간은 더 이상 지체하거나 기다려줄 여력이 없다. 실로 급박하다. 주님은 미리부터 좁은 문, 좁은 길이라고 천명하셨다. 찾는 이가 적다고 하실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고 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눅 13:24]고 미리 경고하셨다. 성경의 경고대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룰”[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일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자신의 구원을 목적하라는 정신 나간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따라 즉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한[요 3:3] 목적을 따라[고후 5:15/롬 14:7-9/갈 2:20/빌 1:21] 충실히 사는 것을 말함이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과거 이미 이루어진 구원이기도 하고, 장차 이루어질 구원이기도 하고 지금 현재 진행 중인 구원이기도 하다.

이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에 관해서 그렇다는 얘기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미 완성된 구원이다. 그러므로 현재 진행 중이라고 해서 또는 장차 얻게 되는 것이라고 해서 미완성의 구원이라고 착각하지는 말 것이다. 가장 정확한 표현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 단계에서의 구원이다. 사랑의 문법은 언제나 현재사이다. 시험을 받아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히 3:12]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 방법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우리를 시험하는 내용으로써 이미 명백히 나타나져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광야 시험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세 가지로 나누어 시험하던 바로 그 내용이다. 머리로서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심을 믿어야 하고 몸된 우리로서는 머리께 절대 복종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 즉 갑과 을의 둘이 하나되는 원리원칙대로 따름이다[마 4:3,6]. 그리고 세상에서 살고자 하지 않는 것 즉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함이다[눅 4:6].

앞에서 말한 대로 나뿐만 아니라 나 외의 모든 사람[그리스도를 믿는]에게도 같은 의미와 모습 또는 상태로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에, 나의 모습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모습이 되어 계시므로 말하자면 나를 비롯한 이 많은 사람들의 ‘머리’로서 계심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은 이 ‘머리’를 정점으로 하는 한 몸의 체제를 구성하고 있다.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으나 머리는 하나인 것처럼 바로 그와 같은 구조이다.

그래서 그 머리되어 계신 모습을 따라 우리 몸도 물론 그대로 닮는 것이니, 그 육체의 모습이 영화로우시면 우리 몸 곧 나의 몸도 그와 똑같이 영화로운 모습이 되고, 그 모습이 모든 능력을 행사하실 수 있는 특성을 지니면 나의 몸도 그와 똑같이 막강한 능력을 보유하게 됨은 당연하다. 머리의 모습이 고난 받으시는 형상이시라면 그 몸의 지체된 나 역시 고난의 세례를 받아야 정상이고 제대로 된 모습이다. 머리와 그 모든 각 지체는 하나요 그래서 한 몸이 아닌가.

나의 영혼이 하나님의 영 곧 하나님(하나님은 영이시니까)과 함께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는 데에는 반드시 조건이 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내가 내 육체가 있고 또한 영혼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도 나의 육체에 해당하는 것이 영이신데 또한 내 영혼에 해당하는 영이 있으신 것으로 성경이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고전 2:10,11]. 고로 우리도 이를 따라 말할 수밖에 없다.

영과 영으로 표현되니까 조금 헷갈린다 할지 모르나 우리의 육신에 해당하시는 것이 "영"이시고 우리의 영혼에 해당하는 것이 "성령"이라 구분해서 생각하면 복잡하거나 어려울 것도 없겠다. 왜냐면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아버지께서도 영이시고 아들께서도 영이시다. 또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되어 계심도 성령이시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원리의 3각 구도[tripod structure]에서 보는 대로, '영으로 계시는 아버지', '영으로 계시는 아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시는 성령'을 구별해서 표현할 필요가 있다.

이런 경우 우리 인간은 육체와 영혼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어 육체와 영혼으로 구별해서 말할 수 있으니 즉 내 육체 안에는 성령께서 계시지만, 내 영혼 안에 성령께서 계시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라 할 수 있음이다. 또 이 때문에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바로 나의 모습이시라 할 수 있는 것은, 현재 내 육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계시므로 나와 그리스도께서 하나가 되어 있는 모습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라고 할 때 결코 이는 내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께서 나라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단지 둘이 하나되어 있음을 이상과 같이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아들과 하나로 계신다고 할 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경우와 같은 것으로써 설명한다면 어떻게 표현될까. 아버지께서 아들은 아니시고 아들께서 아버지는 아니신 것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것처럼 그렇게 계신다고 설명할 것이 아닌가.

결국 하나님 친히 영이시지만 내가[사람이] 영혼과 육체로서의 이중 구조로 존재하는 것과 같이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처럼 하나님도 '하나님'과 '그 영'이라고 표현될 수밖에 없다. 아버지와 그 영[롬 8:11] 그리고 아들과 그 영, 이렇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로 계심을 또는 하나이심을 설명하자니 그렇게 된다. 그리스도로 말하면 이미 사람이 되시어 육체와 그 영으로서의 이중 구조로 되어 계시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바로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이치를 따라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으므로, 이 조건이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성령-행 2:38]"을 받는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다. 그 조건이 어떤 것이냐 하면 서로 사랑한다는 조건이다. 따라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앟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고후 5:15] 아니할 때 성령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나 성령 받는 것이 아니요 이 말은 아무나 죄 용서 받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이 말은 아무나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니 주님의 말씀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요 6:65]는 의미다. 하나님께 듣고 배우지 않는 한 그리스도께 올 수 없다 함이니[:45], 무엇을 배우느냐 하면 이 세상이 죽음과 죄의 일색으로서 도무지 인간이 살 만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 나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을 자각함이다.

내가 현재 죽음에 처해 있어 언제라도 멸망할 수도 있는 처지를 알기 때문에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리스도 앞으로 즐겨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고후 5:15] 하는 회개가 없이는 절대로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엄숙한 사실에 직면하여 내 스스로 그리스도를 택할 경우에만 나는 구원되는 것이다.

그런즉 스스로 자기를 살펴, 과연 이러한 갈림길에서 그리스도를 택했는지 지금도 그런 기로에서 그리스도를 택하고 있는 나 자신의 현재의 위치인지 스스로 시험할 수 있고 확증할 수 있는 것이다[고후 13:5]. 만일 그렇지 못하면 나는 버림받은 자인 것이다[:5,6]. 따라서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이 있으니, 무엇이냐 하면 사랑에 법칙이 있는 것이다. 사랑에도 무슨 법칙이 있는가 하겠지만 사랑이란 것이 맨처음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고 그리고 만물 즉 모든 피조물을 만드시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생명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니 생명의 법칙이 곧 사랑의 법칙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일정한 법칙 없이 되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함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만드시든 그 만드신 모든 것이 일정 규칙을 따라 유지 존속해야 할 것이기에 그러하다. 자연법칙을 보라, 한 치 오차없이 운행되어져 가고 있지 않는가. 바로 그런 법칙이다. 자연계의 물질이나 동식물들도 그런 법칙에 따라 존속하고 있거든 하물며 자유 의지를 가지고 인격성을 지닌 인간들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다시 말해 자연만물이 일정 규칙을 따라 운행됨으로써 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우리 눈을 즐겁게 하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처럼, 창조된 인간들 역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고 그러기 위한 법칙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냐. 서로 미워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 한 몸이 되어 사는 것이다. 한 몸을 이룬 각 지체가 서로 싸우는 것을 보았던가. 한 몸이기 때문에 네가 나이고 내가 너이니 네 것 내 것 구분하지도 않고 문자 그대로 하나로 움직이지 않는가.

한 지체에서 가령 이빨이 아프면 그 이빨 하나의 고통으로만 그치지 않고 몸 전체에 그 고통이 파급된다. 그리고 그 고통이 멈추고 낫게 되면 그 이빨만 즐거워하지 않고 몸 전체가 다 기뻐한다. 바로 이 같은 원리가 사랑의 원리이니 곧 하나됨이요 한 몸됨이다. 하나 되고 한 몸되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몸의 각 지체는 물질이라 그렇게 기계적으로 장치해놓으시면 되지만, 인간과 같이 제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지닌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유를 주신 것은 그와 같이 서로 사랑하면서 살라는 하나님의 뜻이다. 사랑의 핵심은 자유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 의지란 것은 선택권을 지닌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사랑하다가도 미워할 수 있다. 서로 좋아하다가도 원수가 될 수도 있다는 그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런 인간의 자유 의지로써 하나 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 무엇일까. '한 몸'으로써 사랑하며 살아야 할 것이니 그래야 통일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조화하고 통일을 유지할까. 머리 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런 조화와 통일을 유지할 수 있다. 너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이 점에서 일치하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너를 대할 때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시니까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는데 내가 너를 미워할 수는 없다. 네가 나를 대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줄 알면서 네가 나를 미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공통 목적 아래,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인간이 여러 수천 억이 될지라도 그런 공통 관심사 하나로 뭉쳐져 있으면 어느 하나도 미워할 사람이 없다. 그러면 문제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함이다. 사랑은 자유 의지가 핵심이고 자유 의지는 선택권이 보장되어 좋아하다가도 싫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면 나도 하나님을 좋아하다가도 싫어지면 그만 아닌가.

내가 하나님이 싫어지면 내 이웃 즉 나와 같은 피조물인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쳐 다시는 앞에서 말한 통일과 조화, 공통 관심사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나와 하나님과의 사랑이 기본이 된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만드시면서 이미 사랑은 시작되었고 그 법칙 역시 운용되는데, 우리도 경험하여 알고 있듯이 무엇을 만든다, 이루어낸다는 것은 애착 없이는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정성들여 만드니 거기에 나의 모든 힘 즉 나의 전 존재가 퍼부어지는 것이다.

즉 내 자신의 일부가 그 내가 공들여 만들거나 이루어놓은 작품에 옮겨져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렇게 이룩해 놓은 것이니 나의 분신인 셈이다. 자, 그러면 나의 분신이 되어 있는데 그것을 누가 자기 몸처럼 애지중지하지 않겠는가.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자기 모습, 형상으로 만드셨다 했으니 하나님의 마음이나 우리 마음이나 그 희로애락이나 감정 등이 우리와 하나도 차이가 없으시다.

말하자면 우리 각 사람은 능력 면에서나 차이가 있지 그 외로는 '하나님의 한 작은 축소판'인 셈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상대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역시 하나님께서도 우리더러 자기를 사랑하라고 하시지도 못할 것이 아닌가. 하나님 마음이 우리 마음이다 할 때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부모 마음이다.

부모가 자식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 육신으로 자녀를 낳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치 만든 것인 양 애지중지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 마음이 곧 부모 마음인 것이다. 부모의 심정이란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알도록 하신 것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우리가 접촉하며 대하는 모든 것이 우리를 교육하시는데 활용되니까 그런 것이다. 그래서 모든 부모에게, 그리고 새끼를 낳고 키우는 동물들의 모든 어미(또는 수컷이라도)에게, 그런 마음의 기계적 장치를 해놓으신 것이다.

그래서 10계명 중 인간 관계에서의 첫 계명으로서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다. 이미 소개했지만 6.25 전쟁 중의 실화와 같다. 하나님의 어버이 사랑을 소중히 생각하기 위해 다시 이야기하면, 한 겨울 한 미군병사가 노변에서 눈 덮인 한 사람의 형상을 발견한다. 이미 죽은 젊은 여자였다. 그런데 그 옆에는 옷가지를 포대기 삼아 칭칭 감아놓은 뭉치 속에 아기가 할딱거리고 있었다. 그 옷가지는 다름아닌 그 엄마의 옷 전부였고 엄마는 벗은 몸으로 얼어 죽은 것이다.

병사는 얼른 아기를 안아다 막사 안으로 데려가 소생시켰고 그 후 귀국할 때도 아이도 데려가 양자로 삼았다. 청년이 된 아들을 데리고 양아버지는 한국 땅 그 어머니 묻힌 산속의 산소를 다시 찾았다. 청년은 그가 입은 옷을 전부 벗어 그 위에 걸쳐놓고 "엄마, 얼마나 추우셨어요!" 하고 산소를 부둥켜 안으며 울고 또 울었다. 자기를 버려, 자식이 대신 살아 주기를 바란 것이 '어쩔 수 없는' 그 모성애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넣어 주셨으니 하나님 마음이야 감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으니 곧 당신께서 정성들여 만드신 피조물이므로 그 피조물을 자기 분신처럼 생각하시기에 그 피조물을 위하시지 당신 자신을 위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만지거나 만들거나 할 때면 자기를 의식하지 않고 거기에만 모든 신경이 가 있지 않은가.

자기에게 신경을 쓰다가는 그 일에 열중할 수 없음이다. 바로 그 원리가 사랑의 원리이다. 법칙인 것이다. 상대를 보면 그 상대에게 관심이 간다. 그렇게 상대를 보고 있는 동안만은 자기에게 관심이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 상대의 얼굴에 또는 입고 있는 옷에 무엇이 묻어 있으면 그것을 지적해 준다. 자기를 의식하여 내게 무엇이 묻었느냐 하고 상대에게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면 상대는 감사하다는 듯 얼른 그 묻은 것을 떼어내고 나를 보다가 "너도 묻었네" 하고 일러줄 때에야 비로소 나는 내 자신에게 관심이 가게 되는 것이다. 상대에게 대한 긍정적 관심의 집중이 사랑이다.

혼자 있으면 내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누가 보아 주어야 한다. 나만 아니라 다른 사람 즉 내 상대방도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약속을 할 수 있다. "너는 나를 보아 주고 나는 너를 보아 주기로 하자. 너 없이는 내가 못살고 나 없이는 네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자"는 것이다. 나 혼자 있으면 아무 일이 없지만 그렇다고 혼자 있으면 불편하고 심심하고 외롭고 멋쩍으니 부득불 나 외에 누가 또 있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혼자 있지 않고 나 외에 누가 또 있되 마치 나 혼자 있는 것처럼 그렇게 만만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은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되어 주어 함께 하나가 되고 서로 한 몸처럼 사는 것이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대로 내가 하나님의 영을 모시는 기본 조건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나 자신", "제2의 나 자신"의 의미다. 내가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어 하나로 살자는 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내가 네가 되어 주니 나는 너를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는 것이 약속이고 또 법칙이 되는 것이다. 이 약속을 깨뜨리고 법칙을 지키지 않을 때 사랑 즉 너와 나 사이의 사랑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약속 지키기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 조건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내가 하나님의 영을 모시는 것이 이루어지고 ‘둘이 하나 됨’이 영원히 유지 존속되는 것이나 어디까지나 내게 달린 것이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니 곧 삶의 원리이고 법칙이다.

그러니 이 시험 많은 세상에서 혹여 어찌 될까 아담처럼 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될까 "두렵고 떨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이 없을 수 없다. 항상 강조하는 것은 내 스스로 "조심하되"[고전 10:12] 내가 조심하는 것만큼만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 내게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똑같은 은혜지만 어떤 이는 열매를 맺어도 30배만, 60배만 또는 100배의 결실을 하는 것이 그 때문이다. 사랑의 차이다. 따라서 "두렵고 떠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너무나 심한 오해를 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요일 4:8] 일면만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동시에 소멸하는 불이시다[히 12:29].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시 7:11] 함과 같다. 어느 쪽도 일면만을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가 강조하는 양면성 그리고 동시성은 이러한 하나님의 품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그 계시는 모습을 따라 만물을 창조하심으로서 삼위일체 원리가 생성되고 확립되어 있음이다. 곧 짝의 원리다.

반대되는 양면이 하나로서 통일 조화를 이루어 있는 것이다. 구원을 받는 것과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루는"[빌 2:12] 것과의 조화다. "항상 두렵고 떨림"[:12]과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함"[4:4]의 조화 일치다. 여기에는 아무런 이상한 것도 모순된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없다. 이것이 정상인 것이다. 우리는 일면만을 보고서 진리인 양 믿어 온 것이다. 두 손바닥을 마주쳐야 "구원"이라는 손뼉소리가 난다. 한 손 가지고는 아무리 흔들어도 소리를 못낸다.

교회는 "주님을 두려워함[the fear of the Lord]과 성령의 위로"[행 9:31]라는 두 가닥 레일 위를 달리는 열차다. 오늘날 교회가 "배도(背道)"[살후 2:3]의 기운이라는 장막으로 짙게 드리워져 있는 이유는 초대교회의 본을 따르지 않고 중간에 변절하여 성령의 위로만을 강조한 까닭이다. 변절이라기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방해 공작에 놀아난 것이다. 이 역시 양면성이요 동시성이다. 즉 인간[아담] 자신의 범죄와 함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꾐[시험]이었던 것이다. 어느 한 쪽도 일방적인 것이 없는 법이다.

다시 우리의 구원을 정리해보면

맨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인간이 왜 이렇게 짐승의 육체처럼 되었는가 할 때, 원인은 짐승처럼 자기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니 곧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자기중심 때문이다. 자기 부인의 반대 개념이다. 이 인간 욕심이 모든 악과 죄의 뿌리다[약 1:15]. 이것은 모두가 양심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다 잘 아는 사실이고 때문에 모든 종교가 인정하는 것이다. 양식과 상식이 있는 사람이면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이 자기 집착을 어떻게 하면 막을 것인가 그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방법이 있어도 그 길을 모른다기보다 실상은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즉 이러하지도 저러하지도 못하는 불가능인 것이다.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개선해 보고자 하는 것도 자기 집착, 자기중심의 일종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인간 삶에서 일체의 자기 노력을 부정하는가? 물론 그것은 아니다. '행위' 자체를 말함이 아니라 그 '동기'를 말함이다.

개선의 노력을 해도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내가 위하는 내 상대[하나님], 내 이웃을 위하는 것이어야 그것이 정상임을 지금 역설하는 것이다. 죽어 좋은 데 가자는 것 역시 자기 집착 곧 자기 욕심이기는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이런 것은 지금까지 설명한 사랑과는 정반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기 집착, 자기 위주, 자기중심, 자기 본위의 자세로써는 서로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서로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으니 언제 상대방을 생각해 주고 말고 할 마음의 여유가 있겠는가. 이 악순환은 영원히 되풀이된 채 굴러가기 때문에 이를 막을 방도가 없다. 그러면 인생은 꼼짝없이 죽으라는 말인가. 그렇다, 운명적으로 그렇다. 양심상의 가책을 받고 자기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좋다. 그것은 마땅한 바다. 그러나 내 스스로 나의 영생을 목적하는 한 그 노력이 일절 무의미하다는 그 뜻이다. 왜냐면 영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위함으로써 사랑이 없어 죄만 지을 따름인데 사랑의 생명이 있을 리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받고 나서,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즉 머리를 위하고 나와 같이 한 몸을 이룬 지체들을 위해서만 노력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이 때 나는 구원 받았다고 해서 그런 노력이 없고 자기 삶에만 집착하여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되고 그리스도[머리되시는]를 위하여 사는 것이 없다면, 이 때 나는 그 영생을 결국 얻지 못하는 즉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결과가 된다는 그 뜻이다.

마땅히 노력을 해도 순서를 따라야 하고[먼저 새 창조를 받아야] 그리고 그 동기가 올바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 차이다. 이렇게 먼저 새 창조를 받지 않고서 자기가 자기를 개선하려는 노력조차 실상은 자기 집착의 한 유형에 불과하니 인생이 다시 출생하는 극단의 조처가 취해지지 않는 한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방법이 아닌 재창조의 길이 모색되지 않고는 인생은 이대로 두면 멸망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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