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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영사운이란 등록일 2016.02.16 21:45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54

바/영/사/회-"[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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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영/사/회/

명칭
 

아직은 다룰 만한 자료가 없으므로 "바영사회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일련의 글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바영사회'는 "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귀(回歸), 회복(回復), 회심(回心) 또는 회개(悔改)운동"의 약자다. 영어로는 RalRal Movement[“Repent(Return) And Live Right And Lastingly” Movement]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人, 나 자신을 소유하신 임자)로 삼아 회개하여 바르게 살면 영원히 살게 된다[Repent(Return) to live right and everlastingly in the Lord Jesus Christ.]는 뜻이다. 성경대로 하면 “회개[repentance]”이나 “회귀” 또는 “회복”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좀 더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영문으로는 'You-utopia Movement'라고도 한다. "utopia"라는 말은 도마스 모어[1516]가 그 저술에서 한 이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한 섬을 상상해내어 묘사한 데에서 나온 말로 그리스어로 'u'는 없다[no]는 뜻이고 topia는 장소[place]를 의미하는 것으로 아무 데도 없는[nowhere] 상상만의 세계라는 의미로 현실로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적인 세계"의 뜻으로 사용되어져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버이로서의 하나님을 영원하신 머리로 모신 한 몸 체제에서의 각자의 자기 부인의 삶은 이 바로 각자가 이상으로만 생각하는 이상향의 현실적 구현의 삶의 원리일진대 바로 이 사실을 널리 홍보하기 위해서라도 "당신 자신"이 곧 "우리 자신"이 이상향이라는 의미로서 "You"와 "utopia"의 합성어를 만들어본 것이다. "u"가 "없다"는 뜻이라니까 "u"를 부정하는 "u"이니까 결국 "있다"로 통할 수 있지 않으냐 함이다. "you"와 "u"의 발음이 비슷하다고 해서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뿐 아니라, "당신이 곧 이상향의 주체"라는 뜻이요 "이상향은 당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의미이니 서로가 당신이라 하면 곧 내가 우리 자신이 바로 이상향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 "이상향"이 실제 없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면 오늘날까지 거의 모든 이들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자기 부인"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을 품어온 것과 맞아 떨어져, 자기 부인이 성경의 가르침의 요지임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이런 조어(造語)는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못할 것이니 너희 안에 있음이다"[눅 17:21] 하신 말씀에 근거한다. 천국 곧 이상향은 이간의 상상으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현실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을 최고 최상 최선의 행복된 조건으로 살도록 처음부터 창조하신 것인데 그 행복한 삶의 요건이 되는 삶의 법칙을 어김으로써 인간이 오늘날 같은 비극에 함몰되어 있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현재의 인생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은 친히 인간이 되시어 인간의 죽음의 고통에 동참하심으로써 사랑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나 오직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생명의 법질서를 각자 스스로 사랑하여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를 지키지 못해서 이런 비극적인 결과를 냈으니 우리를 구원하심도 이를 지키도록 하심에 있다는 것이야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는 일이다. 천국에 가서 지킬 수 있다고 상상함은 유치의 극치가 된다. 왜 당당히 이 세상에서 다시 말해 모든 역경 가운데에서 사랑과 생명의 법질서를 지키는 그런 사랑의 열정은 없다는 말인가. 우리에게 어떤 능력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오직 요구하시는 것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어린아이라도 능히 이해하고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도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18:3] 하신 것이다. 누구나 구원 얻을 수 있고 어린 아이라도 구원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사상이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제대로 행할 수 있는 점만 다르다. 세상에서의 관점으로 사랑이라 믿는 그런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You-utopia' 운동은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박애주의 운동이 아니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부인의 삶을 펴는 운동인 것이다. 교회 활동이라 해도 좋고 전도 운동이라 해도 좋다. 전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요 이렇게 전파함을 받아 개별적으로 믿으면 교회를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활동 자체가 전도 외에 그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까닭이다[요 20:21,22].


지금까지 사용되어져 오는 "기독교" 또는 "Christian"이라는 말로는 그 원래의 의미를 다시 되찾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로까지 오늘날의 사태는 이어져 온 것이다. 그러므로 좀 더 자극을 줄 수 있는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는 신조어가 필요하다 해서 "you-utopia"라 한 것이다. 오늘날의 성경에 대한 무지는 비잔 오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초대교회 이후 300년간 각종 핍박을 받아오면서 내부적으로는 원래의 사도의 가르침에서 급격한 이탈 현상을 보여 온 것이다.


바울이 죄가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들어왔고 그 죄로 인해 죽음이 왔다고 명명백백하게 설명하고 있건만 아직도 에덴낙원이 이 자연계가 아니라 영계라고 믿는 이는 거의 없을 지경이다. 죽지 않았다면 즉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오늘날까지 살아 있을 아담이 아닌가. 아니, 거룩한 천사들처럼 영원히 죽지 않을 아담이다.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서 어찌하여 죽지 않는다는 말인가. 기껏 살아보아야 노아의 때까지 이어진 아담 시대뿐이다. 아담이 천년을 채우지 못하고 죽었고 노아도 950년을 살다가 죽었다.


자연계에 속한 인간 육체로는 최고로 장수하는 것이 천년도 못다 채운다. 그것도 기후 조건이 오늘날처럼 열악하지 않을 때다. 기후적으로 변동이 왔다는 사실은 노아 홍수 이후에나 무지개[rainbow] 현상이 보여졌던 것으로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노아 홍수 이전까지는 인간이 천년 가까이 살아도 좋은 그런 기후 환경이었다고 결론을 내려도 좋다. 그러므로 아담이 지금까지 살자면 그 몸이 신령한 몸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아담이 신령한 육체로 있었다면 에덴낙원 자체가 이 자연계가 아니라 영계였다는 충분한 설명이 된다. 그러면 성경 기록이 모두 네 귀에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즉 영생까지 하게 할 수 있는 생명나무의 신비성, 뱀이 인간과 대화하는 것 등의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이다. 그 동물도 그 식물도 이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계시록은 이 사실을 가리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곧 용이요 창세기에 나오는 그 "옛 뱀"이라고 두 번이나 명시해주어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 의해 눈이 감겨져 있으니 알 도리가 없다.


"신학"이 무엇이며 "신학자"가 무엇이냐. 수천 년을 흘러오면서도 이 아주 간단한 사실 하나조차 제대로 규명해내지 못한 것이다. 어린 아이에게만 진리를 나타내시고 그리스도 친히 계시하여 주시지 않고는 성경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완전히 학문시하여 성경에 매달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도 이러한 성경의 ABC도 파악하지 못하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우리는 이로써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어진다 하신 말씀이 그대로 나타나진[마 5:18/사 55:11]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리스도의 세례 받으신 의미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 곧 "한 영"[고전 6:17]이 됨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우리 각자와의 하나되심을 가리켜 그렇게 세례를 받으신 사실을 정확히 설명하는 이가 거의 없다. 물 세례는 베드로가 암시한 바와 같이 노아 당시 홍수로 멸망한 그 죽음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 지내지심에 함께 하였음을 여러 차례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롬 6:3,4/골 2:1;2]. 우리의 세례 받음보다 그리스도의 친히 세례 받으심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죽어 장사 지내졌으니 나는 자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기 부인은 이미 시작되는 것이다. 내가 죽어 없어졌으므로 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 그 '나 자신'이라는 것이 없다[고후 5:14,15].


이런 회개 없이 그냥 무턱대고 죄인이라 인정하기만 하면 영생을 주신다고 전파하고 가르쳤으니 지금까지 "다른 예수, 다른 복음"[고후 11:4]을 전하고 가르쳐 왔다고 해도 할 말이 무엇이랴. 그러나 어린아이에게 구원의 진리를 가르쳐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러한 미흡한 가르침을 받아 그 이상은 모른다고 가정해도 구원 받음에는 아무 지장이나 하자가 없으니 왜냐면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을 나 자신 사랑하여 적극적으로 그 모든 뜻을 따르고 말씀 순종함에 핵심이 있기 때문이다.


지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모든 뜻에 순종하고자 함에 있으므로 사랑하여 복종하는 자리에 나가면 그로써 그 이상 요구할 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식은 교만하게 하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아신다고 한 것이다[고전 8:3]. 그러므로 "자기 부인"을 아주 부정(否定)해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진리가 들어갈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어린 아이가 같이 사랑하는 이들은 누가 시키나 안시키나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는 자기 부인을 하고 있음이다. 왜냐면 사랑의 속성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사랑하는 상대를 사는 것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론이 아니라 본성으로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음이다. 사랑이 그와 같이 어린 아기 같지 않기 때문에 더욱 지식을 얻어 확신 속에 사랑하고자 하여 모든 지식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말을 쓰는 우리나라에서는 "You-utopia"보다는 그냥 "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이라는 명칭이 무난하리라 본다. 이상향 건설은 이 세상에서부터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당신 자신으로부터 개개인 각자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와 당신 안에 이상향이 건설됨으로써 당신과 내가 한 몸이 구조로 영원히 지낼 때 그것이 천국이다. 물론 우리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벗어 버리고 거룩한 천사들과 같은 영계에 속한 신령한 몸으로 변환됨은 물론이다.  


회개는 “돌이켜 개선한다 즉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다”는 뜻이요 회심은 말 그대로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회귀와 회복은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온다”, “원 상태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표현은 다르나 의미에는 하자가 없다고 보는 것은, 앞에 “바르게 살기” 위함이라고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 “to return”은 영문 성경에도 자주 사용되어 “to repent”와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우리는 우리만의 조직체로써 어떤 종류로든 세력화를 일절 꾀하지 않는다. 오직 성경대로 그리스도를 지도자로[머리로서] 받들어 그 몸의 지체 역할을 하기로 하는 이들은 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우리는 환영하는 것이다. 현역 교역자로서 이 일에 찬동한다 해서 소속된 교단의 간판을 내리라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일에는 그런 외형적인 것에 구애될 이유가 없다.


절의 주지(住持)라도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다. 단 그 경우, "부처"라는 이름의 우상은 치워 버릴 일이다. 천주교 성당의 신부라도 얼마든지 이 운동을 독창적으로 할 수 있다. 단 그 때는 "마리아"를 상기시키는 그 어떤 것도 제거해야 할 것이다. 사람을 새로 창조하시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올바르게 즉 의(義)롭게 살라는 것이다. 올바르게 사는 것은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모든 사람이 한 몸의 구조[체제]로서 각기 그 지체(肢體)가 되어 있으니 자기 부인을 하는 바탕 위에서 살라는 것이다.


목적이 '올바르게 사는 데'에 있고 영생 자체에 있지 않다. 영생은 올바르게 살 때 오는 당연 귀결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란 것은 현실보다 미래에 있다. 그래서 현실적인 삶과의 괴리를 느끼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종교를 배척한다. 다시 말해 종교는 영생이 목적이다. 그리고 초월자에게 기대는 심리로 마음의 안정과 평온을 도모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생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하나님의 뜻은 영생에도 있지 않고 절대자에 대한 의타심을 바라심도 아니다. 영생을 주심에 있다면, 처음부터 아담을 간섭하시고 강제하셔서 애당초 범죄(犯罪)하지도 않게 하시고 따라서 죽지도 않게 하셨을 것이다. 절대자에 대한 의뢰심이 목적이라면 인간을 자주 독립성을 지녀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 존재로는 애초 창조하시지도 않았으리라. 오직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이 스스로 생명의 원리원칙대로 사는 것이다.


즉 올바르게 살도록 우리 인간을 만드신 것이다. 무엇이 올바른 것이냐, 앞에서 지적한 '한 몸' 체제에서 사는 것이다. 한 몸 체제에서 사는 것을 우리는 통상 공동체 의식이라 한다. 이와 반대되는 것이 개인주의 혹은 이기주의다. 자기중심이다. 몸의 각 지체가 머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기 좋아하는 대로 행동한다고 가상해보라. 그 '한 몸' 체제는 무너지고 더 이상 작동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신체는 그런 한 몸의 체제이기는 하되 기계적인 것이다. 올바른 인간 삶은 그런 한 몸으로서의 삶의 구조를 각자 자기 자유 의사와 의지로써 유지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유일한 차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이 자유는 하나님도 절대로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시지 못한다. 왜냐면 처음부터 그렇게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얼마든지 이 삶의 체제에서 이탈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억지로 그런 삶의 범주에 집어 넣는 일이 없다. 이탈하는 현상을 죄라 하고 불의, 불법, 악 등 이름으로 부른다. 왜냐면 모든 아름답고 올바르고 고상한 것에 대하여 반대로 나가기 때문이다. 이기주의, 개인주의는 누구나 싫어하는 바이고 공동체 의식은 누구나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그 증거다. 악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인생 구원에 대한 유일무이한 이 하나님의 뜻을 막아 인간 구원을 훼방하려고 각종 종교를 만들었다.


세상 종교와의 차별화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도리까지도 그런 유사 종교 형태로 만들어놓고 있는 현실이기에 이와 차별화할 필요에서도 이상과 같은 명칭을 붙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로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으니 따라서 살면 되는 것이지 이것을 인위적으로 특별히 무엇이라 구분할 필요가 없다. 단 애초 창조하신 뜻대로 올바르게 살라는 것이다. 살면 되는 것이므로, 일상생활과 구별하여 세상 종교와 같은 범주에 넣어 구원[또는 영생] 자체를 목적하는 세상 종교와 동일시하거나 유사하게 인식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만물을 다스리게 되어 있는 인간[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에 처해지자 처음 창조의 모습과 그 의미가 사라져 부득불 하나님의 새 창조를 입은 터이므로 따라서 이 새 창조에 따라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이런 진리를 모르고 또는 전적으로 부정하는 종교 집단들과 동일하게 인식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도 구별할 당위성이 제기됨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종교적인 인상이나 착각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종교집단들이 공통으로 띠고 있는 일정 형태, 제도, 의식 등을 갖추고 있을 이유도 없다.


순수한 일상생활로서 그리고 삶 자체로서 '살아가면' 되는 것임을 다시 강조한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생활자(生活者)가 그런 특이한 모양새를 띠는 것은 그 스스로 그것이 일상생활이 아니고 특수한 활동 즉 종교활동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베드로 등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초대교회가 "매일"[행 2:46/6:1] 모였다는 사실도 이러한 일상생활 차원이었음을 강조하고 역설하는 그 증거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눅 9:23] 하심도 같은 의미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고 바울이 말한 것도 같은 차원이다. 말씀을 전달하는 사도들도 날마다 그렇게 했음은 물론이다[5:42].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하여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 3:12,13] 함도 같은 뜻이다.


고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새 피조물된 사람의 삶 그리고 일상생활은 우리가 익숙해 있는 보편화된 인간 생활 그 이상 이하도 아님을 재삼 역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 받은 자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요일 3:1,2] 이 세상에서는 어떤 자세가 되어야 종교적인 색채를 띠지 않고 일상생활화가 되느냐를 따지기 앞서 우리가 믿는 도리를 일단 간추려 정리해볼 필요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영원한 생명[삶]의 법질서


“그리스도 구원의 복음(福音)”이라는 말 그대로 이 '일대 희소식'이라는 하나님이 구원의 말씀은 그 내용의 뼈대를 위와 같은 삼각형의 각 모서리로 설명할 수 있다. ①첫째 모서리는 생명의 법질서로서, 이것은 조물주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을 만드심과 동시에 확립되어 오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서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하여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 내용이 아주 간단하다. 진리는 간단하고 평범한 데에 있다.


그것은 창조라는 사실 위에 근거하기 때문이니, 인간이든 조물주 하나님이시든 무릇 제작[창조] 행위란 것은 항상 그 원리가 간단하고 평범한 까닭이다. 즉 무엇이든 새로 존재하게 할 때에는 그것이 존재하기 이전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도 그것이 새로 생김으로 말미암은 이점(利點)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할 목적으로 창조[또는 제작]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창조의 결과가 혼자가 아니라 둘 이상이 되었을 때에는, 즉 애초 홀로 존재하시던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만드심으로써 피조물들과 함께 다중(多衆)을 이루어 계시게 될 때에는, 애초 홀로 계시던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이 함께 함으로써 생기는 생명의 풍성을 기약하심이 그런 예이다.


다시 말하면 머리와 몸의 관계를 구성하고자 하심이다. 하나님 친히 머리가 되시고 피조물들은 그 한 몸 구성에서 각 지체 각 부분이 되게 하심이다. 하나님의 창조에서는 이를 '둘이 하나 됨'이라 하는데 즉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되는 것은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아 [우리 피조물이 자기가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뜻에서]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하도록 함이다. 이래서 둘은 불가분이 됨으로써 하나가 된다.


왜냐면 갑이 을의 삶을 살고 을이 갑의 삶을 삶으로써 갑은 을에게 을은 갑에게 절대 불가결한 존재가 피차간 되어 있으므로 그러한 것이다. 이런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 아름다운 생명의 법질서에서는 자기 부인이 필연적이다. 쌍방 모두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는 이 아름다운 그리고 풍성한 삶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이 사실을 강조하느냐 하면. 현재 우리가 죽음의 불행에 갇혀 있어 자유 해방의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도, 이러한 머리와 몸의 관계로서 정착되어 있는 생명의 법질서를 '지키는 것'과 '어기는 것'이 상호간 깊은 관계로 맞물려 있어, 우리의 구원의 성격을 알려면 이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실상 - 죽음


②또 하나의 모서리는 이 세상이 절대로 인간 본연의 삶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인간 육체는 푸석푸석한 흙으로 지어져 있는 상태로서, 문자 그대로의 이런 흙이 조물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운 모양과 구성을 하고 있기에 생물이요 사람일 뿐이지, 같은 흙에 속한 병원균이나 또는 그 어떤 외래적인 중압(重壓)을 받으면 곧 바스러짐과 같은 사고를 당하는 이런 모든 일련의 사태가 인간 육체의 본질이 자연계에 속한 흙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변고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 받은 고귀한 인간의 특성은 어느 면에서나 나타나는데도, 유독 그 육체만은 이런 한없이 덧없는 육체를 하고 있다는 것은 재언할 필요도 없이 변괴요 비정상이다. 한마디로, 현재 우리는 생명의 세계에 있지 않고 죽음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방금 지적과 같이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부터 창조하실 리가 없다는 결론이니, 성경에서 설명하는 대로 인간[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죽음에 이른 그 결과물인 것이다[롬 5:12]. 다시 말해 ①에서 설명한 대로의 생명의 영원한 법질서 즉 한 몸 구조에서의 자기 부인을 하지 아니한 결말이 이 죽음의 대가(代價)인 것이다.


새 창조에 의해서만 인생 구원


③그리고 나머지 모서리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서 나타내시고 행하신 모든 일이 바로 내가 그렇게 행한 것이거나 또는 행하도록 되어 있는 것을 미리 본으로 나타내신 것으로서, 이것이 하나님의 새 창조로 된 우리 구원의 핵심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므로 내 안에 사람으로 계시고 동시에 모든 사람 개개인에게 그렇게 동일하게[하나님이시므로] 계시게 된다.


사람이실 뿐이라면 육체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람사람마다 함께 영원히 계실 수가 없지만 그 지으신 우주 만물 안에[in] 계시고 관통해[through] 계시는 하나님이신 고로 이런 일이 충분히 가능하시고도 남는다. 이렇게 개개인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서 자기 안에 자기의 영혼처럼 모시고 있는 새 구조를 형성하기 때문에 아주 훌륭하게 각자는 한 몸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 자신을, 그리고 그리스도 친히 이렇게 하나님으로서 오시는 성령을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gift]”'이시라 한다. 선물은 그 선물을 받는 각자 개인의 소유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세상에 있는 인생들 각자]을 사랑하시되 자기 아들[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되시니 그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 곧 '구원자(救援者)'라는 의미]을 내어주실 정도로까지 사랑하신 것이다"[요 3:16].


"내어주신다"는 것은 영원히 각자의 소유로서 그 아들을 주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아담 창조 당시 아담의 영혼을 지으시기 전에 먼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창조하신 그런 육체로 우리 각 사람을 간주하시어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게 영원하신 선물로 임하실 때 '그 육체'의 '그 영혼'으로 임하시는 의미이니 이는 이미 설명한 대로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라" 하시면서 당시 아담 안에 숨을 불어넣으시던 형용을 하시어[창 2:7] 숨을 내쉬시는[요 20:22] 동작을 취해 보이신 것이다.


삼위일체


그리고 이같은 삼각형(三角形)의 모서리를 싸고 있는 원형(圓形)이 있다. 다시 말해 이 모든 내용 즉 세 가지 기본되는 줄거리의 바탕이 됨이니, 즉 조물주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 둘이서 사랑으로 하나 되어 계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아버지께서 아들을 낳으신 것이다. 친히 아들을 만드셨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영이시라 함은, 외형으로 식별할 수 있는 모든 형상을 지니는 것은 피조물뿐이고 그런 형상이 없는 상태를 영이라 하는데 조물주만이 이에 해당되심을 말한다.


"영[靈]"이라고 하는 영물 즉 "천사"들도 각각 그 고유의 영적인 또는 초자연적인 육체 곧 자기 형상을 지니고 있음이다. 왜 이 사실이 이상 지적한 대로의 기본되는 세 가지 중심 내용이 되는가 하면 우리 인생의 구원이 바로 이 모습과 형태로 나타나 있는 '삼위일체의 원리'를 따라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됨이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둘이 하나 되어 계시는 모습을 따름이기에 이를 강조하는 것이어서 그렇다.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은 본질이 같다는 뜻이요 본질은 같으나 형태 면에서 각기 독립적이 되어 자기 고유의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낳으심으로써 된 체제이므로 셋, 넷도 아닌 단 둘만의 구성체다. 이 단 둘만으로 이루어진 사실을 가리켜 성경은 아들을 아버지의 “형상”이시라 한다[고후 4:4]. 형체가 있으면 본체가 있는 법이니 따라서 형체와 본체는 나누어질 수 없고 언제나 하나로서 표현되게 마련이다.


형체와 본체로서 둘은 둘인데 표현되기는 항상 하나로서 나타나므로 이렇게 불가분의 하나로서 존재하는 것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되기에 삼위일체 이론이 탄생된다. 즉 본체를 갑(甲, a)이라 하고 형체를 을(乙, b)이라 하면, 원래의 하나로 있던 것 또는 둘이 된 다음에도 계속 그 원래의 하나의 모습을 유지하려는 성질, 상태 또는 표현을 일컬어 병(丙, c)이라 하는 것이니, 이렇게 해서 갑, 을, 병 삼위(三位)가 된다.


갑, 을, 병 삼자(三者)가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갑과 을 둘뿐이지만 '갑'과 '을'이 따로따로 자기를 나타내려 하지 않고 항상 '하나'로서 나타내려는 고로 부득불 그 하나로 나타나지는 것을 '병'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병'을 허상(虛像)이라 할 수는 없으니 왜냐면 '갑'과 '을'의 합일체(合一體)이기 때문이다. 실상(實像), 실체(實體)이기는 한데 그것이 '갑'도 아니고 '을'도 아니다. '갑'이 아닌 것은 '을'이 함께 있기 때문이요 '을'이라고도 못하는 것은 '갑'이 함께 함이다.


그러니 이렇게 불가분의 하나로 둘이 뭉쳐져 있으니 이를 따로 부르는 이름['갑'도 아니고 '을'도 아니므로]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이 경우 편의상 부르는 이름이 '병'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주 만물의 구성 원리이기도 하므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원형으로 위의 그림에서 표시한 것이다. 짝의 개념이 이 삼위일체 원리에서 나온다. 대칭[대립]에 의한 양면성 원리라고도 할까. 무릇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서 양면으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이는 조물주 하나님께서 당신이 계시는 모습 그 원리 그대로를 적용시켜 피조물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우주 만물의 창조/구성/존재 원리


말하자면 만물이 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짝'으로서 둘이 하나를 이루어 계시는 모습으로 계시는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증거가 되고 있다. 제작자의 제조표(製造標, make mark, producing mark)와 같은 것이다. 동양화가가 자기의 작품 한 구석에 자기의 작품이라는 증거로 자기의 인(印) 즉 낙관(落款)을 그려 넣는 것과 같은 모양새다.


이 짝의 원리[삼위일체의 원리]를 따라서, 생명이 있으면 죽음이 있게 되고 자연계가 있으면 초(超)자연계 즉 영계(靈界)가 존재하게 되고 영혼이 있으면 육체가 있고 현세가 있으니 내세가 엄연히 존재하며, 생명의 낙과 반대되는 개념이 죽음의 고통과 고난이라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영원한 생명의 이상세계가 있으니 영원한 형벌의 세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남자가 있으니 여자가 있고 깊음이 있다는 것은 얕음을 전제로 하고 그 얕음이라는 개념과 반드시 병행하여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니 얕다는 것이 없으면 깊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모두가 이와 같다. 그리고 이 둘이 하나 되어 짝을 이루고 있는 상태는 앞의 설명대로 하나님께서 자기와 같은 형상[아들]을 만드심에서 시작된 것이니, 자기와 같은 존재로서 형상의 역할을 하는 터이므로 그 창조되신 분 곧 아들께서는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말씀"이시라고도 성경에 표현하는 것이다[요 1:1]. '말'이란 자기 표현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형상'이 곧 자기 표현인 것이다.


그리고 만물을 보고 하나님 계심을 알 수 있다 함은[롬 1:20] 하나님은 실체이시고 그 모든 피조물은 그 형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모두 삼위일체 원리의 양면성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갑에서 을이 나왔고[派生], 애초에는 갑 혼자였던 것이 이제 갑과 을로 둘이 되었지만 엄연히 구별이 있는 것은 갑은 크고 을은 작다는 것으로서 갑이 을을 낳았고[파생시켰고] 을은 갑에게서 나왔기[파생되었기] 때문이다.


또 '갑'과 '을'로서 둘이 되니 갑 홀로 있었을 때를 '병'이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부르고, 따라서 이제도 '갑'과 '을'이 하나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켜 역시 같은 이름으로 '병'이라 함은 사리에도 맞다. 만물이 이 이치를 따름은 당연하다. 그래서 모든 짝은 주종(主從), 대소(大小), 인과(因果) 관계다. 하나는 머리이고 다른 하나는 그 몸 역할이다. 남자가 먼저 있었고 거기서 같은 사람을 만드시니 이 나중 난 것이 여자다.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것은 바보같은 질문이다. 창조된 것이 아니라 저절로 생겨났다는 바보스러운 생각에서 난 우스개다. 먼저 닭이 창조되었고 그 먼저 있는 닭[甲]을 기준하여 그와 같은 다른 닭[乙]이 거기서부터 생성되게 하시니 이로써 암수 구별이 생긴 것이고 그 둘이 하나를 이루어 달걀[丙]이라는 한 개체(個體)가 나오는 것이다. 암컷과 수컷 둘이 작용해서 낳았다고 둘이 되어 나오지는 않는 것이다. 쌍둥이라도 선후 구별이 있다.


이 삼위일체의 법칙이 우주 만물의 모든 자연법칙에서 그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똑같은 동등한 것이 하나를 이룰 수는 없다. 깊음과 얕음의 개념 역시 먼저 '깊음'이면 깊음, '얕음'이면 얕음이 개념화되었기 때문에 그 반대되는 것이 따라서 덩달아 개념화되는 것뿐이다. 즉 먼저 되고 나중되는 엄연한 규칙성 아래 움직인다. 이런 원리 즉 자연 질서를 무시하고 소위 "양성평등"을 고집하는 것은 탈[脫] 자연법칙, 반[反] 자연현상, 역[逆] 이치(理致) 곧 순리가 아닌 역리다.


이런 이단적 사상은 아무 근거도 없는 진화론에서 제멋대로 불거져 나온 것이다. 그래서 무조건 지금 것은 옛 것의 진화(進化)라는 맹신에서 비롯된 폭거(暴擧)를 감행한 것이다. 그 결과서 수천 년래 지속되어 온 인류의 문화유산적 고정 관념을 소위 "과학[진화론]"의 이름으로 일거에 깨뜨리는 야만 행위를 감행한 것이 오늘의 소위 "양성 평등"이다. 이미 우리는 이 암수 양성의 동시 출현이 불가능하고 반드시 사전(事前) 기획, 고안, 설계에 의한 지적(知的) 이성적 작용에 의한 결과물임을 입증하여 진화론의 허구성을 드러냈다.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탈을 쓰고 나온 인류 재앙의 망령인 것이다. 자연 순리를 벗어나 역으로 나갈 때 그 종국은 와해와 혼란이다. 머리와 몸으로 조화 일치되는 법인데 둘 다 머리라면 거기에는 더 다시 조화의 아름다움은 없다. '여권(女權) 신장'(伸張)에서 접근하면 될 일을 왜 무리하게 '평등' 차원에서 다루려는 무리 수를 두는가. 우리는 우열(優劣)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순리를 따르는 조화와 통합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갑과 을 둘이 하나 되어 불가분이 되어 있으므로[이렇게 하나 되는 것을 가리켜 총체적으로 ‘사랑’이라 하는 것이니 사랑은 이와 같이 엄연히 하나의 법칙이다] 그 하나 된 상태 또는 모습을 '갑'이라고도 '을'이라고도 못하니 '갑'이 위치한 곳에 '을'이 역시 함께 하고 '을' 있는 곳에 '갑'이 또한 존재하므로 이 '병'을 별도의 이름으로 호칭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경우 “성령”이시다.


성령의 '이름'[마 28:19]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로 계시니 이같이 계시는 것을 “하나님”이시라고 하면 맞으나 "아버지" 또는 "아들"로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께서 이제는 영원히 ['영원히'라는 것은 여자의 모태를 통해 세상에 오심으로 사람되신 까닭에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자연법칙을 따름이고 조물주로서의 한번 결정은 모두가 영원성을 띰을 말한다] 사람으로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와 하나 되심이 먼저 이루어진 관계로 이 영원성이라는 본질에서 하나님되심 역시 불변임은 물론이다] “하나님”은 이제는 보통 아버지께 대한 호칭으로 굳어지고, 그 대신 이렇게 둘이 하나 되어 계시는 경우는 대개 '성령'으로 통일되어 불러지시게 된다.


그러나 고유명사는 아니고 편의상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니 하나님은 처음부터 영이시므로 "성령"이시라는 이름은 두루 통하는 이름이시기에, 아버지 또는 아버지의 영도 성령, 아들 또는 아들의 영도 성령이시다. 그리고 이상 설명과 같은 경우에도 흔히 부르는 이름이 "성령"이신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영", "아버지의 영", "하나님" 등으로 불려지시기도 한다.


그러면 이상 삼각형의 세 모서리와 원형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대체적인 윤곽은 무엇인가. 우리의 구원이 엄정한 원리원칙[삼위일체의 원리]에 따라 시행되는 것을 보임이니 이 원칙 곧 삶의 법질서를 지키지 않음으로써 죽음이 와서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처럼, 우리가 이제 구원을 받으면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되는 관계 즉 머리와 몸, 영혼과 육체라는 상호 불가분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니만큼 이전의 그 생명의 법질서를 내 스스로 지킴으로써 구원이 유지 보전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단지 영생이나 거저 얻어 챙겨 누리는 것이 절대 우리 구원의 의미가 아님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이상과 같은 설명의 도식(圖式)으로 나타낸 것이다. 왜냐면 우리 구원의 얼개[짜임새, 구조, structure, framework]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둘이 하나됨의 구조이니 어느 하나라도 상대에게 충실하지 못할 때 이 얼개는 필연적으로 와해, 붕괴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충실한다는 것은 갑을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갑이든 을이든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것을 말함이다. 이것이 우리 구원의 핵심이다. 곧 자기 부인이다. 자기를 위하지 않으니 자기를 부인함이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그러한 본을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각자로 하여금 그 본을 따라 오게 하셨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래서 이 가장 요체가 되는 "자기 부인"을 쏙 빼어 버리고 껍질만 요란하게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된다"는 교리를 만천하에 퍼뜨리고 있는 오늘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위의 그림에서 ①은 처음 창조에서나 새 창조에서나 변함 없는 하나님의 계명, 율법, 생명의 법질서를 말한다. ②는 이 법질서를 지기키 않을 때의 결과인 죽음, 저주, 진노이다. ③은 이 법질서를 지키는 경우의 생명이다. 우리의 구원인 경우 지킬 수 있는 모든 환경과 여건이 완벽하게 조성되어 있음[그리스도로 말미암아]을 말한다. 우리의 구원을 이와 같이 법질서 차원에서 조명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어떤 관계인지 다시 말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그리스도 친히 아버지와 아들과의 하나되어 계심을 여러 말씀으로 증언해 놓으신 것이 4복음서에 충분히[특별히 요한복음] 기술되어 있다. 이로써 우리는 충분히 배울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런 말씀들이 우리와는 전혀 관계 없는 오직 그리스도와 하나님[아버지]과의 관계 즉 아버지의 아들이심을 입증하는 것 정도로만 착각해 왔는데 그것이 아닌 것이다. 나와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으로 인한 구원이 그리스도와 아버지와의 하나되시는 이치를 따른 것임을 명백히 하심에 있다[요 14:20/15:5,7/17:21-23].


그리스도의 재림


여기에 덧붙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再臨]이다. 다시 오시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람으로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므로 그 다시 살아나신 증거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없으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사실이 될 수 없다. 물론 제자들에게는 나타나셨으나 세상에는 그 부활하심을 나타내지 않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부활의 증거로서 부활하신 즉시 세상에 나타나시지 않고 어찌하여 미래에 그 증거를 나타내시느냐 하는 것인데, 이 또한 엄연한 진실과 원리원칙을 따르심이다.


어떤 사실에 근거하느냐 하면, 이제 영원히 사람이 되어 계신 것은 이상 사실을 따라 그리스도를 믿는 나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계심을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데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의 일체의 모든 행동으로서 나와 관계가 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이 점이다. 다시 말해 나와 불가분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부활하신 몸으로 영광 중에 나타나시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 영광 중에 부활하여 나타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난에 동참하는 과정이 완료되지도 않은 상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안되는 것이다. 왜냐면 신령한 몸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나타나시는 순간 나의 몸도 신령한 몸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그런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만일 세상 끝날 제일 마지막에 구원 받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는 사람이라 가정했을 때, 그 마지막으로 죽는 내가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과정을 완료한 다음에야 나타나시게 되어 있음이다.


당시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신 것도 마찬가지다. 당시는 하늘에 오르시기 전인지라 아직 믿는 사람 각자와는 하나가 되지 않으셨으니 왜냐면 성령으로 임하시지는 않은 까닭이다. 승천하신 다음에 오순절에 성령으로 임하심으로써 비로소 믿는 사람 각자와 명실상부하게 하나가 되신 까닭이다. 또한 사울[바울의 이전 이름]에게 나타나신 것도 아직 그에게 성령으로 임하시지 않은 때이므로 가능하셨다. 만약 사울이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을 받은 다음에 바울에게 나타나셨다면 그 때는 필연적으로 바울 역시 그와 같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 순간이 되는 것이다.


요한 역시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그리스도를 환상 중에 보았을 뿐이지 직접 부활하신 그대로를 뵌 것은 아닌 것이다. 만일 직접 뵌 것이라면 요한의 몸 역시 그리스도와 같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했을 것이이요 이렇게 한번 변환하면 영구적으로 그리 되는 것인즉 아직 그 누구에게도[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면] 친히 그 부활하신 모습을 나타내신 적이 없으시다. 왜냐면 나타내시는 즉시 그도 그리스도처럼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게 되어 있음이다.


바로 이런 이치 때문에 구원 얻을 사람 다 구원 얻고 난 다음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세상에 다시 오심[재림] 역시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는 강력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일부러 이렇게 그 부활에 대한 증거로써 세상에 나타나실 까닭이 없다. 부활이 지어낸 것이라면, 그냥 "그렇게 부활하신 대로 믿는 사람들도 다시 살아나게 된다"는 말만으로도 충분한 교리(敎理)가 되는 까닭이다.


긁어 부스럼내기 식으로 일부러 "다시 세상에 오신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무갈 제국의 총명한 아크바르[Akbar] 대제는 "기독교의 교리가 다른 모든 종교에 비해 월등하나 단지 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의 삼위일체인지 그리고 왜 그리스도의 재림이 필요한지 그 이유를 풀지 못하므로 선뜻 믿지 못한다"고 당시 천주교 신부들에게 자기가 기독교에 귀의할 수 없는 이유를 밝혔다고 전해져 온다.


당시 "예수회[Jesuit]" 신부들은 그 대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타난 대로의 중요 사실에 대한 설명을 못하고 있으니 그로서도 의아해할 일이 아닌가. 모르는 구석이 있는데도 어찌하여 믿고 있는가. 대답도 못하면서 어째서 믿으라고 하는가 등등 그로서는 풀 수 없는 기괴한 수수께끼였던 것이다. 그런 반면 우리로서는 이것 자체가 성경의 진실성 곧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입증하는 증거 중의 하나라 판단하는 것이다.


이 정도로 알 수 없는 것을 성경에, 그것도 이렇게 총명한 아크바르가 지적해낼 정도로 [성경의] 두드러진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 바로 인위적인 요소는 일절 개입함이 없이 오직 진실과 사실 그대로이기 때문에 가감없이 기록되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면 당시의 천주교 신부들이 대답 못할 정도로 그 이치가 그렇게 어려웠던가 하면 그것이 아니다. 성령의 계시로 모든 진리는 알아지는데 성령께 의뢰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유일한 이유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아주 상식적이고 양식 있는 따라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절 가식 없고 꾸밈 없는 그대로를 보이는 것이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으로서 부활하신 유일하신 사람이시다. 죽었던 사람으로서 다시 살아났으니 반드시 그 살아나심을 세상에 나타내 보여야 당연 사리다. 그렇지 않고 승천했다고 하고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셨다고만 하고 그래서 종적을 감추듯이 하면 "이 세상에 한 때 살고 있었다가 죽었는데도 유일하게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혀 의미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그 다시 살아나신 대로 [당시의 사람들은 이미 모두 죽었을지라도] 그렇게 다시 살아났다는 기록을 남기고 주장을 하고 있는 성경이므로, 그렇게 장담하고 있는 성경 앞에서 세상은 과연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입을 막으신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성경이 그렇게 약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세상이니 최소한 이 세상 앞에서는 그 다시 살아난 증거를 보이심이 필연이고 책무가 되어 있다.


바로 이 책무를 다하시는[왜냐면 부활하셨으므로] 차원에서도 세상에 다시 오시게 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만큼 한 치 의혹도 없이 정직하고 철저히 진실하기만 하다. 원리원칙주의로 일관하시는 하나님의 면모를 우리는 여기 이 점에서도 재차 확인하게 된다. 다시 살아나셨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늘에 계시는 것이야 이미 성경에 기록하기를 우리와 같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음을 밝혀놓고 있는 터이다.


그래서 구름을 타고 두둥실 허공 속으로 올라가신 것이 아닌가. 신령한 몸이기 때문이다. 죽으시기 전에 이미 친히 말씀하시기를,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人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볼 것이라"[눅 21:27] 하신 것이다. 자기를 잡아놓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자 하는 대 제사장과 그 일당 앞에서도,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다"[마 26:64] 하셨다.


이 때의 오심은 심판을 목적으로 오시는 것이 아님에 유의할 것이다. 아크바르가 질문한 것도 마지막 심판 때 그리스도께서 친히 재판장으로 앉으신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이 다시 세상에 오신다 함을 이상히 여기고 이유를 알고자 한 것이다. 이 때 즉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 함께 그렇게 나타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의 고난을 당한 [죽음이 아니더라도 죽음에 준하는 고난을 받은 경우-살전 4:17] 사람들이다.


그들만이 부활 차원에서 영광 중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모습 그대로 나타나게 되므로 이것을 "첫째 부활"이라 한다. 당연히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은 최후의 심판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믿는 사람이라고 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영광스러운 부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이 때 부활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세상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 때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사람은 그 영예에 상당하게 함께 고난 받은 사람에 한한다[롬 8:17].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는 둘째 이유다. 즉 천년 동안 세상을 다스리시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다. 그냥 부활하셨다는 증거로서만 나타나시기에는 너무 무의미하다. 다시 세상에 오실 때는 적 그리스도가 세상에 나타나 세상을 노도처럼 또는 태풍처럼 휩쓸어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거의 모든 인생들이 그의 편이 되어 있을 것이므로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되어[살후 2:12] 멸절하게 되어 있는 상태다.


천년이라 하더라도 아담 이후 인류가 거의 천년 가까이 살았음을 감안한다면 바로 그 시대로 역류하는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아담의 범죄로 이런 모양새가 되어 있는 세상이 범죄하기 전 아담의 원래 상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형국을 밟는 회복, 복귀, 환원의 과정을 보임이라 할까. 그냥 인생들에게 영생 아니면 영원한 형벌을 주시는 차원으로만 그치지 않고 인류의 오늘날 참상과 비극이 과연 어떤 이유로 저질러졌는지 그 최초 원인으로 밟아 올라가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니 과연 원리원칙주의로 빈 틈 없이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다시 한번 대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에는 백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일 것이기에 그렇다[사 65:20].


"일반적으로 믿는 사람은 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同參)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어떤 사람은 천년 기간 중 살아 다스리는 영예를 누리고 어떤 이들은 그렇게 되지 못하는 그런 구별이 있는가" 한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두 강도 중 현장에서 회개한 사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하면 그 답이 나오게 된다.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갔다는 것은 신령한 몸으로 이미 변환된 것을 말함이다.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 있는데 다시 마지막 심판 때 심판 받고자 재판장이신 그리스도 앞에 나타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 나머지 사람들이 마지막 심판 때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는 같은 열매를 맺어도 30, 60, 100배 결실의 차이가 나는 것과 같다. 또는 요한과 야고보 형제가 주님의 좌우편에 앉기를 희망했을 때 그 자리는 아버지 친히 정하시는 것이라 말씀하신 바와 같다. 그러므로 모든 구원 얻는 사람이 균등하지는 않고 차이는 있다. 그런 차이가 그렇게 나타나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 십자가상에서 회개하고 낙원에 들어간 그 강도는 실제 이 세상에 살아 그 충성심을 세상 앞에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미리 보실 때 그는 그만큼 바울처럼 수고할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런 능력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영역이니 다시 말해 같은 사람일지라도 어떤 물건을 만든 제조자가 그 물건을 미리 알고 제작해낸 그 미리 아는 지식에는 제작자가 아닌 이들은 참예할 수가 없는 것과 같다.


말의 요점은, 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골 1:24] 것은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의 의지에 관한 일로서 순종 차원이기에 그러하다. 우리는 인간을 지은 창조자가 아니기 때문에 각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나 하나님은 다르시다. 미리 아시는 능력이 계심을 우리는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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