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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영사운이란? (2) 등록일 2016.02.16 21:44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51


우리는 아직 단 한번도 범죄하기 전의 아담과 같은 그런 상태에 있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담 부부 홀로 그런 산 자로 있다가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들에게도 아담과 같은 그런 공평한 기회를 베풀어 주심이다. 다시 말해 현재 우리가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아담의 선택의 결과인즉 아담 때문에 우리도 덩달아 죽음에 처해져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격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아담처럼 자유 선택의 기회를 베푸시어 우리 스스로 [아담처럼] 죽음이든 생명이든 선택하게 하심이다. 아담은 죽음을 선택하여 이런 비극적 결과를 낳았으니 우리는 당연히 이를 거울로 삼아 그런 어리석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순수하게 우리 자신의 자유 선택에 달린 문제다. 아담처럼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게 되면 아담처럼 꼭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담의 죽음으로 입증되어 있지 않은가.


아담처럼 나 스스로의 선택으로 범죄하여 죽을 때는 다시는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낙착되는 것이 아니고 그 때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영원한 멸망이다. 그래서 모든 악인은 악령들[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과 함께 영원한 형벌의 처소에 유폐된다. 악인과 악령과는 능력 차이지 피조물이기는 똑같다. 실상을 말하면 아담은 그런 영물들 위에 군림해 있었는데 범죄함으로써 죽은 자가 되어 이렇게 상대적으로[악령은 영계에 속하고 우리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남음으로써] 현재 약한 자가 된 것뿐이다.


우리가 이렇게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어 아담의 범죄하기 전 위치로 공정공평하게 자리잡게 되었으므로 아담이 자기 자유 선택에 의해 범죄함으로써 죽은 자가 된 것처럼, 우리도 범죄함으로써 죽은 자가 될 수 있는 것이요 그렇게 되면 아담처럼 똑같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그 죽음이 영원 멸망이라는 그 차이다. 아담은 먼저 범죄했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따랐으므로 오늘날 이 인간 세상이 인간이 주재하고 지배하는 인간 세상이 아니라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하에 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나라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거룩한 천사들처럼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아담은 그런 거룩한 천사들처럼 지금까지 영광 중에 신령한 몸으로 천사들 위에 군림하여 악령들을 넉넉히 제압하여 그들을 영원한 형벌에 처하는 위치에 남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심판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하나님의 대리자 격인 자신부터 범죄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굴복[우리로 말하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절하는" 것이 되어-눅 4:7]하고 그 아래에 들어 죽은 자가 되었으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을 그렇게 처단할 말하자면 적임자가 사라진 것이다.


이런 사정을 알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인간을 꾀었고 그 계략이 적중한 것이다. 그래서 악령들은 지금까지 오히려 인간 위에 군림하여 이 세상 인생들을 지배하기에 이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심으로써 마지막 아담이 되어 주시지 않고는 안되는 상황이 되어 있음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짐작 못할 리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법과 질서와 원칙을 따라 처리하시는 것이다. 이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잘 알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의 계획이 성공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이니,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말기에 가서도 인생들을 선동하게 된다고 요한 계시록이 명시해두고 있는 것도 그 증거다.


그러나 일단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자기의 욕심이 결코 성사될 수 없었다는 것을 그 스스로 인정하게 될 것이나 만사휴의(萬事休矣, 더 손쓸 수단도 없고 모든 것이 끝장 났고 모든 일이 전혀 가망 없음을 말함)다. 원리원칙에 충실하시고 법과 원칙과 질서를 중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영물들이라고 직접 처단하시는 그런 일은 않으신다. 처음부터 만물을 다스리도록 정하신 인간[아담]의 권한 아래 두신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일사부재리다.


이제 그리스도 친히 마지막 아담이 되셨으니 그래서 "인자(人子) 되심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요 5:27] 하신 것이다. 물론 최후의 단 한 사람이라도 다 구원되는 그 때까지의 시한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세상의 지배자다. 그 마지막 사람이 구원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접으실[종료]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나라를 접으신다는 것이요 천년간 그리스도의 통치가 시작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하나님은 구원 받을 사람을 미리 아시고 미리 택하시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을 멸종시키기 전에는 구원 받을 사람이 계속 나올 수 있으므로 언제 이 세상을 접으시겠는가.


§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것은 아담의 범죄하기 전 상태의 바로 그 위치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요 이로써 우리 스스로 거룩한 천사들처럼 처신하게 되면 거룩한 천사들처럼 될 것이요 아담처럼 스스로 범죄하면 아담처럼 될 것이니 악령들처럼 되어 영원 멸망이 그 종착지일 것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일은 끝나는 것이다. 아담은 신령한 몸을 입음으로써 그 창조가 끝났으니 범죄의 경우 그 신령한 세계에서 추방당하는 것이었으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영 곧 아버지와 함께 하나로 계시는 성령을 받음으로써 새 창조가 끝났으니 우리의 경우 범죄하면 그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으로 낙착되는 그런 차이일 뿐이다.


아담이 신령한 세계[에덴낙원]에 들어감으로써 그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환된 것처럼, 나는 몸의 구속을 받는 것으로써 신령한 세계 곧 천국[새 하늘과 새 땅의 세계]에 들어가는 그런 차이다. 아담은 따라서 그 신령한 세계에서 그 순종 여부가 저울질된 셈이라 그 스스로의 범죄로 죽었지만[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아 왔지만], 우리는 자연계에 속한 이 세상에서 우리의 순종 여부가 저울질되는 것이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그런 차이다.


왜냐면 아담은 그 신령한 세계에서 신령한 몸이 됨으로써 그 창조가 종료되었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성령을 영원하신 선물로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의 새 창조가 종료되었으므로 그 창조가 완료된 현장[이 세상 곧 자연계]에서 곧장 그 순종 여부가 가려지게 되어 있음이다. 악령들이 에덴낙원에서 그 색깔을 스스로 나타내어 거룩한 천사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그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 것과 같이 우리도 같은 과정을 밟게 됨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몸의 구속(救贖)"[롬 8:23]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우리에게는 이 몸의 구속이 또한 "구원"이 된다. 왜냐면 내가 범죄하면 다시 말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게"[빌 3:18] 되면 "멸망"[:19]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않도록 "더욱 힘써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과 굳게 하는"[벧후 1:10] 것이 우리 스스로 우리 구원["몸의 구속"]을 이룸이다[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구원을 이룸이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이를 가리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딤후 4:7] 한 것이다.


자기 스스로 할 소임을 다 마쳤다는 의미이다. "죽어보아야 내가 과연 천국에 들어갈지 말지 알 수 있다"는 소리는 통하지 않는다.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님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역시 그러하다"[딤후 4:7,8] 함과 같다.


믿음을 지키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원수로 행함"[빌 3:18]이요 멸망이다. 그리고 이 "믿음 지킴"의 속성을 가리켜 "달려갈 길 마치고"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았으니[요 20:21] 마땅히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하는 것이요[4:34]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접전에서 이겨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구원을 이룸을 가리켜 계시록은 "이기는 자"[계 2:7,11,17,26/3:5,12,21/21:7]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것을 마치 이상과 같은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영생에 곧장 들어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니 마땅히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룰"[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일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세례와 성례


다음에는 세례와 성례[성찬예식(聖餐禮式)]에 관한 것인데 이 두 의식은 필수로 지키게 되어 있다. 이것은 종교의식이 아니라 특정 사실을 확정하고 또 끊임없이 피차간 상기시켜 주는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세례는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함께 장사 지낸바 된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사실을 강조함이니 그리스도 친히 세례 받으신 것이 이 때문이다. 세례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나를 위해 죽으신 죽으심에 내가 하나가 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믿음의 구체적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하는 사람은 누구나 세례를 받게 되어 있다. 성례도 같은 의미이나 더 적극적인 뜻이 있으니 즉 우리가 산다는 것 자체가 전적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리스도를 위함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성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라 할까.


죽음은 한번 죽은 것이요 그래서 세례를 한번 받은 것으로 종료되나, 사는 것은 계속 사는 것이므로 모일 때마다 성례를 행하는 것이다. 즉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그 몸 그리고 흘리신 피 즉 그 상하신 육신이 우리 생명을 형성하고 있어 이 사실을 항상 스스로에게 그리고 피차간에 상기시키고 온 세상에 알리며, 또한 한 몸, 한 피에 모두가 참여하니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동시에 상기시킴이다. 그래서 이를 기념하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 죽으심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명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일반적인 일상생활에 비추어 특이하다는 것은 이 둘밖에 없다. 물론 함께 모이는 일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모여 교제하는 것이야 세상 사람도 이해관계가 얽힌 이들은 함께 모이는 것이므로 특이점이라고 할 것은 없다. 초대 교회 시초에는 매일처럼 모였는데 지금이라고 그렇지 하지 말라는 이유도 없다. 필요해서 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함께 교회로서 모여 지속적으로 특별히 행하는 것은 성찬식뿐이다. 세례는 믿을 때 받았기 때문이다.


세례를 세죄예식(洗罪禮式, 죄를 씻는 예식이라는 뜻-행 22:16)으로 뜻 풀이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똑같은 성경의 내용을 두고 용어부터 틀리게 될 때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민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세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 지내지심을 나의 죽음과 무덤에 묻힘으로서 수용하여 나의 죽음과 장사 지냄을 기정사실화하는데 있으므로 그래서 그리스도 친히 이 뜻을 위해 친히 세례를 받으신 까닭에,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신 것처럼 받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물 속에 들어가신 것이다. 때문에 "물에서 올라 오실 때"[마 3:16] 성령을 받으셨다 한 것이다. 이 때의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신 것이다. 우리가 세례 받은 후 받아 모시게 되는 성령의 선물은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시는 모습이신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아들께서 하나되신 '우리'[요 14:23]로서 내 안에 임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를 그런 방식으로 받는 것이라고 확정해두는 것 외에 달리 논의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굳이 그것을 "침례"라는 별다른 용어를 쓰기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근래 하나님을 난데없이 여성이라 주장하여 "어머니"라고 하는 신종 이단이 생겨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 하여 열심히 지키고 있는데, 신약 성경 어디에 절기를 지키라고 했던가. 성탄절을 지키며 유월절을 지키라고 했던가. 이런 것은 모두 종교화의 넋두리일 뿐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종교 의식이나 행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창조하신 대로 충실히 성실하게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 있다. 우리를 새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에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실한 생활의 핵심은 자기 부인에 있으니, 즉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다"[롬 14:7-9] 함과 같다.


모세 시대 당시 안식일을 지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6일간 창조하신 후 7일째에는 그 작업을 마치고 쉬셨음을 기념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유월절의 의미를 동시에 포함시킨 것이었다[신 5:15]. 이 유월절의 의미가 포함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처음 창조가 인간 범죄로 인하여 무의미하게 되었으므로 부득불 새 창조를 시작하시게 되어 하나님께서 아직도 일하고 계심을 알리는 것이고 그리고 그 새 창조를 끝내고 안식하시는 때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 우리 모두가 함께 위치해 있음을 주지시킴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의 안식일은 영원히 기념해서 마땅한 것이다. 천국에서도 이를 기념할 만한 것이고 이유는 그와 같이 명백한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킨다고 해서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그림자 역할에 불과했던 모세 율법을 따라 명령했던 방식대로 지키는 것은 아님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모세 율법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고 나 자신의 것이 없으며 따라서 내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 되어 있는 위치에서 하나님만을 위해 사는 것이 정상이고 온전한 삶이라는 사실을 그리스도 오시기 전 사전(事前)에 교육하는 차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하나님 소유의 개념을 구체화하여 인식시킴으로써,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우리의 전부 즉 십일조만 아니라 100프로가 그리스도의 것이요 7일 중 안식일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1년 365일 전체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수용하도록 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던 것이 모세 율법 시대의 안식일 지키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주중(週中) 7일째인 토요일만 아니라 1주 7일 전부가 하나님의 것임이 드러난 것이다.


원래부터 그러하였으나 인간[아담]의 범죄로 죽은 자가 되면서 자연계에 속한 동물적 근성인 본능에 좌우되어 사는 삶이 됨으로써 무조건 내 것은 내 것이고 내 스스로 알아서 적당히 살아가 종족 보전의 역할만 유지하면 최고 선이라는 색다른 환경에 완전히 물이 들어 인간이 자기 중심이 되어 버린 탓에 이런 미망(迷妄)을 깨우칠 필요성에서 7일 중 단 하루라도 그와 같이 하나님의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7일 중 하루만 특별히 정하여 거룩한 날 즉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소유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니[롬 14:5]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므로 우리에게는 모든 날이 거룩하고 나 자신이 거룩하고 나의 가진 소유 전부가 거룩하고 나의 삶이 거룩하니 곧 하나님의 것이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 대신 그리스도의 것이 곧 나의 것이 되어 있는 까닭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어 있지 않은가.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여 갑은 을의 것, 을은 갑의 것이 되어 있는 둘이 하나됨의 이치 그대로다.


"거룩하다"는 말의 의미는 이와 같이 둘이 하나됨의 사랑의 원리 그대로 나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다. 그러니 삶도 거룩하고 나 자신도 거룩함이다. 자기 중심으로 살면서도 그런 거룩함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아니니,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고 명령하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너희를 위하시니 너희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고 너희 자신을 위해 살지 말라는 뜻으로서의 하나님의 계명이요 율법인 것이다[고후 5:15].


성경에서 왜 우리가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고 엄명하고 있는지 그 이유가 여기서도 드러난다. 자기 부인은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갈2:20],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한"[빌 1:21] 것을 말함이니, 아기가 엄마 품속에 있으면 엄마밖에 의식하는 것이 없고, 연인들이 함께 있으면 항상 서로를 의식하여 상대의 뜻대로 이루어 주려는 마음으로 충일(充溢)해짐으로써 삶의 행복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순류(順流)요 순리다. 억지가 아님을 명심할 일이다.


교회


한 믿음으로 한 하나님, 한 주님을 모시는데다가 성례가 가리키듯 모두가 한 머리를 중심한 한 몸의 각 지체들로서 생활하니 함께 죽고 살고 웃고 우는 것이므로 함께 모이는 것은 사회성을 띤 인간으로서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모여서 성령의 선물[이는 지체로서의 역할을 가리킴이다]을 따라 각자가 받은바 능력과 재질로써 서로 봉사하고 섬기는 중에 무엇보다 합심해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모일 때에 위에 말한 성례를 행하는 것이다. 모일 때마다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성령으로 함께 계시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모이게 되면 어느 모임에서나 마찬가지로 [종교 활동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어떤 목적을 위해 단체가 구성되어 있을 때] 그 목적이 있으니, 앞에서 언급한 대로 피차간 사랑의 교제와 각 사람의 믿음생활의 발전 향상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명하신바 사람 구원해내는 일의 효과적인 수행을 위함이니 합심 기도가 그 중 하나다. 초대교회가 그렇게 모여 기도에 전혀 힘썼다 한 그대로다.


이런 모임에서 이런 삶의 가장 본이 되는 사람[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그 기준일 뿐 사회적 신분이나 재산의 유무는 여기서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이 그 모임의 대표가 되어 목자[牧者-양들을 치는 것이 하나님의 양떼를 먹임과 같다는 뜻에서-요 21:17/행 20:28,29] 역할을 하고[성경에서는 “장로”, “감독” 등의 명칭도 사용한다], 또 구성원의 경제적 사정을 살피는 사람이 있어 "집사"라는 이름으로 그 일을 담당하게 된다.


초대 교회는 이렇게 기도하는 일,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널리 알리는 일과 함께 내부적으로 경제적인 곤란에 처한 이들 구제하는 일을 병행하였다. 이상은 직제가 아니라 상호간 봉사를 위한 역할 담당일 뿐으로 급료 같은 것은 주고 받을 이유가 없다. 목자도 마찬가지다. 모이는 장소는 일반 가정 집이든 건물이든 구별을 둘 필요가 없다. 필요한 숫자가 모일 수만 있으면 충분한 것이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기준을 핍박 받는 교회에다 두고 논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북한의 지하교회와 같은 것이다. 앞에서 "21바울 형제"라 하여 충분한 설명을 하였으므로 재차 논의는 가급적 피하겠으나, 앞으로 적 그리스도가 나타날 일에 대비하여 가장 상식적이고 양식 있는 판단으로 오직 성경을 기준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행할 일이다. "성령과 우리는"[행 15:28]이라는 말로써 운을 떼던 초대교회를 마땅히 본받을 일이다.


"집사"의 직분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하고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집사의 역할이 필요하게 된 것이 당시 믿는 이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공동으로 사용했고"[행 2:44],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기"[4:32]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비극적 사건도 이 때문에 생긴 비극적 결과였다[5:1]. 그러니 이 일이 당시의 일시적 기분[感興]이나 아니면 그와 비슷한 것에 휩쓸려서가 아니라, 바울이 그 편지에서 그런 집사[딤전 3:8] 직에 대해 장로와 감독[딤전 3:1/딛 1:6,7] 직과 똑같이 강조한 것으로 보아 계속 그렇게 서로 "통용(通用)하는" 것을 일상화하였고 그것이 바로 초대 교회 특성 중 하나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집사 직을 오늘도 시행 유지하려면 당연히 그와 같은 공동체 의식에서 오는 생활의 공동화(共同化) 또는 공유화(共有化)가 이루어져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오늘의 실상이다. 그래서 당시 초대 교회는 "그 중에 궁핍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므로 저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었다"[행 4:34,35].


이들은 그렇게 해서 공산주의 식으로 이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리자는 뜻이 아니라, 오직 사람 구원하는 일에 함께 종사하는 자들로서의 최소한의 생활 요건을 갖추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오직 이 세상은 사는 곳이 아니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때와 장소로서 오직 일하기 위한[삶의 낙이 목적이 아닌] 최소한의 것만 지니어, 먹을 것이 있으니 족하고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며 현재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그런 청빈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딤전 6:8/히 13:5/고전 7:31/엡 4:28/고전 8:13].   


당시 바나바도 밭이 있어 팔아 그 판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했다[행 4:37]. 밭이 있는 사람이 집은 왜 없었겠는가. 그러므로 '여분의' 집이나 밭이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 자기의 소유를 자기 개인의 것이라고 이제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니, 주님의 것이므로 머리되시는 주님의 지시를 따라 언제든지 얼마든지 한 몸의 같은 지체된 이웃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공유 의식으로 변환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딤전 6:17-19] 하였다. 모든 재물을 즉각 처분하라고는 하지 않은 것이다.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눅 18:22] 하심도 같은 의미다. 재물을 가지고 때에 따라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든 아니면 즉각 처분해서 가난한 자에게 흩어 주든,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 필요한 자에게 오직 나누어 주기 위해 잠시 맡은 것뿐이라고 인식하는 점에서는 같다.


즉 영원히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며[고후 5:15] 이 세상에서 또한 자기 생명을 사랑하여 살고자 즉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지 않는다는[요 12:25] 점에서 일치함이다. 때문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눅 14:26,27] 하신 것이다.


생명의 영원한 법칙으로 말하면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다. 받아도 풍성하게 감당도 못할 정도로 받는다[눅 6:38]. 그러나 이 세상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고 때도 아니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는 시험하는 자가 있어 시험하는 무대이며 또한 일하는 장소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 마당에 불과하므로, 그렇게 자기를 부인함에서 오는 당연한 불이익과 수반되는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 때문에 "너희 중에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고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1만으로서 저 2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미리 헤아리듯이 하라"고 하신 것이다[눅 14:29-32].


이 세상 인간 생존의 의의는 오직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의 희소식을 믿어, '죽은 자'가 되어 있는 현실로부터 '산 자'가 되는 데에 있을 뿐이다. '산 자'가 된 다음에는 다른 이들에게 역시 이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행 17:30] 전달하여 그들 역시 회개함으로써 '산 자'들이 되게 하는 것밖에 없다. 이 외에는 이 세상은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홀로 지내는 것이 복이 있다 했고[고전 7:1-40] 그리스도께서도 천국을 위해 고자가 되는 자도 있으니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 하신 것이다.


오직 우리 각자가 영원히 처해 있게 될 양면성의 세계 가운데 '죽음' 아니면 '생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전생(前生)으로서의 의미뿐인 것이 이 세상이다. 즉 장차 나타날 영원무궁한 '결과'에 대한 단지 일시점(一時點)에 불과한 엄정하고도 엄숙한 '원인' 위에 우리 각자는 놓여 있음이다. 엄연한 대칭 원리로서의 삼위일체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보는 것이니 그래서 "두렵고 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것이다.


사물의 가닥을 제대로 잡아가게 하는 것은 이런 법칙과 원리의 효용성(效用性)으로서의 마력(魔力)이다. 아무리 혼돈과 혼탁의 안개 속을 헤쳐 나가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일로(一路) 전진(前進)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이 원리 또는 법칙이라는 길잡이인 것이다. 왜냐면 의당히 그렇게 되어 있다는 진실을 알고 나면 그 어떤 고난도 견디기 쉬운 것이니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감이 생기게 된다. 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혼탁이라도 무작정 밀고 나가는 힘이 이 원리원칙에 대한 확신이다.


§  이유 없는 결과라는 것은 없다. 현재 우리가 접하고 대하는 모든 것은 결과라고 볼 때 반드시 이런 결과에는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저절로 생겨났다는 것은 이유 없는 결과만을 말하는 것으로서 아주 비과학적인 사고(思考) 방식이다. 그런 것을 망상이라 하고 그런 것을 무작정 믿을 때 미신이라 한다. 삼위일체의 법칙은 바로 이런 인과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3운 법칙은 이 원리를 증명하고 있다.


각 사람이 한 분 그리스도를 자기 안에 성령으로 모시고 있지만 그 받은 바 역할을 위한 은사[gift]가 달라 한 몸일지라도 여러 지체가 있어 그 구실이 다른 것처럼 각기 다르게 주심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불가결한 존재가 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각자 맡은 바 믿음의 분량대로 그렇게 모여 이룬 교회에서 각자는 서로를 섬길 수 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과 같이 하지 말고 그 날이 가까우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자고 했다[히 10:25].


어디까지나 필요성에 의해서다. 필요에 의해서 당시 매일 모인 것이다. 매일 모이라는 무슨 명령을 내림으로써 종교의식화하지 않았다.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소위 "안식일"[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모세 율법의 논조처럼] 개념과 같은 것으로 접근하지도 않았다.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모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너희는 마땅히 매일 모일 것이라는 명령도 주신 일이 없다.


필요에 따른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매일 모일 필요성이 있기에 매일 모인 것뿐이다. 당시가 그러했다면 오늘날은 더욱 그러하다. 이렇게 모이는 장소를 따로 정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극심한 핍박 와중에 출발한 초대교회의 본을 따르고 뿐만 아니라 세상이 당시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곧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王, 임금-요 14:30]의 조종 아래 있어 때문에 얼마든지 언제든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필요하다 싶으면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여 환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좋은 예가 북한에서의 '움집에서 모이는 교회'다. 전 세계적인 핍박은 이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 박두함에 따라 더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되어 있으므로 이 점에 더욱 착안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회개운동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리고 하나님의 새 창조로 이루어진 새 피조물로서의 생활을 하는 것을 "회개 운동['바/영/사/회']"이라 명명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심판할 날이 정해지고 [심판이 비로소 가능해지고] 하나님의 새 창조로 분명히 구원될 수 있는 길을 만천하에 개방하신 이상 이제부터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고 명령하시기 때문이다[행 17:30].


회개에 합당한 삶["복음에 합당한" 또는 "부르심에 합당한"-빌 1:27/살후 1:11]을 스스로 살뿐더러 이웃에게도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제사장이 기도와 더불어 전달함이 우리가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이기 때문이다[요 20:21/요 4:34]. '바/영/사/회'의 기치(旗幟)로 들어오라는 소리는 절대로 아니니, 바울이 교회에서 일관되게 가르친 바와 같이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그 위치에서[고전 7:24] 회개운동을 벌이는 것을 적극 권장하는 것이다.


'바/영/사/회'와 관계가 있다고 내색할 필요도 없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뿐이지 우리 자신이나 무슨 단체나 조직을 선전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로 모이라는 것일 따름이다. 단지 이런 운동에서 일종의 구심점을 만들 필요가 있어 '바/영/사/회'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타내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남기를 원하는 것이다.


종교 형태로서의 그릇된 복음 이해 가운데 하나는, 불신자가 보기에도 민망한 의롭지 못한 삶을 살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구원 얻는다는 바로 그 '은혜'와 '믿음'의 비뚠 인식에 있다. 회개는 이전 생활의 180도 회전, 전향이다. 동으로 가던 사람이면 당연히 서쪽으로 방향 전환을 하는 것인데 여전히 구태의연하게 동쪽으로 가는 삶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구원을 자신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다.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이 없이는 즉 바르게 삶이 없이는 영생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회개운동의 골자다. 바르게 살아야 사람답게 살아야 영원한 생명이 가능하다 즉 구원이 된다는 의미다. 이제는 천하 각 사람에게 회개하라 명령하셨기[행 17:30] 때문이니 이는 악을 버리라는 말씀이시다[행 3:26]. 악을 버리는 것이므로 그래서 회개운동이다. 주님 앞서 달려가 주님을 온 세상에 소개한 세례 요한도 “회개하라” 외쳤고 주님 친히 “회개하라” 명령하셨다.


이후 사도들도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온 세상에 전달한 것이다[17:30]. 그래서 회개운동이다. 하나님도 성경도 믿지 않다가 이제는 믿는 것이 회개가 아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착각하고 있다. 회개는 말 그대로 그리고 성경이 강조하는 대로 "악함을 버림"[행 3:26]이다. 겉으로만 믿노라고 자처하는 사람도 회개할 것이요 믿음에 아직 들어서지 못한 사람도 회개하여 복음[(福音), 복된 좋은 소식]을 믿어야 할 것이다. 바르게 살아야 구원된다는 것은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여 바르게 살 수 있고 그래서 영생에 이를 수 있다는 뜻임을 다시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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