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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영사운이란 ? (3) 등록일 2016.02.16 21:44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28

바/영/사/회-"[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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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으로서의 "거룩한" 삶

이것을 성경은 "이제는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게 되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함으로써 명시하고 있다. 구원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①구원을 받는 측면과 ②구원을 스스로 이루는 측면의 양면성으로 되어 있음이다. ①의 경우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새 창조에 속하기 때문이다. ②의 경우 우리를 창조하시되 완전한 자주 독립성을 갖춘 자유 의지를 구사하는 존재로 창조하신 까닭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은혜로 값없이, 믿기만 하면 되는, 거저 얻는 구원"은 ①에 속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경고는 ②에 해당된다. 따라서 명백한 것은 ①이 있기 때문에 ②가 있는 것이요, ②를 전제하기 때문에 ①이 있음이다. 믿을 때 회개하는 것은 후자에 속한다. 그리고 성경이 거의 모든 경고로 충만해 있는 사실은 ②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이는 필연적이다.

당연히 ①과 ②는 불가분이다. ① 없는 ②가 있을 수 없고 ②없는 ①이 있을 수 없다. 아담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창조된 것은 당연히 ①에 해당되고 그들이 범죄하여 하나는 영원 멸망의 운명에, 다른 하나는 죽음에 처해진 것은 ②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위의 과정대로 설명한다면, 애초 ①의 위치에 있었으나[아담] ②의 비극적 결말에 있게 되어[아담의 범죄] 이제 다시 ①의 상태로 복귀, 회귀(回歸), 회복된 것을 말함이다.

이렇게 회복될 때 ②를 충분히 인식하고서 된 일이다. 이를 가리켜 “회개”라고 하는 사실을 앞에서도 밝혔지만 ②가 없이 일방적으로 ①만 알고 있었다면 그 구원을 참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위험에 완전히 그대로 노출되어 있음에도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헤매는"[벧전 5:8]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인데 이를 간과할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성경대로 하면 이 경우 구원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단정함이 본인을 위해서도 유익한 설명이 된다.

기독교라는 종교에만 입문하여 그 교인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그리스도 구원의 복음을 바로 깨닫고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고집하여 자기의 선입견을 고수할 때 장래는 없다. 이 점은 아주 중요하니, 오늘날 이른바 "기독교 교회" 중에서 '복음'과 '종교'를 가름하는데 중요 척도가 되어 있기도 하다. 구원 받아[다시 남 즉 새로 창조됨으로써] 하나님의 의인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나님의 창조[새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여 당당하고 의엿한 의인으로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데[마 7:21], 거룩한 삶을 살지 않아 여전히 자기를 위해 살[고후 5:15] 때에는 주님을 뵙지 못한다고 성경에 명시했기 때문이다[히 12:14].

영원한 생명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은” 다음의 결과다[롬 6:22]. 거룩함이 무엇이냐 하면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한 몸으로 사는 이치에서 자기부인 곧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음에 있다[고후 5:15]. 죄 짓지 않는 것, 의를 행하는 것,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는 것, 거룩하게 되는 것[벧전 1:16] 모두가 한 가지 뜻으로서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으로서 귀결되고 요약된다.

한 몸 구조에서 어느 누구든[머리를 포함해서] 자기를 위하면 그 조직은 전체적으로 와해되고 만다. 바로 그 이치다. 내가 나를 위하여 살지 않는 근거는 너무나 명백하다. 앞에서 그 대강을 말했거니와 바로 이 한 몸을 이루어 사는 생명의 체제에서 자기 부인만이 그 유일한 삶의 방법이기에 그러하니 이것이 그 첫째다①. ②둘째는 내 이름으로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심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말 그대로 하나되어 계시는데 바로 그 사실로써 내가 죽은 것이니 내가 죽었는데 무슨 또 나를 위해 산다는 말인가.

내가 죽었는데도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여전히 영위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나와 함께 죽으신 것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다. 바로 이 죽음[그리스도와 함께 한]에서, 자기 부인은 나의 일체 노력 없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죽어 버린 것이 자기 부인이지, 자기 부인이 따로 있지 않다. 그 이루어진 그대로 믿고 행동하는 것이 구원 얻는 믿음이다.

그리고 ③셋째는, 나를 위해 죽으심만 아니라 나를 위해 살아나시고 내 안에 계시니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내 영혼과 더불어 '나란 존재'의 영원한 구성체(構成體)로 모시고 있기에, 내가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된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만유의 주인이고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내 것으로 소유하고 있음이다. 만유를 그리스도와 함께 소유하고 있는데 또 무엇이 부족하여 나 자신을 위해 살아 내 욕심을 못채워 안달하리요.

이런 사실은 믿지 않으면서, 어찌 구원은 믿고 구원 얻는 자로 자처한단 말인가.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과 죽음이 무엇이 그리 대단한 것이기에 영원한 이 영광과 생명을 '세상'이라는 "팥죽 한 그릇"[히 12:16,17/창 25:31-33]으로 바꿀 만하다고 이 세상을 두려워하거나 또는 사랑하여 못잊어 하고 미련을 둔단 말인가.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은 바로 이 사실을 믿어 내가 현재 향유하여 누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④넷째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 친히 나와 하나 되어 계심으로써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는 위치에 영구히 자리잡아 계심이다. 나와 하나 되어 계심이 바로 그런 뜻이다. 즉 갑은 을을 보면서 을만을 위하고 을은 갑을 보는 것밖에 없으니 자연적으로 갑만을 위하게 되는 이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태를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 된' 축복으로서 누리고 있는 것이다. 나를 지으신 그리스도 이상으로 내가 나를 더 잘 위할 수 있다는 환상에 젖어 있다면 나는 그야말로 천하에 둘도 없이 가련한 자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세심하시고 자세하고 철저하고 정확하게 우리를 위하시는지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딩시의 화폐 단위]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치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마 10:29-30]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이를 두려워하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할 것이다"[:31-33,28] 하셨다.

⑤다섯째까지 말하라면 천국에 사는 모든 인생 그리고 이 세상에서도 그리스도의 이 같은 한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모든 선남선녀들이 모두 자기를 위하지 않고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자세로써 자기 이웃인 나를 위하는 만반 태세를 갖추고 있음이니, 나는 이 바람에 내 이웃의 숫자만큼이나 나 자신을 여분으로 더 가지게 되어 있는 확실한 의미가 되어 있음이다. 그들이 모두 나를 위하는 터에 내가 무엇이 아쉬워 나 자신을 위함으로써 그들의 나 위함을 차단하려 덤비는 어리석음을 범할 것인가! 내가 나를 위하게 되면 이 굉장한 의미의 한 몸 체제에서 나 스스로를 분리시킴이 되는 줄 누가 모르랴.      

자연계에 속한 현재의 우리 육체

자연법칙에 의하면 인생은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자연법칙으로 여자의 모태를 통하여 세상에 오심으로 인해 영원히 사람이실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인간은 이 동일한 자연법칙에 의해 자기 스스로를 일정한 노력이나 정신적 수련에 의해 자기 스스로를 초자연적 존재 즉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자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과학적인 결론이다. 자연법칙에 반하고 어긋나는 것은 무조건 현실일 수가 없고 그것은 한낱 망상이고 따라서 미신이다.

이 때문에 새 창조의 절대적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법칙에 구애 받지 않고 속박당할 필요가 없는 초자연적인 존재께서 자연법칙에 구속당하는 내 안에 계심으로 인하여 내 자신이 자연법칙을 초월하고 더 이상 그에 구애 당하지 않도록 만드시는 합리적인 이치가 우리 구원이다. 그래서 부활이 가능하고 영생이 현실화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리다. 한 때가 그렇게 계시다가 훌쩍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그렇게 내 안에 계시어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고 계심이다.

말하자면 여기에 기계가 있다면 그 기계가 돌아갈 수 있는 원동력으로 그 기계 즉 내 안에 내장(內藏)되어 계심이다. 그래서 영원히 나와 함께 계시고 함께 사심이다[살전 5:10]. 성령을 영원하신 선물로 주셨다는 말씀이 바로 그 뜻이다. 나를 구성하고 계시는 인자(因子)로 내 안에 영원히 계심이 바로 그 의미다. 이것이 '둘의 하나됨'의 이치만 아니라 새 피조물로서 다시 출생해 있는 나의 구조 자체이다.

세상 종교는 이런 이치를 말하지 못한다.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은, 말은 말이지만 궤변이라고 하여 아예 무시해 버리고 젖혀 두는 법이다. 엄밀히 과학적 사실에 의해 설명을 해야 설명이 되는 것이다. 이 썩어질 육체가 막연히 탈바꿈하여 썩지 않는 육체가 된다고 하는 것은 말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허공에 떠도는 메아리에 불과할 뿐 망상에 불과하므로 고집하여 믿으면 미신이 된다.

성경은 당연히 과학적 선언을 한다. 즉 “혈(血)과 육(肉)[다시 말해 육체]은 하나님 나라[영생의 세계]를 상속 받지 못한다" 한 것이다[고전 15:50]. 다시 말해 영생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학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모든 과학적 법칙이 모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창조, 바로 이것이 과학[자연법칙을 연구하는]의 시발점이므로 우리를 새로 창조하셨다 할 때는 현존의 모든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것이고 새로운 과학적 사실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하나님의 새 창조로써 우리가 신령(神靈, spiritual, celestial-고전 15:44)한 몸을 입고 영원히 썩지 않는 몸을 입는다는데 누가 무엇이라 할 것인가. "과학적"이라는 말이 무슨 대수가 아니라 다만 우리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현재의 우리와 같은 이런 모양으로는 만드시지 않았다. 죽지 않고 영생하는 영적인 존재 다시 말해 신(神)으로 만드셨다. 여기서 말하는 '신'은 '육체'에 대한 대칭적인 의미이니 영 또는 영적 존재라는 뜨이니 오해할 것은 없다. 영물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성경은 신이라고 하지 않는가. 영생하는 것은 '신'이요 한시적인 생명은 '육체'다. 신령한 몸으로서 자유자재한 능력을 구사하는 것이 '신'이요 그렇지 못하고 이런 썩어지게 되는 물질 즉 육(肉)으로 된 것이 '육체'다.

인간의 원수 마왕(魔王)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그래서 “이 세상 신”[“the god of this world”-고후 4:4]이라 한다. 영물(靈物)이기 때문에 신이라 하는 것이다. 천사들도 신들이다. 천사들을 성경은 “영(靈)”[히 1:14]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영’이나 ‘신’이나 같은 말이다. 인간은 창조의 양상이 약간 다르다. 처음부터 영으로서 지으신 것이 아니라 먼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지으신 다음 영혼을 조성하신 것이다. 그래서 영혼은 영원하므로 이 영원성에 부합하게 신령한 세계로서의 에덴낙원을 창설하시고 거기서 나는 신령한 나무 열매를 먹게 하심으로써 신령한 몸이 되었다.

바로 이런 신령한 육체가 되어 있는 즉 이제는 명실상부하게 ‘영’이요 ‘신’이 되어 있는 인간[아담]과 교제할 수 있도록 인간을 위해 창조하신 것이 이들 영물들이다[창 2:19]. 이 에덴낙원의 동물들이 영물인데, 그 곳의 식물만 해도 선악과(果) 나무와 대칭[상칭, 대립]되는 생명과 나무가 있어 이 열매를 먹으면 사람이 영생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만 보아도 에덴낙원이 어떤 데인지 알 수 있다.

그런 곳에서 나는 식물의 열매를 먹는데 어찌 신령한 몸이 되지 못하랴. 영생하게 하는 능력까지도 있는데 신령한 몸으로 변환시키지 못하겠는가. 지금 우리가 영혼이 있음에도 이를 두고 "육"이라 할 뿐이지 "신"이라 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육체가 신령한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신"으로 억지로 끌어올리자는 뜻이 아니라 사실을 밝히는 것뿐이다. 영생한다는 것은 다름아니라 신령한 몸이 된다는 그 뜻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몸의 구속”[롬 8:23]이 그것이다. 구속(救贖)이든 구원(救援)이든 모두 공통된 뜻이 있다. 즉 원래의 상태와 같지 아니한 현재의 상태를 원래의 모습대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물에 빠진 사람 건지는 것도 구제 곧 구원이다. 다시 말해 원래는 물에 빠진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그러했다면 그런 것을 구원이니 구속이니 하고 부를 리가 없다. 애초에는 낮은 수준이었던 것을 높은 단계로 향상 발전시킨다는 뜻으로 말한다면 개량, 개선, 진화(進化) 등이 이 경우 어울리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인간 구원'의 개념은 애당초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이와 같지 않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현재와 같지 않았다면 어떤 모양이었는가. 답은,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니라 신령한 몸이었고 지금처럼 죽는 것이 아니라 죽지 않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원히 존재하는 신령한 몸으로 창조하신 것이다. ‘신’이라 ‘영’이라 하는 천사들과 같았다.

단지 차이는 위의 설명대로 영물들은 그 영계의 땅[“ground”]을 소재로 하여 창조되었으니 처음부터 영인 반면, 아담[인간]은 먼저 자연계의 육체로 창조된 후에 그 다음 단계로 영혼이 조성되고 그리고 그 영혼에 걸맞게 그 육체도 신령한 몸으로 변환된 것이다. 그렇게 순서가 다르다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연계 및 그 대칭을 이루는 영계에 아울러 속해 있음으로써 양 세계의 주인으로서 '다스리는" 즉 통할하는 역할로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심을 받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아담은 자연계와 영계와의 대칭 구도에서 그 접점(接點)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즉 자연계의 종결점(終結點)임과 더불어 영계의 시발점(始發點)이었다. 양 세계에 모두 아울러 속해야 하는 것이었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 영생하게 되는 것으로서 범죄 후의 아담이 그 생명과 나무 열매를 먹음으로 영생할까 저어하셔서 생명과 나무로 통하는 길을 차단하시고 아담을 에덴낙원으로부터 추방하셨으니 어떻게 아담이 신령한 몸이 되어 있었느냐" 한다면, 이는 범죄 후의 사정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범죄 전의 상태를 말함이 아닌 것이다. 아담이 범죄했다는 것은 선악과를 먹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범죄 전의 그 신령한 몸을 이미 상실한 것이다. 선악과 나무가 원래 그러한 성질을 지녔기 때문에 즉 인간의 신령한 몸을 자연계에 속한 원래의 육체로 되돌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먹지 말라 하셨고 먹으면 죽는다고 신신당부 겸 경고를 하신 것이다. 자유를 주셨으므로 먹고 아니 먹고는 순수하게 아담에게 달린지라 하나님께서 강제하시거나 간섭하실 위치는 아니시므로 그렇게 간곡하게 일러 주신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아가 결국 썩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 "죽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바로 그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상태로[선악과를 이미 먹어 버림으로써] 당시 아담이 위치해 있었고, 그래서 생명나무 열매조차 먹어 영생하게 될까 즉 신령한 몸이 되어 버리지 않을까 염려하신 것이다. 먹지 말라는 즉 먹으면 죽는다는 경고를 무시한 것이니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목적성이 분명하다.

자기에게 죽음이 된다는데 그것을 먹을 리는 없고, 다만 죽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善, 좋은 것)과 악(惡, 좋지 않은 모든 나쁜 것)에 대한 지식을 보유할 수 있다고 하는 말에 속아 여자는 그 욕심에 먹은 것이다. 그런 자기를 위하는 목적을 가지고 생명과 나무에 손을 댄다면 영생한다는 것은 신령한 몸을 입는다는 뜻인데 그 결과로 아담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되는 것이다. 왜냐면 신령한 몸에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목적으로 신령한 몸을 입었으니 그런 결과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 목적으로는 먹지 않도록 하셨다는 그 뜻이다. 하나님의 새 창조로써 신령한 몸을 입어야 제대로 된 순서인 것이다.

모름지기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않아야 하는데 자기를 위하여 무엇이든 할 때 그것이 죄요 악이요 불의, 불법이다. 욕심은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이지 별다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약 1:15] 하였다. 그 결과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으로써 입증되었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에덴낙원에서 첫 사람 아담을 죽인 데에서 드러났다. 아담이 죽기 위해 선악과를 일부러 먹은 것이 아니나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자살 행위에 이른 것처럼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영원 멸망이 스스로 좋아서 택할 피조물은 아무도 없다.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를 믿지 않음을 인하여 그렇게 스스로 망하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게 되어 있기도 하지만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됨으로써 죽게 되어 있는 이중의 결과를 낳은 것이 당시 아담의 위치였다. 생명과를 먹음으로써 다시 신령한 몸으로 되돌아 오게 되면 후자로 인한 결과는 상쇄되지만 전자로서의 결과까지 유야무야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다. 이미 죄를 지었으므로 반드시 죽게 되어 있고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으로써 죽지 않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되는 일이다. 자신이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어 죽게 되었으니, 선악과를 먹던 때처럼 스스로 손을 뻗쳐 그 생명과를 딸 때는 역시 범죄 행위다. 이 때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돌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신령한 몸 그대로 지니면서 영원한 불 못으로 가게 되어 있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및 기타 악령들]처럼 된다. 그러면 인간 구원의 기회는 아주 없어진다.

또 하나님 말씀대로 “영생할까 한다”는 뜻이 단순히 신령한 몸이 되는 것만 아니라 문자 그대로 영원히 삶의 낙을 누리게 됨을 의미한다면, 이 역시 '범죄자는 죽게 되어 있는' 원리원칙에서 역시 벗어나는 일이므로 용납이 될 수 없다. 범죄함으로써 죽을 자는 마땅히 죽어야 하고 달리 고려할 여지가 없음이다. 그런즉 스스로의 욕심에서 생명과를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먹게 하심으로써 비로소 먹는 것이니, 그래서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할 것이다”[계 2:7] 하셨다.

이미 우리는 몸의 구속을 받으면 신령한 몸이 되어 있다. 그러면 "하나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은 또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세상에 오시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이들은 곧장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게 된다[고전 15:52/빌 3:20,21]. 자연계에 속한 몸이기 때문에 신령한 몸이 될 목적으로 생명나무 과실을 먹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몸이 되어 있기 때문에 먹을 수도 있는 것인즉 생명나무 과실이 반드시 신령한 몸으로 만들게 한다는 한가지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효능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죽지 않는 영생하는 자로 만드셨고,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자연 재해와 기타 위험에 완전 노출되어 있는 자로 만드신 것이 아니니 영생불로(永生不老)의 막강한 능력의 신령한 육체로 지으신 것인데, 인간 스스로 범죄함으로써 이렇게 죽은 자 그리고 죄인으로서 망하게 되어 있는 현금의 위치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롬 5:12]. 그런 신령한 몸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하면 오늘날 소위 ufo라고 하면서 나타나는 것들이 모두 악령들의 그러한 자유자재한 능력을 나타내 보임이다.

다시 말해 이들 악령들의 신령한 몸의 능력을 오늘날 우리는 실컷 구경하고 있는 셈이다. 악령들은 그렇게 꾸밈으로써 소위 외계인 혹은 외계 문명으로 속이고 있으니, 에덴낙원의 영물들로서는 자신들을 절대로 밝힐 리가 없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처음부터 창조된 인간 이상으로 상급 수준의 피조물은 없다. 외계인이니 외계 문명이니 하는 따위의 악령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 일이다. 인간[아담]을 지식 면에서 돕기 위해 창조된 것이 이들 영물들인 것이다. 그 원래의 임무를 악용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와 같이 아담[인간]에게 반역한 것이다.

§   주님께서 육체로 계실 때 어떤 이들이 와서 당시 로마 총독 빌라도가 무자비하고 잔혹하게 몇몇 갈릴리 사람들을 이유 없이 죽여 그들의 피를 자기네 제물에 섞은 일을 말씀 드릴 때[눅 13:1] 대답하시기를,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를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아니다. 너희도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할 것이다” 하시고 또 더 강조하여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18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사는]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아니다. 너희도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할 것이다” 하셨다.

그리고 재삼 이를 강조하시어,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말하기를 ‘내가 3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주인님, 금년에도 그대로 두십시다, 제가 두루 파고 거름을 줄 것이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실 것이라’ 하였다”[:6-9] 하셨으니 모든 인생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와 같이 나타내신 것이다.

죽은 자로서의 인간이 거처하는 죽음의 세상이므로 벌써 망하여 없어질 것이지만 오늘날까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는 이유가 “이제는 어디든지 천하 사람을 다 명하시어 회개하라 하심”[행 17:30]에 있으니,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심과 동시에 심판하시는 재판장으로서[:31] 마지막 아담 곧 사람이 되어 계시는 까닭이다. 세상 문화는 죽음의 문화, 죄의 문화이다. 세상 인간은 죽은 자요 죄인이다.

죄인으로서 죽은 자다. 죽음이 그 죄의 증거다. 그러므로 죄를 회개하라 하신다. 사람들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그렇게 죽는 것을 "비명(非命)에 죽는다" 하고 "억울하게" "명이 닿지도 않았는데도 죽는 것"이라 착각하지만,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인생에게 천수(天壽)가 어디 있고 명이 어디 있다더냐. 갓나서 죽어가는 인생들을 보라. 10, 20대 짬도 없이 죽어 나가는 인생들을 보라. 그래도 천명(天命)이 있다 할 것인가. 그래도 “비명(非命)에 간다”고 말할 것인가.

인간 천명은 원래 ‘죽지 않는 것’이다. 죽음이란 것이 없었다. 그런데 범죄로 죽음이 온 것이다[롬 5:12/고전 15:21,22]. 바로 이 사실을 아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께로부터 배우고”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고” “하나님께서 오게 하여 주심”을 받아 그리스도께 오는 것이라 하신 것이다[요 6:44,45,65]. 바로 이 때문에 아무나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오는 것이 아니라 하셨다. 이 사실만 알면 오지 말라고 해도 한사코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올 것이다.

오는 자는 내쫓지 아니한다 하셨다. 스스로 물러가는 것이야 억지로 막지 못하지만 오는 자는 다 받아 주신다는 말씀이시다[:37]. 자기 부인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이 말씀이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0] 하고 물러가는 제자들이 많았지만 “너희도 가려느냐?” 하실 때 베드로가 “생명의 말씀이 계신데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한 것도 이 세상이 죽음과 죄의 세상이고 모든 인생이 죽은 자요 죄인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갓난 아이로 죽는 것을 비명에 간다고 말 못하고 억울하게 죽는다고 여긴 것도 실상은 억울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이고 죄인이므로 당연히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므로 이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죄인으로서 “망하는”[눅 13:3] 것으로 말씀하심이다. 그러니 죽은 자로서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뿐인데 말씀이 어렵다 하여 물러가면 역시 죽음이요 죽은 자이지 생명은 아닌데 가기는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의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요 12:25]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한시적인 찰나 같은 목숨으로 끝내겠다는 것이니 그 원대로 되어질 것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는다는[:25] 말씀이 그 뜻이다. “그러면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선물로 그 안에 모신 사람은 죽지 않는가?” 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상황이 이제는 완전히 다르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과 믿은 후의 양상이 하늘과 땅 차이다.

믿기 전에는 죄인이요 죽은 자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은 현재 이 시간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장차가 아니라 현재 그렇다[요일 3:2].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하나님의 맏아들[“the first born”]이신 그리스도와 똑같이 되는 것이니 그렇게 되자면 나 역시 그리스도를 닮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의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 하셨다.

아버지의 일을 그 아들들이 하지 누가 하겠는가. 사람인 하나님의 아들들[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바로 그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요 20:17]로서의 아버지 이름을 알리고  그 나라를 선포하고 아버지의 말씀과 뜻 즉 사람 사는 바른 도리를 세상에 알리고 그 뜻을 따라 고난 받는 가운데 사람들을 구출해내는 즉 아버지의 새 창조의 일에 동참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그 같은 일을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와 함께 일하셨고[요 5:17]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일을 하고 있음이다. 물론 아버지 또한 아들과 함께 하나 되어 계시므로 나와 함께 일하신다[고후 6:1].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는 것이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빌 3:10-12] 하였다.

내 스스로 나의 의지로 “그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는” 것이다. 죽으심을 본받지 않으면? 부활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면 나의 행위로 구원 얻자는 것인가? 아니다. 내가 구원 얻지 않았다면 순종하는 것 자체, 본받아 죽음에 이르려는 의지 자체가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아담]이 영생하는 자로 창조되었으나 범죄하였기 때문에 죽은 자가 되고 죄인이 되어 있는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범죄하고 않고 하는 것이 자기 의지에 달린 것이다. 이는 물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의 나의 현재 상황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강압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롬 7:24].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산 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스스로의 자유 선택에 의해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은 여기에 일절 개입하실 수 없다. 이미 그러한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그렇다.

만일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시면 하나님 하신 일 자체를 스스로 무너뜨리시는 것이 되니 왜냐면 이미 자유를 주신 사실을 친히 무효화시키는 것이 됨이다. 고로 이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고 하나님도 하실 리 없다. 간섭 아니하시려고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니던가. 복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요, 머리되신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은 바로 내 이웃 즉 함께 한 몸의 지체(肢體)들이 되어 있는 이들을 위함이다.

이는 곧 나 자신을 위함이니, 그 내 이웃들 역시 같은 이치로 나를 위할 것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내가 위해지기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나 혼자 나를 위함보다 내 이웃의 다양성만큼이나 다양성으로 위해진다는 뜻이요 내 이웃의 숫자만큼이나 배가(倍加)된 힘으로 내가 위해진다는 뜻이니 ‘되[말의 1/10]’로 주고 ‘말[섬의 1/10]’로 받는 정도가 아니라 ‘섬’ 이상의 무한정으로 받는 것이요 위해짐이다.

즉 자기 부인은 삶의 최고 지혜로서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태요 방식이다. 하나님 정하신 것으로서 최고 아닌 것이 없고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무릇 살아 있는 자로서 움직이게 되어 있는데, 누구를 위해 움직이느냐 하면 자기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위하고 자기 이웃을 위함뿐이다. 앞에서 욕심이 죄가 된다고 한 것은 그렇게  머리 위하고 동료 지체들을 위함이 아니라 자기만을 위함이니 이는 한 몸 구조에서 자기 고유의 기능을 벗어난 암적 존재가 됨이다. 암은 자기 혼자로서만 망하는데 그치지 않고 반드시 주변을 물들여 파괴시킴이니 에덴낙원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담을 범죄하게 한 사례가 그 증명이다.

우리가 죄를 지을 위기에 처했어도 하나님은 일절 무관심이요 완전히 버려두시는 그런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왜냐면 죄를 짓지 않도록 무수하게 경계를 하시고 경고의 말씀을 주시고 여러 모로 백방으로 알아듣도록 그리고 정신을 차리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모세의 인도 아래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길에서 하나님은 몇 번이나 참으시고 그 때마다 얼마나 회초리를 드셨던가. 그 사연을 읽는 우리로서도 "하나님은 너무 참으신다", 혹은 "이스라엘 백성이 너무 지나치다"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너무 하실 것도 없고 지나칠 것도 없다. 때가 지나면 아니, 때가 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참으시지도 않고 더 이상 기다려 주시지도 않는다. 더 이상 고집스럽게 매양 뻗댈 것도 실상 없다. 왜냐면 때 늦은 후회를 하게 되는 날이 오기 때문이다. 이미 그 때는 늦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다. 하나님께서 한번 마음을 돌리신 뒤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울고불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하는 것이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한다고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자기 구원을 목표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지 말 것이다. 그렇게 할수록 구원으로부터는 멀어진다. 구원을 이루라는 뜻은 산 자로서 그렇게 하라는 뜻이요 죽은 자로서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니다. 산 자의 특징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음이다. 자기 구원을 목적함은 자기를 위함이 아닌가. 고로 그런 모순된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는다. 그러니 끝까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오직 살라는 뜻이다. 그것이 구원을 이룸이다. 결과론적으로 "이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산 자가 됨이요 산 자는 움직이는 것이고 움직이는 것은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되신 하나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함이니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 결과로 부활에 이르려 함을 어찌 이해하기 어렵다 하는가. 그러면 움직이지 않겠다는 것인가. 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자가 아닌가. 죽은 자의 특성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구원 받지 못한 자이니 '움직이지 않으므로'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위해 삶으로써 죽은 자로서의 행색이 완연함이다. 그러면 움직이는가? 움직여도 자기를 위해 움직인다는 것인가? 그러면 산 자로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로서 움직임이니 주검 곧 송장의 뒤척임뿐이다. 주검은 이미 스스로 움직일 생명력이 없어 무엇인가에 의해 건드려지면 피동적으로 움직일 분이다. 

능동적으로 움직임과 피동적으로 움직임, 여기서 산 자와 죽은 자가 구별되는 것이다. 사랑해서 움직이면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주인 의식에서 움직인다. 그렇지 않고 구원 받기 위해 또는 멸망되는 것이 두려워 그런 것이 동기가 되어 움직이면 피동적으로 움직임이다. 다시 말해 자기중심이니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모습이다.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다 . 당신은 구원 받지 못한 자이니 죄를 지음이요 죄 짓는 자는 죽음밖에 없는 까닭이다.

왜냐면 우리 위해 죽으신 목적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하려 하심”[고후 5:15]이라 했으므로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여전히 산다면 당신에 관한 한 하나님의 구원은 실패한 것이다. 왜냐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그 어떤 일도 실패다. 우리 구원의 목적은 다시는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하심인데 내가 여전히 나 자신을 위해 사니 실패가 아니면 무엇인가.

죄를 지으면서도 여전히 죄인으로 있으면서도 의롭다 하심을 얻어 구원 얻는다는 맹목성, 비합리성, 반(反)논리성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그러므로 내가 구원 얻은 것이 '산 자로서 구원 얻은 것'도 그렇지만 더군다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되었는데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고 그 뜻을 행하지 않는다니 완전히 구원의 실패가 아니고 무엇인가.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는 아버지 뜻대로 하지 않음이다.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하심”[고후 5:15/롬14:9/갈 2:20]이 목적인데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니 어찌 구원의 실패가 아닌가. 나를 위해서는 일절 그 어떤 목적도 두지 말라. 상 타려는 생각? 누가 상 타라고 시키던가. 과거에 내가 갖지 않았던 것이지만 이제 "상을 탐"으로써 가지게 되는 그런 무엇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이루어진 결과' 또는 '상응한 보답'의 의미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상속해 주심으로서 아들은 아버지의 소유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주인이다. 그런데 무엇이 받지 않은 것이 있기에 상(賞)으로 받을 것이 또 남아 있다던가. 성경을 읽어도 상식적으로 읽을 일이다. 상식으로 읽지 않고 괴상야릇하게 읽으니 다시 말해 성령의 계시(啓示)하심과 인도하심을 갈망하는 마음이 없이 최소한 그러한 부지런함도 없이 덤덤하게 소설 나부랭이나 읽듯이 읽으니 이단으로 흐르고 억지 해석을 하여 자멸에 이른다[벧후 3:16].

다시 말해 영생을 비롯해 하나님의 모든 소유[피조물]를 나의 소유로 지금 현재 받아 있는데 그렇게 소유한 주인 곧 아들로서의 상속자답게 행동하고 처신하라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무척이나 아들답지 않은[자기 자신을 위하는 자기중심의] 망나니 짓을 함인데[에덴낙원에서 아담을 죽음으로 내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그런 망나니를 누가 계속 아들로 두겠는가. 양자(養子)라면 파양(罷養) 감이다. 우리가 양자로 구원 받은 것이다[롬 8:15,23].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   “천국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행 14:22]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아버지의 일[사람 구원해내는]을 하려 하고,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王, 임금-요 14:30]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한사코 이를 저지하려 든다. 어찌 충돌이 없으랴. 그래서 전쟁이다. 또 이 전쟁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을 죽음에 빠뜨린 살인자가 됨으로써 이미 선포된 것이었다[창 3:15].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우리의 발꿈치를 물고 우리는 그의 머리를 짓밟아 상하게 한다[창 3:15]. 아킬레스 건(腱)이 상했으니 현재 우리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상태다. 우리는 육체이고 그는 영 곧 신이다. 그 다음 단계는 "여자의 씨[후손]"로서의 그리스도께서 그의 머리를 상(傷)하시게 되어 있다. 그리고 머리와 몸은 하나이니 우리 역시 그의 머리를 우리 발 아래 두게 되어 있다[롬 16:20].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앞서 그 발꿈치를 상하시는 십자가 고통을 견디시고 이기셨다. 그와 하나 된 우리 역시 같은 행보(行步)이다. 그래서 나를 핍박하였으니 너희도 핍박을 당할 것이라 미리 경고하시고 예언하셨다[요 15:20].  

§   조물주의 존재를 시인함으로써 인생에게 미치는 불이익이 있는가. 한마디로 그런 것은 없다. 그것이 무엇인가 물을 필요도 없다. 생명의 사랑의 법질서를 따라 내가 조물주의 위치에 서서 조물주 대행을 하고 있는 터에 그리고 절대적인 자유 의지로 내 스스로의 운명까지 조정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구사하고 있는 터에 무슨 불만이 있을 수 있는가. 조물주의 위치에 서서 조물주 대행을 한다는 것은 대칭성 원리로서의 생명과 사랑의 법칙에서 하는 말이고[여기서는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자기 부인이 핵심이다] 무슨 불경스러운 소리도 아니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게 되어 있는 하나 됨을 말한다. 천사들이 그와 같이 하나님을 대행하는 역할을 해 왔음을 우리는 성경에서 누누이 확인하지 않는가[행 7:35/53]. 갑은 을의 것, 을은 갑의 것이니 그래서 갑 안에 을이 있다 하고 을 안에 갑이 있다 함이다. 이것은 둘이 하나 됨에서 가능해지는 일이다. 이 하나 됨을 '사랑'이라 한다. 갑은 을의 위치에서 을의 일을 대행하고 을은 갑의 위치에서 갑을 일을 대행한다. 이를 "보내심 받는"[요 20:21] 것으로 표현한다.

우리 모든 사람이 모두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에나 일에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이 그 뜻이다[골 3:17]. “각각 은사(恩賜, 선물, gift)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 4:10,11] 함이 모두 같은 의미다.

우리 각자는 그 지체(肢體)로서의 받은 바 은사[이는 한 몸 구조에서 눈이면 눈, 입이면 입으로서의 역할 분담을 말한다]를 따라 충직하고 성실한 청지기들이 되어 있어,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각자 자기 이웃을 위하고 섬기는 일을 함이니 이것이 삶이요 삶의 낙이다. 재물이든 권력이든 재주든 기량이든 모두 '이웃을 위함으로써 자기도 그 백배나 위해지는' 삶의 지혜로운 방법을 따라 '남에게 베풂"을 위한 것이다. 즉 각자 조물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움직임이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삶을 아주 잘못 알고 잘못 살고 있는 것이다. 살 줄을 모르고 그저 사는 것이라고 사는 것뿐이다. 사람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짐승처럼 사는 것이라 해야 될까. 이는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걸음걸이다. 전진이 아니라 답보도 아니고 퇴보 일색이다. 생명의 법칙, 사랑의 원리대로 하면 자기와 이웃하는 이웃들의 숫자만큼이나 각자가 똑같이 평균되게 배가(倍加)되어 살 수 있으니 얼마나 지혜로운 방법인가.

그럼에도 자기 고집대로 굳이 이 방법을 마다하고 자기 것이라고 자기 가진 것만 움켜쥐려 하고 그것도 양이 차지 않아[방금 말한 대로 양이 찰 수가 없으니 자기 자신을 위하게 되면 한정이 있는 까닭이다] 남의 것까지 강탈하려고 서로가 호시탐탐 짐승처럼 되어 살기 등등해 있으니 얼마나 미련스러운가. 악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를 부채질하니 실로 비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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