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HOME

3위1체 원리

  • 관련 자료 모음
  • 바영사운

Home > 3위1체 원리 > 관련 자료 모음

제목 바영사운이란? (4) 등록일 2016.02.16 21:43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25

바르게 영원히 사는 것

바르게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영원한 생명과 사랑의 삶의 올바른 법칙을 따라 순류(順流)대로 사는 것을 말함이다. 알기 쉽게 말하면 인간 세상에서 누구나 말하는 그러나 실천하기는 꺼려하는 공동체 의식에서 공공의 복리를 위해 사는 삶이다. 전체를 위함으로써 자기가 위해지는 방법이 아닌가. 그 결과가 이 세상에서는 잘 구현되지 않는 단점이 있다. 왜냐면 거의 전부가 자기중심으로 일관하는 까닭이다. 여기에는 상대를 믿지 못하는 불신도 물론 한 몫을 한다. 그러나 철저히 모두가 이런 공익(共益, 公益) 정신 아래 산다고 가정할 때 그 사회야말로 우리가 참으로 꿈에서나 그려볼 수 있는 이상사회일 것이야 말하나마나다.

우리가 선전하고 소개하고 기다리고 있는 세계는 바로 그런 이상 세계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하늘나라],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가 그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세례 요한이 외치고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외치신 것처럼 회개하는 자만이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상 설명한 생명의 법칙을 사랑하여 지키는 이들만이 그 세계의 복(福)과 낙(樂)을 향유할 것이야 불문가지다. “회개하라”는 것이 그 뜻이다.

이 세상은 악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주름잡는 곳이다. 고로 여기서의 이상 세계는 불가능이다. 악마가 있어서도 그렇지만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이상적인 사람 삶이 형성될 수도 없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상세계가 이루어지면 뭘 하나. 인생은 원래 영생하도록 창조된 것이다. 그래서 영혼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 영혼을 지으신 것은 영생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영혼은 원래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령한 몸으로서 아담은 에덴낙원에서 살았던 것이다.

악마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로 모쪼록 그런 이상 세계에 하나라도 덜 들어가도록 막자는 데에 있다. 이 외에 그는 어떤 뜻도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 왜냐면 이 세상 존립의 의미가 그런 사람 단 하나라도 건져내어 그 이상 세계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있기 때문이다. 그 목적만 달성되면 이 세상은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또 그 목적이 달성되지 못하면 이 세상은 언제까지든 굴러갈 수밖에 없다는 논리인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바로 이를 노리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 구원을 결사적으로 방해하는 것은 자기의 생사가 이런 쪽으로 달려 있다고 딴에는 믿는 절박감 때문이다. 구원 얻는 사람의 숫자가 일정량에 미치지 못하면 그만큼 이 세상의 종료는 지체되는 까닭에 이 목적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소위 환생, 윤회 따위의 것들을 가지고 세상의 불합리성을 억지로 합리화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 살리시는 데에, 악마의 목적은 그 일을 방해하는 데에 있음이다.

하나님의 목적이라기보다 우리 인간의 선한 목적이다. 이유는 이 모든 일의 구체적인 측면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구원 받은]의 손에 일임하셨기 때문이다. 천사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악마와 하나님께서 대치하는 것이 아니다. 악마와 그 수하 악령들과 대립되는 세력은 거룩한 천사들이다. 그러나 그들끼리 무슨 원수진 것은 없다. 오직 인간과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이 선포되었을 뿐이다[창 3:15].

그러므로 인간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이요, 거룩한 천사들과 악령들의 대치는 모두 인간을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영계의 이런 영물들과 대칭되는 것은 자연계의 동식물이다. 영계에서의 영물들과 그 곳 식물과 또한 대칭이다. 이는 자연계에서의 동물과 식물이 서로 대칭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영물과 인간이 대칭이니 인간[아담]을 위해 영물들이 창조된 까닭이다[창 2:19]. 인간[아담]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머리의 위치에 있으므로 몸과 머리와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물주로서의 하나님과 대칭되는 것은 그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이다.

즉 조물주께서는 그 피조물을 위하시고 피조물은 조물주 하나님을 위하는 영원한 체제다. 이 생명의 법칙을 이들 악령들은 어긴 것이고 사람[아담]도 이에 물들어 어긴 결과 오늘날과 같은 비극 속에서 헤매는 것이다. 이런 영물들을 관장하는 것이 인간[아담]인데 범죄하여 이 모양으로 비참한 지경에 놓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되어가고 있다. 그 작업에 우리 자신 동참하고 있으니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움으로써[히 5:8,9] 그러하다.

피조물인 나를 전적으로 위하시는 조물주

위에 설명한 생명의 법질서에서 조물주는 일편단심 그 피조물을 위하시게 되어 있다. 그리고 당연히 피조물은 조물주 하나님을 위하고 사랑하는 위치에서 각자 자기 이웃을 사랑하고 위하는 것이니, 여기에 편벽되고 사사로운 것이 있을 수 없고 그야말로 공평무사한 사랑을 베풀게 되는바, 그 근거가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먼저 사랑함으로써 그 다음 순서로 머리의 지시를 받아 이웃 사랑함에 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지시를 따라 같은 지체(肢體)들인 이웃들을 사랑하여 위함으로써 자기 자신도 위해지는 것이다.

내가 나를 직접 위하면[이것이 자기중심이다] 이 법질서에서 벗어나고, 다른 이들이 나를 위하면 더 풍성한 삶을 내 자신 누리게 될 뿐 아니라 모두가 다 떳떳하고 올바른 삶의 자세가 된다. 왜냐면 내가 이와 같이 내 이웃의 굄을 받고 사랑을 차지하려면 내 자신이 나를 위하지 않아야 즉 나 자신은 비워 놓아야 내 이웃들이 이 빈 자리를 대신 채워 주기 때문이다. 나는 역시 그들의 빈 자리를 채우는 책무를 진다. 섬김을 받는 권리와 섬기는 책무가 완전히 균형이 잡혀져 있음이다.

하나님의 제조 마크를 지니고 있는 만유(萬有) 그 일체의 모든 것이 짝의 개념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조물주 없이 피조물만 생각할 수 없고 피조물 없이 조물주를 생각할 수 없다는 이치 그대로다. 조물주와 피조물은 이같이 사랑과 생명의 법에서 하나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물주의 존재 그 자체가 전적으로 그 피조물인 나를 위하심이니 내게 무슨 불이익이 된단 말인가.

독재자 유형인 폭군으로서의 신(神)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세상 인간이 두려워하고 혐오하고 그 굴레라고 생각하는 것은, 조물주가 아니라 이 세상 신(神)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이 세상 신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자신이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오해하도록 조종하고 있는 결과다. 이 세상 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창조주로 혼동함이니, 폭군, 독재자로서의 신의 유형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다. 미워해야 할 이 세상 신은 따르고, 사랑해야 할 창조주 하나님은 엉뚱하게 미워하고 있는 꼴이다.

하나님을 숫제 모르기 때문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자신이 그렇게 속이고 있음이다. 모르면 알고자 노력이나 해야 될 것인데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이 세상 신이 마치 조물주처럼 군림하여 속이고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인간은 이 세상 신 곧 지배자[王, 임금-요 14:30]인 악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조물주를 혼동하고 있음이다. 이 세상 신은 문자 그대로 자기 중심으로서 자기를 위하는 것뿐이다. 모든 인간을 자기 목적을 위해 노예화하고 있고 간섭하고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형벌의 불가피성

창조주의 섭리와 경륜 중에 영원한 형벌이 불가피한데 이것은 조물주로서의 위치 즉 법질서를 세우고 그것을 집행하고 따라서 각 피조물의 자유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는 각 행동에 대해 상벌(賞罰)로 구별하여 심판하는 것이 불가피하고 필연이기 때문이다. 조물주를 우리 피조물의 위치와 처지에서 그 동일한 수준으로 인식하려는 것부터가 지혜가 없다. 항상 우리는 조물주 하나님을 마치 우리와 같은 피조물처럼 오해하고 착각하는 것이 결정적 흠이다.

그러나 심판하시는 주체는 하나님으로서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는 것이니 이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사람' 즉 마지막 아담으로서 심판하신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악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영원한 불 못에 악인들과 함께 유폐시키시는 것도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당연한 업무다. 지금은 악령들이 인간 세상 위에 군림하여 있지만 사람[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사람 아래에 있어 그 다스림을 받던 [거룩한 천사들을 비롯해] 영물들인 것이다.

이 영물들은 처음부터 인간[아담]을 위해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창조된 것이 "그룹[cherub]"들과 "스랍[seraph]"들인데 이들과 대조된다. 즉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인간 아담을 보필하도록 에덴낙원의 영물들은 창조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같은 불 못에 들어가는 것은 옳다. 그리고 그에게 빌붙어 악을 좋아하고 선을 멀리 한 악인들 역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이 취급되어 같은 형량[刑量]으로 다스려지는 것은 합리적이다. 사람[그리스도]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처벌하시는 것은 당연하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아담]을 꾀어 죽음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발꿈치에 물린 인간이니 인간의 머리로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머리를 밟게 되시는 것은 당연 순서다.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도 그와 같이 하게 된다[롬 16:20].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 하늘나라

이와 같이 자연계에 속하지 않은 인간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하고 있다는 것은 비극이요 참상이다. 육체는 자연계의 흙으로 조성하셨으나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숨[생기(生氣), the breath of life]을 그 코에 불어넣으심[숨을 내쉬심]으로써 영혼이 조성되니 사람이 영적인[영원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래서 영계인 에덴낙원에 두시고 거기서 나는 실과를 먹음으로 그 몸이 초자연적인 몸으로 변환되었으니 바로 그런 초자연계 [자연법칙이 관장하는 이런 자연계가 아닌] 즉 영계(靈界)가 인간의 삶의 본고장이다.

다시 말해 영적인 존재인 천사들이 거처하는 그 곳이다. 이런 영적인 세계 곧 초자연적인 세계를 성경은 천국[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 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에덴낙원[혹은 "하나님의 낙원"]이 그 곳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면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으신다고 성경에 명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자연계에서 태평으로 잘 살고 있는 인간에게 난데없이 "천국"을 끄집어내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의 뜻을 살펴야 함이니, 다시 말해 이 자연계에서 인간이 자기 본고장처럼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갓나서 죽고 한두 살에 죽고 10대, 20대 대중없이 죽어 나가는 사실에서도 확인되듯이 이 자연계의 자연법칙 아래 살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하시는 말씀이 곧 "천국"이다. 즉 영원한 생명과 삶의 낙이 보장된 영원한 세계다. 자연계로 전락하여 자연계의 동물처럼 되어 버린 것은 첫 사람 아담 부부가 자기중심으로 흘러 생명의 법질서를 어김으로 인하여 죽음 즉 자연계로 도로 돌아와 버린 비극 탓이다.

그렇게 만든 직접 장본인이, 이 세상에서 현재 신(神)으로 군림하고 있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짓만 아니고, 인간 자신의 어리석음과 불순종 즉 생명의 법질서에서 스스로 어긋난 행동을 함으로써 이 지경이 되어 있으니 실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만을 탓할 이유도 없다. 인간의 자업자득이다. 따라서 인생들 중에 구원 받을 만한 사람은 다 구원된 후에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이 세상 지배는 종결되고 그리스도의 천년 간의 짧은[영원에 비하면 가히 한 순간이다] 통치가 시작된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이 세상 지배 기간을 "이 세대[this generation]"라고 지칭하고 있다[롬 12:2/고전 2:8/막 13:30/눅 21:31].

순절(殉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그 지조와 절개로써 목숨을 버리는 것도 불사하니까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므로 순교(殉敎) 즉 종교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뜻보다 "순절"이라는 말이 훨씬 낫다. “순교자”도 “순절자”로 바꾸어 표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의미에서도 좋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위한 순절자의 각오로 임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친다. 사람답게 살지 못하여 인생 비극이 시작되었으니 그리하여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않고 짐승 같이 사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사람답게 다시 말해 얼마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영존하여 영생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짐승처럼 자기 본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이성인(理性人)답게 그리고 지성인으로서 사는 법을 전파하는 것이다. 인간 이성이란 것은 건전한 상식적 판단을 할 줄 아는 능력이다. 이것은 반드시 특정 지식이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다.

지성인은 배워서 아는 즉 일정한 지식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우리는 세상 지식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이 나타내 주는 영원한 사람 삶의 지식을 말한다. 성경을 전에는 몰랐으나 이제는 알아야 하고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성이 있고 지성이 있는 것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원래 그 염원대로 죽지 않고 영존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 덧붙여 영생인(永生人)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사는 삶의 핵심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이런 사랑의 절조를 지켜 목숨을 버리는 순절자(殉節者)가 되어 마땅하고 그것은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하 내용은 인터넷에서 인용해온 글이다. 리 영희(이영희, 37세 여)씨는 2000년 2월10일 12시 함경북도 무산시 장마당에서 순절했다. 장마당의 상점들의 문을 모두 닫게 하여 모든 주민이 나와 목격하는 가운데 처형당하는 이유를 남녀 [공산당]당원 둘이 나와 연극식으로 설명하기를 "당과 조국을 배신하면 이렇게 된다"고 한 후 처형했다.

고문으로 이미 하반신은 일어설 수 없도록 만신창이가 되어 부서진 다리로는 상체를 버틸 수가 없어 말뚝에다 새끼줄로 목과 가슴 그리고 허리를 묶었다. 눈은 헝겊으로 가려졌다. "발사 준비!"라는 명령으로 사격수들이 조준하자 영희씨는 "예수를 믿으시오!" "주여!" 하고 또 무어라 소리쳤으나 "발사!" 소리에 울리는 요란한 총성에 더 이상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3명의 사격수가 머리에 4발, 가슴에 4발, 배에 4발을 쏘아(일반 사회사범들은 3발씩을 쏜다고 한다) 온몸의 살점이 터졌다. 심장에서 터진 피는 구경꾼들에게까지 튀었고 땅은 피로 검붉게 물들었고 시신은 순식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위의 내용은 같은 동료 전도인이 옆에서 지켜보고 전한 것으로 계속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리 영희씨는 97년 가을에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두만강을 건너 우리 지하처소(地下處所) 교회로 들어온 탈북자였다. 보기 드물게 대학을 나온 지식인이요 성분도 좋은 당원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정으로 숙청당해 남편과 함께 아오지 탄광의 노동자로 전락했었다. 우리가 그들 부부를 받아들일 때는 남편은 복막염으로 사경을 헤맬 때라 우리 선교사들은 최선을 다해 그들을 치료했고 먹이고 입히며 돌보았다.

"또 위성방송을 통해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게 했다. 처음에 그들은 돌봐주는 인정에 그저 감사할 뿐이더니 차츰 가치관이 바뀌기 시작했고 사상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속아 살아왔습니다' 라고 말한 뒤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믿음으로 성장하는 속도는 대단히 빨랐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탈북자 생활에서도 밤새워 성경을 읽고 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알려고 노력했다.

"한 3개월 정도를 우리와 같이 지낸 그들 부부는 남편의 질병이 어느 정도 차도가 있자 두고 온 가족들 때문에 돌아가겠다고 해서 우리 선교사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싸 보내며 성경 책을 함께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다음해(98년) 봄에 왔을 때에는 믿음이 많이 성장해 있음을 볼 수 있었고 영희씨는 친정 동생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면서 전도도 했다고 했다.

"남편의 병세는 그 전처럼 다시 악화되어 또 다시 그들은 우리와 함께 지내면서 본격적인 성경공부와 전도의 방법을 배웠고 주님의 일군으로 양육되었다. 그들은 사명감으로 불타기 시작했다. 그 해 여름철에 영희씨는 쌀 대신 달러를(북한에서도 미화나 중국 위엔 화는 교환해 쓰는 방법이 있어) 가지고 갔고 의약품과 특수 제작된 소형 성경을 운반하기 시작했다. 98년부터 99년 말까지 영희씨는 수차에 걸쳐 이 일을 계속했고 남편은 건강 관계로 집안을 돌보는 상태였는데 그들은 담대했다.

"그러던 중 금년(2000년) 1월 말경 함경북도 무산에서 체포되어 2주간의 모진 고문 끝에 그와 같이 처형당한 것이다. 처형당하기 전에 하반신은 고문으로 이미 마비가 되었고 많은 출혈로 생명을 부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그러면서도 오히려 고문하는 보위부원들에게 "예수를 믿어야 삽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 악질 반동 예수쟁이 죽어봐라"하며 채찍과 몽둥이는 영희씨의 몸을 사정없이 파고들었고 그는 신음 대신 "주여!"를 외쳤다.

"초죽음이 되도록 처참한 고문을 당하고도 우리 선교 캠프나 선교사들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함으로써 아직까지 우리가 이 일들을 계속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 북한에서는 도처에 순교의 피가 흐르고 있다. 99년 한 해만 해도 400여명을 공개 처형했는데 그 중 3분의 1은 기독교인이란 보고가 있다. 그리고 지금도 북한 도처에는 이런 일이 자행되고 있다. 지금도 햇빛이 들지 않는 땅굴 속에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죽기를 결심하고 기도하며 죽음의 때를 기다리는 제2, 제3의 리영희가 양육되고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와 복음 사업

한국민족은 기마민족이면서도 사람답게 사는 것을 희구했다. 그래서 씩씩하게 말 달려 해 뜨는 고장을 찾아 빛의 근원이라도 발견할까 싶어 동방을 향해 달려온 것이다. 태양은 광명이고 광명은 빛이고 진리는 모든 진실과 진상을 밝혀 주니 빛의 속성과 진리를 동일시하여 그래서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빛을 상징한다고 믿어 흰 옷을 입기를 좋아하는 특별한 민족성을 나타냈다.

때문에 예로부터 주변국으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즉 사람답게 사는 것을 최상의 덕목으로 친 것이다. 군자지국(君子之國)이었던 것이다. 공자도 한번 가서 살아보았으면 하는 희망을 피력하기도 했던 그런 나라이니 예로부터 국호를 조선(朝鮮) 곧 아침의 광영(光榮)이라는 의미로 지은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때문에 사람 사는 법도를 중시하여 사랑의 인간 삶을 실천하고자 "홍익인간"을 건국 이념으로 했다.

뿐 아니라 사후(死後)의 일에도 관심이 깊어 필연코 사후의 세계가 있을 것이라 믿어 사람이 죽어 장례를 치를 때도 주변 어느 국가의 장례법보다 장중하게 치르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때문에 진리를 갈망하는 민족성답게 이 땅에 유교가 들어오면 유교가 흥했고 불교가 들어오면 불교가 성했고 기독교가 들어오면 역시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왕성하게 뿌리를 박았다. 이로 보아서도 세계에서 가히 지능지수 제1위라는 판정을 받아도 손색 없는 민족답다 할 것이다.

이 한반도 교회가 오늘 이 위급한 현실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온 세계에 전하는 하나님의 첨병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할 것이다. 같은 혈족인 몽골인들이 왕년에 무력으로 서쪽으로 진군하여 세계를 발굽 아래에서 내려다 보았으나 이제는 이 한반도 한민족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의 메시지로써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서방 공략을 하는 기치 아래 말발굽 소리 우렁차게 호령하며 달려 나갈 때가 온 것이다.

그러므로 기마 민족의 진취적 기질을 살려 통일 한반도 인구의 절반이라도 들어내어 외지에다 갖다 심는 인류사적 신 기원을 이루는 일을 해볼 만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절반 이상이라도 외국 각 처로 전도 이민을 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는 물론 국가 시책이 아니라 각자가 복음 전파의 사명을 띠고 자발적으로 하면 되는 일이다. 일찍이 구경해본 적이 없는 선의(善意)의 민족 대 이동을 하자는 것이다. 과거의 민족 이동은 한발이나 기근 등의 외부적 환경적 요인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달하는 차원에서 세계 각지로 흩어지는 것이다. 수백만, 천만 명 단위라도 좋다.

사람답게 사는 정신운동이 필요하다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나는 일이다. 그것은 임진왜란 당시 이공(公) 순신(舜臣)처럼 옳은 일을 위해 불의와 한 치도 타협 없이 떳떳하게 사는 공동체 의식의 삶이다. 세상에 아첨하여 보신책에만 급급해하는 풍조를 일치하게 배격함에 있다. 오직 정신문화로 우뚝 서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치를 높이 들고 온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의로운 사람은 그 의로움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과 희열 속에 사는 법이다. 그런 가운데에서 그 의를 강력하게 나타낼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마음, 그 은혜를 즐거워하는 마음이 힘의 원천임을 다시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구원 하나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 크게 오해하고 있다. 세상 종교는 구원에 매달리고 있다. 구원을 위하여 선행도 장려하고 있는 터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것이므로 사람 사는 법과 직결된다. 바른 사람, 옳은 사람이 되는 것에 있다. 그리스도인은 왕과 제사장으로서의[벧전 2:9/계 1:6] 당당한 자세로 이 사람 사는 도리를 전해야 하는 것이다. 즉 공동체 의식이니 한 몸 체제에 충실한 삶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핵심을 드러내어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지혜를 만천하에 홍보함이다.

세상은 이제 마지막을 달리고 있다. 성경에 예언하신 것처럼 이제는 나라가 쪼개지다 못해 개인이 한 국가를 상대할 만큼 막판이 된 지 오래다. 가공할 핵무기, 생화학무기가 개인 테러 집단에 넘겨질 수도 있는 그런 단계다. 이로써 그들은 당당히 거대 국가라도 위협하며 조종하며 조롱하게 쯤 되어 있다. 한마디로 혼란과 혼돈이다. 이른바 "911테러"로 뉴욕시 쌍둥이 빌딩이 폭파된 것이 그 증거다.

이렇게 되면 누가 나서서 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인간사회를 통제하고 통일된 질서를 잡아야 하는데 이제 인간은 뿔뿔이 나누어져 철저한 군웅 할거가 되어 버렸으니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이다. 필연적으로 바울이 말한 그 "악한 자"의 출현이 무르익은 것이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악한 세상에서 그런 대로 살고자 하는 것부터가 의(義)에 대한 반역이다.

악한 세상에서는 의인은 마땅히 이 불의와 대치해 있는 자세이므로 핍박과 탄압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세상과 똑같기 때문에 세상도 이런 변절한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양심은 있으므로 그런 의로운 사람의 행위는 세상도 칭찬한다. 그러나 자기만은 그런 것을 본받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로운 행위도 자기에게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칭찬하는 것이지 자기와 상관되어 자기가 다칠 일이라고 판단되면 세상과 합작해서 그 의인의 무덤을 파 헤치는 짓도 곧잘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속성이다.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는 그들을 멀리하던 사람들도 이제 자유로운 세상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공적을 치하한다. 세상이 만일 다시 한번 뒤바뀐다고 가정하면 그들은 여전히 그런 자기 정체를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도 당시 위선자들을 가리켜 "우리가 우리 조상 대에 있었다면 그렇게 선지자들을 핍박하던 우리 조상의 죄에 동참하지 않았으리라 하는구나. 바로 그렇게 박해한 자들을 너희 조상이라 하는 것 자체가 너희가 그 자손들로서 그들과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음을 너희 말로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는 말씀으로 질책하신 것과 같다. 시대는 변하지 않았고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오늘날도 살기등등하다. 순절을 각오하고 말씀을 외치는 자는 충실히 충성으로 외칠 일이다.

바영사회[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운동]

이 운동의 표제어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이다. 첫째, 회개하라는 것이다. 자기 중심의 삶을 벗어 버리라는 뜻이다. 인간은 자기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회개가 불가능했었다.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려고[또는 이 죽음 가운데에서나마 무리하게 살아보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중심일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을 친히 이루어 주심으로써 우리가 다시는 자기중심으로 살 필요가 없도록 해주셨기에 이제는 회개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둘째는 천국이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사람은 동물처럼 지내며 살 존재가 아니라 천사들과 같은 영적 존재로서 영적인 세계[완전한 세계]에서 살도록 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범죄하여 오늘날과 같은 참상에서 헤매고 있다. 이제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그 영적 세계로 통하는 길이 열려지게 되었다. "천국"이라는 사람 삶의 근본 토대가 그 문호를 활짝 개방하기에 이른 것이다.

"천국"은 가공적인 이상향이 아니라 자연계와 대립되는 실존(實存)의 영계(靈界)를 말함이다. 이에 대한 증명 또는 증거는 삼위일체의 법칙이다. 그리고 이 원리를 증명하는 것은 3운법칙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짝의 개념 혹은 원리 정도는 실재(實在)하는 것으로 어렴풋이 알아 동양에서는 음양이론이라는 윤곽 정도를 헤아리는 학풍(學風)이 한 때 성행했으나 그것을 실제로 증명할 수 없었던 탓에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실체가 완연하게 드러나 그 아름다운 영원한 법칙의 자태를 우리 앞에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자연계는 인간 삶의 기본 토대가 아니다. 물론 자연계의 흙으로 처음 만들어졌으므로 '근본'이라 할 수는 있으나, 이미 영적 존재가 되어 있어 영계에 있다가 이 자연계에 다시 예속되어 있는 현실이므로 이 자연계가 '근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근본은 영적 세계 곧 하늘의 나라, 하늘의 세계 곧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따라서 처음 세례 요한이 주님 앞서 나가며 외쳤던 그리고 주님 친히 외치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메시지는 그리스도 다시 오시기까지 유효한 것이다.

요즘 사람들의 신조어에는 죽는 것을 "하늘나라로 간다" 하고 마치 죽으면 누구나 하늘로 올라가는 것쯤으로 여기고 있으나 그런 공상에 젖어 있을 한가한 때가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영원을 두고도 끝나지 않을 비참한 고난 고통의 때가 모든 인생들을 잔뜩 노리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베드로의 성령 충만한 전도의 말씀을 듣고 유대인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는가?" 했을 때 베드로는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고 죄 용서를 받으라"[행 2:38] 했다.

"그러면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라" 하였다. 각자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반면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본능적으로 자기가 죄인임을 절감했던 빌립보 간수가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될까?" 했을 때 바울과 실라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 한 것이다. 고로 죄인인 것과 죽을 자의 멸망을 알면 "믿으라"는 처방이고, 그렇지 못하면 "회개하라"는 것이니 즉 죽을 죄인인 줄 먼저 알고 그래서 이 죽을 짓을 다시는 않겠다는 회개가 필수이다. 그래서 회개 운동이다.

‘바영사회’[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운동][2]

바르게 살자는 것이다. 이공(李公) 순신(舜臣)처럼 살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철저한 공동체의식으로 살자는 것이다. 공동체의식은 '하나' 의식 속에서 한 몸 의식으로 사는 삶을 말한다. 그것은 주인의식, 주체의식으로서 다른 사람은 다 그렇더라도 나만은 바르게 살자는 의식이다. 남이 다 그런데 나만 특별히 한다고 달라질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배격하는 운동이다. 이런 운동을 제창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올바른 인간 삶이 내용을 윤곽이나마 그대로 담고 있는 까닭이다.

핵심이 자기 부인인데 이 자기 부인은 인간의 각성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반드시 성령으로 다시 나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와 하나됨에 있어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또한 이 회개운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순신 정신을 강조하고 이공 순신처럼 살 것을 주창함은 그렇게 살면 영생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한 몸 체제 안에서의 '우리' 의식, '하나' 의식, 공동체 의식이므로 이 공동체 의식을 통해 자신의 잘못된 생활 유형을 변혁시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라는 즉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함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죄가 무엇이냐, 그 반대 개념인 올바르고 선한 것이 어떤 것이냐 할 때 이 공동체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인데, 아무리 이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뭉쳐져 있는 죄와 죽음의 세계일지라도 이 근본되는 삶의 형태 또는 형상까지 없어지지는 않은 것이다. 바로 그것이 '한 몸 구조로서의 인간 삶'을 확신함에서 오는 공동체 의식이요, 그런 의식으로 철저히 무장하여 이룬 혁혁한 삶의 승리가 역사적 증거로 나타난 사례가 임진란에서 드러난 이공 순신의 생애와 공적인 것이다.

그리고 한 몸 의식 즉 공동체 의식으로 공동체 생활하는 것이 사랑인데 이 사랑, 이 '하나 됨'은 애초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 피조물들이니 하나님을 알고 그 법질서를 따라가면 영원히 사는 것이 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바르게 사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머리로 삼아 머리를 중심으로 하여 모두가 한 몸의 각 지체(肢體) 각 부분으로 사는 것을 말함이다. 그 유일한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대안[代案]은 없다. 오직 잘 살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이 길뿐이다. 조물주는 하나이시니 달리 더 방법이 있을 턱이 없다. 자연계에 자연법칙이 있고 자연계의 생물이 이 법칙을 따라야 살 수 있듯이 영원한 삶의 법질서가 있는 법이니 이 법이 바로 갑과 을 둘이 하나 되어 사랑 속에 사는 원리다. 그것은 갑을 을이 위하고 을은 갑이 위하여 각자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공동체 의식의 모태(母胎)인 것이다.

이같이 서로를 위함으로써 모두가 잘 되고 이같이 ‘우리’가 먼저 잘 됨으로써 ‘내’가 거기에 덩달아서 자연스럽게 순서를 따라 잘 되는 것을 인식함이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자기중심으로 살아온 날들을 뉘우치고 버리는 운동이다. 이는 이 모든 법질서의 제정자요 그것을 확립하시는 집행자시요 그 최종 심판주(審判主)이신 조물주께 대한 회개를 말함임은 물론이다. 이것은 우리 인생이 다시 나서(出生) 새 창조에 들어가는 운동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   말은 간단하지만 하나님 친히 영원히 그 피조물 인간 중의 하나가 되신다는 것은 오직 자식을 둔 어버이의 마음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다 죄인 인간으로서의 죽음의 고통과 부끄러움까지 맛보셔야 하는 것이니 이는 어버이의 사랑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 사랑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영원한 형벌이 마땅하다 할 수 있으리라. 사람이 얼마나 악하면 이런 사랑에까지도 둔감하다는 말인가!

이 구원은 하나의 약속 즉 하나님과의 약속이 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왜냐면 우리의 순종의 행동 여하를 보시기도 전에 생명부터 먼저 주시고 보는 하나님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한번 주셨다고 그 주신 사실이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니 약속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약속이 아니라면 한번 정하신 것이므로 절대 불변이라는 말이 통할 수 있으나, 성경은 영생 자체를 분명 약속이라 하였고[요일 2:25/약 1:12/2:5] 우리가 이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는 까닭이다[히 10:36].

약속이 아니라면 당장 우리의 몸이 믿는 즉시로 신령한 몸으로 변화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왜 약속인가. 약속이 되어 있어야 할 이유를 이와 같이 순종하는 것을 다루어 보시기 위함이라는 것 이외에는 성경이 달리 밝힌 것이 없다. 그리스도의 일을 하라고 세상에 보내신 것이 우리의 구원[성령 받음]의 뜻임을 밝히신 것이 이 때문이다[요 20:21,22]. 그러므로 보내신 뜻을 행하여 순종하는지 여부를 살피심이다.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 한해 몸의 구속이 이루어지니 영생이 약속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한 것이다. 때문에 "참고" 선을 행하는 자가 영생으로 포상된다 한 것이다[롬 2:7,10]. 그렇지 않고 자기중심[selfishness, 우리말 번역 "당을 지어'는 오역]으로 나가는 것은 심판의 대상이라고 확언한 것이다[:8,9].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새 언약"[고전 11:25]이다. 약속이므로 차후 문제는 이 약속의 이행 여부에 있음은 물론이다. 하나님 편을 두고 이 이행을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약속 이행 여부가 모든 것의 관건이 된다. 그래서 새 피조물이 되었다고 마음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끝 날까지는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각자의 구원을 이루어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다시 말해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이니 시험하는 자가 시험하기 때문이다.

지키지 못하면 약속으로서의 우리 구원은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야 정한 이치다. 약속 이행이지 나의 '공로' 즉 소위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다. 약속과 공로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약속'은,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가 약속을 지켜 행할 때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친히 공급하신다는 의미이고, 우리 편에서 보면 그 능력을 힘 입어 순종의 약속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이 약속은 회개할 때 이미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로'는 그런 쌍방간의 합의 없이 그냥 일방적으로 나 혼자만의 힘과 의지로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택정(擇定)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즉 아무 기준도 없이 무턱대고 처음부터 구원 얻을 자, 얻지 못할 자를 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즉 각자가 사람으로 태어난 후에 어떻게 처신할 것을 미리 내다보시고 그 미리 아심을 따라 바로 그 기준에 의해 택하셔서 그 택하신 자들이 그들의 자유 의지를 따라 구원에 이르기에 아무 지장이 없도록 미리 조처해 두시는 것이 하나님의 "미리 택하심"이다.

구원 받는 일에 지장이 없도록 장애를 제거해 주시는 것과 처음부터 구원되도록 미리 짜놓는 것과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다시 말해 전자의 경우 아무리 장애를 제거해도 시종일관 당자의 자유 선택에 달렸지만 후자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의지만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가 통하는 것이지, 후자의 경우라면 그런 경고가 필요가 없게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헷갈릴 이유가 없다.

"내 자신 저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의 구원을 원함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이것이 그치지 않는 마음의 고통과 큰 근심이 되어 있음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언하는 바"[롬 9:1,2,3]라 했던 바울인즉, 바울로서는 바로 그런 것이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는" 모양새였던 것이다. 고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고 "나 자신을 구원하라"[딤전 4:16] 경고한다고 내 구원이 목표인 즐 결코 착각하지 말 것이다.

우리 구원이 다시는 아담이나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되지 않고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머리의 지시를 받아 복종하며 사는데 있으므로 복종 않으면 아담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선례에서 입증되었듯이 구원 자체가 무의미, 무효가 됨이다. 내 자신의 구원이 목적이라면 위에서처럼 바울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바란다"고 감히 성령을 증인으로 내세워 단언할 리가 없다. 

 

글쓴이    비밀번호   
보이는 순서대로 문자를 모두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