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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영사운이란? (5) 등록일 2016.02.16 21:42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437

바/영/사/회-"[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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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조물주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볼 수가 없는 분이시다. 생각해보면 말하나마나가 아닌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바보같은 소리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조물주를 피조물처럼 되라는 소리이기에 그렇다. 조물주는 조물주이시고 피조물은 피조물이니 한계가 명확하다. 피조물이 된 처지에서 감히 조물주더러 피조물처럼 되어보라는 것이 무리요 억지이니 만고에도 없는 바보스러움이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은 피조물에 한한다. 만일 우리 인간과 같은 형상으로 계신다고 해보자. 그러면 모든 인간이 조물주를 보았다고 만족해할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조물주라고 하면서 우리 인간과 같으니 크나큰 우주에 비해 먼지만도 못한 모양새의 조물주를 보고 "에게게, 광대한 우주에 비해 티끌만도 못한 것이 인간인데 인간처럼 모양을 갖추다니, 아냐, 조물주가 아니야, 조물주일 수가 없어!" 할 것이 뻔하다.

바보들에게는 장단을 맞추어 주는 것조차도 무척 힘든 일이다. 이렇게 해 주어도 불만이요 저렇게 해 주어도 절대로 양에 차지 않는다. 바보는 바보대로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상책이다. 이 우주를 지으실 만큼 크시니 크시기 때문에 볼 수 없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 피조물의 눈에도 확 띌 만큼 "오, 여기 조물주께서 계신다!" 하자니 먼지만도 못한 크기의 인간 피조물과 같은 형상이라야 하니 그렇게 먼지만도 못한 존재가 어찌 이 광대무변의 우주를 만드실 리가 있느냐 할 것이니,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어리석은 자의 말에 장단 맞추기도 힘든 일이 아닌가. 너무 크시면 크시기 때문에 볼 수 없고 우리 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그렇게 작으면 작다고 조물주로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앞에서 단정한 것이다. 도무지 이성적인 말일 수가 없는 것을 아주 당당하다는 듯이 스스럼없이 하고 있으니 자기 얼굴에 침 뱉기다. 스스로 지성인인 양 자랑하고 있으나 실상은 그 정반대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인생들이므로 하나님의 판단이 인간의 판단과 같을 수가 없다. 인간이 자기 지혜를 다 짜내어도 겨우 알아볼 정도의 하나님의 지혜요 그 뜻인데 그렇게 경박하기 짝이 없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보아야 믿겠다고 하는 상황이니 그런 좁은 소견으로 어찌 바다 같이 깊고 하늘 같이 높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으리요. 아니나다를까 세상을 지으신 실체이신 하나님의 아들 친히 그 거룩하신 뜻을 따라 이 불쌍한 인생들을 구하시려고 세상에 실제로 나타나시자 세상은 어찌 했던가. 단번에 부정(否定)해 버렸다.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고 명백히 밝히셔도 믿지 않았고 각종 기적을 통해 사람이라면 도무지 상상도 못할 능력을 베풀으셨어도 오히려 귀신과 마귀의 능력을 행하는 일로서 치부해 버리고 코방귀만 뀌고 상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확실한 증거를 보면서도 "더한 증거, 더 확실한 증거!"[막 8:11] 하고 외쳐대기만 했지 실제 그 증거를 수용하려는 마음 한 쪽 구석에도 없었다. 핑계를 위한 핑계였기 때문이다.

조물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친히 만드신 그 애틋하신 애정으로 이 인간들을 그냥 버리실 수 없어 친히 우리 같은 인간 피조물이 되셨다고 하면 깜짝 놀랄 것인가. 다시 말해, 볼 수 없는 하나님을 한 인간으로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어 우리 모든 인생이 한 인간으로서 사귈 수 있게 되었다면 이야말로 놀라운 사실이 아닌가. 피조물이 되시지 않으면 우리가 확인할 수 없다던 그 바보 같은 무리한 요구에 응하심인가?

그것은 아니다. 그런 바보 같은 생각에 응하실 리는 없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니 못믿겠다고 하는 엄살에 응하시고 이제는 확인하여 믿으라고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들을 한없이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내시기 위해 즉 영생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친히 사람이 되신 것이다. 다시 말해 나와 하나 되시기 위해 가로 세로 나와 똑같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향후의 '나'라는 존재를 영원히 나와 함께 구성해 주시려고[성령으로 내 안에 영원히 사심으로] 인간이 되신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사람이 되시니 세상이 그를 믿었던가? 지금도, 세상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얼씨구나 하고 믿는가? 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눈에 나타나셔도 믿지 않는 바로 이 실태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데 어디 있느냐? 볼 수 없으므로 멊는 것이 분명한데 어찌 믿으라고 하느냐?" 하는 당당한 소리가, 실인즉 한도 없는 우문(愚問)의 부질없는 합창(合唱)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즉 볼 수 있게 임하셔도 믿지 않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나 지금 인생들이나 똑같다. 그래서 너끈하게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기까지 했던 것을 보라. 조물주 하나님께서 일부러 사람으로 오시니 직접 잡아다가 그것도 최악의 죄수에게나 행하는 형틀에다 매달아 죽여 버린 것이다. 그러고도 하나님을 보여 달라 하고 보지 못하니 못믿겠다 하는가. 이런 것이 인간이고 세상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각도를 조금 달리하여 조명해도 관점을 약간 바꾸어도 이렇게 하늘과 땅 차이다.

조물주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 자신을 인생들에게 보여 주시나 인간은 아예 '볼 줄을 모르는' 것이다. 실제 코 앞에 들이대어 "나다, 나 여기 있다" 해도 볼 수 있는 눈이 없으니 어찌하리요.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것이다[마 5:8]. 마음의 청결이 무엇이냐,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됨이다[마 18:3]. 때문에 미리 선언하셨으니, "천지의 주재(主宰)이신 아버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옳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하시고,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마 11:25-27]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리스도'를 알았으니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념 외에는 그 어떤 생각이나 동기나 목적을 품지 않도록 조심할 일이다. 세상은 짧고 헛되기 때문에 믿음을 지킨다는 생각도 하지 말 것이요, 심지어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생각도 하지 말 것이니 오직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고전 16:22]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모든 것을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편달해 나갈 일이다.

"만일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으라"[:22] 한다고 해서 저주를 받을까 싶어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니, 사랑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우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지 되지 않으면 결단코[never]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신 것이니 이 말씀을 깊이 마음에 새길 일이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그 까닭을 항상 마음에 묵상하는 부지런함이 최소한 없이 어찌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하리요.

나는 아무리 해도 그런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쉽게 단념하고 물러서는 것도 오만한 마음인 것이다. 어린 아이의 마음은 교만한 것을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 아이 같이 받들지 않고 믿지 않고 수용하지 않는 모든 것이 교만한 것이다. 교만은 멸망의 지름길이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 겸손한 자를 찾으시는 것이다. 악착 같은 끈기로 기도에 힘쓰며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찾는 것이 무엇보다 기본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항상 기뻐하라"[:16], "범사[매사]에 감사하라"[:18],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15] 하는 것이 모두 사랑에서 오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용을 써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자연발생적으로 자연 발로로써 우러남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이 권유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되어질 수 있는 일을 상기시킴에 불과하고 스스로를 돌아보아 그렇지 못하다고 판단될 때는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 있는 줄을 알고 본연의 제 위치에 돌아오도록 촉구하는 의미인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계명과 율법이 모두 그러하다. 당연히 하게 되어 있는 것을 상기시킴이다. 하라고 해서 비로소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나 아니하나 하게 되어 있는 것을 다시금 알도록 해 줌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권고를 받지 아니할 때 불복종으로 취급되고 처분되는 것이다.

사랑의 노래

다시 말해 '사랑에서 오는' 평안과 기쁨을 말함이다. 내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니 또는 영생을 하게 되니 또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어 만유를 상속 받고 그 주인이 되어 있으니 등등의 이유로써 그러하다기보다[물론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니 엄연한 현실이므로] 그러함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당연히 우러나오는 결과로서의 그 모든 것이다.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 하면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함께 사심으로 나타나는 둘의 하나됨의 사랑이다.

주님과 하나됨으로써의 사랑은 또한 당연히 아버지와의 사랑이니 '엄마 품속에 있는 아기'의 평안과 희열 바로 그것이다. 엄마 품속의 아기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바로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십자가로 나아가시기 전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장차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리라는 말씀에 아주 침통한 절망과 의기 소침에 젖어 있는 그 제자들에게 오히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준다, 기쁨을 준다"[요 14:27/15:11/16:33 등의 말씀을 하신 것이 바로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아버지와의 사랑 속에서 용솟음치는 평안과 기쁨을 말씀하신 것이다.

"준다"고 하신 것은 사실 그대로이니, 왜냐면 이제 그리스도 죽으심으로써 친히 성령으로 오시면[16:7/14:23] 바로 그와 같은 동일한 사랑 속의 평안과 기쁨을 제자들도 당연히 누릴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항상 제자들 각 사람 안에 계시므로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어떤 경우에서든지 주님께서 계시고 동시에 아버지께서 계실 것이며 그래서 함께 그와 사시게 될 것이므로 그런 것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둘이 하나된 사랑 가운데에서의 평안과 기쁨이요 사랑하는 이가 함께 사는 낙에서 우러나는 평안과 기쁨인 것이니 그 대상이 영원하신 하나님[아버지]이시요 그리스도시라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어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다"[살전 5:10] 함이 바로 그 뜻이다. 사랑의 기쁨이요 평안이니, 우리 가곡집이나 널리 알려져 있는 오페라의 아리아에도 나오는 사랑의 찬가(讚歌)에서 "그대 운운" 하는 것에다 우리 주님을 대입(代入)하면 바로 그것이 찬미가 되고 찬송이 되는 것이다.

사랑 자체가 생명이요 따라서 평안과 기쁨이니 노래가 없을 수 없다. 그래서 "마음으로 주께 노래한다"[엡 5:19] 했으니 영역으로는 더 실감 나게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making melodies in your heart to the Lord"이다. 사랑으로 즐겁게 흥얼거림이다. 사랑이 없으면 이런 평안과 기쁨이 있을 리 없다. 아래의 모든 권고도 그런 사랑 가운데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살전 5:11],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14], "성령을 소멸치 말며"[:19]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21]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22], 기타 성경에 나오는 모든 권유와 경계 경고가 이런 사랑을 뿌리로 하고 있음을 바로 인식할 일이다.

이와 같이 사랑 가운데 있을 때 그것이 "더욱 힘써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벧후 1:10] 것이며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는"[:10]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써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는 것이며 또한 우리를 부르시는 이는 신실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실 것이다"[살전 5:23,24].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하는 이은상 시의 사우가(思友歌)를 이 점에서 참작하시기 바라는 뜻으로 아래에 소개한다. 사계절 변함없는 친구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지적했지만 성경에 왜 남녀 연가(戀歌)로서의 아가서(雅歌書)가 있는지 그 이유를 여기서 다시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것이 남녀 사랑임을 역설하시기 위함이라 착각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알 것은, 바로 이 사랑의 기본이고 근본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 각자와 하나님과의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오직 이 사실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봄이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靑蘿) 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 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 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화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 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더운 백사장에 밀려들 오는 저녁 조수(潮水)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소리 없이 오는 눈발 사이로 밤의 장안(長安)에서 가등(街燈) 빛날 때
나는 높이 성군(星群)[또는 성궁(星宮)] 쳐다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밤의 장안과 같은 내 맘에 가등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사랑의 평안과 희열을 노래할 바에야 넘치는 사랑의 시상(詩想)을 떠올려 그런 노래 가사를 많이 짓고 작곡가들은 가사의 빈곤을 한탄할 필요 없이 시편[초대 교회는 이 시편을 음송(吟誦)하듯이 곡조를 붙여 애창한 듯 보인다-골 3:16/엡 5:19]이나 기타 성경 구절 등 자료야 풍성하니 넘치는 은혜를 따라 무진장으로 주옥 같은 찬송가를 지어낼 수 있는 것이다. 세계 최고로 음악성이 있는 우리 민족인데 외국 사람들이 지은 찬송가를 겨우 번역이나 할 정도라면 이는 아주 얼굴을 못들 일이 아닌가.

지난 시절의 아름다운 명곡을 듣고 그냥 피아노를 치는 등 악곡만을 연주하는데도 청중들이 눈물짓는 광경을 보라. 그만큼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다. 훌륭한 가사와 아름다운 곡조를 부르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의 찬송 곡만 듣고도 훌륭한 전도의 길잡이, 안내자가 되지 않으랴. 워낙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진리 말씀이 실로 간결하고 간명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짚어 말씀을 전달하면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천년 넘게 고질화된 인위적인 요소가 말씀의 화석들[말씀이 화석화할 수 없으나 말씀을 빙자하여 말씀이라고 가장하여 그렇게 만든]을 너무 깊이 뿌리 박아 있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세척해내기 위해서는 꾸준한 반복 학습이 주효하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여 장문(長文)으로 엮어가게 되었지만 원래 구원의 복된 좋은 소식은 절대로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의 찬송가들을 일별하면 우리말 번역의 성경을 성경에서도 보듯이 번역자[성경-예를 들어 "우리 위해 죽으심"을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오역(誤譯)하는 등] 작사자[찬송가] 자신이 신학적 편견에 사로잡혀 때로는 아주 치명적인 내용이 것이 들어 있다.

우리나라 찬송은 단지 문학적 소양이 있다고 하는 이유만으로 불신자에게 찬송가 번역을 의뢰한 경우가 있다고 하니 이는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의 기준을 따르면 그 폐단과 해독을 결코 묵과할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찬송을 단순히 종교 의식화하여 즉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없이 "예배를 위한" 목적으로 '찬송을 위한 찬송'을 지어 부르는 경우, 이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것이 진실로 화석화(化石化)인 것이다.

여러 가지로 진상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은 성경과 같이 찬송가도 변경될 수 없는 권위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대로 수용하고 있으니 이런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가 그러한 줄로 알도록 만드는 악영향까지 끼치게 되니 결코 간과할 일이 아니다. 이와 같이 찬송가의 가치와 의미를 아무리 강조해도 그것이 절대로 과대 평가일 수가 없다. 사랑의 심금에서 퉁겨져 나오는 아름다운 가락으로 찬송시나 곡이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성경이 하나님께 대한 이 찬미 찬송을 신구약을 통틀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초대 교회 이후 로마정권의 압제 아래 교회가 수난을 받을 당시 원형 경기장 안으로 죽음의 참변을 당하기 위해 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아름다운 찬송을 부르며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이를 본 상당수의 사람들이 감명을 받아 믿음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기록도 남겨져 있거니와 특별히 갓난 아기를 품에 안은 젊디 젊은 엄마의 평화스럽고 태연한 모습이 더욱 그러했다고 전하고 있다.

생명의 평안과 기쁨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목숨이 붙어 있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비록 주음에 이르러도 생명의 진수(眞髓)는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랑에서 우러나는 넘치는 평안과 희열은 말 그대로 생명력의 순수한 발로인 것이다. 성경에 말하는 "성령 충만"은 다름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사시는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원활한 관계를 말하는 것이니 무슨 특별한 능력을 받아 나타내는 것이 아님을 명심할 일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은 이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고자 하는 시도이다. 주님의 광야 시험에서도 이 특징은 여실히 그대로 드러난다. 하나님의 뜻은 무시하고 아랑곳할 필요도 없이 알아볼 생각도 없이 내가 우선 시장하니까 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기를 부추긴 것이다. 이는 사랑과 생명의 법칙을 완전히 와해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자기 부인을 부정하도록 함이다.

둘째는 그와 마찬가지로 상대이신 하나님의 나 위하심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즉 과연 그 말씀대로 하실 것인지 시험해보려는 마음이니 성정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보려는 충동을 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시험에 대하여 주님은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응하셨으니 이는 곧 하나님의 우리 위하심을 의심하지 않는 절대적 신뢰에서 오는 것이다.

다음의 셋째 번 시험도 같으니 역시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응하셨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여기서 사랑에 조건부를 내거는 것으로 교묘하게 접근하는 것이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보여 주며 "내게 절하라" 했으니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자기의 어떤 이욕(利慾)과 목적하는 바를 염두에 두고 할 때는 이는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섬기고 그 앞에 절하는 것이 된다.

무조건 자기중심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절하는 것 즉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추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세 가지 시험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떼어놓고 자기중심으로 나가게 하는 것으로 일관된다. 모든 범죄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자신이 그러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범죄한 것이다. 자기중심이 교만이요 교만이 자기중심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이다. 따라서 결론은 이러한 자기중심을 토대로 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자기 부인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특성은 항상 오늘을 그 중심으로 삼고 있는 데에 있다. 왜냐면 사랑은 현재 둘이 하나되어 사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함께 산다는 것은 불가분성을 말함이다. 머리와 몸의 관계이든, 영혼과 육체 관계이든, 엄마 품속의 아기이든, 남녀 한 몸으로 사는 것이든 모두 그러하다. 그래서 함께 사는 것이므로 '현재'가 사랑의 특성이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과거 믿음의 많은 일들을 한 사람들이 그것도 많은 숫자가 심판대에서 멸망을 받는[마 7:21/25:45] 것이 이 때문이다.

사랑은 결코 자기를 합리화하려 하지 않는다. 자기를 위해 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해 한다는 그런 변명과 핑계를 일삼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사울 왕이 그런 본이 되었다. 자기 욕심대로 하면서도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행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한 것이다[삼상 15:15].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표방하지만 실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예가 부지기수다. 그러므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눅 9:23] 하 신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매일 사는 것이 어찌 가능하냐 하고 질문하는 이가 혹 있을지 모르나,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이시라 하는 것이다. 지금은 사람으로 엄연히 계시나 처음부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 되심은 영원히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한 번 하신 일 또는 한 번 이루시는 일은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로서 일관성이 있으니, 이는 법질서 확립에서 필연이다. 

아버지께서는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장차 이 세상에 다시 오시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므로 이 우주에 충만해 계시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심은 '본위치' 또는 '원위치'라 할 수 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들길 때 항상 손은 기본 위치에 둠과 같다. 그러나 손가락은 기본 위치에 있으면 아무 일도 되지 않고 전후좌우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기본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심은 기본 위치라 할 수 있고 실제 움직이시기는 우리 안에 계시고 나와 함께 사시는 것이다. 이 역시 동시성이고 양면성이다. 하늘에 계시고 동시에 내 안에 계시니 양면성이시다. 그러므로 이런 일에 일절 혼동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로 말하면 그렇게 계시기로는 유일하신 사람이시라고 인식하면 되는 것뿐이다. 우리 중에는 아무도 그렇지 않으니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유일한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알고 인정하면 되는 것뿐이다.

머리되시는 하나님

공동체 의식이라 하는 것은 먼저 나를 위하지 않고 먼저 우리를 위함으로써 내가 위해진다고 의식하는 것을 말함이다. 자기중심은 먼저 '나'를 위함으로써 '우리'가 위해진다는 거꾸로 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런 차이가 분명하므로 헷갈릴 필요가 없다. 손을 내 쪽으로 처음부터 뻗는 것이 아니라 '나'가 아닌 '우리' 즉 상대 쪽으로 뻗어 결국 그 손이 나 외의 여러 다른 [모든] 사람들의 손으로 연이어져 나가 전체 '우리'를 다 함께 남김없이 다 아우른 다음에 내게로 다시 돌아오게 한다는 것이니, 낚시 하나로 한 마리 고기를 잡는 효과가 아니라 그물을 쳐서 또는 쌍끌이 저인망으로 고기잡이를 하는 것이다.

고로 당장에는 내가 손해 보는 듯이 싶어 하기 싫고 반발심이 일어날지 모르나 다시 생각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은 줄로 알고 기꺼이 [내게로 향하던 손을 멈추고] 방향을 온전히 돌려 남, 이웃, 우리에게로 손이 향하도록 고정시키는 것이 공동체 의식, '우리' 의식, '하나' 의식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그와 같은 모양새를 나타내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것이다.

즉 "내가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하실 정도로 번뇌에 차 계시다가 기도하실 때 "아버지, 가능하시면 이 잔[고난 받으심]을 내게서 옮겨 주시십시오, 그러나 저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 하신 것이다. 이는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면모(面貌)이시다. 에덴낙원에서의 첫 사람 아담은 [여자와 남자 공(共)히]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그 자신 직접 먹음으로써 그런 지식을 얻고자 한 것이ㅏㄷ.

왜냐면 당시 그런 지식은 영물들의 보좌를 받아 알게 되는 것이었다. 필요한 대로 그들의 자문을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 지식을 그 스스로 갖추어 활용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욕심에 불과하여 자기중심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정하심도 아담의 지위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막강하므로 천사[영물]들의 견제 혹은 보완 관계로 인한 지나치게 한 쪽으로 쏠림이 없는 평형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려 하심이었다.

영물[천사]들 역시 영계에서 창조된 막강한 능력을 과시하고는 있으나 먼저 창조되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물을 다스리게 되어 있는 아담 아래 위치해 있으므로 아담이 통제를 받아 상호 간의 알력이라든가 부조화라든가 우열 다툼이 일절 없도록 하신 것이다. 이러한 처음부터의 조화로운 체제를 마다하고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자기 스스로 그런 지식을 보유함이 더 낫지 않으냐 하는 주제넘은 생각으로 그렇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비뚠 자문[실제는 선동이요 부추김이요 충동 질]에 응한 것이다.

고로 우리는 항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속시켜 그 지시대로 따르기로 작정하고 힘씀이니 아무리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이 내게 나은 것으로 비쳐지더라도 일절 그런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겠습니다. 저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하고 번번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마음을 정한 다음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모든 결과는 그리스도께 일임한 것이니 일이 진행되는 대로 곧장 그 길로만 일로(一路) 전진 또는 매진하는 것이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우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스스로 처단하려는 만반태세에 있다"[고후 10:3-6] 함이 바로 이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이시니 이와 같이 머리의 지시를 따르면 만사 형통이다. 우리의 신체 조직을 보아도 머리의 지시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뻗대고 자기 식으로 나가는 것이 암 세포인 것이다. 정상 작동을 버리고 돌연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한 몸 체제에서 죄를 조명하면 바로 이 암 세포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제거하면 할수록 안전하고 방치하면 할수록 피해는 막심하다.

그러므로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이 죄의 본질은 절대로 우리의 "새 생명"[롬 6:4]에서 용납이 될 턱이 없다. 영생과는 전연 무관한 일반적인 이 세상 일에서도 공동체 의식이라는 것이 이와 같이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인데 하물며 영생에 있어서랴. 우리가 이공 순신의 삶의 자세와 '나' 원균의 일반적으로 우리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평범한 생활 태도를 대조하여 강조하는 것도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는 일반 사회 생활보다 더욱 철저한 상하 관계를 엄중히 따져 머리와 몸으로서의 인식이 뚜렷하다. 왜냐면 일반적인 조직이나 집단과는 달라 생사(生死)의 갈림길이 너무나 현실적이고 뚜렷하기 때문이다. 원초적(原初的)인 것이므로 이것저것 따질 것이 없이 반드시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것이 생명이고 지상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리로서의 지휘관을 잘못 만나면 그대로 패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 아래 아무리 상관보다 똑똑하고 지혜 있는 부하가 있어도 그 어리석은 '머리'의 지시에 따라 자멸을 면치 못함이니 '몸'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사 문제와 직접 맞닿지 않는다 하여 사회로서의 가장 기본 단위인 가정에서 남녀 평등이 되어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게 되는데 이는 앞에서 말한 군대 조직에서의 머리와 몸 관계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다. 상식과 양식에서도 벗어난 일을 현대인들이 하고 있으니 진보, 진화가 아니라 퇴화임을 이로써도 한눈에 꿸 수 있다. 남녀 조화는 오직 통일된 조직 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장점이다. 아무리 민주주의 정체라 하더라도 대통령은 엄연히 존재하는 법이다. 머리가 둘이 있는 기형아 또는 괴물이 되어 있는데 어찌 통일된 조화가 되겠는가. 그것은 인간 환상에 불과하다.

모든 인간 집단이 이런 머리와 몸 관계로써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그 생명일 줄 알면서도 그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로서의 가정에서만은 양성 평등이 되어 머리가 둘인 혼란 상태를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것이 첨단 과학을 자랑하는 현대인의 특성이다. 왜냐면 이 마지막 때 즉 현대의 최종적인 시점에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 세계를 하나로 묶어 완벽하게 통일시키기 위해 이런 과학 문명이 발달되어 있음을 앞에서도 설명한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이 과학 문명의 혜택을 보는 것은 사실이나 그 궁극적 목적만은 제대로 그 실상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미래를 '아는' 것과 이런 문명의 이기(利器)를 현재 '사용하는' 것과는 별개이다. 현재 이용하고 있으니까 그 결과도 이로울 것이라는 장미 빛 꿈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그 뜻이다. 왜냐면 우리 인간은 구원 받아 신령한 몸으로 환원되어 지금 악령들이 소위 "외계 문명"이라 하여 속이고 있는 바 ufo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은 그런 초자연적인 능력을 우리도 갖춤으로써 해결되는 까닭이다.

인간이 이와 같이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초 능력자가 되는 길을 악령들은 난데없는 존재하지 않는 "외계 문명"과 연결 지어 인생들을 속이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첫 사람 아담의 상태로 원상 복귀하여 앞에서 설명한 사람 삶의 도리 즉 한 몸 의식에서 오는 공동체 생활의 기간이 되는 자기 부인[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의]만 충실히 해 나가면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우리 자신이 그런 존재로 나타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머리와 몸,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니 이 복된 현실에 극력 충실하여 이에서 어그러짐이 없도록 함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이요, "더욱 힘써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함"[벧후 1:10]인 것이다. 과거의 행습(行習)처럼 나 자신 단독으로는 절대로 생각하지 말 것이다. 항상 그리스도와 연계시키고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를 구성해 있다는 이 원리원칙에 결코 이탈하지 않도록 "힘쓸"[히 12:28/고전 7:32,34/고후 5:9-11/롬 12:2/히 4:11/눅 13:24/고후 5:9/벧후 1:10]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가령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 1:21] 할 때 왜 죽는 것도 유인인가 하고 한참 어리둥절해하는 것은 나를 중심으로 해서만 생각해 왔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면 죽는 것도 그리스도다[롬 14:7-9].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우리 구원을 위함이므로 세상 천지 이보다 거 귀중한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각종 핍박과 탄압의 대상이 되어 죽기도 하고 고난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치움으로써[골 1:24]. 그리스도 친히 내 몸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마저 하시도록 함에 나의 그 몸된 지체로서의 본분을 다함이다.

때문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 함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과 같은 나 혼자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이루어지는 죽음이니 파괴적이 아니고 건설적이며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면으로서만 나타남이다. 항상 이와 같이 성령을 읽을 때나 일상생활을 할 때에나 하나님의 사업을 할 때에나 이와 같이 새 사람으로서 새로 창조되어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새로운 틀 속에서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상으로 일관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되어 순리를 따라 순류(順流)로 흘러 정상 가동(稼動)이 되면 모든 천사들의 활동 그리고 함께 된 믿음의 형제들과의 기막힌 조화와 경이(驚異)를 창출하게 되는 것이다. 질서 정연하게 돌아가는 천체의 자연법칙의 운행(運行)과 같은 아름다운 광경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모양을 맞추어 진행되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와 같이 우리가 되지 못할 때 전체가 아주 난감하게 되고 우중충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근심 걱정을 자아내게 되는 것은 말하나 마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해도 사랑 가운데에서 기쁨과 평안과 자신감 넘치게 임해야 함을 성경은 엄중하게 가르치고 있다. 유대에서 온 선지자가 하나님 시키시는 일을 수행한 다음에 귀로 중에 사자에게 물려 죽은 사례다[왕상 13:1].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말씀만 전달해주고 가는 길이든 오는 길이든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라는 지시를 받고서도 "천사가 말했다"는 한 마디에 먹고 마시는 불복종의 일을 했기 때문에 받은 보응이었다. 성경은 이 사실만 기록해두고 일절 설명은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전후 사정을 살필 때 그 선지자는 그 지시에 대항 원망 또는 불평 불만이 있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시장해서 죽을 지경이라도 먹지 않아야 하고 목이 말라 빈사지경에 빠지더라도[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데 그런 극단적인 일이 생길 리도 없다] 일절 마시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사의 말을 빙자하여 감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시하여 금했던 일 즉 먹고 마시는 일을 했기 때문에 이는 그가 내심으로 이 하나님의 지시를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중간에 가서 변경되는 그런 종류의 일이 아니다. 한번 말씀하신 것은 법이고 원리이고 질서이므로 사람은 그런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는 것이다. 고로 천사가 직접 나타나는 형사으로 해서 먹고 마셔도 좋다 하더라도 의심할 판인데 사람의[아무리 그가 과거 선지자로 있었다 하더라도] 말을 듣고 그렇게 했다는 것은 그가 분명 그 마음 가운데 불평불만이 있었다는 증거다.

그리고 발락에게 말씀을 전달하게 되어 있는 발람 선지사의 경우도 같은 예다. 발락이 유혹하는 뇌물을 마음에 두고 말씀 전달을 시도하려 했기 때문에 억지로 마지못해 하나님 지시를 수행한 것이다. 그 역시 나중에 발락의 뇌물에 욕심이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방 여인들과 음행을 하게 만듦으로써 범죄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칼에 죽게 된다[유 1:11/계 2:14/민 22:5,7/신 23:4]. 이와 같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행하는 일체의 것을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시지 않고 수용하지지 않는다.

왜냐면 하나님 친히 지금까지의 설명과 같이 전적으로 순수하게 우리를 위하시고 사랑하시어 모든 일을 우리 위해 하시는 까닭이다. 절대로 우리 자신을 위할 필요가 없는데도 이를 어기니 군더더기가 된다는 정도를 지나서 하나님의 모든 섭리와 경륜에 차질을 불러일으킬 것은 명약관화다. 구약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모든 은혜를 베푸셨음에도 하나님을 기쁘고 단 마음으로 섬기지 않음을 책망하시는 대목이 나옴도 이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순종이라도 기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달갑게 그 지시를 따른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정한 것이 그 핵심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냥 믿는다고 이를 "의롭다 하신 것"이 아닌 것이다.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순종하는 것이어야 하므로 만일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이 그 무엇이든 할 때 이 사람은 하나님의 눈 밖으로 벗어나는 것이다. 머리이신 하나님을 사랑함은 당연히 그 지시를 받들어 우리와 함께 지체된 형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요한 사도는 그 편지에서 이 형제 사랑이 없는 것 즉 미워하는 것을 가리켜 "살인자"[요일 3:15]라 했고 하나님의 구원과는 전혀 무관함을 엄중 경고한 것이다. "나를 믿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마 25:45]으로 인하여 사람이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왜냐면 그 한 가지만으로도 그가 '구원 얻는 믿음'에 있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킨다, 내 계명을 지킨다"[요 14:15,23,24] 하셨으니, 그 계명대로 복종하지 않을 경우 그 믿음 자체기 믿음이 아님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다, 요한 사도가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한 대로 그리고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한다"[:19] 한 대로, 야고보 역시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니, 형제자매가 헐벗고 굶주리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따스하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약 2:16] 한 것이다.

야고보가 행함을 강조한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 한 것이다. 야고보가 이렇게 행함을 강조한 것이 순전히 상식과 양식 차원이요 아무 것도 지나치게 나가는 것도 없는데도, 워낙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구원을 잘못 알아 왔기 때문에 이렇게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서나 베드로후서, 히브리서 등은 초기에는 성경에 끼워 넣기조차도 주저한 것이다. 얼마나 성경을 곡해하고 구원이나 믿음을 오해해 욌는지를 알 수 있다. 지금까지도 이런 사정은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 구원 얻는 믿음이 있다는 증거는 행함에 있으니 다른 행함이 아니라 즉 무슨 종교 의식을 착실히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랑함에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는 그 자신이 기록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오해함이 없도록 다시 풀이하여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한다"[요일 3:14] 한 것이다.

때문에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일 것이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마 24:9-13]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을 지키는 자가 구원된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사랑의 풍성 속에서 평안과 기쁨이 충만하게 되고 그 충만 속에서 이웃을 위한 사랑이 충만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오늘에 입각하여 그리스도와의 둘이 하나되는 사랑 안에서의 충만한 삶이 되도록 "더욱 힘쓸"[벧후 1:10] 일이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매일의 사랑 삶을 충실히 할 때 그는 계시록에서 경고하는 바 "이기는 자"[계 2:7,11,17,26/3:5,12,21/12:11/21:7]이다.

생명의 핵심이 사랑에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 핵심 빼 버리면 생명은 빈 쭉정이다. 그래서 무의미 무가치하다. 있으나 마나이다. 왜 사랑이 생명의 핵심이냐 하면 하나님은 생명이신데 동시에 사랑이시니 이는 사랑과 생명의 법질서의 근원, 근본이 되시기 때문이니 다시 말해 하나님을 머리로 하는 한 몸의 구조 또는 체제가 모든 생명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한 몸 체제를 떠나서는 사랑이 있을 없으니 생명도 당연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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