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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1체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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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영사운이란? (6) 등록일 2016.02.16 21:41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36

 

사람들은 너무나 생명에 대한 몰이해로 일관한다. 지금까지 사는 것을 단지 영원 속으로 연장하는 것을 말함인 줄로 착각한다. 영원하게 사는 존재로 창조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 일당이 왜 영원한 멸망에 처해져 있는지 그 이유부터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덮어놓고 영원히 사는 것만 생각하고 그것만 욕심 낼 뿐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처음부터 영원히 사는 존재로 창조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착각 속에 영생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이 되고자 하는 의미밖에 없음을 왜 생각 못하는가.

그러면 당연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같이 되어 영원 멸망에 들어가는 것뿐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같이 되지 않으려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왜 그런 영원한 생명을 받았으면서도 생명과는 반대로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된 이유를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랑이 없어 자기중심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아담 부부를 죽음에 내몰았고 이 "악한 자를 닮아서"[요일 3:12] 가인은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내가 구원 받아 영생을 소유하였다고 할 때의 그 영생은 반드시 자기 부인 곧 한 몸 구조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를 위해 사는 것을 말함이다. 그리고 머리를 사랑함은 반드시 그 머리의 지시를 받으므로 한 몸된 형제들을 사랑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그가 아무리 믿음이 있노라고 천만번을 외쳐도 그가 말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늦기 전에 알아야 하는 것이다. 실상이 아니니 허상만을 붙들고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생명은 그냥 영원히 산다고 생명이 아니다. 반드시 사랑이어야 하고 사랑은 자기 부인이 핵심이니 결단코 자기중심이어서는 생명일 수가 없는 것이다. 생명 아닌 생명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이 왔다가 가고 또 올 줄로 기대하는 그런 삶이다. 그러나 일단 죽음이 오면 그 후로부터는 완전히 국면이 달라진다. 죽어보니 세상이 더 좋고 이 세상보다 더 좋더라는 소위 "임사(臨死) 체험"을 했다는 이들의 환상에 속아 넘어가는 이들은 만고에도 없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이들이다.

왜냐면 자기의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그런 헛된 악령들의 속임수에 맥없이 내어 주고 포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악령이고 아니고 하는 것은 다른 것으로 판단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의 이성과 지성으로 능히 판별할 수 있으니 오직 스스로 판단을 내릴 일이다. 남에게 의존하는 것처럼 미련한 것은 없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인데 왜 남에게 빌붙으려 하는가. 그 자체가 지기 생명 혹은 자기 자신의 포기 행위 즉 자포자기가 아닌가.

만고에 조물주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피조물 인간 중 하나가 되실 이유가 없다. 이것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 되셔야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시니 당연히 누가 혹은 무엇이 강압해서도 아니다. 아들께서 사람되신 것은 아버지 친히 사람되시는 마음을 품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께서 사람되실 때 아버지 친히 사람되시는 모양새를 취하신 것이다. 모양새를 하셨다는 것은 사람은 친히 되시지 않았으나 정녕 되신 것처럼 즉 사람으로서의 모든 수치, 고통을 아들과 똑같은 분량으로 다 함께 받으셨다는 의미이다.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둘이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오직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무한하신 사랑, 가이없는 은혜, 긍휼, 자비 등 그 어떤 어휘를 동원해도 충분히 묘사할 수 없는 그런 사랑이다. 그래서 성경이 그런 단어를 동원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전신전력을 다하여 이러한 사랑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배기리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랑으로서 사람을 사랑함이 따로 있고 하나님을 사랑함이 따로 있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듯 그렇게 사랑함을 말한다.

원래가 그렇지만 더군다나 이제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 계시므로 더욱 더하다. 이 '사람'을 우리가 '유일하게' 사랑하지 않고 어찌 배기리요. 우리가 그 어느 사람 중에 특별히 누구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찌 사랑하지 않으리요. 이 사실을 절대로 가벼이 생각하지 말 것이다. 가볍게 생각할 일이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로서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내면의 아름다움 즉 사랑'의 외부적 표현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가리켜 성경은 그 어느 인자[남녀를 통틀어 사람의 아들(후손, 씨)]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우시다 했으니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어느 인간의 사랑이라도 그것을 초월하신 사랑이 단순한 외부적 발로, 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은 잘못 알기를 이 은혜, 긍휼, 사랑, 자비, 인애는 "우리가 죄밖에 과거 지은 것이 없고 현재도 그럴 수밖에 없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하시어 영생하게 하시는 것"이라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죄인이었다는 말은 아무 하자가 없다. 그러나 "현재도 그러하다"는 것은 바로 인간 아담을 범죄하게 만든 마귀, 악마가 시키는 대로 하는 말이다. 이런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는 이들이다. 이 말은 자기중심이라는 말과 똑같다. 이런 자기중심의 세상을 사랑하고 이런 세상과 더불어 어울려서 삶의 낙을 향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명백한 그 증거다. 자기 부인의 사람은 자기중심의 세상과 맞지 않기 때문에라도 그런 분위기에서 삶의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

앞에서 말했거니와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상대의 말을 따르고 그 원대로 해 주는 것이 상식이다. 이 상식 차원에서 하신 말씀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 내 계명을 지킨다"[요 14:21,23] 하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했으니 당연히 그 갚음으로 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당연히 하게 되어 있는 것이지만 단지 그것을 강조하셨을 뿐이다. 친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는데[요 15:13] 그렇게 상대가 사랑하면 나도 그와 같이 해 주는 것이 그를 사랑함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 사랑을 받은 자격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격은 다른 그 어떤 무엇도 말하지 않는다. 사랑함을 말한다. 사랑하는 것은 어린 아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랑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의인이 되게 하고 선한 사람으로 만들어 "선을 행하게 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롬 2:7-10] 것이다. "믿으면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는 것이 바로 그 뜻이다. 어제까지 내가 악을 행했던 죄인이지만 오늘 하나님의 사랑으로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니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요 20:21/4:34] 그 말씀대로 "행하게"[약 2:17] 되어 있다.

바로 그 사랑하는 마음이 믿음이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롬 10:10] 한 꼭 그대로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바로 이 사랑의 마음, 사랑하겠다는 의지로써 향후 절대로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결심, 다짐, 약속을 하는 "회개"를 보시고 "의롭다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에게는 당연히 그 죄가 용서되고 성령의 선물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단지 특정 사실을 사실로서 시인한다 하는 그것으로는 절대로 구원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성경의 권위로써 단정하는 것이다.

충분히 능력을 베푸신 다음이니 즉 친히 그 능력이 되어 계시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내 말을 지키라, 내 계명을 지키라"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도 "현재도 나는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 감히 무슨 말이라는 것인가. 이는 전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래서 순종하지 않는[그 말씀하신 대로, 계명을 주신 대로 지키지 않는] 자는 아예 구원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성경은 명백히 못박아 두고 있다[고전 2:9/약 2:5/1:12/행 5:32/히 5:8].

인과율[the law of causality, 인과성의 법칙, 인과 법칙] 하나로만 따져도 모든 것은 쉽게 가닥이 잡히는 것이다. 인간[아담]이 죄를 지어 죽음이 왔으므로[롬 5:12] 이제 다시 살게 되는 구원은 반드시 죄를 짓지 않는다는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원리는 바로 이 인과율인 것이다. 삼위일체의 법칙도 이 인과율로 설명하면 더욱 쉽게 이해하게 된다. 단지 삼위일체의 원리는 성경적 사실을 근거로 하므로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입증할 수 있다는 그 차이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는 것은 현재의 인간 참상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그냥 고스란히 그대로 증명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 비극적 참상을 동시에 실감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구원에 들어가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나를 그토록 사랑하신 그리스도 나의 주님을 미워하여 죽인 세상을 어찌 사랑할 수 있는지 상상해보면 알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께서는 물론 죽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지만 죽인 것은 세상의 악함이요 무지(無知)인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의 악함과 무지가 합리화되지도 않고 당연시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세상이 이리 그런 줄을 아시고 세상에 사람이 되시어 오셨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그 스스로 죽기 위해 오셨으니 자살행위가 아니냐 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면, "세상이 그 악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죽였으니 그 악도 필요악이 아니냐" 하는 말 역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상이나 오늘이 세상이나 같은 세상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셨다고 세상이 달라지고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 비극적 참상과 세상의 죄악된 실상을 정확히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님의 그와 같은 사랑을 아는 것과 병행하여 필수이다. 동전의 양면과 같다. 양면성을 강조할 때는 항상 이 "동전의 양면"을 말하게 되는데 사실이 그런 것이다. 따라서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 가운데 [잘] 살고자 하고 삶의 낙을 누리려는 것과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는 상극이고 도저히 조화가 되지 않으니 이를 가리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려는 것보다 더 어렵다" 하신 것이다.

부자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재물을 쌓아두고 아까워할 이유가 없다. 부자 청년은 세상을 사랑하면서 영생 얻는 방법을 알려고 한 것이다[눅 18:18]. 그러니 세상 사랑을 버리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랑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기중심일 수밖에 없다. 천국에 들어가고 구원을 얻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배우는"[요 6:45] 것이다.

§   공동체 의식으로서의 한 몸을 이루어 사는 공동체 생활이 이상적이고 좋은 줄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인간이 연약하여 그렇게 살지를 못해서 그런 것이지 꿈에 그리는 인간 삶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막강하신 능력으로 그리고 무한하신 사랑의 은혜로 막강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있는데 그리고 이 세상은 인간의 원수인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있음을 잘 알면서도 세상 삶에 연연하여 그런 이상적 삶이 기본 자세로서의 자기 부인에 의한 공동체 의식도 하나 철저히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구원 받았다[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이 과연 부합할까.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공동체에는 반드시 그 집단을 대표하여 상징하는 그 중심되는 대표자가 있게 마련이니 그를 중심하고 그를 둘러 싼 하나로서 통일되고 조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공동체 의식은 한 몸 의식이니 한 몸에는 머리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한 머리로서 모든 지체 각 부분이 일치 화합하여야 그것이 진정한 '한 몸'으로서의 삶이다. 그러면 누가 그 머리가 되는가. 다 같은 인간이요 따라서 평등한데 누가 그 머리 노릇을 할 것이냐.

다 같이 평등하면서도 머리는 하나가 되어야 하니 그렇다고 모든 인생이 번갈아 가면서 교대로 머리 노릇을 할 수는 없다. 개중에는 뛰어난 자가 있고 그렇지 못한 자가 있게 마련인데 뛰어난 자 곧 택함 받은 자들 가운데서 머리가 나와야 할 판이나 자연 그렇게 되면 공명정대 공정공평하지 않다는 점은 둘째 치고라도 서로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경쟁하는 통에 자리 뺏기 다툼이 그칠 날이 없게 되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 뻔하다.

그러므로 영원히 머리될 사람은 똑같이 사람인 동시에 만인 위에 뛰어난 사람이어야 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가 조물주의 피조물이므로 조물주께서 그런 역할을 하시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조물주의 이름으로 하면 그렇게 조화 통일되고 분쟁 없는 행복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원래 그렇게 해서 모든 피조물이 살도록 되어 있었던 것인데, 개중에는 몇몇 이탈하는 자가 생겼고 그 중에는 첫 인간[아담]도 끼어 있었으니 즉 머리로서의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불복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면 믿는다고 하는 것은 빈 말이요 거짓말인 것이다. 고로 앞에서 지적했듯이 하나님은 본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과 양식으로 얼마든지 믿을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것이다. 옛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많은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은 것과 똑같은 양상이다. 비율로 치면 60만 장정 중에 끝까지 그 믿음대로 나간 이는 갈렙과 여호수아 단 둘뿐으로 입증된 바와 같다.

이렇게 사람이 되신 의미는 너무나 막중한 의미이기에 오히려 우리가 간과해 지나쳐 버릴 수가 있다. 모쪼록 항시 마음에 아로새겨 이 은혜와 사랑을 마음 속에 깊이 새겨 두고두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볼 수 없던 조물주 하나님을 이렇게 해서 볼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같은 사람으로서 피차간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제처럼 하나님과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아무 장애가 없어졌다. 사람끼리 하는 것처럼 하면 되는 일이다. 단지 현재는 육체가 아니시고 성령으로 계시니, 따라서 사람은 사람이되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존재하신다고 생각하면 가장 적절하리라. 이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시되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이시니 그런 분은 오직 한 사람뿐이라는 인식이면 충분한 것이다.

첫 사람으로서 그와 같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 수 있었던 까닭은 인간을 보좌하기로 되어 있던 영물들 중 하나[곧 용이니 마귀 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고 하여 이 세상의 신(神)으로 군림하여 현재 세상을 지배하는 자이다]가 인간을 위해 사용되어질 그 지식으로써 도리어 인간을 속이는 데에 사용하여 헤어나지 못할 죽음의 함정에 몰아넣은 결과다. 자기 욕심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생명의 법질서를 지키지 않는 범죄의 결과는 피조물끼리 불화하게 하여 오늘날과 같은 비극을 연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과도기적 현상으로서 결코 항구적으로 지속되지는 않으며, 인간들 중에서 악인들이 가려지고 걸러지고 솎아지는 작업만 끝나면 이 세상도 종료되고 모든 것이 곧 정상 상태의 영원한 세계로 돌입하게 되어 있다. 지금이 정히 바로 그 때임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 처음 모든 세상을 완벽하게 만드신 것은 사실이나 그래서 범죄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 비극적 상황이 되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착실히 복구, 회복되는 단계에 있지만, 인간[아담]이나 영물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시어 자유 선택으로 일체의 행동을 하게 하신 이상 이러한 현실을 미리 예상 못하신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1차적인 전단계의 완전한 세계 그리고 그 다음에 오는 최종적인 완전한 세계 양면으로 나누어진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비록 피조물들의 자유 선택에 의한 악한 행동으로 인해 해를 입었으나 후자는 전자에서 되어진 모든 일을 토대로 하여 세워지는 것이므로 다시는 그런 먼젓번과 같은 계속 연이어질 까닭이 없으니 그 상태로써 영원한 것이다. 이에 비하여 전자는 한시적이니 왜냐면 이 세상은 폐하여지고 불로 살라지기 위해 작정되어 있는 것이다[벧후 3:7]. 즉 전생(前生)과 후생(後生, 내생)의 대립 관계요 한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과 짝을 이룸이다.

물론 지금도 영원한 것은 영원한 속성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나 단지 인간만이 에덴낙원에서의 비극의 여파로 현재 영원하지를 않기 때문에 과도기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죽어 썩으면 흙으로 돌아가고 다시는 재생할 수 없는 까닭이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에덴낙원에서 노린 것이 바로 이런 함정이었다. 영물들 위에 군림해 있는 인간에 대한 시기심과 더불어 그것이 증오가 되었을 뿐 아니라, 처음부터 범죄한 자기 신상에 대한 보호 책략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인간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 자기 자유 의지로 동조해서 이리 되었으니 원(怨)도 한(恨)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분명 원수 사이인 것이다[창 3:15].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심 받았기 때문에 영원한 존재로서 그런 영적인 존재에 부합한 영적인 세계에서[이런 자연계가 아닌] 살아 인간을 돕기 위해 창조된 영물들[천사들]의 보좌를 받으며 그들 위에 군림해 있었지만, 영물들이 인간을 따르던 것이 인간의 범죄로 도리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따르는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담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를 따랐다는 것은 이제는 거꾸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 위에 군림하게 되어 있다는 뜻이니 그리하여 인간들은 오늘처럼 자연계에 예속되었고 악령들은 상대적인[인간은 처음 육체로 그 다음에 영혼이 조성되었음에 반해 악령들은 처음부터 영물 곧 영으로 지으심 받았으므로] 우위를 점하여 인간 세상을 좌우지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현재 인간은 영원하지를 못하다. 영혼은 영원하나 육체는 영원하지 못하므로 먼저 창조된 것이 영혼이 아니라 육체이기에 즉 육체의 바탕 위에 영혼이 그 육체에 안주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까닭에 이 육체가 없어지면 영혼의 존재 가치 역시 덩달아 상실됨이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육체는 자연계에 속한 흙으로 먼저 창조되었으나 나중에 영혼이 새로 창조됨으로써 창조의 새 기원이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즉 영혼이 우위였으나 현재는 그 반대가 된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생물체 창조는 인간으로써 그 일단락이 되었으니 다시 말해 자연계에 속한 생물체 창조의 클라이맥스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인간의 육체 창조였다.

다음 단계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그런 인간의 육체에 영혼이 새로이 창조됨으로써 영계(靈界) 창조의 기원을 이룩한 것이다. 그리하여 영원성을 지니는 이 영혼에 걸맞게 영계의 땅이 창설되고 식물, 동물의 순서로 자연계와 대칭[대립]되는 영계가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영혼으로 인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었으니 영혼이 육체보다 우위였다. 그래서 육체는 영혼을 따르게 되어 오늘날처럼 육체가 영혼을 지배하는 구조와 반대였었다.

그러나 불행히도[불행이라기보다 범죄로 인한 당연 결과로] 선악과를 먹어 [이 자체가 범죄 행위였다]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도로 돌아오고 보니 육체에 대한 영혼의 우월적 지위가 역전, 반전이 되어 육체가 이제는 영혼을 압도하고 지배하기에 이른 것이 성경에서 가리키는 이른바 “죄의 몸”[롬 6:6] 즉 “육신”[7:5-8:13]인 것이다. 그러나 이 불가항력의 “육신”을 통해 작용하던 “죄와 사망의 법”이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음으로써 완전 와해된 것이다[6:6]. “육신”에게는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모든 인생이 자연법칙에 예속되어 있으므로 인간 스스로 이 자연계의 굴레를 벗어나 영생한다는 것은[세상 종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에 따른 것으로서 망상과 미신에 불과하고 현실성이 전혀 없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기만술(欺瞞術)이다. 그래서 조물주[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 인생과 같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그 해결책을 찾아 주셨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라는 이름은 사람으로서 지니셨던 이름이요 그리스도란 '구원자' 곧 "기름 부으심을 받았다[성령의 능력을 입었다]"는 의미의 유대 말 "메시아"를 당시의 그리스[Greece] 말로 불렀던 칭호다.

“예수” 역시 그 탄생하신 유대 땅의 히브리 말로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제 인생은 구원자를 얻은 것이다. 이 구원자로 말미암는 개인적인 구원을 통하여 앞에서 말한 그런 전체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세계 건설로 연이어지는 힘찬 발동이 걸린 것이다. 먼저 개인적인 구원은 우리 각자가 새 피조물됨이다. 우리 각 사람이 새로 창조되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현재의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인생이 죽음에 빠져 있으니 그것이 비록 자업자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본다면 새 손질이 필요불가결한 급박한 상황이다. 그래서 조물주 친히 사람되시어 이상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으니 인간 범죄로 유발된 것이지만 전화위복으로서의 영원하고 아주 이상적인 인간 구조[그리스도와 하나되는]를 다시 이룩해 주신 것이다. 즉 개개인마다 아주 이상적인 자기 짝[동시에 공동으로 모두의 '사랑의 짝'으로서의 "머리"되심]을 얻게 하심이다.

그리하여 그 '사람'[짝]으로 하여금 각자의 삶을 사시게 하고[왜냐면 개인적인 선물로 각자가 모셨으니까] 각자는 오직 공통으로 모신 그 특별한 '사람'을 사랑하여 그 '사람' 중심으로 한 몸의 구조를 이루어 온전히 하나된 '사랑'의 이상 세계를 건립하게 됨이다.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인간의 범법행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 그래서 벌어진 피조물과 조물주와의 사이를 화해시키는 접점(接點)이 되신 것이고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기반이 되신 것이다.

단 이 극적인 새 창조는 우리 인생 각자의 자유 선택에 달려 있으므로 그래서 각자가 스스로 믿어야 얻는 양면성과 동시성의 구원임을 이제까지 설명해온 것이다. 이런 모든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왜 우리의 구원이 바르게 사는 데에 그 목적이 있고 단순히 영원히 사는 것 자체에 있지 않은지 그 이유를 밝힘에 있다. 따라서 "믿으면 구원된다"는 것은 말이야 간단하지만, 이는 우리 각자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을 말하는 것이므로 절대로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그런 동일한 자유 선택에 의해 첫 사람 아담이 영원히 사는 것을 버리고 스스로 죽음에 이른 사실을 감안한다면 보통 결심과 결단이 아니면 믿을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하게 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되지만 동시에 아무나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올 수 없다는 의미가 됨이다[요 6:65]. 그리스도를 믿었고 그래서 줄곧 따라다니던 많은 제자가 그 믿음을 스스로 버린 사례에서 이는 입증된다[:66]. 믿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명확한 예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처음부터 자기 부인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신 것은 나와 함께 죽으심이니 이 사실을 수용하게 되면 나로서는 자기가 부인됨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 얻는 믿음'의 특성인 것이다. 단지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즉 특정 사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만 인정하기만 하면 영생을 나누어 주신다는 식으로 수박 겉 핥기로 믿음을 착각하도록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기만해 온 것이다.

나 위해 죽으셨다는 그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보려고도 않고 그래서 "예복"도 입지 않은 채 "잔치 음식"[영생]만 먹으려고 덤벼 든 가당치도 않게 무지막지한 무례인 것이다[마 22:11,12]. 이런 무지하고 무례한 사람들은 일찌감치 가차없이 물리침을 당하게 되어 있다[:13]. 이런 사람들로 대부분 구성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의 거의 전부의 기독교 교회다. 때문에 그리스도 친히 미리 경고하시되, 망대를 세우는 비유 또는 전장에 임하는 왕의 사전(事前) 점검으로서의 비유로써 이 구원 얻는 믿음이 반드시 자기 부인과 연계되어 있음을 소상히 밝히신 것이다[눅 14:26-34].

오늘날은 기괴하게도 이런 명백하신 뜻을 완전히 외면한 채 "예복" 입지 않은 사람들만 끌어들이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대체적인 교회 실상을 대하게 된다. 그러니 이에 비추어 볼 때, 그네들의 설교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라"는 절박한 경고를 도무지 듣지 못하게 되어 있음은 아무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   조물주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피조물 사람이 되신 것은 그래서 영원히 사람으로 계시는 것은 다음과 같은 예로써 빗대어 설명할 수 있다. 여기 한 기계[사람]가 있는데 망가져 버렸다. 이것을 꼭 재생해[살려]내고 싶은데 다시 말하면 이전의 아름다운 형태를 그대로 유지 보존한 채 움직이도록 하고 싶으나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이와 똑같은 발동기(發動機)를 하나 더 만들어 그 망가진 것에 끼워 둘이 하나처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단지 여기서의 특징은 이전 발동기를 드러내어 새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새 발동기를 삽입함으로써 옛 발동기도 함께 돌아가도록 하는 장치다. 따라서 옛 발동기가 멈추면 새 발동기도 멈추고 새 발동기로 말미암아 비로소 옛 발동기도 돌아가므로 새 발동기가 없으면 옛 발동기는 영영 움직이지 않는 그런 구조다. 그래서 두 발동기가 동시에 움직이도록 되어 있는 협업(協業) 체제다. 이것이 우리 구원의 양면성, 동시성이다.

따라서 실상은 새 발동기가 작동됨으로써 비로소 옛 발동기가 살아 움직여 돌아가는 것이지만 겉으로 나타나기로는 그 망가진 기계가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옛 것은 겉모양 그대로 있고 속의 내부 장치만 전혀 새로운 구조의 새 것으로 작동되는 그런 이치다. 형태상으로는 옛 작품 그대로이나 실질상의 내용인즉 망가진 옛 것과 더불어 새로 된 새 것이 ‘하나로서의 구조’로 되어 있음이니, 겉 모양은 옛 망가진 것 그대로이나 속인즉 새 것의 내용으로 가득 차 있어 둘이 하나로 되어 움직임이다.

과거의 그 망가진 옛 것과 새로 만들어진 새 것이 혼연 일치되어 있으므로 모습은 동일하나 실질 내용으로 보자면 이전 것과 전혀 다르다. 이 망가져 버린 작품을 나 자신이라고 한다면 또는 우리 각자 인생이라고 한다면 이 망가진 '나'라는 인간과 똑같은 새 것 즉 '또 다른 사람'이 바로 나를 만드신 조물주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조물주 하나님께서 그 '새로운 것'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친히 그런 '새 것'이 되어 주신 것이다.

이 새 것이 되어 주시기 위해서는 나 같은 사람이 되셔야 했고 나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시므로 죽음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나를 위해 맛보시고 그리고 나를 위해 부활하신 것이니 이와 같이 나와 하나되심을 인하여 내 안에 성령으로 친히 임하여 계시고 따라서 이후 그리스도의 모든 것은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 되시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 육체[나 자신]의 영혼[그리스도]처럼 되어 나와 불가분의 하나가 되실 때 나는 비로소 새 창조가 되고 다시 출생함이다.

즉 둘이 하나됨이 구체화하고 현실화하는 것이다. 위에 예를 든 것은 기계적 장치에 빗댄 것이나 이와 같이 '나'와 '그리스도'와의 '둘이 하나됨'은 인격적인 사귐으로서 유지되므로 나로서는 복종이 절대적인 의미가 되는 것은 지당하다. 이 하나 됨은, 갑과 을이 하나되는 삼위일체의 원리에서 갑은 을을 안고 을은 갑을 업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짐과 같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명념(銘念)할 필요가 있다. 그 어느 쪽도 일방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나를 대신하시어 나의 죽음을 죽으셨다"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대신하신 죽음일 경우 동시의 움직임이 아니라 일방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이 될 수 없고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죄의 몸” 곧 나의 “육신”에게 포로되어 지낼 수밖에 없어 여전히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할 수밖에 없고 죄를 짓고 “여전히 나는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타령을 일삼도록 되어 있다.

완전히 그리스도의 일방적인 움직이심이 되므로 우리의 구원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육신" 타령을 하고 "죄인" 핑계를 내세우는 것이 이 첫 단추 잘못 끼움에서 발단된다. 그러나 이상 설명과 같이 나를 위해 죽으신 죽으심이 나와 하나 되심으로써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 되기 위해서라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문자 그대로 죽은 것이 되므로 절대로 그런 죄 타령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만일 그런 말을 하게 되면 당장 믿지 않는 자로 낙인 찍힐 수밖에 없다.

왜냐면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의 나의 구원 얻는 믿음은 바로 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남’[롬 6:3,4,8/골 2:12:13/엡 2:5-7/딤후 2:11,12]에 근거를 두는 까닭이다. 역사상의 인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나를 위한 그리고 모든 인류 개개인을 위한 그런 '새 것'이 되어 계심을 믿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시간적 격차가 현저한 그 이 천년 전의 인물 예수 그리스도와 오늘날의 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둘이 하나가 되느냐 한다면, 그 분은 영원부터 계시는 창조주[하나님의 아들]로서 순수하게 나를[모든 인류 각자를] 위해 사람이 되셨으므로, 보통 사람처럼 죽으면 그냥 죽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시어 오늘날도 그리고 영원히 살아 계시니 오늘날의 나와 어찌 하나 되는 일에 하자가 있겠는가.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시어 영원히 계시기 때문이다. 사람이시지만 하나님이시기에 그러하다. 그 때 당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살아 나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다. 그 때 당시 33세 가량이셨다면 지금이 2013년이니 자연계에 속한 사람 나이로 치면 2046세이신 것이다. 그러나 자연계에 속하시지 않고 영계에 속하시어 신령한 몸으로 계시니 그런 햇수 계산은 의미가 없다. 나이와 관계 없이 젊음의 최고 전성기 다시 말해 아담을 만드셨던 당시의 아담의 모습 그대로 계신다고 말하면 적합할 것이다.  

전생(前生)으로서의 이 세상

바로 이 세상이 영원 세상에 대하여 전생(前生)에 해당된다. 그 이전에는 전생이 없다. 바꾸어 말해 양면성의 원칙을 따름이니 시한부와 영원성의 대비(對比)요 전생(前生)과 내후생[來後生]의 대립일 뿐이다. 이런 사실은 삼위일체 원리 그대로이니 만상(萬象) 만사(萬事) 이에서 단 하나도 이탈함이 없다. 오늘날이 그 전생인 것이다. 이 전생을 뿌리로 하여 내생이라는 나무가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찰라 같은 시한부의 이생[전생]에 비해 내생은 영원무궁하다.

그래야 상칭(相稱, 대칭)이 된다. 이생이 있으면 반드시 내생이 있는 법이니 삼위일체 원리에서 양면성의 이치 그대로다. 이생에서의 인간 삶이 짧으니 이는 현재 세상 이전에는 전생이 없었다는 증거다. 왜냐면 짧다는 것은 불완전한 것이요, '불완전한 것'과 '완전한 것'이 짝을 이루고 있으므로 완전하고 영원한 것이 먼저 올 리가 없고, 현재는 이 세상이 선과 악이 뒤섞이는 등 일견 불완전하니까 선과 악이 명백하게 가름되어 사필귀정으로 나타나는 세계가 완전하고, 완전하니까 영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가, 장차 임하는 영원 세상을 기준할 때 전생(前生)에 해당되고, 이 세상 이전에는 전생이 없었다는 확실한 증명이 된다. 그래도 전생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무지한 탓이고 그래도 억지로 고집할 때는 속임수이거나 미신이거나 둘 중 하나이니 그 자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전히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시한부‘니까 뒤죽박죽이고 엉망진창이고 혼돈스러워 보이고 악과 선이 구별되지 않는 것 같은 양상임은 당연하고, 이에 비하여 영원성의 내생은 확고부동하게 정비, 정돈, 정착되어 있음이다.

혼돈 이후에 질서다. 고난 다음에 영광이다. 이렇게 만사가 상칭(相稱)하는 것으로서 이런 점에서 볼 때, 정확히 이 세상사·인간사는 한 치 오차 없이 운행되어 가는 이 우주의 자연법칙처럼 그 질서가 엄정하고 엄밀하여 빈 틈이 없음을 알게 된다. 겉보기처럼 절대로 혼돈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지금' '한 때' '우는' 자에게는 반드시 '장차' '영원히' '웃게' 되는 상황을 그 짝으로 맞게 되어 있다. 지금 한 때 웃는 자는 반드시 장차 영원히 울게 되는 그 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제 웃는 자는 장차 울게 되고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다"[눅 6:21,25] 하심이 이를 경고하심이다. 이 세상이 짧으면 반드시 영원한 세상이 있게 마련임을 다시 경고한다. 본격적인 것에 비해 지금은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에 불과한 까닭에, 성경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삶이든 죽음이든 진정한 삶 또는 죽음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3운법칙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이 강제가 바로 이 사실을 입증함이라고 이미 밝혔다.

진정한 삶 그리고 진정한 죽음은 이 세상 다음에 온다. 거기서 본격적으로 나누어져 분류된다. 그리고 영원히 지속된다. 일시적인 것으로서 본격적인 것에 대비하는 의미뿐이므로 이와 같은 삼운(三運) 법칙에 의해 인생들이 통제되고 있다. 고로 이는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도 간섭, 강제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면 이 세상에서의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고 영원토록 지속될 이 세계 이후의 차후 세계에서의 삶과 죽음이 본격적인 것으로서 그것만은 내 스스로 나의 완전 자유로써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사가 일견 뒤죽박죽, 엉망진창 즉 의로운 것도 불의한 것도 한데 뒤섞여 꿀꿀이죽이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악인에게는 마치 제 세상인 양 착각하여 그 악을 그대로 행하도록 만드는 함정이요 덫, 올무 역할을 하기에 그러하고, 의인에게 닥치는 고난은 여하한 환경과 조건에도 의를 사랑하여 순수한 동기로 의를 행한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해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분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에서 오직 의미가 있는 단 한 가지는, 이런 중에서도 끝까지 "의를 사랑하여 불법을 미워하느냐"[히 1:9] 아니면 그런 정갈한 사람 마음이 아닌 꿀꿀이 돼지의 마음이 되어 아무리 씻겨 주어도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벧후 2:22] 그런 상태이냐, 그 양단(兩端) 간을 충분히 저울질하고 다루어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 이 하나뿐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처신했던 그 성적(成績)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판결을 내리시는 것이니 곧 마지막 심판 때다[히 9:27].

즉 "참고 선을 행한"[롬 2:7,10/요 5:29] 결과를 낸 이들에게는 영생이요 그와 반대로 자기중심[self-seeking, selfishness, 우리말 번역 또는 일부 영역에서의 "당을 지어"(롬 2:8)라는 오역을 바로잡은 실제 의미]이 되어 악을 행한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震怒)와 분(忿), 영원한 환난과 곤고(困苦)만이 태일 것이다[:8,9].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때문에 악령들도 당장 처치되지 않고 한시적으로 이 세상에서 활동하도록 허용되어 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자신이야 자기의 악한 목적을 위해 자기의 의지로써 움직이지만 양면성의 이치에서 볼 때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당신의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차질 없이 진행시키고 계심이니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의 토대 위에서다. 따라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자신도 이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에서 하나의 '필요악(必要惡)'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미리 아시고 정하심도 피조물의 자기 선택의 자유 의지를 일절 건드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일이니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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