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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1체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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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영사운이란? (7) 등록일 2016.02.16 21:41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69

바/영/사/회-"[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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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한창 젊으신 나이의 사람으로서 성령으로 계시는 것이나 이는 사람으로서 그러하시다는 것이고,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이시므로 그런 나이가 필요 없으신 유일하신 분임을 앞에서도 지적했다. d창조 당시의 아담의 모습 그대로 혹은 신령한 몸의 천사들처럼 한창의 젊음 그대로이시다. 신령한 몸은 젊음과 늙음의 구별이 없다. 아담 역시 그러했을 것이나 범죄하여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면서 늙음이 진행된 것이다.

늙음이 진행되었어도 전신(前身)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신령한 몸이었던지라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돌아갔어도 그 잔존 기운으로 인해 천년 가까이 그 후대들이 모두 살았고 이는 노아 홍수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온 세상이 물로 뒤덮이는 홍수의 대란 속에서 기후 등 사정이 뒤바뀌어지면서 인간 수명은 현재와 같은 7,80세 정도로 수축, 단축되기 시작한다. 기타 악조건으로 인류는 이런 수명도 못다 채우고 대체로 30세 전후로 끝나는 때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나와 같이 생존해 있는 내 이웃 중 그 어느 누구와도 같으시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얼마든지 언제든지 하나가 될 수 있음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고 그에 관한 기록을 믿는 것도 아니고 그 어떤 다른 무엇, 누구의 해석, 주석, 성경 강해를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생존해 계시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내신 그대로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다

‘믿는다’기보다 ‘개인적으로 안다’, '신뢰한다', '사랑한다'는 말이 더 어울리고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는 “볼 수 있다”[벧전 1:8]는 말이 아니라 “만난다”는 뜻이요 더 정확하게는 “항상 함께 산다”는 의미다.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특정 사실 즉 해가 지구보다 크다든지, 알렉산더 대왕이 실제 역사적 인물이라든지, 소크라테스가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을 했다든가 하는 그런 사실들을 사실로서 수용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사실 수용'이 아닌 것이다.

망가진 옛 것을 새 것으로 대체[교체]하여 낡은 것을 버리고 새 것으로 대치(代置)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말한 대로 둘[새 것과 망가진 것]이 하나 되게 함으로써 옛 것의 기능을 새 것의 기능을 통해 되살려 옛 것의 엔진을 새 것의 엔진 가동을 통해 재가동시킴으로 이제는 두 개의 엔진 즉 초 강력 쌍발[雙發] 엔진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 새로운 존재가 되어 있되, 그런 기계적 장치와 같은 의미로 그리스도와 내가 사랑으로 하나되어 있음을 믿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이렇게 둘이 하나 되는 방법이 세례 받고[세례 의식을 치르고] 성령 받음[성령을 내 안에 받아 모심]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나와 똑같이 세례 받으시고 성령 받으신 꼭 그대로의 형식이다. 세례 받는 것은, 나를 위해[갈 2:20] 하나님의 아들[조물주]께서 사람이 되셨으니 내 이름으로 사람이 되셨으므로 즉 망가진 옛 것이 새 것과 하나 되는 관계에서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어 있음이 엄연한 사실이라고 내가 아주 확실하게 도장을 찍는 일이다. 다시 말해 현실적인 나의 사망 진단서에 내 스스로 서명 날인하는 의미이다.

그러면 성령 받음은 무엇인가. 나의 서명 사실을 수용하시고 이번에는 하나님 쪽에서 친히 성령으로 서명 날인하심이니 그래서 성령으로 인(印) 치신다 하는 것이다[고후 1:22/엡 1:13]. 이로써 나는 주님의 것 즉 주님의 소유, 주님은 나의 소유가 되신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라 부르는 것이다[고전 12:3]. 나를 소유하신 나의 주인, 나의 소유주 따라서 나는 죽든지 살든지 주인의 뜻대로 행함으로써 "복종함"[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에 내 생명이 있다는 바로 그 뜻이 "주님, 주"의 의미다.

그래서 주님은 또한 자신을 내게 선물로 주심이니 곧 성령께서 그 선물이시고[행 2:38] 성령으로 내 안에 친히 임하셔서[요일 3:24] 나의 소유가 되심이다. 이래서 나는 주님의 것이 되고 주님은 내 것이 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할 것도 없이 주님은 나만을 위하시고 나는 주님만을 위한다는 약속인 것이다. 쌍방이 그 계약서에 서명 날인함이다. 이 바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한다는 생명의 법칙 이행 약조이다.

이 동력을 따라 힘차게 가동함으로써 약동하는 것이다. 바울이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서 주님께 드리기 위해 중매를 드는 것”이라 한 대로[고후 11:2] 신랑 신부가 백년 해로를 굳게 약조하는 것과 같음이다. 무슨 약속인가. 평생 피차에 대하여 충실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미 그 생명으로써 내게 절대적인 의미의 완전한 약속을 하셨으니 곧 십자가 죽으심이다.

그 이상 또는 더 이상의 것은 필요 없는 최고 경지의 최종 한계에까지 우리는 이른 것이다[요 15:13]. 오직 남은 것은 나의 차례이니, 나에게 전적으로 달린 것이다. 약속 파기도 나의 몫이요 약속 준수도 오로지 내게 달렸다. 둘 사이가 깨어져도 나 때문이요 보전되어도 내가 그 핵심이다. 약속 이행의 능력은 언제나 강조하는 말이지만 하나님의 선물이다.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시는[사시는] 그리스도 친히 그 능력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이 능력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은 순수하게 나 자신인데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 위해 사시는 모습은 어디서 나타나느냐 하면 당연히 하늘에 계시는 바로 그 모습이 나의 모습으로 하고 계시므로 그와 같이 움직이시는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나를 위하심이다. 그런데 항상 명심할 것은 동시성이요 양면성이다. 양쪽이 반드시 함께 움직임이다.

이런 동시성과 양면성의 특성은 지니는 것이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그 어느 인간도 또는 인간의 작용도 이 가장 행복한 이상적인 삶의 틀을 만들지도 못하고 구성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 종교가 구원이 전혀 없는 헛된 구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그들의 주장에는 사랑의 이러한 동시성이나 양면성이 없는 것이 바로 이를 증명함이다.

상대를 믿어야 나도 동시에 움직일 수 있는데 믿지 못하니 영원토록 이런 사랑 관계는 그 누구와도 형성될 수가 없음이다. 내세의 행복이니 극락이니 아무리 침이 마르게 주장을 해도 실현 불가능한 인간의 한낱 이상만을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위해서는 만물을 지으신 어버이 같은 하나님의 존재가 설정되어져야 하고 그것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증거가 확실히 나타나져야 하는 것이다.

물론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그런 증거가 필요 없었다. 처음 정하신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그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 죽은 자로서의 인생들이 그와 같은 애초의 원 상태대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시고 나 위하여 죽으시지 않고는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시대는 영원히 그리스도의 시대라 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살게 될 때 앞에서 말한 약속은 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영생을 명백하게 약속이라 성경은 정의하고 있다[요일 2:25/약 1:12/2:5]. 따라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경고하신 그대로다[마 7:21]. “주님, 주님” 한다고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말로만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는 것과 같음이다.

이는 약속 이행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다[고후 5:15/롬 14:7-9]. 다시 말해 사람 사는 도리 그 방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그 도리를 따라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다. 가장 행복하게 이상적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이 한 몸의 체제에서 머리를 위하고 머리를 위함으로써 자기 이웃을 위하는 것으로써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이니 이는 이미 여러 차례 설명한 바와 같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그것은 오로지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니[롬 14:7/고후 5:15/빌 1:21/갈 2:20] 여기에 아무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곧 주님의 보내심을 받았으니[요 20:21]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4:34]. 바로 이것이 “선을 행함”[롬 2:7,10/요 5:29]일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게 되어 있고 의를 행하게 되어 있음이다. 이렇게 선을 행하니까 자연스럽게 영생의 보상을 받는 것이다[롬 2:7,10/요 5:29/계 20:12,13/딤전 4:16/고후 5:9-11/행 3:26].

반면에 악을 행하는 자는 멸망이다[롬 2:8,9]. 왜냐면 생명의 법칙대로 행하지 않으니 유일하게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스스로 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는 생명 자체를 버림이다. 그 이유는 그렇게 행복하게 사는 법을 따르지 않은 채 아무리 영생을 해도 그런 삶은 영생커녕 단 하루를 살아도 지겹고 따분하고 싫증이 나 당장 살기를 싫어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지경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그 때문이다.

당연히 죽음이지 달리 모습이 나타날 리가 없다. 악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다[고후 5:15]. 단 이 악한 세상의 특성상 “참고”[:7] 선을 행해야 한다. 이는 “인내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히 10:36]과 같은 뜻이요 “인내로 결실한다”[눅 8:15] 하심과 같다. 참고 견딘다고 무엇 대단한 것도 아니다 앞서 우리가 와신상담의 고사를 살펴 보았거니와 누구나 이런 경우에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이다.

이미 이 세상은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즉 인간이 모두 "죽은 자"[마 8:22]들이므로 저주 받은 땅인 것이다[창 3:17]. 모세 율법에서 주검[死體]을 부정(不淨)하다 하신 그대로다.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이와 같이 하나님 지으신 땅이 망쳐진 것이다[계 11:18]. 그리하고도 오히려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분노하는"[:18] 등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대상이다[:18]. 이런 끔찍한 죄악을 회개하는 자에게만 영생 곧 구원으로 보답하시는 것이다[:18].

진노 아래 있고 저주 받은 이 땅 곧 세상에 무슨 삶의 낙이 있으리요. 오직 있다 할 때는 진노의 대상이 되어 있는 죄인 곧 악인을 멸망하도록 유인하는 다시 말해 그들을 추려내고 솎아내고 걸러내는 무서운 함정, 덫, 올무의 역할일 뿐이다. 그래서 이 악한 세상에서 부유하게 잘 사는 등의 위로를 받은 이들은 오는 세상에서는 다시는 위로가 없다고 선언하신 것이다[눅 6:24,25/16:25]. 소위 하나님의 축복 받아 세상에서 잘 산다는 소리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종교 교리인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몸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는 절대로 영원히 살 수가 없다. 이 자연법칙을 무시하고서 영생하게 된다는 세상 모든 종교의 교리는 그 자체가 황당한 미신이라 단정함이 여기에 근거한다. 인간 스스로의 의지나 수양 하나로 이 철벽같은 자연법칙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너무 유치한 발상이요 당치도 않은 망상이라는 것은 철부지 어린애라도 능히 수긍할 수 있는 것으로서 기본 상식에 속한다. 이런 몰상식한 것을 교리로 삼아 종교라는 것에 심취해 있으니 실로 이성적이라 하는 인간으로서 황당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理性]에 대한 모멸이라 할 수 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인간이 이렇게도 어리석을 수 있다니 이는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악령이 인간을 마음대로 농락하고 있다는 증거다. 어차피 죽게 되어 있으니 죽을 것은 죽어야 하는 것이다. 죽어야 비로소 이 자연법칙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마련됨이다. 죽었을 경우 자연법칙은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자연계의 자연법칙과는 완전히 갈라서는 것이다.

문제는 살고자 하는 목적으로 죽는 데에 있는지라, 바로 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일이 사람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나 위하여 죽어 주심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살아나실 때에는 바로 이같이 자연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별다른 존재로서 살아나신 것이니 앞에서 지적한 대로 영적 세계의 신령한 몸으로 부활 즉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죽으심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나되어 있는 위치에서[그 위치는 내 안에 친히 성령으로 오심으로써 현실화, 구체화된다] 이루어졌으므로 역시 살아나심도 나와 하나되심으로써 그러하므로 이 역시 성령을 내가 받아 모심으로써 되니 따라서 이는 내가는 문자 그대로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는 근거이다.

이제 그리스도와 하나 된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자연법칙과는 완전 결별이 되었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확실한 토대가 그리스도와 함께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남으로써 완벽하게 다져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 그 장사 지내지심이 내가 무덤에 묻혀진 것이니 죽음은 철저히 완료된 것이다. 고로 그 살아나심[신령한 몸으로] 역시 바로 내가 그렇게 살아나 있음이 됨으로써 비로소 나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할 수 있게 되는 이치다.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은 그리스도 친히 마지막 아담으로서 바로 첫 사람 아담의 위치에 계신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아담이 그 범죄로 죽었다가 그 죽음의 대가를 모두 치르고 다시 살아날 때에는 범죄하기 전의 상태 즉 신령한 몸으로 있던 그 몸으로 다시 복구되는 양상으로서의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심이었다. 이와 같이 빈 틈 없이 인(因)과 과(果)의 철두철미한 상호 관계다. 하나님의 일하시고 움직이심이 다 이와 같으시다.

아담이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아담이 아니시지만 아담의 위치에 그리스도께서 계심이다[고전 15:45]. 그래서 아담이 모든 인류의 기원이 되었음과 같이[그러나 실상은 그 자신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됨을 인해 죽은 인생들의 원류(源流)가 된 것이어서 성경은 아담을 우리 인간의 조상이라는 말을 한번도 쓴 적이 없고 오직 아브라함을 우리 믿음의 조상이라 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산 자의 근원이 되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아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이 이제 그리스도 곧 마지막 아담의 성령을 "물려받아" 그 닮은꼴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낳으시는 것이 아니니 왜냐면 아들께서는 항상 아버지와 하나로 계심을 통해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므로 "성령"이시라 하게 되면 아들 혼자의 모습이 아니시고 아버지와 함께 하나로 계시는 모습이시므로 아버지 또한 아들과 함께 계심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닮은꼴이 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아들께서는 형상이시고 아버지께서 실상 또는 실체이시니 항상 아버지께서 모든 일의 중심이시다.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형상으로서의 "말씀"[요 1:1]이신 것이다. 형상과 실체와의 불가분성에서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형상으로 나타나시고 아들께서 곧 아버지의 형상이니 그래서 둘이 항상 하나로 존재하신다 함이다. 그러나 아들이시라고 한 쪽으로 물러나시거나 비켜 서시는 것이 아니니, 둘이 하나됨의 특성은 동시성이고 양면성이므로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시고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위하심이다.

바로 이와 같은 '둘이 하나되는' 관계의 이치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곧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됨이다. 곧 삼위일체의 원리다. 양면성의 의미이니, 하나는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됨을 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것이 나의 새 창조요 다시 출생함이라 했거니와, 또 다른 의미는 내 스스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러야"[빌 3:10,11] 하는 것이다. 전자는 이미 이루어진 일이요 후자는 그렇게 이미 이뤄진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그 능력을 배경으로 힘을 얻어 내 스스로 부활에 이르는 일이다.

내 스스로 죽었다가 스스로 다시 살아나는 일이다. 이는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사실을 가리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요 10:17,18] 그리스도 친히 밝히신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여기서 "계명을 받으셨다"는 것은,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에서 절대로 그 어느 쪽도 자기를 위하게 되어 있지 않음을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여 즉 아버지 친히 그런 계명을 내리신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요[요 6:39:40] 이는 또한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니[롬 8:11]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둘이 하나로 계시기 때문이다. 아들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렇게 나를 살리신다 하셨으니[요 6:39] 이는 곧 아버지께서 나를 살리시는 의미인 것이다. 같은 원리다.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 나의 구원인즉 내가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모든 일을 할 때 이는 그리스도 친히 나를 통해서 일하심이 된다.

내가 죽는 것은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즉 그의 보내심을 받아[20:21] 당하는 고난이니[골 1:24] 이는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내 육체를 통하여 그 남으신 고난을 마저 채우심이다[:24]. 이와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살리시는 것은 내가 그 뜻을 받들어 스스로 죽었다가 즉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동참, 교제, fellowship]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고난 받아 죽었다가 내 스스로 살아남이다.

"내 스스로 살아난다니 큰 일 날 소리도 다 한다" 하겠지만, 이것이 사랑의 주인 의식 즉 능동성이요 적극성이다. 사랑의 동시성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살리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살리시는 것이 분명하지만, 나는 그렇게 나를 살려 주시니 그냥 피동적으로 받는 것으로만 그치게 되면 나 자신을 위함이 되어 일방적으로 피동적인 의미밖에 없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나의 살아남을 나 자신을 위하는 것으로 받지 않고 내 스스로 그리스도를 위하는 의미로 전향 또는 변환시키는 것이 "내 스스로 살아남"의 의미이다. 이러한 오묘한 관계가 '사랑'이다.

즉 내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to arrive at, attain, 도달, 달성, 획득하다]"[빌 3:11] 것이다. "어찌하든지[by any means]"[:11]라 했으니 확고한 나의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내 자신의 구원을 위함인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에 참예 곧 동참하기 위함이니 그리스도 친히 내 육체를 통해 그 남으신 고난을 마저 채우시는 일에 내 육체를 기꺼이 제공해 드림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피동적으로 소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자진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기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이다[계 1:9]. 나를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함이다.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나의 이제부터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 표현이 사람에 따라서는 어색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는 내가 구원을 받았으나 즉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지만 내 스스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과 같은 맥락이다.

고로 이는 또한 내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나를 부인하시고 내가 주님을 시인해야 주님도 나를 시인하실 것이라는 경고와 역시 원리는 같다[딤후 2:12/마 10:32]. 무슨 원리냐 하면 삼위일체의 원리이다. 또는 양면성의 원리라 해도 상관 없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부인하시면 나는 멸망이고 시인하셔야 내가 천국에 들어감이 허용되는데, "그러면 구원이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뜻이 아니냐?" 하겠지만, 당연히 그러하다.

아무리 그리스도의 구원은 완성되어 거저 주시는 은혜로 만인을 기다리고 있지만 내 스스로가 믿지 않으면 그 구원이 내게는 그림의 떡일 뿐임과 마찬가지다. 이것은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구원하시되 선별해서 구원하신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 선별은 하나님 임의로 하시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나 자신에게 달려 있음이니, 하나님 임의로 결정되는 일이라면 우리에게 자유를 보장해 주신 의미가 무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아 좌우되는 것이 분명하다. 또 내 스스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 역시 아니니, 아무리 은혜로 믿음으로써 선물로 얻는 구원이지만 하나님께서 오게 하여 주시지 않으면 내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아무 관련이 없다[요 6:45,65]. 다시 말해 단지 영생에만 욕심이 나서 그리스도께 나오는 자는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사랑과 생명의 법칙에서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전부를 주셔서 영원히 나의 소유가 되어 주셨으니 나 또한 나의 전부를 드려 기쁘게 주님의 소유가 되어 드릴 때 한해서만 그래서 전적으로 그 뜻에 복종할 의지가 있을 경우에만 그래서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호응하여 회개하는 이에게만 구원을 베푸심이다.

이와 같이 나의 의지가 절대적인 관건이 되어 필요 불가결이 되어 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의지, 복종하겠다는 의지다[고후 5:9]. 사랑의 의지이니, 고로 이 사랑[왜냐면 일방적인 사랑은 없는 것이어서 주님의 내게 대한 사랑이 풍성하시므로] 자체가 내게 무한한 기쁨과 평안과 위로로 작용하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것이니, 만일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동기나 목적이라면[예를 들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나 소위 "상급"을 타기 위해서나] 단언하거니와 구원은 없다.

왜냐면 한번도 구원 받은 적이 없거나 사랑이 식어[믿기는 했어도-눅 8:13] 구원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마 24:12,13]. 따라서 열매를 맺는 것도 나 자신의 사랑의 의지에 달린 것이니 스스로 열매를 맺어야 하고 자동적으로 열매가 열리거나 하나님 친히 열매 맺도록 관여하시지는 않는다. 열매 맺고자 하는 나의 의지에 좌우되어 나타나는 능력[열매 맺게 하시는]이다. 30배, 60배, 100배의 차등이 생기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왜냐면 하나님께는 똑같은 피조물인데 차별해서 상관하실 리는 없는 까닭이다.

에서와 야곱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야곱은 내가 사랑했고 에서는 내가 미워하였다"[롬 9:13] 하심도 이유 없이 미워하고 사랑하실 리 없으니, 미리 아시는 것을 근거로 하여 에서가 창세기에 소개된 대로 그런 식으로 즉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무시하고 평소 나가게 될 것을 미리 아신 것이므로 미워하신 것이고 야곱은 하나님을 찾고 그 말씀을 마음에 담아 두게 될 것이기에 사랑하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셨기 때문에 에서가 그렇게 벗나간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줄을 미리 아셨다는 그 차이다.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움직이신다면 모두가 다 100배의 결실을 하도록 만드셨을 것이 아닌가. 어떤 이는 보다 못한 30배만 결실하도록 방치하실 리가 없다. 하나님은 100배의 결실을 하도록 똑같이 대하셔서 은혜를 베푸셨지만 사람에 따라 다르니 어찌하실 도리가 없는 것이다.

3년이나 열매 맺기를 기다려도 열매가 없으므로 그 나무를 없애치우려는 주인과 같다[눅 13:7]. 나무를 심고 자라게 하고 그리고 열매를 맺도록 모든 가능한 조처를 취해 주는 역할은 주인에게 있고 직접 열매를 맺는 것은 나무 자체의 몫이다. 열매 맺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이룩하신 것이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은혜이나, 열매를 맺는 것 즉 직접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것은 나의 몫이다. 열매 맺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나무를 없애 버리는 것과 같이 우리 역시 열매가 없을 때 그와 같이 "찍힘을 당한다"[롬 11:22]는 경고이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하고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진다"[눅 3:9] 함도 같은 뜻이다. 회개는 "돌이켜 그 악함을 버림"이다[행 3:26]. 악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자기중심을 말함이다. 결국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룬다"든가,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는다"든가 등의 모든 일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고후 5:15]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됨이다.

즉 우리를 새로 창조하시고 다시 출생하게 하신 목적 즉 구원하신 목적[롬 14:9/고후 5:15]에 부합하게 우리가 순종하는지 여부에 모든 것이 달려 있음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함께 부활함으로써 새 생명 가운데 있으나 내 스스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 하든지 부활에 이르려 하는"[빌 3:10,11] 것이니, 이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심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나의 죽을 몸도 살리시는"[롬 8:11] 사실과 배치되지 않음은, 생명과 사랑의 법칙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살리셔서[고전 6:14] "몸의 구속"[롬 8:23]을 받게 하신다는 사실과 모순이 되지만, '다시는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므로 하나님은 나를 위하시고 나는 하나님을 위하심으로써 서로가 맞아 떨어짐으로 그렇게 되는 것인즉 일 자체는 겹쳐지고 같은 내용이더라도, 일하는 동기가 완전히 달라 갑은 을을 위함이고 을은 갑을 위함인즉 혼연 일치하고 조화되어 쌍방간의 교류로서 아무런 흠이 없고 어색함이 없는 것이다.

갑이 갑 자신을 위하고 을 역시 갑 자신을 위하는 것이라면[혹은 을이 을 자신을  위하고 갑도 을을 위함이라면] 일방적이 되어 버려 더 다시 사랑이 존재하지 않게 되어 독재가 되고 상대방은 항상 노예의 처지를 벗어날 수 없게 되지만, 또는 갑이 갑 자신을 위하고 을 역시을 자신을 위하는 것이라면 상호간 충돌이 되어 뒤범벅이 되겠지만, 서로가 서로를 위하니 혼연 일치의 조화 통일이 이루어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시면 모든 것은 깨끗이 끝나는 것이지, 왜 나 자신 또 부활을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더 다시는 달 필요가 없게 된다. 하나님으로서는 나를 위하심이고 나로서는 하나님을 위하는 것으로서 의미가 서로 다르지만[다른 양상의 모습이지만] 삼위일체의 원리에서 서로 대칭적이 되어 하나로서의 조화로 완결되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보어의 상보성 원리에서 보어가 바로 이런 내용을 들여다보고 사람 삶의 기본 틀을 연상(聯想)해 낸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친히 십자가에 나아가시기 전에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니,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요 10:17,18] 하심과 같은 이치다. 즉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리시는 것이지만[롬 8:11] 아들로서는 아들 스스로 다시 살아나시는 의미가 됨이니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이시기 때문이요, 이 이치는 앞에서 "내 스스로 부활에 이른다" 함과 같은 의미이다.

왜냐면 아들로서 하시는 일은 모두가 아버지를 위하심이요 아버지의 모든 하시는 일은 아들을 위하심이어서 서로 각자 자기 할 몫을 다하심이다. 아버지께서 비록 주동(主動)이시지만 아들로서도 피동적으로 움직임이 없으시다는 뜻이다. 실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리셨으나, 아들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를 살리심으로 살아났다는 데에 의미를 두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다는 점을 강조하심이다.

그래서 "이 계명을 아버지에게서 받았다"[요 10:18] 하셨다. 이는 이 하나 되심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에 있음과 같이 바로 이렇게 어느 쪽이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게 되어 있음을 뜻하시는 것으로서, 이 영원한 '생명의 법질서'가 지켜지도록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맺어져 있는 영원한 약속의 의미임을 명시하심이다. 같은 약속 관계라도 큰 자와 작은 자와의 약속은, 큰 쪽에서는 명령[계명]이 되고 작은 쪽에서는 복종이 되는 까닭이다.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영원히 사랑 가운데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의미를 가리키심이다. 이상 모든 설명은 '사랑으로 둘이 하나 되어 있음'의 이치이니 사랑하는 양쪽 모두 동시에 주인이요 동시에 종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사랑으로 종 노릇하라"[갈 5:13] 함과 같이 서로가 종 노릇하니 서로가 서로에게 종이요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주인이요 서로가 서로에게 대하여 소유주(所有主)가 되어 있음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인님이라 하여 "주님"이라 부르는 것이다. 사랑 가운데에서의 주인을 모심이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의 의미이다. 사랑 가운데에서의 자유이다. 하늘의 별들과 같이 아무리 중다(衆多)하더라도 각 개체가 완전 자유와 자주 독립성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 이 사랑 가운데에서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이 이 사랑 가운데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불교에서 크게 그르치는 것이 자기 홀로 이른바 "대각(大覺)"하여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함에 있다. 자기 '홀로' "열반"이니 "해탈"이니 하여 '자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혼자이면 자유를 논할 수조차 없다. 관계와 관계 속의 원만한 '사랑' 가운데에서만 '자주 독립성'을 구가할 수 있다. 거기서만 완전한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자유"의 진정한 의미가 이렇게 사랑으로써 서로가 종이 되고 주인이 되는 이치에 있기 때문이다.

연기생(緣起生)을 부르짖으면서도 즉 모든 현상은 무수한 원인과 조건이 서로 관계해서 성립되어 있는 것이라 하면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 '사랑'을 전적으로 도외시하고, 난데없이 "영원한 실제가 없다"는 것만 논증하기 위해서 동원하니, 이런 모순과 불합리 속에서 진리가 탄생하기는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이 피어나기를 바람이 더 나을 것이라 함과 같다.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핵심은 완전히 놓쳐 버린 채 진리를 찾느라 부산을 떨고 있는 것이다.

엄마가 아기에게 종 노릇하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엄마가 되어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 가운데 섬기는 자로 있다" 선포하셨다[눅 22:27]. 이는 영원히 그러하시다는 의미이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엄마가 아기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그림인 것이다. 아들께서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다"[요 1:18]고 한 것처럼 조물주[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피조물들에게 어버이로 계심이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식이나 새끼에 대한 사랑이 모두 이 하나님의 어버이 사랑을 나타낸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처음부터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엄마 품속에 있을 때처럼 평안, 기쁨, 자유, 사랑은 느끼지 못한다. 자라서는 잊어 버리게 된다지만 본성적으로는 그리워하게 되어 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그 근본적인 '엄마의 품속'인 것이다. 이러한 '엄마와 아기 관계'에서의 상호 '주인과 종의 관계'요 사랑으로 '둘이 하나됨'이 조물주와 피조물 관계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하여 피조물들 사이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위하니 모두가 나의 세상이요 온통 나의 소유 아님이 없다[고전 3:21,22].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된 만유의 상속자들"[롬 8:17]인 것이다. 천국에서는 그 어느 곳에 가도 모두 하는 말은, "나는 당신의 종이요 당신은 나의 주인이니 원하는 대로 가지시고 누리시고 마음껏 즐기십시오, 그리고 저를 부리십시오. 언제든지 대령하겠습니다"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가 모든 것의 주인이 되고 모두를 나의 종으로 삼고 모든 것을 나의 소유로 삼게 된다. 우리 모두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 친히 그렇게 나를 위하시는데 하물며 다른 이, 다른 것이야 말할 것도 없다. 나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이 주인 노릇을 하고 모든 것의 소유주가 되어 있으니 모두가 말하자면 머리가 되어 있는 격이다. 머리가 되어 있어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모든 것을 소유하여 모두가 똑같이 그러하되 그러나 서로 간에 결코 다투는 일이 없다.

희한한 별천지 그야말로 이상향이 아닌가. 모두가 '주인이 되어 있는 종', '종이 되어 있는 주인'이 되어 있음이다. 그 유일한 비결은 각자의 자기 부인에 있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니 종이 되라면 얼마든지 종이 된다. 주인이 되라면 아무 사심 없이 주인 노릇을 한다. 오로지 상대[머리든, 같은 지체이든]를 위해 살기 때문이다. 한 머리를 공동으로 모시고 모두가 머리를 위하고 이웃을 위함으로써 일치 조화하는 엄정한 법질서 아래 일사불란하여 자기 스스로를 위한 욕심이 일절 없되 기계적 작용도 아니고 순수하게 자기의 자발적인 자유 의지로써 그렇게 하는데도. 자기를 위해 사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롬 14:9/고후 5:15].

나 역시 자기 부인을 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나의 주인으로 섬기기는 마찬가지다. 즉 주인이면서도 동시에 종이요, 종이면서도 동시에 또 주인인 것이니 말 그대로 사랑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일방적이지 않으니 관계와 관계 속에서 혼연 하나가 되어 얽히고 있어 말 그대로 일체(一體) 곧 한 몸이다. 이것이 진정한 "연기생"이다. 사랑으로 하나된 관계와 관계 속에서 일체가 움직여 질서 정연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처음부터 죽은 자로서 자기중심으로 아등바등 하던 우리가 이렇게 자기 부인하게 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이미 설명한 대로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십자가 죽으심에 있는 것이다. 우리 각자와 관련되는 그리스도의 의미, 혹은 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런 꿈과 같은 자기 부인이 가능해지는지 그 근본이 되는 사실을 열거하여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①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려면 내가 나를 위해 살아 나를 위할 필요가 없도록 누가 대신 나를 위해 주어야 하고 또한 그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냥 자기를 부인한다고 해서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다. 그럴 바에야 많은 사람이 벌써부터 즉 그리스도 오시기 전부터 이런 자기 부인을 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했으니 이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한다는 것은 하나님 친히 우리를 위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이 어떻게 증명이 되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그리스도께서 그 영원하고도 확고한 증거가 되어 계심이다.

②또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에서, 이제 다시는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살 수 없다는 확실한 근거를 찾게 된다. 이렇게 함께 죽는 것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라는 확신은 그냥 그렇게 그리스도의 나 위하셨다는 죽으심을 사실로서 인정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실제적인 아무 효험도 없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장치로 구현되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와 같이 나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친히 반드시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여 나라는 존재를 영원히 구성해 계심으로써 그 죽음이 나의 죽음, 그 부활이 나의 이 새 생명 가운데 사는 삶이 됨이다.

그래서 명실상부하게 나와 그리스도가 둘이 하나 되어 있는 구조 또는 체제를 만들고 있음이다. 그래서 영원하신 선물로서의 성령을 우리가 받아 모심으로써 이 사실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나의 "성령 받음"은 그리스도 친히 아버지와 하나 되어 계시는 모습으로서 내 안에 임하여 오시어 나와 하나 되심을 가리킴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자신께서 내 안에 오셔서 '영혼[성령]'과 '육체[나 자신]' 사이로서 영구적으로 나라는 존재를 구성해 계심을 말한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로서 존재하므로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 곧 내가 그렇게 실제 역사적인 사실로서 죽은 것을 말하는 것이므로 나의 자기 부인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 그 나 자신이 죽어 장사 지내졌기 때문이다.

③그리고 성령의 임하심은 나만 아니라 나와 함께 같은 믿음에 속해 있는 모든 이들에게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그렇게 성령을 모신 이들이 성령 안에서 한 몸을 구성하고 있음을 아는 고로, 그들은 곧 나 자신처럼 되어 똑같은 머리를 모신 한 몸의 각 지체로서 기능(機能)하는 위치에 있음이다. 고로 나를 기준하면 나와 똑같은 나 자신이면서도 역할이 각기 다른 형형색색의 여러 수만의 나 자신으로 짜여진 '거대한 나'가 구성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한 몸에서 눈은 눈이요 입은 입이고 손은 손이지만 눈이나 손이나 서로를 남이라 여기지 않고 자기 자신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한 몸에 붙어 한 머리의 통제를 받는 불가분의 유기체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를 그들이 위해 주는 것이고 나는 그들을 위해 주는 관계이니 그래서 자기 부인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는 물론 머리의 지시를 받음으로써 나 자신이나 그들이나 서로를 위하게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즉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기준하면 몸의 각 지체를 통하여 머리로서 나를 위해 주시는 것이다. 물론 친히 나를 위하시는 기본 원칙 아래에서 그와 같이 그들로 하여금 나를 위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위함을 받으니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생기지 않아 자기 부인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 친히 나를 사랑하심으로써 나를 위하신다는 사실과, 그와 같이 함께 똑같이 성령을 받아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모심으로써 그들 역시 나와 한 몸을 이루어 나를 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이런 확신이 없으면 내가 나를 부인하는 것이 실제 불가능하다. 자기 부인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곧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복종하고 같은 믿음의 형제들 곧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여겨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마 22:37-40]. "과연 그런 삶이 실제 이 세상에서 가능하냐?" 할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다. "의인(義人) 은 믿음으로 산다" 함이다. 이 말씀이 왜 나왔느냐 하면 하박국 선지자(先知者)가 "왜 세상은 악인으로 가득하고 죄를 지어 악하게 해야 형통하고 그 반면에 의인은 항상 볕들 날이 없는 쥐 구멍 속에서 위축되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항변에 대한 대답으로 주신 것이다. 그래서 "참고" "인내로써" 선을 행함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다[로 2:7/히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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