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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1) 집에 있는 교회 등록일 2016.02.27 21:17
글쓴이 김일동 조회 369

 

'한 사람'이신데 어찌 모든 사람에게 나와 동일하게 주시는 선물이 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사람이심과 동시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드리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위해 살기커녕[하나님조차도 부정하며] 자신을 위해 살아왔으니 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 이 죽을 몸이건만 한없이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어 저 위해 피 흘려 죽음을 맛보셨으니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하나님만 사랑하게 되어 있고 또 저만 아니라 저 외의 다른 사람들 역시 하나님이 사랑하시므로 저도 그들을 사랑하게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제 중심으로 이제껏 살아왔으니 그러한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회개하여 과거처럼 절대로 살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나 자신에게 다짐한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나의 것이 되셨으니 나 또한 당연히 그 분의 것이라 나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도 하나님 뜻대로 살련다. 내가 이제 내 몸을 돌보더라도 나의 것으로 보살핌이 아니라 그 분(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서 돌보는 것이니 내 이웃 역시 그 분의 것임에는 일반이므로 그 분[주님一나의 주인님, 나의 소유주]의 것으로서 나를 돌보듯이 돌보며 정성으로 위하련다".

나와 함께 사시는 주님이 나의 영원한 모습이시요 그 분이 소유하신 모든 것이 바로 나의 것이 되어 있으니 나는 내 이웃에게 주고 또 주어도 아까운 것이 없고 또한 다함이 없고 모자람이 없다. 이런 피차간의 사랑으로 그 분을 머리로 하여 모든 사람이 한 몸으로서의 공동체를 이루면 이야말로 인류 숙원이 실현되는 완벽한 구도(構圖)로서 명실 상부하게 행복한 사랑의 세계 곧 영원한 이상향이 구현된다.

이런 이상향을 지향하여 적은 무리이나마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루어 그런 이상향의 삶을 세상에서 선보이고 믿음의 동지들을 규합하려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일을 대행(代行)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이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을 따라 만물을 그 원리와 이치대로 지으시니 곧 짝의 원리 또는 대칭성 원리로서 삼위일체 법칙이다. 고로 생명이 있음으로 죽음이 있듯이 영생이 있으니 영벌(永罰)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품성도 사랑이심과 동시에 "소멸[燒滅]하는 불"이시다. 하나님의 나라 곧 인생의 이상향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세계가 영원한 고통의 "불 못"인데 이 양자의 대칭성은 영원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사람이 죽으면 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바로 그런 영원한 고통으로 연계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인간을 죄인으로 또는 죽게 되어 있는 자로 만드시지 않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영원히 죽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창조하셨으나 첫 사람[아담]이 범죄하여 이렇게 죽음에 이르는 자 즉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까닭에,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영원한 죄인으로서의 영원한 멸망[to perish]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그 누구도 왜 "우리가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한 이와 같은 죽음을 억울하게도 죽어야 하느냐?" 하고 항변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왜냐면 이제 모든 인간은 첫 사람 아담의 죄 때문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의 죄로 죽게 되어 있음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이다. 그리고 "우리가 첫 사람 아담의 죽음으로 인한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이기 때문에 즉 "육신"[롬7:5-8:13] 때문에 이런 범죄를 짓는 것이 아니냐" 할 수도 없으니, 왜냐면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육신"으로서의 "죄와 사망의 몸에서 해방되는"[8:2]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는 우리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얼마든지 "육신"을 이기고[고전 9:27]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바로 그 뜻이다. 그러므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져 있고 또한 살아 계시는 하나님으로서 성령으로 이 세상에 계시는데 진리를 알고자 하고 그 진리대로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얼마든지 "두드리고 찾고 구할" 수가 있고 그리스도의 진리에 들어가게 되어 있음이다. 그런즉 오직 불찰은 그와 같이 찾고 구하고 두드리지 않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

조물주 하나님이 과연 계시는지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성경이 과연 진실인지 등 스스로 그런 '찾는' 마음이 우러나 움직여야 하나님 또한 그런 마음을 '찾으시는"[요 4:23/행 12:27] 터이므로 둘은 만날 수가 있다. 따라서 이렇게 구하지 않고 찾지 않는 마음은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도 알고 그 경고 말씀도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말씀을 스스로 버리고 믿지 않음과 똑같아지므로 핑계할 수도 피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 위해 죽어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지만 우리가 이와 같이 그 뜻을 순종할 마음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이 그림의 떡일 뿐이다. 그리고 이 구원을 먼저 알고 믿은 우리가 세상에 알리지 않는데 세상이 어찌 이를 알겠는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죽어 영원히 고통 받게 될'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게 해 주고 그들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해 주어(우리는 하나님의 제사장들이다) 회개하게 함으로써 그런 멸망을 피하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해 주는 것이 사람 삶의 도리를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 때문에 당하신 고난 중에서 그 분이 우리 위해 남겨두신 고난을 우리 몸으로 마저 채우며 이렇게 우리가 할 도리를 다하면 주님께서 오시고 그 때 이 세상은 끝나고 새 세계가 시작될 것이니 이는 당연 순서다. 내 몸을 그 성전으로 하여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시어 영원히 나와 함께 사시는 그리스도 친히 그 몸된 교회의 한 지체 그 한 부분이 되어 있는 나와 함께 받으시는 고난으로서, 나를 통해 그 고난을 마저 채우시는 것이니 이는 우리 몸이 하나님께 바치는 "살아있는 희생 제물"[롬 12:1]이 되어 있음이다.

그 때까지는 이 세상은 이 세상 신(神))의 나라요 죽음의 세상이므로 여기서 살려고[살자면 잘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마음 쓰는 것은 한없는 어리석음이다. 정말로 다 함께 잘 살 때가 온다. 주님 다시 오시면 그렇게 된다. 이렇게 우리의 할 도리를 다하는 동안 이 세상 신은 끊임없이 공격해오는 바 우리 자신의 믿음을 허물고 또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일을 차단시키려는 양면 작전에서다. 여기서 지면 모두가 도로무공이 될 것이니 경계하여 믿음으로 이기는 자가 될 일이다. 우리가 대응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닥치는 악령들의 그 외의 공격력은 우리 위해 능력을 행사하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다 상쇄된다[롬 8:28/히 1:14/고전 10:13].

처음 믿을 때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되는 뜻에서 그리스도 친히 본을 보이신[세례 받으신] 대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고, 또 믿는 사람들끼리 한 가족이 되어 함께 모여 상부상조하거나 합동으로 사람 구원의 일을 하기 위해 모일 때(교회)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데, 그것은 그 자리에 항상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를 우리가 인식하고 우리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일을 기념하여 되새기며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다.

이 글에 명시하지 않은 모든 것은 누구든 성경을 읽음으로써 성령의 친히 가르치심을 받아 배울 수 있어 함께 모일 때(모이기를 힘씀-히 10:25) 이렇게 배운 바를 따라 서로를 가르칠 수 있다.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지만, 다음 세상(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런 것은 영원히 사라지고,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히 하나로 계시는 독생자 하나님과 우리가 영원히 한 영이 되어 삶을 누리는바, 그 삶이 얼마나 좋은지는 예수님이 육체로 계실 때 변화산 상에서 변화하실 때의 사실로써 확인된다.

그 때 모세와 엘리야와 담론하시는데 단지 그렇게 예수님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곁에서 보고 들을 뿐이었는데도 곁에 있던 세 제자는 형용 못하리만치 두렵고도 황홀하여 베드로의 입에서 부지중, "주님, 여기 그냥 있는 것이 좋으니 원하시면 초막(草幕) 셋을 하나는 주님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짓겠습니다"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으니, 그 생명의 세계에 비하면 이 죽음의 세계는 비록 억만장자의 사치와 호강으로도 한낱 그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다.

성경의 "교회 지도자"론(論)

"그들은 잔치의 상석과 사람들이 모이는 곳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선생, 스승]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다. 땅에 있는 사람을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분이시다.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다. 너희 중에 큰 이는 너희를 섬기는 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 23:6-11).

한 마디로 교회에서 모든 사람에게 본[모본]이 되는 사람이 그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다. 무슨 본이냐 하면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됨과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했듯이 믿음에서의 본이다[벧전 5:3]. 대사도 바울이지만 육체의 가시를 두셔서 그로 교만하지 않게 세심한 배려를 하셨을 정도로 인간은 이 점에서 아주 취약하다. 그래서 바울 자신도 "너희가 나를 업신여길 만한 것이 내 육체에 있다"라고 했을 정도로 주님께서는 바울을 교회 앞에서 낮추신 것이다.

이 때문에 12사도를 뽑으실 때 당시 쟁쟁한 율법 학자나 믿음 좋다는 바리새 파 사람 중에서는 한 사람도 택하시지 않고 무식한 고기잡이 그리고 죄인 취급 받던 세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택하셨다. 그 중 "똑똑하다"고 여겨 회계(會計) 일을 맡아보던 가룟 유다는 도리어 주님을 배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살아 계시는 사람이신 주님, 현재 눈에 보이시지는 않으나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지도자시다.

이 외에는 그 누구도 지도자라거나 하는 위치 또는 신분을 일절 허용하시지 않는다. 다 형제들일 뿐이다. 12사도들 역시 주님께로부터 직접 배우고 듣고 목도한 "증인"으로서 "증언"하는 역할이었을 뿐이지 그 이상으로 즉 신분상으로 격상되는 그 무엇이든 배제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시다. 그리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자기 교회의 머리로 일하고 계신다. 단지 동시에 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계심이어서 우리의 육체와는 달리 "영"으로 계신다는 사실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뿐이지 우리의 유일무이한 교회 지도자로서 아무 결격 사유가 없으시다. 사람이 아니시라면 그 분을 대신하여 특별 선택된 특정인이 그 대리 역할을 할 때 그 정당성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이시다. '성령으로서의 사람'으로 우리와 더불어 함께 계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사람으로 계시는데 달리 또 무슨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래서 교회 활동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사도행전에서 교회 중요 의결을 할 때 "성령과 우리는..."[행 15:28]이라고 서두를 떼었던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고로 모든 교회 일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를 먼저 따져 살펴볼 일이요 이를 이의없이 확신하고 수긍하면 다음 단계는 순종이다. 오직 우리의 지도자는, 그 '말씀'으로 역사하시며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 그리스도이시다. 각자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하나님의 사업을 전개하면 되는 것이다. 가시적인 지도자가 없다고 해도 한 분 주님의 지도 아래 있으므로 절대로 혼돈은 있을 수 없다. 질서 정연한 통일된 조화의 아름다움만 있을 뿐이다.

외려 가시적이고 인위적인 것을 고집하여 옛 이스라엘이 주위 이방인들처럼 가시적인 왕을 구했던 것 같이 하면, 다시 말해 성령의 지도자되심을 믿지 않는 그런 불신 상태에서는 어떤 교회 운동도 발전할 수 없고 지속될 수 없고 금방 쇠퇴하지 않으면 유지되더라도 이름뿐이요 곧장 변질되어 하나님의 영광은 떠나 버린 "이가봇"(삼상 4:21)이 될 수밖에 없다. 종교화로 변질되는 것이다. 그 동기가 아무리 좋아도 그래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아무리 자처하더라도 성령의 인도를 따름이 없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진행할 때, 웃사(삼하 6:6-8)가 무엄하게 하나님의 법 궤를 자기 손으로 잡는 순간 무서운 즉결 심판을 현장에서 자초한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만이 따를 뿐이다.

그러므로 극력 거룩한 것[일]을 인위적으로 손 대려 하지 말고 손을 떼어 물러나 앉고, 오직 주님 친히 인도하시도록 믿고 내맡기면 모든 것은 형통할 것이다. 항상 우리 인간으로서는 자기 할 일 다하고 충실히 한다는 것에만 착념할 것이지,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주관한다는 그런 오만한 마음은 극력 경계해야 할 일이다. 각자는 밑거름 즉 하나님의 농장에서의 퇴비 역할을 자임할 따름이다.

퇴비는 풀이나 짚같은 유기물을 썩여서 만들어지는 비료이므로 냄새도 나고 해서 땅에서만 나도는 물질이나 농작물 생육에 필요불가결한 요소다. 귀하다 해서 방안에다 모셔 놓는 일은 없다. 평상시에는 잘 알아 주지도 않는다. 천덕꾸러기다. 그러나 농사에는 절대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에 필요불가결한 중요 핵심 역할을 하면서도 항상 남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존재가 되어야 하나님의 일에도 적합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자기 자신에게도 안전하다.

그러므로 학력을 따지거나 특수교육 즉 신학교 같은 데를 나왔느냐 또는 경제적인 능력 또는 사회적 신분이 있느냐 하는 것 등으로 사람을 따져보거나 저울질하는 것은 교회에서만은 금물이다. 그런 세상의 안목으로 그리스도 교회 목자 자질을 논해서는 안될 일이다. 믿음, 성령, 지혜의 충만 여부가 교회 일에서 최 우선이요 또는 전부가 된다. 믿음의 은혜를 받는 계층은, 천한 자, 약한 자, 낮은 자, 없는 자, 무식한 자라고 해서 멸시받는 계층임을 처음부터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고전 1:26-29).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고 부끄러워하면 그는 참으로 구원 얻는 믿음에의 길이 요원하기만 하다. 따라서 그리스도 교회의 활동 주체들은 자연 그런 계층에서 나오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세상에서의 높은 자, 있는 자, 지혜있는 자, 힘 있는 자, 유명한 자를 칙사대접하고 알아 주고 높이는 것은 교회 타락의 원인이 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떤 계층이든 교회 내에서 자기 역할이 있고 그 역할을 다하는 것으로써 그 존재 의의가 있는 것이요 그 이상은 다 악(惡)에서 나온다는 것을 명심할 일이다.

6.25 전쟁 중에 별을 단 한 이름 있는 군인이 나가는 대구의 모 교회가 있었는데 한번은 목사가 남루한 옷의 교인과 인사를 시켰더니 그 후로는 다시는 그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 군인이 문제가 있다기보다 처음부터 믿음의 도리를 제대로 충실히 가르치지 않은 교회가 잘못이다. 그리고 과거 능력을 나타냈다고 해서 그것을 의지 삼지 말아야 함은 그리 하고서도 얼마든지 멸망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마 7:22]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조심하라"[고전 10:12] 하고 "두렵고 떪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일 것은, 우리 중 누구든지 이 정도의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업을 할 수 있게 됨은 북녘의 고난 받는 형제들의 희생적인 고난과 기도가 그 밑거름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항시도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 형제들의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박해 받는 고통의 산고(産苦)가 없었던들 오늘날 같은 이런 믿음이 도저히 얻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온 천하에 전할 사명을 받고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 연이어 고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자신에게 다짐할 일이다.

삼위일체론에 의거한 그리스도 복음의 강요(綱要)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셨다. 오직 홀로 계시던 하나님께서 자기 외의 또다른 존재를 만드신 것이다. 즉 아들을 만드셨다. 그리고 아들께서 만물을 만드셨다. 그런데 이렇게 만물을 만드실 때 그냥 마구잡이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모습을 따라 지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시냐. 사랑의 모습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이 표현을 막연하게 그저 그런 것으로 알아들을 일이 아니다. 엄연한 법질서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은 사랑이심과 동시에 소멸하는 불이심을 이해하게 된다. 그냥 사랑이시라고만 알면 소멸하는 불이심에 대해 의아하게 여기고 신뢰가 덜해지며 혼동마저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엄연한 법칙을 따라 비로소 이루어지는 사랑으로서 생명의 핵심이라고 이해하게 되면, 주님을 우리가 부인할 때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시고 시인해야 시인하신다는[딤후 2:12/마 10:32] 말씀을 제대로 소화하게 된다.

다시 말해 '둘이 하나됨'으로서의 구조를 사랑이라 하는 것이니, 사랑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할 때 둘이 하나가 되어 있는 모습이다. 분명히 둘인데 존재하기는 언제나 하나로서 존재함이다. 하나이면서도 둘이요 둘이면서도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랑이 그러하다. 이 기준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으로 위장한 위선이고 명목만의 사랑으로서 남을 이용해 먹기 위한 "양의 탈을 쓴 이리[a wolf in sheep’s clothing]"에 불과하다.

그저 무턱대고 좋아하는 감정이 사랑이 아닌 것이다. 그런 것은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라 표현하면 그것으로 제격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그러하다. 한 몸 의식으로 이해되는 공동체 의식도 따지고 보면 이 하나로서의 구조를 나타내는 '사랑'의 또다른 표현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생활에는 다 함께 지켜야 하는 사회적 계약이 있어 법질서가 확립되어 있는 것과 같이, 이 법을 따르고 따르지 않음 즉 복종하고 거역함의 명확한 구별이 생기고 차이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불복하는 자에게 응징이 따른다.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됨에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에서 서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 핵심인데, 이 법을 어기고 자기 자신을 위하게 되면 이 하나 됨은 와해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자기중심의 성향은 전체에 끼치는 독소적 영향력이 있어 암적 존재이므로 이런 '암세포'는 즉각 격리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이 법 개념으로 사랑을 이해하게 되어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부인하면 우리를 부인하시고, 우리가 시인하면 우리를 시인하시며" "사랑이심과 동시에 그래서 구원자이심과 동시에 얼마든지 소멸하는 불로서의 재판장"이시라는 그리스도의 양면성의 의미가 확립된다[눅 3:16,17/요 5:27].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어린양[lamb]이실 뿐 아니라 다윗의 뿌리로서의 유대 지파의 사자[lion]이신 것이다. 이렇게 되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의 뼈대를 이루는 것이 있다. 이를 가리켜 '삼위일체의 원리'라 한다. '삼위일체'를 더 정확히 말하면 일시 이원 삼위 일체(一始二元三位一體)다. 하나로 시작하여 하나로 마무리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여기서 '삼'(三)은 무엇이냐. 분명히 둘은 둘인데 그 둘이 언제나 하나로 존재하고 움직이니까 이 '하나'는 그 둘 중의 어느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둘 중 어느 하나처럼 되어 있기도 하기에 그런 특징을 마치 하나가 도 있는 양으로 대접하는 것이다.

그래서 독립적으로 제3의 존재로서 인정되는 특징을 지닌다. 그러나 이 3은 2가 1로서의 모양을 갖추고 있는 복합체다. 다시 말하면 그 둘이 연합하여 별개의 하나로 되어 있다는 뜻이니 이 '별개'가 곧 '3'의 존재다. 연합하여 하나이지 전연 별개로서의 하나가 아닌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 '하나'는 언제든지 둘로 양립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즉 각각 자기 특질을 잃지 않고서도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사랑'은, 둘[2]이 이러한 '하나[1]'를 구성해 있는 모습으로서의 '3'의 실체가 영구적으로 나타내는 또는 지니는 별칭(別稱)인 것이다. 그 둘을 갑(甲)과 을(乙)이라 하면 갑과 을이 하나되어 있으니까 갑도 아니요 을도 아니다. 그러면 그것을 무엇이라 부를 것이냐. 갑도 아니고 을도 아니니까 부득불 병(丙)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제3의 존재"다. 이 '병'은 새로 생긴 별개의 개체가 아니라 '갑'과 '을'의 연합이요 을이 갑으로부터 나오기 전의 갑의 본연의 모습인 것이다.

둘의 연합이므로 이 병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갑과 을로 따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하나로서 존재하기를 더 원하기 때문에 병이 되어 있음이다. 하나로서 존재하기를 원하는 이것이 사랑이다. 둘이 이렇게 하나로서 존재하는 것을 굳이 또는 재미있게 표현하자면 이렇다. 즉 갑이 을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을 쪽에서 보면 갑을 업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둘이 업고 안고 하다보니까 갑과 을이 하나로 보인다.

그러나 그 업고 안은 것을 중지하면 둘로 보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갑과 을이 하나로 있는 상태를 병이라 하면 그 병을 설명할 때도, 갑을 중심으로 말할 때는 을을 안고 있다고 말하게 되고, 을을 중심으로 말할 때는 갑을 업고 있다고 표현하게 된다. 고로 어느 편도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동시에 자기 스스로 주체가 되어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양상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이렇게 서로 표현은 다르지마는 의미는 같은 것이다. 즉 갑과 을은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업고 안은 상태로 둘이 하나로 있기를 원하지 서로 떨어져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나로서 있는 모습을 갑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면 을이 또한 있어 갑에게 안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또 을이라고 할 수 없으니 갑 또한 을과 함께 있어 을에게 업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렇게 둘이 하나가 되어 있는 상태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갑이면서도 을이 함께 있고 을이면서도 갑이 함께 있으니 갑도 을도 아닌 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그 이름이 제3위(位)의 존재로서의 이름이다. 부르는 이름은 그러하나 실질적으로는 둘이 하나가 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일 뿐이요 분명히 셋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둘이 하나가 되어 있는 것 아니, 될 수가 있는 것은 원래는 갑과 을 둘로서가 아닌 갑 혼자였는데 갑이 을을 만든 까닭이다. 즉 을이란 존재가 있게 한 것이 갑 자신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갑은 크고 을은 작을 수밖에 없다. 갑은 을을 이끌고 을은 갑을 따른다.

갑은 먼저 존재했었고 을은 갑보다 나중에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를 않고 갑과 을이 동시에 생겨났다고 가정해보자. 동시에 생겨난다면 우연히 생긴 것이고 우연히 생기는 것이면 반드시 갑과 을만 있게 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비논리적인 것이다. 그 둘 외에도 그 둘이 생성된 똑같은 원인에 의해 둘 아니라 셋, 넷, 여섯, 열, 백, 천, 만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그렇게 많을 때 그렇게 둘이 하나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셋만 되어도 불가능하다. 예컨대 안고 업고 하는 비유를 들더라도, 누군가가 안아야 하는데 똑같이 안으려고 하고 또는 안기려고 하니, 싸움질만 되풀이되지 단 한번도 누가 누구를 안아볼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창조가 이래서 필연적이고 그래서 저절로 우연히 생겨났다는 주장을 두고 바보의 소리라 하는 것이다. 셋이 아닌 단 둘이 있다고 가정해도 서로 그렇게 싸우기는 마찬가지다. 서로가 머리되겠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둘이 동시에 생겨났다고 치면 그렇다는 얘기이다. 둘 중의 하나가 먼저 다른 하나를 조용히(서로 싸우는 요란스러움이 없이) 안아 주는 것이 되어야 그제서야 비로소 안고 업고 하는 모양새로 나타나는 조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둘이든 셋이든 동시에 각각 독립해서 생성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갑이 홀로 존재하였다가 그 다음에 갑의 의지대로 셋도 아닌 꼭 둘만 되도록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둘만으로 구성이 되도록 그렇게 을(乙)만 존재하도록 갑(甲)이 을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갑은 그 새로 생성된 을을 안을 수 있고 그것이 다시 을이 갑을 업는 형상으로 연이어지게도 되어 하나로서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이 갑을 우리는 조물주 하나님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창조주의 창조 행위가 없이는 사랑도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조화도 통일도(일사불란한 하나가 되지 못하니까) 불가능하고, 있다면 앞에서 지적한 대로 오직 분쟁이요 결국 공동 파멸이요 따라서 현재와 같은 이런 일사불란한 우주도 세계도 처음부터 존재할 수가 없다. 위의 간단한 예로써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이상 간단한 예에서 구체적으로 업고 안고 하는 동작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면 이렇다. 갑 홀로 있다가 을이 존재하게 되니 둘이 되어 있는데 우리 사람의 예를 들어보아도 분명하다. 즉 갑은 을을 보고 을은 갑을 마주 대하게 되어 갑을 보게 된다. 둘 다 자기 자신은 볼 수 없고 오직 상대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자연적으로 생기게 되는 현상은 갑은 자기 자신을 보는 대신 을을 보고 을 역시 자기 대신 갑을 보게 되는 일종의 약조 관계에 들어가게 된다.

정확히 말해서 서로가 서로를 보아 주기로 하는 약속이다. 자연 그렇게 되면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위할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볼 수 없으니까, 그 대신 상대방은 얼마든지 언제든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보아 줌으로써 자기가 자신을 완벽하게 보는 효과를 피차 거두는 것이 더 편하고 수월하고 빠르고 여러 가지로 이득이 많다. 갑이 을더러 "네가 입은 옷이 네 몸에 어울리게 보이지 않으니 다른 것으로 바꿔 입으라" 할 수 있고, 을은 또 갑더러 "그렇게 앉은 것보다 이렇게 앉는 모습이 더 보기 좋으니 이렇게 앉아보라"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자연 어떻게 되느냐, 갑은 을을 위하게 되고 을은 갑을 위하게 된다. 갑과 을의 업고 안고 하는 관계에서 갑이 을을 위하는 것은 을을 안는 것으로 나타나고 을이 갑을 위하는 것은 갑을 업는 것으로 나타난다. 갑이 을을 위하고 을이 갑을 위함이 그러므로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갑도 위해지고 을도 위해지는데 이는 갑이 갑 자신을 또는 을이 을 자신을 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갑이 을을 을이 갑을 이렇게 동시에 똑같이 위해지게 됨으로써 비록 둘이지만 하나의 모습으로 서로 분쟁없이 갑이나 을이나 똑같이 위해지게 됨이다. 확실히, 자기가 자기를 위함보다 더 풍성한 위함이다.

또 갑은 을을 안고 을은 갑을 업고 있으니 앞에서 말한 대로 둘 다 똑같이 능동적이요 주체성을 지닌다. 이것이 사랑의 주인 의식인데 따라서 사랑에서는 어느 편도 피동적 소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하되 어느 편도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 역시 없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기 때문이다. 갑은 오직 하는 일이 을을 안는 것뿐이요 을 역시 오직 하는 일이 갑을 업는 것밖에 없어 자기 자신은 조금도 위하거나 생각할 틈이 없다.

그러면서도 각자는 피차를 통해 자기가 훌륭하게 위해지는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따라서 결과론적으로 보면 갑은 을을 위함으로써 갑 자신을 위함이 되고 을 역시 갑을 위함으로써 을 자신을 위하는 모습이다(엡 5:28). 결국은 다 자기를 위하는 것이지만 홀로 있을 때의 방법을 택하는 대신 그것을 버리고 둘로 함께 있을 때의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서로를 바꾸어 삶을 대신 실행해 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채택함이니 따라서 지혜로 드러나는 것이다.

결국 그 결과는 자기의 무한한 확대로 이어진다. 하나로 존재하면 거둘 수 없는 더 풍성한 자기 확장, 확충인 것이다. 이런 이치대로 하면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확장이 배가되는 까닭이다. 이것이 둘로 나누어 존재하면서도 마치 하나처럼 되어 분쟁 없이 존재하게 되는 비결, 비법이요 지혜이다. 이 곧 "사랑"이다. 그래서 이런 이치의 사랑의 원리를 생명의 법질서라고도 한다.

또한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이미 짐작되겠지만 무릇 '사랑'은 조물주의 창조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사랑은 조물주의 창조의 증거이기도 하다. 또 달리 말하면 조물주를 인정하지 않는 모든 소위 "사랑"은 허구임이 입증된다. 이를 다시 풀이하면 사랑을 주(主) 덕목으로 하는 모든 종교 교리 그 자체가 이같은 조물주를 인정하지 않는 한 순수하게 허구라는 증명이 된다.

홀로가 아닌 둘이 있으면서도 홀로 있을 때의 방법 그대로 고수하는 것은 비이지적(非理知的)인 것으로서 미련하여 어리석기 한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따르는 무리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라" 하신 것은 이런 미련한 방법을 버리라는 말씀이시다. 그리고 매일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르라고 하심은 이같은 생명과 삶의 원리원칙에 따라 친히 본을 보이신 대로 이 세상의 비뚤어진 삶의 방법을 교정하여 원래의 모습대로 현재 되돌려놓으셨으니 그 길을 따르라는 의미이시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삶의 가르침이 경고의 성질을 띠는 것은 이 세상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세상에서 생명의 법질서가 생명으로 나타날 리가 없다. 더군다나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악을 부채질하여 선동하고 있고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로서 권세를 부리는 마당이라면 끊임없는 방해가 없을 수 없으므로 이런 생명의 길은 이 죽음의 세상에서 도리어 죽음으로 인식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혹독한 박해 속에서 그 빛을 잃기가 쉽다. 따라서 한사코 다시 말해 비록 죽음의 대가가 닥치더라도 끝까지 이 생명의 길을 지킬 각오가 요구되는 까닭에 경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망대"[눅 14:28]의 비유로써 미리 경고하신 것이다.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음과 양의 관계에서는 양이 크고 음이 작다는 정도로만 인식했을 따름이지 그 양이 음을 낳았다 즉 파생시켰다는 논리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리 되면 최초 원인으로서 조물주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노자가 장자나 태초 곧 시초(始初)가 있다는 것만 그저 막연하게 바람 잡듯이 안개 잡듯이 애매 모호하게 표현했을 뿐이고 명백히 우리 사람과 같은 인격성을 지닌 최고의 이지(理智)로서의 하나님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이 세상 신(神)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하나님의 존재를 가급적이면 숨기려 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그리 된 것으로 알면 될 것이다. 위의 그림은 안는다는 것은 대(大), 주(主), 인(因)을 말한다. 업는다는 것은 소, 종, 과를 말한다. 즉 안는다는 것은 어버이로서의 인자, 자비를 말하고 업는다는 것은 자식으로서의 효, 공경을 말함이라 하겠다. 안아 키우고 업어 봉양(奉養, 부모, 조부모를 받들어 모심)함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원리의 특성은 3자(者)가 의좋게 화합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고 이원론을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도 아니다. 최초로 1이었다가 1이 또다른 1을 파생시킴으로서 2를 구성하게 되되 그 2가 2 그대로 머물지 않고 항상 1로서 존재함을 가리킴이다. 그러므로 2로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나, 2가 1로서 존재하므로 마치 제3자가 있는 양으로 비쳐지는 것 또한 현실이니 이 현실을 무시할 수 없고 현실 그대로 수용해서 마치 3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만물이 작동되고 있으므로 이 원리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즉 빛은 파동으로서의 일면이 있는 반면 전연 성질이 다른 입자로서의 특성도 함께 지니나 그러나 이 둘이 연합하여 항상 빛으로 존재한다는 이 성질을 하나의 법칙으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성질이 얼마나 독립적이었으면 아인슈타인 같은 석학도 빛은 입자라고만 우겨 보어와 논쟁을 벌이다가 결론도 얻지 못한 채 세상을 떴을까. 그만큼 전연 화합할 수 없는 두 가지가 하나를 이루고 있으니, 그것이 왜 그런가 하고 아인슈타인처럼 굳이 따지려고 할 것 없이, 이를 하나의 원리로서 인정하면 그것으로 답이 되는 것이다.

어쨌든 이 대립[대칭, 상칭] 관계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가 파생(派生)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 기정 사실을 전제로 하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풀려질 수 있는 문제다. 가령 빛의 경우 입자에서 파동이 파생한 것이 아니냐 하겠는데[이는 무슨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니므로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 관계 즉 파생시킨 것과 파생된 것과의 상호 관련성만 잘 구명한다면 모든 실마리는 풀려지는 것이다. 어느 것이 파생시킨 주체이냐 하는 것은 과학적 실험을 통해[파생한 것과 파생된 것과의 차이를 염두에 둔] 드러나질 것이다.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바로 그와 같이 계심으로써 그 계시는 모습을 따라 만유를 지으셨다고 하면 그것이 답인 것이다. 이 원리가 생명체의 삶에 적용되면 하나님 친히 머리가 되시고 그 피조물은 그 몸을 구성함으로써 되는 삶의 기본 원리 곧 생명의 법질서가 되는 것이다. 이 사랑과 생명의 원리에서 갑이든 을이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이 갑과 을이 이렇게 하여 병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렇 서로 안고 업은 모습을 태극 문양과 같은 모양으로 위와 같이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갑 홀로일 때는 물론 자기가 자기를 위하게 되나("위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이제 둘이 되므로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않게 되고 현저히 눈에 보이는 상대만을 위하게 되는 것이다[그렇게 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함이 더 적합할 것이다]. 하나님의 경우 물론 당신 자신을 보실 수가 없어 아들을 낳으신[만드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경우 자기 형상을 만드심이니 즉 당신 자신을 객관화시키셨다는 의미라 할까. 그리하여 아들을 통해 만물을 창조하시고자 했다는 말로도 통할까. 어쨌든 이 원리에 의한 이런 '삶의 극대화' 지혜는 둘이 서로 합의한다고 되어질 일도 아니다. 최초 근본이 존재하시어 바로 그런 지혜를 염두에 두시고 자기와 같은 존재를 "자기의 형상"이라는 개념으로 창조하심에서 비롯되었고 그렇게 해서 또한 가능해지게 된 것이다.

'형상'을 만드셨으니 당신 자신은 '실체 또는 본질'이 되신다. 여기서 만유의 대칭 개념이 생겨나고 이로써 삼위일체의 법칙[원리]가 확립된 것임을 앞에서도 설명했다. 또 하나님께서 무엇이 필요하시고 부족하셔서 다시 말해 당신 자신을 확장시키시기 위해 이런 일을 하신 것은 아니고 오직 이상 설명과 같은 사랑의 사귐[교제]을 위한 것이니, 더 분명히 말하면 조물주께서는 당초 홀로 계시는 것보다 이같이 둘로 함께 하나되어 계시는 것이 더 좋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또다른 존재, 당신과 같은 존재를 만드신 것이다.

그렇게 존재하시게 된 분이 바로 독생자(獨生子, 독자, 외아들)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이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게 된다.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하기로 한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내가 하는 일은 다 너를 위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 역시 나에게 그러하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언제나 하나가 되는 것이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이 사실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곳곳에서 아주 분명히 증언되고 있다. 바로 이런 것을 그 피조물인 우리에게 하나님은 요구하시는 것이다.

만물을 이같은 당신의 모습을 따라 만드셨기 때문이니, 이것이 최고 선(善)이요 올바름[義]이요 지혜이다. 이 이치를 어기는 것이 죄요 악이다. 즉 "좋은 것[선]"에 대칭되는 "좋지 않음[악]"이다. 하나님께서 최초에 모든 것을 만드신 다음 둘러 보셨을 때 다 "심히 좋았다". 완전무결이었다. 그러나 이 "좋은 것"에서 "좋지 않은 것"이 생긴 것이니 피조물의 자유 의지, 그 자유 선택으로 바보같이 이 지고(至高), 지선(至善)의 하나님 지혜를 버리고 스스로 "좋지 않은 것"을 택한 탓이다.

교만하여 그 좋지 않은 것을 좋은 것으로 스스로 "생각해본" 결과다. 자기 판단이 하나님의 정하신 것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착각에서다. 그래서 교만이다. 영물(靈物)이든 인간이든 여기서 죄가 파생하고 멸망의 개념이 도입된 것이다. 멸망은 무엇이냐 하면 죽음과 동일한 의미로서, 대개 우리가 아는 '죽음'은 이 자연계에서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말하므로 '항상 존재하되 생명의 낙에 대칭[상칭, 대립]되는 것'을 '멸망'이라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즉 창조 이후로는 모든 것이 이 삼위일체 원리 곧 인과율 또는 짝의 대립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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