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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2) 집에 있는 교회 등록일 2016.02.27 21:20
글쓴이 김일동 조회 363

집 교회 운동-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CITHM'의 핵심은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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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중심은 정상적인 생명의 궤도 이탈

인간은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와는 달리 영혼을 지닌 영원한 존재이다. 영물들과 같아서 영원히 존재하기는 하되 사랑과 생명의 법칙을 준수하는 것이 그 생명이다. 에덴 낙원에서의 아담의 범죄도 이 생명의 원리를 어김에서 온 것이다. 영물들은 이 판가름에서 거룩한 천사들과 악령[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포함해서]들로 구분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을 위하고 그 영광을 구하여 그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생명이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 무엇이든 하게 되어 있지 않다.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오직 인간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하시니까 인간은 자기를 위해 무엇이든 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게 되어 있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꾐에 넘어가 이 중요한 삶의 이치를 스스로 깨뜨려 버린 아담이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하려는 마음이 일었으니, "눈이 밝아짐으로써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해서[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을 믿고 받아들여] 선악과를 먹는 행동을 여자는 했고, 남자는 여자의 권유에 못이겨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자기를 위하는 자세가 되고 하나님을 위해서 그 말씀대로 따르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음 이것이 곧 범죄요 그 대가는 죽음이다. 또 먹으면 "죽게"[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아가는] 되어 있는 선악과를 먹었으니 그 결과 역시 필연코 죽음이다. 먹지 말라 하시는 말씀을 듣지 않았으니 불복종이므로 죄이고 먹으면 죽는다는 말씀을 믿지 않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었기에 자기를 위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어 그것이 범죄이고, 그 "자기를 위해 사는"[고후 5:15/롬 14:7-9] 것이 됨이다.

자기 스스로 눈을 밝게 하여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목적으로 선악과를 먹음으로 생명의 이치를 벗어났으니 필경 찾아드는 것은 생명의 반대 현상인 죽음밖에 없다. 영물은 선악과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자세로 나간 까닭에 생명의 도리를 스스로 벗어남으로써 멸망에 들어가는 운명이 되었지만, 인간은 이상과 같은 사유로 해서 '영적 존재로서의 멸망' 대신 '영적 몸을 상실하고 자연계의 몸으로 도로 환원되어 버리는 육체적 죽음'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차이만 다르다 뿐이다.

원래 이 선악과니 생명과니 하는 것은 인간을 위해 조성된 것이다. 영물들 자신들도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던 것이다[창 2:18-20]. 또한 영물로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처음부터 영물로 창조된 까닭에 온전한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범죄한 것이고, 이에 반해 첫 사람 아담은 상대적으로 지식이 없는[또는 덜한] 상태에서 불복종했으므로 자기 본질[자연계에 속한 것(육체)과 영계에 속한 것(영혼)과의 이중적인 복합 구조]에 상응하는 보응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아담]은 영원한 멸망 대신에 자연계의 육체로 도로 회귀해 버리는 육체적인 죽음을 맞는 것으로 그쳐 다시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 구원이 기회마저 버리면 그 때는 영원한 죽음 곧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악령들의 운명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 고로 분명한 것은 이 자연계에서의 동물적인 한시적 생명을 마친 다음에는 필시 그 다음 과정은 영원한 멸망이라는 것이다.

만물을 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즉 대칭적인 짝(둘로서 하나로 조화를 이루는)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생명 아니면 죽음이요 이것 아니면 저것이지 그 중간은 원래 하나님의 피조물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과 식물은 서로 상칭[相稱, 대칭]이고 동식물과 인간, 영물과 인간, 자연계와 영계 역시 그러하다. 이것이 대칭 개념이다. 영원한 생명이 있으니까 반드시 영원한 죽음이 있다. 생명의 세계에서 영원히 삶의 낙을 누리니까 죽음의 영원한 세계가 반드시 있어 영원토록 고통으로 시달리는 그런 영원한 고생[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이라 할 수 없는]이 역시 존재하는 것이요 이것이 "멸망"이다.

어쨌든 아담의 "죽음"은 즉각적인 영원한 멸망은 아니더라도 죽음은 죽음으로서, 이 자연계에서의 한시적 생명이 필연적이게 죽음으로 마칠 것인즉 그리고 이 죽음은 다시 영원한 멸망으로 연이어지는 것이므로, 이렇게 일단 생명의 법칙을 어기고 죽음에 들어온 이상 이 죽음을 면할 길은 없으나, 이 생명의 법칙을 지킨다는 전제하에서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죽은 다음에도 아무 특정 조처도 없이 그리고 사유(事由)도 없이 살아날 수 있는 것이라면, 죽음이 생명되고 생명이 죽음되는 등의 뒤죽박죽이 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엄연한 창조의 질서 속에 그런 혼란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전혀 살 소망이 없이 죽은 자가 되어 있을 뿐이므로 오직 누군가가 이런 인간과 함께 죽어 주어야 그런 혼란 없이 질서는 질서대로 유지되면서 하나님 세계의 생명은 생명대로 보존되어 인간은 다시 기회를 얻고 생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능력이 많다는 것은 영계에 속한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 천사가 물론 그 일을 할 수 없다. 인간처럼 한 개체로서의 존재에 불과한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이시니까 개개인의 많은 인간 생명을 포괄하실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 홀로 한 분만으로 계실 때는 불가능하다. 생명은 생명이요 죽음은 죽음이지 앞에서 말한 대로 죽음이 생명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인간 위해 죽어 주신다면 아무리 하나님이시라 하더라도 다시 살아나시면 안되기 때문이다. 한번 죽으셨으면 죽음만으로 영원히 일관되게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죽음은 죽음이고 생명은 생명이며 생명에서 벗어나면 죽음이라는 질서가 유지된다. 인간의 몸으로 죽으실진대 더욱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위에 설명한 대로의 갑과 을 둘이서 하나로 계시는 모습이시라면 가능하신 일이다. 왜냐면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아들이시므로 사람과 하나되시는 위치에서는 아들께서 아주 죽으신 것이지만,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위치에서는 그렇게 죽음 가운데 머물러 계시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사시는 것이 아들의 이름으로 즉 아들이 사시는 의미로써 다시 말해 아들을 위해 사시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아버지 친히 아들을 살리심으로써 부활하신 것이다. 아들 스스로 살아나신 것이 되면 위에서 지적한 질서 확립 차원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억지로 죽이시거나 죽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아들 스스로 죽으신 것이므로 아무리 아들 스스로 다시 살아 나실 수 있어도 스스로 살아나시면 안되는 이치 또는 이유를 위에서 설명했다.

같은 이치로, 아들이 하시는 모든 것은 아버지 이름으로 즉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하심이니 아들이 우리 위해 고난 받으심은 아버지 친히 그 아들을 통하여 그리고 똑같이 함께 그 고난을 맛보심이다. 피조물과 조물주와의 차이는 피조물은 본질적으로 홀로 존재할 수 없는데 반해 [왜냐면 조물주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항상 조물주와 상대를 이루고 있으므로] 조물주는 애초 홀로 존재하신 사실에서 보듯이 전혀 그런 점이 없으시다는 것이니 그 점이 다르다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 뜻에 따르는 것이 생명이다.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하게 행동함이 생명이다. 우리를 새로 창조하신 목적 즉 구원하신 목적은 절대로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 각자의 짝이 되어 계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데에 있다[고후 5:15/롬 14:7-9].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신다는 증거를 그리스도의 우리 위하신 죽음으로 확증된 바다. 이 죽으심의 믜미를 이와 같이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여기에 모든 것은 달린 것이다.

우리가 조물주와 소통하는 데에 아무 문제가 없도록 창조된 까닭에 조물주를 피조물처럼 착각할 때가 많다. 그래서 얼마든지 개별적으로 마치 피조물 인간들의 관계처럼 하나도 다름 없이 가까우시고 어색한 데가 없지만, 그러나 모든 것의 근본으로서의 조물주시라는 사실은 망각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셔서 피조물을 만드시고 사랑하시는 것은 아니니, 오직 원하시는 것이라면 피조물과의 인격적 교제, 사랑의 사귐에 있는 것이다. 이 사귐은 우리로서는 절대로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데 있다.

이는 엄마와 그 품에 있는 아기와의 관계와 같다. 엄마가 아기에게서 바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엄마에 대한 아기의 사랑뿐이다. 독생자 하나님께서도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아들"이시라고 성경이 표현했을진대 그 아들께서 만드신 우리 피조물들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즉 엄마의 사랑은 아기에게 대한 일방적인 것임과 마찬가지로 또 엄마에게 대한 아기의 사랑은 엄마에게 순종 즉 시키는 대로 일방적으로 잘 따라 주는 것에 있다.

사랑의 원리, 그 생명의 법질서도 피조물 모두의 행복을 위함이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갑과 을이 서로를 위함으로써 결국은 자기를 위함이 된다고 했지만, 결국은 대가를 바라는 자기중심의 사랑이 아닌가 하여 탐탁치 않게 생각할지 모르나, 내가 나를 직접 위하는 것과 우회적으로 전체 우리를 함께 위하는 방법으로 위하는 것과의 차이로서, 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이다. 내가 나를 위하면 나 하나가 나를 위하는 폭이지만, 모두가 하나같이 자기를 부인하여 오직 이웃을 위하게 되면 내가 나를 위함보다 내 이웃이 존재하는 그 숫자만큼이나 갑절로 내가 위해지는 지혜이다.

뿐만 아니다. 각자가 그렇게 자기를 직접 위하게 되면 한 몸의 이치는 완전히 사라지고 상호간 남남이라 제각기 제 한 몸뿐이므로 상호 쟁투와 알력이 끊일 날이 없고 평화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며 종국적으로는 공동 파멸로 치닫게 마련이니 이렇게 어리석고 미련하고 바보스러움이 있을 수 없다. 이 바보스러움이 바로 오늘날 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교만으로 야기된 비극적 결말의 세상사가 빚어내는 갖가지 참상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이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마귀, the devil]의 일을 없이 하고자 하심이라 하지 않았는가(요일 3:8).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 주신 모든 말씀은 물의 흐름과 같아서 순리요 자연스럽기 이를 데 없다. 이 순리를 따르면 된다. 순리에는 모든 아름다움이 있고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천지창조 때처럼 "심히 좋은" 것뿐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막연히 사랑을 추구하고 행한다고 해서 주장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다.

종교를 초월하여 인간 사랑만 실천하면 다 구원 얻는다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세상의 말이지 하나님 말씀은 아니다. 자기 부인 없는 사랑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서 그 어떤 긍정적인 결과도 맺지 못한다. 그리고 이 자기 부인은 내가 완전히 죽음으로써만 가능하게 되니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뿐이다. 이를 떠나서의 그 어떤 방법론도 인간을 멸망시키려는 이 세상 신(神)의 계략임을 알 수 있다.

죽게 되어 있는 인간인지라 우리와 함께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시는 하나님의 속죄(贖罪) 양(羊) 없이는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지 않고는 그 어떤 소위 사랑의 행위로든[율법의 행위로든] 절대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사도들은 얼마나 힘들여 강조하고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바탕 위에서만 생명의 법질서 곧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그리스도 오시기 전 그림자로서의 의미뿐인 모세 율법을 말함이 아닌]을 지킬 수 있고 또 반드시 지키게 되어 있는 것이다.

세상 종교는 모든 죄악이 인간의 자기중심 곧 욕심에서 생겨나는 것이므로[이런 정도야 사람마다 자기 양심으로 다 알고 있는 터이다] 스스로 이 욕심을 끊고 자기를 비우는 무아(無我) 상태를 이루면 구원 받는다고 한다. 이미 죽기로 사형언도를 받아놓은 인간인데 그런 지경에까지 이른들 무슨 소용인가. 죄악이 무엇인가부터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비우려고 해도 부정하려 해도 죽어지지 않고 비워지지 않으며, 자기가 부정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것을 어찌 하리요.

이를 극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성경 로마서 7장이다. 죽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시퍼렇게 살아있는 것을 절감케 되는 것이 "오호라 나는 비참한 인생이로다"[롬 7:24] 하는 탄식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스스로를 죽이려고 또는 스스로 죽음의 상태에 이르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은 상태에서> 그렇게 이미 죽은 상태를 <믿음>에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골 3:5) 일을 신속히 간결하게 해치울 수 있는 것이다.

그 <믿음>은 그렇게 죽었다는 사실만을 일방적으로 믿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되어 그 생명을 내 것으로 하여 내 자신 더 큰 생명, 더 넘치는 생명, 더 영광스러운 생명, 그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있음을 동시에 믿는 것을 말하며, 이렇게 양면으로 믿어야 하고 어느 일방적으로만 믿으면 그것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력으로써 죄를 이기고 자기 부인을 거뜬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부인 즉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 것은 살아 계신 주님 친히 나를 위해 주시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인생 죄악의 가장 분명한 해결책이 바로 이 자기 부인인데, 이 자기 부인은 나를 위하시는 조물주가 계시기 때문에 처음부터 가능한 일이었는데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 사실이 재확인되었으므로 이 말씀을 믿고 나는 얼마든지 자기 부인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런 엄청난 구원의 역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셨으므로, 이미 그 '사실'은 현재는 '말씀'이 되어 있다. 그래서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한 것이다[롬 10:8]. 또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벧전 1:24,:25] 하였으니 말씀대로 믿으면 구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말씀 무시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무시함이다] 마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죄를 정하신 것이며 아담에게도 그 죄의 대가로 죽음이 임한 것이다.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단순히 죄만 짓지 않는다는 것으로는 구원이 되지 않는 것은, 이미 죽기로 되어 있는 자는 반드시 죽음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또한 우리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다. 실상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죄를 안지을 도리가 없으니 "죄를 짓느니 않느니" 하는 것도 공허한 말일 뿐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자기 부인이 가능하고 자기 부인의 밑바탕에서만 순종이 가능하고 순종하는 것이 곧 죄를 짓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조물주 하나님이 없이는 그리고 이제는 나를 그렇게 전적으로 위하시는 사실을 그 십자가로 증명해 주신 그리스도 없이는, 한마디로 인간 구원[행복하게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해 준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동시에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나와 함께 죽으심인즉]으로써 내 자신 죽어 있는 것을 믿는 것이므로, 즉 내 스스로 죽으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죽어 있는 것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기에 그 자체가 이미 자기 부인이 되어 있는 것을 가리킴이고, 이 자기 부인된 사실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인 것이다.

따라서 자기 부인을 명쾌히 가르치지 못하는 세상 종교마다 진리 아닌 허구요 비록 성경을 믿는다는 기독교의 간판을 내다 걸어도 그러하며, 예수 그리스도 없이 자기 부인을 논하는 세상 종교라면 그것은 진실 없는 허위 일색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이치까지는 이해력이 미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어린 아이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여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이 경우 "내가 죽으려고 애쓰고 힘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이미 부인되어 있는 사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 지내져 있는 현실에 대하여 <하나하나씩 믿음으로 매일의 일상생활로써 확인해 가는> 작업이라고 우리의 '사랑'과 '믿음'을 정의(定義)할 수 있다. 땅의 지체 한가지한가지씩 즉 한 마리 한 마리씩 땅의 지체라는 파리가 달려들면 이 "믿음"이라는 파리채로 그 한 마리 한 마리를 때려 잡는 그런 것이다.

안심하고 때려 잡는 것이니, 말벌처럼 혹 독침이 있는가 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벌이 쏘는 것과 같은 사망의 독침(毒針-고전 15:56)은 이미 그리스도의 죽으심[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파괴되어 사라진 것이다. 이런 '믿음'이 아니고서는, '나의 의지' 또는 '나의 애씀과 힘씀'으로 아무리 휘둘러보아도 허공만 칠 뿐이지 파리는 잡지 못한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애씀과 힘씀"은 그러한 믿음의 바탕 위에서 즉 내가 이미 죽어 버렸다는 사실을 근거로 해서 주님의 일을 하고 그 뜻을 이루는 생명의 영역에서만 비로소 활발히 활용될 단어들이다.

엉뚱한 데에다 그 말의 잣대를 갖다 대니 혼돈만 가중될 뿐이다. "자기를 비우고 자기 욕심을 떨어 버리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우리 위해 이미 이루신 이 길 외에는 없고 또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책이다. 즉 과거 내가 나를 위하던 힘을 이제는 전부 나의 상대방에게 쏟아붓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자기를 비우라니 비우지 말라니 하는 말 자체가 필요 없게 된다. 동쪽을 열심히 보고 있으면 뒤로 돌아 서쪽을 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스스로 죽으려고 애쓰고 힘쓰는 것부터가 바로 나 자신을 위함이다. 그런 식으로는 절대로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다. 왜냐면 내가 나를 부인하려는 것부터가 바로 나 자신을 위함이고 나를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서는 나의 상대방이 그의 전 존재를 다 바쳐 그 전심전력을 다해 담당해 주는데 더 이상 내가 기대할 것이 없다. 더구나 그 나의 상대는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시는 즉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믿음 없이 감히 무엇을 "믿는다"고 말하리요. 동쪽만 보고 있으면 서쪽을 까마득하게 잊을 수 있다. 죽은 나를 볼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을 보면 내가 생각날 겨를이 없다. 주님 친히 바로 나의 모습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보지 않고 주님을 보면 거기서는 이미 죽은 나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 영광 중에 있는 나를 동시에 보게 된다. 은혜로 구원 얻는다 할 때의 "은혜"는 나로서 한 일이 없이 값없이 받는 것을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이 반드시 따른다. 다시 말하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아니 이미 죽어 있는 자가 생명을 얻게 되는 그것이 은혜이다. 나는 사랑 받지 못할 짓을 했으나 사랑을 받게 되었으니 은혜다. 사랑 받을 일을 이루어낸 사람에게나 베푸실 사랑을 마치 나도 그런 일을 한 것처럼 받게 되니 은혜다. 나의 죽음과 나의 고난을 함께 하신 사랑을 근거로 해서 베푸시는 은혜다. 우리로서는 전혀 "한 일이 없이(죽은 자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되어지고 이루어진 나를 위한 새 창조이고 다시 출생하는 일이므로 은혜다.

창조란 것은 하나님 단독의 작업이지 창조되는 피조물이 끼어 들어 이루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값없이 얻는 구원이다. 또 그렇게 나를 새로 창조하시는 방법이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시는 그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짊어지시면서까지 이룩하신 것이기 때문에 더욱 말할 수 없는 사랑이요 그래서 은혜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내가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즉 지금은 살았으나 이전에 죽었는데, 여전히 과거의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처럼 여전히 자기중심주의의 생활 양식대로 살고자 하면 '은혜' 차원이 아닌 '믿음의 유무' 차원에서 다룰 문제가 된다.

내가 이전에 죽었다는 것은, 나 위해 [즉 나와 함께] 죽으신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오늘 내 안에 모신 결과를 말함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어제까지는 나는 살아 있었다. 물론 실제는 죄인으로서 "죽은 자"[마 8:22]였지만 그래서 산 자가 아니었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내가 이천 년 전의 시점(時點)에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계시는 그를 내 안에 영접해 모심으로써 그 십자가에 죽으심이 나의 십자가 죽음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이다[갈 6:6]. 동시에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나로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 또한 내게 적용되어 현재 내가 그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 후에 다시 살아나 있는 것이다. 즉 죽음과 동시에 다시 살아난 변화가 그와 같이 나 위해 죽으셨다가 나 위해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내 안에 모심으로써[영접함으로써]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있는 현재를 기준하여 내가 그 이전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결과이고 내용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내게 요구하시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고후 5:14] 그 죽은 나 자신을 위해서는 다시는 살지 말고[:15]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으므로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라는 것이다. 나의 최대 은인(恩人)이신데 그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아 나가는 나의 향후 삶이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셨으니 나도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심경이 곧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가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다 함이다[롬 14:7-9].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자신을 내게 주셨기 때문에 지금 내 안에 영원히 내게 주신 선물로서의 성령으로 계시니[나와 함께 사시니] 나도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려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리스도의 것으로서 죽고 사는 것이므로[:8]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해 죽고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 믿는 믿음이 이런 사실과 내용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음을 성경이 밝히고 있는 것이다[롬 14:7-9/고후 5:15]. 그렇다면 말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 그러한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어 드리지 못해도['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않는다'고 표현해야 제격이니 왜냐면 나의 의지가 작용하므로) 구원만은 받기 바라는 것은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소치이다.

다시 말해 성경은 이제부터는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해서만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치는데 반해[고후 5:15], "세상을 따라 자기 위주로 살아도 구원을 받아야 그것이 은혜가 아니냐" 하니 이런 경우 적합한 말은 '배은망덕'이라는 것이다. 은혜를 받으면 그에 상응하게 감사하고 그 은혜 베푼 이를 위하여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도 도리어 그 바라는 뜻에 위배되는 일을 하면서도 구원은 욕심 내니 그렇다.

하나님 친히 무엇이 필요하셔서 그래서 나더러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 되므로 그렇게 하라는 요구이신데, 이 최소한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니 하나님이신들 어찌하시랴. 즉 자기 부인이라야 그런 요구를 수용하는 것인데 여전히 그 반대인 자기중심으로 살려고 하니 만사가 뒤틀릴 수밖에 없다. 왜 나 자신처럼 내 이웃을 사랑해야 하느냐 하면 한 머리로서의 그리스도를 똑같이 모시고 있으므로 그 내 이웃들이 모두 나 자신이 아니면 무엇인가.

아직도 믿지 않아 그리스도를 자기 머리라고 인정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그렇게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들은 먼저 회개하고 믿어 구원을 얻는 것부터 급하고 그것이 선결문제다. 또 그런 목적을 위한 차원에서 선행을 나타낼 수는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먼저 그러한 사랑을 나타내신 바로 그 이치를 따름이다. 그러나 이미 한 몸이 되어 있는 차원에서 하는 사랑과 그렇지 못하고 한 몸이 되어 있지 않아 한 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단계에서의 사랑이 같을 수는 없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전자의 경우다. 이 "사랑하라'는 계명 외에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분부 또한 주셨다. 이 명령은 후자에 해당된다. 구원의 말씀을 전파하여 이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그리스도라는 '한 우리[a fold(양의)]' 속으로 사람들을 인도해 들이는 일 역시 사랑이 원동력이다. 그러나 한 몸의 지체(肢體)끼리의 사랑과 아직 그런 지체가 되지 않은 사이에서 나타내는 사랑의 본질이 같을 수 없다.

지체로서의 사랑은 자기 자신이다. 그러나 지체가 아닌 경우 나 자신이 아니고 남이다. 한 몸이니까 사랑하는 것과, 한 몸을 만들기 위해 내 스스로 마땅히 해야 하는 대로 수고하여 힘쓰고 애쓰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후자의 경우 나의 사랑의 상대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 뜻을 오직 따른다는 의미로서 다시 말해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고통까지 감내하는 그와 같은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일이므로 이는 얼마든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나와 함께 한 몸을 이루어 있는 지체들이므로 그들은 바로 나 자신이 되어 있다. 그들은 나의 것이요 나는 그들의 것이다. 우리의 머리로 계시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가 바로 그와 같이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나의 것이 되어 있음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한 몸의 같은 지체가 되어 있는 믿는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사랑함이다. 때문에 지극히 작은 형제 하나라도 사랑하지 않을 때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음이다[마 25:45].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경우 그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한 몸 체제에서 이탈되어 있음을 의미하므로 이를 회개하지 않는 경우 멸망 곧 생명 아닌 죽음밖에 없다[:45]. 무조건 산다고 하는 모양새는 자기 부인으로 나타남이니,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나와 함께 지체가 되어 있는 이웃을 위하고 또한 공동으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함이기 때문이다. 이 자기 부인은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먼저 나를 위하셔서 자기의 전부[생명]를 나를 위해 바치심으로 내게 영원하신 선물로 주셨기에 가능하고 또 그렇게 본을 보이신 것이다.

고로 마땅히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동시에 움직여야 함이니, 이것이 자기 부인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주님 친히 자기를 위하시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하시는 본을 보이셨으니 나 역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바로 자기 부인이다. 10명의 나환자를 고쳐 주셨으나 그 중 단 한 사람만이 그나마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감사할 줄 알았을 뿐인데 이런 실상을 책망하신 것이라든지[눅 17:17], 청함을 받은 이들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잔치자리에서 추방하였다고[마 22:13] 경고하신 까닭도 여기에 있다.

상식대로 해도 은혜를 저버리면 안되고 마땅히 감사를 해야 하는 것이다. 구원 받는 것도 이런 평범한 상식 수준에서 할 일을 다하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상식대로 하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순종도 상식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죄는 이런 상식을 벗어남이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할 도리로서의 상식을 양심이 가르치는 바다. 그런즉 양심의 작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와 같이 건전한 상식으로 판단하여 행할 수 있도록 만드셨건만, 피조물 스스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그 자유를 남용, 오용 또는 악용함으로 인하여 자해(自害) 행위를 하게 되고 이를 회개하지 않고 고집할 경우 급기야는 자멸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살아 상식대로 하지 않는 결과다. 그런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필연적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짓을 답습하여 세상을 또다시 비극의 혼돈으로 추락시킬 것인데 이를 허용하실 리 없으니 그래서 이런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다[마 7:21]. 두 번 다시 에덴낙원에서와 같은 비극적인 참상은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설혹 들어간다 하여도 결국 추방될 것이므로 그럴 바에야 아예 처음부터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함이 마땅하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룸"[빌 2:12]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시험하는 내용은 주님의 광야 시험에서 드러난 그대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방법이 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이기는 방략이 되고 성경의 경고대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빌 2:12] 결과가 된다. 왜냐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성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그가 어찌하여 죄를 지어 멸망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여 둘이 하나되는 생명의 법칙의 핵심인 자기 부인이 그 핵심 골자가 된다.

이 법칙대로 사는 데에는 자기의 상대가 자리를 위함을 확고하게 믿어야[신뢰해야] 하는 것이고 그래야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상대를 위해서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고후 5:15]. 더불어 이 세상의 속성을 알아야 함이니 왜냐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의 지배자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눅 4:7/마 4:9]. "이 모든 것을 네게 줄 것이니 내게 절하라[경배하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임금이 되어 다스리는 세상은 원천적으로 우리와 화합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세상인 줄 확신할진대 죽인다고 해도 그런 위협에 떨겠는가. 죽음으로써 대항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데 섞이고 어울리려고 하겠는가.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과 함께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심판을 알릴 것뿐이다. 세상을 악하다고 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말할 수가 없게 된다. 세상을 악하다고 하니 세상이 우리를 미워함이야 당연하다[요 7:7]. 세상을 좋게 말하고 사람 살 만한 곳으로 말하면서 절대로 구원의 희소식을 전달할 수 없음을 명심할 일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살면서 영생도 얻는 것이라 하여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전함으로써 "다른 영"을 받게 하고 있는[고후 11:4] "배도(背道)"[살후 2:3]의 시대다. 그런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런 기독교를 오히려 비호하고 장려하고 그 세력화를 부추긴다. 자기에게 전혀 무해(無害)하고 오히려 자기의 목적을 달성함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실을 밝힘이 없이는 은혜의 구원의 복음[희소식]이 제대로 온전히 전달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은 함께 살아나기 위함이었다. 내가 현재 그리스도 안에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결과다. 고로 죄 짓는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자기 부인을 하고 있는 자이므로 죄를 짓지 않고 의와 선을 행하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의인인 것이다. 내가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여 절대 복종하기로 약속하였으므로 그 약속을 액면대로 수용해 주시어 성령께서 내 안에 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당연히 내가 약속한 대로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요 15:1,2,4,5,8,16/마 7:19,20/21:43/막 11:13,14/눅 13:6/벧후 1:8]. 만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거짓말한 자로 분류되어 의인이 아닌 죄인이다. 나는 나의 죄로서 그 응분의 대가로 죽음[멸망]밖에 없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을 곡해하거나 혼동하지 말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것은 내 안에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 된 것이니, 가장 먼저 나의 회개로써 지난 죄가 씻어지고 용서된 다음의 일이다.

회개는 다시는 불순종하지 하지 않고 복종하겠다는 약속임을 앞에서 누차 밝힌 대로다. 뉘우치는 자가 어째서 그 잘못을 계속 짓겠다고 말하겠는가. 당연히 다시는 그런 짓을 않겠노라 하는 것이 회개가 아닌가. 성령을 모시는 것은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심이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셔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됨으로써 그 죽으심이 나이 죽음이고 그 부활이 내가 다시 살아남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믿으면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고, 내가 믿지 않으면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던 것이 취소가 되는 그런 무엇이 아니고,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영 즉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심이기 때문에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이전처럼 나 자신을 위해 살아 즉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할 때에는[히 6:6/10:26,29]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내 안에 계시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도 함께 다시 살아남도 동시에 사라지고 나는 그리스도를 믿지 앟고 죽은 자로 있던 과거 상태로 도로 돌아가는 것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특정 사실을 사실로서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도 "나를 믿는 자는 영생한다" 하셨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내어 주시어 우리 위해 죽으신 사실을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다[요 3:16]. 그러므로 내가 성령을 내 안에 모심으로써 내가 구원이 되는 것인데, 이렇게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되는 체제를 이루는 것은 갑이나 을이나 자기를 부인하고 그 상대를 위함에 있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상대를 시인한다는 그 뜻이니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상대를 위해 산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 위해 죽으신 목적을 가리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라 한 것이다[고후 5:15/롬 14:7-9].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시고 우리가 주님을 시인해야 주님도 우리를 시인하신다 하신 것이다[마 10:33].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면 나를 위하신 그 죽음 및 일체의 모든 것이 더 다시는 나를 위하심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면 다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히 6:6/10:26,29].

여기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죄 때문에 다시 말해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그 결말로서 죽으신 것임을 말한다. 내게 관한 한 그런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모든 끔찍한 일들은 모두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 때 따라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을 때[고후 5:15]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 성경은 우리가 엉뚱한 생각으로 착각하지 못하도록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심만 있어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경우 성령께서는 얼마든지 가르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그런 열심이 없고 찾고 구하고 두드리지 않기 때문에 모든 혼돈이 일어나는 것이다. 누구든지 성경에 밝히고 있는 이 말씀을 듣고 자신이 없다고 생각하거나[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아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일에서] "말씀이 어렵다"[요 6:60]고 여기는 이들은 현재의 그러한 상태로 판단하건대 그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음을 확언하게 되어 있다.

사랑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사랑으로 화답하는 자만을 구원하신다. 아무나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다[:65]. 모든 사람이 회개하기를 원하신다고 성경이 밝혔지만[딤전 2:4/벧후 3:9],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였다"[눅 13:34] 하셨고 우시기까지[19:41] 하셨으니 더 무슨 말을 하리요.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56] 했는데 이를 잘못 해석하여 율법이 무슨 죄와 관련된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이다.

율법이 아니고는 내가 죄를 알 수 없었다 하는 것은[롬 7:7], 산 자만이 지킬 수 있는 율법을 죽은 자에게 갖다 댐으로써 스스로 산 자가 아닌 죽은 자임을 자각시키기 위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왜 산 자만 지키는 율법[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사전(事前) 교육 차원에서의 제도적 장치에 관한 모세 율법이 아닌]이냐 하면 하나님 주신 생명을 유지 보전하는 의미에서의 율법[계명]이기 때문이다. 곧 생명과 사랑의 법칙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음으로써 생명 가운데 있지 않고 죽음에 있는 한, 율법은 단지 내가 죄인이고 죽은 자라는 사실만 일깨워 주는 역할일 뿐이지 내게 그것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뜻은 아닌 것이다. 그런 요구는 내가 산 자가 되어 있을 때에만 한한다. 그러므로 "죄의 권능이 율법"이라 함은 율법을 앎으로써 내가 죄인인 줄 깨달았고 죽은 자인 줄 자각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그래서 "죄의 권능"이다. 죄[죄와 사망의 법-롬 8:2]가 실질적으로 나를 사로잡고 있음을 내가 비로소 알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조물주 하나님과 그 피조물인 우리는 갑과 을의 관계를 이루어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조물주 하나님 홀로 계시던 때와 같은 하나로서의 통일된 모습을 유지하되, 하나님 홀로 계시던 때보다 더 풍성한 생명의 세계가 새롭게 병(丙)이라는 이름 아래 여전히 하나로서의 조화를 지속하는 아름다움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피조물인 우리들 역시 여럿으로 존재하지만 개개인 각자가 이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색깔의 한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이니, 각 개체가 자기의 자주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한 몸이라는 동질성(同質性)을 똑같이 지녀 공유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한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으로서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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