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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3) 집에 있는 교회 등록일 2016.02.27 21:22
글쓴이 김일동 조회 387

 

고로 우리 상호간에서도 피차를 대할 때, '갑과 을이 하나 되어 있는 병이라는 존재' 즉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는 새 피조물'로 인식되어, 모든 사람 개개인에게 다 한 그리스도 즉 한 성령께서 계시니. 그 개개인을 대할 때 그 개인을 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하나 되어 계시는 그리스도를 대하는 것이 되어, 그를 위함은 곧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한 몸으로 한 지체가 되어 있는 나는, 머리를 비롯한 모든 지체를 구성하고 있는 모두가 나를 주인으로 모시는 사랑의 체제 속에서 살게 되니 문자 그대로 내 가족이요 내 나라요, 그 중에 내가 왕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

내가 주인이다.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친히 자신을 내게 선물로 주셨으니 말 다한 것이 아닌가! 이런 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생명의 핵심인 사랑이 중심이 되어 있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들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들이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다"[요 15:24] 하심으로써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심을 나타내신 것과 같이 내가 하나님을 모심을 가리켜 아버지와 아들을 모심이라 했지만[요이 1:9],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12:45] 하신 대로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사람 예수 그리스도이시나 아버지와 함께 계심을 보는 것이므로 아버지를 또한 뵙고 있으니 곧 아버지의 형상[볼 수 있는-고후 4:4]이 아들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둘이 하나되어 있는 이치'는 삼위일체의 원리의 형태로 하나님 지으신 모든 만물에 두루 통하고 하나도 이에서 예외가 없으나, '둘이 하나되어 있는 사랑의 모습'만은 영이신 하나님과 상관되는 일일 때에만 가능하다. 그리고 영으로 계시므로 육체 안이든 그 어디에든 계시니,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은 '사람'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됨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만이 아니시고 하나님이시므로, 이렇게 우리 각자가 얼마든지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받아 모심으로써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치로 나와 하나되심을 통해 나를 구원하심이요 또한 같은 이치로 모든 사람을 일일이 하나 같이 구원하심이다. 나와 하나가 되실 수 있기 때문에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고 그 장사 지내지심이 내가 무덤에 장사 지내진 것이요 그의 부활이 내가 그렇게 죽어 땅에 묻힌 후 "새 것"[고후 5:17] 곧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한 자로서 존재하게 됨이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일단 죽고 죽어 무덤에 묻혀 옛 창조, 옛 사람, 옛 것은 완전 종료되고 그리고 나서 다시 살아나야 구원인데 이런 모든 작업이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는 믿기만 하면 되고, 그래서 선물이고 은혜로 얻는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되어 계심과 같이 나도 똑같은 모습과 이치로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구원되어 있으므로, 그 삶[둘이 하나됨] 역시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위하시고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시듯 그리고 그 실제 본을 아들 친히 나타내시고 그 말씀으로[주로 요한복음서에 완연히 나타나 있다] 밝혀 설명하신 그대로 나도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있고 동시에 아버지를 내가 섬기고 위해 드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실제 죽으셨으나 아버지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실 수 있었음과 같이 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고 아버지로 말미암아,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도[그리스도를 위해]" 얼마든지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이 명백한 것이니, 그리스도와 이같이 둘이 하나되어 있음이다. 그런즉 어찌 하든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니 그 죽음과 닮아 있어야 그 생명과 영광에도 닮을 수 있기 때문이다[빌 3:9-11]. 두루 닮아야지 한 쪽 면으로만 닮는 수는 없지 않은가[롬 8:17].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되어 있는 구조, 그 이치는 반드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게 되어 있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이다. 자기를 위하지 않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니 자기 부인이다. 자기 부인이 이와 같이 둘이 하나됨에서 상대가 자기를 위해 주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동시에 쌍방이 똑같이 위해짐이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예수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님을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11]고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 항상 죽음에 넘겨지는 것을 생명으로 삼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일인데 여기에 그 어떤 지어낸 거짓말도 속임수도 개재될 틈이 없다. 이런 것이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이다. 이런 내용으로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이 지어낸 이야기라느니 거짓이니 속임수니 하는 말들을 남발하는 것이다. 앞에서 강조한 대로 상식 차원에서 모든 사물을 관찰하고 판단할 일이다.

발이 손을 위함이나 또는 손이 발을 위함이나 발이나 손 자체를 위함이 될 뿐만 아니라 한 몸으로 통해져 있는 머리를 또한 위함이 되는 것이다. 즉 전체를 위하면서 동시에 개체를 위함이니 그 개체에는 나 자신이 포함됨은 물론이다. 아무리 모래 같이 수다한 개체가 제각기 자기 개성과 특성을 지니고 있어도 다 이같이 한 몸으로 통해져 있기에 문자 그대로 하나로 통일된 사랑과 평화와 희락의 세계가 된다.

인간의 세계에서 실현 불가능한 것이 아닌, 실현 가능한 진정 '하나'[사랑]의 세상으로 통일된 현실적인 이상향이다. 이 세계에서 각자는 자기 이웃 대하기를 하나님 섬기듯 하고 (왜냐면 그 이웃마다 다 하나님을 자기 안에 모시고 있으니까-요이 1:9) 또한 각자는 그렇게 자기 이웃을 위함으로써 하나님을 위하게 되니까 그러하다. 이런 진실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말로만, 사람마다 "부처(佛) 위하듯이 위한다" 하나 그것이 현실화가 될 리 만무하다.

그리고 또한 각자는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칙사 대접 정도가 아니라 마치 하나님 위하듯 하는 극진한 대접을 받아 누리게 됨이다. 이 세계에 비록 수억의 사람이 있더라도 한결같이 하나같이 한 사람 빠짐없이 다 나를 극진히 위하는 것을 보게 되는 꿈같은 세상의 현실화, 구체화이다. 이보다 더 이상적인 이상향이 있을 수 없다. 반대로 불 못(이와는 영원히 대칭적인 세계로서)으로서의 형벌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이와는 반대로 돌아가는 세상이 된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몸서리 쳐지는 세계다. 생명의 낙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주변의 환경과 여건도 그렇거니와 상호간에 끼쳐지는 증오와 해악(害惡)으로 인한 고통으로 세월이 지고 뜨고 하되 그 끝이 없으니 그 "고난의 연기는 세세토록 올라간다"[계 14:11]고 했다. 거기에는 일체의 구원도 구제도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싸우며 노심초사하고 죽기도 각오하는[행 21:13] 것이다.

이 이상향 운동을 우리는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불철주야 전개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보람된 일이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가 바로 이것이다. 종교가 아니다. 범세계 범국민적인 사회운동이다. 행복한 삶을 살자는 운동이다. 이 세상에서만 실현 가능한 운동이다. 천국에서는 이미 모든 것이 정착 단계에 이르러 확고 부동하므로 그런 운동이 필요치도 않다. 이를 실현하고 있는 사회운동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의 교회다.

물론 이름만의 이른바 '그리스도 교회', 기독교회를 표방하는 것이 오늘날 넘쳐 나지만, 오직 이상과 같은 이치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교제를 위한 집합체가 교회다. 이들은 그 이상향의 시민들인 것이다. 천국은 철저히 자율로 움직이는 세상이다. 현재 자기중심의 인간형으로는 타율적인 세계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타율적인 인간생활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실 리 없다. 그것은 마치 생명력 없는 오직 인형[꼭두각시]과 같은 것이기에 그렇다.

어째서 타율적인 인간이 되지 않을 수 없느냐 하면, 자기 위주이다 보나 서로 싸우고 시기함으로 상호 살육극이 끊일 사이가 없어 불가불 강권으로 통제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 증거 중 하나가 3운법칙[트리니 호모, trini homo]이다. 자연 그러자니 자율 아닌 타율이 된다. 그런 타율로 다스릴 수밖에 없는 오늘날 인간 세상인데도 왜 여전히 이렇게 지속되어가느냐 할 것이다. 오늘날은 구원의 때이므로 누구든지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까닭이다.

고로 일단 구원 얻는 숫자가 충족되면 이 세상은 끝날 수밖에 없고 더 다시는 이런 타율적인 세계가 존속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해진다. 이런 자기중심형의 인간상은 에덴에서의 불복종으로 빚어진 결과다. 그러므로 치유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피조물되는 것밖에 없고 그 치유가 이렇게 아주 완벽하게 성취된 것이요 따라서 오직 복종하는 자만이 들어가는 생명의 세계다. 바울이 그렇게 극심한 핍박과 장애의 고통을 겪어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다시 또 다시금 오뚜기[불사조]처럼 일어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지칠 줄 모르게 나아간 것은, "사람 건져 올리는 어부"의 일이 그의 낙(樂) 곧 그에게는 즐거움 자체였기 때문이다.

죄인 하나 회개하면 하늘에서 천군 천사들의 환호가 말할 수 없이 크다 하셨고[눅 15:7] 또 성령으로 더불어 복음 전하는 일을 하늘의 천사들도 구경하기를 원한다고[벧전 1:12] 한 것처럼, 그런 열정, 그런 기쁨이 줄기찬 원동력이 되었기에 바울은 그렇게 많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아랑곳없이 숨질 때까지 뛰어다닌 것이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전 9:16]는 말을 했다고 해서 그런 화가 두려워 억지로 그런 일을 한 것이라 생각한다면, 이만 저만 착각이 아니다.

바울이 그 말을 한 것은 일반론으로서의 기본 원칙을 말한 것이다. 자기의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으나,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가정해서 이를 전제로 하여 말한 것으로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 그런 '믿음 없는' 상태를 지적했을 뿐이다. 바울은 믿음 없는 상태가 아니라 믿음에 넘쳤고 그 믿음에서 우러나는 평안과 희열에 겨워 자랑이라고 하면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지 않았던가.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니, 기뻐하라"[빌 4:4] 한 그대로다.

죽음이 두려워서 했던 복음 전도였다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니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는 것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롬 9:1-3]는 말이 나올 턱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바울의 열심에 제동을 거셨다.

복음 전파로 동분서주하는 것은 좋으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위험한 틈이 엿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고난 중에서도 복음 전파에 여념이 없는 나머지 기도에 소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 전파에는 반드시 충분한 그리고 철저한 기도가 따라야만 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죄인처럼 쇠사슬에 매인 몸이 되어 로마로 끌려가도록 만드시는 동안에 충분히 기도할 수 있도록 강제적으로나마 환경을 조성해 주신 것이다. 이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일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제동은 그 몸에 "가시" 곧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사자"[고후 12:7]를 주심으로써 교만해지지 않도록 조처해 주신 것이다. 이는 강제가 아니라 바울이 주님을 향하여 열심을 냄에 보조를 맞추신 것이다. 만일 바울이 이러한 사랑이 없이 냉랭하기만 했다면 이런 은혜를 주실 리 없다. 이는 "나를 부인하는 자를 내가 부인하고 나를 시인하는 자를 내가 시인할 것이다" 하심과 같은 의미가 된다.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열심을 낼 때 잘하는 중에 더 잘 하라고 주님은 우리를 징계하시고 우리에게 회초리를 드시는 것과 같다[히 12:8].

천하보다 귀한 한 사람의 영혼이라는 말들을 한다. 그렇다면 그런 보물을 진정 욕심 내어 물이고 불이고 가릴 것 없이 미친 듯이 뛰어들 열정도 없는가. 이 욕심은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전체를 위한 욕구를 말한다. 왜냐면 한 몸을 이루게 될 천하보다 귀한 나[우리]의 영원한 지체(肢體)들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우리가 아들들로서 참예함이기 때문이다.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은, 평소에는 감히 생각도 못할 인간 마력, 괴력도 솟구치게 하고 용솟음쳐 내는 것을 우리는 가끔 목도한다. 이 모두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장치하셨기 때문이다.

그토록 인간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을 가졌다면 어찌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가 없는가. 한 사람을 구원해내면, 나는 영원토록 나를 사랑하여 영원을 두고 내게 생명의 꿀 맛을 더하게 해 주고 황홀한 삶의 향기를 불어다 줄 내 형제 즉 또 하나의 '나 자신', 또 하나의 '나의 생명', 나의 지체를 더 얻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명이 내가 인도해내지 못함으로써 영원한 고통 가운데 허우적거리게 버려둘 수 있는가.

그것은 나 자신을 그렇게 버려둔다는 의미도 됨을 모르는가. 복음을 전하는 나의 발길이 마르고 닳도록 다닌들 내게 어찌 과하다 하리요. 평생의 노력 끝에 단 한 사람이라도 그런 생명 건져만 낸다면 무슨 여한이 있으랴.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내가 나 자신을 위함'이라고 속단하여 오해하지 말 것이다. 어디까지나 그 결과를 두고 논하는 것이다. 이는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 자기의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와 같다. 이 표현대로 하면 각자 자기 구원을 목표로 힘쓰고 애쓰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 결과를 놓고 말한 것이다.

목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니 곧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데에 있음이다. 즉 '우리를 위하는 것'과 '나를 위하는 것'과는 같은 의미로 들릴지 모르나 엄청난 차이가 있다."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됨"[엡 5:28]이라 함과 같다. 처음부터 자기를 사랑하여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는 이는 없다. 오직 아내/남편을 생각하고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 최종 결과가 그렇게 나온다는 뜻이다. "남편을 포함한 '우리' 부부', '아내를 포함한 '우리' 부부"다. '내'가 아닌 '우리'다.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 주님께는 먹을 음식이라 하셨다[요 4:34].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 사활이 달린 것이다. 생사가 달린 일이지만 그것을 의식하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몹쓸 병고에 시달려 입맛이 아주 없어 억지로 먹고 마시려는 병자 외에는 없다. 문제는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나아가, 자기 유익을 구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데에 있다. 고로 "항상 복종함으로써" 구원을 이루라 한 것이다.

자기중심으로 나가지 않고 자기 부인으로 나가는 것은 믿음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 없이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증거가 될 뿐이다. 그래서 "믿음을 지키라"[딤후 4:7]는 것과 동의어가 되는 것이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의 의미인 것이다. 보통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라 함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누가 내게 묻기를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요 하면 첫째도 대한 독립, 둘째도 대한 독립, 셋째도 대한 독립이라 말할 것"이라 했는데 그러면 나는 "첫째도 사람 구원, 둘째도 사람 구원, 셋째도 사람 구원이요"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는 열심히 나를 삼켰다" 하신 것처럼 거룩한 열정에 사로잡혀 그리고 삼켜져 이글이글 타오르는 횃불이 되어 어둠을 밝히며 외치며 종횡무진 달리다가 마지막 날 빗발치듯 하는 돌 팔매질의 무더기 속에서 "보라! 인자(人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이 보인다!" 하고 부르짖으며 "주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는 마지막 기도로 하나님 나라 그 개선문(凱旋門)을 향해 침입해[눅 16:16/마 11:12] 들어갈 마음은 없는가.

구원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오해하기를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나 대신 죽어 주심으로 내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해 주셨다는 말들을 한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 삶의 방법, 사람 살아가는 법칙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의 구원으로만 그치지 않고 향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삶을 영위할 것인가 그 방법을 제시하고 그 토대를 깔아 주는 것이다.

이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다. 이것을 간과하기 때문에 그 구원의 핵심을 놓치고 실질적으로 구원에 들어가지 못하는 비극을 낳는다. 구원 받음은 영원히 살기 위함인데 영원히 사는 방법을 모르고서 어찌 영원히 살기를 바라리요. 이것은 구원 얻는 방법 자체를 모른다는 말과도 통한다. 이 점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다. 즉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롬 8:13] 했고, 그리고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13]이라 했다.

이 성경 구절마저 딴 방향으로 해석해 버리면 이 역시 그만이다. 다른 모든 성경도 그렇게 억지 해석하는 이에게는 구제불능일 수밖에 없다. 그 영원히 사는 방법은,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하여 죽는다"(롬 14:7,8), 또는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15) 한 그대로다. 이전처럼 나를 위해 나 중심으로 살아도 구원 받는다는 바로 그 엄청난 착각이 문제다. 이것은 위에 명시된 바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명백한 불신이요 반역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낙원에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분명히 경고하셨음에도 이를 믿지 않고 "죽지 않는다"는 피조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더 신용한 바로 그와 똑같은 불신이요 거역이다. 이런 똑같은 죄를 반복하고 여전히 같은 죄 가운데 있을 바에야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고통으로 죽으실 필요 없이 그냥 그대로 모든 인류를 영생하도록 조처하시면 될 일이 아니겠는가. 아예 아담을 죽지 않게 만드시면 되는 일이다.

그런 서로 일치하지 않고 모순되는 것은, 철저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우주 법칙으로 운행되는 이 우주에서 용납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구원의 정작 참 의미를 알아야 하고 구원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살아야 하는 것이니, 다시 말해 "주님, 주님 한다고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는" 것이라 하신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나의 생명되시고 내가 주님 삶을 살아 서로 바꾸어 자기 존재를 향유함으로써 둘이 서로 하나로서 존재하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이렇게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을 말하는 것이 우리 "구원"이다. 내 안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요" 내 안에 내가 아닌 주님께서 사시는"[갈 2:20] 것이요, 그리스도 안의 나이기 때문에 "내 생명이 주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고"[골 3:1-4] 주님과 더불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어[엡 2:6], 주님께서 영광 중에 나타나실 그 때 나도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것을 알고, 그렇게 믿은 대로 이 세상에서 행동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자는 것이 어째서 그렇게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인가.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셔서 아들을 통해 아버지의 일을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안에 계셔서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과 같은, 사랑으로 하나됨의 이치를 따름인데, 무엇이 그렇게 어렵기에 자기 부인을 부정하고 육신대로 살아도 구원은 받는다고 무지(無知)의 억지 말을 하는가. 한마디로, 육신대로 살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고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기[요 12:25] 때문이다.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함이요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것은 고난이든 죽음이든 오직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함이요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지 아니함이다. 살고자 하면 도리어 생명을 잃게 되고 미워해야 영생하도록 자기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된다 하셨다[:25]. 이 세상은 절대로 살 만한 곳도 아니려니와 게다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하는 마당이므로 다시 말해 언제나 사즉생 생즉사(死則生生則死)만이 통해지는 전투 현장이다.

이 세상이 만일 영원한 불 못이어서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죽음으로서의 의미밖에 없는 이 세상은 어떤가. '불 못'과 '이 세상'의 차이가 있다. 즉 이 세상은 악한 자들을 걸러내기 위한 함정, 덫, 올무 역할을 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살 만한 세계인 것처럼 착각되도록 하여 악한 자들로 하여금 생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불 못"에서는 그런 것이 전혀 없으므로 그래서 순수하게 고난뿐일 따름이다. 이런 실상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에 때가 있음을 강조한다. 만사 때가 있는 법이다. 고로 때를 따르는 것이 지혜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는 것이다[전 3:1,17/8:6].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다"[:2-8].

전쟁하는 자가 시종 승리하기를 바라는 것은 전쟁 자체를 포기하고 적에게 항복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밀리다가 종반전에 들어 밀고 들어가 최후 승리를 낚는 일이 비일비재다. 처음부터 일방적으로 이기고 들어가는 전쟁은 대개 없으니, 상대가 일찌감치 유불리(有不利)를 따져 화친을 청해 오기 때문이다[눅 14:31]. 우리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의 양상을 성경에 명백히 해놓으셨으니 즉 먼저 발뒤꿈치를 물리고 다음에 상대의 머리를 밟아 상하게 하는 순서다[창 3:15].

지금은 발뒤꿈치를 물리는 상황이다. 머리를 밟는 것은 이후에 오게 되어 있다. 처음부터 상대를 제압하여 머리를 밟고 있는 줄로 착각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여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들이다. 이런 사람은 전쟁에 임할 수 없다. 기드온의 300명 용사가[삿 7:6] 바로 이 뜻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교훈을 지닌다. 기드온이 군대를 소집할 때 모인 숫자가 3만2천이었다. 숫자가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변변히 싸우지도 않다가 정작 이긴 다음에는 자기가 싸워 이겼다고 허풍을 떨 사람들을 솎아내기 위하여 전쟁 공포에 사로잡힌 채 어중이떠중이로 몰려든 인원 2만2천을 빼니 1만이 남았다. 그리고 이 1만 가운데에서 참으로 전의(戰意)가 있고 없는 것을 따져 걸러내니 3백명만이 적격이었다. 1만명을 개울 가로 데려가 지금 한창 적과 대치하여 접전 중이라고 가정해서 그 때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자 할 때 어떻게 하겠는지 스스로 알아 그대로 시연해보라 했더니 3백명만이 물을 손에 움켜 쥐고 개처럼 핥았다. 나머지는 개울가에 그냥 무릎을 꿇고 입을 물에다 처박고 적의 칼날이나 창 끝이 다가온대도 내 몰라라 하는 식으로 그렇게 마셔 댄 것이다.

우리의 구원이 그냥 하나님께서 영생이라는 선물을 주시는 것으로만 착각하면 큰 오산이다.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이 구원인데 이 성령을 받으라 하시기 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내가 너희를 보낸다" 하신 것이다[요 20:21,22].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다"는 것은 일하라고 보내심은 물론이요, 일하기 위해서는 이 일 자체를 사생결단으로 방해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및 악령들과의 접전이 불가피하므로 전쟁에 임하는 완전무장한[엡 6:13] 전투원[딤후 2:3,4/빌 2:25]으로 보내심이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하심을 받은 자는 적다고 하신 말씀이 여기에도 해당된다. '두려워하는"[겁약(怯弱)한, timid, cowardly] 자는 다 도태된다[계 21:8]. 그리고 싸우는 듯 마는 듯 하는 자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으므로 입에서 토하여 내친다고 하셨다[게 3:16]. 적극적으로 능동성 있게 하나님의 일에 달려들지 않는 자도 모두 걸러 내어진다는 교훈이 이 기드온의 3백명 용사의 가르침이다. 고난 받음이 없이 전쟁을 구상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정신이 온전하지가 않다.

믿음의 일에서 말하면, 그 믿음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니 이는 믿음이 없다는 의미다. 보내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적지에 보내졌다는 뜻이요 적지에 포로되어 있는 인생들을 구출하고자 함이다. 특공대를 보내는 것과 같은 양상이다. 보내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원래의 삶의 터전을 일시(一時) 뒤로 하고 거기를 떠나 있다는 의미다. 신라의 박제상이 인질로 있는 왕제(王弟)를 구출하기 위해 일본으로 보냄 받은 것과 같다. 목적을 성취한 다음에는 일본에 복속(服屬)하면 살려 준다는 회유와 함께 갖은 악형에도 굴하지 않고 순절했다.

영계와 자연계를 감히 비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우편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는 지위와 신분에다 내일도 기약 못해 내일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하루살이 같은 이 세상의 삶을 감히 견줄 수 있는가. "미친 마음"[전 9:3]이 아니고는 그럴 수 없다. 이런 미친 마음은 구제불능 곧 불치(不治)다. 영구적으로 고치지도 못하는 이런 병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런 불치병자는 그 스스로 원해서 된 것이므로 그 자신이 고치지 하나님께서도 고치시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강제, 간섭이 되는 까닭이다. 자기가 고친다는 것은 회개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즉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로 하여 회개하고 그 약속대로 시종일관하는 일이다. 중도에 변심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고난을 다 감당하시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몸된 교회를 위하여 "은혜"[빌 1:29]로 남겨두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와 하나됨이요 영원한 삶도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기 때문이다.

한 몸이니까 영광에서도 하나요 고난에서도 하나 됨이다. 그리스도와 이 하나됨을 인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 남으신 고난을 그 교회를 통하여 마저 채우심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운다고 한 것이다. 무릇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이 고난을 필연적으로 받게 되어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게 되어 있음을 주님께서는, "세상이 나를 핍박하였으니 너희도 핍박할 것이라" 하심으로 확인해 주셨다.

고난 가운데 주님과 하나되어 주님과 함께 고난 받을 수 있는 은혜는 이 세상뿐으로 따라서 그만큼 색다른 것이며 말할 수 없는 가치의 은총인 것이다(:29). 주님과 하나되어 있음-모든 은혜는 여기에 집약되어 있다. 사랑으로 하나됨이다. 이 하나됨은 이미 설명한 대로 조물주와 피조물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사랑으로 하나된다는 것은 무작정 양편이 하나가 되고 싶다고 해서 상호 약조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이, 어떤 상호간 필요에 의해 자연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우리가 났기 때문에 피조물로서 창조주와 하나를 이룰 수 있음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 함과 같은 이치다. 이는 다시 말해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지 않는 한 인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이상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런 것이 인간 자신에 의해 자연적으로 되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면 이 세상은 이미 오래 전에 그런 것으로 해서 더욱 살기 좋은 곳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를 않고 그 정반대이니 살벌하기 짝이 없는 세계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과의 약속 관계다. 하나님을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는 약속이니,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당신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하심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이미 확증해서 나타내셨기 때문이다[롬 5:8]. 고로 오직 나의 결단,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묻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내가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순종을 약속하고 나설 때 구원은 시작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하나님과 나와의 약조[약속]이다.

즉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신다는 것은 이제 영원히 변경될 수 없는 사실, 더 의심할 필요 없는 진실임이 입증되어 있으므로, 오직 나의 사랑, 나의 순종에 의한 약속 준수만으로 좌우되는 일이 되어 있음이다. 사랑으로 하나됨이 가능하다는 것은 본질상 그 양편이 별도의 것이 아니라 원래 같은 것이었고, 그래서 원래는 하나로 존재해 있던 것이(이것이 본질상 서로 같다는 증거다) 둘 또는 그 이상으로 분리된 것이고, 따라서 이 둘 또는 여럿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원래는 하나였으므로 그 원래의 하나로 응집할 수 있는 성질과 그런 강렬한 성향에 의하여 그렇게 하나로 존재하려는 자연스러운 욕구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래서 그런 하나됨(사랑으로)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만 논할 수 있는 일이라 한 것이다. 남녀가 하나되는 것도 애초 아담 하나로 존재하던 인간이 그 아담으로부터 또 하나의 인간이 파생됨으로써 남자와 여자라는 두 개체로 양립하여 존재하게 됨에 이르러 둘 사이에 생겨지게 되는 피차간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다 한 인간 즉 아담으로부터 난 아담의 후손들인데 왜 그러면 이제까지 하나로 화합하지 못하고 전쟁 없는 때가 없이 이 모양으로 지내 오는가 할 것이다.

모두 사랑으로 하나되어 사는 유토피아에의 갈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갈망에도 불구하고 그 화합과 조화를 깨뜨리고 각자 자기 중심이어서 자기가 우위에 올라서고 더 많은 이권을 차지하고 싶다는 "욕심"이 동시에 자기 속에 더 강한 욕망으로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둘 사이의 내적 갈등에서 항상 자기중심이 여지없이 상대[하나되어 서로 상대를 위하겠다는 의욕]를 압도하기 때문이라는 슬픈 인간 비극을 말하고 있는 것이 로마서 7장 24절이다.

이 적절하지 못하게 일어나는 욕망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 말미암은 비극의 산물인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원죄(原罪)"라고 하겠는데, 실상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든 관계 없이 어쨌든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이 죄과(罪果)로 인해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 죽음의 의미는, 우리가 현재와 같은 이런 흙으로 돌아가는 육체로 다시 돌아와 있다는 사실만 아니라, 이러한 특성의 자기 위주의 삶이 낳은 결과로서 하나님의 생명의 세계로부터 영원히 분리된 상태라는 데에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영원히 그렇게 자기 위주로 밖에 살 수 없는 구제 불능의 본성 때문에 우리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필요불가결하게 되는 것이다. 생명이 삶의 낙이라면 그 생명으로부터 분리된 것은 그 반대 개념인 고난, 고통일 수밖에 없는데 이런 저주 받은 삶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에 내가 함께 함으로써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이리하여 이미 지은 죄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하시고 동시에 향후 다시는 그와 같은 죄를 짓지 않도록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되어 사는 삶의 구조가 되게 해 주심으로써 위에 언급한 그런 소위 죄성(罪性) 또는 "원죄" 역시 종결을 짓는 것이다.

죄는 자기 위주로 삶으로써 이루어지는 자기중심의 모든 욕구를 총칭하는 것인데,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관계에서는 만유(萬有)를 지으신 그리스도 자신께서 바로 나의 생명 그 자체가 되시어 나를 위해 사심으로써 내가 나 자신을 위주로 하여 삶을 엮어 나갈 당위성이나 필요성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기 것이다. 과거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욕구하고 소망하고 꿈꾸던 그 이상으로 나를 위해 모든 것이 되어 계시고 또 직접 나를 위하시는 위치에 계시니 더 이상 내가 나를 위하여 무엇이든 할 여지가 아주 없어져 버린 바로 그런 토대가 이루어짐이다.

그리고 우리 위한 그리스도의 그같은 고난 받으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니, 당신께서 지으셨기 때문에 자기 자신처럼 그 피조물들을 사랑하신다는 단순히 그 사실을 말함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지 않으셨다면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실 까닭이 없다. 우리가 비록 창조한 것은 아닌데도 단지 우리가 낳았다는 이유로 우리 자식들을 대하는 부모로서의 자식 사랑을 보아도 이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인간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지 않았다면 사랑이란 것 자체가 존재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는 것은 그런 가장 자연스러운 이치 속에서 이루어지는 조화이다. 영이신 하나님과 육체로서의 인간인 내가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런 하나로서의 조화를 이루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마치 예술품의 극치를 내 몸에 지니고 두고두고 감상하는 것과 같다고도 하겠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그와 같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주 만물을 다 합친 것보다도 아름다우심을 그리스도 재림 때에 뵙지 않더라도 미리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함만 아니라, 사람 사랑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정립이 없이는 피조물 상호간의 협약에 의해서만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이미 설명했다. 하나님만을 위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근본 바탕이 저변에 깔려져 그 토대를 이루어야 비로소 사람 사랑이라는 건축물을 세울 수 있음이다.

즉 하나님만을 위하는 기본 입장에서 내가 내 이웃[믿음의 형제]을 볼 때 그가 '하나님 친히 위하시는 사람'이다보니까 '그 사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위하고 사랑한다는 뜻이다. 바로 요한이 말한 바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한다(요일 5:)"가 그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할 수 있으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똑같이 공평하게 사랑하는 일이 비로소 가능해지게 된다. 이런 것이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함이다[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이와 같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믿음으로써만 될 수 있는 일이니, 그 믿음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으로 연계되어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을 믿음이라 할 수가 없다는 결론이 간단히 도출된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자가 로마서 7장과 같은 고민을 더 이상 할 수가 없게 된다는 이유가 여기서 나온다. 로마서 7장은 자기 사랑이 언제나 먼저 달려와 모든 것을 장악해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도무지 발붙일 틈을 주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 자기 사랑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래서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나의 삶을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그리스도의 삶을 내가 살아드리는 마당에서는 자기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으므로 로마서 7장이라는 것은 더 다시는 현재의 그리스도인의 체험이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죄의 몸이 멸히졌다"[롬 6:6] 하는 것이요 때문에 "마귀의 일을 멸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다"[요일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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