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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4) 집에 있는 교회 등록일 2016.02.27 21:24
글쓴이 김일동 조회 346

집 교회 운동-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CITHM'의 핵심은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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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최대 관건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役事)한다"[갈 5:6] 한 대로, 이런 저런 것을 다 몰라도 아주 간단히 말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 사랑 속에 이상의 모든 의미가 다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로마서 7장의 체험을 따지고 들며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체험이라고 고집하는 순간 그래서 아무리 그리스도를 믿어도 "육신대로 살"[롬 8:13]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게 되는 때, 그 구원 얻는 믿음은 일순간에 무산되어 버리는 것이니 거기서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면 자기를 중심하는 바탕에서는 자기 부인이 불가능하고 사랑의 핵심이 자기 부인이므로 핵심이 빠져 있는데 사랑이 건재할 리가 없다. 그 자기의 "믿음"이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 즉 그 본색이 드러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을 사랑하지 않음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있다가 다시 하나님 품속으로 돌아옴을 뜻한다. 주님께서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다시 말해 아버지가 없이는 내가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는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면 살 수 없다" 하신 말씀이 이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데 품속에 있다는 말은 못하는 법이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이 그리고 사람 사랑함이 없이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살 수는 없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하나님 나라에 가서는 그렇게 살리라고 보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나님 나라의 환경 탓에 그렇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내 자의가 아닌 타력(他力)에 의하여 그렇게 된다는 말인즉 사랑에는 그런 것이 숫제 존재하지를 않는다. 사랑은 항상 자율적이기 때문이다.

알기는 알기 때문에 "주님, 주님" 하고 부르지마는 믿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즉 하나님만을 위해야 하는데 반대로 자기만을 위하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위하지 않으면 그것은 기필코 자기만을 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성경의 판단이며, 그 중간은 없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뜻대로 행치 못하니 필연적으로 천국에 들어 갈 수가 없다[마 7:21].

나만을 위하셔서[주님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 나만을 사랑하셔서[주님 자신을 사랑하시지 않고] 나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그리고 살아나셔서 나만을 사랑하시며[주님 자신을 사랑하시지 않고] 나만을 위해[주님 자신을 일절 위하심이 없이] 지금 나와 함께 존재하시는 것이 내게 주시는 영원하신 선물로 성령 받는 의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만을 위하지 않고 여전히 나만을 위하는데 어찌 나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는다" 할 것인가. 세상에 그런 일은 없다.

이상과 같으므로 로마서 7장에 대해 그것이 바울의 믿은 후 체험이냐 아니냐 하는 헛된 논쟁을 할 필요가 없다. "다시는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갈 2:20]고 말한 바울이 그런 탄식, 곧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삶의 탄식을 하고 앉았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천부당 만부당의 소리가 아닌가. 만일 그래도 바울 자신의 이른바 "내적인 영적 갈등"이라 규정한다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성경 자체를 부인하거나 아니면 그 의미를 희석시키는 것이니 이는 곧바로 이 세상 신(神-고후 4:4)의 짓거리다.

간단 명료한 하나님 말씀을 괜히 어렵게 만들어 "혼잡하게"[고후 4:2] 하여 복잡하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에덴 낙원에서의 비극과 똑같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흉계가 되풀이됨이다. 구원 얻은 자가 믿음에서 떨어져 멸망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논쟁도 부질없는 짓이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자가 천국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명약관화인 이상, 항상 그리스도만을 위하는 삶이 되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바울의 탄식처럼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빌 3:18] 일이 없도록 하면 되는 것이지 달리 신경 쓸 것은 없는 것이다.

바울의 증언처럼 그리고 결의처럼 항상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면"[고전 9:27] 되는 것이지 여러 변명이 필요가 없다. "복종시킨다"고 단번에 말해 버린 것과, 복종시키기커녕 도리어 자기 자신 번번이 사로잡혀 버린다는 로마서 7장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모든 문제가 이같이 자기만을 위하여 사느냐 아니면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사느냐 하는 데에만 달렸다. 그리스도도 위하고 자기도 위하는 그런 일은 인간이 만든 세상 종교에 이론적으로는 있어도 하나님의 복음에는 없고 현실에도 없고 하나님 나라에도 없다.

앞에서 말한 대로 상식에도 어긋난다. 성경 말씀에는 명백히 위배된다. 성경은 각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말하고 이것을 믿는 것이 구원 얻는 믿음임을 말한다. 이에서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예정론(豫定論)을 두고 왈가왈부할 것도 없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벧후 1:10) 은혜만 받았지, 자기 위주로 자기를 위하여 여전히 살면서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믿을 수 있는 그런 은혜는 받지 않았다. 그런 은혜는 처음부터 주신 일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완전히 일치하지 않고서야 그 말씀을 누가 믿겠는가.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살면서 나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위에서 베드로가 한 말의 뜻이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있지 않다고 양심상으로 판단될 때는 언제든지 자신을 점검해보아 믿음에 있는가 확실히 해둘 일이다(고후 13:5). 자신을 위한 삶이고 그리스도를 위한 매일의 삶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어디서 그 처음 사랑을 버렸는지 맹렬히 반성하고 회개할 일이다(계 2:4,5).

아니면,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진단함이 옳다. 자신을 위한 삶을 영위하면서 백 번 자기의 택하심을 믿어보아야 헛일이다. 과거사를 두고 자기의 택함 받은 증명이라 생각함은 어리석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달린다"[빌 3:13]고 했다. 주님의 말씀에, 과거에 내가 무엇무엇을 하여 능력도 행하고 귀신도 쫓아내었다고 했지만 결국 멸망에 이른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마 7:22]. 처음부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서는 "믿는다"고 자신하여 의심치 아니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사실이 그럴진대 자기가 믿음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들도 다 자기는 믿음에 있다고 믿고 죽었는데도 주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니까 나 역시 그렇게 믿다가 심판 때 가서는 또 그렇게 될 것이 아닌가" 할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림 받은 자"[고후 13:5]라 하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를 시험하고 확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인지 아니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인지[5:15] 스스로 짚어보면 되는 일이다. 이는 각자 스스로 알 수 있다. 그래서 "내 말이 너희를 심판할 것이라"(요 12:48) 하셨다. "나를 믿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않는 것이라" 하신 것도 그런 예다. 모든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다.

그러나 성경을 읽되 앞에서 지적한 대로 '상식'을 따라 읽을 일이요, 사람이 어떻게 해석했느냐 그런 것에 의존하지 말 것이며, 오직 성령의 가르치심을 믿고 바라고 친히 그 가르쳐 주심을 사모하면서 마음 속에 기도하면서 읽을 일이다. 오늘날은 사람의 가르침과 사람의 생각이 성령의 가르치심과 하나님의 생각을 대신하여 판치고 있는 세상이 되어 있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즉 자기에게 수월한 대로 살지 않고 주님만을 위해 살기로 작정했다면 당연히 그 모든 말씀에 힘써 유의해야 함이 옳다.

우리가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명념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내용을 다 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항상 어떤 경우에서나 성령께서 내 마음에 말씀하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이 가장 최신(最新)으로 즉 최근에 읽은 말씀으로 기억해두는 노력이 내 편에서 필요한 것이다. 성경을 다 안다 해도 우리는 자기 마음이 쏠리는 쪽으로 편향되게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 수가 많다. 가령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할 때도 하나님의 사랑만을 묘사한 대목 중심으로 외고 있으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일을 까맣게 잊게 되어 우리 믿음에 큰 타격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런 위험 천만한 불균형은 항상 성경을 읽음으로써 바로잡을 수 있고 따라서 가장 최신형으로 말씀을 저장해둘 필요가 있고, 이렇게 성경을 읽어야 오늘 하루 그리고 현재의 환경과 여건에 따라 들려 주시는 꼭 필요한 성령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을 꺼내 그저 읽기만 하면 된다는 편한 생각을 버리고 직접 중요 요절집을 스스로 만들어 본다든지 성경 읽고 난 다음의 깨달은 점을 공책에 써둔다든지 하는 적극적 자세가 아쉽다.

안일하게 바람 불고 물결치는 대로 거기 따라 생활해도 무방하다는 말씀은 성경 그 어느 곳에도 없다. 오히려 좁은 길, 좁은 문을 말씀하시고 그리로 가기를 "힘쓰라" 하셨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했으니 얼마나 급박하고 절박한 상황인가. 우리의 처지가 바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일대 접전 상황이기 때문이다.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넘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전긍긍하는 것과는 다르니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빌 4:4] 한 데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기뻐함은 항상 넘치는 여유를 말한다. 이 '여유'는 '방심'(放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성령과 우리와의 사랑 관계를 상징하고 있는 성경의 아가서에 그 사랑하는 사람을 부지런히 찾아 헤매는 장면이 나온다. 주님께서는 항상 함께 계시지마는 나의 의식상(意識上) 내가 주님 곁을 떠나 있을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다. 고로 하루에도 여러 수십 번, 아닌 수백 번도 좋으니 주님을 찾고 꼭 곁에 모셔서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과 같은, 사랑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자세가 자연스럽게 언제나 우리 각자에게서 우러나야 하고 자리잡도록 우리 스스로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를 숨기시는 하나님"[사 45:15]이시라고 성경은 아주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 부지런히 찾는 자만이 찾아 만나게 되어 있다. 이는 찾으라, 구하라, 두드리라 하시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라 약속하신 말씀과도 일치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찾지 않고 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찾은 일이 없고 사람들의 말에만 의존하여 거기에 의존하는 타율적인 인간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에서는 이런 타율적인 것을 배척한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인 의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항상 기뻐하라, 모든 일에 우선 무조건 감사부터 하라, 이것이 마땅하다. 선을 악으로 이기라, 성령을 근심케 해드리지 말라,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라(시 1:2)는 모든 경고들이 바로 이런 자세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부지런히 찾는 것과, 내가 받은 구원이 어떻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과는 다르다. 사랑은 누리면 되는 것이지 전전긍긍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사랑의 기쁨과 평안은 누리는 것이지 그것을 애써 보존하려는 몸부림은 결코 아닌 것이다. 든든하고 넉넉하고 그득하고 여유 만만한 느긋함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의 평안함과 기쁨과 의로운 행실이 우리의 특징이다[롬 14:17]. 사랑은 설명하는 말에 있다기보다 느낌인 것이다. 이 '느낌'에 선행(先行)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반드시 나의 의지(意志)와 맞물려 작용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믿음 역시 감정만이 아니라 감정과 더불어 의지이다. 고기잡이의 명수인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질을 해도 허탕을 쳤는데 그렇게 마르고 닳을 지경이 되도록 지난밤 그물질했던 바로 그 자리에 주님은 그물을 던지라 하신 것이다. 고기가 잡히리라는 느낌은 전혀 오지 않으나 그러나 "말씀하시니 그렇게 하겠다" 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 믿음이다. 느낌이고 뭣이고 아무 것도 없지마는 말씀하시니 그런 줄 안다, 이것이 믿음이다.

베드로처럼 행동을 하니 고기가 그물이 찢겨 나갈 듯이 잡혔던 것처럼 그 믿음 따라 느낌도 희열도 사랑도 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일방적이지 않고 쌍방간의 양방향 교류이다. 주님의 사랑이 나의 사랑을 일깨우고 나의 사랑이 다시 주님의 사랑에 활기를 주고 이렇게 오가는 교제이다.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요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터이요 내가 또한 그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라"(요 14:21) 하신 뜻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어디 있느냐, 주님 안에 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 안에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내 안에 계신다. 내 안에 계셔서 나를 통해 그의 일을 하신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신다" 하신 바로 그 이치 그대로다(요 14:10). "아버지께서 내 안에 게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그리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하실 때는 "내가 하나님이다" 하시는 말씀이신 것이다. 때문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의 모습이셨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이치에서 보이시는 사람의 모습, 그리스도의 그 모습은 아버지의 '보이시는 모습'이신 것이다. 그래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어도 아버지를 보여 달라 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묘 14:9) 하셨다. 또한 "지금은 그들이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다"(15:24)고도 하셨다. 같은 이치로,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음은, 이와 같이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각기 다른 모습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통해 아직도 남은 고난을 마저 채우시며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의 각기 다른 지체, 각 부분의 모습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더 무엇을 말할 것인가. 이를 믿지 못하면 대관절 무엇을 믿는다고 말할 것인가. 사람 구원해내고 사람 사랑하는 일 곧 주님께서 하시던 일 이외의 다른 그 어떤 일이 대관절 우리의 진정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서 일하시던 주님께서 나를 통해 다시 모습을 나타내셔서 일하시는데 그 때 하시던 일의 연속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제자가 그 스승 같으면 족하여 더 나을 수 없고 나를 핍박하였으니 너희도 핍박하고 내 말을 들었으니 너희 말도 들을 것이라"[요 15:20] 하신 것이다. 마음 놓고 일하고 충성을 다하여 한 방울 남은 기력(氣力)까지 다 짜내어 주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 남아 있는 유일한 이유가 아닌가.

이 외에 달리 딴 방향으로 나간다면 그것이 아무리 사람 보기에 그럴 듯하게 보여도 믿음 없는 세상에 속한 일인 것이다. "믿음 없다"는 것은 심판 아래 여전히 놓여 있다는 뜻이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단죄되었으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한 연고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롬 14:23]라 함과 같다. 그래도 아직 세상에다 미련을 두고 세상 불신자들처럼 세상 일로써 여생을 감히 허송할 것인가.

많은 사람이 여전히 그런 길을 간다고 무작정 그들을 따라 할 것인가. 분명히 단언하거니와 영생 길을 알아 좁은 문 앞까지는 찾아왔지만 결코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하셨다[눅 13:24]. 그래서 "들어가기 위해 힘쓰라"[:24] 하셨으니 구원 받았다고 태평세월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기"[빌 2:12] 위해 힘쓰는 것이 우리 구원 받은 증거이다. 

이 경고를 하면서 바울 사도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고 있다. 형제들이여,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빌 3:12-14] 하였다. 바로 그와 같다.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나를 붙잡아 주심으로써 필요한 능력을 베푸시는 이께서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러므로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제 구원 받아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내 스스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는 일로서[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나를 위하고 계시니]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데 있는 고로[요 4:34], 나 자신의 구원이 목적일 수 없다. 내 스스로 나의 일처럼 내가 주인인 것처럼 하나님의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니 '아버지의 사업을 이루는' 것을 가리켜 '나의 구원을 이룸'이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부르심의 상"이라는 것은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경주(競走)에다 비추어 전제를 했으니 당연히 그 결론은 의당히 "상(賞)"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상이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가 할 때 "부활에 이르려 한다"[빌 3:11]고 밝혔으니 "부활에 이르는 것"을 말함이다. 이는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룬다"[2:12]는 말과 같은 것이다. 장차 나를 부활시키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롬 8:11/고후 4:14] 어찌 내가 부활에 이른다고 하는 것인가.

이는 "내가 이미 구원 받았는데 또 무슨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가?' 하는 질문과 같다. 그리스도를 얻어 성령으로 모시고 있는데도 "그리스도를 얻고자 한다"[빌 3:8] 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도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발견되기를 목적한다"[:9] 했으니 이 모두 구원의 양면성을 말함이다. 구원은 피동적이 아님을 가리킴이다. 동시에, 능동적인 자세를 내게서 적극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가 구원을 받았지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믿게 된 것과 같은 이치다.

사랑의 동시성이다. 물론 그 첫 시작은 하나님께서 하셨다.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보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확증한 순간부터는 항상 동시성으로 움직이는 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킨다" 하셨고,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요 14:21] 약속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활하실 것이나 나는 또 나대로 하나님을 위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하나님을 위해 "부활에 이르려" 함이다. 이제 다시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나 자신을 위함이 없다. 무엇이든 일체 모든 것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체제 일변도다. 이를 구분하여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헷갈리면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된다. 하나님을 위해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이니 곧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 것이 바로 나의 구원을 이룸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주님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요 10:17-19] 하신 의미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내용이다.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셨으나[20:21] 나를 강제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그러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왔다"는 말씀이시다.

이미 우리는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위하시고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시는 위치에서 아버지께서도 아들께서도 결코 자기를 위하심이 없음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을 하라고 아들을 보내셨으나[4:34] 이는 동시에 아들을 위해서 아들의 일을 하려고 아버지께서 움직이심[아들을 보내심을 비롯해]이 된다. 그리고 아들께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기 때문에 세상에 오신 것이기는 하나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 일을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34] 스스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따라서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위해 스스로 세상에 오시어 죽으심으로써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에 또한 아버지를 위해 살아나셔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맞물림이 사랑의 법칙에 따르는 피차간의 움직임이다. 왜냐면 당신께서 살아나시는 것이 아버지를 위하심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아버지께서는 아버지 자신을 위하시고 아들께서도 아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하시는 경우라면,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뜻을 행하시고 자기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죽으신 그 아들을 살리시는 것은 당연하나 아들 스스로 다시 살아나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 아들을 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들을 위하여 살리시는 것이므로,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아들께서 친히 하시는 일이 된다는 그 뜻이다. 다시 말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한다면 갑이 하는 일은 을이 하는  일이 되고 을이 하는 일은 갑이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단지 갑과 을 각자가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서로 상대를 위하기 때문에 갑의 일을 갑 스스로 하지 않고 을이 대행하며 을의 일을 을 스스로 하지 않고 갑이 대행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리신 것은 사실이고 아들 스스로 살아나신 것은 아니나, 아버지께서 아들을 위하여 하신 일이 말하자면 아들 친히 하시는 일이 되는 이 이치는 위의 갑과 을의 비유에서 충분히 설명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위해 아들을 살리시는 것이 아들 친히 아버지를 위해 다시 살아나시는 의미가 되기에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계명을 아버지에게서 받았다" 하심은, 이렇게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됨으로써 갑도 을도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영원한 법질서를 아들께서 준수하기를 아버지께서 명령하심을 의미하심이다.

물론 이렇게 되면 아버지 친히 솔선 수범으로 먼저 그렇게 하심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으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한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어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셨다"[요 5:19,20] 하셨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하나된 위치에서 마찬가지 이치대로 따름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이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나[6:39] 우리는 그냥 우리를 살리신다고 그냥 살리심을 받는 것으로 수동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 스스로 다시 살아난다는 그런 의미이다. 스스로 그렇게 살아나는 결과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스스로 우리가 기쁨으로 그 "죽으심을 본받는"[빌 3:10]다는 것이 선행(先行)되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의미는 다시 "천국은 스스로 침입하여 빼앗는 자가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라"[마 11:12/눅 16:16] 하심과 같다. 다시 말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해 그렇게 침입하여 강탈하듯이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체의 모든 일을 하는 것이니 지푸라기만한 것이라도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 없고 일체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골 3:17/고전 10:31/벧전 4:10,11][요 14:10/5:19]. 이것이 영원한 삶의 비결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구원은, 지금까지의 우리 자신을 위해 살던 삶[이는 실질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영원한 법질서를 어기는 것으로서 죽음인 것이다]을, 다시 출생함으로써 원래의 법질서를 따라 사는 삶[이것이 영생이다]으로 복구, 복귀시킴인 것이다. 무릇 하나님의 피조물된 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고후 5:15] 생명이니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 피조물 각자를 위해 모든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죄와 악은 자기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 받은 증거는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도 죽지도 않고 오직 살아도 죽어도 주님을 위함에 있다[롬 14:7-9]. 이를 명확히 구별하여 인식할 일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왜 우리가 은혜로 주시는 구원을 피동적으로 단순히 받아 챙겨 단지 누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고 반드시 "선을 행해야"[롬 2:7,10/요 5:29] 하는 것을 강조하는지 그 이유가 여기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사랑의 주인 의식이다.

이를 한 편으로 곰곰이 생각하면 신바람 나는 일인 것이니 왜냐면 인간[아담]을 "만물을 다스리는 자"[창 1:26]로 애초 창조하신 대로,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만물의 주인으로서 당연히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가 본질이어야 함이다. 이는 만물의 상속자 즉 주인으로서의 마땅한 마음 가짐이다. 말 그대로의 하나님 아들로서의 위치요 신분이다. 과거 인간[아담]이 만물을 다스리는 자로 있었으나 범죄로써 일개 영물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종 노릇하게 됨으로써 그러한 위치가 완전히 망가졌는데,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로서 상속자가 되어 있는 마당이므로 그 원 위치로 완전히 복귀한 것이다.

주인 의식의 특징은 항상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에 있다. 사랑 자체가 항상 이런 주인 의식을 요구하고, 공동체 의식에서 이런 주인 의식이 강조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러므로 생명에 들어가는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가기를 힘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이니 그렇게 오해하기 때문에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여 자멸(自滅)에 이르는[벧후 3:16]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하고 내 이웃을 위하는 데에는 우리가 얼마든지 힘쓰고 애써야 하는[벧후 1:10] 당위성을 강조하게 된다.

이런 것이 없으면 자기중심이 되어 게으르고 욕심만 부리는 망나니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자기 자신을 위한다는 측면에서는, 구원을 얻으려고 힘쓰고 애씀도 아니고 구원 얻는 것을 유지할 목적으로 힘쓰고 애씀도 아니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힘쓰고 애씀도 아니니, 말 그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히 12:28/고전 7:32,33/고후 5:10,11/롬 12:2] 위해 힘쓰고 애씀이다. 그렇게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힘쓰고 애쓴 결과가 "구원을 이룸", "몸의 구속 그리고 양자됨"[롬 8:23] 또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마 7:21] 등으로 나타난다는 것뿐이다.

그 좋은 예라 할까 설명을 아담의 범죄에서 엿볼 수 있다. 즉 우리가 이와 같이 구원을 이루는 것도 "구원을 이룬다"는 것 자체를 의식하는 것과 그런 것 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을 의식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이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들은 후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과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니 그 말씀을 어찌하든지 어기지 아니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림'을 목적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만일 후자를 아담 부부가 택했더라면 결코 범죄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는 말에 솔깃해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따르게 되고 죽음에 이른 것이다. 바로 이 차이다. 간발의 차이인 듯 보이나 실은 하늘과 땅의 차이다. 따라서 우리 역시 구원을 이룬다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기필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밥[벧전 5:8]이 되지 않을 수 없음은 그런 아담의 역사적 선례(先例)가 입증하고 있는 바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다. 나 자신을 사랑함이냐,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상대를 사랑함이냐 하는 그 차이로서 유동적(流動的)인 마음 하나의 작용이니까 그렇게 별 차이가 없는 듯 보여도 실은 죽음과 생명을 가름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부터 이미 우리는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아나시어 앞으로 영원히 모든 것을 나를 위해서 하실]를 위해 사는 것으로 영원히 방향이 확정되어 있으므로 내 스스로의 고의적 변경이 아닌 이상 변경이 없다. "두렵고 떨라"[빌 2:12]는 것은 바로 이 고의적인 변경[히 10:26]을 말함이다.

내가 이 생명 문으로 들어가려 하나 아직은 미흡하다 하고 스스로 인지하는 경우에는 그래도 희망이 있다. 왜냐면 들어가기 위해 자기를 더 철저히 반성하며 모든 방법을 강구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위급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 위험을 죽을 날까지도 깨닫지를 못하는 것인데 이것이 두려운 일이다. 죽은 다음에야 뒤늦게 알아차린들 무슨 소용인가. 이런 위험을 직시하면서 주님의 일에 남은 전 여생을 바치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만이 모여 <교회>를 이루는 것이요 주님 안에서의 한 식구(막 10:30/마 12:50)가 되는 것이다.

이런 "믿는" 사람들이 모여 "집 교회 운동[CITHM]"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죽지 않는 이들일진대[롬 14:7-9] 견해 차이가 있어도 한 믿음의 형제임에는 틀림없으니 서로 나누어질 이유도 없다. 서로 분리되어 쪼개지는 현상은 이런 기본 토대 즉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고후 5:15]는 원리원칙대로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견해 차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여기에 쐐기를 박아 분리시키려 하고 당파를 만들게 하려 하나 바울의 지침[롬 14:7-9]을 따르면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영생을 얻자니 가당찮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가" 할 필요도 없다. 그것이 무슨 "대가"라고 감히 이름을 붙일 수 있더란 말인가. 죽음의 세상에 잠시 안개처럼 나타난 죽음의 삶이 아까워 그렇게도 그것이 소중하여 "대가"라고 말하려는가. 요컨대 처음부터 끝까지 믿고 안믿고의 문제다. 오직 그 문제이니, 다른 데서 엉뚱하게 이유를 찾으려 들지 말 것이다. 가장 간단하게, "믿느냐, 아니 믿느냐", "사랑하느냐, 않느냐", 오직 이 양자택일에 있을 뿐이다.

구름 떼처럼 주님을 따르던 무리들을 보시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리고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하셨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낙심천만이었겠는가. 영생을 얻자는 것이 그다지도 어렵고 벅찬가 했겠지만, 믿음은 사랑이다. 사랑은 생명 그 자체의 원동력이므로 힘, 능력 그 자체이다. 물이든 불이든 가리지 않는다. 이 사랑은 구원의 복음을 들음으로 그래서 믿음으로 우러나는 것이다.

"자기 부인"은 앞에서의 설명대로 자기 자신을 억지로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루어 있는 공동체 조직에서 머리를 위하고 이웃 지체들을 위함이니, 나 혼자만의 생명이 아니라 내 이웃 숫자만큼이나 확대된 다양성이 풍부한 삶을 누리는 최고도의 지혜인 것이다. 이런 지혜를 한 때 좀 어려움이 있다고 자기 발로 차버림으로써 영원한 고통과 고난에 이른다면 만고에 없는 어리석음일 것이니 그런 사람들이 나중 결국 일이 다 끝난 다음에 후회하며 슬피 울고 이를 갈아도 가히 누가 동정이라도 하겠는가. 때 늦기 전에 깊이 생각할 유일한 주제이다.

구원은 언제나 "믿음"으로 "은혜"로 "값없이" 얻는 것이다. 단지 이 "믿음", "은혜", "값없이 얻는다"라는 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오해하고 억지 해석을 하기 때문에, 성경대로 하자니 그렇게 힘들고 어렵고 벅차고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뿐이다. "믿는" 자에게는 그렇게도 쉽고 간단하고 그렇게도 은혜롭고 뛸 듯이 기쁘니 이는 불을 보듯 명백한 것이다. 구원 받는 일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티끌만큼도 없다.

왜냐면 새 창조 즉 창조에 속하므로 하나님의 단독적인 행위이신지라 우리의 힘이나 능력이나 자질이나 자격은 일절 묻지도 요구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그저 "보라!"는 것이다. 보는 데에 힘들 것 전혀 없다. 보아도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바로 보아야지 세상에서 말하는 대로 또는 사람들이 교리로 가르치고 있는 것을 따라 색안경을 끼고 보면 바로 볼 수 없고 그렇게 보아야 백날 보아도 허공만 치는 격이요 허투로 보는 것이다.

어린 아이처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의 논리는 순수 그대로다. 편견도 선입견도 일절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마디로 잘라서 경고하신 것이다. 사랑이 있고 없음에 따른 차이가, 어린 아이처럼 되는 것과 그렇지 못함과의 차이로 나타난다. 어린 아이 같은 이들의 눈에 곧장 곧잘 비치는 것은 사랑이다.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죽어 주셨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가슴에 사랑이 피어오를 것은 정한 이치다. 이 사랑만 만일 그대로 이 세상 하직하기까지 지켜진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여기서 설명하는 지식 같은 것이야 있으나 마나이다. 이런 지식은 그런 사랑으로 유도하기 위한 길잡이일 뿐이다. 지식이 사랑은 아닌 것이다[고전 8:1-3]. 이 사랑이 나를 주관하고 있으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든 믿고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35세 때 처음 믿은 후 60여년을 거쳐 100세 문턱에 오셨지만 "예수님 날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것 생각하면 눈물만 흐르지..." 하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 젖은 감사, 오직 "아멘"밖에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치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음이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골 3:1-4) 등의 황금 같은 보배스러운 말씀들이 성경에 차고 넘친다.

줄줄 외울 수 있도록 읽고 또 읽고 노트에 적어 항상 즐겁게 들여다 볼 일이다. 셰익스피어의 명시(名詩)만 자랑스럽게 외운다고 하면서도 그보다 몇 천, 몇 만 배나 보배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 더군다나 나 개인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을 외면하니 그런 마음에 "어린 아이 같은" 것이 끼어 들 여백, 공간은 없다.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한다"는 것은 주님의 일에 전념함을 뜻하고 땅의 것을 생각함은 세상에 미련을 두고 연연함을 의미한다. 세상 사랑이다.

이런 구절은 새벽이나 이른 아침 기도로 새 날을 열 때마다 암송하기에 알맞은 말씀 중 하나다. "제가 주님과 함께 다시 살리심 받았으니 위의 것을 찾습니다. 거기는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치 않습니다. 이는 제가 죽었고 저의 생명이 주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생명이신 주님께서 나타나실 그 때 저도 주님과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줄 믿습니다....".

자기가 읽는 모든 성경을 이같이 제일인칭으로 바꾸어 읽을 일이다. 이런 모든 노력이 사랑의 열매들이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고전 7:34]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삶의 낙이다. 무한한 힘이 용솟음치는, 다함이 없는, 마를 날이 없는 생명수 샘이다. 믿을까 말까 믿어도 될까 어쩔까 어정쩡하게 주저주저하며 머뭇거리며 읽는 자세를 지양하고, 화끈하게 "믿어 버리는" 일도양단(一刀兩斷)의 자세로써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에 뛰어드는 자가 항상 물 가를 맴돌며 뛰어들 생각을 아니한다면 아마 평생 가도 수영을 못하거나 아니면 귀한 시간만 낭비함이 되니 얼마나 큰 폐해인가. 이 말씀과 더불어 아래 간증을 항상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온 세계 그리스도인이 즐겨 말할 간증이 있으니 이미 소개한 대로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말해도 좋을 그런 귀중한 증언이다. 헛슨 테일러의 중국내지 선교회 보고에 따라 알려진 것으로 석자직(席子直: Pastor Hsi[Xi])목사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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