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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5) 집에 있는 교회 등록일 2016.02.27 21:26
글쓴이 김일동 조회 351

 

여기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성령을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실상이 영적 존재인 귀신에게 어떻게 비쳐지는지 그리고 성령께서 근심하시면 어떤 결과가 되는지를 귀신의 뜻밖의 그 증언으로 알게 된 것이 그 하나요, 성령을 모신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자세 즉 "쉬지 않고 기도하는"[살전 5:17] 것을 얼마나 주님이 기뻐하시는지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됨이 그 둘째요, 귀신들을 능히 굴복시킬 만한 이런 성령 충만이 바로 이같은 기도의 삶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니 이것이 그 셋째다. 즉 여호수아의 경우에서도 나타내신 대로[수 9:14/대상 10:14] 사사건건 모든 일에 일일이 하나님의 뜻을 묻고 주님을 인지(認知)하는[잠 3:6] 데에 우리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거듭 확증할 수 있게 되는 은혜다.

§  사람의 자식이 되는 것은 어버이의 육체 즉 그 부모의 육체와 같은 육체를 물려받음으로써 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됨도 같은 이치를 따른다. 우리가 알 수 있는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진리를 가르치시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으로는 그 무엇이든 말씀하시지 않는다. 부모의 육체를 받아 사람의 자식이 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 영[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육체는 육체일 뿐 영은 없다.

부모의 영을 물려받지는 않는 것이다. 부모의 영도 물려받는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부모이지 자식은 아닌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은 모든 영의 아버지"[히 12:9/사 57;16/슥 12:1]라고 했듯이 우리의 영은 하나님 친히 만드심이다. 육체와는 별개다. 인간이 신의 영역에까지 침범했다고 교만하게 법석을 대지만 인간복제라는 것은 육체에 그칠 따름이지 영은 예외다. 다시 말해 영이 없는 육체만의 인간 그런 고기덩이만 복제해낼 수 있는 것이다.

아담이 처음 육체로만 창조되었던 당시 즉 인간이 영혼 없는 육체일 때 개나 고양이 같은 지능 정도라도 있었을까. 왜냐면 인간의 맨숭맨숭한 피부[털북숭이가 아닌]를 볼 때 처음부터 인간을 신령한 몸으로 만드실 계산으로 그런 피부의 아담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는 영혼의 형체, 형상인 까닭에 그런 것[복제 행위]마저도 하나님께서 허용하실지 아니면 세상 끝이 더 빨리 다가올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하나님의 영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인데 이 영은 말할 것도 없이 성령으로서 하나님이시다(하나님은 영이시니까). 다시 말해 하나님 친히 내 안에 오셔서[요이 1:9] 나와 영원히 함께 계시니(사시니)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리스도 친히 그 성령으로 즉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으로 내 안에 임하심을 가리킴이다. 만유에 충만하신 존재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만유(萬有-무릇 존재하는 것) 안에(in) 계시고 만유를 관통해(through) 계시고 만유 위에(above) 계신다. 그러나 자유 의지가 완전히 보장되어 있는 마음에만은 계시지 않은 것이니, 창조시에 일단 베푸신 자유를 간섭하실 수는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마음 문을 두드리실 뿐 친히 들어오시지는 않는다. 내 쪽에서 문을 열어 드려야 들어오시는 유일한 영역이다[계 3:20].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피조물이라 함은 이 새 피조물의 구조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첫 사람 아담의 구조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이전의 그런 구조 즉 '나 혼자만의 구조'였다. 그러나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나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 즉 성령과 나라는 이중 구조이다. "둘이 하나되고,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삶의 진실은 우리의 일상 삶에서도 증명되는 내용이다. 즉 "당신은 무슨 낙으로 사느냐?" 물을 때 한결같은 우리의 대답은 사랑하는 자기 처자식을 위해 또는 부모님을 위해 등등 대답을 하게 된다.

하나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고 할 사람은 없다. 왜냐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 자신부터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독한가. 그래서 그 누구도 자기의 외로운 처지를 들어내려 하지 않는 법이다. 관계와 관계 속의 삶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에도 홀로 나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인식하게 되는 것이 나 외의 모든 사람들이다. 부모, 형제 등 결코 나 자신만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첫 사람 아담부터 그러했으니 더 할 말이 무엇인가. 아담이 창조된 후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먼저 인식한 것이 하나님이 아니셨던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전체 우리 모두를 위해 살아야만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기는 알지만[이것이 공동체 의식이다] 문제는 그럴 능력이 없어 그렇게 실천을 못한 것인데,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얼마든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 우리가 온 세상에 전파하게 되는 희소식[복된 좋은 소식]인 것이다.

이같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처음부터 지으신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 하셨다. 이는 반드시 남녀를 지으시고자 하심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혼자 있으면 자기 자신을 위하게 마련이다. 이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은 생명과 삶[일상생활]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짝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직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해' 이같이 서로 사랑하는 상대를 이룬 둘이 자기의 사랑하는 상대를 위하여 사는 이것이 진정 사람 사는 삶의 도리이자 낙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화요초 만발한 화려한 무릉도원의 낙원이라도 그 곳에 혼자라면 과연 제대로 낙을 누리며 살 수 있겠는가. 반드시 누군가 곁에 있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무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진정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이라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서로 미워한다면 혼자 있음만 못하다. 그래서 개인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사람들은 절해고도에 갇힌 고독감을 자주 호소한다. 사랑 없는 무원고립 혼자서의 삶에 대한 피 맺힌 호소다. 혼자로는 살 수 없고, 여럿이 또는 단 둘이라도 같이 살되, 반드시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있으면 단 둘이 있어도 족하다. 혼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것이다.

§  아브라함의 믿음은 우리가 배워 마땅한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본이다. '하나님을 믿는 법'이라 할 수 있으니 혹은 '순종하는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순종하느냐 그 구체적인 본보기가 된다. 독자 이삭을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상으로 아무 불평 없이 올라간 바로 그 자세를 말함이다[창 22:10].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아브라함 자신을 위하시지 않음이 없음을 아브라함은 확고하게 믿은 것이다.

따라서 장차 어떻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를 위해 어떻게 이루시겠다는 약속이 거의 전부인데, 이 약속의 말씀을 믿되,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고 그리고 식언(食言)하시지 않는 분으로서 한번 정하신 뜻은 이랬다 저랬다 하시거나 절대로 바꾸시지 않는다고[히 6:17,18] 믿어 의심치 않은 것이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의 마음은 바로 어버이의 마음으로서 사람이나 짐승이 그 새끼나 자식을 위하는 마음을 만드신 분이시므로 그런 피조물들이 행하는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이런 사랑의 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한번 정하신 것은 바로 법질서이고 원리 원칙이 되는데, 이랬다 저랬다 하여 그 뜻을 바꾸시게 되면 우주를 움직이는 자연법칙과 같은 그런 만유 존립의 뼈대가 확립되어 있지를 못한다. 그러나 자연법칙이 오늘날까지 여전히 확고히 세워져 그대로 한 치 오차 없이 움직이는 것을 볼 때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를 읽을 수 있고 또한 그 증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거짓말이라는 것은 원래가 악(惡, 좋지 않은 것)으로서, 처음에는 악이 없었고 선(善, 좋은 것)만이 있었고 선만을 창조하신 것이었기 때문에 그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좋았던"["very good"-창 1:31] 것인데, 오직 지능적이고 이성적인 영적 존재로서의 피조물들[인간 역시 포함된다]에게 자율성[자유 의지]과 독립성을 주심으로 인하여 비로소 '악'이 생기고 '선'과 대칭각(對稱角)을 이룬 것이다. 피조물에게서 나온 것이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은 아닌 것이다.

모든 것 곧 무릇 존재하는 것의 최초 원인이 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거짓말을 하실 필요도 없거니와 하실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자기 생각대로 해석하고 자기 멋대로 판단하지 않았다. 이로 보아서도 아브라함은 이지적인 사람답게 처신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이 하나님이 없다 하는 무신론자들을 "바보, 멍청이"[The fool has said in his heart, "There is no God."-시 14:1]라 한 것과 같다.

하나님의 실존을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는 아무리 이성적이고 지성적이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 과대망상이지 실질적으로 그렇지 않으니, 성경은 이를 가리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해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었다"[롬 1:21,22] 한 것이다. 가장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것을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판단하여 영원한 멸망에 이르기 되니 그보다 더한 어리석음과 미련함이 없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여타 모든 사람보다 더 이지적이라는 뜻은 아니니,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그런 정도의 이지적인 존재로 즉 하나님을 능히 알 수 있도록 형평에 어긋나지 않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이지를 제대로 활용한 것뿐이다. 이에 반하여 믿음 없는 이들은 각자 자신의 '분수에도 없는 교만'으로 인하여 어리석은 생각을 스스로 하게 됨으로써 이 세상 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빌미거리를 주어 마음 눈이 어둡게 되어[고후 4:4] 빚어지는 인간 비극인 것이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당연히 볼 수 없는 것이니, 이런 것을 믿음이라 할 수조차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오직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이상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보듯이 '신뢰'를 말함이다. "누구든지 그[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요 3:16] 하신 것이 바로 이를 말함이다. 즉 아브라함과 같은 절대적인 '신뢰'이다. 다시 말해 절대적인 순종[사랑에서 우러나는], 우리를 구원하신 뜻[목적-롬 14:7-9/고후 5:15]에 대한 복종이 핵심인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리 내게 당장 불이익으로 비쳐지고[아브라함이 자기 생명과 같은 독자를 바치는 한이 나는 것과 같이] 고난의 죽음 일색으로 나타나더라도, 그것이 모두 나 자신의 유익[善]을 위한 것이라는[롬 8:27] 믿음은 흔들릴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함이다[살전 5:16,18]. 악[사람의 악행]을 선[그 악행에도 불구하고 그를 선대(善待)하는]으로 이기는 것이다[:15]. 모름지기 아브라함의 믿음을 배우고 따를 일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 모두의 "믿음의 조상"이라 하는 것이다.

즉 이웃에게 악을 끼치지 않는다는 단순한 그것만이 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닌 것 전부가 죄다. 이런 자기중심의 마음 자세는 설혹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필연적으로 이웃에게 장차 해를 끼치게 되어 있다. 순종하지 않는 것이 죄다. 죄 짓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모든 일에 머리되시는 주님께 대한 순종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머리시니까[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 머리의 지시를 따라야 한 몸 체제가 유지되는 것이니 이 '한 몸 체제'로 되어 있는 것이 생명[영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고 자유자적한 느긋함 가운데에서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악을 행하지만 않으면 영생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집단들을 많이 만들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인류를 속이고 있으나 이것은 거짓말이 된다. 이런 세상 종교가 거짓이라는 사실은 이미 설명한 대로 두 가지로 지적할 수 있다. ① 생명 체제는 머리와 몸으로 구성된 둘이 하나되는 사랑의 체제이기 때문에 이를 벗어나서는 그 어떤 생명도 존재 불가능이다. 다시 말해 자기중심을 척결하지 않고는 공멸(共滅)뿐이다.

②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는 사람이 영생하지 못한다. 자연법칙으로는 육체가 생존할 수 있는 기한이 우리가 아는 대로의 수명으로 한정되어 있다. 영생은 단지 희망 사항일 뿐이다. 자연계와 대립[대칭, 상칭]되는 초 자연계에서, 자엽법칙을 초월하는 초 자연법칙의 지배 아래 있어야 비로소 영생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현재 자연계에 속해 있어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영생과 같은 딴 생각을 할 여지가 없다.

악(惡) 또는 죄(罪)는 자기 중심, 자기 본위, 자기 위주에서 나온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데에서 온다[고후 5:15]. 다시 말해 욕심에서 온다[약 1:15]. 그러므로 욕심을 내지 않아야 하고 그리 하자면 자기를 위해 살지 않아야 한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충분히 위해지는 방법은 모든 사람이 머리를 중심으로 하는 몸과 머리 관계를 이루어 몸은 모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함으로써 몸도 머리도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면 된다.

우리는 이 '머리' 역할이 반드시 조물주[중생을 창조한]로 한정될 수밖에 없는 그 필연성을 밝혔다. 사물을 주재하는 상주불멸(常住不滅)의 실체가 있다고 믿는 집착을 "아집(我執)"이라 하면서 이를 버려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불교는 최초 원인으로서의 조물주를 인정하지 않으니 만날 가야 제자리 걸음일 뿐 일보도 전진하지 못한다. 천주교나 개신교가 하나님을 시인한다고 해도 '머리로서의 하나님'의 의미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점에서는 공통이다.

그래서 불교는 머리와 몸의 관계를 말하지 못한다. 머리를 인정하지 않는 모든 것이 악과 죄의 뿌리다. 왜냐면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만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게 되고 욕심이 생겨날 틈이 없기 때문이다. 천주교나 개신교도 하나님을 머리로서 인정한다면 몸은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함으로써 절대로 그 어느 편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불을 보듯 뻔한데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있으니 이는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머리의 지시를 받지 않으면 자기 홀로 자기를 위해 살 수밖에 없는 자기중심이 되므로, 이웃이 있음으로써 그런 '중심'이 되어 있는 자기에게 도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것을 그냥 두지 못하게 된다. 자기에게 대한 위협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시기, 질투, 증오의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설혹 영생한다 해도 이 몸과 머리 관계를 구성해 있지 않으면 그 영생이 아무 의미가 없다. 서로 으르렁거리는 꼴이 보기 싫어서라도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어 버릴 것이므로 그렇다.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 먼저 반드시 조물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을 인정해도 성경에서 밝히는 대로의 하나님이라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설명하는 대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신 사실을 믿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이 하나님 계시는 모습[아버지와 아들 둘이서 하나로 계시는]에서 확립된 삼위일체의 원리를 따라 자연계와 대칭되는 세계[영계]가 존재함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실현 불가능한 영생에 대한 단 꿈은 조용히 접고 단념하는 것이 이성적(理性的이요, 오직 그리스도께 나아옴으로써만 그 꿈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하나님 계심을 믿을 일이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을 인정할 일이요 성경의 유일한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에 주목할 일이다. 왜냐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함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하면, 사람이 영생하지 못하는 원인으로서의 악 또는 죄는, 생명의 체제가 한 몸 구조로 되어 있고 이 한 몸의 체제에서는 마땅히 머리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데 머리를 인정하지 않거나 그 지시를 무시하는 데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웃에게 단지 악을 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또는 일종의 선을 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영생의 조건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머리와 몸의 '한 몸' 체제에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절대 불가결한 것이며 선익선(善益善)일 뿐이다. 그런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해서 해(害)가 되고 손(損)이 될 일은 단 하나도 없다. 오히려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면 만들어서라도 가상적(假想的)으로라도 머리로서의 위치를 정해놓아야 할 판이다. 이미 밝힌 대로 이런 한 몸 체제에서 머리와 몸이 관계가 되어야만 자기중심이 완전히 척결될 수 있으니 머리도 몸도 몸의 각 지체도 어느 누구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너는 나를 위해 살고 나는 너를 위해 사는' 세계에서는 오직 선(善)과 의(義)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좋고[선] 옳기[의] 때문이다. 바로 그렇게 사는 것을 가리켜 선을 행한다 하고 의를 행함이라 하는 것이다[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선과 의는 여기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몸과 머리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그 어떤 선도 의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몸과 머리로서의 한 몸 구조에서의 삶을 가르치지 않는 곳에서는 모든 선이 위선(僞善)일 수밖에 없다.

위선인데 그것이 옳은 것(義)일 수가 없다. 올바른 것이 아니므로 모두가 불의(不義)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좋은 것]이니 의[올바른 것]라느니 한다면 허공에 뜬 말일 뿐이니 자기 기만[기망]밖에 더 되지 않는다. 가장 불행한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왜냐면 머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무조건 자기중심으로 밖에는 흐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를 중심하는 이기주의, 개인주의, 사사로운 욕심이 낳는 폐해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신물이 나도록 넌더리가 나도록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계에 속한 우리의 육체를 하나님이 신령한 몸이 되게 한다고 영생하는 육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원리원칙대로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인간을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만드셨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영생하는 육체로 만드셨으나 인간이 스스로를 망쳐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현재 되어 있든 간에 한번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정착되어 버린 이상 이를 변경하면 원리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끝나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달리 그 어떤 다른 것으로 변할 수는 없다. 변한다면 무질서가 된다. 무질서 속에서는 그 어떤 원리원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다는 것은 원리원칙 안에서 가능하게 만드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지 원리원칙을 어기면서 마음대로 하시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그 자체가 무질서다. 무질서 속에서는 그 어떤 것도 존재가 불가능이다.

무릇 존재한다는 것은 시종일관성을 말하기 때문이다. 사람이었다가 갑자기 개가 되고 소가 되고 물고기가 되었다가 또는 다시 사람으로 변한다면 사람으로도 소로도 개로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예 그 무엇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함이다. 고로 무엇이 존재할 때에는 엄정, 엄격한 질서를 의미한다. 따라서 사람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하고 있는 한은 영생한다는 것은 오직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고 현실이 될 수 없다.

이런 지극히 상식적인 것도 말하지 못하는 세상 종교이니 거기에 무슨 진리가 있으리요. 그래서 사람이 영생하게 되려면 하나님의 새 창조가 필수 필연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바로 이 새 창조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앞서의 설명대로 죽을 것은 죽고 그리고 다시 출생하는 것으로써 출생하되 자연계에 속하지 않는 초 자연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는 초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사람으로 다시 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다. 영생하는 자로서 새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 영생하는 존재로 새로이 만들어졌으면 그대로 영생하면 되는 것이지 또 무슨 과정이 별도로 남아 있어 "영생에 들어간다"는 묘한 말을 쓰는가. 묘한 말이 아니라 마땅히 할 말을 하는 것이니, 사람이 영생한다고 그냥 그것이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되 올바르게 살아야 선하게 살아야 자기중심이 되지 않을 것이 아닌가.

내가 자기중심이 되면 남의 그 영생을 망가지게 할 수 있음이다. 남이 생명만 아니라 나 자신의 생명을 망치게 된다. 그래서 아담이 죽었고 그 여파로 모든 인생은 태어나자 곧 죽게 되어 있는 오늘의 현실이다[롬 5:12]. 죽음의 결과가 있으니 반드시 그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이 있는 법이다. 그 원인이 다름아닌 자기중심 즉 머리이신 하나님이 계셔도 머리로서의 지시를 따르지 않음이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한 욕심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현재 새로 창조하심을 받아 첫 사람 아담처럼 영생하는 몸이 되어 있어도 올바로 살지 않으면 다시 말해 아담처럼 자기중심으로 나가면 남도 죽이고 나도 망칠 것이므로 영생은 있으나 마나이다. 구원은 받으나 마나이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써 그 생사가 갈라진 것처럼 우리 새로 창조된 이들도 그런 갈림길에서 양자 택일하게 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람[아담]을 시험해보려고 일부터 그런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신 것이 아니라 사람[아담]을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일 뿐인데 그래서 단지 그것을 먹지 말라는 경고를 주신 것뿐이나 아담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즉 머리[하나님]로서의 지시를 받고도 이를 듣지 않음으로 인하여 자초한 재앙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분명한 선례가 있으므로 혹여 아담처럼 그런 불상사가 있을까 하여 즉 그런 일이 되풀이될 수 있다고 충분히 예상하시어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이니 곧 우리가 마땅히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지 여부를 가름하시게 되는 것이다.

그런 시험대에 올려지는 일을 겸해서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을 부과하신 것이 다름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가 다시 출생한 것이므로] 아버지 일에 아들로서 당연히 동참하는 일이다. 아버지의 상속자이니까 만물의 주인으로서 얼마만큼 충실히 주인 의식으로 아버지의 일에 임하느냐 하는 것을 보시려 함은 당연하다. 아들로 만드셨으면 거기 상응하게 아들로서의 구실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만일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면 이는 몸이 머리를 거역하는 것과 같음이다.

그렇게 되면 아담이 거역하여 죽음에 이른 것과 같이 우리 역시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없음이 판명 난 까닭에 더 이상 아들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다시 출생한 것인데 나 스스로 아들이 아닌 쪽을 선택했으니 나의 선택대로 되는 것뿐이다. 아담이 자기 생명을 결과론적으로 내다 버린 것과 똑같은 결말이다. 과연 나는 아담처럼 행동한 것이고 그래서 시험해볼 가치가 있다 함이다. 그런 우려가 적중이 된 것이다.

물론 이는 가상해서 하는 말이고 그러므로 나는 절대로 아담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시험하는 과정만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래서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에 오신 바로 그 일처럼 이상적인 것은 없다. 바로 그렇게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부과된 것이다. 즉 현재와 같은 육체로 그리스도께서 처음 세상에 오셨으니 우리도 이런 육체를 지금 그대로 지니고 있는 이유다.

그러나 앞의 설명처럼 우리는 근원적으로는 신령한 몸으로 창조된 그대로 그 신령한 몸의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니 곧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어 있는 관계로 하늘에 계신 육체로서의 그리스도의 모습이 바로 나의 새로 창조된 근본적인 육체의 모습인 것이다[엡 2:6]. 단지 지금은 오직 아버지의 일을 하기 위해 '임시로 받아 있는 육체' 격이 바로 현재의 나의 육체인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의 이 육체는 일하기 위한 작업복인 것이고[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이니 전투복이기도 한] 나의 원래의 정장(正裝) 차림은 하늘의 그리스도의 모습인 것이다. 그 화려한 영광스러운 '의복'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나타나게 되어 있다.  

가령 여기 무소불위(無所不爲, 無所不能)의 독재자가 있어 감히 그 누구도 그에 대하여 입을 놀릴 자가 없으나 그 독재자가 원리원칙대로 움직이고 자기의 사사로운 욕망을 따르지 아니하며 전적으로 국민들을 위해서만 모든 일을 한다고 한다면 그가 단순히 독재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마다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국민을 자기 친 자식 같이 또는 자기 자신 같이 위하므로 그런 독재자라면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독재자"의 경우도 아니다.

하나님은 단 한 분으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로서 둘이 하나되어 즉 머리와 몸의 관계로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아들을 위하시고 자기 자신을 위하심이 없고 아들 역시 아버지만을 위하시고 자기 자신을 위함이 없으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하는 것이다[고전 11:3]. 바로 이러한 사랑 가운데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자기 모습을 따라 만물을 만드시고 또한 우리를 새로 창조하신 것이다. 이렇게 계시는 모습이 영원한 법과 원리원칙으로 정착되어 확고하게 세워져 있으니, 이 원리를 이름하여 삼위일체의 법칙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자기 피조물을 위하시고 당신 자신을 위하심이 없다. 나를 위해 사시고 당신 자신을 위해 사시지 않는다. 그 증거가 나를 위해 죽으신, 나에게 당신 자신을 전부 내어 주신 십자가 죽으심이다. 영원한 그 확증이다[롬 5:8]. 여기에는 영원히 변동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십자가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는 사형수의 모습으로 죽음을 당하신 것은 원래 첫 사람 아담의 범죄가 범법 행위 즉 생명의 법을 어긴데 대한 마땅한 형벌이었으므로 이를 나타냄이었다. 생명의 법은 다름아니라 몸과 머리의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이다.

"그러면 그 피조물을 위하신다면 왜 악한 자라고 해서 영원한 형벌에 처하시느냐, 누가 그런 곳에서 영원토록 지내기를 원한다기에 그렇게 강제하시느냐" 하려는가? 그렇게 하시는 것 역시 우리 피조물을 위하심이다. 왜냐면 악인들을 그렇게 격리시키지 않으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담을 죽음에 빠뜨리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처럼 한 몸 구조에서 암적(癌的) 역할을 자행하기 때문이다. 자기도 망할뿐더러 이웃까지 함께 망하게 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것은 강제가 아니니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것을 단지 확정시켜 주시는 것뿐이다. 그러나 생명의 법을 관장하시는 주체로서 법 집행자이시기 때문에, "형벌에 처하신다"는 표현만을 그렇게 할 뿐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 선택한 것은 그 선택한 대로 일절 변동이 없도록 하심이다. 항상 강조하지만 법질서 확립의 요체는 그 변동 없는 일관성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특성을 가리켜 첫째 그 한번 작정하시는 일에 변동이 없음 즉 마음을 바꾸시는 일이 없음과 둘째 거짓말을 하시지 않는 것을 들고 있다[히 6:17,18].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과학 시대에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연법칙을 벗어나 몸이 썩지 않고 영생하려는 것은 숫제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전혀 현실성이 없는 공상물(空想物)에 속한다. 과학은 법칙과 원리를 생명으로 하는 학문이다. 검증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과학에서 제외된다. 이 육체가 한번 썩어 흙으로 돌아가면 그것으로 영원히 종결이다. 그것이 다시 회생하거나 하면 법질서 문란이 된다.

지금 자연계에 속한 우주 천체가 질서 정연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아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그런 무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노쇠하여 기운이 없어 죽어 썩는 것으로 일단락되고 그 이상은 없다. 그러나 새 창조의 경우에는 다르니, 새로운 창조는 새로운 법질서 창조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법과 질서는 원래 창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시니 그것이 바로 법과 질서로 정착된 것이다.

모든 과학적인 원리와 질서의 근간이 삼위일체 원리다. 이 원리에서 파생되어 나가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이 자연계가 있으면 초 자연계가 역시 존재함을 입증함이다.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삼위일체 원리에 의해서 증명되는 사실이, 위에서 지적한 대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영원히 남고 그 대립되는 초 자연계에 속한 신령한 몸은 신령한 몸으로 영원히 남을 뿐이다.

일시적인 변화는 할 수 있다. 즉 신령한 몸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변할 수 있음이다. 그러나 반대로 자연계에 속한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면 이 역시 대립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는 까닭이다. 다 똑같으면 대칭[상칭, 대립]이 되지를 않는다. 그러나 일시적인 변화는 할 수 있어도 그 본바탕은 변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영원히 자기 모습 그대로 남는다고 한 것이다.

아담이 범죄하여 신령한 몸으로부터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되돌아온 것도 그런 신령한 몸의 변환 능력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범죄의 결과로 그리 된 것이기 때문에 다시 신령한 몸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보다도 근본적인 이유는 일단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있다가 신령한 몸으로 정착되어 있었는데 다시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되돌아간 다음이므로 그 애초의 자연계 육체로 그냥 영원히 굳어져 버린 일면에 있다 할 것이다.

아담이 애초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다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된 것은 당시는 창조의 과정에 있어 창조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창조가 끝난 다음에는 모든 것은 확고부동이다. 이렇게 대립되는 개념으로 있는 것은 영원히 변동될 수 없으니 그래서 우리의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새로 창조하심을 받아야 신령한 몸이 될 수 있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빛의 구조에서 파동과 입자는 영원히 그 둘로서 부동(不同)이고 그 사실로서 부동(不動)이니 입자가 파동이 되거나 파동이 입자가 되지 못함이다. 만일 그런 변동이 가능하다면 빛이라는 것부터가 아예 존재할 수가 없다.

우리의 새 창조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사람이 되심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는 새 창조의 영역이다. 창조주 친히 당신 자신을 사람으로 만드신 것이니 그러하다. 다음에는 우리를 죽은 자로부터 산 자로 만드시니 또한 그러하다. 다시 말해 썩어져 없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 육체가 썩어질 수 없는 육체로 만들어진 것은, 그리스도 친히 그렇게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죽으셨다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그대로 성령으로서 내 안에 오시어 나와 하나되심을 통해서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으로 출생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 3:6].

그리스도 친히 새 피조물된 나에게 생명력이 되시는 것은, 이렇게 나와 하나되심으로써 그 죽으심을 나의 죽음, 나의 장사 지내짐과 아울러, 나의 승천으로 곧장 이어져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하나님 옥좌 우편에 앉아 있는 것으로 확정되어, 내가[옛 사람] 죽었으므로 나를 위해 살지 않음으로써[고후 5:15] 범죄하지 않게 되고,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는 상태로 살아났으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고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시니 자연적으로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 필요가 없어서라도 죄를 짓지 않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완벽하고 이치에 맞고 합리 타당성을 지니고 원리원칙에서 하나도 벗어남이 없으므로 과학적인 구원이다. 단 현재의 과학은 자연법칙에 한정되는 것이므로 "실험 불능"이라 하여 영혼마저 부정함으로써 자연계에 대립되는 세계에 속하는 신령한 세계는 인정하지 않는 쪽발이인지라 엄정한 의미에서는 과학적이라는 말이 합당하지 않으나, 단지 철저한 원리원칙을 따라 논리성과 합리성과 타당성을 띠고 따진다는 점에서 그런 표현을 쓰는 것뿐이다.

앞에서 현재 내가 죽었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고 승천했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엡 2:6] 것이 모두 현재의 일이라고 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음이 현재의 현실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초점은 여기에 있다. 몸[나]과 머리[그리스도]의 불가분성, 영혼[성령]과 육체[나 자신]의 불가분성이 바로 그 '하나'다. 이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왜 현재는 신령한 몸이 아니냐, 이미 여러 차례 설명했지만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다시 오시는[오순절 날 그렇게 오신 것이다] 것은 그리스도와 이제는 영원히 하나되어 있는 내가 또한 세상에 다시 임하는 바로 그 의미가 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렇게 세상에 임한 것이다. 즉 내가 오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을 받아 모시는 의미가 바로 그렇게 된다. 오순절 당시 120명 정도의 사람들에게는 그 때 내리신 성령께서 바로 그러한 의미이셨고 오늘 내가 성령을 받아 모시면 오늘 그러한 의미가 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체로는 하늘에 계심과 같이 내가 하늘에 있는 위치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우리 생명이 하늘에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다 하는 것이다[골 3:3]. 이 육체를 앞에서 작업복, 전투복이라고 했지만 바로 그런 의미이다. 작업복은 오직 일하기에만 적당해야 하고 전투복은 피에 범벅이기도 하고 찢겨져 걸레처럼 되는 것이야 아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이런 작업복, 전투복 차림으로 이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라 표현해야 제대로 된 표현일까.

사랑은 언제나 현재를 두고 이야기한다. 생명도 현재다. 미래에 살겠노라 하거나 과거에 살았다고 하는 말들은 한 마디로 무의미한 것이다. 비록 지금은 우리의 생명이 감추어져 있고 그래서 십자가 고난의 형극[가시밭]의 길이나 주님께서 십자가로 나아가실 때 "내 평안과 기쁨을 너희에게 준다" 하심으로써 오히려 당신의 기쁨과 평안을 제자들과 나누실 정도로 풍성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현재 그러한 것이다. 

영혼을 지닌 육체의 비극이 이 세상 인생 삶이다. 자연계의 동물들은 영혼이 없으므로 비록 육체를 지녀도 그들은 평안하고 행복하다. 창조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면서 자자손손 대가 물려지고 있으니 당연히 그러하다. 그런 그들은 창조 때의 바로 그 모습이다. 그러나 영혼이 있는 인생은 자기 사는 한 때로써 끝이다. 육체는 물려지고 있으나 영혼은 물려지지 않는다. 나는 내 할아버지, 아버지가 아니니 영혼이 각각(各各)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극적 현실을 모르니 더욱 참담한 비극적 현실이다.

인생이 나대는 모습들을 보라. 옷 모양새, 얼굴 표정하며 거동하며 온통 '영혼'의 증거가 철철 넘친다. 자기 영혼을 그 육체에 발라 가며 움직이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다. 그런데도 그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고 심지어는 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단 한 가지 사실을 인해 부정하기까지 하는 것이 소위 지식 있다 하고 지혜 있다 하고 똑똑한 양 으스대는 계층의 한없는 미련함이다. "본다고 하니 죄가 그저 있다"고 책망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안다고 하면서 더욱 그러하니 인생의 미련함이 이와 같다. 사연도 사유도 없이 무턱대고 오만하다. 제 잘났다고 한다.

자멸의 길로 걸으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다. 때문에 진리를 아는 것은 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게만 허용된 것이다[눅 10:21/마 18:3]. 무릇 겸손한 자에게 복이 있다. 진리를 아는 지혜는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전유물(專有物)이다. 이 사실을 아는 것 자체가 지혜이다. 왜냐면 어린 아이가 사랑을 제일 잘 알고 또 할 줄 아는 연령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이 사랑이다.

그리스도를 알고 난 다음의 사랑을 말한다. 왜냐면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그 어는 인간도 사랑을 아는 바가 없다. 안다고 해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안다"[요일 3:16]고 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이 사랑을 알고 나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 있는"[마 18:3] 사랑의 반응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즉 '엄마'의 사랑에 대한 '아기'의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더 정확히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사랑을 제대로 알 수 없음이다.

이는 생명 자체를 모르고 살 줄을 모른다는 그 뜻이기도 하다. 목숨이 붙어 있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자유 의지가 있어 자유 선택을 할 수 있으므로 사는 법을 따라 즉 올바르게 사는 방식을 따라 살도록 되어 있음이니 사랑과 생명의 법질서 테두리 내에서 그러한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살아야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살지 못해 첫 사의 범죄로 현재 모든 인생이 "죽은 자"가 되어 "망하는"[눅 13:1-9] 길로 접어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회개하는"[:1-9] 것이다. 바울처럼 우리는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행 17:30]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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