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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운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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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6) 집에 있는 교회 등록일 2016.02.27 21:29
글쓴이 김일동 조회 316

집 교회 운동-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CITHM'의 핵심은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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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구원의 특징-'미래'가 아닌 '현재'

(1)인간[아담]은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으나 범죄로 인하여 그 몸을 잃은 상태가 현재의 이 육체이므로 애초 그런 영계에 속한 영적인 몸으로 있었고 거기 맞추어 미리 영혼이 조성되어 있는 관계로 영생에 대한 욕구는 강렬하나 인간 스스로 이 신령한 몸을 다시 갖춘다는 것은 망상일 뿐이고, 오직 하나님의 새 창조만이 가능하게 할 뿐이다. 아담이 이미 죽은 자로 선고를 받은 터이므로 이 문제를 합법적으로 해결 못하면 영생은 불가능이었다.

(2)합법적인 해결은, 일단 죽고 난 다음에, 현재 살아나 있어야 하는 것, 이것이다. 살아나되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데 그런 죽음을 죽은 후 다시 살아나는 것도 불가능하거니와 더군다나 신령한 몸으로 살아나 있다는 것은 더더욱 꿈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고는 영생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을 어찌하리요.

(3)이 구원은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미래'에 일어날 것을 말함이 아니다. '현재' 그렇게 되어야 그것이 '합법적 해결'이 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고는 영생은 한낱 허공에 뜬 부질없는 공상에 지나지 않으니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그런 미신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무슨 좋은 묘안이 있다는 말인가. 그리스도의 구원은 이 '현재'를 말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세상 종교는 모두 '미래'를 말한다. 현재를 말하는 것은, 창조는 현재의 일이지 미래를 두고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4)"미래에 그렇게 창조하실 것이다" 하고 말하는 것은 "미래에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하는 의미이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은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현재 구원된다는 그 뜻이기 때문이다. 현재 내가 죽고, 다시 살아나고, 신령한 몸으로 있고, 하늘에도 있는 등, 이 전부를 한꺼번에 포함되는 의미가 현재 그렇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이미 설명한 대로 당연히 그러하다. 이 현재와 미래를 가름해 주는 핵심되는 의미가 바로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5)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는 이 현실이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현재에 일어난 변화이기 때문이다. 믿자마자 변화이요 받자마자 변화이다. 현재에 일어난 변화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변화이니, 새로 창조되었고 다시 출생했고 성령으로 출생했다. 죽은 자가 아닌 산 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이 모두 현재의 변화다. 죽고 난 다음의 미래에 보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왜 영생을 약속이라 하는가[요일 2:25/약 1:12/2:5/히 10:36].

(6)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이 양면성의 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원리를 강조하여 설명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현재 이미 얻고 있는 것과 약속은 아주 별개다. 약속은 미래를 말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원리의 3각[tripod]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갑[a], 을[b], 병[c]에서, 현재 얻고 있는 것을 갑이라 한다면 약속은 을이고 그러면 병은 무엇이냐. 현재 구원 받아 있는 생명력을 원동력으로 하여 순종함으로써 얻는 최종 결과를 말함이니, 여기에는 갑과 을이 다 포함되는 것이다.

(7)다시 말해 현재가 있음으로서 미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현재가 있음을 미래를 이루기 위함인 것이다. 고로 현재와 미래는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혼연 하나로 융합하여 있는 것이다. 갑을 떼놓고 생각하면 을이 있을 수 없고 을을 떼놓으면 갑의 의미가 없어진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있지만 얻으려 하고[빌 3:8]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내가  발견되려 하고[:9] 그리스도의 부활을 내 것으로 삼아 현재 살아 있지만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예하여 부활에 이르려 하는 것이다[:11].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을 이루려 하는 것이다[2:12].

(8)이것은 갑과 을의 관계를 말함이다. 그러면 병을 표현하면 어떻게 되느냐. 바울 사도는 이 표현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빌 3:12]는 말로 나타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현재 나를 잡아 주시니 그 붙들어 주시는 힘으로 내가 달려가는 것이다. 이 힘이 없으면 나는 달려갈 수 없다. 또 내 스스로 달려가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아무리 나를 잡아 주셔도 그것이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다. 왜냐면 그렇게 달려가라고 나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9)그 달려가는 것이 여기서 무엇을 뜻하는가? 다름아니라, 머리와 몸의 한 몸 관계에서 몸[의 한 지체]으로서 머리에 끝까지 충성하는 것, 머리의 지시에 한 치 흔들림 없이 따라 움직이는 것이니, 즉 지체를 삼아 주셨으므로 지체(肢體)로서 마땅히 머리의 지시를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그 지시에 따르는지의 여부를 살피는 단계가 현재인 것이다. 나를 산 자로 만드신 것은 이 한 몸 체제에서의 한 지체를 삼아 주심이니 지체를 삼으신 것은 머리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그 생명이다.

(10)즉 머리의 지시를 따르라고 지체로 만들어 주신 것이다. 또 내가 지체로서 머리의 지시를 따르도록 되어 있는 것은 내 스스로 이런 지체로 만든 것이 아니고 나를 산 자가 되게 하시어 지체로 삼으신 은혜와 영광을 입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그러니 갑이 있음으로 을이 있고 을이 있음으로서 갑의 의미와 가치가 있음이다. 이렇게 지금 갑과 을이 혼연 일체가 되어 병을 이루어가고 또는 병을 나타내어가고 있는 것이다.

(11)그리고 병은 지속적인 동작이지 달려갔다고 해서 골인 점에 도달했다고 더 다시 달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삶 자체 곧 사는 것 즉 일상생활을 말하므로 영원히 그렇게 해서 병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상태이면서 끊임없는 동작이다. 갑과 을이 안고 업고 해서 영원히 한 개의 공[球]으로서 굴러다니는 것이 병으로서의 움직임이다. 병으로서의 자신을 나타내고 있는 갑과 을 역시 그 안고 업은 상태 그대로의 영원한 모습이다.

(12)그러면 왜 이 세상에서는 우승하기 달리는[고전 9:24] 것처럼 하라고 해서 "푯대"[빌 3:14]를 정하고 있는가 하면, 지금은 선과 악을 갈라내는 시험의 무대이기 때문에 그러하다[마 13:48]. 영물(靈物)들은 이미 그런 시험 과정을 거쳐 오늘날 거룩한 천사들과 악령[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하여]들로 영원히 구분되어 있다. 지금은 우리가 바로 그런 동일한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물들로 치면 악령들이 되어서는 안되고 거룩한 천사들의 위치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푯대"인 것이다.

(13)이렇게 의인으로 인정되어야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강조하는 것은 과거 "죽은 자"[8:22]로서 죽어 있었던 때와 지금 "산 자"[고후 5:15]가 되어 있는 때와는 하늘과 땅 차이이니 삶의 의미 또는 목적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이다. 왜냐면 "옛 사람"일 때에는 무조건 나 자신을 위해 살았던 자기중심 일변도였으나, 이제 "새 사람"이 되고 나서는 무조건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것이다.

(14)그러므로 구원을 이루려고 해도 그리스도를 얻고자 해도 그리스도 안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려 해도 부활에 이르려 해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는 일체의 동작이요 움직임이고 힘씀이고 애씀이다. 이 차이를 모르기 때문에 헷갈리는 것이다. 이 분명한 차이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에나 일에나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요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골 3:17/고전 10:31/벧전 4:10,11][요 14:10/5:19].

(15)바로 이것이 산 자가 되게 하시어 몸의 지체로 삼아 주셨는데 과연 머리의 지시대로 잘 순응하는 것인지 여부를 살피는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양자-롬 8:23]로 삼아 주셨는데 과연 아버지의 뜻을 잘 받들어 순종하는 아들이지 여부를 시험해보는 의미인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은 시험하시지 않는다[약 1:14] 한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악한 의도로 시험하시지[고전 7:5] 않는다는 뜻이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히 11:17/약 2:21] 것처럼 그런 시험은 의당히 있어야 할 일인 것이다.

(16)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십자가 죽으심이 된 이유는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의 의미로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는데, 죄 값으로 죽으면 처벌을 받았다는 의미는 있어 죄인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요구는 충족되었으나 그렇다고 다시 살아나는 법은 없다. 왜냐면 일단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 죽었다는 사실이 무의미해지고 무효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우리 대신하여 죽으심"이라는 의미가 성립될 수 없음을 이미 설명했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고 영원히 사시기 때문이다. 뿐 아니라 성경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우리의 구원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못박은 것이다[고전 15:17,18].

(17)그러므로 형벌은 형벌대로 받고 동시에 또한 살아나 있어야 구원이다. 천주교니 개신교를 제외한 세상 종교는 이 인생의 죽음이 죄를 지은데 대한 형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죄의 결과로 인정하지 않는다. 천주교나 개신교 등 기독교라고 해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복음과 기독교를 분리해서 생각하고 같은 카테고리에 있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니 개신교만 해도 성경대로 믿는 이들이 아주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견해를 가진 것도 아니니, 아담 자신이 애초 신령한 몸이었다는 성경 기록을 믿지 않고 있는 것이다.

(18)우리가 아는 대로의 죽음과 죄가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왔다는 명백한 설명이 성경에 있는데도 이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 까닭이다.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죽지 않는 것이었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다 죽게 되어 있는데 죽지 않는다 했으니 몸이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니요 신령한 몸이었다는 사실을 말함인데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모두 이런 식이요 이 정도이다.

(19)그 중에 한 사람이라도 성령의 가르치심으로 성경을 이해하겠다는 사람이 나서야 하는데 모두 이 성경에 관해서만은 철저한 '도미노 현상'을 일으켜 일제히 '남 따라' 하기에 열중인 것이다. 이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 든 것이니 성경을 혼자 읽으면 이단 사상에 흐르기 쉽다는 겁을 주었으므로 그런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는 까닭이다. 필자는 성경대로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니 누구나 진실된 마음으로 읽으면 성경을 제대로 깨닫게 해 주시리라 믿었었다.

(20)필자가 성경을 직접 읽고자 하여 나선 동기도 기독교가 너무나 교파, 교단이 많아 모두 자기가 진리이고 옳다고 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또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하여 가르쳐 주신다는 대목이 성경 곳곳에 있어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데에서 힘을 얻은 결과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진정으로 성경의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이상 하나님께서는 나의 마음을 아실 것이라 믿어 그래서 올바르게 인도해 주실 줄을 믿고 성경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성경을 믿어야 즉 성경을 진실의 기록이라고 믿어야 읽는 것이지 거짓말로 된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그나마도 읽을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이야 물론이다.

(21)죄의 형벌로 죽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처음부터 죽는 자로서 인간이 생겨났다는 의미인데 그러면 왜 영생하고자 하고 죽음 자체를 슬퍼하고 고통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디서 났는가. 고통으로 생각하는 것도 역시 '과(果)'이다. 그러면 이 '과'는 반드시 '인(因)'이 있게 마련이다. 그 원인은 우리가 첫째 하나님의 세계 창조를 인정하게 되면 풀리는 것이니 처음부터 영생하는 존재로 인간이 창조되었으나 머리와 몸으로 이루어진 한 몸 구조로서의 생명 체제를 구성하는 생명의 법칙을 어겼기 때문에 즉 범법, 불법을 인해 죽음이 왔다는 결론이다.

3운법칙의 구조는 하나님의 존재는 모습을 그린 것

(22)하나님의 존재는 그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진실성과 더불어 확실한 사실로서 우리에게 오늘날 다가 와 있다. 적(敵) 그리스도가 장차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나타나 하나님으로 자처하게 될 것인즉 오늘날 세계는 곧 있으면 무신론자는 그 어디서나 찾을 수가 없게 된다. 이 무신론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쯤 되면 즉 그 때 가서 그런 세상 분위기[무신론이 아닌 유신론적 풍조]에 휩쓸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될 때는 이미, 구원의 기회로서는 완전히 때 놓쳐 버린 것이 될 터이니, 지금 그 구원의 때를 잡아야 천추 만대에 이르는 한(恨)을 만들지 않게 된다.

(23)하나님의 존재는 그 만드신 만물로 보아 분명히 알게 되어 있음은 이미 여러 차례 반복해서 밝혔거니와, 성경의 진실성 역시 성경의 자체 증명으로 충분히 나타나 있는 사실이다. 이런 모든 것에 무게를 더해 주는 것이 삼위일체의 원리요 이 원리를 증명하는 것이 3운법칙[trini homo]의 등장이다. 3운법칙의 핵심은 그 단 세 가지 유형으로 한정되어 나타나는 희한한 얼개[짜임새, structure, framework]에 있다. 그 자체의 독특한 구조가 이 법칙의 진실성을 증명해 주는데다 또한 여러 많은 생애들이 예외 없이 이 짜임에 들어맞게 나타나 줌으로 해서 이 특이한 구성이 절대로 틀리지 않음을 또한 입증하는 까닭이다.

(24)이 삼위일체 원리가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둘이 하나되어 계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함은 그 계시는 짜임새를 바로 위와 도형으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병(丙)은 원래 아버지 홀로 계시던 과거의 모습이고, 갑(甲)과 을(乙)은 현재 아버지께서 아들을 낳으심으로써 아버지와 아들로서 계심을 보임이다. 원래 병으로 계시다가 갑과 을로 나누어져 계시므로 본질은 같다는 뜻에서 셋 모두 검을 띠게 된다.

(25)그런데 갑과 을은 아버지와 아들로서 개체가 다르다는 뜻에서 검은 반분(半分)의 바탕을 서로 어긋나게 위치시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 이 도표에서는 이 둘[갑과 을]의 대소, 주종, 인과 관계는 나타내어지지 않았다. 나타내지는 않았어도 둘로 되어 있는 까닭이, 병이 을을 만듦으로써 즉 을이 병으로부터 나옴으로써 병이 갑이 되어 있는 것을 알기에 그런 뜻을 표시하나 아니하나 둘 중의 하나는 다른 하나보다 크다는 것은 이미 밝혀져 있는 것이다.

(26)위의 그림에서 유독 갑이 크다고 정할 필요는 없다. 을이 크면 갑은 상대적으로 작은 것이므로 어느 것이든 기준으로 삼는 것이 큰 것이다. 갑, 을, 병 순[영어로는 a, b, c 순]으로 말해 나가기 때문에 먼저 오는 갑을 큰 것으로 해두는 것이다. 이는 애초 아담이라는 첫 사람이 생겼는데 여기서 여자가 생김으로 인하여 아담은 남자가 되어 있는 것 꼭 그대로이다. 즉 아담은 병이고 남자는 갑이고 여자는 을이다. 당시 그렇게 여자가 창조될 때 여자는 이름이 없었다. 그냥 둘 사이는 "남자"와 "여자"로만 통했고[창 2:23] 이름은 오직 아담 그대로이었던 것이다.

(27)하나님이신 경우 "하나님"은 '병'이고 "아버지"는 '갑'이고 "아들"은 '을'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은 "성령"으로도 통한다. 왜냐면 아버지께서도 영이시고 아들께서도 영이시기 때문이니 "하나님은 영"[요 4:24]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도 "하나님"이시고 아들께서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병'이 "하나님"이심과 같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 아들의 이름, 성령의 이름"[마 28:19]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28)그래서 주님께서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하심으로써 성령을 "그[He]"라고 하심으로써 제3인칭 단수로 표현하신 것이다. "우리"라고도 하시지 않았으니 "우리"이면 단지 '함께 계심'을 나타내는 것이고 '둘이 하나'로서 움직이시는 것을 나타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나 아들과 똑같은 개체로서 "그"라고 나타내심이 이 표현의 핵심이다.

(29)그러므로 삼위일체의 원리의 구도(構圖) 또는 도식(圖式)은 이상과 같이 된다. 이 그림이 곧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그림을 3운법칙의 3가지 유형의 구조식이 꼭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 원리를 3운법칙이 입증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미 설명했지만, 검은 바탕은 FS유형을 말하는데 그 축소판인 JP가 OT유형과 SN유형에 같이 붙어 있음으로써 '갑'과 '을'이 똑같은 '병'의 본질로 되어 있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30)그리고 갑과 을이 같은 본질 즉 병에서 나온 것임을 그와 같이 갑과 을이 병의 본질인 JP를 대동함으로써 나타내되 갑과 을이 다르다는 것 즉 별개라는 것을 JP의 위치를 엇바꾸어 놓음으로써 그림은 나타내고 있으나, 실제는 JP가 위치해 있는 것으로써 그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갑과 을의 LP[활동기/전성기]와 DP[비활동기/침체기]를 나타내는 숫자를 엇바꾸어 즉 도치(倒置, inversion)시키는 형태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31)즉 갑과 을의 유형에서 공통으로 전체 생애를 57등분을 했다고 가정했을 때 그 57등분되어 있는 전체를 3등분하면 19가 되는 것이 갑의 유형이요, 거꾸로 19등분을 하면[역시 57등분되었다고 가정하여 그 전체를] 3이 되는 것이 을의 유형이다. 즉 3과 19라는 숫자를 서로 엇바꾸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갑의 유형이 되는 OT형은 JP, LP, DP가 균일하게 전체 생애의 1/3씩이 되어 3등분됨으로 인해 19["57등분"의 57을 3으로 나눈 값]가 된다.

(32)이 19라는 숫자는 OT형에서는 실질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고 실제 사용되지도 않으니 실제로 사용되는 숫자 3을 편의상 "실수(實數)"라 하면 "허수(虛數)"라 할까. 그리고 "57등분했다"는 것 역시 실질적으로 사용되지는 않고, 오직 위에 지적한 3과 19라는 숫자를 생기게 한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밖에 없다. 그러나 이 점에서는 나름대로 중요성을 갖추고 있다 할 것이니, 왜냐면 갑의 대칭을 이루는 을의 유형에 해당되는 SN형은 OT형의 도치(倒置)된 형태를 나타내고 있음이다.  

(33)도치 형태라고 하는 것은, OT형이 JP, LP, DP가 전체 생애의 1/3씩이 되어 3등분됨으로 인해 19["57등분"의 57을 3으로 나눈 값]가 되는 것과는 반대로 SN형은 JP, LP, DP가 5/19, 7/19, 7/19이 되도록 전체 생애를 19등분을 함으로써 3["57등분"의 57을 19로 나눈 값]이 되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즉 19와 3의 도치 즉 엇바꾼 형태다. 따라서 SN형에서는 3이라는 숫자가 실질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고 실제 사용되지도 않으니 역시 "허수(虛數)"가 된다.

(34)말하자면 그림과 같이 JP의 엇바꿈이 아니라 19와 3의 엇바꿈인데, 그림에서 반쪽짜리 검은 바탕의 엇바꿈은 바로 이러한 3과 19의 엇바꿈을 상징하는 것이니 도식(圖式)인 만큼 이런 상징성은 훌륭한 것이고 충분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난데없이 튀어나온 '19'라는 숫자의 근거요 그 출처이다. 다른 숫자 즉 7, 4, 3, 1 등은 우리에게 친숙한 숫자이지만 이 19라는 숫자는 아주 생소한 것이다. 즉 FS형이나 OT형의 JP, LP, DP 등을 구분하는 4/7, 3/7, 1/3 등은 너무나 눈에 익지만 19는 아주 다른 것이다.

(35)이는 병이 갑이요, 을이 생김으로써 갑과 을로서 되어 있는 내력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까. 즉 병이 갑이 되었고 갑이 원래 병이었다는 사실을 그와 같이 FS형이나 OT형 모두 그런 친숙한 숫자로써 JP, LP, DP가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낸 반면, 나중에 생긴 을은 그런 갑과 다르고 갑에서 파생된 것임을 유달리 구별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냥 무턱대고 별다른 숫자 예컨대 9나 8 같은 숫자로 나타낸 것이 아니라 갑을 기준해서 그 도치시킨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으니 이는 역시 갑에서 을이 나온 것임을 명백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그래서 놀랍고 희한하다고 하는 것이다.

(36)바로 지금 설명하는 것과 같은 설명이 될 수 있도록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이런 짜임새[구조]로 하나님께서 손보심으로써 3운법칙을 정하셨다는 의미 외에는 없는 것이다. SN형에서 JP기간을 정하는 5/19의 5라는 숫자는 19등분이 되어 있기 때문에 LP와 DP를 각각 7/19로 정하니까[7/19+7/19+5/19=19/19] 나머지가 5/19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FS형이 LP와 DP가 4:3비율로 LP가 DP보다 1/7만큼 긴 기간인데 반해, SN형은 OT형에서 파생되었다는 의미로 OT형을 닮아 LP와 DP기간이 똑같은 것도 눈 여겨 볼 만하다.

(37)OT형과 SN형이 FS형에 나왔다고 하여 FS형의 축소형인 JP를 대동하고 있는 것과 같이 SN형은 OT형에서 나왔다는 의미로 그 두 유형[OT형과 SN형]의 LP 및 DP 기간의 길이가 같은 것이다. JP가 FS형와 축소형이라는 것은, OT형과 SN형에만 있는 JP라는 것은 출생시부터 활동기[LP] 또는 비활동기[DP]가 시작되는 시점까지의 기간을 말하는데, 그 JP기간 중에도 DP 또는 LP로 나누어져 그 JP긴 역시 7등분되어 그 4/7가 LP, 나머지 3/7이 DP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38)JP기간 중의 DP, LP라는 것은 청소년 시절에서 비교적 수월했던 시절 또는 그렇지 못했던 때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가령 부모를 잃는다든가 하면 고생스러운 때가 되는데 그런 때가 DP에 해당되고 나머지가 LP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분석해본 SN형이나 OT형의 인물들의 생애 중에서는 그 JP에서 DP와 LP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대개 전기류(傳記類)가 아닌 약전(略傳)에서는 그 청소년기가 특별히 소개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39)그러한 관계로,  SN형과 OT형에 속하는 생애 가운데서 그 JP의 DP와 LP를 분명하게 분석해낼 수 없다고 해서 3운법칙 자체의 진실성이 입증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JP가 FS형의 축소형이라는 것은,  그 JP가 SN형과 OT형에만 있고 FS형에는 없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고 있고, 또 유소년(幼少年) 시절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나와 있는 인물들 중에  SN형이나 OT형에 속하는 생애는 예외없이 그 JP에서 DP와 LP가 3/7과 4/7로 가려져 나오기 때문이다.

(40)그리하여 '병'에서 '갑'과 '을'이 나왔음과 더불어 '갑'과 '을' 둘이서 '병'이라는 하나를 이루어 항상 존립함을 가리키는 것이, '갑'과 '을'은 반분(半分)의 검은 바탕[반드시 검은 바탕이 아니더라도 색깔을 지닌 또는 같은 색깔을 지닌 것으로 나타냄]으로 되었으나 '병'은 전체가 검은 바탕으로 되어 있는 형상인 것이다. 이것을 3운법칙의 구조는, FS형의 축소형인 JP가 SN형과 OT형에만 있다가 FS형에 와서는 축소형이 아닌 원형 그대로 즉 LP와 DP가 전체 생애의 4/7, 3/7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써 단순화, 단일화되는 것이다.

(41)§  인간이 오늘날 죽을 수밖에 없도록 된 근본 원인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악을 행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아담은 에덴낙원에서 그런 종류로는 아무 악도 행하지 않았다. 해를 끼칠 대상자가 없기도 했다.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함이셨던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믿지 않음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망친 것밖에 없으니 이웃에게 악을 끼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즉 이웃에게 악을 행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해쳤으니 자신에 대한 악[좋은 것을 선이라 할 때 그 반대로서의 좋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웃이 있었다면 그 이웃에게 악을 행했을 수도 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이 그 증거다. 자신에 대한 악이라는 것은 그 범죄가 자신을 망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42)왜 자신을 망치는 것이냐 하면 머리로서의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니 머리를 떠난 몸이 어디 가겠는가. 머리의 지시를 무시하고는 한 몸의 생명 체제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할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 것이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지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른다"[요 15:4-6] 하심과 같다.

(43)이 둘이 하나되고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되어 있는 관계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병으로서 위치해 있는 삼위일체의 원리를 따름으로써 머리와 몸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은, 주님의 명령과 같이 내가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居, to abide, to live)함에 있다. 왜냐면 위의 말씀과 같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 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거해야 주님도 거한다는 뜻으로 "나도 거할 것이다" 하신 것이다.

(44)나를 소유하신 나의 주인, 소유주로서의 명령인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실 것이다"[마 10:33] 하신 경고와 같은 뜻이다. 갑을 주님이라 을을 나라고 하면 내가 움직이는데 따라 주님도 움직이실 수밖에 없는 갑과 을의 움직임에서의 그 동시성(同時性)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미 주님은 나를 주님께 접(graft)붙여 주신 다음이다[fha 11:17].

(45)즉 죽은 자로서의 나를 산 자로 만들어 주셨으니 나는 당연히 산 자로서의 작동을 해야 주님도 계속해서 내게 생명력으로서의 역할을 하시는 것이다. 접붙여진 것이 제대로 작동되는 것을 보아서 참감람나무의 진액이 원래의 돌감람나무의 가지로 흘러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의 접붙여지는 관계는 기계적 작동이어서 한번 그렇게 되면 연속해서 자동적으로 되어지나, 주님과 나와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므로 나의 자유 의지를 따른 연속적인 의지 작용이지 않으면 안되니, "항상 복종하지"[빌 2:12] 않으면 어느 새 나는 자기중심이 되어 버려 주님을 부인하게 되는 그런 특징이 있으므로 이를 경고하심이다.

(46)즉 나의 삶 자체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함이요 나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끊임없는 동작의 겉모양은 그리스도를 얻으려는[3:8] 것으로 나타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발견하려는[:9] 것으로 나타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내 스스로 부활에 이르려는[:11] 것으로 나타나고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나 자신을 구원을 이루려[2:12] 하고 나 자신을 구원하려는[딤전 4:16/고전 9:24-10:13/15:2/빌 3:8,9/딤후 3:15/벧전 2:2/히 3:6-17]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47)사람이 행하는 모든 악 그리고 죄는 이 머리와 몸 관계에 있지 않음에서 오는 것이다. 바로 자기중심의 특성인 것이다. 이 머리와 몸 관계를 가리켜 공동체 의식, '우리' 의식, '한 몸' 의식이라 하는 것이다. 바로 자기중심이 모든 악과 죄의 뿌리이니 여기서 필연적으로 남을 해치는 것으로 본색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자기 부인이 없는 것이 악이다. 즉 자기중심이 악인 것이다. 자기중심은 반드시 조만간에 이웃에게 악을 행하게 되어 있다. 이 자기 부인은 한 몸 의식에서 오는 것이므로 한 몸이 구성되어 있어야 하고 여기에는 머리의 존재가 필연 필수이다. 머리는 어느 인간이 선출되어 되는 것도 아니고 세습으로 왕 노릇을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친히 머리가 되어 계심을 이미 밝혔다.

(48)특정 사실을 사실로서 시인하는 것만이 믿음이 아닌 것이다. 특정 사실이라 함은 그리스도 친히 나를 사랑하시어 나 위해 죽으신 그래서 그리스도 자신을 나에게 몽땅 내어 주신 따라서 지금 영원하신 선물로서의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심을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움직이심이다. 앞에서 "내 안에 거하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나의 동시 움직임이 따라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어야 구원이다. 나의 회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49)향후 머리의 지시를 따르겠다는 몸으로서의 약속이요 다짐이고 결단이다. 이 특정 사실의 핵심은 사랑이다. 고로 사랑은 사랑으로 대응하는 법이라 나 역시 그렇게 주님[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 곧 소유주이시므로]을 사랑하여 "주님 위해서만 사는 것이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닌"[고후 5:15] 것이니 이것이 자기 부인이고 그리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곧 '구원 얻는 믿음'의 본색(本色)인 것이다.

(50)언제나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체 모든 인류를 위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을 마치 피조물인 한 개인처럼 착각하여 전체를 위하시니까 개인적인 세세한 일에서는 떠나 계시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이는 심각한 오해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물론 전체를 위하실뿐더러 개별적으로 개개인을 위하시는 일에 온전히 철저하신 것이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이로서 나를 보살피시는 것이니, 내가 나 자신을 위하는 것보다 더 완벽하게 나를 위하시는 것이다.

(51)그렇지 않다면 피조물인 사람과 조물주로서의 하나님의 차이가 없지 않은가. 하나님은 영이시어서 온 우주에 충만하시므로 당연히 내 육체 안에도 계신다고 간단히 생각하기 쉬우나, 오직 자유 의지가 있어 자율적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 우리의 영혼과 관계되는 인간의 마음 즉 영혼의 영역에는 계시는 것이 불가능하고, 엄정히 특정 조건 아래에서만[내 스스로 나의 마음 문을 여는 경우에만-계 3:20] 계신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간섭, 강제를 하시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52)하나님 친히 손대지 못하실 것을 아시고 또 그렇게 하시지 않기로 작정하시고 그렇게 자유를 주신 것이다. 따라서 이 자유는 완전하고 절대적이다. 그런즉 내 스스로 원하는 경우에만 바꾸어 말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롬 1:28] 좋아하는 경우에만 내 안에 오심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내 안에 계시는 경우 <내 안에 한정되어 계시는> 하나님 그래서 '나의 소유가 되시는' 하나님이 되시니 이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내 안에 한정되어 계시고> '나의 소유가 되시지만' 모든 믿는 사람에게 똑같이 그와 같이 계시니 하나님이시다. 사람이나 그 어떤 피조물도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53)다시 말해 우리가 성령을 선물로 모심으로써 그리스도를 영접하려는 사람마다 그리스도께 절대 복종하기로 뜻을 세우지 않는 한 그 모심이 실현되지 못한다. 성령의 선물을 받아야 구원이 되는데 이 선물은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만 한정해서 주시기 때문이다[행 5:32].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여 절대적으로 복종할 의사가 없고 확고한 결의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구원이 불가능한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54)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모든 믿음의 조상들이 바로 이와 같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여 아브라함과 같이 절대 복종하는 자세로써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 하나님과 원활한 교제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그 마음이 항상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하여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爲人)도 그러한즉"[잠 23:7] 다시 말해 무엇을 사랑하느냐 하는 데에 매인 것이다. 사랑하면 그 사랑하여 좋아하는 것을 항상 생각하게 마련이다.

(55)돈을 사랑하느냐, 명예를 사랑하느냐, 권력을 사랑하느냐 등등이다. 즉 주님을 사랑하느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느냐 하는 것으로 구분되어진다. 그래서 이것이 매우 중요한 까닭에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치 말라"[골 3:2]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 되어 있으므로 위의 것 즉 하늘에 속하고 영원한 생명에 속한 것을 생각함이 마땅한 것은, 그 "위의 것"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1].

(56)그리스도와 나와의 불가분성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그 모습은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니 내가 나를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기중심으로서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것과는 완연히 다르니 자기중심일 경우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중심의 경우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고 생각하는 데에 근본적 차이가 있다. 이것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의미다. 갑이 을이 되어 있고 을은 갑이 되어 있는 불가분성 때문이다.

(57)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으므로 나 자신이 바로 그 생명 가운데 있어 그 하늘에 위치해 있음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1]의 의미다. 그렇다면 내가 생명의 세계에 속해 있고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늘에 있어야 하고 생명의 세계에 위치해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곧 죽음의 세계에 있음이다. 다시 말해 죽은 자의 모습 그대로 있다는 의미다.

(58)과거에도 죽은 자로 있어 죽은 자의 모습이었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지금은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로서 죽은 자의 모습을 하고 있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져 있다"[:3]. 전에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감추어 있기는커녕 생명 자체가 없었고 오직 죽음이니 죽은 자였던 것이다. 과거에는 죽은 자로서 자기만을 생각하고 이 땅에 속한 것만을 생각했으나, 지금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는 이중구조이므로 죽은 자의 모습으로 있기는 하지만 산 자로서 생명에 속해 있어, 생명의 세계에 위치해 계시는 그리고 성령으로는 내 안에 나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만을 생각하는 것이 지당하다.

(59)왜 우리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느냐 하면 앞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갑은 을을 위해서 움직이고 을은 갑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둘이 사랑으로 서로 하나 되는 이치에서 살도록 하려 하심이니 사랑의 핵심이 이 '자기 부인에서의 주인 의식'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 기쁘고 즐겁게[생명 자체가 기쁨이요 평안이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상대를 위하여 살도록[고후 5:15/롬 14:7-9] 하나님께서 애초 정하신 대로 자율적으로 살도록 하려 하심이다. 

(60)그런즉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천국에 들어가도"[눅 16:16/마 11:12]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도"[빌 2:12], 우리 스스로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고전 10:31] 하고, 주님 친히 하시듯이 "말에나 일에나 주님의 이름으로"[골 3:17] 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함이라는[히 12:28/고전 7:32,33/고후 5:10,11/롬 12:2] 그래서 이를 위하여 힘쓰고 애쓴다는[고후 5:9/벧후 1:10/3:14] 오로지 이 일편단심 하나로 사는 것이 우리의 구원 얻은 믿음이요 그 증거이다.

(61)기도도 마찬가지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루어 주시시라고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 친히 그렇게 이루어 주시기를 위해 기도해야만 그렇게 약속대로 하시게 되느냐 하면[겔 36:37],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실 때는 우리를 위하셔서 하는 것이니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즉 하나님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움직여야.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둘이 하나되는 사랑 관계를 따라 행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62)모든 것이 이 법칙에서 하나도 벗어남이 없다. 이것이 원래부터의 생명의 길이요 생명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을 이해하려 할 때는 바로 이것이 모든 정확하고 올바른 성경 해석의 열쇠[key]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 주심을 가리켜 처음부터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행 5:32] 것이라고 성경은 못박고 있다. 다시 말해 삼위일체의 법칙이 항상 적용되고 영원히 작동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우리의 구원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63)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함이 당연하고 합리적이고 실질적이므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룬다, 내 스스로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등의 표현이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니고 나의 구원이 목표가 아님은, 그와 같이 하나님을 위하는 생명의 법칙[하나님의 계명, 율법]을 따르고 지킴으로써 생명에 이른다는 뜻임이다. 그 확증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이 구원되기를 갈망한다"[롬 9:3] 함이니, 바울이 교회더러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 했으면 자기 자신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고"[빌 2:12] 있는 중임을 밝힘일진대, 바로 그렇게 '구원을 이룸'이 자기는 멸망하더라도 이웃은 구원되기를 바라는 열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64)다시 강조하거니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삶으로써[고후 5:15] 구원을 이룬다[빌 2:12]는 것은,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게 되어 있는 생명의 법칙을 지킴으로써, "침입하여 들어가 천국을 빼앗아 능동적으로 차지하는"[마 11:12/눅 16:16] 비결인 것이다. 실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위해서' 친히 주시는 모든 것이나, 우리 스스로 또한 '하나님을 위해서' 똑같이 움직여야 하는 것이 마땅함은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65)즉 하나님 '주시는' 것을 우리가 '받는' 행위가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동시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갑과 을이 하나가 되어 있음으로써 갑의 측면에서 보면 을을 안은 모습이요 을의 측면에서 보면 갑을 을이 업은 모습으로서의 동시성이다. 우리의 구원이 그러하다. 나를 그리스도께서 그 피 값으로 사들이시는 것이 구원[혹은 구속(救贖)]인데, 나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나를 소유하시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나 자신을 내가 주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라는 칭호가 바로 "나의 주인, 나의 소유주"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종으로서 주인께 나의 모든 것을 일임(一任)하고 바치는 것이다.

(66)이것을 부담으로 생각하고 속박이라고 여길 때에는 나는 사랑을 숫제 모르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이기주의고 자기중심으로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에게 자신을 전부 주신[가 2:20] 사실이 나의 심금을 아직도 울리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나는 단지 영생만을 욕심 내고 멸망만을 두려워하는 것뿐이다. 그런 것으로서 스스로를 진단할 경우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식의 필자의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살펴보시도록 감히 권고를 드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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