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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7) 집에 있는 교회 등록일 2016.02.27 21:30
글쓴이 김일동 조회 340

 

(67)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영원 멸망에 현재 처해져 있고 아담이 죽은 것은 바로 이 생명의 법칙을 벗어나 범죄, 범법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 말씀대로 하려 하지 않고 복종할 생각은 없이, 자기 자신을 앞세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려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죽은 자의 모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런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서의 사고방식'이 죽은 자의 모습인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순전히 본능[자기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기계적인 작동으로 종족 보전에만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68)그러나 기계적이 아니고 자유 의지로써 이지적 판단에 의해 스스로 선택하여 행동하게 되어 있는 영적 존재[천사와 같은 영물이나 인간]에게는 이런 자기 위주, 본위, 중심의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행동 방식은 곧바로 죽음에 속하는 것이다. 기계적인 본능 작용은 종족 보전으로만 끝나는 것이나 자유 의지에 의한 자기중심은 모든 면에서 자기 욕심만을 추구하므로 한 몸 체제에서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69)아담이 에덴낙원에서 신령한 몸 즉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있다가 범죄함으로써 즉 그 범죄의 대가로 죽음에 이른 것이나, 곧바로 영원 멸망에 처해진 악령들과는 달리 그 특이한 이중 구조[천사 즉 영물과는 달리,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는]로 인하여 그 죽음은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환원되는 것이었다. 애초 아담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창조되었다가 영혼이 조성되면서 이 영혼에 부합하게[걸맞게] 신령한 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70)자연계에 속한 몸의 특징은 그 육체가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그 삶의 동기와 목적이 순수하게 자기중심적인 그리고 동물적인 본능에 있으니 이야말로 인간으로 말하면 위의 설명대로 '죽음'이지 '삶'이 아니다. 자기가 자기를 위한다는 것 자체가 죽음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영적 생명에서는 절대로 용납되지 못하는 죽음의 지름길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이반 로버츠의 1904-5년 웨일즈 현상에 대해 언급했지만, 아무리 "회개한다" 하고 "그리스도를 높인다" 하고 죄를 고백하고 소리 높여 찬양을 하고 "성령"께 즉각적인 순종을 한다 해도 그 정작 핵심인 이 사랑의 동시성을 나타내지 않고 그냥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만 받기 원한다면 그것은 진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71)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그래서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동시성, 양면성에 의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움직임이 있어 '자기를 부인하는 주인 의식'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얼마든지 이를 모방할 수 있고 가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혀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런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는 주인 의식'을 발휘하는 것만은 죽어도 모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모방할 정도라면 그 자신이 벌써 "거룩한 천사들" 중 하나로 처음부터 남아 있었을 것이다.

(72)이 동시성 즉 하나님의 일방적인 움직이심이 아니고 우리 편에서의 적극적인 능동성이 요구되는 것을 이미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우리의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는 생명이라는 말과도 같은 의미다. 생명과 사랑은 불가분이기에 그렇다. 생명의 핵심이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체를 지으실 때 사랑으로써 지으셨다는 말과도 같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사랑을 떠나서 생명이 없으므로 생명보다 사랑을 우선적으로 생각할 일이다.

(73)§  영혼과 신령한 몸은 직결되어 있다 할까, 그래서 영계인 에덴낙원의 땅["ground"]을 소재로 하여 창조된 영물은 그 영이 곧 신령한 몸이요 신령한 몸이 영이라 말하자면 영이 형상화하여 신령한 몸으로 되어 있다고도 하겠다. 때문에 영물은 따로 영혼이라는 것이 없고 오직 인간만이 그러한 영혼과 육체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아담이 영계인 에덴낙원에서 신령한 몸으로 되어 있기는 했으나 그 원래의 육체가 자연계에 속한 흙["dust"]을 소재로 하여 창조된 그 근본은 그대로 유지되고 변할 수 없는 것이었다.

(74)그러므로 현재 죽은 자로서의 우리가 영혼은 아무리 존재해도 그 형상화가 이루어져 신령한 몸이 되어 있지 않으면 죽은 자이다. 때문에 마지막 심판 후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는 경우에도 신령한 몸이 된 다음에야 즉 "심판의 부활"로써 가능한 것이다[요 5:29]. 그리고 우리가 "죽었다"[골 3:3]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새 사람"이 되어 있는 까닭에 가능해지는 구분 또는 구별-롬 6:6/골 3:9/엡 4:22/골 3:10/엡 2:154:24]이 죽었다는 의미로서도 표현된다.

(75)그리고 이 "죽었다"는 의미는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다"는 말에 대한 상칭(相稱) 개념이다. 생명이 없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있기는 하되 감추어져 있으니 그렇다면 죽었다는 의미는 죽음으로서의 실체가 아니라 형상으로서 단지 죽음의 모습만 띠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이것이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모습이셨고 우리가 그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으로서 그러한 머리의 형상에 함께 동참하는 것은 당연하다. 본질이 같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76)이러한 죽은 자로서의 모습은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죽은 자"로서의 상태와는 다르다. 그 때는 죽음의 '실체'였다. 그러나 지금은 단지 그 '형상'으로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으니 즉 죽음의 고난 받기 위함이다. 생명에는 원래 고난이라는 것이 없다. 죽음의 고난을 목적하고 이런 육체를 하고 있으니 "죽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는 그리스도께서 사람되신 것이 죽음의 고난을 목적하셨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모든 일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어야 하는 것이다.

(77)옛 사람으로서의 과거에는 죽음의 모습을 한 죽은 자로서 그 결과는 당연히 살고자 기를 쓰고 덤비며 모든 일에 나 자신을 위함이었던 것인데[히 1:25] 그래서 범죄에서 결코 헤어날 수 없었던 것이나 이제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은혜로써 산 자가 이미 되어 있어 생명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모습을 띠고 있기는 하나[실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어] 죽은 자답게[과거에는 죽은 자로서 스스로를 인정하지도 않고 그래서 살기 위해 모든 힘을 다 기울였지만]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여 본능적으로 동물들이 움직이는 것과 같이 자기중심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고후 5:15] 의미이다.

(78)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말함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영으로 사는 것이다[고전 6:17]. 사람과 함께 살 때 어떻게 하는가. 한 몸으로 살 때는 남자의 몸은 여자의 것으로 여자의 몸은 남자의 것으로 사는 것이다. 한 영으로 살 때는 삶 자체를 두고 그렇게 하는 것이니, 나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고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삶을 사시니 그렇게 해서 함께 둘이 하나되어 사는 것이다. 주님께서 항상 내 앞에 계시고 나는 내 앞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데 어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요이 1:9].

(79)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불평불만 속에 살거나 원망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다[:18]. 왜냐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사시는데 나에게 해로운 것이 일어나도록 용납하실 리 없으니 그리스도와 내가 불가분성이므로 내게 임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임하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 항상 기뻐하는 것이다[:16]. 고난이든 죽음이든 옳은 이치를 따라 즉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는 생명의 원리를 따라 우리 구원 받은 이들은 시종일관함이다.

(80)그리스도께서 비록 영원히 사시는 이시지만 우리와 같이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사람이 되셨으므로 처음에는 구원 받은 현재의 우리와 같은 죽은 자의 모습이셨던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주인"[행 3:15]이시므로 죽은 자가 아니셨던 것은, 현재 우리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로서 구원 받은 자가 되어 있음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그렇게 죽은 자의 모습으로서 죽으셨지만 처음부터 산 자로 계셨으므로 당연히 살아나시되 신령한 몸으로[더 다시는 자연계에 속한 몸이 아닌 생명에 속한 정상적인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81)"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나 너희는 나를 볼 것이니 이는 내가 살았고[because I live]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19] 하심과 같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같은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을 입으시어 고난 받으시고 죽음에 이르셨지만 그러나 항상 사시는["because I live"] 것이니 왜냐면 아버지와 항상 하나로 계시는 까닭이다. 바꾸어 말하면, 참으로 한 사람으로서 죽으시고 장사 지내지신 바가 되었지만 아버지와 하나로 계시므로 죽으셔도 다시 살아나시게 되어 있지 죽어 있으실 수가 없다. 물론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리신 것이다.

(82)이상 사실은 이렇게 살리실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함이다. 우리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다 하는 것이다[골 3:3,4].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고난 받고 "일 백 번 고쳐 죽는다" 해도 다시 살아나고 오히려 그 고난 받음을 인해 영광이 역사(役事)되는 것이다[고후 4:17].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시지만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스스로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말이 타당성을 지니는 이유이기도 하다[빌 3:10,11].

(83)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 각자 안에 임하여 오시는 것이, 내가 '육체'라면 나의 '영혼'으로서 임하여 오심이므로, 이와 같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의미로서는 이보다[영혼과 육체] 더 이상적이고 완벽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 부모가 자기 육체는 그 후대에 물려 주는 것이나 그 영혼만은 독자적인 것이어서 아들이나 딸의 영혼이 아버지나 어머니의 영혼과는 전혀 별개인 것과 같은 이치다.

(84)그리스도께서 나의 영혼이심과 같은 이런 이중 구조에서도 그리스도와 나는 철저히 별개로서 반드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고 나 자신을 위해 살도록 되어 있지 않다[고후 5:15]. 둘이 하나되어 있음에서 이는 당연하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오로지 나를 위하심이니 새 피조물로서의 이중 구조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세상에 영혼과 육체처럼 가까운 관계는 없다. 말 그대로 불가분이다.

(85)따라서 이로 비추어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음미할 수 있다. 영혼은 철저히 육체를 위하고 육체는 절대적으로 영혼을 위하게 되어 있는 구조다. 즉 나는 그리스도만을 위하고 그리스도께서는 나만을[자기를 위하시지 않고] 위하는 것은 너무나 현실적이고 구체적임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성경은 이를 적절히 표현하여 "식물(食物)은 배(腹, belly)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실 것이다.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위하며 주님은 몸을 위하신다"[고전 6:13] 하였다.

(86)앞에서 "죽은 자의 모습"을 말하면서 아무리 신령한 몸으로 있다 해도 그 마음 자세가 자기 자신을 위하는 동물적 사고방식을 취하는 한 바로 그것이 죽은 모습이라고 했지만[결국 이를 회개하지 않는 한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죽음 또는 멸망에 처해지게 되어 있어], 우리가 육체로는 아무리 죽은 자의 모습을 취하더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자기 부인이 되어 있는 바탕이므로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의 모습인 것이다.

(87)또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죽은 자의 모습으로서 육체 가운데 있어도 자기 부인으로 일관되게 나갈 때 산 자의 모습이나, 만일 이전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닐 때 그렇게 마음 바뀌어질 때, 나는 더 이상 산 자의 모습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 모두 죽은 자의 모습 즉 죽은 자인 것이다. 이럴 경우 "몸의 구속 즉 양자(養子)됨"[롬 8:23]에서는 당연히 제외된다.

(88)이 악한 세상의 존속 이유는 그 악함으로 인하여 벌써 멸망했을 것이나 오직 악한 자를 걸러내기 위한 시험 무대이기 때문에 악한 자를 솎아내고 추려내기 위함이요 또한 아직 구원 얻지 못한 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구원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미 믿지 않는 자는 심판에 해당되므로[요 3:18] 일차적으로 추려진 것이다. 다음은 이차로 추려내는 작업이니 무슨 말이냐 하면 믿는다고 하는 이들 중에서 악인을 골라내는 것이다. 악인 중에서 의인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는"[마 13:49] 것이다.

(89)겉모양은 의인으로 있으나 실질적인 내용은 악인이므로 우리가 이러한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룸"[빌 2:12]이다.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 하신 그대로다[마 7:21/25:45].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자들을 말함이다. 이런 사람은 당연히 생명으로부터 격리될 수밖에 없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90)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마 3:3)로서 우리가 자처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사실을 세상에 알리어 이제는 악행을 회개하라고 외친 세례 요한의 소리가 있었던 것처럼 오늘 주님의 재림(再臨, 다시 오심)에 대비하라고 모두에게 "회개하라"[행 17:30]고 외치는 "소리"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껴서다. 이런 세례 요한 성격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오늘날 곳곳에서 많이 들려지기를 기대하는 바람이 크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심을 믿는 자마다 구원 얻게 되는 복된 좋은 소식[福音]을 전하면서 베드로는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 하였고,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다"[:26] 한 것이다.

(91)고로 그 악함을 돌이키지 않음으로써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죄 짓는 죄인으로 자처하며 "육신으로 살"[롬 8:13] 수밖에 없다고 가르치는 데에서는, 이 "믿음으로써 은혜로 얻는" 그리스도의 구원이 해당되지를 않는 것이니 경계할 일이다. 세례 요한의 외침은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주님께서 우리의 희생 양으로 처음 오시는 때였으므로 그러했다. 그러나 지금은 주님께서 이미 오셨고 이제는 다시 오시는 차례다.

(92)그러므로 "처음 오신 의미와 은혜를 똑똑히 알고 있느냐" 하는 외침일 수밖에 없다. 왜냐면 그래야 주님 다시 오시는 목적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다시 오심은 이미 믿은 이들을 위해 오시고 그리고 믿지 않는 이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오시기 때문이다. 마지막 심판이 아니라 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심판이다[살후 2:12]. 그러나 회개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에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행 17:30].

(93)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이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 우리가 절대 복종함에 있어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데에 있기[고후 5:15/롬 14:7-9] 때문이다. 생명[영생] 자체가 이 머리와 몸의 관계에 따르는 한 몸 체제에 있으니 이는 당연하다. 회개는 한 몸 체제를 인정하지 않는 자기중심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고 있느냐 하는 그 외침일 수밖에 없다. 정확히 믿어야 믿는 것이다. 회개 없이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일이 너무나 흔한 오늘날이다.

(94)정확히 믿어야 올바르게 회개하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소위 교회 집단의 비리와 죄악을 통렬히 논박하고 낱낱이 들추는 데에 있지 않다. 정확히 믿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지은 범죄요 악행인즉[행 3:17]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하여 이루어놓으신 은혜를 정확히 알면 모든 죄 문제는 절로 해결되는 까닭이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가려지는 것이다. 믿는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들어가는 개선문일 것이요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심판으로 나타나 각각 나뉘어질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의 변화 없이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는 한결같이 "회개하라!"는 외침이 되지 않을 수 없다.

(95)§  계시록에 보면 철장(鐵杖)으로 장차 만국을 다스릴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해치려고 이 세상 신(神-고후 4:4)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 입에서 물을 강 같이 토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자를 떠내려가게 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땅이 여자를 도와 입을 벌려 그 물을 흡수하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도는 일단 좌절된다. 꼭 그것을 가리킨다고는 말하지 않으나, 이 강물이 무엇일까. 인터넷이 발달하여 초등학교 또래의 아이부터 거침없이 거기 빠져드는 것을 보고 이 거대한 세력이 바로 그와 같은 드센 강물처럼 불가항력의 노도처럼 홍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96)한마디로 그 앞에 거칠 것이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공룡처럼 모든 것을 쓰러뜨리고 휩쓸어 간다. 자살 조장, 청부 살인, 성적 타락, 심지어 동성성행위까지 일사천리로 까발려지고 있으나 이에 대한 대비는커녕 전혀 무방비 상태다. 완전한 속수무책 바로 그것이다. 오직 각자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길밖에 없다. 그리하여 어른은 새 사람이 됨으로써 새 생명 곧 본성적으로 그런 것을 피해 가는 것이어야 하고 아동일 경우 성경을 통한 가정 교육을 통해 그러한 건전한 인성(人性)을 양성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97)성경이 이 때를 가리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하나님을 모독]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용서하지 않으며] 무고(誣告)하며[남을 헐뜯으며] 자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신하여 팔며 조급하며 스스로를 높이며[거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딤후 3:1-5] 했다.

(98)자못 어투가 하나님도 알고 그리스도도 알고 구원의 도리도 다 알고 있는 양으로 말하는 것이 특이하다. 다시 말해 믿는다고 하고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이들 중에 이러한 현상이 장차 두드러지리라는 뜻이 되어 있다. 한 마디로 오늘날 '인터넷', '스마트 폰'[또다른 무엇이 새로 나올지도 모르지만] 시대의 특성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영문으로 하면 아래와 같다.

(99)This know also, that in the last days perilous[terrible] times(times of stress) shall come. For men shall be lovers of their own selves, covetous[lovers of money], boasters, proud, blasphemers[abusive], disobedient to parents, unthankful, unholy, Without natural affection[without love], trucebreakers[unforgiving], false accusers[slanderers], incontinent[without self-control], fierce[brutal], despisers of those that are good, Traitors, heady[rash, headstrong], highminded[conceited, haughty], lovers of pleasures more than lovers of God; Having a form of godliness, but denying the power thereof: from such turn away".

(100)§ 성경에 "각각 자기의 일을 돌아볼뿐더러 이웃의 일도 돌아보라"는 말씀이 있는데, 자기의 일을 돌아본다고 해서 혼동을 느낄 필요는 없다. 자기의 일이란 것은 자기의 몸과 영이 모두 주님의 것이므로 주님의 것으로서 자기에게 부과된 역할을 다하는 차원에서 차질이 없도록 스스로를 돌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일이라 해서 자기중심으로 다시 돌아와 자기 위주로 나가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의 여부, 하나님의 뜻이냐의 여부, 하나님의 일을 위함이냐의 여부를 따져 오직 그런 방향으로만 나가라는 의미다.

(101)자기를 위하는 것은 죽는 것이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인데 그런 일은 이제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음이다. 주님께서 "내가 전에 죽었었다"(계1:18) 하신 것처럼 우리도 "나는 전에 죽었었다"(롬 6:13)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천적인 "육체의 무할례"[골 2:13]와 그리고 우리 자신의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몸이었으나(엡 2:1)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써 다시 살아나 있는 현재의 몸이다.

(102)성경은 현재 우리가 죽어 있는 것[골 3:3]과 살아 있는 것을[요 3:3/고후 5:17] 양면으로 강조한다. 치우침이 없이 평형되게 강조하여 가르치는 것이다. 죽었다는 것은 "육신"[롬 7:5-8:13]에 있던 "옛 사람"[롬 6:6/골 3:9/엡 4:22]의 죽음을 가리킴이요[갈 5:24/6:14] 살았다는 것은 "새 사람"[골 3:10/엡 2:154:24]으로서 살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요 14:19]. 이 세상에서 이 둘은 엄격히 구분되어 나타나야 한다. 왜냐면 이 세상이 시험의 무대로서 시험하는 자가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하고 있는 까닭이다.

(103)새 사람으로 살고 옛 사람으로서 죽은 모습이라는 것을 성경은"우리 생명이 감추어져 있으니 고로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죽었다"[골 3:3]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앞서의 설명처럼 천국과는 달리 이 세상에서는 또다른 의미에서의 죽은 자가 될 수 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는 '옛 사람으로서의 죽음'이 정상이고 이것이 믿음에 들어온 증거인데도, 처음 믿을 때와는 달라 이 '옛 사람의 죽음'이 아닌 '옛 사람 그대로 사는' 자가 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를 가리켜 "살았으나 죽었다"[딤전 5:6] 하는 것이다. 즉 "일락(逸樂, 쾌락)을 좋아함"[:6]이니 그리스도의 경고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요 12:25] 것을 말한다.

(104)이 세상은 죽은 인생들의 세계로서 죽음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말하지 않는 그 무엇이든 그것은 속이는 자, 거짓말하는 자로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에 말려들어간 것을 의미한다. 즉 죽은 것을 산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다.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이 무리하게 무턱대고 죽었다 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현실인데다 속절없이 죽어 나가는 판인데 어찌 이것이 사는 것인가. 이런 현실이 죽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105)관점을 확 바꿀 필요가 있다. 인식 전환이 화급하다. 이 세상이 사람 사는 곳인 줄로 아는 세상사람들 따라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고 성령으로 출생한 사람들로서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죽은 자"이었다가 "산 자"가 되어 있는 것이 우리 구원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죽은 자인 줄 모르고서는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다는 뜻이 여기에 있다[요 6:44,65]. 죽은 자라고 인식함은 온 세상에 죽어 있음, 죽은 자의 세계임을 아는 것을 말함이다.

(106)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이러한 죽음의 현상에 대한 그 자초지종을 설명하여 밝히고 있는 유일한 책이다. 이와 같이 죽음이니 당연히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이 없어야 하는데도 살고자 하니 무리이고 억지이다. 죽음의 세상이라는 것은 현재와 같이 사람이 죽어 나가고 고통스럽고 슬프고 고난의 연속이 되어 나가는 것이 그 증거요 또한 제 모습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살고자 하고 이런 세상을 사랑하여 그 신기루 같은 혹은 찰라 같은 쾌락에 젖어들려고 하니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가 죽음의 짓거리다.

(107)이 죽음은 멀지 않은 장래에 명백히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죽음의 세상에서는 순순히 이 죽음의 질서에 순응하여 고난으로 일관하는 것이 정상이요 따라서 그 다음 순서로서의 생명[영원한]을 기대하게 되어 있는 그런 현재의 단계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는 감추어져 있으므로[골 3:3] 이 세상에서의 모든 시간을 오직 사람들을 구원해 내기 위한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며 그것이 고난이든 아니든 개의치 않으며 또한 죽음도 불사하는 것이다.

(108)그래서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는"[빌 3:10,11] 것이니, 때문에 "이미 얻었다 하지도 않고 온전히 이루었다 하지도 않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자세다.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것만 있다[빌 3:12,14].

(109)이것이 "온전히 이루었다고 스스로를 여기는 자로서의 마땅한 자세다[:15].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것이요 동시에 산 것이다. 이렇게 죽은 자가 되어 있는 '능력'[능력이라는 말에 유의할 것이니 내 스스로 죽은 자가 되어 이 세상에 임하여 있다는 것은 하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은 내가 산 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이런 죽은 자가 되어 있기만 했지 산 자로서의 생명력이 없었다.

(110)그래서 산 자로서의 순종이 불가능했었다[롬 7:24]. 그 차이다. 따라서 이제 산 자로서의 능력을 받아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 하는"[빌 3:10,11] 단계로 '이를' 수가 있는 것이다.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빌 2:12]. 그 능력은 성령으로 현재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시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한 나의 믿음인 것이다.

(111)믿음이 없이 다시 말해 순종이 없이 더 분명히 말해 갑을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하나 됨'의 동시성이 없이는 즉 동시에 똑같이 나도 움직이는 적극성과 능동성이 없으면, 그 능력은 내게 아무 효험도 효력도 나타낼 수 없다. 이 능력은 엄마 품 속에 있는 아기의 넉넉함, 든든함, 푸근함, 느긋함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문자 그대로 그러하다. 엄마 품속의 아기의 그런 평안과 기쁨이 곧 능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112)사람이신 주님께서 힘써 기도하실 때 천사들이 나타나 힘을 돕더라[눅 22:43] 한 것처럼, 이제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천사들의 힘을 필요로[히 1:14] 하신 것이다. 물론 이는 우리의 대표 또는 본으로서의 '사람'이시므로, 우리에게 또한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심을 밝히시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쨌든 우리는 이로써 '하고자 하는 의지'는 우리의 몫이나 우리의 그 하고자 하는 의지대로 직접 '행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임을 명확히 알 필요가 있다.

(113)§  "우리가 구원을 이룸"은 죽음으로써 이루는 것이 특색이다. 세상 종교에서 또는 우리가 믿기 전 진리를 알지 못해서 몸부림칠 때의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고자" 한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 때는 죽기를 무서워하여 무조건 살고자 하였고 현재의 삶을 죽음이 아니라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고 단언한다고 한 것처럼, 넉넉히 죽은 자로 자처하고서 이루는 구원이다. 이제는 산 자이기 때문이다.

(114)이 세상에서의 산 자로서의 일[사람 살리는]은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것이 그 특징이므로 그렇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 한다[빌 3:10,11] 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구원 받아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요 4:34]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고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에 관해서는 일절 관심이 없이 오직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사람 구원하는 일에만 몰두할 뿐이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빌 2:12]이다.

(115)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을 받아 도중에 나 자신을 위할 때 즉 고난을 기피하여 이 세상 살고자 하고 자기 생명을 사랑하여 죽기를 두려워할 때, 그것은 앞서의 설명대로 죽은 자의 모습을 스스로 취하는 것이므로[산 자로서의 위치를 스스로 버리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들을 때 장차 자기가 그 금단의 죽음의 선악과를 먹을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으랴. 그러나 엄연한 현실은 그것을 먹고 죽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았던가.

(116)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막연한 근거 없는 생각은 금물이다. 근거는 있다. 그러나 그 근거는 내 스스로 믿음을 지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변함이 없을 때에 한해서 철저히 나를 지켜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 한 나를 지켜 주실 아무 근거가 없어진다. 이것이 구원의 양면성이요 동시성임을 이미 설명했다. 만일 그런 근거가 있다면 모든 인생들은 믿든 안믿든 자동적으로 다 구원되게 하셨을 것이다.

(117)믿는 자에 한해 구원이라는 단서를 붙여두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일방적이 아닌 '동시성'의 구원임을 항상 명심할 일이다. 내가 적극적으로 순종하기로 하여 회개할 때 한해서 나의 죄가 용서되고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됨이다[행 2:38]. 그리고 이 믿음은 사랑의 영역이어서 사랑은 절대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관계로 그 후로도 나는 얼마든지 마음을 바꾸어 믿음을 버릴 수도 있고 사랑을 떨어뜨릴 수도 있어 얼마든지 냉각해질 수 있는 것이다[계 2:4,5]. 그래서 무릇 지킬 만한 것 중에 네 마음을 지키라 하는 것이다[잠 4:23].

(118)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왜냐면 처음 창조될 때부터 받아 타고 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지 우리 스스로에게서 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 스스로에게서 난 것이라면 우리가 창조되었다는 말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처럼 영원 전부터 존재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 우리는 창조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었고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를 않았었던 것이다.

(119)그러므로 시종일관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고 하나님 주신 선물 아닌 것이 없다. 우리의 구원이 이러한 하나님의 새 창조로 말미암아 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 구원이 "선물"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선물이시기 때문이다[요 4:10]. 그래서 "성령의 선물"이다[행 2:38].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임하여 오시는 까닭이다. 우리 스스로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가 그[하나님]를 힘입어 살며 기동(起動)하며[움직이며] 존재한다"[행 17:28] 하였다.

(120)여기까지가 즉 우리가 새롭게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는 여기까지가 하나님의 일방적인 움직이심이다. 일방적이기 때문에 은혜다. 믿기만 하면 되는 구원이다. 거저 주시는 것이다. 특별히 은혜인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행한 것은 하나님 미워하시는 것밖에 행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와 같이 대해 주셨으니 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렇게 나를 새로 지으시려고 일체를 완성하셨으나,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곧장 나를 새로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앞서의 지적대로 모든 인생들이 다 자동적으로 구원되게 하셨을 것이다.

(121)나를 새로 창조하시려고 모든 일을 완성하신 다음 그래서 내가 믿기만 하면 되도록, 다시 말해 "보기만 하면"[그리스도의 나 위한 십자가 죽으심을] 나의 다시 출생하는 일에 관한 모든 것이 일시에 완결되도록 하신 다음에 오직 나의 반응을 보시는 것이다. 즉 '동시성'이 시작된다. 나 역시 하나님의 손바닥과 마주치는 손바닥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의 손바닥과 나의 믿음의 손바닥이 마주쳐 새 창조, 다시 출생의 손뼉 소리가 나게 되어 있음이다.

(122)그래서 나의 믿음은 향후 절대적인 순종을 약속하는 회개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음이다[행 2:38]. 나의 구원이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으니 끝까지 이런 자세, 이런 방식으로 일관해야 할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왜냐면 사랑이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에서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은 마음의 영역이므로 내 스스로 지켜야 하는 것이니 여기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 나오기 때문이다[잠 4:23].

(123)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기를 기도한다"[엡 3:17]고 사도는 그 교회를 위해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은 그 내용을 밝힌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계시지만 나의 사랑의 의지력으로 내 마음에 항상 모시기를 힘쓰지 않으면 안되는 성질의 일이기 때문이다. 내 스스로 그리스도를 그와 같이 마음에 모시지 않으면 나를 강제로 강압해서 계실 수는 절대로 없는 일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니 문을 열면 들어갈 것이라"[계 3:20] 하신 말씀이 이 뜻이다.

(124)한번 들어오셨다고 그냥 눌러 계시는 것 또한 아니다. 그렇게 되면 강제가 된다. 나의 마음을 떠보시기 위해서라도 항상 연속적으로 내 안에 새로 들어오시는 모습을 취하심이다. 처음 믿을 때에만 이런 동작을 취하시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나는 얼마든지 이러한 주님을 발로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은혜의 성령[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시는데]을 욕되게 할 수 있음이다[히 6:6/10:26,29]. 성령을 욕되게 하고는 영원히 용서 받지 못한다[마 12:32/행 5:4].

(125)"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주인, 소유주]로 삼으라"[벧전 3:15]는 권유 겸 경고도 같은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나의 주님이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기계적인 것도 아니고 형식적인 것도 아니고 우리의 마음으로 항상 변함 없이 매일, 매시, 어느 순간에서든 새로 결정하는 사랑의 일로써 행하는 일과(日課)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어느 때 어느 순간이든 내가 싫증을 느끼면 나는 더 이상 내 마음에 주님을 나의 주인, 소유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126)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과거에는 죽은 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따라서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생이 죽은 자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지 않았었다. 산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로서의 속박을 벗어나 산 자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능력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전의 상태처럼 나의 생명력으로서 그대로 내 안에서 작용하시는 것이다.

(127)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되어 계심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하셨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가 그리스도 없이 구원된 이들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고 단지 믿음으로서 의롭다 하심을 받아 현재 죽어 있으나 산 자가 되어 있음이다. 왜냐면 구원의 핵심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에 있으므로 바로 그런 믿음만 있으면 그리스도 오시기 전이나 후나 하나님 앞에서의 산 자가 되기에는 흠이 없는 까닭이다.

(128)따라서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그들 역시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성령을 모심으로써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한 몸'의 생명 체제 안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이라도 그들이 산 자가 되어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오신 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본질이나 당시 그들이 나타낸 믿음의 본질이나 절대적 순종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이기 때문이다.   

(129)아브라함이 자기 독자 이삭을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여 바치려고 할 때 "네가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to fear] 줄 알았다"[창 22:12] 하심이 이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처음 믿을 때 아직도 순종의 어떤 행위도 나타나기 전이지만 회개함으로써 향후 절대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겠다는 약속을 할 때, 이 하나만을 수용하시고 죄 용서와 성령 주심을 한꺼번에 베푸심과 같은 이치다. 아브라함 역시 그리스도께서 아직 오시기 전이었으므로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여부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 순종의 믿음을 그렇게 장차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으로 수용해 주심이다.

(130)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아브라함이 될 것을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은 미리부터 아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씀을 하시고 또 그와 같이 아브라함을 다루어보신 것은 우리들을 위함이니 믿음의 속성이 이런 것임을 가르치려 하심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런 믿음을 의롭다 하시는 이유를 밝히심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믿음만 있고 의지[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만 있으면 그 분량대로 얼마든지 하나님의 능력이 베풀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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