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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운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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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8) 집에 있는 교회 등록일 2016.02.27 21:33
글쓴이 김일동 조회 354

집 교회 운동-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CITHM'의 핵심은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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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죽으리라 주님을 위하여
[핍박 받는 중국교회의 노래]


    초대교회 세워지던 오순절 그 날부터
    주님을 따른 이들 한 사람 한 맘 같이
    스스로를 제물 삼아 기쁨으로 희생했네
    "이 한 몸 죽고 죽어 희생 제물됨으로써
    구원의 기쁜 소식 널리 멀리 퍼진다면
    오, 이상 더 무엇을, 무엇을 바라리요
    생명의 면류관이 우리를 기다린다"

    죽기까지 성도들은 이같이 충성하여
    그 절개 일편단심 변할 줄을 몰랐었네
    사도들은 최후까지 주님을 사랑하여
    기쁨으로 주를 따른 십자가의 길이었네
    스데반 첫 순교자 군중들의 돌팔매에
    페르샤 땅 마태는 칼에 맞아 운명했고
    양쪽 말에 양 다리가 찢겨졌던 마가였네

    참혹하게 목 매달린 의사였던 누가였고
    요한 사도 귀양 가니 밧모라는 절해고도
    바돌로매 산 채로 껍질이 벗겨졌고
    인도 땅 도마는 다섯 필 말 사이에
    사지가 찢긴 채 영광으로 들어갔다
    야고보는 헤롯왕이 머리를 잘랐었다
    또 한 사람 야고보는 톱에 켜져 운명했다

    주의 동생 야고보도 돌에 맞아 순절했다
    기둥에 결박되어 화살 맞은 유다였고
    예루살렘 시내에서 머리 잘린 맛디아다.  
    로마 황제 네로 때에 바울 역시 순절했다  
    십자가에 달린 채로 베드로는 운명했고
    빌립도 십자가에 못박힌 채 순절했고
    시몬 역시 십자가에 매달린 채 운명했다  

    오, 희생 양 길을 따른 사도들 뒤를 이어
    기꺼이 나아 가리 십자가 나도 지고
    고난의 길을 택한 사도들의 자취 따라
    영광 중에 들어가리 십자가 나도 지고
    천만 영혼 구원하는 밑거름이 될진대는
    전부를 내던지고 내 모든 것 다 버리고
    기쁨으로 주님 위해 목숨 바쳐 순절하리.

    [합창]
    주님 위해 죽으리라 주님 위해 죽으리라
    기쁨으로 주님 위해 영광 중에 순절하리

 

산 자와 죽은 자

(1)고로 내가 아무리 '내 스스로 이룬다'[빌 2:12] 해도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는 것'이니 시종일관 은혜요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다. 내가 새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출생함으로써 선물로 받은 모든 것이 아닌가. 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도 내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그리스도의 것이니, 하나님의 것으로서 나 자신을 하나님께 나는 기꺼이 드리는 것이다. 돌려드리는 것뿐이다.

(2)드렸으니 어찌 되는가. 절대 복종만이 있을 따름이다. 종이 주인에게 그렇게 하지 않는가. 죽으라면 죽는 것이다. 종 스스로 선택해서 할 아무 것도 없다. 단 나와 하나님 관계는 사랑 관계이기 때문에 내 스스로 사랑 가운데 나의 자유 의지와 선택으로 기쁨으로써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리기를 원하시고 또한 그 자세 변함이 없기를 바라시는 뜻에서 나를 시험하시는 것은 당연하다[창 22:1]. 그러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은 욥기에서처럼 하나님의 허락 아래에서 되어지는 일이다.

(3)그러나 하나님의 시험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은 내용을 같을지라도 질적으로는 하늘과 땅 차이다[약 1:13]. 하나님의 경우 마음을 떠보시는 것이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에덴낙원에서와 같이 죽이려고 덤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 욥기에서처럼 강제가 되지 않고 자발적인 것이 되도록 우리를 연단하시고 훈련시키시는 차원에서다. 징계가 여기에 포함된다[히 12:5-12].

(4)세상 종교의 소위 '자력(自力) 구원'은 과학적 사고방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간 망상(妄想)의 대표적 표본이다.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미신이 아니다. 네피림의 죽은 영혼이 귀신들이므로 이런 영들은 실제 그런 수작을 광범위하게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자연계에 속한 물질에 불과한 육체가 썩지 않고 그 육체가 그대로 영원히 간다고 믿으니 자연법칙을 무시하는 그 어떤  생각이나 말도 진리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이 미신이다.

(5)푸닥거리하는 것이 미신이 아님은 실존하는 귀신들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하기 때문이다. 점을 치는 것도 그런 귀신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기에 미신일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은 덮어놓고 그런 귀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으므로 그것이 오히려 미신이다. 소위 과학적이라는 판단 아래 저질러지는 황당한 미신들의 독선이요 아집이다. 무신론 역시 미신이다. 믿고 있으니 미신이라 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무엇이든 '존재하는 것'이 생겨나는 것이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없는 것을 가리켜 인과 관계라 한다.

(6)불교에서 말하는 '연기(緣起)"가 이 사실을 말함이다. 그러면서도 첫째 원인이신 하나님은 부정하니 모순도 보통이 아니고 이만 저만의 자가당착이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유일하게 저절로 생겨나신 것일까. 그것은 우리 이해의 한계 밖이다. 왜냐면 창조라는 것은 창조 이전의 영역과 창조 이후의 영역으로 명확히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과 인식, 인지 활동은 창조 이후의 것이므로 이전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시 말해 창조 이전의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고 피조물의 영역은 창조 이후의 것으로 국한된다.

(7)우리가 가히 미치지를 못한다. 우리의 상상(想像)으로는 창조 이전의 영역을 일정하게 개념화할 수는 있어도 실질적으로는 우리의 한계 밖이기 때문이다. "모든 현상은 무수한 원인과 조건의 상호관계에 의해 성립되어 있는 것으로서 영원한 실제가 없다는 도리"로서 불교인들은 소위 그들의 "연기(緣起)"를 정의하고 있으나, 한계 밖이고 미치지를 못하니까 없다는 것으로 섣불리 결론 내려서 그런 것이지 실제는 없는 것이 아니라 있으나 단지 우리의 영역 밖이라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다는 것뿐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일종의 미신이다.

(8)그렇게 감을 잡을 수 없다고 그 실체가 없다고 속단하는 것은 마치 자연계에 속한 자연법칙만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자연법칙을 벗어나 있는 영계를 부정하고, 가시적인 것이 있으면 반드시 불가시적인 것이 있을 수밖에 없는 삼위일체의 법칙 즉 양면성[짝]의 원리를 부정하듯이, 보이지 않으니 하나님도 없다. 보이지 않으니 영혼도 없다 하고 무조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풀어 버리려 하는 단려(短慮)의 비과학적 접근이다.

(9)실상은 '동시성'이니 '일방적'이니 하고 많은 말을 하며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은 '사랑'이라는 한 마디로 다 설명이 되고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쭙잖은 지식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마음에 교만만 들지만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아신다고 하는 것이다[고전 8:1-3].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줄 믿으니 나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상대의 뜻을 들어 주고 이루어 주려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야 너무 당연하다[요 14:21,23].

(10)그렇지 않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일 뿐이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니 어렵고 복잡한 것이 하나도 있을 까닭이 없다. 사랑하지는 않고 영생에 대한 욕심만 있다보니 말도 많고 설명도 많고 항상 거꾸로만 생각하니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으므로 그것을 억지로 논리를 갖추어 이해하려 하니 무슨 굉장한 것처럼 인식되어 학문처럼 여겨 신학(神學)이니 신학교니 하고 법석을 피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리 될 줄 아시고 미리 경고하셔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18:3] 하셨다.

(11) 무엇이 "어린 아이 같음"이냐, 사랑을 알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다. 엄마의 사랑의 품속에서 자라나 사랑 하나에는 박사다. 박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알고 사랑하니까 그 이상 알아야 하는 것도 해야 하는 것도 없는 까닭이다. 엄마 없이는 나는 못살아 하고 엄마가 없으면 우는 바로 그런 것이 엄마와 아기의 '둘의 하나됨'의 불가분성이다. 동시성이고 결단코 일방적일 수 없다는 그 뜻이다. 아이가 실종되면 그 부모는 마음이 타는 것 같아 만사를 젖혀놓고 아이 찾는 데에만 기진 맥진해진다. 바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증거다-롬 5:8] 우리는 당연히 또한 엄마 찾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뿐이다.

(12)§  개신교의 교리가 난데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만 구원을 오해하여 자기는 열 손놓고 영생하는 것만 욕심 내는 미신에 빠져 있는 반면,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천주교나 또는 독자적인 코란을 통해 창조신을 섬긴다는 이슬람교나, 모두 사람으로서 자기 이웃으로서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사람 도리라는 것쯤은 양심의 명령이므로 다 인정하는 터이지만, 다시 출생된 새 사람으로서의 자기 부인을 가르치지 않으니 미봉책일 뿐이다.

(13)자기 부인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몸과 머리의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함으로써 한 몸의 조직체를 유지해 가듯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고후 5:15]에 있다. 머리와 몸 관계가 되면 머리나 몸이나 절대로 자기의 상대를 위해서만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절대로 위함이 없다. 위할 수가 있는 구조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면 위하는 순간 그들은 더 다시는 한 몸을 지탱할 수가 없게 되는 까닭이다.

(14)오히려 그 반대파를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또는 신성 모독이라는 명분으로 무차별로 처치해 버리는 데에 도가 통해 있었음은 과거 역사의 전례가 그 증거가 되어 있다. 그렇게 반대파를 숙청하는 것은 이 세상 신(神)으로서의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마치 창조신이 다스리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이다. 역시 영생 하나만 욕심 내어 종교적인 행위에만 의존하는 일방적인 것만 강조하므로 개신교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15)불교는 앞의 지적처럼 자연법칙을 완전히 무시하는 무지 속에 있을 뿐 아니라 모순에도 차 있으니, 입산 수도하여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소위 "쉬운 불교"를 내세워 염불(念佛, 부처의 모습과 공덕을 염[念, 생각]하면서 입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 지극 정성으로 하거나 인지(認知) 감각도 없는 목석철(木石鐵)에 불과한 우상 앞에다 만물의 영장(靈長, 영묘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우두머리)이라는 인간이 우스꽝스럽게 허리 굽혀 절하기를 3000번을 하면 된다는 말을 동시에 하고 있기 때문이다.

(16)전자가 옳으면 전자만 강조할 일이요 후자가 옳으면 모두가 그런 식으로 나가야 일관성이 있다. 형편 따라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고 또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런 종잡을 수 없는 일을 누가 진심으로 신뢰하겠는가. 그럼에도 그런 것을 따르고 있으니 인간 이성(理性)에 반(反)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결론은 초자연적인 존재로서의 악한 영물의 사주를 받고 조종을 받는 것이라 함이니, 이것이 어찌 무리한 독단(獨斷, 근본적인 연구 없이 주관적인 편견으로 판단을 내림)인가.

(17)§  자기 부인은 머리와 몸 관계를 이룬 조직에서 상대[몸이면 머리, 머리는 몸이 그 상대]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을 말함이다. 무슨 자기 부정과 같은 것으로 착각하면 안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기 부정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몸을 이룬 조직 내에서 한 사람이라도 고난을 받는 일이 없이 다 희락 가운데 부귀영화를 누리면 다 똑같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18)그러나 문제는, 그 중의 단 하나라도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 한 몸으로 모두 통해 있으니까 그 나머지 지체 역시 그 고통을 일제히 함께 나누다보니까 고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 경우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은, 그 고통 당하는 한 지체[단 하나일지라도]를 위해 사는 것이 되어 그 고통을 당하는 지체가 그런 고통을 다시는 당하지 않게 되기까지 그 방법을 모색하면서[그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함께 그 고통의 짐을 나누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롬 8:22].

(19)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음의 고난 받으심이 바로 이 이치로 인한 것이다. 친히 우리와 하나 되심 즉 한 몸이 되는 관계로 들어오신 것이 사람되심이요 우리 위해 죽으심 다시 말해 우리의 죽음에 동참하심이니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통해 함께 다시 살아남을 입은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받음이 역시 같은 상황이다. 여전히 "죽은 자"로 남아 있는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그들의 죽음에 동참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0)이는 다시 무슨 의미이냐 하면 단 한 사람이라도 고통 중에 있다면 그 조직은 생명 가운데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왜냐면 생명에는 죽음의 고통이라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죽음의 세계라 한다. "죽음의 권세를 가진"[히 2:14]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세계, 곧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의 신"[고후 4:4]이요 "왕"[지배자-요 14:30]인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처음 인간[아담]을 죽음에 빠뜨려 그 죽은 자로서의 인생들 위에 군림해 있기 때문이다. 군림해 있다는 뜻은 인간[아담]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추종하여 따름으로써 스스로 그 지배 아래 들어갔다는 의미다.

(21)이 자기 부인이 사람 삶의 핵심이 되는 것이요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자기 중심이 모든 죄와 악의 근본이 됨을 주님께서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이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치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막 8:33,34] 하시고 베드로를 꾸짖으신 것이 바로 이 자기중심과 자기 부인을 가르치심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생각하시고 사람은 하나님을 생각함이다.

(22)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함이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의 법질서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 질서를 어기고 인간으로 하여금 역시 어기게 만들었고 그 결과로 이 죽음의 구렁텅이인 자연계의 생명체에 속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같은 수법으로 시험하는 자로서 우리를 파멸에 몰아넣기 이해 혈안이 되어 있는 자임을 이 사례로써 명백히 하신 것이다. 성경을 잘못 읽는 이들의 특징은 이런 경우 그리스도와 관련시켜서만 읽는 데에 있다. 그러니 자연 흥미가 없다. 나 자신에 관한 모든 내용이다. 그래서 성경을 가리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라 하는 것이다[딤후 3:15].

(23)다시 말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들을 죄다 적어놓은 병서 곧 전략 교과서인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면 곧바로 멸망으로 통한다. 사생을 건 싸움이건만 전혀 이를 감지하지 못하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랴. 베드로를 꾸짖어 "네가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신 것은 그것이 곧 멸망의 지름길이라는 경고이신 것이다. 그래서 곧 이어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나를 따라올 수 없다" 하신 것이 아닌가.

(24)그리고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을[구원할] 것이다"[막 8:34-38/마 16:24,25] 하고 재차 제자들에게 강조하신 것이다. 또한 "사람 앞에서 나를 부끄러워하면 나도 그를 부끄러워할 것"임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은 시종일관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적대시하게 되어 있다. 적대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그것은 자기 편에 귀속해 들어와 세상 종교가 되어 버렸으므로 아무 위협이 되지 않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25)다시 말해 자기 부인이 없는 경우 이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기독교"인이기는 하지만 구원은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영생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이다. 상식대로 판단해서 악마가 여전히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데 하나님의 교회에 대하여 절대로 우호적으로 나올 리가 없으니 우호적으로 나온다면 그것은 오직 단 한 가지 이유로서 세상 편이 되었으므로 미워할 이유가 없다는 그것뿐이다.

(26)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항상 회유와 위협의 양면 작전을 한다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 시험을 받을 때에는 배반하여 곧 넘어지게 한다[막 4:17/마 13:21].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 "지내는 중 이생[세상]의 염려와 재리(財利)[재리의 유혹]와 일락(逸樂)에[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이 막혀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게 한다"[마 13:22/막 4:19/눅 8:14]. 처음부터 말씀을 들어도 관심을 내지 못하는 경우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즉시 와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다[눅 8:12/마 13:19]. 마음과는 생각과 불가분이라 그 들은 바 말씀에 대하여 일차 생각해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냥 차 버리고 털어 버리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기 때문이다.

(27)진리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기를 갈망하는 심정으로 성경을 항상 가까이 할 일이다. 이를 게을리 하는 것도 내 탓이요 내 스스로 나의 영원한 운명을 정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알고 보면 이와 같이 소스라치게 놀라 마지아니할 심각하기 짝이 없는 때요 장소다. 이 한 평생의 기회다. 산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멸망을 앞두고 있는 가장 중차대한 순간에 직면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28)사람은 영생하는 자로서 처음 창조되었으나 범죄로써 죽음이 왔으므로[롬 5:12] 이 자연계에 속한 시한부 생명인 자연계에 서식하는 동식물과 같이 되어 있는데 그 자연계에 속한 시한부 생명의 세계에서 그 시한부 생명을 누릴 동안의 나름대로의 "삶"의 영광이 있는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이 나름대로의 그 한정된 생명의 영광이 있음을 가리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는"[벧전 1:24] 것이라 하였고,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눅 12:27] 하심과 같다.

(29)그러니 인간도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시한부 생명을 살고 있으니 나름대로의 삶의 영광은 있는 것으로서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을 보이며 "이 모든 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는 것"[눅 4:6]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비록 현재는 인간이 이러한 자연계에 위치해 있지만 원래는 이 세상의 시한부 생명이 인간 생명이 아니고 영계에서의 영원한 생명이 인간 본연의 삶의 영광이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절하면서 즉 자기중심의 "마귀의 일"[요일 3:8]을 따르면서 그런 것을 욕심 내고 탐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일 뿐이다.

(30)그러면 그것이 독극물과 같은 것으로서 절대로 맛보지도 만지지도 생각하지도 않아야 하는 것이라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 할 때 이 세상에서의 권세와 영광과는 완전히 등지고 그 대립 개념인 고난과 고통과 죽음밖에 없다. 그리스도 친히 바로 그러한 길을 걸으신 것이고 우리 또한 그 몸된 교회로서 같은 발자취를 따라 행하게 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그래서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귀신의 왕, 마귀]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마 10:24,25] 하셨다.

(31)그리스도를 마귀라고 하였으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당연히 같은 대접을 하게 되어 있다. 즉 "마귀들"로서 치부하여 핍박을 하고 따라서 마귀 일당은 처치하니 스스로 생각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 또는 예법이라 하게 되어 있다[요 16:2]. 특별히 적(敵) 그리스도의 때에 그러할 것이다. 또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다"[요 15:19,20] 하셨다.

(32)현재 세상의 실상, 인간의 실상, 이러한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배우는 것이다[6:44].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유일하게 할 일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하여 가르치는 것 이상으로는 없다. 진실로 들의 풀이요 꽃으로서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고 그저 그뿐이다. 한 때의 자랑과 싱싱함은 한 순간에 끝나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인생들을 죽은 자로부터 산 자로 만들고 영생의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더 큰 보람 있는 일은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것을 분토처럼 버린다 한 것이다[빌 3:7,8]. 

(33)이러한 우리의 자세에 대하여 진리와 모든 진상을 알 턱이 없는 세상은 야유를 하고 증오하는 것은 당연하다. 고로 "참고 선을 행하는"[롬 2;7] 자만이 영생으로 포상하신다. 그래서 인내로써 결실하는 것이요[눅 8:5/마 13:18/막 4:3],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하였으니 영생은 약속이기 때문이다[요일 2:25/약 1:12/2:5/히 10:36]. 생명의 법칙이 어찌하여 괴롭고 번거롭고 달갑지 않은 것이 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생명의 낙일 수밖에 없다.

(34)'먹고 마셔야 산다'는 것은 당연히 생명의 법칙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도 이 생명의 법칙을 지키는 것을 부담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낙으로 느끼는 것이니 그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삶의 즐거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먹어야 살지 하고 억지로나마 먹는 사람은 아파서 식욕이 떨어진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과음과식해서 탈이다. 자기 위주로 나가지 않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사람이 지금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 이상의 낙인 것이다.

(35)그러나 지금 여기는 죽음의 세계로서(죽음이란 것은, 자연계의 흙의 몸에 속해 있는 사실을 말한다) 먹고 마시는 등의 일로만 쾌락을 찾고 있으나, 성령으로 출생하여 이 자연계에 대립[상칭]되는 영계의 생명에 속해 있는 영적 차원에서 보면 그런 것만이 쾌락일 수 없다. 현재의 우리 인간은 영적인 것과 자연계에 속한 것을 겸하고 있으므로, 육체로는 아무리 고달프고 괴롭다 하더라도 옳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옳은 것을 행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에서 오는 보람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36)그러나 그렇게 의롭게 삶으로써 세상에서 받는 불이익과 불편과 고통이 또한 지천으로 넘쳐 나게 된다. 이 죽음의 세계에서는 자연 그럴 수밖에 없다. 죄와 죽음의 세계가 생명과 의에 속한 것과 어울릴 까닭이 없다. 의롭지 못하여[올바르게 행하지 못해] 죄가 왔고 그래서 죽음이 온 것으로서 이 세상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롬 5:12].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죄와 죽음의 세계를 지으셨고 또한 의와 생명의 세계를 만드셨으면, 의가 죄를 교화(敎化) 시키고 그래서 생명이 죽음으로 변화시킬 목적으로 둘이 조화를 이루어 아무 알력이 없다는 논리가 선다고 할 것이다.

(37)그러나 애초에 선하고[좋고] 의롭고[올바르고] 그래서 죽음이라고는 있을 수 없는 상태에서 인간이 그 자유로써 스스로 악함과 죄를 선택하여 죽음이 왔기 때문에[:12] 서로 상극이 되고 반대가 되어 원수 사이가 되어 악과 죄는 선과 의를 용납 못하고 선과 의로 말미암는 악과 죄의 죽음을 용납 못하는 것이니 자연 이 악하고 죄 많은 죽음의 세상은 의롭고 선한 생명에 속한 것을 미워하고 멀리하고 꺼려하고 때문에 이런 악의 세력은 의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탄압하고 핍박하게 되어 있다.

(38)만일 그렇지 않으면 이 '그렇지 않음' 자체가 정상이 아닌 비정상일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의와 불의, 불법은 화합하지 못하고 죄는 선을 행함과는 양립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생명이 죽음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세상에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우리가 절대로 환영 받지 못하는 까닭이다. 이 세상 지배자요 이 세상 신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가 원수 사이인 것과[요 15:18,19] 전쟁 중에 있음은 당연하다.

(39)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세상에서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이런 역할은 세상을 착하고 생명의 세계로 바꾼다는 뜻이 아니라[오히려 세상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함께 망하게 되어 있다] 이 세상 중에서 구원 받을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니 그들이 이러한 빛과 소금 역할을 보고 회개하여 악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만드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하신 것이다.

(40)이 말씀을 하시면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다.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지만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18-20] 하신 것이다.

(41)그리고 또한 경고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너희 의(義)가 서기관과 바리새파 사람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0] 하셨으니,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들의 모든 행위는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뿐이요" "선생"이라 "지도자"라 "아버지"라 하는 소리만 듣기 좋아하는 것이다[23:3-9]. 얼마나 타락했으면 소위 기독교방송이라는 데에서, '소돔 고모라의 파멸'로 만대에 경고를 내리신 동성끼리의 성행위를 "인권보호"라는 명목으로 비호하고 있들 정도다.

(42)이와 같은 성경의 엄중한 가르침과 경고를 무시하는 오늘날의 개신교 사람들은 오히려 세상 사람들로서 공자를 숭배하는 이들이나 불교의 양심적인 것과 사람 사는 도리를 강조하는 이들에게 가서 최소한 무릎 꿇고 배워야 겨우 천국에 들어갈까 말까 하는 것이다. 왜냐면 인륜으로나 도덕적인 면에서나 완벽해야 하는 것이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성경은 명백히 가르치기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딤전 5:8]라 한 것이다.

(43)"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가 천국에 들어갈 리 없다. 그렇게 된다면 세상 사람들이 소위 믿음이 있다 하고 하나님도 알고 그리스도도 알고 성경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들보다 덜 양심적이고 인간의 도리를 알지 못하는 "기독교인"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만든 종교 교리를 더 믿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런 종교를 만들어놓은 것은, 그렇게 자기 만든 종교 교리를 인생들이 따르면 그 누구도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을 그 자신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44)다시 말해 성경을 완전히 거꾸로 해석하여 소위 믿기만 함으로써 이미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번 구원 받으면 차후의 행동과는 관계 없이 천국 행이라고 믿는 관계로, 그렇지 않아도 악한 인생의 마음인데 힘써 선을 행하려 할 리가 없고 양심 따라 살려고 할 리 없고 이 세상을 사랑하여 이 세상에서 소위 "하나님 축복 받아" 잘 산다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교리에 심취하여 양심의 가책은 "육신"[롬 7:14-8:13] 타령으로 얼버무리고, 소위 "바울 자신도 그런 육신 가운데에서 허덕였다"는 식으로 악마의 속임수에 말려들어가 자멸을 재촉하는 것이다.

(45)오늘날도 여전한 "서기관과 바리새 파 사람들"이 사람들을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마 23:15] 하는 것이다. "화 있으라, 너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하시는 주님의 경고는 오늘날도 여전히 변함없이 울리건만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라고 책망 받아도 날 때부터 악인으로 태어난 이들은 네피림 외에는 그리고 처음부터 "빛을 미워하는"[요 3:20] 이들 외에는 없다. 아직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기회는 있으니 성경에로 돌아올 일이다.

(46)앞에서 누누이 설명한 대로 사람[아담]이 사람 삶의 도리[머리되시는 하나님께 몸으로서의 배정 받은 역할을 충실히 하는]를 지키지 않음으로써 죄를 짓고 죽음에 이르렀으니[롬 5:12], 우리를 구원하심은 아담처럼 되지 말고 그리고 아담이 영향을 받아 그렇게 했었던 멸망의 아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되지 말고 사람 사는 도리로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지키도록 하려 하시는 목적인 것이다[롬 14:7-9/고후 5:15].

(47)이것이 선을 행함이요 의를 행함[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이며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함"[히 1:9]이다. 머리와 몸의 구조로서 사람 사는 것이 최대의 행복을 보장하는 방법이기에 옳고[義] 좋은[善] 것이다. 하나님께서 머리이시고 그 피조물[인간처럼 인격성을 지니고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은 모두 그 몸[의 각 지체]으로 조직되어 있음이다. 그래서 각자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함으로써 이웃을 위하게 되고 바로 그런 결과가 나 자신으로 하여금 곱절[이웃의 숫자만큼이나]로 된 나 자신을 향유하게 만듦이다.

(48)이와 같이 생명에 이르는[롬 2:7,10] 선을 행함과 의를 행함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차단시켜 믿음의 의미를 전혀 엉뚱한 것으로 해석하게 하여 많은 사람을 속여 죽음 가운데 가두어 놓을 뿐 아니라 진리에 이르러 의롭게 살고자 한 이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해 왔다. 그래서 이 시대, 이 세상을 시험의 때, 시험 무대라 하는 것이다. 이런 불이익을 받고 있음에도 그러나 의를 사랑하기 때문에 과연 "참고 선을 행함"[롬 2:7]으로써 그 신념대로 행하느냐 여부가 저울질되는 까닭이다.

(49)인생은 자연계에 속한 것과 영계에 속한 것 양쪽에 걸쳐 있으므로 이런 양면성을 가리켜, 주님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당시 유대인들은 우리처럼 곡식의 낟알을 익혀 먹는 "밥"이 아니라 가루를 만들어 쪄서 먹는 '떡'이었기 때문에 그 쪽의 식문화를 따른 "bread"로 번역되어 있으나 두루 알기 쉽게 "먹는 것"이라 하는 것이 좋다.

(50)육신이므로 먹고 마셔야 산다. 그러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유혹하는 것처럼 먹는 것만으로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요 동시에 중요한 것은 우리 영혼을 살리시는 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다. 육신은 썩게 되어 있으나 영혼은 영원하니 영원한 것을 따라 행함이 우선적이니 그래야 육체도 따라서 영생함이다. 고로 만일에 먹는 것이 뜻이 아니라면 먹지 않아야 함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까지 먹을 이유는 없다.

(51)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의 의(義)와 평안과 희락"[14:17]이라 한 것이다. 여기서 "의"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함"[마 6:33]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요 4:34]이다. 이를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먹을 것 곧 "양식"[:34]이라 하셨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았으니 당연히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함"[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이 우리의 먹을 양식인 것이다.

(52)그렇다고 하나님 나라에서는 먹고 마시는 것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다시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 하신 것과 같이, 먹고 마심은 있되 그것이 이 세상 자연계에서 먹고 마심이 차지하는 비중처럼 생명 유지에 필요 불가결한 그런 차원은 아닌 것이다. 생명의 낙을 무한량으로 즐기는 차원이다. 나를 위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모든 것이 합력(合力)하여 내게 선[善, 좋은 것]을 이루는 것이다[롬 8:28].

(53)그러나 당연히 조건이 붙는 것이니, 사랑과 생명의 법칙 곧 둘이 하나 되는 이치[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에서 반드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야"[:28] 하는 것이다. 이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상대를 위함으로써 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고후 5:15/롬 14:7-9] 함을 뜻한다. 사랑은 원래 말보다는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니[요일 3:18] 자기 자신을 위해 살 때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모두 거짓으로 판명 나는 것이다.

(54)그러므로 이웃[그리스도를 한 머리로 모신 믿음의 형제]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 즉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16]. 이는 천국에서나 현재 이 세상에서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선을 행함이요 의를 행함이 아닌가[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55)그래서 요한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안다"[:16] 하였다. 자기를 위하시지 않는 그리스도의 본을 보고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상대의 "뜻대로 행함"[마 7:21]이니 이는 자기 뜻대로 행하지 않음이요 따라서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음"[고후 5:15]이다. 사람이 두 방향을 동시에 대할 수 없다. 동을 대하면 서를 등지게 마련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마 7:21].

(56)머리의 지시대로 따르지 않으면서 한 몸으로서의 머리와 몸 관계를 유지할 수 없음이다. 우리의 구원 얻는 믿음이 이와 같은 절대적인 순종을 의미하므로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라 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성경은 이와 같이 명확히 밝히고 있다. 누구든지 믿노라 하고 사랑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을 때는 그것이 믿음이 아니고 자기 생각대로 믿는다고 하는 것이며 가짜이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시지 않는다 즉 성령 받아 모신 적이 없다고 단정, 단언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이다.

(57)때문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 줄을 내 스스로 알"[:5,6]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하면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스스로 확증할 수 없다면, "너희가 버림 받은 자"[:56]라고 바울 사도는 주저없이 단정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는 아주 중요하니, 모든 나무는 그 열매를 보고 알 수 있게 되어 있음이다[눅 6:44].

(58)"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으로서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한 대로,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증거는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니 이는 달리 표현하면 다시는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다.

(59)"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은 내가 주체가 되어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을 말함이다. 내가 내 육체에 있으니 내가 당연히 주체다. 이렇게 되어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 줄을 내 스스로 알"[고후 13:5,6] 수 있음이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심을 내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즉 내가 항상 의식적으로 나를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 때 그리스도께서는 내 안에 계심이다.

(60)그리고 주님께서는 자신을 영원히 내게 주신 선물로서 계시므로 주님께서 주체적으로 하시는 것은 당신을 위하심이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해 사시고 나를 위하심이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내 이름이 홍길동이라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홍길동이가 사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둘이 하나되어 있는 삶의 구조다.

(61)이 동시성(同時性)은 성경이 확고하게 나타내고 있으니, 다윗이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한다"[시 16:8] 한 것을, 성령 충만했던 당시의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으로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신다"[행 2:25] 한 것이다. 즉 주님 편에서는 나를 위해서 내 앞에 계시는데, 내 편에서는 내 스스로 주님을 섬기기 위해 그렇게 내 앞에 모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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