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HOME

3운법칙

  • 3운법칙 계시판

Home > 3운법칙 > 3운법칙 게시판

제목 (끝) 집에 있는 교회 등록일 2016.02.27 21:36
글쓴이 김일동 조회 349

 

(62)내 앞에 계시는 모양은 똑같은데 주님 편에서 보는 모습, 내 편에서 보는 모습이 각기 다르다. 주님으로 말하면 나를 위하시는 위치에 계시고 나로 말하면 주님을 위하는 위치에 있으니, 갑의 위치에서 보면 을을 안고 있는 것이요 을의 위치에서 보면 갑을 업고 있는 것이다. 똑같이 움직이는 동시성이다. 그러므로 명백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께서 항상 내 안에 계시게 하는 방법은 내가 항상 의식적으로 나를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한다는 일편단심으로 매일의 삶을 사는 데에 있다.

(63)한 순간이라도 주님을 외면하고 나 자신을 위할 때는 하시라도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의 아들을 밟는"[히 6:6/10:26,29] 위기 일발의 순간인 줄 알고 꿈틀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얼른 그 순간, 그 지경을 피하고 정상적으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는 정 위치로 돌아서는 것이 바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빌 2:12] 일이다.

(64)그래서 성경을 가리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딤후 3:15] 한 것이다. 구원을 한번 받는 것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면 "구원에 이르게 되는 지혜"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 받고 성령에 참예한 바가 된[성령을 받은] 다음에도[고전 10:2-4] 모세 인도하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에 악을 즐겨하다가[:6], "탐욕은 우상 숭배인데"[골 3:5] "우상 숭배하다가"[고전 10:7], 그리고 "간음하다가"[:8], 주님을 시험하다가"[:9], "원망하다가"[:10],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던"[고전 10:5] 것처럼, 세례 받고 성령 받고 다 했으나 범죄하는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마 7:21] 중도에 "멸망"하는 것이다.

(65)그와 같이 하나님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일을 하지 않게 하는 지혜를 성경이 준다는 뜻이다. 물론 그런 지혜를 갈망하고 그 지혜를 따라 행하기로 작정하는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여기서의 요점은 그와 같이 악을 즐겨하는 아무리 세례 받아 죄 용서가 되고 성령을 받아 새 사람이 되어 새 생명 가운데 있어도 옛 사람의 삶의 방식을 따라 자기중심으로 나가면 가나안 복된 땅 곧 천국으로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66)이와 같이 성경대로 바로 가르치지 않고 육신에게 사로잡힌[롬 7:24] 그대로 있어 죄를 지어도 구원은 받는다 하고 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하는 것이 사도 바울 자신의 믿은 후의 체험이라고 고집하니, 그와 같은 이스라엘 가나안 행군(行軍)이 "우리의 거울이 되어"[고전 10:7,11] 있다는 경고를 정면 위해하는 것이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때가 넘어질까 조심하는 때인 것이다[:12]. 이것도 양면성이고 동시성이라 할까. 항상 넘어질까 조심하는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선 줄로 생각할 수 있다. 또 섰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안되니 어느 순간에든 넘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한 것은 실제 그렇게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67)그러나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우리에게 당한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하시어[faithful]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시어 우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13] 것이다. 고로 모세 인도 아래 이스라엘 백성이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 가나안 땅으로 침공하는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민족 이동을 한 것처럼, 우리의 복음 전파의 일 그리고 이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이 우리의 일상생활로써 나타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68)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종교가 아니라 일상생활이라 하는 것이다. 한 순간, 한 순간 그렇게 그리스도를 나로서는 틀림없이 모시는 것이 되어야 바울의 이상과 같은 경고대로 내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하는 것이 된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절대로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되어 있다[롬 14:7-9/고후 5:15].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살고 이웃 곧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 사는 것이다.

(69)하나님 창조하신 인간 피조물들을 위함이니, 이를 위해서는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세상 모든 인생들에게 알려 주어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출생하게 하는 일이다. 다시 출생하도록 만들어 주는 일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희소식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이 종료되는 날이 동시에 이 세상도 종료되는 날이라고 명백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24:14].

선을 행함

(70)"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는 것이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하심도 같은 뜻이다[눅 6:45].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악이요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선이다. 이것이 "선한 사람[善人, 義人]"에 대한 성경의 정의(定義)다. 고로 다시 경고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불러 '주님, 주님'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46] 하셨고,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도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홍수가 나 부딪히면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다"[:49] 하셨다.

(71)다시 말해 실제가 아닌 '신기루 믿음'이다. 뜬 구름 잡는 식의 구원이요 믿음이다. 실제가 아니니 완전한 자기 기만이다. 이런 불행이 어디 있는가. 이와 같이 '선인 것'과 선이 아닌 것, '믿음'인 것과 믿음이 아닌 것, '구원'인 것과 구원이 아닌 것을 성경은 명백히 가려내고 있다. 여기에는 그 어떤 혼돈도 애매 모호함도 있을 수 없다. 대낮 같이 밝아 헷갈릴 일도 없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절대로 "핑계치 못한다"[롬 1:20]. 무리하게 핑계 대려 하면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해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 버린다[:21,22].

(72)이런 말을 하면 항상 대두되는 것이 "그러면 이 세상에 어떻게 살까?" 하는 걱정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 하고 물러갔던 많은 제자들이 바로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생 혹은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 살면서도 거기 더 보태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죽지 않고 사는 데에 있다고 착각한 것이고 이 고집을 그리스도의 그와 같은 명백한 가르치심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않은 것이다.

(73)하나님의 가르치심은 이 세상은 숫제 사람 사는 곳이 아니니 살지 말라는 것이다. 사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것이니 여기는 마귀가 왕 노릇하는 데요 죽음의 세계라는 것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바르게 일러 주어도 듣지 않으면 그 때는 구제불능이다. 정승 감사라도 제 싫으면 그만이다. 살지 말라고 경고를 하심에도 기어코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먹지 말라고 해도 굳이 그것을 따먹고 죽음에 이른 그 동일한 결과를 내는 수밖에 없다.

(7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시는" 것이다[:24]. 간단히 말해 멸망이니 이는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부인할 것이라" 하신 그대로다[딤후 2:12/마 10:32]. 여기서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신다"[마 10:32] 하셨고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는다"[눅 12:8] 하셨다. 이는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면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게 된다"[마 13:47,48] 하심과 같다.

(75)그리스도께서 시인하시는 사람들만 골라 천사들이 그렇게 "좋은 그릇에 담는" 것이다. "세상 끝에도 이러할 것이니,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을 때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마 13:49,50] 하신 그대로다. 이런 악한 부조리의 세상이 하루 속히 끝나기를 바라거든 남은 여생을 이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분부를 온 세상에 알려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게 하는 데에만 오로지 힘쓸 일이다.

(76)그것이 이 불의한 세상 종료를 재촉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렇지 않고 이 세상 낙에 휩쓸려 시간을 허비하면 주님의 소유로서의 나의 시간을 무엄하게 낭비하는 것이 되어 그 대가를 면치 못한다[요 12:25].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은 것이다[딤전 5:6]. 이로써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할 일이 명백히 드러난다. 우리의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 첫째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받기 위한 회개, 둘째도 셋째도 그것뿐이다.

(77)이 뜻을 망각하는 이는 그리스도의 사람일 수가 없다. 왜냐면 그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까닭이다[마 7:2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하다"는 핑계를 듣지 않으신다. 왜냐면 우리가 구원 받음으로써 이런 연약함에서는 벌써 벗어나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새  창조"[고후 5:17]이고 "다시 출생함"[요 3:3]이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출생하는데"[요 3:5,6] 연약한 자로 출생할 리 없다. 하나님의 새 창조인데 연약한 자로 창조하실 리 없다.

(78)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우리의 믿음으로써만 베푸신 크신 능력을 따라 우리가 열심히 살기를 바라신다. 연약한 자가 아닌 강한 자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어린 아이 같이"[마 18:3] 사랑함에 핵심이 있으니, 즉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함"[22:37]이요 이웃을 사랑하되 나 자신처럼 사랑함이다. 반(半) 마음으로 사랑할 때는 사랑하는 것도 아니요 그것은 억지가 된다. 이런 억지로 하는 경우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움직일 때는 결국 필연적으로 그 반 마음마저 아주 버리게 되어 있다.

(79)"내가 네 행위를 아니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한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칠 것이다"[계 3:15,16] 경고하심과 같다.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가. "사랑"은 항상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주인 의식으로 움직여야 함을 명심할 일이다. 즉 내 스스로 좋아서 하는 것이므로 마지못해 억지로 부득이 해서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80)성경에서는 이런 데에까지 세세하게 아주 자상하게 말씀하시고 경고하시고 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성경"이다[딤후 3:15]. 성경에 보면, 구약 역대 이스라엘과 유대 왕들 가운데 이같이 미적지근하여 피동적으로 움직인 왕은[즉 선지자가 곁에 있어 항상 경고할 때는 잘 따랐으나 그 선지자가 죽어 없어지면 자기 마음대로 행하여 하나님의 기존 말씀을 따르지 않은] 형통하지 못하고 결국 범죄하여 그 영혼은 망했던 것을 알게 된다. 우리에게 주는 경고다.

(81)"신실하던 도시가 어찌하여 창녀(娼女)가 되었는고!"[사 1:21], "주님의 거룩한 성읍들이 황야(荒野)가 되었으며 시온이 황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주님을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聖殿)이 불에 탔으며 우리의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폐하였습니다"[사 64:10,11] 한 성경의 경고가 각자 자신에게 임하게 되지 않도록 항상 극력 조심할 일이다[고전 10:12].

(82)2003년 11월 10일자 런던의 더타임즈(The Times)에서 영국 얼스터[Urlster] 대학교 심리학교수 리처드 린[Richard Lynn]이 핀란드 모교수와의 합동으로 특이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는데, 국가별 국민 지능지수로 185개국 중에서 홍콩이 1위, 한국이 2위, 북한과 일본을 3위로 그 등급을 매기는 등 자국이나 자국 계열의 서구 제국보다 동북아 국가의 민족이 지능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학자적 양심으로 솔직히 드러내고 있다.

(83)홍콩은 도시국가를 형성하고 있고 또 중국에 속했으니 국가별로 따지면 한민족이 최고라는 결론이다. 한국은 경제 개발로 부유한 국가군 중에 끼어 있어 그렇다 하더라도 가난한 북한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한 수준에 올라 있는 것으로 취급했으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수하니까 어쩌라는 말이냐. 자기 도취에 빠짐으로써 쉬이 멸망하라는 말밖에 더 되는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복음 전파에 온 국민이 적극 나서라는 것이다. 나라의 절반이라도 해외에 나아가 진취적 기상으로 그 곳에서 개척할 일이다. 그 개척의 가장 좋은 예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전파다.

(84)§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모든 과학적 진리의 본령(本領)이다. 또 현대가 과학시대라 하지만 실제 이 자연계에 관한 것만 해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은 모든 것을 미리 말하고 앞서 말하는데, 이와 같이 불완전하게 그리고 부분적으로만 알 것뿐인 우리 주제에, 성경이 과학적 진리의 본령이라는 표현에 반론을 제기할 이유도 없다. 이 우주와 만유의 모든 질서 그 원리와 법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85()그 원리와 법칙이 창조에서 나온 것이지 어디서 나왔다는 말인가. 만유가 창조됨으로써 그 생성과 존립의 원리가 확립된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미리부터 말하고 있는 것을 과거와 현재밖에 모르는[그것도, 현재까지 알고 있는 정도까지만 아는] 인간이 어찌 가타부타 할 수 있으리요. 남녀는 대칭성으로서 무엇이든 대칭형을 이루고 있을 때는 '주[主]'가 있고 그 '주'에 대한 '종[從]'이 있다.

(86)다시 말해 그 선후[先後]가 엄격히 구분된다. 대칭형에서는 '선'이 없으면 '후'도 없으니 따라서 반드시 그 선, 후라는 경계가 뚜렷하다. 먼저 있는 것이 있어야 그 먼저 있는 것을 축으로 해서 그 대칭형이 이루어진다는 그런 인과의 법칙이다. 따라서 남녀가 대칭성적 성격을 띠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 한 그 선후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니, 성경은 남자가 먼저고 그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온 것이고 여자가 남자를 위해 존재하고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87)우열의 문제가 아니고 상호 조화와 보완의 관계이니 역할 분담이다. 남자는 지성이요 여자는 감성이라고 특질면으로 표현할 수 있고 여자는 감성에서 남성보다 우위다. 그리고 상식적으로도 한 몸되어 더불어 사는 둘의 관계로서 대등할 수는 없고 주종관계이니 이것은 둘이 하나로 움직이려면 필연적이다. 즉 머리와 몸이라야 그 한 몸이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 중 하나에서 다른 하나가 생성되었기 때문에 대칭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88)실질적으로 그리 되지 못하면 계약상으로라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네가 앞서고 나는 따르겠다는 의미의 묵계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남녀 관계는 실질면으로 그렇다. 즉 남자가 머리요 여자가 그 몸의 역할이다. 머리는 몸을 인도하고 몸은 머리를 따르는 것이다. 지능지수가 남자가 여자보다 일반적으로 평균해서 4 정도 앞선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데, 지능적으로 더 나아야 그렇지 못한 쪽을 인도하고 앞장 설 수 있는 생래적 이유 때문이다.

(89)남성의 지성처럼 여성의 이 감성은 그 이유가 있다. 육아(育兒)로 대표되는 가정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런 서로 침범할 수 없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남성이 여성 역할을 할 수 없고 여성이 남성 역할을 할 수 없다. 이래서 보완관계요 일치 조화라고 하는 것이다. 신체적 요건은 어떤가. 자기 역할에 알맞게 갖추어진 신체적 특성임을 알 수 있다. 즉 여성은 감성에 맞게, 남성은 지성에 맞게 되어 있는 신체 구조다.

(90)다시 말해 여자는 가정적이기 때문에 그에 적합한 부드러운 신체적 조건이니, 앞장 서서 여하한 악조건이라도 돌파하는 남자의 강인한 신체적 조건과는 같지 않음이 당연하다. 고로 둘이 육체적으로 하나되는 요건에서, 필요불가결한 각기 그 맡은 구실에 따라 거기 적합하게 구조상으로 상호 짜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열(優劣)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보완 관계다. 혼전 순결을 묻는 질문에 중국, 일본, 한국 등 몇 개 나라 청소년들이 대답한 것을 보면 혼전 순결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남학생 비율은 단연 한국이 으뜸인데 비해 여학생은 중국에 뒤졌다고 한다.

(91)소위 양성 평등이 낳은 서글픈 부산물이다. 혼전 순결은 가장 기본적인 건전 상식에 속한다. 우리 선조들이 "예의 바르다"는 평판을 듣게 된 사실과도 통한다. 인륜이나 도덕이니 하는 것도 이런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간의 보다 나은 질적 삶을 영위하고 유지하려는 최소한의 규범이다. 우리 민족은 그런 선천적인 우수한 지능으로써 그런 보편 타당성이 있는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뜻에서 군자지국(君子之國)이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가정을 사회 계약의 기본으로, 또는 집단의 가장 시초가 되는 단위로 인식한다면 단체에 왜 단체장(團體長)이 있는지 다시 배울 일이다.

(92)그것이 남자건 여자건 개의치 않는다. 다만 가정에 왜 가장(家長)이 있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남성 우월주의를 주창하는 말이 아니다. 단지 자연만물의 합당한 사리(事理)를 따라 내리는 결론이다. 하나님은 '상호 보완적인 측면에서 평등하게' 창조하셨다. 다시 말해 개성(個性)이라는 것은 지극히 '평등'하지 못한 것이다. 들쭉날쭉이다. 이것이 지체(肢體)의 개념이다. 같은 지체 안에서도 각 부분의 역할이 또 다르다. 각 부분의 어느 한 쪽만이 우월하게 또는 열악하도록 하셔서 평형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만드시지 않았다. 서로를 보완함으로써 평등이 되도록 하셨다.

(93)남은 아무도 갖지 않은 자기만의 독보, 독자적인 개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개성에서는 자기가 최고이고 주인이다. 바로 이런 면에서 모두는 평등한 것이다. 개인적인 가치가 없으면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면 기계적인 다량 생산에서 규격이 꼭 같은 것으로 생명체가 아닌 물건일 때의 경우다. 그래서 "양성 평등"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의 소치다. 이런 무식함을 깨닫지 못하는 현대인이니 물질문명에서는 옛 사람보다 앞섰으나 정신적이고 지적인 양식(良識)의 측면에서는 반대로 퇴화, 퇴보하고 있음이 입증되고 있다.

(94)남자든 여자든 반드시 둘 중 하나는 머리이다. 다시 말해 먼저 존재하는 것이 있고 그 다음 순서로 생겨난 것이 있게 마련이다. 또한 그 다음 존재하게 되는 것은 반드시 먼저 존재한 것으로부터 파생(派生)하는 것이 필연이다. 제각기 저절로 생겨나는 법은 없다. 이런 소위 양성평등이라는 것 역시 오늘날 이 세상이 악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 아래 지배당하고 있는 실태의 한 단면도다. 왜냐면 인간의 건전한 상식과 양식이 외부적 압력[인간을 초월하는]을 통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증거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95)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성경의 평가절하, 그리스도의 폄훼를 목적함이다. 왜냐면 자기의 적 그리스도를 출현시키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말살하고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성경을 부분적으로[자기 목적을 위해 악용할 것만 남겨두고] 훼손시킬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아담]을 만물을 다스리는 수장(首長)으로 창조하셨지만 이 인간이 교만해지지 않도록, 인간보다 나중에 창조되어 인간 아래에 있지만 지식 면에서는 인간보다 월등하여 인간을 보필, 보좌하도록 영물들을 창조하심으로써 균형을 이루게 하셨음을 보아서도 이 사실은 확인된다.

(96)또 첫 사람 아담과 한 몸을 이룰 여자는 그런 영물보다 나중에 창조하심으로써 역시 인간과 영물 간의 균형을 꾀하셨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완벽하여 빈 틈이 없으시다. 그러나 영원한 세계에서는 더 이상 성(性) 구별이 없다. 자연계에서의 성 관념도 조화와 질서 차원이다. 남자는 여자를 자기 몸 같이 사랑하고 여자는 남자를 자기 머리 같이 여겨 따르면 아무 부조화가 없다. 남자가 여자를 그와 같이 사랑하지 않는다 해서 여자마저 남자와 동등이란 논리를 내세움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자식이 부모에게 반발하여 부모 자식 간의 연을 끊으려는 것과 같은 무리이지 결코 순리가 아니다.

(97)자기 정체를 바로 찾아내고 자기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못살고 핍박 받는 민족으로 울분을 삭여왔다. 움츠리고 기를 펴지 못했다. 우리의 민족적 수난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집트 예속(隸屬)과도 같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얽매여 있던 우리의 영적 실상과 같다. 따라서 우리의 8.15 광복은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과 같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의 자유 해방"[롬 8:2]과 같다고 하겠다.

(98)스스로 그렇게 열등하다고는 여기지 않았지만 남들이 또한 우수하다고 평가해 준 적도 없었던 우리 민족인데, 이제 어느 정도 우리 자질이 최고 수준급이라 인정 받기에 이르렀다. 이제 자기 실력을 알고 정확한 자기 진단을 통하여 우리의 할 일을 깨달을 때가 왔으니 곧 진리에 대한 증언자의 역할이다. 예로부터 정신문화를 개발하여 지켜 온 우리는 서구 세계만 아니라 범세계적 의미에서 정신적 지주(支柱)로 자리 매김 할 때가 왔다.

(99)남녀평등이니 동성행위니 하는 따위의 그런 퇴폐적인 것으로 세상이 오염되었으나 더 이상 여기에 덩달아 흔들리지 말고 의연하게 우리의 정신문화를 꽃피우고 지켜 세계의 양심 역할을 할 때가 왔으니 세계의 선도자(先導者) 역할을 할 시대가 온 것이다. 세계가 그러하니 우리도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의 사대주의를 청산할 때가 온 것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 능력과 자질을 알았으니 세계가 다 그러하더라도 그런 세계를 무작정 따르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솔선수범으로 홀로일지라도 바른 길을 택하여 몸소 실천해 보이며 앞장 서는 선구자적 포부로써 오히려 세계가 따라오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100)온 세계가 모두 남녀평등으로 아우성 치더라도 온 세계의 돌팔매를 당할지라도 그것은 종국에 인간생활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당당히 외치는 그런 선구자적 자세의 민족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대가족제"라는 예에서도 보듯이, 세계가 그 장점을 알고 따라 오려는 것조차도 우리 발로 스스로 걷어차 버리는 망발을 지금까지는 서슴지 않았다. 개인주의로 몸살을 겪는 서구인(西歐人)들은 우리의 대가족제란 생활문화를 흠모해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서구화라는 사대주의에 젖어 우리 스스로 그 미덕을 발로 걷어차 버린지 오래다.

(101)정신적 선진(先進)과 물질적 선진을 혼동한 때문이요 그래서 우리의 정신적 선진을 물질적 후진으로 착각하고 오해한 결과다. 모두가 애꾸눈인 판에 자기의 정상적인 눈이 손가락질 당한다 해서 자기 스스로 그들처럼 애꾸눈을 만들어 버리는 "애꾸눈 원숭이의 우화(寓話)"처럼 되고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무나 그동안 비하하고 폄훼하였기 때문에 빚어진 비극적 혼란이다. 그러나 이제 오늘이라는 시점을 일대 전환점으로 해서 각자 자기 혁명의 첫걸음을 내디뎌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일찍이 김구 선생이 외치지 않았던가.

(102)"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인류가 현재 불행에 처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뿐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 단군의 이상이 바로 이것이라 믿는다."

(103)백범은 웃으면 한없이 마음씨 좋은 이웃 할아버지 같지만 그 기골부터가 백만대군을 호령하는 장상(將相)이다. 그러나 그동안의 풍진성상 속에서 그가 터득한 지혜는, 무릇 국가는 문무를 겸하지 않으면 안되고 특별히 우리는 그러한 정신면에서 세계를 제패하고 정신문화적인 측면에서 계속 말 달려 앞서 나아가는 세계의 선구자가 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에서 그 역사적 민족적 사명을 이같이 피끓는 어조로 강조하게 만들었으니, 과연 어느 시대에서나 통하는 우국충정의 절규요 호소다.

(104)개인주의로써 "교만하여 합심하지 못하는 불화 때문에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다"고 외친 안중근 의사의 이 말은, 그가 이등박문을 죽이기 한 해 전 1908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의 해주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나온 것이다. 아무리 가는 것이라도 그것을 여러 겹으로 꼲으면 튼튼한 줄이 된다고 말했다(전 4:12). 이승만 전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다. 안창호 선생은 미국에 가서, 동포들이 구경하는 미국인들 앞에 대로변에서 서로 상투를 쥐고 흔들며 싸우는 참담한 현실을 대하고 장탄식을 했다.

(105)이들 선각자들의 한결같이 외친 말은 우리 민족의 대동단결이다. 나라가 외적에게 몽땅 빼앗긴 그런 때에도 임시정부 내 요인들이 서로 감투싸움을 했다.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 무마 정책에서 각 민족 가운데 인물을 선발해 부주석 직을 줄 때도 조선족은 워낙 시기하고 감투 싸움을 잘 하는지라 빼어 버렸을 정도다. 머리 좋기로 세계에서 으뜸 간다지만 그 머리 좋은 것이 빗나가, 남에게 뒤지지 않고 자기가 머리되려는 개인주의가 어느 민족보다 드세다.

(106)몽골인들이 그런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지만, 그러나 같은 몽골계라도 베트남인들은 단결심 강하기로 이름이 나 있다. 중국의 끊임없는 침입도 막아냈고 당시 몽골의 세계정복 야욕을 유일하게 막아낸 단 하나의 아시아 국가다. 잠시 프랑스에게 장악되기도 했으나 결국 그 서구세력을 몰아냈고 미국이라는 거대한 군사대국도 격퇴했다. 그런 점에서 베트남에게 머리 숙이고 겸손히 배워야 한다.

(107)우리는 단결심 약하기로는 예부터 정평이 나 있다. 한반도에서 세 갈래가 되어 싸우더니 통일을 해도 우리들끼리 싸워 강자가 군림하는 그런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지 않고 외세의 힘을 빌려서라도 자기가 으뜸이 되겠다는 저주 받을 생각으로 일관하여 신라는 중국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 고구려를 치고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형제 싸움을 벌이다가 그들 중 하나가 분풀이한다고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와서는 제 조국을 치는 망동을 부리다가 결국 망했다.

(108)백제가 망한 뒤로는 백제의 유민이 일본의 군대를 끌고 와 신라를 공격하는 그런 한심한 작태를 골고루 연출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임진왜란이라는 전무후무한 국난을 겪으면서도 사색당쟁을 일삼으니 못난 선조까지도 참다못해 한마디 하기를 "나라가 이 꼴인데도 경들은 아직도 당파 싸움인가" 했다. 이런 모래알 같이 뿔뿔이 흩어지는 주제에 아무리 세계 일등 가는 머리 좋은 국민이 된들 무슨 소용인가.

(109)머리는 보통 수준이라도 단결 잘하는 민족을 절대로 이길 재주가 없다. 역사가 그렇게 증명해 주고 있는 터에 갑자기 무슨 범국민 운동을 벌인다고 이 저주받을 국민성을 타파할 것인가. 오직 하나님을 알고 그 말씀을 깨달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뭉칠 수 있다. 뭉쳐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예로부터 "노래 잘하고 춤 잘 춘다" 했으니 예술적 감각이 발달한 민족이기도 하다. 지금 '한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도 그 증거다.

(110)예술은 무엇보다 직감력이다. 달리 표현하면 영감(靈感)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로 말미암음이니 역시 이런 직감력이 다른 무엇에도 우선하여 작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민족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느 나라 어느 민족보다 빨리 흡수하고 완전 소화시켜 이 말씀을 온 세계 만방에 널리 전파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기에 적격이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모든 추잡한 개인 욕심이 봄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이다.

(111)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계 정복에 나서는 장쾌한 말발굽소리를 울려야 할 때가 왔다. 징기스칸은 무력으로 세계정복의 길에 나서 서쪽으로 나아가서 다시 동쪽으로 돌이켰으나 우리 민족은 그보다 오랜 세월 전에 정신적인 것 다시 말해 빛을 찾아 진리를 찾아 동쪽으로 나아가 이제 그 후대인 우리 세대에 이르러 다시 왔던 길을 돌이켜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온 인류가 참으로 사는 길'을 전파하는 전도자(傳道者), 진리의 증언자가 되어 세계를 정복할 때가 왔다.

(112)이러한 좋은 인적 자원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길로 나설 일이다. 지능적으로 세계 최고라는 사실은 잘못하면 실속없는 자만심만 부추긴다. 오직 이런 사실을 강조하는 까닭은 세계에서 내로라는 열강에 주눅들지 말고 진정한 문화국으로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지고 세계에서 우뚝 서려는 기백을 함양하자는 것이다. 자랑스러운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기타 여러 가지 일도 성공리에 치렀다.

(113)이 귀중한 경험의 자산을 바탕으로 영적이고 정신적인 기본적인 일에서 웅비도약하자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끈질기게 최후 마지막까지 분할, 분단 국가로 남아 있는 국제적 수모도 이런 지독한 개인주의 탓이다. 영원한 사람 삶의 진리를 이 마지막 때 온 세계에 책임 지고 전하는 사명감을 다할 일이다. 모든 피조물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이 받아 모시도록 우리의 혼신의 힘과 노력을 다 경주하자는 것이다.

(120)이 세계에다 그런 이상 사회를 구현하라는 것이 아니다.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눅 17:21] 하신 대로, 사람을 즉 그 영혼들 안에 천국 곧 이상향을 심어 주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면 천국의 영토[자연계에 속한 토지 개념이 아니라 영계에 속한 각자의 심령에 속한]는 자연적으로 확장되고 건립되는 것이다. 바다에 하나님 사랑의 그물을 던져 많은 사람을 사랑으로 사로잡아 오는 일인 것이다.

(121)하나님을 머리로 삼아 모든 인류를 그 몸의 지체[한 몸 구조에서의]로 구성시키는 일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사랑으로 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억지로 믿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께 달려오게 만드는 것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런 일은 복음 전도자가 직접 사랑의 사도(使徒)가 되어 사랑의 삶의 본을 보이는 가운데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써 성취되는 일이다. 과연 이상향 건설의 역군(役軍)이다. 이 이상향은 사람 사랑으로써 이루어진다[:21]. 삶은 사람 사랑인 것이다.

(122)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은 나 혼자만 배 불리려 하는 이기주의, 배타주의의 동물적 삶의 양식이니 사람이 아니라 짐승[자연계에 속한]이므로 인간적 삶[자기 부인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 특징인]의 사람들이 사는 천국에는 들어갈 수 없다. 내일 어찌 될지도 모르기에 내일마저 기약할 수 없는 이 세상의 일에 혈기 왕성하고 이상(理想)이 끓어 넘치는 젊은 피가 바쳐질 아무 이유가 없다.

(123)한 몸처럼 똘똘 뭉쳐진 5000 정병(精兵)으로 페르시아를 한 달음에 석권한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의 인더스 강변에 다다르자 그것이 세상 끝인 줄 알고 다시는 정복할 땅이 없다는 생각에 비감스러움을 금치 못하여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했다. 젊은이들이여, 해외로 눈을 돌려라. 거기에는 무진장의 보고(寶庫)가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다. 60억 인구라는 영혼이라는 보물들이다. 장차 하늘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고 별과 같이 찬란하게 광채를 내뿜을 수 있는 보물들이 그들이다.

(124)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인도하는 이들은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췰 것이라 했다[단 12:3]. 나 개인의 그와 같은 영예를 탐내라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다. '나' 개인의 것은 없다. 없는 대신에 '우리'라는 전체가 바로 내 것이다. 바로 이것이 '머리와 몸의 한 몸'으로서의 체제로 운영되는 사람 삶의 법칙이요 원리다. '우리'라는 전체를 모두 서로의 것으로서 공유(共有)하는 것이 생명 체제이므로 자기를 위하지 않는 바로 이것이 그 핵심 비결이다.

(125)고로 별과 같이 빛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명예요 영광이다. 바로 이와 같은 충만과 풍만한 삶의 이상향을 목표로 하고 이와 같은 해들과 별들을 한도 없이 무진장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천하 사면(四面)에 널려져 있는 것이 바로 세계 60억 인구다. 피땀을 흘리라. 그 대가는 이와 같이 엄청나다. 물밀 듯이 한 깃발 아래 진군(進軍) 나팔 소리 우렁차게 전진해 나갈 일이다. 선봉으로 나가시는 우리의 대장은 성령으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앞 다투어 나갈 일이다. 성(聖)천사들의 막강한 배후가 뒤따를 것이다.

(126)이제까지 막연하게만 생각해 왔던 영생이라는 것이 이제는 인간 생애의 법칙인 '트리니호모[3운법칙]'가 드러나 세상에 알려짐으로써 구체화, 현실화, 실질화한 것이니, 다시 말해 이 세상 삶은 허상(虛像) 격이고 천국이 실상(實像, 實相, 實狀)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은 부질없는 것이요 이 세상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속임수로 쓰는 수단임이 다시 밝혀져 확인된 것이다. 처음부터 성경이 경고해온 것이지만 성경이 이 마지막 때를 당하여 3운법칙을 밝혀 줌으로 인하여 이 경종(警鐘)이 일층 더 강화되어 있는 현재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비상 시국이라는 것이다.

(127)그런 만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지식도 논할 가치가 없고 그 어떤 것도 추구할 의미가 없으니 사람은 가장 먼저 산 자부터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주님[나의 주인, 소유주]이라 불러 구원을 받으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다"[롬 10:14,15/사 52:7] 하였다.

(128)마라톤[marathon] 평야에서 "우리가 이겼다"는 낭보를 전하기 위해 거침없이 달려 와 사람들에게 그 한 마디 전해 주고는 즉석에서 숨을 거둔 것이라면 우리는 그보다 말도 할 수 없이 더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압제를 깨뜨리시고 우리 모두를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신 것이다. "우리 인간이 이겼다! 세상의 악마를 이겼다!"고 외치기 위해 아래에 달려가는 모습과 같이 우리는 "달려갈 길을 마쳐야"[딤후 4:7] 하는 것이다.

(129)악마를 이겼기 때문에 이제 그 굴레에서 벗어나 그와 맞서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들을 그의 손아귀에서 뺏기 위한 성전(聖戰)에 돌입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달려가는 발걸음이 있는 터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하여 "이기셨다"[요 16:33]는 소식을 전함 받아 그 이긴 그대로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마귀를 이긴 이김에서 우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함이니 마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참으로 우리를 원수로 싸움의 맞잡이 즉 호적수(好敵手)로 인정함이다.

(130)그리스도께서 이미 이기셨으나 우리는 우리의 몫대로 이겨야 할 차례다.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이기셨으므로 나도 그 몸된 교회에 붙어 있어야 그 이김이 나의 이김이 될 수 있으니 오직 나 자신의 문제이므로 내가 스스로 이기지 못하면 나만은 지는 것이니, 여기서 진다는 것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라 행하지 않는다는 뜻이요 이는 자기중심이 되어 그리스도와는 상관이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e)내가 나 자신을 위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기신 그리스도의 이기심에 함께 동참하는 의미이니 '우리'의 이김으로서 나의 몫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기심으로써 완료되었다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 1:24]이라는 말이 성경에 있을 리가 없다. 이 남은 것은 내 스스로가 그리스도를 위해 그래서 전체 몸된 교회를 위해 내 몸에 채우게 되어 있음이다[:24]. 전쟁 없이 승리는 없다. 안일한 자세를 취하고서 전투에 나서는 일은 없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지 않는 한 승리는 없다. '사즉생 생즉사'다.

 

글쓴이    비밀번호   
보이는 순서대로 문자를 모두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