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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1) 법과 질서 - 6 등록일 2016.02.25 09:05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531





집 교회 운동-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CITHM'의 기본 잣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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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약속

그래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 즉 순종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생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요일 2:25/약 1:12/2:5/히 10:36]. 우리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약속을 지키신다 하여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시는 법은 없다. 약속에는 일방적인 것이 없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은혜로 얻고 믿기만 하면 되고 선물로서 받는 구원은 이 약속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은혜, 믿음, 선물로서의 속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절대로 구원을 베푸실 까닭이 없으니,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런 천국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거나, 아니면 천국이 있다면 천국에 적합한 유자격자만이 들어가는 곳이거나 둘 중 반드시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렇게 구원되었다고 전부인가. 당연히 대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면 약속이었으니까 그 약속 이행 여부가 점검되어야 마땅함이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는 것이다. 복종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약속해놓고는 그 약속을 이해하지 않으면 즉 복종하지 않으면 그러면 나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셨다고 자기 약속을 이행하시겠는가. 나의 약속을 지킴과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이 지켜지는 것이다.

내 스스로가 들어 약속을 지키지 않아 하나님께서도 부득불 약속을 이행하실 수 없는 상황이어서, 이 상황을 나 자신이 만들었으니 즉 내가 처음 회개할 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야기된 결과이니, 내가 "내 구원을 이루지"[빌 2:12] 못함이 아니면 무엇인가. 바로 "나 자신을 구원하지"[딤전 4:16] 않음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을 그렇게 값비싼 대가로 이루어 주셨는데 나 자신이 들어 나의 영원한 운명을 망치는 꼴이 되니 어찌 아니 "두렵고 떨지"[빌 2:12] 않으리요. 그래서 베드로도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경고하고 있다.

이 순종이 다름아닌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선물로 주신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고후 5:15/롬 14:7-9/갈 2:20/요 4:10/행 2:38] 것을 말함이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니 절대 복종이 아닌가. 그리고 그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것이 아닌가. 사랑하는 것이 바로 "선을 행함"이지 무엇이 선을 행함인가.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하는 자가 영생을 얻고[롬 2:7,10] 자기중심이 되어[:8,9]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멸망한다고 두 번 다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성경은 아주 못을 박아 버린 것이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살든지] 떠나든지[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것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니 우리가 [이]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후 5:9-11] 한 것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뜻이니 이 뜻대로 살지 않고 악을 행하니까 당연히 멸망이요 뜻을 따라 선을 행하니까 영생이다[롬 2:7-10]. 그래서 당연한 결론이지 여기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 억지로 해석하려고 무리하게 시도할 이유가 없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할 수 있도록"[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새 창조의 바탕을 완전히 마련해 놓고 그리스도께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오기를 원치 않은"[눅 13:34] 것이다. 뿐만 아니라 회개하고 믿어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기로 약속한 사람도 한 때는 잘 나가다가도 중도에 그 마음이 변하여 이전처럼 악을 행하고 선을 행하지 않고 의를 행하지 않으니 처음부터 믿지 않는 자와 차이가 없다는 판결을 받음은 당연하다.

따라서 그런 이들은 믿지 않는 자와 동일한 율(律)에 처해지지 않을 수 없다[눅 12:46]. 즉 처음부터 믿지 않는 자와 똑같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마 7:21,23/25:41,46]. 그래서 마지막 심판대에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는 기준을 "그리스도를 믿고" 안믿고 하는 그 여부에 두지 않고 단지 "선한 일을 행하는 것"과 "악한 일을 행하는 것"[요 5:29]에 두신 것이니, 바울이 "선을 행하는 자가 영생하고 악을 행하는 자가 멸망한다"[롬 2:7-10]고 한 것과 같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구원은 지금까지는 우리가 "죽은 자"로서 악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밑바탕[자연계에 속한 육체이므로]'이 되어 버려 구제 불능이었는데 이제는 죄를 짓지 않는 '바탕'[nature, disposition, constitution. ground, foundation, basis]을 새로 깔아 주신 것이니 곧 '예수 그리스도의 바탕'이다. 이런 '바탕'은 아담이 범죄하기 전의 '바탕'과 같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 범죄하기 전의 '바탕'과 같은 것으로서 순수하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죄를 지을 때는 영물로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및 악령들]처럼 또는 더 더욱 오랜 과거의 그 타락한 '그룹[cherub]'처럼 그리고 아담처럼 자기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죄를 지을 수가 없는 새로운 바탕이기 때문에 새 창조라고 함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이루라" 함은 그렇게 고의성을 띠고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죄를 짓지 말라,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길을 택하는 것이 추호라도 마음에 떠올려서는 안된다는 경고이다.

비단 바탕만 새로 깔아 주시는 것만 아니라 엄정한 법질서 집행에서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것은 마땅히 죽은 자로서 사라져야 하는 것이므로 죽음이라는 엄격한 처분 그대로 그렇게 죄인으로서 죽음으로 종결 처분을 내리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죽으심의 의미이다. 이는 또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범죄한 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엄정하게 다스리시겠다는 하나님의 단호한 결의를 우리 모두에게 나타내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참한 죽으심의 의미인 것이다.

절대로 "공짜"가 없고 "유야무야", "흐지부지"가 없고 책임 물을 것은 반드시 묻고, 죄는 반드시 지은 대로 보응을 받으며 절대로 피할 수 없음을 이로써 우리 모두에게 가르치시는 것이니 하나님은 사랑이심과 동시에 똑같은 비중으로서 "소멸하시는 불"[히 12:29]로서의 재판장이심을 이로써 완전히 드러내심이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타내는 의미이다. 엄격한 양면성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한 측면만을 보고 있다. 이는 아주 잘못된 것이요 백해무익이다.

그리고 그 선과 의를 행함의 내용 또는 골자가 무엇이냐, 이미 설명한 대로 한 몸 구조에서의 지체 역할이니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우리 모두 다 그 몸의 지체로서 이러한 한 몸으로서의 체제에서는 머리도 몸[의 각 지체]도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대칭을 이루고 있는 상대를 위함이니 즉 머리는 몸을 위할 뿐이요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몸 역시 머리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니 곧 자기 부인이다.

질서라는 말이 바로 이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머리를 중심한다는 뜻이다. 머리를 중심으로 하여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한 몸처럼 움직이므로 이를 질서라 한다. 머리가 만일 하나가 아니라 제각기 자기가 머리라고 하거나 머리가 둘 또는 셋이 난립해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무질서다. 영(令)이 서지 않으니 무질서다. 하나처럼 한 몸처럼 움직여질 수가 없다. 가정이라는 최소한의 기본 단위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자와 여자가 다툴 이유가 없다. 양성평등이라는 것은 이런 무지(無知) 속의 알력과 불협화음을 스스로 빚어내는 어리석음이다. 남녀가 사랑 가운데 조화 통일이면 아무런 문제가 생겨날 틈이 없다. 양성평등이 미국에서 처음 발단되었지만 그 나라에서도 이 가정의 조화의 아름다움은 대개 지켜지고 있는 것이니 이것이 자연스럽고 순리이기 때문이다. 남편이 아내를 깔보기 시작하여 인간 취급하지 않음에도 아내가 끝까지 인내와 사랑으로 대처하여 결국 그 못된 어리석기만 하던 남편으로 하여금 마음 돌리게 하여 새 사람되게 만든다는 일화는 수두룩하다.

여자는 자녀를 양육하도록 생리적으로 이미 역할 분담이 되어 있어 이런 감성 면에서 남자보다 탁월하다. "사랑은 오래 참으며"[고전 13:4] 한 대로 인내가 그 강점이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도 이 사랑의 특성 중 하나다.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중 하나가 이 "오래 참음"[갈 5:22]이다. 아내가 혹은 여자가 이 여성으로서의 강점을 포기하면 그 성을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니 그러면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성이 된다는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릇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 분수를 지킬 일이니 자기 위치를 벗어나는 것처럼 흉한 것은 없다. 여자가 자기의 강점을 벗어나면 갑자기 남자처럼 근육질이 되겠다는 것인가. 여자가 남자보다 아름다움이 더한 까닭은 이 사랑이라는 여자의 특성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여성다움이요 남성을 움직이는 힘이다. 평등해서 남성보다 우위에 서겠다는 발상부터가 설익은 것이다. 원래 남녀 사이는 우열에 있지 않다.

머리와 몸의 관계다. 머리와 몸 관계에서는 머리로서 대표성은 지니는 수가 있어도 너 없이 나 없고 나 없이는 네가 없다는 데에서 오는 통일, 조화만이 있을 뿐이다. 원래가 하나였기 때문이다. 평등을 주장하면 원래부터 둘이었다는 억지 주장이므로 순리가 아니라 역으로 흘러가려는 한없는 무리다. 자녀를 키워도 어디까지나 남성은 남성답게, 여성을 여성답게 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남성도 여성 같고 여성도 남성 같아지면 그런 꼴불견도 없다.

§  인간이 새로운 창조를 받아 다시 말해 그리스도로써 다시 출생하지 않는 한은 죄를 짓게 되는 것을 벗어날 수 없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바탕이고 또한 지금까지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필연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죽음 일변도요 결국 멸망에 들어갈 수밖에 없으나,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새 바탕으로서의 새 창조를 통해서만 사람이 선하게 되어 선하고 의로운 나라에서 살 수 있다는 결론은 얼마나 사리에 맞는 것인가!

그래서 세상 모든 종교를 허구라 주저 없이 단정하는 것이니 그런 확실한 인간 개혁의 현실적 수단 없이 그냥 말로만 선행을 하고 사랑과 자비를 베풀면 극락 천당 간다고 하는 것이므로 민중을 유혹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함이다. 자기 부인을 해야 실질적으로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 것이 되므로 이런 삶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그래서 그것을 대체하여 일정한 종교 의식을 행하면 된다 함이니 이 또한 얼마나 헛된 일인가. 즉 불교를 예로 들면 이른바 "쉬운 불교"라 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완벽한 선을 행하는 것이 현실에서는 할 수 없으니 장차 오는 완전한 세계에서는 할 수 있다고 할 것인가. 이런 주장은 주로 개신교에서 많이 하는 말이다. 애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로의 완전성을 갖추어야 완전한 세계인 천국에 가는 것이니, 불완전한 자는 처음부터 들어가지 못하는 데가 천국이다. 왜냐면 하나님은 인간을 처음부터 완전한 자로 만드신 까닭이다.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었던 것이니[롬 5:12], 범죄했다는 것은 그 스스로를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자기의 허물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천국에 가서야 자기도 '완전하게' 된다고 하는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내용인 것이다. 지금 현재 내가 이 세상에서 나의 완전성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이 완전성을 내 스스로 이룸에는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함이니, 그리스도의 복음(福音, 복되고 좋은 희소식)이 그런 확실한 토대가 되어 있음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함의 기준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음이다.

현실 세계가 있으면 반드시 미래 세계가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 삼위일체의 법칙이다. 과거 세계는 없었다. 왜냐면 이 대칭[상칭, 대립] 원리에서 완전한 것이 있으면 불완전한 것이 그 대칭[상칭, corresponding] 개념이고 영원한 것이 있으면 불완전한 것이 그 대칭을 이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보아도 이 세상을 완전하다 할 수 없고 영원하지도 않으니 반드시 완전하고 영원한 세계가 장차 오게 마련이다.

과거에 그런 영원한 것이 있고 완전한 것이 있었다고 말을 못하는 것은 과거가 영원했다면 이 세상은 그러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거기가 영원하다면 이 세상은 생겨나는 것부터 없어야 한다. 그리고 순서가 불완전한 것에서 완전한 것으로, 시한부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변천하는 것이지, 이 순서를 거꾸로 하는 대칭성은 존재할 수도 없음을 우리의 양식과 상식이 넉넉히 판단하는 것이다.

과거의 에덴낙원이라는 영계(靈界)가 있지 않았느냐 할지 모르나, 그 영계는 이 자연계와 대칭이었다. 그러니 엄연한 현실의 세계이지 과거의 세계가 아니다. 지금도 에덴낙원은 "하나님의 낙원"[계 2:7] 또는 "낙원"[눅 23:43]으로서 존재한다. 단지 인간[아담]이 거기서 쫓겨났기 때문에 이 자연계에 속해 있을 따름이다. 인간의 완전성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음에 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완전성은 완전 회복된 것이다.

자기 위주, 중심, 본위의 인간 본성[아담의 범죄 이후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인간이 전락하였으므로]을 교육이나 수양, 자기 훈련으로써 개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넌센스다. 교육으로 가능하다면 지금까지 수천 년 세월이 흘러왔는데도 왜 세상은 이 지경, 이 모양인가. 세상에서 지겹도록 그 정체가 드러나 치유 불가라고 딱지 붙은 인간이 이 모양 이대로 있으면서, 오는 세상에 가서 이상향을 갑자기 형성한다는 것은 공상에서나 가능하지 실제로는 없다.

명석한 머리를 지닌 사람은 그래서 종교를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허구에 가득 찬 종교를 믿는 사람들 자체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또는 덜 지성적이고 덜 이성적인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방금 말한 그 이유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일이 갑자기 오는 세상이라고 가능하겠는가. 그런 주장 자체에 혹세무민의 냄새가 나는 것이라고 판단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런 종교의 하나로 인식하는 것은 그들로서는 거쳐 넘어지게 하는 걸림 돌에 걸려 넘어진 격이다. 무엇이든 잘 알아보지도 않고 선입견 하나로 모든 것을 잣대로 재려는 그런 치명적 인간의 오류 곧 교만이라는 걸림 돌이다.

모든 일에 오만은 패망의 지름길이다. 그들은 성경을 직접 읽음으로써 그 가르치는 바를 알려고는 않고 성경을 안다고 자처하는 이들의 말만을 믿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멋대로 판단해 치우는 것이다. 소위 성경을 알고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도 실제로는 성경을 읽지 않고 성경에 대해 알고 있다는 이들의 말을 더 믿고 그것을 "성경을 다 아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성경도 믿지 않는다"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을 믿는다고 해서 그런 오류에서 해방되는 것도 아니니, 말은 성경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성경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천국에 가서야 사람이 변화되고 이 세상에서는 여전히 육신을 벗어날 수 없어 죄인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지만 믿음 하나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의롭다 즉 의인으로 간주하신다는 허황한 인위적인 교리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감히 제 멋대로 인간의 구미에 맞추어 해석한 것이다. 그 배경을 따라 정확히 말하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이다. 이 세상에서는 할 수 없는 것을 천국에서는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간섭, 강제를 말함이 된다.

사랑은 자유 의지가 핵심이다. 생명의 핵심이 사랑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이나 영물 등 영원히 존재하는 영적 존재에게 자유 의지를 완전 보장해 주심으로써 그들을 창조하신 이유다. 그런데도 천국이라는 것으로써 사람을 선을 행하도록 강제하고 간섭하신다고[협박이든 회유든 간섭이기는 마찬가지다] 착각하니 반(反)성경적이 아니면 무엇인가. 성경이 그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전 창조의 영향을 일절 받지 않는다는 뜻에서 "새" 창조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전 창조의 결과물 즉 범죄함으로써 야기된 죽음을 완전 척결하고 그 영향력[육신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등의 변명을 가능하게 하는]과 완전히 결별한다는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한[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한] 나의 죽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범죄하지 않는 아담을 창조하신 것처럼 범죄하지 않는 나로서 새로 만드신 것이 나의 구원이다. 그러나, 범죄하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아담을 창조하셨다고 그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던가 하면 아닌 것이다.

자유 의지로 자유로이 선택해서 움직이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범죄를 하지 않고 죽지 않도록 창조되었으나 죽음을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 오늘날의 우리의 죽음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역시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거룩한 천사들처럼 될 수 있음에도 범죄함으로써 악령이 되어 있고 장차 영원한 심판[불 못]의 운명에 처해져 있다. 모두 다 같은 마찬가지 이치다. 그러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육신 운운" 하여 죄인으로 자처하는 경우 "구원" 자체를 세상 불신자만큼이나 그 의미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을 직접 읽고 하나님의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으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해석이나 가르침에 의존하려는 것은 곧바로 자살 행위이다.

이런 종교의 허구성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혹하는 것은 그들 종교에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초자연적 현상 때문이다. 소위 "기독교"로 자처해도 마찬가지다. 단 여기서 '기독교"라 할 때는 성경의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는 일부는 물론 제외된다. 왜냐면 믿음은 각자 개인적인 것으로서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심을 목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거짓 기적"[살후 2:9]이 최대한으로 발휘되려는 시대에 와 있음을 알 일이다.

자연계에 얽매여 흙으로 돌아가는 육체의 인간인지라 초자연적인 것이면 무조건 무릎을 꿇고 경외감을 품게 되어 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 세상 신(神)이다. 신은 당연히 초자연적 영역에 속하므로 그런 초자연적 놀음놀이를 하는 것이야 식은 죽 먹기고 인간은 또 그런 것을 보고 그를 경배하게 되는 것 또한 불가항력이다. 종교 교리라는 것이 그런 허구뿐이건만 가끔 그렇게 초자연적인 것으로 나타내는 이 세상 신(神-고후 4:4)의 짓거리를 보고 인간들은 그 논리적 허구성은 금방 잊어버린 채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는 것이다.

그 실체가 악마 곧 이 세상 신인 줄 알 턱이 없다. 그래서 이런 것도 성경을 믿지 않고 엉뚱한 것을 믿게 되는 요인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인 능력은 믿지 않고 이 세상 신의 초자연적인 것은 믿는 것이다. 그런 논리적 허구라도 그런 초자연적 현상이라는 속임수 때문에 이의 없는 소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 신을 "온 천하를 꾀는[속이는] 자"[계 12:9]라고 했다.

성경에 나타난 각종 초자연적 현상 즉 기적들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 그리고 초대교회에 한해서 나타내신 것들이다. [부활하신 모습도 오직 믿는 이들에 한해서 나타내셨고 세상에 나타내지 아니하셨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일부러 그 능력을 나타내어 주신 기록은 없다. 있는 것 같이 보여도 반드시 이스라엘과 관련하고 초대교회와 관련되어 나타난 현상들이다. 따라서 그런 성경 기록을 세상은 믿지 않으면 그뿐이다.

따라서 자기 스스로 겪은 것이 아니므로 성경 기록은 거짓이고, 자기가 직접 체험하는 이 세상 신이 나타내는 기적과 모든 초자연적인 것은 자기 눈을 의심할 수는 없으므로 진실로서 믿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성적 판단으로써 믿게 하셨으니 이렇게 믿지 못하면 즉 자기가 이지적으로 판단하여 올바름을 사랑하고 그 좋은 점에 깊이 심복(心服)하여 스스로 따르지 않으면 한 마디로 구제불능이라 보아야 옳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 개혁, 삶의 변혁 없이 어찌 보다 나은 세상, 이상향을 바라겠는가. 이 세상의 비극은 천재지변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주로 인재[人災], 인화(人禍)에 있다. 사람이 사람을 해치고 불행에 빠뜨린다. 천재지변은 불가항력이라 참을 만하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데서 오는 고통은 못견딜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런 근본적인 것을 해결하지 않고 어찌 감히 이상향을 꿈꾼다는 말인가.

이런 인간 해(害)와 악이 모두 각 개인의 욕심에서 우러나오고 그런 이해관계에서 원망도 증오도 생기는 것임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다 확인되어 온 바다. 그런데 이런 욕심과 자기 위주, 자기 본위, 자기중심 성향을 그대로 지니고 미래의 이상향을 꿈꾼다는 것은 말짱 허구이지 달리 무엇이란 말인가. 만일 그런 자기중심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 실제로 있다면 막연하게 내세에 있다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세에 적용시켜 이 짧은 인생 삶이나마 고통을 면하게 해 주는 것이 도리이고 더 상식적이지 않겠는가.

현실에서는 못하는 것을 내세에서는 가능하다고 하여 그런 이상향을 꿈꾼다는 것은 말 그대로 꿈으로만 그칠 뿐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를 미신이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의 복음을 종교로 생각하는 선입견부터 버리는 것이 시급한 일이다. 그런 인간 개혁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논증한 바다. 스스로의 노력으로써 될 수 있다면 그 방법을 모든 사람에게 시술해서 이 세상부터 이상향 또는 이상향에 가까운 것을 만들어놓고 오는 세상에서의 그런 행복을 이야기할 일이다.

각자 자신의 노력이 필수적일 때가 있으니 그것은 현재의 "죽은 자"로서의 상태를 벗어나 '산 자'가 되고 난 후부터의 일이다. 산 자가 되면 그 때는 당연히 자기 스스로 노력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의 개혁이 목적이 아니라 처음부터 온전하고 완벽한 자로 창조되었으므로 그 완전함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니 그 방법이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와 몸 관계에서 자기 부인에 있음이다. 오직 나의 상대[머리 및 자기와 함께 한 몸의 지체가 되어 있는 이웃]를 위해서만 살도록 자신을 편달[채찍 또는 회초리]함이다.

자신의 개혁[인간 개혁]을 시도하기 전에 가장 먼저 자신의 생명의 한계부터 극복할 일이 아닌가. 오늘 아무리 자기 완성을 이루어놓아도 내일 여차하면 죽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런 것이다. 키가 작은 사람이 아무리 키를 크게 하려 해도 부질없는 일이 되는 것처럼[마 6:27], 내일 죽을지도 모를 인생이므로 자신을 영생하게 만들지 못할 바에야 자기에 관한 한 일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 우선 상식이다.

그런즉 결론은, 사람은 창조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저절로 생겨나서 이렇게 영생하지 못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면, 그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영생한다는 것 또는 영생하려 한다는 것은 더욱 웃기는 일이 된다. 가로 세로도 없는 벼룩 한 마리가 왕청스럽게도 스스로 소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것이 된다. 그리고 처음부터 영생하지도 못하고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허무한 삶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사람의 그 신체 내부의 한 조직만을 잠시 들여다보아도 실로 혀를 내두를 만한 경이로운 치밀함과 사전(事前) 기획과 고안으로 처음부터 만들어져 작동되고 있음을 당장 알 수 있다.

왜냐면 그렇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도록 면밀하게 구조 자체가 그리 되어 있으므로 사전 기획이고 고안임을 알 수 있게 하는 증거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움직이도록 고안되어 있지 않으면 그렇게 서로가 연결되어 빈 틈 없는 상호 작용으로 움직일 수가 없는 까닭이다. 인간 스스로가 그렇게 작동되도록 장치해놓았던가? 앞의 말이 바로 이 뜻이다. 즉 그 정도로 치밀하게 스스로를 작동시킬 만한 인간의 지능이라면 얼마든지 영생하도록 아니면 영생까지는 과하다면 만년 가까이는 살 수 있도록 스스로를 만들어놓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도 하나 못하는 주제에 저것인들 감히 할 수 있으랴. 이것도 저것도 못하니 아무 것도 자기 스스로에 관한 한 못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도 다른 것을 위해서도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설령 아무리 할 수 있다고 해도 극소수 일부에 한하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 자체가 저절로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미망(迷妄)에서부터 우선 일차적으로 벗어나는 것이 긴급한 과제요 급선무다. 왜냐면 하나님이 없다고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니 나머지는 '보나 마나', '물으나 마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비운다, 욕심을 없앤다 하지만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이던가. 혹 심산유곡에 들어가 뼈를 깎는 자기 수련을 통해 그런 소위 무아(無我), 무욕(無慾)을 이루었다 치자(우리는 이미 그런 노력들이 무의미함을 선언하였다). 그렇다면 그런 극소수의 사람만이 향유하는 곳이 극락, 천국이지 어째서 대중 다수가 갈 수 있는 곳이라 선전하고 오도하는 것인가. 모순이 이런 데에서도 드러난다.

소위 "쉬운 불교"가 있어 염불만 외면 되는 등 일반인이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니 어째서 만인 평등인데 그런 차별을 두어 불공정 불공평한가. 쉬운 불교가 있으면 입산 수도함이 전혀 없어야 하고 입산 수도를 고집할 바에야 "쉬운 불교"라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일관성이 있어야 그것이 진리로 통한다. 그렇지 않으면 입산 수도하는 이들만이 열반 해탈에 이르게 되고 쉬운 불교를 통하는 이들은 거기에 이르지 못함이 명백한데도 그런 말을 하니 이는 일반 대중들을 속이고 있음을 스스로 폭로함이다.

이성이 있고 지성이 있다고 자처하는 이들이 이런 자가당착과 모순투성이의 거짓말에다 자기 일신을 내맡기고 있으니 어찌 이를 인간에게서 났다 하리요. 그래서 성경은 처음부터 강조하기를 이 세상 신(神)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의 마음을 조종하고 통제한다 한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지적이고 이성적이라 하더라도 신(神) 앞에서는 한낱 육체인지라 불가항력으로 꼭두각시밖에 될 것이 없다. 이는 물론 그 스스로 자기중심의 측면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동조하고 보조를 맞추니 그리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 스스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동조하지 않는 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는"[요일 5:18] 것이다. 따라서 가장 먼저 하나님을 인정하고 성경이 그 말씀의 기록인 줄 믿어, 오늘날의 인간 불행이 범죄의 결과로 "죽은 자"가 되어 있기 때문임을 숙지할 때, 진정한 인간의 자기 노력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의 부족함을 개선하고 개혁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처음부터 완전하게 창조된 바탕 위에서 완전한 자로서의 위치와 모습을 스스로 배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적극 능동적인 노력이다.

이미 새 창조로 완전하게 되었은즉 그 완전성을 지키는 노력으로서 다시 말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한 몸 구조에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고자 하는 힘씀 곧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노력이다[히 4:11/눅 13:24/고후 5:9/벧후 1:10]. 같은 노력이지만 세상 종교는 자기의 부족함[영생하지 못하는 것을 위시해서]을 스스로 채우고 완전하게 함으로써 영생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데에 비추어, 그리스도의 구원은 완전한 것으로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함으로써 그 완전함[영생하게 되어 있는 것을 포함]을 계속 유지 보전하기 위한 노력이니, 같을 수가 없다.

전자는 자기중심으로서 자기를 위하고 자기 구원을 목적함이나. 후자는 자기부인으로서 정반대다. 그리스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모든 사람을 위해 베풀어지는 영원한 양식이요 음료다"[요 6:55] 하고 선언하신 것처럼 바로 이 자기 부인이 한 몸 체제를 유지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요 지혜인 것이다. 오늘날 회자되는 모든 인간 재앙[인간 자신이 이웃을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야기되는 죄악-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그 앞서 영물이 인간을 죽이는 등]이 자기중심에 있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음에서 오는 해악(害惡)인 것이다.

생명[영생]이 한 몸의 체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최고 행복과 지복(至福)을 보장하는 방법이 자기 부인인 것이니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것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할 빈 틈조차 없다. 이런 자기 부인은 이와 같이 우리의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니, 불교에서처럼 '있는 것'을 괜스레 '없다' 하고 없는 것을 있다 함으로써[있는 것을 없다고 했으니까 자연스럽게 없는 것도 있다는 말이 될 수밖에] 자기를 기만하는 자기 세뇌로써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 구원 또는 이상향 건설, 인간 개혁에서는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과는 영원히 결별하고, 오직 이웃만을 위하는 그런 합리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영원하고도 확고한 장치가 필요하게 되어 있다. 그 장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으로서는 가능성이 없으니 있었다면 어찌 오늘날까지 하고많은 세월을 보냈어도 이 모양이겠는가. 오직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나 위하신 죽으심을 믿고 그 믿음 안에서 즉 그리스도만을 위함으로써 그 지시를 따라 이웃만을 위하는 방법이다[고후 5:15]. 머리와 몸 관계의 가장 완전한 이상적인 체제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를 통한 방법이 있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졌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이니, 이는 누구나 스스로 믿어야 되는 것인데 이를 믿는 자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을 하는 자가 현재 우리가 알기에는[장차는 어떻게 될지 모르나]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렇게 소수라는 사실을 미리부터 경고하고 있음과 같다. 그러나 이런 경고를 미리 하지 않으면서도 인간 스스로 자기를 개혁하고 영생하게 할 수 있다고 하니, 만일 그런 것이 참으로 있다면 왜 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냐 하는 그 얘기다.

자기 자신을 위하지만 않으면 자연스럽게 이웃만을 위하게 되니 선한 직업을 가져도 "구제하기 위함"[엡 4:28]이라 한 대로 그리고 스스로 먹고 마시는 일도 자기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즉 그 시키시는 일을 그 뜻대로 행하기 위해 그렇게 하고[고전 19:31],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여 오직 몸을 위하시는 머리의 뜻을 따라 하는 것이니[골 3:17] 이것이 가장 확실하고 이른바 "과학적인" 삶의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삶은 이 방법 외에는 아주 없다. 더 필요하지도 않다. 따라서 이 방법 외에 그 무엇이 나타나더라도 관심을 기울일 일이 아니니 그것은 부질없는 속임수임을 그 스스로 자체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구원이 어디인가 불합리한 점이 있고 아쉬운 점이 있다면 더 나은 다른 것을 꿈꾸어 볼 일이겠지만 연약하다고 할 우리 자신의 판단에도 완벽하고 무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정 엄격한 원리원칙에 입각하고 여기서 한 치도 어긋나거나 벗어남이 없기 때문에 온전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지니고 있음이다. 완벽한 법질서는 완벽한 아름다움인 것이다.

그러면 말하기를, 기독교가 생긴 것이 언제인데 아직까지도 세상이 이 모양인가 할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해온 대로 간판만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내걸었지 실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은 것이 지금까지의 이른바 "기독교'의 대체적인 양상이었다. 또 극소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올바르게 살았다 치더라도 소수이므로 자기 이웃이나 개인적으로 지면(知面)이 있는 한정된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쳤지 전 세계를 상대하여 세계인의 삶에 영향력을 파급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러한 자기 부인의 삶은 각자가 스스로의 선택으로 직접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셔 들임에 있는 까닭에, 이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결단이 없을 경우 자기 부인의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자기를 위하지 않고 그 이웃을 위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화급한 일이 이러한 삶의 방법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데에 있으므로 세상은 이것 자체를 미워하여 바울 사도와 열두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방해하여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차단시키기에 급급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니 세상을 변혁시킬 짬도 사실은 없는 상황이다.

오늘날도 사정은 마찬가지로서 세상을 바꿔놓을 수도 없는 일이니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을 지배하여 관장하기 때문이다. 말하는 요점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방해하지 않는 세상 종교들이건만 그런 가시적인 일도 하나 이루지 못했다는 이 사실에 있다. 그와 같이 이루지 못한데 대한 아무 설명도 변명도 합리적으로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런 모든 세상 종교가 진리가 아니라는 증거가 되어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 항상 소수임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물론 정하신 것은 아니고 개인적으로 그런 성향을 띠는 이들이 많다는 의미이다[마 7:14]. 왜 절대 다수가 그런 경향을 띠는지는 우리로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똑같이 반반이라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미리 그렇게 정하셨다 할 것이니 그런 것 역시 실상은 우스운 일이다. 그러면 그와 반대로 그런 경향을 띠는 사람이 적고 악을 미워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도, 그 적은 부류에 드는 사람은 역시 의아하게 생각하기를 "나는 왜 이런 불행한 소수의 사람들에 속해 있는가" 한탄할 것이니 그 이유를 밝혀야 할 것 아닌가.

그런즉 우리는 단지 그런 줄로만 알 따름이고 그 스스로 그런 소수에 들고 다수에 들지 않도록 "힘쓰는"[눅 13:24] 것이 현재로서는 상책이다. 나중에 우리가 다 영계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비밀과 사실을 알게 될 것이기에 그렇다. 사람 삶의 변혁은 오는 세상에서가 아니라 이 현실 세계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니 곧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 표본이 된다. 자기 부인으로 하나님[머리되신]을 위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래서 각 지체가 머리를 중심으로 온전히 하나로 뭉쳐져 머리의 이름으로 서로에게 봉사하는 삶이 그것이다.

한 몸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각기 다른 역할의 지체가 있음과 동시에 그것들을 통할하는 머리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법이니 지체라는 것은 각기 다른 개성과 인격을 지닌 우리 개개인 각자를 말함이요, 머리라 함은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다[고전 11:3]. 머리와 몸 관계로 사는 이것이 완벽한 그리고 현실성 있는 따라서 이생에서나 내생에서나 두루 통하는 유일무이의 인간개혁, 삶의 변혁, 그리고 영생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래서 종교라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종교의 형태를 갖출 필요도 없다. 종교로 오해되거나 착각하는 일이 없도록 종교의 형태를 갖추어서도 아니 된다는 주장이 여기에 근거한다. 그냥 평범한 일상 생활이요 삶 자체이다. 이에 덧붙일 것도 뺄 것도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리는 성경은 이 세상의 실상을 밝힌다. 즉 악한 자 곧 악령이 지배하고 신으로 군림해 있어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다.

세상 그 어떤 종교도 이런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실상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런 종교를 만들었기 때문이요 그 배후에 있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세상 종교가 진실이라면 왜 이 세상부터 변혁시키지 못하느냐고 다그치는 것이다. 방금 지적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은 다르다. 이 세상 자체를 악령이 지배하는 적지(敵地)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나그네로 자처한다. 따라서 진리이지만 이 세상 자체를 변혁시킬 수도 없거니와[악령이 지배하는 고로] 또 그럴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 것은 이 세상은 이미 버려진, 파기(破棄)된 것으로 보는 까닭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만 충분히 전달되는 즉시로 이 세상은 폐기되는 까닭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 인간 변혁은 믿음의 영역이다. 하나님 친히 이루어놓으신 사실에 대한 인정과 시인, 그리고 이 사실을 근거로 모든 일을 하시리라는 절대적인 신뢰를 따라 행해지는 우리의 절대적 순종이 이 "믿음"이다. 따라서 모든 악과 인간고의 뿌리가 되는 자기중심의 아집(我執)은, 이 '또 하나의 내'가 되어 주시기 위해 나를 위해 사람되신 후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 그 성령으로 내 안에 영주(永住)하심으로써 나와 온전히 하나가 되심으로써 척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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