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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2) 법과 질서 - 7 등록일 2016.02.25 09:07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423

 

그 죽으심이 곧 내가 죽은 것으로 현실화하기 때문이다. 고로 원천적으로 내가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근거가 완전히 뿌리째 뽑혀 사라지고 없다. 이것이 자기 부인의 근거다. 바로 이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새 출발하니 이것이 곧 완벽한 인간 개혁이 아니면 무엇인가. 인간 교육이 아니라 인간 개혁이다. 근본 바탕부터 새로 바뀜이다. 개혁이라는 말도 조리에 닿지 않고 완전한 새 인간 창조이니, 새 유형의 인간 창조다.

그리스도와 내가 완전히 하나로 되어 "겹[複數ㅡ복수] 사람"이 되어 있으니 새 유형이 아니고 무엇인가. 과거에 이런 일이 없었다. 이런 인간이 존재해 오지 않았었다. 그리스도 오신 후부터 그런 인간형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오늘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것만 아니다. 내가 죽어 없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매장되어[장사 지내져] 버렸기 때문에 단순히 그 이유 하나로써 다시는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겹으로, 곱으로 더 있으니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하던 과거가 이렇게 깨끗이 청산되어 버린 바탕 위에 다시 더 두터운 바탕을 깔아 두신 것이니, 곧 내가 나 자신을 위하는 것보다 무한대로 더 나은 방법으로서 다시 말해 나를 지으신 하나님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하시는 체제로 완전히 뒤바꿔진 개혁, 혁신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더더욱 나는 나를 위할 수 없고 위할 필요도 없게 된다.

이 두 개의 바탕으로 말할 때, 첫째 바탕은 인간이 범죄함으로써 자초한 비극적 결과의 타개(打開)이다. 그리고 그 두 번째는 천지 창조 때부터 확립되어 오는 생명의 법질서 준수로 정상적으로 다시 회귀함을 가리킨다. 제대로의 순서를 따름이다. 당면 문제는 죽음에 처한 인간을 당장 이 죽음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인데,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죽을 것은 의당히 죽음으로써 끝내고 종결하는 의미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었다.

동시에 첫 사람 아담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존재하다가 나중에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영계에 들어가 거기서 신령한 몸으로 변환됨과 아울러 자기중심의 동물적 생명의 본능에 속하는 모든 것이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 생명에 부합한 것으로 순화 또는 조절되는 단계에 이른 것이 당시 에덴낙원이었던 것과 같이, 나는 이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나 자신의 죽음으로 수용함으로써 자기중심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일체의 연결 고리를 절단시켜 버린 것이다.

곧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이다[갈 5:;24]. 이로써 이전 아담의 범죄로 인한 모든 구악(舊惡)이 소멸되어 깨끗이 청소되었다. 따라서 이 두 번째 바탕이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진행되어 온 생명의 법질서[즉 하나님은 피조물을 위하시고 따라서 피조물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주시는 하나님만을 위하는 것으로써 한 몸의 체제로 확립되어 있는]를 재확인하는 의미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오직 나만을 위하시는 존재로 이제 영원토록 계시게 되므로 따라서 이제 나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든지 죽든지 하는 것이고 나 자신을 위해서는 일절 아무 것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롬 14:7-9/고후 5:15]. 필요가 없어서다. 억지로가 아니라 나 스스로 불필요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니하는 것이니 내가 원하지 않아 않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같이 고난 받으심으로써 비로소 생기게 된 원리원칙이 아니라 기존의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던 항구적인 삶의 법질서 개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같이 새 피조물 곧 새 유형의 인간으로 일조일석에 되어 버리는 이것보다 더 확실한 장치, 구조, 체제, 개혁이 다시 있을 수 없다. 하나님 친히 이루신 새 창조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은 말 그대로 복음 즉 복된 좋은 소식, 희소식일 따름이지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릇 "소식"은 내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이루어져 있는 현실적 사실을 아는 것 즉 "지식"이다. 그 지식 곧 정보를 수용하느냐 여부에 달렸다.

수용하는 것이 믿는 것이고, '믿음'에는 반드시 그 믿음대로 하는 '행동'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제까지 사람 사는 법을 모르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믿고 바로 깨닫고 사람답게 살고 사람답게 행동하고 생각하고 사람다운 말을 하게 되는 것뿐이다. 물론 그 기본 바탕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써 확고하고 완벽하게 기틀이 다져진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 사는 도리를 힘써 가르치고 전하는 것뿐이다.

공자가 사람 사는 도리를 아침에 들을 수만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겠다[朝問道而夕死可矣] 했던 그 사람 삶의 도리를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전세계에 알릴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이다. 애초 그 도리를 찾아 빛의 발원지라 생각했던 곳을 찾느라 동방의 끝에까지 이르러 이 한반도에서 멈춘 그 열심으로 우리 한국 민족이 당시 빛을 숭상하여 흰 색깔[無色]로 평상복을 해 입었던 것처럼, 그리고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바 그 백마(白馬) 탄 무리처럼,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장으로 삼은 정복자의 군단을 이루어 "이기고도 또 그 위에 더 이기려는" 무진장의 패기와 강력으로 세계 정복의 길을 나서고자 하는 것이다. 이 세계 정복은 영적인 의미이므로 육신적으로 볼 때는 피 비린 내 나는 순절(殉節)의 고난과 형극의 길이다.

앞에서 설명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되어 있는 구조를 더 부연해서 설명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남편이 아내를 기쁘게 해 주려 하고 아내가 역시 남편을 기쁘게 해 주려 함이 인지상정인데 그것을 '세상 일'이라 단정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에 장애가 된다고 한 그 점이다[고전 7:32]. 바꾸어 말하면 주님께서 남편이나 아내보다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가까우신 분으로 그런 현실이 이제는 되어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 아내/남편이 나에게 가까이 있어 함께 사는 것과 똑같은 의미 그리고 무한대로 그 이상이 됨을 나타내는 것이다. 단지 주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아니하신다는 사실만을 놓고, 그저 막연하고 애매 모호한 추상적인 것으로 인식하는데 이것이 문제다. 우리가 가장 가깝다고 이의 없이 인정하는 아내 남편 관계보다 더 가까운 그런 1대1의 사귐이 곧 나와 주님과의 사귐인 줄 알아야 함이다.

말씀이 그렇다고 하시니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이 믿음이다. 베드로가 밤이 맞도록 바다에 그물을 치고 기다렸음에도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자기 지식과 경험과 육감에 아주 반[反]하는 주님의 분부이시지만, 그러나 "말씀이 그러하시니 제가 그물을 던지겠습니다" 한 바로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믿음"인 것이다. 사람은 이지적 판단으로 어떤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게 되면 그 인정한 바를 따라 행동에 옮기게 되어 있다. 지금까지 설명해온 것 중에 이성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안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었던가.

그래서 시편에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기를, "하늘에서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 밖에 제가 사모할 분이 없습니다"(시 73:25) 하였다. 이것은 성령의 말씀이시니 그런 줄로 그대로 믿으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 the Comforter)"[요 14:16]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심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까워지셨다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게 된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모두가 우리를 위하심이 아닌 것이 없으니 이는 창세(創世) 초부터 일관해서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그러하시나 우리의 이해가 못미치기 때문에 우리의 이해가 미치도록 취하신 조처라는 일면도 그리스도의 구원에 포함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다 함이다[롬 5:8]. "또 다른 보혜사"라는 말씀을 따라 성령께서 오심으로써 나와 하나님과의 사랑 관계, 그리스도와 내가 이렇게 둘이 하나 되는 관계가 인간 상호간의 가시적인 그것처럼 확립이 되어 있다는 그런 의미다.

친히 사람이 되시기 전에도, 우리 육신의 눈에는 비록 보이지 아니하시나 이와 같이 우리가 볼 수 있는 사람들과 전혀 다름없이 생소하지 않게 우리 가운데 계시는 분이건만 우리의 미련함으로 그렇게 인정 받지 못하실 때 우리 사람이 느끼시는 것과 같이 느끼신다는 사실을 여호수아의 경우에서서 우리는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즉 여부스 사람들이 멀리서 온 것처럼 위장하여 여호수아를 속일 때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이에 관하여 여쭙지 않았다 하여 그와 같이 속고 있는 현장에서도 그 사실을 말씀해 주시지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야 성령으로,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여쭙지 않았다" 하고 분명히 기록하게 하신 점이 그것이다[수 9:14].

야곱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요셉이 죽었다고 그 형들이 와서 거짓말을 할 때 당연히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자기에게 약속하신 바가 "너희 자손이 별과 같이 많고 많으리라"는 데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이 일에 대해 일단 여쭈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되게 하신다 하셨는데 요셉이 죽었다 하니 그럴 리가 없건마는 그렇다고 하니 어떻게 되는 일입니까" 하고, 슬퍼하는 대신 기도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묵묵부답이실 턱이 없다. 기도를 아니하니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지 아니하신 것이다. 이집트의 제2인자가 되어 요셉이 그 아버지 야곱을 불러들이기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일절 말씀하시지 않았다. 이는 자기중심의 우리 인생들이 “네가 그러하니 나도 그리 하겠다”는 식의 앙갚음으로 하는 것처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사랑과 생명의 법칙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게 되어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위하실 수가 없다는 그 뜻임을 명백히 하심이다.

이는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시고 시인하면 주님도 시인하신다는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마 10:32]. 하나님께서 얼마나 섭섭히 여기셨기에 그렇게 야곱이 슬퍼해도 일절 그 사실을 말씀해 주시지 않았겠는가. 요셉이 그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인마(人馬)를 보내게 되기까지도 말씀하시지 않았음을 우리는 깊이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런 모습을 취하신 것은, 우리와의 개인적인 사귐[갑을 을이 위하고 갑은 을을 위하는 관계]에서 그와 같은 의미로서의 우리의 기도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입증하는 것이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것을 하지 않았다고 어쩌면 그렇게도 야곱에게 야박하게 대하셨나" 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야곱을 서운하게 하신 것이 무엇인가.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그런 기도쯤 한번이라도 할 만한데도 하나님의 약속 말씀을 믿지 않고 더구나 짐승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는 자식의 거짓말을 더 믿고 있었으니 믿음 없는 자에게는 그 믿음 없는 대로 두실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불간섭주의니 즉 피조물의 자유 의지는 절대로 건드리시지 않는다는 원리원칙주의시다.

바로 에덴낙원에서의 아담의 자세를 야곱이 취한 것이다. 아담 역시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아무리 여자가 그 금단의 과일을 입에 씹고 있었어도 일단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이는 여자와 동조했고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자세를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실 리 없다. 야곱이 그와 같이 한 것이다. 도리어 야곱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보호해 주시지 않았다고 믿은 것이니 이는 곧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요 원망이다[고전 10:10].

믿지 않는 자에게 억지로 믿게 하실 수는 없으니 그렇다면야 에덴낙원에서의 아담의 범죄도 미리 막으셨을 것이 아닌가. 이로써도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이 세상 지내야 하는 것이다[벧전 1:17/빌 2:12]. 욥과 같이,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어 가신 이도 하나님"이시니 오직 이 비극을 수용할 뿐이라고 말하기에는, 야곱과 욥 사이에는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있다. 욥과 달리 야곱의 경우는 자손이 번성케 해 주시리라는 하나님 친히 주신 약속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약속을 믿지 아니했기에 그 당연한 응보이다. 이렇게 하시는데 대하여 우리가 이의를 단다면, 우리는 주님을 혹 부인하는 일이 있어도 주님만은 우리를 부인하시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다. 이런 생각은 이기주의의 극치다. 많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 하나님은 이런 이기주의를 미워하신다. 죄를 미워하신다는 뜻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죄가 무엇이고 그와 반대되는 의가 무엇인가 그것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이공 순신과 '나'원균의 교훈인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억조창생을 만드신 분으로서 모든 피조물을 전체적으로만 상대하시고 개별적으로는 비교적 관심이 덜하신 것으로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이 착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일컬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 데에서 잘 나타난다. 이는 다시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이라 말씀하신 데에서도 확인된다. 다시 말해 개인 각자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개별적으로 관계하시는 하나님, "1대[對]1 교제"의 하나님이시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엄청난 위로로 다가서는 사실이다. 우리 인간은 조물주 하나님을 우리와 같은 피조물 중 하나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면 다수를 상관하다보면 우리는 개개인을 일일이 챙기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잘못 인식하는 그 엄청난 불찰 때문에, 단지 보이시지 않는다고 해서 마치 실체가 없는 막연하고 애매 모호한 존재로 구름 잡듯 바람 잡듯 안개 잡듯이 몽롱하게만 하나님을 인식하니, 하나님을 개별적으로 친밀히 하여 사랑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개별적으로 참새 한 마리도 다 기억하시는 분이시다[눅 12:6]. 우리의 머리털 하나도 다 세시는 분이심을 친히 강조하셨다[:7]. 이 말씀을 건성으로만 듣지 말고 마음 깊숙이 되새길 일이다. 믿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도 믿지 않는 것이 언제나 탈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기껏해야 가시적인 특정 건물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고 거기 부지런히 나간다든가 아니면 "교회 일"을 부지런히 하는 것 정도로 착각한다.

고작 불쌍한 사람 주님의 이름으로 관심을 가져 구제하는 정도로만 하나님과의 사귐을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 역시 하나님을 너무도 모르는 탓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생각하실 때도, 우리 인간에 대하여 바로 이 점을 퍽 안타깝게 여기실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으로서 그 어느 인간의 왕보다 더 잘 이스라엘 백성을 보살피시는데도, 인간의 왕을 만들어 세우자고 했을 때 하나님은 이를 "큰 죄악"[삼상 12:17]으로 단정하신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성경은 단언한다[히 11: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당신의 모습을 밝히시지 않은 것이 아니니, 밝히시지도 않으면서 안타깝게 즉 섭섭하게 여기실 리 없다. 오직 문제는 우리가 너무나 믿지를 않는다는 것이 이요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다"[요 5:42]는 것이다. 이것이 항상 문제다. 사랑하지 않음은 우리의 탓임을 통감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첫 사람 아담]을 만드실 때도 한 개인을 만드신 것이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택하셔서 그로 말미암아 한 나라가 세워지게 하신 것도 그렇다. 한 개인으로 시작되는 관계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나의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 나의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고 선언하셔서 우리 인간과 똑같으신 사람으로서 주님의 아버지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주님[사람으로서]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심과 더불어, 모든 사람 또는 만유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개개인 각자의 하나님이심을 확증해 주신 것이다.

이 경우 그렇게 말씀하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특별하신 사람으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한 개인으로서, 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된다는 그 뜻이다. 바로 이 사실을 그 때 그 말씀으로써 분명히 주지시켜 주신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시다. 나를 사랑하시어 내게 자신을 선물로 주신 그리스도시다[갈 2:20]. 똑같은 비중으로서의 '나'와 그리고 '우리'인 것이다.

이 사실을 단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으로서 "너희 머리털 하나까지라도 다 세신바 되었다" 하셨다. 더욱 더 한 것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미물에 속한 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께서는 관심을 가지셔서 그 비록 한 마리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결코 땅에 떨어져 죽지 않는다 하셨으니 바로 이 사실을 확언하심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그렇다.

믿음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 한 사람만 지목하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만 하셔도 될 터인데 그 할아버지, 그 아버지, 그 아들 손자 개개인 각자의 하나님으로 선포하심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이삭의 하나님도 되시고 그 손자 야곱의 하나님도 되시는 것이다. 야곱 이후는 열 두 아들이므로 그 중 대표적으로 어느 하나를 편파적으로 지목하실 수도 없고 해서 야곱으로써만 그치게 되나, 그러나 의미는 그 말씀만으로써 충분히 모든 인간에게 전달되어 있음이다.

인간 창조 당시부터 이렇게 개개인 각자의 하나님으로서의 의미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극적으로 그리고 가장 현실성 있게 나타나 정착되어 있다. 그리하여 바울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라고 자기 믿음을 명확히 표백했다[갈 2:20]. '우리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나의 하나님'이시다. '나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시다. 이 사실을 깊이 마음 속에 아로새길 일이다.

이미 시편에서는 이를 예언하여 “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 밖에 나의 사모할 이 없습니다”[시 73:25] 한 것이다. "주님 외에 아무도 없다" 할 때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하나님 친히 바로 그와 같은 관계로써 나를 대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때문에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나와 똑같이 믿는 저 형제, 또 저기 저 형제 안에도 나와 똑같은 의미로 동시에 계심이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가 나 자신처럼 되어 있다.

그렇게 모두에게 계시지만 내 안에 내게만 계시는 것처럼 되어 있는 그 의미에 하등 이상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시다. 사람이야 이런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사람이 되신 것은 이같이 사람처럼 개인적 개별적으로 나와 관계하시고자 함이니 절대로 집단적으로 한꺼번에 전체적으로만 우리를 대하시는 의미로 착각할 일이 아니다. 사람이란 원래부터가 개별적인 존재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담 한 사람만 처음에 창조하신 것이다.

갑이란 사람이 을이란 사람과 상대할 때는 동시에 병이란 사람과 상대할 수는 없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사람'되심이 그리스도시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은 하나님이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나와의 똑같은 의미로 그와 같이 계시니 동시에 또한 전체적으로 대하시게 되는 것 역시 현실이다. 때문에 앞에서 하나님을 피조물처럼 착각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개별적으로 친근하신 하나님이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똑같은 의미로 대하셔서 친히 그 왕이 되어 계셨고 하나님의 이 뜻을 저버리고 인간으로서의 왕을 원했을 때 섭섭하게 여기시는데 머무시지 않고 이를 "죄악"이라 하신 것이다[삼상 8:7,8,12:17].

여기서도 "죄"의 속성이 드러난다.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것이 생명과 사랑의 관계인데 갑이 을을 위하지 않고 을이 갑을 위하지 않을 때 이것이 죄라는 것이다. 생명의 법질서는 이와 같이 그 의미가 명백하고 확고한데 이를 어김이다. 하나님 자신께서는 영원히 그 법질서로 존재하시니까 결단코 우리를 위하시지 않는 일이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위할 때 그것을 "죄"라 부르는 것이다.

죄 값은 죽음이니 생명이신 하나님에게서 떠나니 그 대립 개념으로서의 죽음일 것은 당연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으로서의 하나님을 마다하고 인간으로서의 왕을 구하니 그것이 죄가 아닐 수가 없다. 오늘날도 같은 현상으로 나타난다. 즉 그리스도 친히 교회의 머리시다. 주재자이시고 관리자이시고 치리자(治理者)이시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 하여 인간을 세워 그 "왕"의 "통치"를 받기 원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종교형태 지향성이다.

그러므로 이를 극력 배척하지 않을 수 없고 기피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 일이 "죄악"이 되는 이유는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에서 피조물이 조물주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 즉 자기 이익을 자기 스스로 추구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베푸시는 현재 상태 이상으로 좋은 것은 없고 바로 그 가장 좋은 것으로 피조물을 대하시는 것인데, 이를 버리고 자기가 선호하는 것으로 기울어져 고집하니 어이없는 교만이다. 곧 자기중심이다.

항상 명심할 것은 아무리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을 이행해도 그것을 나 자신을 위하는 마음으로 하게 되면 죄가 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친히 내게 주신 것이라도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받게 되면 그것이 죄다. 그러면 이 경우 나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그것을 받고 누려야 함이다. 말의 의미가 이상하게 들리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 그러하다. 왜냐면 나는 무조건 시종일관하게 하나님을 위할 뿐이지 나 자신을 위함이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이리 저리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고 해서 이스라엘은 그냥 그렇게 해 주시기만을 기다리고 주시면 그것을 받을 것만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 주기시를 구해야 하는 것이고 구하되 자기 자신을 위해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이루어 주시고 베풀어 주시기만을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이 성립되는 것이다[겔 36:37].

이 세상 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인간 개조론(改造論)

이런 본원적인 하나님의 인간 창조 곧 새 창조에 대해 이 세상 신은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면 이른바 "과학"의 이름으로 소위 인간 개조론을 지어내어 속일 것 같다. 그리고 세상 종교를 통해 이 세상 신이 써 먹는 초자연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역시 여기에도 초자연적인 것을 가미시켜 이 세상 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공작하게 될 것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계 13:13,14/16:14/살후 2:3-12]. 인간은 상식과 논리로 사물을 판단하므로 이 세상 신의 그런 비합리적 시도에 적극 호응하는 편은 아니나, 기적[그것이 거짓이든 아니든 간에]을 통해 현저히 증명하고 입증되는 형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할 때 문제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가시적인 것으로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주장을 강력히 뒷받침하고 수용하기를 강요하는 마당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그런 강변(强辯)에 당장 반박할 수 없는 힘이 없으므로 그것을 거짓이라 실증하지 못하는 바에야 아니 넘어갈 도리가 없게 된다. 무슨 근거가 있어야 이를 논박할 수 있는데 전혀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으므로 여기에 아니 넘어갈 인간이 없게 될 것을 성경은 미리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경우 오직 그 진실성 즉 하나님의 말씀임을 자체 증명하는 성경밖에는 없게 된다.

성경을 믿지 못하면 모든 것은 끝이다. 따라서 오늘날 이 시간 이 성경에 대해 명확한 자기 입장을 세워두어야 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리고 다시 강조하지만 경계해야 하는 것은 이런 초자연적 현상에 무조건 권위를 두는 경향이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이지적인 존재다. 냉정하게 이성으로 판단할 일이다. 아담 역시 에덴낙원에서 이성적인 판단으로 나갔다면 그럴 듯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일지라도 거기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말하는 대로 선악과 나무 열매를 보고 있었다. 먹음 직, 봄 직하고, 지혜롭게 해 줄만큼 탐스럽게 보였다. 이것은 이성적인 판단 대신 당장 나타나는 기적에 혹하여 그 굉장함에 넋이 빼앗겨 있는 것과 똑같은 본질의 상황이다. 이미 이렇게 되면 일은 다 글러 버린 것이다. 인간이 그 가장자리만을 맛보고 있는 과학[자연계의 제반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인데 인간은 아직 이 자연계를 미처 다 알지 못하고 있으므로]일진대, 이런 미지(未知)의 분야로써 인간의 이지(理知)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마비시켜 놓는 것은 일시적으로는 대단한 효과를 낼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작업은 원래 그 바탕이 비합리적인 것으로 일관하는 거짓이요 속임수이기 때문에 오래 가지는 못하며 그리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라는 것은 거짓의 속성상 임시방편으로서 한 때에만 국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파급 효과는 온 세계를 장악하고도 남는 것이어서, 에덴 낙원에서의 비극처럼 이미 일이 다 저질러진 다음에야 그 속임수가 들통이 나는, 그런 '일단 저질러지는 비극적 결말'이 될 것이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고 인류의 불행도 바로 이런 데에 있었고 이 세상 신의 노림수도 이 점에 있다.

그래서 가령 우주 어느 한쪽에(인간의 지식이 미치지 못하는) 고도로 발달된 문명권이 있다고 가공으로 설정해놓고(이 역시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넘는 것이므로 검증될 수 없는 것인 만큼 어리석은 인생은 거기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또 이런 약점을 악용하여 얼마든지 판을 벌일 수가 있다) 거기서 온 외계인이라 속이고 인간을 그런 고도의 과학문명으로 개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무지한 인간은 별 수 없이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각종 기적[그것이 거짓이든 아니든 간에]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 다음에야 무기력한 인간은 이런 초자연적인 현상 앞에서는 쪽을 쓰지 못하는 까닭이다. 거짓은 한시적이므로 따라서 그 임시(臨時)에서는 끝도 없고 한계도 없이 부풀어 올릴 수 있는 것이 거짓의 속성이다. 그래서 인간이 미치지 못하는 그런 과학적인 기술 내지 능력을 나타내며 그것으로써 인간을 근원부터 개조할 수 있어 행복한 세계에서 살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 선전해댈 때,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성령의 능력 아래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누구 하나 예외 없이 그 속임수에 말려들게 될 것이라는 결론이요 전망이다.

그러나 유념해야 하는 것은, 이 세상 신(神-고후 4:4)이 활용하는 이 모든 것 즉 소위 "과학적 지식"이라는 것은 이미 성경에서 경고한 바에 따라 진행되는 속임수라는 사실이다. 즉 다니엘이 그 예언에서 "사람이 빨리 왕래하고 지식이 더한다. 그 때가 마지막 때다"[단 12:4]라고 했기 때문인데 바로 이 예언대로 되어진 "과학적" 지식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런 과학 지식(인간 삶의 모든 지식이 과학 아닌 것이 없지만 여기서 말하는 '과학'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 월등한 지식으로써 악용하는 측면을 특별히 지적해서 하는 말)은 인간 생활을 편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나 축복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이런 지식은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고 영원한 세계에 들어갈 때에는 자연적으로 얻어지는 것임을 감안할 때, 이 세상에서의 삶 자체를 윤택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요 오직 우리가 구원 얻는 것이 유일의 과제라는 사실이 명백해진 이상, 그런 결론은 당연하다. 그러면 그 지식의 의미는 무엇이냐 할 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이 마지막 때의 속임수를 위함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는 다니엘의 그 "마지막 때" 예언과 맞물려 있다.

과학적 지식이라는 것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예언되어 있지 않고, 또한 이전부터 점진적으로 꾸준한 추세로 지금까지 발전되어 온 것이라면 그래서 갑자기 이 20세기에 들어 용수철처럼 또는 화산 폭발처럼 진전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와 관련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오랫동안 고요하게 잠자코 갇혀 있던 봇물이 예기치 않게 정신을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갑자기 터져 광란하듯 또는 화산이 요란하게 어지러이 터지듯 폭발하는(마치 시한폭탄이 시간이 되자 터지는 것 같은) 바로 이 점에서, 이 과학적 지식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 있는 음모와 계략을 위한 것임을 간파할 수 있다는 얘기이니 곧 적 그리스도의 출현을 위함이다.

고로 다니엘의 예언과 이 20세기를 전후하여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분출하는 과학 문명을 상관시켜 볼 때 이 소위 "과학 지식"이라는 것을 절대로 백프로 긍정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경고 신호음을 우리는 확실하게 들을 수 있다. 과학 자체를 불신한다는 뜻이 아니라, 원래부터 이런 성질을 숙명적으로[다니엘의 예언을 따라] 타고 나타나는 과학인지라 누구의 손에 의해 요리되느냐 하는 이 점에 초점이 맞춰져야 하기 때문이다.

"과학, 과학" 하고 과학 즉 지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 과학적 지식으로 망하게 될 것이니 주의를 요한다. 모든 과학의 총본산이자 그 원류인 이 삼위일체의 원리가 어떤 무슨 과학적 실험에 의하여 밝혀지지 않았고 입증되지 않았고 오직 3운법칙에 의해 증명되었고 3운법칙 역시 어떤 과학적 실험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친히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하신 구조[structure]를 따라 그림 그리어져 있듯이 나타난 자체 증명으로 된 것임을 명심할 일이다. 지식으로 된 것이 아니니 오직 성령께서 친히 가르치심으로 된 "계시"[revelation-요 6:44,45,65/ 16:12-15/눅 10:21,22/고전 2:9/고전 2:13,14/마 11:25-27/16:17]로 말미암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앞에서 진화론의 허구성으로부터 과학의 '실속'을 이미 맛본바 있다. 다시 말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런 "과학"이라는 미명(美名) 아래에서 얼마든지 저지르고 공작할 수 있는 실상을 똑똑히 확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적 그리스도가 장차 출현하면서 나타내어 과시하게 될 소위 "과학적 지식"이 제2의 '진화론적 허구'일 수 있음을 이로써 우리는 충분히 알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런 것에 괘념하는 일이 없도록 마음을 굳세게 할 일이다.

§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이상, 이 자유의지는 영구히 보존되고 유지되는 것이니 인간 변혁이든 개혁이든 모두 그 의지 작용 그대로 되어질 따름이요, 따라서 인간 개조라고 해서 결단코 기계적 작용 혹은 물리 화학적 반응과 같은 것에 의해 변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 또한 유의할 일이다. 그럴 바에야 아예 처음부터 기계적인 인간으로 만드셨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영생하게 되는 것이나 앞서의 설명대로 영생에 적합한 행복한 삶이 되도록 인성(人性)이 변하는 인간 개혁, 개조는 순수하게 인간 각자의 자유 의지에 달린 사랑의 변혁뿐이다.

"인간의 영생이 어찌 각자의 자유 의지에 달린 것이냐, 그러면 자기가 영생하기를 원한다고 영생할 수 있다는 말이냐?" 하겠는데, 우리는 이미 인간이 우연히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다음의 단계에 있다. 저절로 생겨났다면 영생 자체를 거론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 왜냐면 현재 인간은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생하지 못하는 것으로서 우연히 생겨났으므로 역시 자기 의지로 영생하게도 못한다 즉 스스로를 영생하는 자로 만들지도 못한다는 것이 이미 증명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벌써 오래 전에 영생하는 자로 이미 스스로를 만들지 않았겠는가.

저절로 생겨났다고 주장하려면 그러면 현재의 인간 피부가 왜 자연계에 속한 모든 동물들처럼 깨끗하여 털북숭이가 아니냐 하는 이유부터 설명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저절로 생겨났다는 설명을 하기보다 먼저 이것부터 설명해야 한다는 그 뜻이다. 왜냐면 여기서 인간이 창조의 선물(膳物)이냐 아니면 우연의 산물(産物)이냐 하는 것이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예외없이 진화론을 앞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진화론의 허구성을 드러낸바 있다.

3운법칙이 그 증거인데, 그러나 사람 따라서는 "그런 따위를 누가 믿어?" 하고 등을 돌리면 일단 그만이다. 그러나 이미 처음에서부터 밝힌 대로 남녀 쌍으로 인간을 비롯, 자연계의 모든 동물들이 동시에 나타나져야 동물이나 인간이나 생존 가능하게 되어 진화할 만한 시간적 여유를 벌 수 있다는 점에서는 진화론 지지자들은 완전히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왜냐면 암수 쌍으로 나타나져야 인간이나 동물이나 낳고 낳아짐으로써 진화에 필요한 시간적[그것이 하루 이틀인가!] 여유를 벌 수 있으니 인간이든 동물이든 남녀 쌍으로 동시에 나타나야 하는 것인데, 남녀 동시에 쌍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필연성은 이미 그것이 생식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사전(事前) 고안, 기획, 의도가 누가 보아도 분명한 것이다.

바로 이런 사전 고안, 기획의 주체를 가리켜 조물주 하나님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증거로 창조의 선물[왜 "선물"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저 주시지 않고는 인간 스스로 자기에 관한 것을 만들거나 구비하거나 장치하는 것이 단 하나도 없는 까닭이다]이 인간임이 증명되지만, 그래도 무신론이라는 막무가내 고집을 인내심으로 참고 다음 사실 즉 인간 피부의 특이성[자연계의 동물들처럼 털북숭이가 아니라는]을 지적하는 것이다.

인간의 피부가 인간의 아름다움을 목적한 것이라면 그러면 그렇게 아름다움을 목적한 그 놀라운 능력으로 왜 영생은 못하게 하는가. 아니, 영생은 고사하고 만년이라도 살도록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만년 사는 것은 너무 과하면 일단 접고라도, 가장 상식적으로 동물들[예컨대 북극 곰]은 추위를 끄떡없이 견디는데 왜 그 잘난 인간은 겨울철에 동사(凍死)하도록 그 정도로 손쓸 수밖에 없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처음부터 대답에 궁한 것이 무신론의 기막힌 허구성인 것이다. 이는 기막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 속임수와 통한다. 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철통 같은 인간 압제, 조종과도 맞물리는 내용이다. 눈으로 멀쩡히 보고 있는데도, 저것은 저것이 아니라 전연 딴 것인 이것이라 하면, 인간은 그대로 저것을 이것으로 인식하게 되어 있는 것이 현재의 실상인 것이다. 사실 그대로 이 인간 피부의 수수께끼를 풀 일이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영계에 속한 영적인 육체로 변환되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증거임을 알게 될 것이다.

고답적인 것을 찾지 말고 겸손하게 일반적이고 평범한 것으로써 증거를 삼을 일이다. 원래부터 마음이 오만한 경우 필연적으로 낭패를 보게 마련이다. 일반적이고 평범한 것이 기본이며 근본이고, 고답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실상인즉 그 근본의 곁가지 즉 지엽적인 것이다. 사람이 어른으로 성장은 하지만 결국 그 근본은 엄마 품속의 어린 아이 적 시절이므로 거기로 되돌아가는 향수가 모든 것의 원동력임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피부만 아니라 오늘날도 부지런히 옷을 챙겨 입게 되어 있는 이유가 여기서 드러난다. 영계에서 신령한 몸으로 현란한 광채로 옷을 입게 되어 있으므로 바로 그런 사전(事前) 기획으로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이러한 피부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런데 범죄하여 죽는 자가 되어[처음에는 신령한 몸으로서 인간 아담이 영생하는 자였는데] 다시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환원되나 애초 그렇게 창조된 몸은 그대로여서, 갑자기 털북숭이가 될 수 없으므로 짐승은 추위를 견뎌도 인간은 얼어 죽는 불상사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그 영광스러운 빛의 옷을 못잊어 몸을 아름답게 치장하려는 욕구에서도 옷이라는 것을 지어 입게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인간이 자연계에 속한 몸이면서도 신령한 몸을 덧입도록 창조되었으나, 인간 자신의 범죄에 의해 이런 결과를 낳았으므로 환경이 바뀌었다 해서 즉 영계가 아닌 자연계에 속한 육체라고 해서 인간 스스로 자기 피부를 추위에 견딜 수 있도록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이미 이렇게 인간을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온전하게 만드셨는데도 인간 스스로 죄를 지어 죽은 자가 되었으니 이런 인간의 피부를 추위에 견디도록 다시 만들어 주실 리도 없다. 그렇게 되면 창조가 되므로 창조라면 지금까지의 설명대로 새 창조밖에 없는 까닭이다. 실상은 창조가 아니라, 처음 창조의 번복 또는 취소가 된다고 해야 정확한 해석이 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든 것이 일사부재리다. 그런 일이 있을 턱이 없다. 오직 새 창조를 통해서만 신령한 몸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된다.

또 인간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선물로서 주신 모든 것과 함께 자유 의지를 받았으므로 자기에 관한 한 스스로의 결단과 의지가 오로지 관건이 되어 있는 것이다. 자신의 영원한 운명까지도 자기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니, 그 증거가 아담의 죽음 또는 영물[악령]들의 오늘날 멸망에 처해진 그들의 운명이다. 그러므로 공정 공평을 생명으로 하는 평형의 원리에서 우리 새 피조물들도 우리 스스로 우리 운명을 결정하게 되어 있는 고로[이 세상에 있을 동안만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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