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HOME

3운법칙

  • 3운법칙 계시판

Home > 3운법칙 > 3운법칙 게시판

제목 (23) 과학 지식은 아무리 늘어나도 등록일 2016.02.25 09:18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468

집 교회 운동-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CITHM'의 기본 잣대
----------------------------------------------------------------------------------------------

과학 지식(단 12:4)은 아무리 늘어나도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던 인간이 자기 자유 의지로 죽음에 이르렀고 인하여 영생을 할 수 없게 되었은즉, 영생에 이르는 구원의 경우 역시 자유 의지에 의한 자유 선택의 결과로 되어지는 것이야 당연하지 않은가. 다시 말해 구원 얻는 믿음에 이르는 것은 자기 자유 선택이다. 믿으라고 강요하지도 강제하여 간섭하지도 않는다. 자기가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믿지 않는 것이니, 완전한 자유 선택이다.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완성해 놓으신 구원임을 말한다. 그리고 또 이 사실은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여[나를 사랑하시어 나 위해 죽으셨은즉-갈 2:20] 하나님을 위해 죽든지 살든지 내 스스로 기꺼이 오직 그 뜻대로 행하여 순종함을 동시에 말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내 스스로 순응하든지 아니면 그렇지 않든지 온전히 나의 자유 선택이다. 그래서 영생하는 것도 내 스스로의 선택 사항이라는 뜻이다.

영생이야 물론 누구든지 원하는 바이지만, 이 구원 얻는 믿음에는 위의 설명과 같이 필수적으로 복종을 수반함이므로 이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복종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을 때 그 누구든지 이 구원에 들어올 수 없음을 앞에서 누차 역설한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이 마련되어 있어도 자기 싫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복종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갈라놓은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임을 명심할 이다.

덮어놓고 누구에게나 안겨 주시는 값싼 싸구려가 아닌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이다. 그래서 자기 부인에 관한 말씀을 듣고 많은 제자가 "이 말씀을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하고 물러갔을 때 주님은 몇 마디 말씀만 하셨을 뿐 당연한 결과인 것처럼 받아들이셨다[요 6:65]. 오히려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하시기까지 했다. 이 말씀은, "너희도 가려거든 가는 수밖에 없다"라는 뜻이 함유되어 있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이런 특성을 지니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이므로 믿기를 또는 회개하기를 강제하시지 않고 간섭하시지 않는다. 국가 권력의 힘으로 모든 국민을 믿게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완전히 가짜로 만들어 종교화했기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으로 그런 국가 권력을 등에 업는 행티를 보일 뿐이다. 따라서 일단 믿고 회개에 이른 사람도 그 결말이 저울질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그 스스로 믿음에서 떠나가면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과 동일하게 취급되는 것 역시 당연하다. 그래서 이런 모든 것이 나의 자유 선택에 의함이므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9:24-10:13/15:2/빌 3:8,9/딤후 3:15/벧전 2:2/히 3:6-17] 함이다. "누구든지 믿으면 영생"이라고 하나 믿음의 의미를 정작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결코 간단히 생각할 일이 아닌 것이다.

항상 인과(因果) 관계를 생각해서, 왜 우리가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는가 하는 그 '원인'부터 바로 살펴야 바른 믿음에 들어오고 "헛되이 믿지 않게"[고전 15:2] 되어 제대로 된 '결과'를 거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범죄하여 이리 되었으므로 범죄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자기를 위함으로써 죽은 자가 되었으므로 또다시 "나 자신을 위하여 살게"[고후 5:15] 되면 나는 재차 죽음[이번에는 멸망]에 이를 것으로 기대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미 이루어놓으신 은혜의 역사가 아니더라도, 나는 내 스스로의 선택으로 영생커녕 그 어떤 것도 일체의 나를 위한 일을 할 수가 없다.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가 아무리 움직여 보아야 오직 죽음의 몸짓일 뿐이기도 하지만, 무조건 산 자이든 죽은 자이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일절 해서는 안되는 것이 생명의 영원한 법질서다.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라고 해서 자기 자신을 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그리스도의 구원은 '죽은 자'를 '산 자'로 만드심이다. 그래서 나를 값없이, 은혜로, 단지 믿기만 하면 되는 선물로서의 구원 즉 산 자로서 다시 출생하도록 해 주신 것이다. 출생하는 자가 자기 의도대로 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산 자로서 성령으로 출생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단독적 창조 행위다. 내 스스로 나를 산 자로 만든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일절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는 생명의 철칙 아래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이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말아야 하고 오직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이 하나님의 원래부터의 뜻을 행하고 않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자유 의지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 자신을 위해 살면 나는 아담[의 죽음]의 선례를 따라 필연코 죽을[산 자가 되어 있다가 죽는 것이니 곧 멸망이다-왜냐면 내가 과거 죽은 자였다가 산 자가 되어 있었으므로] 것이기에,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것이 "항상 복종하는"[빌 2:12]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내 스스로 나의 구원을 이루라"[:12]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데 자기 "스스로 영생을 취한다"["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다"-딤전 6:19]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겠는데, 이 역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룬다"[빌 2:12]는 말과 같은 것이다. 왜냐면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단지 피동적으로만 움직이면 그런 표현을 쓰지 못할 터이지만, 영생을 받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내 스스로 믿어야 하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까지[하나님의 나라는 내 스스로 침입하여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므로-눅 16:16/마 11:12] 내 스스로 나의 자유 의지에 의한 자유 선택이기 때문이다.

물론 믿지 않으면 그만이고 내 스스로 천국에 들어가려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평양 감사[조선 시대 관료 사회에서 노른자위로 여기던]를 해 먹으라 해도 자기 싫다 하면 그만이다. 원래부터 영생은 강제로 떠맡기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아담은 아무리 범죄해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강제로 주시는 것이므로 누가 하나님의 강권을 막을 것이냐. 영생하는 자로서 처음부터 아담을 만드셨기 때문에[롬 5:12] 그 사실로만 보면 강제인 듯하나, 사실은 강제가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었으니 위에서의 지적대로 완전한 자유 의지를 함께 선물로 주신 까닭이다.

그래서 아담 스스로 죽는 일을 감행함으로써 그 영생을 버리니 실제로 버려졌던 것이니, 이는 영생이 강제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증명이다. 나의 새 창조에 의한 영생도 마찬가지 원칙으로 다루어짐은 당연하다. 죽은 자가 즉 생명이 없는 자가 자기 생명을 자기 스스로 창조해서 가질 수는 없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시되 그 생명은 조건부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아담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하지 말 것을 주문[요구]하는 것이다. 즉 절대적인 복종이다.

무엇을 요구할 때는 상대의 의지를 묻는 것이니 그의 의지를 좌우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 자신이 결정할 사안이라는 뜻이다. 첫 창조 때는 그런 의사를 물을 상대가 없었으니 아직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상대가 있었다 가정한다면 당연히 그 의사를 물었을 것이다. 즉 순종하겠느냐, 갑을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게 되어 있는 삶[생명]의 법질서를 따르겠느냐고 그 의사 타진을 했을 것이요 당연히 대답은 "예" 아니면 "아니요"일 것이니 "예"의 경우에는 생명이 허용되고 "아니요"라 할 경우에는 반드시 생명을 주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대가 아직 생기지도 않았으므로 그런 의사를 묻는 것도 약속을 받는 일도 없었다. 예컨대 아담을 창조하시니까 영생하는 존재로 즉 생명을 받은 존재로 생겨난 것이지, 그 전에는 아담이라는 존재가 미처 생겨나기도 전이므로 "생명의 법을 지킬래 안지킬래" 하고 다짐을 받아낼 수가 없다. 창조되어 생겨난 다음에 그런 것을 묻는 격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 범죄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영원 멸망에 들어가게 되는 운명으로 낙착되는 것으로 나타났고 아담은 범죄하여 죽음에 들어오게 된 것으로 오늘에 이른 것이다.

우리의 경우 "회개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하고 물으심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물으심이 "명령"[행 17:30]으로 나타나 있다. 역시 마찬가지의 자유 선택이다. 회개하는 것도, 회개 아니하고 무시하는 것도 나의 자유다. 그래서 내 스스로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게 되어 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로서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회개는 앞으로는 여하한 일이 있어도 생명의 법질서를 따르겠다는 결의요 약조이다.

그러면 이것이 기계적인 것이 아니고 마음의 문제로서 자유 의지는 그대로인 만큼 내 스스로 마음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차후 내가 범죄하게 되면, 처음부터 나의 선택으로 "나는 법질서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겠다"는 것과 똑같은 의미가 되므로 자연스럽게 구원은 취소됨이 당연하다. 아담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그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범죄로써] 그 영생이 취소된 경우 외에 별다른 의미가 아닌 것이다.

과학은 아무리 발달해도 영계에 속한 것[영혼에 관련된]은 한계 밖이고 오직 물질적 측면에 관한 것이지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영계에 속한 것이라 함은 영적 존재로서 이상 설명과 같은 자유 의지에 의한 자유 선택을 말한다. 그러므로 과학적 지식 즉 문명 발달에 의해 인간이 개조될 수는 없다. 인간에 관한 한 소위 "진화(進化)"라는 것이 여기서도 그 맹점(盲點)이 발견된다. 왜냐면 인간은 육체만 아니라 영혼이 있어 마음을 작용시킬 수 있는 까닭이다.

기계적인 진화는 가능하다 치더라도 마음의 진화는 절대 불가능이다. 인간은 마음이 그 핵을 이루고 있으므로 마음의 작용 즉 자유 의지가 없는 일반 동물에게는 진화[창조에 대체되는 개념이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자체적인 구조상의 발전 혹은 기능 향상]가 혹 해당될지 모르나 인간은 예외가 되는 것이니, 스스로 진화를 하려면 반드시 마음의 의지 작용이 절대 필수이기 때문이다. 진화는 기계적 진화에만 한정됨이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조물주이신 하나님께서도 좌우지 하실 수 없는 영역임을 알아야 함이다. 좌지우지하시는 그 순간 이미 기계적인 존재가 되어 버리는 까닭이다. 고로 마음은 그 마음이 움직여질 수 있도록 하는 마음의 주인공이 자기 스스로 제어하기도 하고 굳히기도 할 수 있는 유일한 자기 고유의 것으로서, 감동을 받아 반응을 보일 만한 동인(動因)이 있을 때 외에는 원천적으로 고쳐질 수가 없다. 이것이 유일한 결론이다.

왜냐면 기계가 아닌 마음이기 때문이다. 고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유일한 인간 혁변[새 창조]의 유일한 단초(端初)일 수밖에 없음이 드러난다. 기계를 고치는 것은 기계고, 마음을 고치는 것은 오직 마음으로만 가능하니 곧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에 감화 감동되어 스스로 움직일 때다.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에 의해 움직임이다. 이 외에는 인간이란 존재의 핵을 이루는 이 마음이란 것을 고칠 수 있는 방책은 아주 없다.

생명이 생명을 만들 듯이 마음이 마음을 만든다. 사랑 이외의 그 무엇도 마음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랑은 마음의 영역이다. 그래서 사랑만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함이다. 마음이 전환됨으로써 인간이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생은 마음 고쳐 먹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 창조로만 가능하다. 구조적으로 다시 나야 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됨을 통해서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이 바로 이 새 창조의 핵심이 되기 때문에, 죄[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고후 5:15]를 미워하고 의[그 반대되는 것 즉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여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를 좋아하여 사랑하는[한 몸 의식에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지시에 전적으로 따라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구분이 뚜렷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다"[히 1:9] 함과 같다. 우리의 대표 즉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렇게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죽은 자로부터 산 자로 만드셨지만 오직 육체로서의 나의 한 부분만을 그렇게 만드셨지 영혼은 그대로이니 마음 역시 그대로이다. 육체라 함은, 과거의 옛 죄의 몸이 멸해진[롬 6:6] 것을 말함이니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날 때 그리스도와 하나된 불가분성으로 다시 살아났으니[마치 영혼과 육체의 불가분성처럼] 이 둘이 하나되어 있는 구조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체제가 아니다. 왜냐면 둘이 하나가 되어 있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도록 되어 있는 새 삶의 체제가 이제는 되어 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죄성(罪性)"이라는 것은 "죄의 몸"[:6] 즉 "육신"[7:14-8:13]을 말하는 것이지 영혼은 아무 관계가 없다. 영혼은 "불의를 좋아하느냐"[살후 2:12] 아니면 "하나님의 법을 좋아하느냐"[롬 7:25] 하는 것으로 이미 구분되어 있다. 물론 회개하는 것은 마음의 영역이므로 영혼의 일이다. 회개하지 않는 한 그렇다는 얘기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얼마든지 회개할 수 있다. 이미 과거에 고의적으로 범죄하지 않은 경우에만 그렇다[히 10:26].

따라서 이미 불의를 좋아하는 영혼은 구원이 해당되지 않으니[요 3:18-20]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는 탄식조차 없다.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제외된다. 왜냐면 첫 사람으로서의 아담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진해서 그런 위치에 있어 이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추종하는 것과 같음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처음부터 범죄하는 자"[요일 3:8]로서 모든 범죄자의 시작이 되어 있음이다. 그래서 믿지 않고 그리스도께 나아오기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너희 아비[father] 마귀"[요 8:44]라 하신 것이다.

그러나 물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는 터이므로 누가 믿을지 혹은 믿지 아니할지 또는 예수님을 배반하여 팔 것인지 모든 것을 아시나[요 6:64], 우리로서는 그렇게 아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으므로 우리가 오직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사람일지라도 언제든지 회개하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으므로, "나는 구원으로부터 제외되어 있다"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살거리는 말에 좌우되지 말고 마음을 결단하여 지금이라도 그리스도 안에 들어올 수 있다 함이다.

우리는 이 흙으로 돌아가는 육신을 미워한다[고전 9:27]. 이런 육신으로써 한 판 삶의 세계를 이루어 이것이 마치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흥청거리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요 12:25] 것을 미워하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에 넘어가 연출하는 어리석음의 광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전 9:3]. '나 자신을 위해 살아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는' 모든 것을 미워한다. 따라서 내 자신 이런 것들에 발을 들여놓는 일이 없도록 방심하지 않고 깨어 있기 위해 "힘쓰는"[히 4:11/눅 13:24/고후 5:9/벧후 1:10] 것이다.

이 세상 신(神-고후 4:4)과 같은 악령만 없으면 그래서 악인들만 도태된다면 자연스럽게 그런 사랑의 세계가 형성되리라는 것은 공상이다. 나 자신이 얼마든지 그런 악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에덴 낙원에서의 비극은 악인이 있어서가 아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처음부터 악한 것으로 지으심 받은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한 대로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 피조물로 창조된 것인데, 스스로 교만이란 것을 자기 마음으로부터 만들어내고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불신하게 되고 그런 것이 싹이 되어 욕심을 일으켜 살인을 낳고 죽음이 왔고 불행이 온 것이다.

따라서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 인간 개혁과 변혁을 아무리 빛 좋은 개살구로 주창하고 정연한 논리로 설득하려 해도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새 창조가 아니고는 인간 구제는 불가능한 것이요, 그리고 이미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벽하게 이루어져 있으니 더 이상 이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고 단정해 버리고 그런 것에 신경쓸 일이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와 같은 식으로 같은 소리를 되풀이할 때에도, 이미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다음이므로 나중에 오는 것은 그 스스로 참 것에 대한 모방임을 증명함이다.

따라서 거짓이고 속임수에 불과한 것[성경에서 벌써 그리 할 것이라고 예언해두고 경고한 대로]을 드러내는 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 되는 일이다. 그런 가짜가 올 것이라고 성경이 미리 예언하여 경고했는데 바로 그 가짜가 드디어 나타났구나 하면 그뿐이다. 그 무슨 소리를 해도 쇠귀에 경 읽기로 무시해 버리면 그뿐이다. 오직 그리스도 이름으로 죽을 것만을 단단히 각오하고 있을 일이다. 그리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자기 할 몫을 다하리라는 결의만 다질 일이다.

이 세상의 인생으로서 그러므로 현재 시급한 일은, ①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와 구원 받아 다시 출생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 ②그리스도의 사랑에 감화를 받아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마음이 되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것이 될 것 등이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지 않으면 영원히 그렇게 살지 못한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시험하는 자가 되어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사는 것을 포기하도록 함이다. 그렇게 되면 영생 역시 포기함이 되는 것이야 불문가지다.

천국에 가서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 말 것이다. 거기서는 다시는 시험하는 것이 없다. 오직 이 세상에서 시험을 받아 시험을 이기는 자라야 "몸의 구속 곧 양자됨"[롬 8:23]을 받게 되어 있다. 영물들은 이미 그런 필요한 시험을 거쳐 거룩한 천사들과 악령들로 영원히 양분되어 있다. 이제는 우리 인생들이 의인들과 악인들로 영원히 양분되도록 이 세상이라는 시험 무대에 올려져 있는 순서이다.

이 시험이 모두 끝나고 구원 받을 사람 다 구원 받는 종결 시점이 바로 우리 눈앞에 현재 다가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물이나 인간이나, 악한 이들과 의롭고 거룩한 이들로 양분되는 작업이 끝나면 그 때 비로소 영생은 영생대로 멸망은 멸망대로 나누어져 영원 세계의 양면 형태로 항구적으로 지속되어 나가게 된다. 그 때가 본격적인 생명 아니면 죽음의 세상이다. 양분된 채 일절 변동 없이 나가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죽기로 되어 있는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아담이 생존한 것이 아니라 그래서 순종하면 영생이고 불복종하면 영원한 죽음 곧 멸망이라고 오늘날 "배도(背道)"[살후 2:3]에 빠진 기독교는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성경을 아예 잘못 배우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성령으로 [계시에 의하여] 진리를 배우려 하지 않고 무슨 학문처럼 여겨 인위적으로 해석해 버린 결과이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가 무엇이냐 하면 이런 어쭙잖은 성경 해석 그릇된 억지 풀이밖에 없다.

예를 들어 에데낙원이 영계(靈界)라고 가르친 역사가 없다. 초대교회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은 것은 바울이 죄와 죽음이 아담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천명한 데에서 입증된다[롬 5:12]. 죄를 지음으로 비로소 죽음이 왔다는 것은 에덴낙원이 신령한 세계로서 아담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여 있었다는 증거다. 따라서 인생을 죽은 자라 하신 것은 영적인 죽음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 즉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버린 사실을 가리킴이다.

그러므로 이미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이다. 이 멸망의 진노로부터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인 것이다[롬 5:9/살전 1:10],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시 7:11] 함과 같다. 죄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땅을 망하게 하는 짓이므로[아담의 저주로 땅이 저주를 받음과 같이-창 3:17] 진노가 임하실 수밖에 없다[계 11:18]. 그와 같이 하나님의 위엄을 범하였으므로 그 위엄에 저촉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우리의 현재의 죽음의 현실인 것이다. 복종 않으면 멸망으로 위협하심이 아니라 이미 진노와 저주의 멸망에 처해진 상태로부터의 구원인 것이다. 저주 받아 진노 아래 있는데 무슨 삶의 낙이랴.

그러므로 우리가 "양자 됨과 몸의 구속"[롬 8:23]을 받게 될 그 때까지는 이 세상을 사는 곳으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 그래서 살고자 하여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지 말 것이며 죽음의 고난을 기피하려고 하지도 말 것이다. 지금은 정상적이고 본격적인 완전 정착된 세계로 나아가는 오직 과도기일 뿐이다. 구원 받은 자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의 본분에 오로지 충성할 일이다. 이상의 사실을 무시하고는 그 어느 누구도 내세의 복락과 영원한 생명을 논할 수 없다. 논한다면 그야말로 자타(自他)에 대한 기만행위가 된다.

이런 경우 종교를 아편이라 해도 옳은 말이 된다. 종교가 있어서 생기는 유익보다 종교를 빙자한 악이 더 많으니 그리스도로 인한 영생 길을 막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종교는 그래서 인간 본연의 내세에 대한 동경의 발로가 아니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만들어 낸 ‘그리스도 복음의 대용품(代用品)’이라는 단언(斷言)에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으로 하나 되는 방법 즉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 되는 이치를 장차 이 세상 신이 적 그리스도의 출현을 통해 혹 모방하는 형식을 취할지 모르나, 무릇 내용이 유사한 것이면 그 나중에 오는 것은 필연적으로 모조품이라는 것은 상식임을 다시 강조해 둔다.

거듭 말하거니와 그런 본격적인 생명 세계에 들어가는 자격은 단순히 사랑의 법칙을 “지킴”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①과 ②의 순서를 뒤바꾸는 것이 된다. 순서대로 해야지 순서를 바꾸면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로서 절도나 강도가 된다"[요 10:1]. 그런 생명의 법칙을 지키는 것은 현재의 죽은 자로서의 인간 상태로는 불가능함이 이미 입증된 것이다. ①다시 출생하지 않고 ②생명의 법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그 입증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시다. 불가능하지 않다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죽은 자를 벗어나 사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다. 고로 ①오직 새로 지으심 받는 새 피조물되는 것이 급선무다. ②새 피조물됨으로써 다시 출생한 연후에야 사랑의 법칙, 생명의 법칙을 비로소 지킬 수 있고 또 이는 필연 필수가 된다. 그래서 마땅히 지켜야 하고 지키지 않을 때는 ① 역시 무효가 된다.

생명의 사랑의 법을 지킨다고 되는 것이 아님은 지키기에 앞서 인생은 이미 죽은 몸으로서 그 결과로 영원히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다. 아담이 생명의 사랑의 법을 어김으로써 죽음을 맞이한 현재의 인간 상태인지라 그래서 구원의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에, 생명의 법을 다시 지킨다고 해 보아야 의미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아무도 멸망 받을 자가 없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멸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사부재리다. 한번 되어진 일은 재론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리원칙주의다. 일사부재리인 까닭에 죽을 것은 죽고 난 다음에 다시 살아나고 그 연후에야 생명의 법칙 준수를 비로소 논할 수 있는 것이니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만 얼마든지 지킬 수 있다 함이다. 이같이 멸망 받을 자는 멸망 받아야 하고 죽을 자는 죽어야 생명의 사랑의 법칙이 명실공히 '법칙'이 될 수 있고 법질서로서의 기강이 서고 또한 오는 세계 곧 천국의 운용 원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조건 나는 죽을 수밖에는 없는데 내가 죽으면 그만이요 그것으로 끝나고 다시 살아날 재주는 없다.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남이 없어야 "죽음"이 죽음이 되는 까닭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면야 누가 그것을 죽음이라 하겠는가. 죽음 없이 어찌 생명 또한 생명이 될 수 있겠는가. 둘은 상호 대칭[상칭, 대립 개념]을 이루기 때문이다. 고로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 외에는 없다.

그가 살아나셔야만 하겠기 때문이고 다시 살아나실 충분한 근거를 갖추고 계신 때문이다.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과 독생자 하나님께서 하나로 계심이다. 이 하나되심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실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 아니시니 "한 하나님[One God]"이라 함은 하나로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곧 아버지와 아들로서 둘이 하나되어 계심이다. 그래서 하나님 계심을 표현할 때 때로는 "우리"[창 1:26/요 14:23]로서의 복수, 또 때에 따라서는 단수이니 문자 그대로 '하나'로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아버지 또는 아들로 나타내시기도 한다. 그래서 삼위일체의 원리가 존재함을 이미 설명했다. 즉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음을 맛보게 하시고, 그런 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다시 살리신 것이다. 그래서 "죽으시는" 것이 되고 "다시 살아나시는" 것이 된다. 단 이 때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로 계시는 "한 영"의 관계라 이는 육체로 치면 머리와 몸 관계가 되므로 아들이 당하시는 모든 고통의 내용을 남김없이 아버지 친히 역시 함께 당하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필연이 된다.

고로 아버지 또한 아들 안에 계셔서 아들과 똑같은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어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고후 5:19].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도 그리고 부활하셨을 때도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계셨으므로 말하자면 그리스도로 보아서는 아버지께서 살리신 것이나, 또 한 편으로는 그리스도 친히 살아나신 의미가 된다 할까.

그리스도 안에 계시던 아버지의 영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것이 되므로 그리스도 안에 성령으로 계시던 아버지 친히 아들과 함께 죽음에 동참하시고 또한 다시 살아나실 떼도 함께 하심이었으니, 아버지도 아들과 함께 살아나심이 아닐까 할지 모르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은 사람으로서 죽으심이나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고 다시 살아나심의 의미는 아들께만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 먼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창조된 다음 영원한 영혼이 조성되고 그리하여 영혼에 걸맞게 영계인 에덴낙원이 창설되어 거기서 아담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었으므로. 이제 범죄로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다시 환원됨으로 인해 육체는 썩어지나 영혼은 그대로다. 그러나 육체와 불가분으로 되어 있는 까닭에 영혼 없이 영혼 혼자서 움직일 수는 없다. 그래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보듯이 일정한 장소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난다.

반면에 네피림으로서 죽은 영혼들은 그 자체가 인간과는 다른 구조로 되어 있으므로[영물들이 인간처럼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지 않고 영혼이 형상화되어 있으므로] "귀신"[주님은 이들을 "더러운 귀신"이라 하셨다]으로 남아 얼마든지 이 땅 위에 횡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도 사람이시므로 육체가 죽으시면서 영과 분리되셨으나 그리스도의 영 역시 우리의 영[혼]과는 다르니 하나님의 영으로서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영으로 노아 당시 물로 말미암아 죽어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시어 전도하셨다"고 베드로는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영은 육체와는 별도로서 사람의 육체가 죽는다고 영이 어찌 되는 것이 아니고 영 그대로 남아 있음이니 그리스도의 경우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시므로 아버지와 여전히 하나되어 계심인 것이다. 단지 동시에 사람이시므로 그 영으로 스스로 살아나시지는 못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살려 주셔야만 이전 육체[죽었던 그러나 이제는 다시 살아난]로서 사람으로 계실 수 있음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계실 때 항상 자신의 사람되심을 강조하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감추신 것도 아니니 항상 이런 양면성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기에 헷갈리는 것도 물론 아니다. 사람이신 경우 즉 사람의 측면이 강조될 때에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하나님으로서의 측면이 필연적일 때는 하나님으로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양면성 또는 동시성에서 그리스도는 유일하신 사람이심을 항상 염두에 두면 혼동이나 혼돈을 느낄 이유는 없다.

그래서 아들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 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는 것으로서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요 10:18] 하신 것이다. 이 모두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시기 때문에 하실 수 있는 말씀이시다. 그러나 하나라고 해서 그 어느 편도 피동적으로 움직이심이 없으니 각기 주인 의식으로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움직이시나, 서로가 서로를 위하심이기 때문에 항상 일치 조화를 이루심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을 아들에게 강압하시는 것도 없고 아들 친히 아버지를 사랑하여 아버지를 위하시는 까닭에 항상 아버지의 뜻을 이루되 아버지의 편에서 보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심이나 아들의 편에서 보면 항상 아들의 주도(主導)로 이루어짐이다. 그래서 또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17] 하신 것이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의 하나된 관계에서 마찬가지다. 그리스도 편에서 보면 그리스도께서 주장(主掌)하심이요 내 편에서 보면 내 스스로 주인 의식으로 일을 마무리해 나가는 것이다. "이제는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함은 내가 그렇게 주장해서 주인 의식으로 나의 의지로써 "그리스도를 사는 것"[빌 1:21]을 말함이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것을 의미함이다.

아버지께서 우리 곧 나를 위해 내가 현재 당하고 있는 죽음의 저주 그 고통을 나와 함께 짊어지심으로써 나와 함께 죽으신 다음 다시 살아나실 때 나도 함께 살아나도록 하려 하시는데 그리 하자면 나와 똑같은 육체가 필요하시게 되니 왜냐면 나와 같은 육체가 친히 되셔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에게 "네가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하심이다. 왜냐면 그렇게 아들께서 죽음을 당하시면 그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나를 구원하시게 되는데 그래서 나의 구원이 완결되는데, 그렇게 다시 살리기 위해서는 아들께서는 죽으시고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죽으신 아들을 다시 살리시는 역할을 하심으로써 이루어짐이다.

아버지께서 죽으시면 안되니 왜냐면 아버지께서는 아들보다 크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들께서 다시 살아나심 즉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리시는 일에도 삼위일체 원리의 대칭[상칭, 대립, corresponding] 관계에서 반드시 큰 자는 작은 자를 인도하고 작은 자는 큰 자를 따르는 형식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리실 수 있는 것도 아들은 반드시 아버지를 따르신다는 의미 역시 함께 포함되는 것이다.

이 경우 아버지께서 만일 [우리 위해 사랑되시어] 죽으시고 아들께서 살아 계시면 아들께서 아버지를 살리실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아버지께서 죽으셨으므로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따라 덩달아 죽으시는 것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주(主)와 종(從)의 관계, 대소(大小) 관계 그리고 인과(因果) 관계다. 때문에 아들에게 아버지께서 의사 타진을 하신 것이라고 위에서 그런 설명을 해 본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이시라 해도 일단 우리 위해 죽으셨으므로 그 경우 스스로 살아나시는 법은 없다. 반드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리시는 방법을 통해야 함이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다시 살리는 경우 대소, 주종, 인과 관계를 따르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크신 쪽에서 작으신 쪽을 살림으로써 생명이신 아버지를 아들께서 따름으로써 다시 살아나는 이치이다. 크신 쪽이 작으신 쪽을 따르시는 법은 없다. 이 아버지의 뜻에 아들께서는 순순히 동의하실 뿐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곧 아들 자신의 뜻이라 스스로 그 목숨을 우리 곧 나를 위해 내어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아버지의 뜻은 분명 아버지의 뜻이므로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고,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것이지만, 아들의 뜻이 또한 친히 우리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시려는 데에 있으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제물과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다' 하셨고, '하나님, 이제 보십시오, 두루마리 책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하셨다"[히 10:4,5] 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 이 모든 엄청난 사랑의 일, 아름다운 일을 이루신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음을 당하신 것은 아버지와 아들 이렇게 하나로 계시는 그 모습 그대로 하신 것이고, 그리고 그 모습을 따라 나와 하나 되는 관계를 이루시고자 나를 위해 죽으셨다. 단지 나를 위해 죽어 주셨다는 단순한 그 사실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하나로서의 의미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이로써 그 분의 영[성령]이 내 안에 계시게 되면, 아담이 먼저 '육체'가 창조되고 다음에 '영혼'이 조성된 것처럼, 나 자신이 또한 그러한 '육체'에 해당되고 성령께서는 그 '영혼'에 해당되시어 영원히 '육체'와 '영혼' 관계의 이중 구조를 이룬 불가분성으로 함께 존재하게 되므로 명실 상부하게 새 피조물로서의 이중 구조['영혼'과 '육체']로서 "다시 출생하게"[요 3:3] 되는 이치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그 죽으심을 우리를 대신하신 죽음이라 착각하고 있음은 크게 왜곡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은 "위하여["for"] 죽으심"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을 무조건 "대신하여 죽으심" 일색으로 번역해놓고 있다. 번역자의 편견, 선입견이다. "대신한다"는 영역은 "instead of", "on behalf of"로 되어야 하는데 실제는 영역으로서 "for"인 것이다. 영어로도 그런 대신한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는 있다. 그러나 대신하는 죽음일 경우 그 '대신 죽음'답게 다시 살아나시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살아나는 경우 그 '대신 죽음'으로 인한 나의 삶[생명]은 그의 살아남과 동시에 종료되는 까닭이다. 즉 그 '대신 죽음'이 무효가 되어 버리고 전적으로 무의미하게 된다. 왜 이 점을 생각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도 인간처럼 시늉한 해 보이고 죽으시는 흉내만 나타냈다는 결론이 된다. 일종의 '쇼'가 된다. 모든 일에 진실 그리고 원리원칙을 제일주의로 채택하여 나가시는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일하시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답지 않은 처사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성경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나를 대신하심'이 아니라 '나와 함께' 죽으심이다. 나와 함께 죽으심이므로 불가불 다시 살아나셔야 하는 것이니, 그래야 나와 '함께 살아나심'이 되어 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역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엄격하게 생명과 대칭되는 죽음의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한번 죽으시면 다시 살아나셔서는 안되는 것이나 아버지와 하나 되심에서 다시 살아나실 수 있는 것임을 다시 강조한다.

이래서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은 나와 함께 살아나심이요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은 내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음이다[엡 2:6]. 곧 이제는 그리스의 존재가 바로 나의 모습, 나의 생명, 나의 모든 것이 되심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다[갈 2:20]. 이와 같이 나는 죽어야 할 죽음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었고 지금 현재 살아 있음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인하여 다시 살아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나의 생명이시고 친히 나의 모습이시다. 여기서 더 무엇을 말하리요. 지금 살아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있음이니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항상 전제한다. 이와 같이 둘이 하나됨은 반드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고후 5:15]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사심으로써만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사신다는 것은 이제는 영원히 내게 주신 선물로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갈 2:20].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친 것이다. 나를 자기 피 값으로 사셨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나 자신을 그와 같이 바쳐야 함이니 절대로 강제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면 모든 것이 사랑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내 스스로 믿어 회개하여 복종하기로 작정한 것이 나의 애초 믿음이었던 것이다. 고로 믿어야 구원된다 함이다.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어디까지나 나의 주도로 항상 일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나를 위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성령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내가 움직인 것만큼 움직이실 수밖에 없는 것은 내가 이 일에서 주장(主掌)이고 주도(主導)이기 때문이다. 나의 의지력보다 앞장 서셔서 가시면 그것은 간섭이 되고 강제가 되는 까닭이다. 이것이 사랑의 양면성 또는 동시성이니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갑을 위함으로써 둘이 하나되는 머리와 몸 관계의 생명의 법칙은 사랑이 그 골격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상(異象) 중에 요한에게 나타나실 때 “내가 전에 죽었었다. 그러나 보라 내가 영원히 살아 있다”[계 1:18] 하신 대로 우리 역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오늘이 되어 있다. 즉 옛 사람은 죽었고 지금 그리스도 안에 살아 있음은 새 사람으로서다[롬 6:6/골 3:9/엡 4:22][골 3:10/엡 2:154:24]. 하나님의 은혜로 이 사실을 현실로 만들어 주셨으니 이를 믿고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진실로 복이 있다 할 것이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은 육체의 정(情)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의미다[갈 5:24]. 다시 말해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약 1:15]고 한 그 욕심이니, 이는 죄를 다시는 짓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다”[고후 5:15]는 의미이니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여 자기중심은 더 이상 발붙일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무덤에 장사 지내진 것이다.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의 청산과 더불어 죄의 뿌리로서의 육신의 동시 척결이다[롬 6:6]. 많은 사람이 전자만 택하고 후자는 간과하고 보지 못한다. 일부러 버리는지도 모른다. 이는 영생만 욕심 내는 것이니 이런 욕심이 바로 악인의 특성이다. 이를 용납하실 리 없으니, 이는 동전의 양면에서 한 면만으로 통화 구실을 하려는 무리요 억지가 되는 까닭이다. 이런 무리와 억지가 용납되지 못함을 가리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스도의 구원은 이 사실을 사실로서 믿느냐의 여부를 말하는 것이다.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한 대로 믿으면 구원은 즉각적이다. 왜냐면 우주 천상천하에 충만하신 성령이시므로 전도자가 전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성령께서 곧장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바로 그 자리에 성령께서 계시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상 설명과 같이 구원에 관련된 일체의 모든 것이 하나도 빈 틈 없이 이미 다 이루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고 순종하는 나의 마음에 그리스도 친히 그 성령으로 내게 개별적으로 주시는 "선물"로서 임하시게 되면 나는 즉시 새 피조물로 창조가 되고 "성령으로 나는"[요 3:5,6] 즉 다시 나는[출생하는] 것이 되고 그 순간 하나님의 분명한 아들로 탄생된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성령으로 출생하는 사람은 바람이 제멋대로 불 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음과 같다" 하셨다. 바람을 느낄 수는 있듯이 획기적인 변화를 감지할 수는 있는 것이니 사람의 삶이 그 목표가 달라졌는데 어찌 변화가 인식되지 아니하랴.

싫어하고 좋아함이 완전히 바꾸어졌는데 그 변화를 누가 모르랴. 이와 같이 '둘이 하나 되는' 관계에서는 다시 말해 이 생명과 사랑의 법칙에서는 쌍방 그 어느 편도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일이 없다[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이것은 절대적이다. 이것이 '둘이 하나 됨'의 특징이요 영원한 불문율이요 법질서다. 이 생명의 사랑의 불문율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자연스럽게 내 안에 이루어지게 하셨고 확고히 세워지게 하신 것이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 이 의미는 또한 나를 위해서 사심[당신 자신을 위하심이 아닌]을 뜻하기 때문이다.

 

글쓴이    비밀번호   
보이는 순서대로 문자를 모두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