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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4) 과학 지식은 아무리 늘어나도 - 2 등록일 2016.02.25 09:19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403

 

죽으심은 자신의 전부를 바치시는 의미요 그 전부가 나의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전적으로 나를 위해 존재하신다는 놀라운 현실적 의미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나 역시 자연스럽게 주님만을 위해 살고 죽고 주님만을 위해 존재하고 주님만을 영원히 위하는 삶의 체제가 확립되는 것은 당연하다[롬 14:7-9]. 주님이 나를 위하시는데 내가 또 다시 나를 위할 수 없지 않은가. 주님은 나만을 위하시니 주님을 위하는 것은 당연히 내가 아닌가. 내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는 실제로 죽은 것이다. ①주님의 죽으심이 엄연한 역사적 현실일진대 ②나의 죽음도 가상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엄연한 역사적 현실이다. 많은 사람이 전자①만 믿으려 하고 후자②는 무시해 버린다. 이는 믿음이 아니다. 따라서 그는 아직도 구원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스도의 구원은 이 사실을 사실로서 믿느냐의 여부를 묻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저주 받은 죄인으로서의 죽음이므로 말 그대로 저주의 표상이 되는 나무에 달리신 모습을 취하게 되셨고 또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으로서 극형에 처해지시는 형상을 나타내시게 되는 것이므로 그래서 십자가 죽으심이다.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각자의 몸에 채우는 우리의 고난도 이에 준함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은[요 19:34,35],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용서가 없다"[히 9:22] 하신 대로, 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대속물"[마 20:28, "ransom" (포로 따위의) 몸값을 치르고 자유롭게 함/배상금을 치르고 되찾음]로서의 죽으심을 의미함은 물론이나, 또한 이와 같은 의미로서의 피 흘리심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눅 4:18]가 우리가 전하는 그리스도 구원의 내용이다. 스스로 포로된 처지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이 구원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아무나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오는 것이 아니라고 잘라 말씀하셨다[요 6:65]. 죄의 포로, 이 세상 지배자요 신(神)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포로, 죽음의 포로였음을 자각하는 자에게는 그 어떤 무슨 말씀을 하셔도 또는 요구를 하셔도 그리스도를 떠나거나 버리는 법이 없다.

하기야 나는 그런 십자가 고통을 당하지 않았으므로 "나를 대신하여" 그런 죽음을 당하셨다고 해도 무리한 말은 아니지 않으냐 할지 모르나, 그런 경우에도 "나를 위해" 그런 정도의 심한 고통을 당하셨다 해야 옳은 표현이다. 어느 경우에서든 "대신 죽으심"이라 말할 때에는 "나는 그 대신, 죽을 것을 면하였다"는 인식을 주기에 충분하므로 나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함께 장사 지내진 엄연한 현실을 외면하거나 무시하고 망각할 위험이 크다.

위 구절의 "대속(代贖)물"이라는 말 자체도 단순한 "우리 위한 죽으심'을 "우리 대신하신 죽으심"이라고 신학적 의미를 덧붙인 번역과 같은 속성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번역한 것이다. 그냥 간단히 말해 "몸값[ransom]"이라는 의미다. 우리말 성경의 "속(贖)하다", "구속(救贖)", "속전(贖錢)', "속량(贖良)" 등의 의미로서 값 주고 풀어 주는[방면하는] 그런 의미다. "대신 어쩌고" 하는 의미는 없다.

영역으로는 "ransom", "redeem, redemption" 등의 단어다. "하나님이[주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라 하여 분명히 밝히고 있는 대로, "그리스도의 피 값[죽으심]으로 우리를 사신[매입, 구입]" 사실을 가리키는 용어들이다. 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죽음 등에 매여 있던 상태를 자유 해방케 하심이니 당신께서 친히 흘리신 피 곧 죽음의 몸값을 들여 그렇게 하심이다. 이 사들이시는 일도 기계적으로 즉 강제로 되는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 우리가 영원히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영원히 당신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하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나를 사들이시는 것이니 이는 또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위해 나 자신을 바치는[드리는] 동시성과 양면성의 만남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이것이 회개다. 항상 이와 같은 '동시성'과 '양면성'을 마음에 깊이 아로새길 일이다. 절대로 일방적으로 되는 일이 없다. 이것이 사랑이 특질이다.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들이신다는 것은 자기 목숨을 값으로 지불하고 자기 소유로 삼으신다는 것인데 이 경우 사랑의 의미밖에 없음을 다시 강조한다.

그냥 방면시켜 풀어 주어 자유롭게 하신다는 것만 생각하지 말 것이니, 자유롭게 풀어 준다는 것은 강제적인 억압에서 자유 해방을 준다는 것이로되 정상적인 원래의 상태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갑은 을의 것, 을은 갑의 것이라는 관계로 복귀함을 뜻한다. 따라서 이런 관계가 기계적일 수 없고 믿어야 구원된다 함과 같이 어디까지나 나의 자발적인 사랑으로 나 자신을 주님[나의 소유주, 주인이시니 나는 당연히 그 종으로서]께 드리는 경우에 나를 사들이시어 나를 소유로 삼으시는 관계가 형성됨이다.

이는 또 바꾸어 말하면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다"[갈 5:18] 한 반면,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다"[고전 9:21] 함과 같은 것이다. 전자는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모세 율법과 같은 것으로서 그리스도 없이 스스로의 순종으로 자신을 구원하려고 발버둥친 것을 가리킴이요[모세가 물론 이와 같이 하라고 가르치지 않았고 그와 반대로 그리스도 없이는 순종할 수 없음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후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골 3:10], "새 생명"[롬6:4], '새 피조물"[고후 5:17/엡 2:10/갈 6:15]로서 반드시 지키게 되어 있는 "새 계명"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차이가 분명하다.

즉 이전에는 내가 죄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죽음에 소속되어 있어 그 아래 종이 되어 있었으므로 순종이 불가능했으나, 이제는 생명에 소속되어 그리스도께 사랑으로 종이 된 것을 가리킴이니 사랑함으로 인하여 내 스스로 기뻐서 즐거워서 하는 종의 노릇 곧 섬기고 위하고 복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순된 표현이 아니니, 생명과 죽음의 차이요 사랑과 사랑 없음의 차이다. 충만함과, 그렇지 못하여 항상 부족함을 느껴 전전긍긍하는 것과의 차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종적으로 횡적으로 그득하고 넉넉하고 든든하고 한없이 느긋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해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의 확대, 확장, 확충을 현재 누리며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모두 바치시고 나 위해 죽으시기까지 하신 그리스도이시니[갈 2:20] 그렇게 죽으신 뒤 다시 살아나시어서는 어디로 가시리요. 당연히 나를 떠나실 수 없어 나와 함께 사시고 나와 가장 가까운 사이로서 바로 내 안에 계심이다.

성경은 분명히 "나를 사랑하시어 나에게 자신을 주셨다"[:20]고 명시했다. 그리고 우리를 "고아(孤兒)처럼 버리시지 않는다"[요 4:18]고 친히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내가 이 말씀을 믿을 때,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엄마의 품속처럼 고아가 받아 모시는 유일한 조건은 믿음이므로, 내가 이 사실을 믿는 한 나와 함께 계시고 사시고 있는 것만은 천하 없어도 분명한 사실이다. 고로 나의 일상생활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생활이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생활이니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생활인 것이다[:20].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삶인데, 내 욕심 따라[약 1:15] 나를 위해 살아[고후 5:15] 죄 짓는[요일 2:1/3:6-10/5:18/고전 15:33,34/벧전 4:1/히 2:14,15] 삶일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엄마와 아기 관계인에 아기가 엄마를 믿는데 아기가 엄마 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보았던가. 엄마가 주는 약이 쓰다는 것을 알면서도 엄마가 주는 약을 한번 내려다보고 그리고 엄마 얼굴 한번 쳐다보고는 울면서 그 약을 받아 먹지 않던가.

"내가 오겠다"[요 14:18] 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으로 주셔서"[:26][성령께서 "아들의 이름으로" 오신다는 것은 아들을 가리키심이니 곧 아들께서 오신다는 뜻]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게 하실 그 "또 다른 보혜사"가 바로 아들 자신이심을 밝히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셨으나, 실제는 아버지와 하나되어 오심이니 그래서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할 것이다"[:23] 하신 것이다.

그러나 둘이 하나일 때는 그 대표성을 띠는 것으로써 표현되는 것이니 아버지와 아들로서 둘이 하나이실 때에는 "아버지"로서 대표되시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 아버지와 상관하는 것처럼 우리가 말하게 된다. 그러나 반드시 아들과 함께 하심이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와 같이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금도 혼동할 것이 없으니, '하나'로 계신다는 표현 그대로 '둘'이 아닌 '하나'로서의 모습이시기 때문이다. 즉 '사람으로서의 아들의 모습'이시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버지와 어머니 같으신' 모습을 가리켜 대표적으로 "아버지"시라 함과 같으니 최초의 남자[아담]에게서 최초의 여자가 났으므로 둘이 별도의 이름이 없이 대표성을 띤 "아담"의 이름으로만 불려지고 단지 "남자"와 "여자"로 구별되어 있었던 것과 같다. 따라서 "아버지"가 대표성을 띠는 호칭이므로 "아들" 역시 그런 대표성을 띤 이름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현재 구원 얻은 이들을 남녀를 불문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하는 것이다.

이런 남녀 구별은 이 자연계를 벗어나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면 자연 소실(消失), 소멸되는 것이다. 영원히 사람이 되어 계시는 그리스도 친히 그런 구별이 없으시니 마지막 아담으로서 여자가 생기기 이전의 첫 사람 아담의 모습이시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아담이 창조될 때 남자의 특성을 지닌 육체였다면 반드시 형평을 유지하기 위해 여자도 함께 지으셨을 터이지만, 한동안 지낸 후 즉 에덴낙원까지 창설하시고 아담이 거기 살게 되면서 비로소 "사람[아담]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하시고도 여자를 짓지 않으시고 에덴낙원의 각종 짐승[영물 곧 천사]들을 지으신 것이다. 그런 뒤에야 여자가 창조되는 것이며 비로소 그 때부터 아담은 남자가 되는데, 그 때 아담이 여자의 이름을 짓지 않았고 범죄 후에야 이름을 지어 부르게 된다. 이는 짝이 될 수 없는 짐승들의 이름을 짓던 때와 같은 경우가 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둘이 하나되어 대표성을 띤 "아담"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는 의미다.

왜냐면 남자는 여자를 다스리게 되고 여자는 남자를 넘보려 하는 경향을 띠면서 더 이상 애초와 같은 이상적인 둘의 하나됨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육체로 한 몸이 되는 것이야 변함이 없지만 최소한 사랑 가운데에서의 이상적인 둘이 하나되는 관계는 허물어졌으니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다스리는 처지에서 무슨 하나됨이 가능하겠는가. 이는 처음 여자가 범죄 행동을 할 때 남자와 상의하는 대신 마치 남자더러 자기를 따르라는 식이 됨으로써 발단된 비극이다.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과 이렇게 하나가 되어 있으니 종적으로 한없는 충만이다. 그리고 나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어 역시 나와 하나가 되어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모든 이웃들[믿음의 형제들]과 더불어서 역시 횡적인 하나를 이루고 있으니 이 또한 한없는 충만이다. 나는 이 충만 위에 더 충만해짐을 위하여 사랑의 사자(使者) 노릇을 기꺼이 하는 것이니 곧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사람의 "아름다운 발"[사 52:7/롬 10:15]이 되어 있는 것이다. 모두가 일제히 나를 위하니 모두가 나 자신이 되어 있기에 한없는 충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와 같은 아름다운 사람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우리가 됨에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내가 모든 것을 분뇨[dung]처럼 기꺼이 버렸다"[빌 3:8] 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보람 있고 가치 있으며 아름다운 일은 없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전 13:3] 한 대로 바로 이것이 사랑의 일인 것이니 곧 아름다운 소식을 모든 이들에게 전달하여 알림이다.

에덴낙원에서의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죽음뿐 아니라, 이미 세상은 저주 받아 한 차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었던 경력이 있으니 곧 노아의 홍수다. 그 때까지는 사람도 거의 천년을 살았고 동물들도 약육강식이 아니라 모두 초목을 뜯어먹고 살았다[창 1:30]. 그러나 노아 홍수 이후 하나님은 인간에게 육식을 허락하셨다. 단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생명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피째 먹지는 말도록 명하셨다.

인간이 동물을 잡아 먹는 이 때부터 동물들 사이에서도 육식의 습성이 길들여진 것이다. 처음부터 서로 먹고 먹히는 것이 습성이었다면 노아의 방주 안으로 둘씩 짝지어 들어갈 때 서로 잡아 먹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조처하셨다던가 하는 무슨 언급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없다. 뿐 아니라 반년 넘게 방주 안에 있었으니 육식 동물은 그동안 목숨 연명하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잡아 먹히는 동물들의 고통은 노아 홍수 이후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비록 홍수는 끝났으나 한마디로 저주 받은 그대로의 모습이다. 인간의 수명도 이전과 같이 천년 가까운 장수가 아니라 점차 단축되어 갔으니 아브라함의 경우는 170여세요 모세는 120세 정도로 마무리 지어진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런 저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서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나 위한 그리스도의 저주 받으심을 통해 나는 과거처럼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위하고[고후 5:14]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위하시는 내 이웃들을 위하여 살게 되는[요일 3:16] 새 피조물, 새로 지으심 받은 존재가 된다.

이보다 더한 이상적이고 합리적이고 확고한 인간 쇄신 방법이 없다. 이와 같이 인간 자체가 변하여 그 삶의 구조가 획기적으로 새롭게 변혁되니 그 삶 자체에 혁명이 일어난지라, "보라! 이전 것은 다 지나갔다!"[고후 5:17] 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 사는 방법이요 사람 사는 법칙이요 따라서 삶 그 자체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종교화'된 것에서부터 눈을 돌려 '생활화'로서 올바르게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삶의 기본 법질서를 온천하에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도'다. 종교는 이러한 인간 구원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정작 핵심되는 것은 접어두고 엉뚱한 것, 당치도 않는 것을 놓고 쓸데없는 논쟁을 벌여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니 "행위로 얻는 구원"이니 하는 논쟁만 일삼는데 이는 무익한 일이다. 이 세상 신(神-고후 4:4)이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혼돈시키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구원은 이미 해결이 되었으니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그 자질, 의식구조를 갖추게 하고 그리하여 그 바탕 위에서 그렇게 사는 구체적 방법을 보여 주신 것인데, 이것은 접어두고 구원을 한번 받았으면 그것을 도중에 잃어 버릴 수 있느냐 없느냐, 그리스도인들의 행함이 믿음과 어떻게 조화되느냐 따위로 갑론을박만 하고 있으니, 무엇이 믿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믿고, 믿지도 않으면서도 믿는 줄로 자신을 속이는 등 혼란과 혼돈만 가중될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종교는 구원만을 말하지 구원 받은 다음의 할 일 즉 어떻게 하면 서로 사랑하여 생명의 법도대로 살 수 있는지 그 사는 방법을 말하지 못한다. 왜냐면 논리적이지 못하고 감상적이며 구체적인 것을 결한 추상적인 허공에 뜬 인간적 편견으로 세워진 허구이기 때문이다. 구원 얻어 좋은 곳에 가기만 하면 저절로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되는 줄로 착각하고 그런 막연한 말만 하고 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주님의 말씀과 같이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해주는 복된 좋은 소식이다.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려고 사면팔방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죽은 것이 살아나고 멸망하게 될 것이 영생에 들어가게 됨이다. 인생은 당면문제가 죽음에서의 탈출이다. 이제껏 산 자로서 존재하다가 더 이상 산 자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죽음이다. 또 삶의 가치는 행복에 있는데 존재 자체가 괴로운 것, 불행한 것이 죽음이다. 생명이 의미하는 모든 것과의 대칭[대립]적 의미다.

구원은 이 죽음을 끝내는 것을 일컬음이다. 즉 "흙"[창 3:19]의 몸을 벗어 버리고 신령한 몸을 입게 된다. 그리고 더 풍성한 삶을 얻게 됨이다. 그 "풍성함"의 하나는 모든 세상이 사랑 가운데 한 몸처럼 하나되어 사는 삶의 낙이요 또 하나는 신령한 몸으로 영원히 죽지 않으니 이전처럼 흙의 몸으로서 제약을 받는 것 없이 자유자재로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낙이다. 가령 새처럼 자유 분방하게 왕래하여 오로지 땅에다 몸을 붙이고 다닐 필요가 없게 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 더 빨리 신속하게 움직이며 공중만 아니라 물 속이나 우주 공간이나 그 어디든 번개처럼 왕래하는 것과 같은 능력과 자유로움이다.

이것이 신령한 몸의 특성이다. 흙의 몸일 때는 비행기가 있어야 하고 배가 있어야 하고 요즘처럼 컴퓨터가 있어야 판단력이 신속해지지만 그런 것이 없어도 그보다 더욱 더한 능력과 자유자재함이 있게 되는 것이 '인간적' 생명이다. 우리는 현재 '동물적[자연계에 속한]' 생명에 국한되어 갇혀 있는 것이다. 능력만 있어도 안되고 사랑이 있어야 하고 사랑의 세상만 아니라 능력이 있는 자유자재함이 있어야 '인간적' 생명의 낙을 누림이다.

사랑의 세계라는 것은, 각자가 다 성령을 모시고 있으므로 내가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기 때문이니 각자가 다 자기를 위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위하는데 각자 그 이웃을 위함으로써 그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되는 그런 세상이다. 그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도 그 위하시는 그 사람을 위한다는 뜻에서도 그렇지만, 바로 그 사람 안에 내가 오로지 하여 섬기고 사랑하는 내 하나님이 계시기도 한 때문이다.

이런 것이 몸과 머리의 관계이니 이러한 한 몸의 이치에서 한 몸으로 통해 있으면 모두가 나 자신이다. 확대, 확장, 확충된 나인 것이다. 눈이 코를 위하고 다리가 팔을 위하는 지체의 역할로써 자연스럽게 그렇게 거대하게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자기 자신'을 각자 평균되게 평형되게 공정공평하게 한 쪽으로 쏠림이 없이 평등하게 구가하고 향유함이다. 진실로 인간이 꿈꾸는 것 이상의 이상향의 삶이 아닌가!

이런 희소식을 전달하는 전령사(傳令使)를 가리켜,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 15:23],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사 52:7]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의 열쇠는 사랑이다. 사랑이 무엇이냐. 생명의 핵심이다. 그 사랑이 어떻게 표현되느냐,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 그 참 의미를 안다고 했다[요일 3:16].

즉 머리와 몸 관계에서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지 않는 한 그 무엇이든 사랑이 아니다. 이 십자가 사랑을 보고 우리 마음은 동(動)하게 된다. 그 사랑에 감읍(感泣)하고 무릎을 꿇게 된다.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는 순간 이미 그 마음은 주님을 한없이, 한없이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믿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居處)를 그와 함께 할 것이라"[요 14:23] 하신 것이다.

즉 같이 함께 사신다는 의미이시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요 묘사요 시(詩)이며 그리고 한 폭의 그림이요 아름다운 음악이냐. 온갖 표현을 동원해도 모자란다. 성령을 주신다고 하심이 이와 같다. 그리스도 친히 아버지와 함께 내게 오셔서 나와 영원히 함께 사시는 것이니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냐. 순종의 어떤 구체적인 행위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행 5:32]이라 함과 같다.

이로써도 믿음은 사랑이요 사랑은 순종을 의미하는 것임을 확언할 수 있게 된다. 곧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킨다" 하신 바로 그것이니 곧 순종이다. 그래서 사랑의 마음이 아닌 것은 믿음의 마음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의 마음을 보시고 그 사랑이 순종을 넉넉히 나타낼 줄 아시고 이를 신뢰하셔서 "성령의 선물"[그리스도 친히 아버지와 하나로서 오심]을 주시는 것이다. 물론 나중에 어떻게 될 줄을 하나님은 미리 아시므로, 이렇게 성령을 받고서도 나중에 배반하게 될 사람들이 있지만 이를 몰라서 그렇게 성령을 주시는 것은 아니다.

아시더라도 사랑의 특성은 항상 현재에 있으므로 현재 사랑하면 그것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현재를 기준하여 움직이시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단지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헛된 말에 속지 말 것이다. 그것은 거짓이요 속임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리킴이 없이 특정 사실만을 믿는 것으로 세뇌시키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 특정 사실이 대관절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랑 없이 그 사실을 감히 수용할 수 있는가? 이것은 순수하게 상식에 관한 문제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믿지 않는 것으로 단정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은 반드시 순종을 낳는 것, 이 역시 평범한 상식이다.

§  그리스도의 교회가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 남으신 고난을 함께 나누며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떠나 혹은 그리스도 밖에 있을 경우 그 때 받을 영원한 고통과 고난에 비하면 감히 논할 수조차도 없다[롬 8:18]. 그리고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만이 받는 고난도 아니니,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된 처지로서 이 세상에서 당하는 갖가지 고난에 그들의 구원을 위해 동참해 주는 의미일 뿐으로 특별한 것도 아니다.

이 세상 문화란 것도 그 가치를 인정 받아 지금까지 존재해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도록 배려하심에서 부득불 이 세상이 그 목적이 달성되기까지는 존속되어야 하겠기에 불가불 나타나질 수밖에 없는 일시적인 현상들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서의 인생 한 평생, 이 세상 짧은 삶이라도 아무쪼록 보람 있게 보내라는 데에 뜻이 있지 않고[물론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그 삶 자체가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세상 삶을 말한다], 마땅히 구원 받아야 할 사람들을 구원해내기 위해서는 부득불 세상이 존속해야 하니, 그 존속하는 동안만의 인간 세상의 온갖 양상일 뿐, 그 외로는 일절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 대한 순종 여부로써 천국에 들어가고 못하고 하는 것이 결정되므로[마 7:21], 장차 오는 영원한 세상에서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행적(行蹟)을 가리켜 "전생(前生)"이라 하게 되는 그런 막중한 의미만 있을 뿐이다. 전생과 내생(來生)은 둘로서의 짝을 이룬 하나다. 이 내생은 불교에서 말하는 바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남"을 말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은 영원하므로 이 세상에 살면서 "선악간(善惡間)에 그 몸으로 행한"[고후 5:10] 바를 따라 오는 영원한 세상에서의[현재의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고 시한부다] 삶이냐 또는 죽음이냐 하는 것을 가름한다는 그 뜻이다.

즉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 천국에서 오늘 이 세상에서 행한 바 그 "참고 선을 행한데"[롬 2:7,10] 따른 포상 또는 결과인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형벌의 처소인 불 못에 있는 사람은 오늘 이 세상에서 행한 자기중심의 악을 행한데 대한 보응인 것이다[:8,9/요 5:29]. 그 원인에 대한 그 결과로서의 인과율이다. 그래서 금생(今生)이 그 때 가서는 전생(前生)이 되고, 지금 우리가 말하는 내생(來生)은 그 때 가서는 금생이 된다.

금생이 있음으로 내생이 있고 전생이 있음으로써 금생이 있다. 그러나 오늘 이 세상 이전의 전생은 없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금생, 내생, 전생과 혼동하지 말 일이다. 이 세상은 구원하는 것만 아니라 악인들을 걸러내는 의미도 있으니, 악인들을 제대로 솎아내자면 그들을 걸러낼 수단 또는 방법 즉 함정과 덫과 올무[올가미] 역할을 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이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온갖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사랑하도록 만드는데 있다. 고로 금생에서의 오직 진정한 의미는 구원을 받는데 있고 구원을 받았으면 다른 사람 구원하기 위해 수고하는 데에만 있을 뿐이다. 이 외에는 어떤 목적도 의미도 없다.

§  새 피조물로서의 "둘이 아니라 하나요 하나가 아닌 둘"이라는 관계는 '피차간에 이루어지는 형체(形體)와 본체(本體)의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갑과 을 관계에서 갑은 을의 형체이고 을은 갑의 형체가 된다. 그리고 '전자'에서 을이 본체이고 '후자'에서는 갑이 본체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이전의 상태에서 형체는 육신이요 본체는 나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것과 대조해볼 수 있다. 갑이 을을 볼 때 을이 곧 자기의 형상인 것이다. 그리고 을이 갑을 볼 때는 갑이 을의 형상이 되어 있다.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형체시고 나는 그리스도의 형체이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서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형체시고 아들은 아버지의 형체시다. 여기서 형체라고 하는 것은 본체를 나타내는 형상을 말함이다. 본체와 형체 어디가 그 중심이냐를 논할 필요는 없다. 아들이 사람이 되셨지만(사람의 형체이시지만) 그 본래 형체(본체)는 하나님 곧 아버지이신 것이다. 그리고 보이지 아니하시는 아버지의 보이는 형체는 곧 아들이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를 본 이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 하셨다. 이런 형체와 본체끼리의 서로 뒤바꿈은 갑을 을이 위하고 을을 갑이 위하는 서로 위하는 관계에서 그 합리성을 나타낸다. 형체는 항상 형체가 아니고 본체는 항상 본체가 아님이다. 물론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형상이시다[고후 4:4]. 아버지께서 먼저 계시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만드셨기[낳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위치는 불변이다.

그러나 사랑의 측면에서는 사랑 자체가 상대를 서로 섬기는 데에 있으므로 섬기면 종이고 섬김을 받으면 주인 격이다. 그래서 서로가 종이고 동시에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다. 이는 사랑 관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마치 엄마가 아기에게 종처럼 되어 건사해 주는 이치와 같다. 앞에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에게 당신 전부를 주시고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다시 살아나신 다음에는 어디를 가시리요, 오직 나와 함께 영원히 사시는 것밖에 더 있으랴" 하였지만, 엄마 품속의 아기의 모습이 바로 나이다.

하나님의 모습은 항상 그 품속에 그 피조물을 안고 계시는 모습이시다. 이것이 바로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와 같은 것이고 '몸'과 '머리'와의 관계이고,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사랑으로 하나됨'의 관계인 것이다. 엄마가 아기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다 바치듯이 해서 아기를 위해 엄마가 죽었다면 그 엄마가 다시 살아났을 경우 제일 먼저 누구에게로 달려갈 것인가. 바로 그 위하여 죽었던 아기에게로 가지 않겠는가.

그래서 영원히, 영원히 아기와 떨어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성령 받아 모심이요 그리스도 친히 아버지와 더불어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심 즉 성령을 영원하신 선물로 내게 주심의 의미다. 시편 139편에 말씀하신 그대로다. 나를 품으시고 머리를 쓰다듬으시고 항상 품속에서 떠나지 않게 하시는 형용 그대로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더 첨가하면 품속의 아기를 들여다보며 나지막하게 자장가를 불러 주는 엄마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습 3:17] 하는 대목이다.

흠정영역으로는 "he will rejoice over thee with joy; he will rest in his love, he will joy over thee with singing"이라 되어 있는데, NIV, NKJV에서는 "He will quiet (you) with His love"라고 되어 있어, 이 경우 우리말 번역과 흠정영역이 옳다. 후자 쪽은 우는[보채는] 아기를 사랑으로 달랜다 즉 잠잠하게 만든다는 의미인데 반해, 전자의 변역은 품속에서 잠이 들었거나 젖을 빠는 아기를 사랑에 겨운 시선으로 내려다 보는 광경이 역력한 것이다. "(you)"는 히브리어 원문에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 친히 사랑에 겨우신 모습으로 "잠잠하게 계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강조한 대로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실 때 아버지 역시 똑같은 고난을 받으시는 모습이셨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는 아버지를 통해 부활하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이 아버지께서 친히 하시는 말씀이요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이 아버지께서 친히 하시는 일이라 하셨다.

그리스도와 하나된 나는 그리스도의 형체이다. 그리고 나의 형체는 그리스도시다.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서 핍박 받아 몸이 불살라지는 지경이 되어도 내 모습은 그리스도로서 그대로 완연하게 보존되어 있음이니 그래서 "너희 머리카락 하나도 세신 바가 되어 있다" 하셨다. 하나하나를 다 세시고 계시니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그 한 오라기라도 상함이 없다. 영구적으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어 있는 관계로 나의 머리카락은 고사하고 나의 육체가 문드러져 있을지라도 나의 모습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온전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비록 죽으셨으나 그 형체는 아버지로서 영원불변하시므로 따라서 아버지를 통해 다시 살아나신 것과 같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이제 금방 그 육체가 목불인견으로 찢겨져 나갈 순간에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人子,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이 보인다!"[행 7:56] 하고 외쳤으니 바로 스데반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본 것이다. 우리는 양면의 모습을 각자 지닌 것이다. 그리스도와 나, 둘이 하나되어 있음이다.

갑이 을을 보기 때문에 그 보이는 을이 갑 자기의 형상이다. 을 역시 갑에 대해 그렇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것은 이 둘 관계가 평등하다는 것은 아니다. 먼저 존재하시는 이와 나중에 있게 되시는 이와의 구분이 엄연하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시다. 아들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셨으므로 아들이시다.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 역시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항상 "주님[나의 소유주, 주인]"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이미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므로 내가 모시는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와서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하셨다. 혹자는 교회에서 가르치기를, 우리 개개인의 몸이 성전이 아니라 그런 성전은 전체 회중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니, 그 스스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다. 성경의 가르침[요이 1:9]과는 전연 반대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그와 함께 하리라"의 "그"는 말할 필요도 없이 믿는 사람 개개인이다. 우리가 성경 내용을 다 안다고 하며 성경 읽기를 게을리 하는데 이는 아주 잘못하는 것이다. 누가 어느 구절을 대면 그 구절이 분명 있다는 정도는 안다. 왜냐면 그 대목을 읽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문제에 부딪쳐 적절한 대목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을 자리에 와서는 까맣게 잊어 버리는 수가 많다.

성경은 그 내용을 몰라서 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시험 받으실 때 말씀으로 이기신 것처럼 성령의 검(劍)으로써 필요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기억에 새롭게 하여 늘 외워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한 어제는 깨닫지 못했으나 오늘은 깨닫게 될 수 있으므로 그래서도 부지런히 읽게 된다. 이 세상 신(神-고후 4:4)은 24시 쉴새 없이 공략해 오기 때문이다. 마귀가 쉴 틈 없이 쏘아대는 불 붙인 또는 불과 같이 맹렬한 화살[火箭-엡 6:16]이다. 말씀으로 막지 못하면 온 집안이 불이 붙어 난리가 날 터인데 그 피해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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