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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5) 사랑의 특성 등록일 2016.02.25 20:36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511

집 교회 운동-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CITHM'의 기본 잣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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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특성

둘이 하나가 되어 있는 모습 또는 그 구조는 무한한 지혜의 원천이기도 하다. 하나가 어찌 되어 불상사를 당해도 다른 하나가 건재하니 그 상함을 받은 쪽이 곧 회생(回生)할 수 있다(전 4:9).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지혜에서도 드러나고 그리스도인(또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이 세상 핍박 받음에서도 드러난다. 주님 친히 십자가 상에서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도 그런 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나의 관계에서 하나가 둘 되고 둘이 하나가 되는 구조는 주님께서 사람이시기 때문에 가능하고 또 동시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은 위의 설명에서 밝혔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게 이루어져 있는 새 피조물로서의 구조는 이런 영원한 구조이다. 애초 에덴낙원에서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흙의 몸이 아닌 신령한 몸으로 자녀를 생산하고 또 그런 영원한 존재로서 인간들의 삶이 진행되었겠지만, 인간이 범죄함으로써 육체의 영원성을 상실해 버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친 아들[그리스도]을 통해 새로 창조하시는 방법으로 인간들을 구원하심으로써 그 영원성을 회복하게 하시는 것이다.

유의할 것은, 우리의 새 피조물로서의 구조는 육신의 구조처럼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직 사랑에 의한 것이니 이 사랑이 식어질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불문가지다. "사랑이란 것은 어쩌다 식어질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얼마나 불확실하냐" 할 필요는 없다. 단 이 한가지 사실만은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즉 사랑에 싫증을 느끼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염려는 부질없는 기우에 속한다.

사랑에 싫증을 느끼는 것은 생명 그 자체에 대한 싫증이니 그것은 자살하는 심경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그런 일이 있을 리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자체가 생명의 낙이라는 의미인데 그런 생명의 낙을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오직 있다면 그 믿음을 버리는 경우에 한해서다. 그러므로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경고가 계시록에 나온다[계 2:4]. 때문에 그런 생명의 구조를 스스로 파괴하는 일이 실제로 생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고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히 6:6/10:26,29] 일이 실질적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성경은 경고하는 것이다. 성경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기도할 때 "한 주간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 하다가 오늘 회개합니다" 식의 말을 하는데 정신을 차리고 성경을 읽을 일이다.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영원히 멸망이다. 얼마나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져 있는지 그 '정도'를 알 수 있다.

때문에 극도의 혼돈 속에 있다. 그러면서도 회개하는 기운은 없다. "배도(背道)"[살후 2:2] 상태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 역시 한정도 없이 오해하고 있다. 인생 살이에서 힘들고 어려운 것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많은 이들이 착각하고 있다. 자기 부인, 자기에게 죽어 있는 상태 즉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상태를 말하고 있음인데, 이를 엉뚱하게 해석하고 있으니 어찌 그 생활에서 구원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겠는가.

음식은 먹어야 알고 사람은 사귀어야 안다. 사랑은 자주 만나며 같이 살아야 그 사랑을 알게 된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 역시 하나도 다르지 않다. 주님을 사랑함이 보통 일이 아니라 영생 바로 그것인데, 이 사랑을 게을리 한다는 것부터가 그 믿음이 올바로 서지 않았다는 증거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겠는가"[히 2:3] 한 것처럼 세상 일에는 밤샘을 하면서라도 열심을 내면서 이 영생하는 일에 관해서만은 그런 열심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누가 보아도 "이같이 큰 구원을 게을리 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우리의 새 피조물됨이 결코 기계적인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맺어진 것임을 다시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런 "게을리 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랑의 관계가 지극히 불안정한 것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위기가 닥칠지 모르는 일이다. 이 모두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하신 그 경고에 해당된다.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14:33]고 잘라 말씀하신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천국은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그 보화를 매입하는 것과 같다고 하신 경고를 귀 담아 들을 일이다. 영생 얻기를 갈망하는 부자 청년에게 "네 가진 것을 다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내 뒤를 따르라" 하신 경고를 새겨 들을 일이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 건져 올리는 어부의 일이다. 내가 구원을 받았으면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 어찌 무관심할 수 있는가. 당장 불이 나 모두 결딴 나게 생겼는데 "불이야!" 외치지 않을 수 있는가.

외치지 않는다면 그 자신 그 불난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믿는다"고 하는 것도 만일의 경우 즉 그것이 사실일 경우 '보험에나 들어두는' 식의 결정이었지 참으로 믿어서가 아니라는 증명이다. 참으로 믿는다면 어떻게 그렇게 이웃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는가. 상식과 양심에도 어긋난 일이다. 구원 받은 것은 바로 그런 일을 하라고 "보내심 받은"[요 20:21] 것을 말한다.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라는 뜻으로 구원 받은 것이다[고후 5:15/롬 14:9].

그래서 이 목적으로 우리를 새로 창조하셨다. 창조하신 목적에 어긋나는 일을 함으로써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렀으니, 우리 역시 우리의 새 창조[구원]의 목적에 어긋나면 죄의 대가인 죽음[이제는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과 같은 멸망]뿐이다.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보내심 받은 그리스도이신데 바로 그 일을 계승하라고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보내신 것인데 이 뜻을 행하지 않고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죽음이 그 대가이다.

그래서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다"[고전 9:16] 하지 않았는가. 아담의 생명을 그 스스로 무효화한 것처럼[롬 5:12] 우리 역시 우리의 "새 생명"[롬 6:4]을 스스로 무효화하는 결과가 됨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나 항상 말하지만 이런 경고를 구원을 목적하라는 뜻으로 재차 빗나가는 일이 없도록 할 일이다. 구원을 잃지 않기 위함도 역시 자기 구원을 의식하는 것이므로 구원을 목적하는 것이다. 아담처럼 하지 말라는 뜻이다. 죽을 일을 하지 말라는 의미다. 아담은 죽을 일을 했기 때문에 그 생명을 잃어 버린 것이다.

아담은 그런 경우 자기 생명을 잃을까 싶어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다. 전전긍긍한다는 것은 우리로 말하면 우리가 혹 구원을 잃어 버리지는 않을까 조바심하는 것에 해당되는 말이다. 아담 역시 오직 "조심만 하면"[고전 10:12] 되는 일이었다. 생명은 생명대로 한껏 매일 누리고 동시에 조심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 조심을 하지 않은 탓에 그는 죽은 것이다. 그래서 이를 거울로 삼아 성경은 우리에게 조심하라는 경고로써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는 것이다.

이 세상 신(神-고후 4:4)은 끊임없이 공격해온다. 그는 영물이므로 자지도 쉬지도 않는다. 틈만 노리다가 잡았다 하면 무자비하다. 전쟁이다. 방심한 자에게 승리는 없다. 베드로가 얼마나 믿음이 좋았는가.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 세상 신(神-고후 4:4)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했으나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구했다" 하셨다. 아무리 믿음 좋다 해도 이 세상 신(神-고후 4:4)에게 맡겨지면 식은 죽 먹기로 그 믿음은 무너질 수 있다.

물론 주님께서 나를 지키시므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요일 5:18]. 그러나 이는 오직 앞에서 설명한 대로의 '동시성(同時性)'에서 나 자신 "주님께 붙어"["to cling to the Lord"-행 11:23/요 15:4] 있을 때에 한한다. 항상 동시성으로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내 스스로 조심하고 구원을 이루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은 내 것이 아니라 항상 주님의[성령의] 능력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구원 받은 까닭에 이 능력을 누리는 것이지 구원 받은 산 자가 아니라면 어찌 산 자의 힘을 부릴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달려가라고 나를 붙잡아 주시고 있는 그 힘으로 달려가는 것임을 명백히 설명하고 있다[빌 3:12].

그러므로 내 스스로 믿음을 지킴과 동시에 역사(役事)되는 것이 주님의 기도 그리고 능력임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위해 틀림없이 기도해 주시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할 것인가. 그렇다면 성경에 그 숱한 경고는 무엇 때문에 있는가. 성경은 절대로 모순되는 내용은 담지 않는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모순일 수 없는 것은, 우리가 그런 경고에 유의하여 조심하는 바탕 위에서 주님의 기도가 효험이 나타나지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 얻기를 바라시지만, 그 원하시는 대로 모든 사람이 다 자동적으로 구원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반드시 내 스스로 믿어야 함이다.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그 원하심은 단순히 원하심 그 자체로만 끝나는 것이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주님께서 눈물 흘리신 것과 같다. 주님의 소원대로 되어지는 일이었다면 눈물을 흘리실 이유가 없다. 주님의 능력만이 역사하시는 것도 아니고 내 믿음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주님의 능력과 기도와 나의 믿음, 이 둘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내가 믿기로 작정할 때 그 순간 주님의 능력은 작동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믿지 않을 때는 주님의 기도도 소용이 없다. "아무나 내게 올 수 없다" 하심과 같다[요 6:44,65]. 이것이 양면성의 원리다. 모든 것이 이 삼위일체의 원리를 벗어남이 없다. 주님께서 우신 것은 주님 스스로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은 한량 없으시나 우리 스스로가 믿지 않고 순종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손을 쓰실 수 없어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막강하신 능력도 사람들의 믿지 않음 앞에서는 아무 능력도 행하실 수 없었음을 보라[막 6:6]. 그래서 항상 강조하시기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신 것이다. 즉 양면성 또는 동시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동시에 나의 믿음이다. 아담이 범죄하여 죽을 때 하나님은 이를 죽지 않게 못하셨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불가능'으로 나타나는 것은, 법질서 차원에서 하시면 안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信實)하셔서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시어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전 10:13]고 한 대로, 무엇이든 우리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시니, 안심하고 오직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는 대로 최선을 다하기만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성경에서 가르치고 경고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음으로써 어찌 하든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히 2:3] 않도록 적극 유의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로[요 4:34] 열과 성을 다할 일이다. 그것이 우리가 택하심을 받은 증거다. 그런 것이 없을 때 우리를 미리 택하시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도 있으니 크게 유의할 일이다. 성경에 경고한 대로 가르치는 대로 따를 일이지, 이에 대해 이의를 낸다는 것 자체가 교만이다. 그렇다고 기계인 양 무조건 따르라는 것은 아니니 왜 그렇게 명령하시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숙고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심이다. 숙고하는 것과 이의부터 내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주님을 사랑함이 바로 생명의 낙인데도 지금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육체적 측면을 두고 하는 말일 때 그렇다. 성령 안에서의 영적인 측면으로 말하면 의(義, 올바른 행실)와 희락[joy]과 평안[롬 14:17]으로서 더 이상 가는 것은 없다. 이 세상은 동물이 아닌 인간으로서는 생명의 세계가 아니요 죽음의 세계인 때문이다. 따라서 말씀하시기를, "공중의 새도 둥지가 있고 여우도 그 굴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하셨다.

그리고 솔로몬의 모든 부귀영화로 입은 옷도 그 영광이 들에 핀 한 송이 꽃만도 못하다 하신 것이다. 인간의 본 거주지는 자연계에 속한 이 곳이 아니라 영계 곧 천상[天上]임을 밝히심이다. 오직 무엇이 옳고[의롭고] 선한 것인가 하는 그 판단에 따라 그 기준을 정하고 그것이 당장 나타나는 낙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이 현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업만을 하여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하는 것이 옳으므로 이 일만 하는 것뿐이다. 시키시니 하는 것이 아니라 주동적으로 주인 의식을 가지고 기쁨으로 일에 임하는 것이니[빌 4:4/살전 5:16], 아버지의 일이 곧 아들로서의 나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고난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되셨다 했으니[히 5:8], 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인하여 받는 고난을 통해 진정 순종을 배우고 온전하게 되도록 정해져 있음이다. 믿음은 한번 믿었다고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믿게 되어 있는 것이 믿음의 속성이다. 사랑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사랑한다고 그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지속시키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과 같다.

부부가 사랑으로 함께 살아도 그 사랑을 지속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함과 같은 이치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에 "위의 것을 찾으라, 아래 것을 찾지 말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경고할 필요가 없다. 왜냐면 자동으로 다 되는 일이라면 굳이 하라, 말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동으로 될 수 없고 매시 매순간 우리의 자율적인 믿음이 계속 작용하지 않으면 안되기에 그런 부단한 경고가 성경에 충만하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항상 기뻐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 악을 선으로 이기라[살전 5:15-18] 등등 다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라["singing and making melody in your heart to the Lord"-엡 5:19] 등 이런 것은 성령 충만의 비결이다. 계속 믿어야 하는 것이므로 이 일을 게을리 하면 믿음에서 떨어질 수 있고 믿음을 배반할 수도 있고 믿음에 파선할 수도 있다. 바울 선생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런 경고가 충만하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룰"[빌 2:12] 필요성이 생긴다. 그런 경고와 명령은 당연히 그렇게 하게 되어 있다, 즉 그럴 이유가 충분히 있다는 그 뜻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반복하여 경고하여 일깨우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우리의 믿음이란 것은 지속적인 자극이 필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 정반대 방향으로 흐를 수가 있음이니 항상 주의를 요한다. 그래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이처럼 하지 말고 그 날이 가까울수록 힘써 더욱 모일 것을 경고하는 성경이다[히 10:24].

김유신이 젊을 때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자 그 어머니가 눈물로 훈계한다. 이를 귀 담아 들은 유신이 어느 때 한번 마상(馬上)에서 졸고 있는 사이 이전에 방탕하게 지낼 때 곧잘 가던 기생의 집 뜰 안으로 말이 습관이 되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를 안 즉시 유신은 지체 없이  칼을 빼어 들어 그 사랑하는 말의 목을 쳤다. 애마(愛馬)지만 그렇게 한 것은, 말에게 무자비하게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그렇게 혹독하게 매질을 한 것이다. 우리가 어찌하다보면 우리가 탄 말 곧 "육신"[롬 7:5-8:13]이 옛 습관 따라 움직일 때가 비일비재하다. 고로 그 때는 믿음의 칼을 들어 그 말의 목을 치듯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 하는 것이다. 쉴 새 없이 그런 일을 반복할 필요가 있다.

우리 육신의 말은 김유신의 그 말처럼 한번 쳐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신의 말은 그 한 칼날 아래 죽어 버렸지만 우리 육신의 말은 우리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는 한 우리의 생애가 끝 날 때까지는 언제든지 덮칠 기회를 엿보기 때문이다. 이전처럼 나를 사로잡고 있는 상태는 벗어났으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강하여 육신을 제압하고 있으나, 우리의 믿음 여하에 따라 즉 믿음이 약하면 그 강함이 약해질 수 있으므로 그런 때를 노리는 것이다.

상대적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뒤 도리어 버림받는 자기 되지 않기 위해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전 9:27]고 했다. 로마서 7장에서 설명하는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장탄식하던 상황과는 정반대다. 김유신의 경우에도, 만일 김유신이 마음이 변하여 그 어머니의 경고를 귀 담아 들을 마음이 없을 때에는 다른 말을 얼마든지 구하여 그 천관(天官, 기생의 이름)의 집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우리 육신의 특징이다.

다시 말해 나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믿음의 의지, 사랑의 의지, 순종의 의지다. 나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으나 나의 육신은 계속 살아 있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내가 죽었기 때문에 나의 육신을 쳐서 제압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그와 같이 죽은 것이 없다면 계속 "오호라,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하는 탄식밖에 나올 것이 없다. 그리 되면 나는 나의 육신에게 즉 자기중심이라는 본능적 죄성[자연계에 속한 육체적 본능으로 인한 욕심이 자기중심이고 자기중심이 곧 자기가 자기를 위하고 자신을 위해 사는 모든 것이기 때문]에게 여전히 사로잡혀 그 노예가 되어 있음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는 무관하고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빌 3:18]이다. 그러나 죽었기 때문에 그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고 따라서 나는 자유롭게 되어 즉 죽은 자가 아닌 산 자가 되어 그 죽음의 일들, 육신의 지체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생명력이 있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무덤에 장사 지내짐이 '믿음'으로 된 사실이요 현실임에 명심할 일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으면 육신은 그대로 살아 있는 현실이 된다는 점을 마음에 아로새겨야 하는 것이다.

이는 불교에서 애용하는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라는 말과는 본 뜻이 다르다. 그 쪽에서 말하는 것은 단지 마음의 인식 변화에 따른 결과를 말함이므로 현실 자체에는 아무 변동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실제 이루어져 있는 역사적 사건의 현실과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그 엄정 엄격한 현실에 적용 여부가 판가름 나는 것이므로 차원부터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물과 내가 하나되는 것이 나의 믿음이니, 이 믿음이 없으면 전혀 남남이 되므로 현격한 차이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을 때는, 주님께서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셔서 비록 나의 육체와 동일한 본질의 몸을 입으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고 죄가 없으셨던 것과 같이 된다.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셨기 때문이다. 나도 이제는 똑같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어 산 자이다.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이기 때문에 이 육체[육신]를 능히 제압할 수 있다. 과거에는 "죽은 자"였으므로 제압하지 못했다. "죽은 자"[마 8:22]라는 뜻이 육신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 자체가 죽음이요 그래서 죽은 자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분리되어 있으니 죽은 자요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 가운데 매여 있고 또한 육신 가운데 있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으니 과거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내가 죽은 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어 과거 죄의 청산이 이루어졌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니"[골후 5:15]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다.

그러나 현재 자연계에 속한 몸 그대로이니 죽은 자다[골 3:3]. 여기서 죽었음["you died"]이라고 하여 과거 한 때 죽었던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언제 죽었느냐,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죽음"[롬 6:2], 육신 즉 "죄의 몸이 멸해짐"[:6], 다시 말해 나 자신을 위해 살았던 "옛 사람의 죽음"[:6]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죽음을 근거로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 등의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게"[골 3:5] 되는 것이다.

옛 사람에 대하여 죽었고 새 사람으로는 살아 있음이다. 아담의 "죽음"은 우리와 같은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다시 돌아오고 신령한 몸을 잃음으로써 영생이 불가능하게 된 상태를 말함이었다. 그러면 우리와 같이 이러한 몸으로 계셨던 당시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리켜 "죽은 자"이셨다고 할 것인가. 그것은 그렇지 않다. 아담은 말 그대로 죽은 자였으나 당시 세상에 계셨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은 자'일 수가 없는 '산 자'이셨다.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으로써 비로소 죽으신 것이다. 나의 죽음은 바로 그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하는 것이다. 과거 내가 죽은 자였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살아남으로써 산 자가 되어 있는데도 몸은 여전히 과거 죽은 자로서의 모습 그대로이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사람되셔서 즉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계셨던 것과 같은 양상으로서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하고 있으니 죽은 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죽은 자는 아니나 죽은 자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비로소 우리 위해 죽으신 자가 되신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이 죽음의 몸을 입으신 그 때부터 죽음의 희생 제물이셨음과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죽은 자로 여기지 않는 것은 생명이신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죽었으나"[골 3:3]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되어 있으므로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이다. 그래서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한 것이다[:3].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 우리도 생명의 영광 가운데 즉 신령한 몸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음이다. 고로 "너희가 죽었다" 할 때에는 우리 옛 사람이 죽었음을 가리키는 것임과 동시에 이상의 의미 즉 우리가 현재 이 자연계에 속한 몸 그대로 있음을 동시에 가리킴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오신 것과 같이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승천했다가[엡 2:6] 다시 세상에 내려 온 격이 되어 있는 것이 성령 강림의 의미 곧 내가 성령을 받아 모심의 의미이기도 하다.

왜냐면 나는 영원히 이제는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게 임하심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에 임하여 이전 나의 육체를 입게 되어 있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음이다. 그리스도는 이제는 영원히 나와의 불가분성으로 계심을 의미하므로 그리스도께서 취하시는 모든 움직이심이 바로 내가 취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인식됨이다. 왜냐면 성령으로 지금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나와 하나가 되어 계시기 때문이다.

머리를 따르는 몸의 이치로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고난 받음을 위해 이런 자연계에 속한 몸을 여전히 입고 있는 것인즉, 혹여 이런 고난을 면하기 위해 나 자신을 위하여 사는 즉 고난을 기피하고자 하는 옛 육신의 욕심으로 되돌아갈 공산도 없는 것이 아니라 있기 때문에 이상과 같은 성경의 경고는 적절한 것이다. 이는 꿈틀거리는 육신이 여전히 그대로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 육신 곧 '죄의 몸이 멸해진"[롬 6:6] 것은 순전히 나의 믿음을 따라 이루어진 엄연한 현실적 실체인즉, 지금이라도 이 믿음 버리면 상태는 다시 옛 것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그러므로 우리 옛 사람이 죽어 있는 우리의 믿음을 계속 유지하라는 경고이다. 그래서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과 분과 악의와 훼방과 입의 부끄러운 말, 서로 거짓말을 하는 것 등의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골 3:5,8,9] 한 것이다. 우리의 믿음으로써 옛 사람이 죽었고 우리 육신이 멸해졌기 때문에 능히 "죽일" 수 있는 터이기에 그러하다[고전 9:27]. 그러므로 믿음으로써 "내 몸을 쳐 복종시키지" 않을 때는 아무리 복음을 "남에게 전파하고" 있어도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27].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키는 것으로서[:6] 우리가 이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7]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아니하니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9] 새 사람을 입었기[:10] 때문이다. 이와 같이 믿기 전과 믿음 후의 경계(境界)가 뚜렷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따라"[:10] 닮아 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며 구원 받은 자로 자처하면서 죄를 짓고 육신대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도 바로 이와 같은 분이라고 선전하는 것과 같은 악이 되니 용납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하나되심으로써 우리와 같은 이런 육체에도 불구하고 죄 짓지 않으신 것은 항상 그 사는 것이 아버지 중심이요, 자기 자신을 위해 사시지 않고 그 안에 아버지께서 사시는 것으로 항상 균형을 잡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도 하나님 중심으로 살면 될 것인데 왜 그리스도와 반드시 하나가 되어 있어야 하느냐 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산 자이시고 우리는 아담 이후 모두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아무리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도 그것은 자기가 '산 자'가 되기 위한 목적일 수밖에 없으니 왜냐면 현재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은 자이므로 죽은 자는 마땅히 그 당연한 죽음을 당했다는 역사적 사실 혹은 증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단 죽은 다음에 영생을 논해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 죽었다가 다시 사는 수는 없으니 죽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죽음을 현실화하기 위해 나와 함께 죽으시는 죽으심을 하나님의 아들 친히 십자가상의 죽으심으로 이루신 것이다. 그래서 역시 함께 살아남으로써, '죽었다가 산 자'로서의 나의 위치가 하나님 앞에서 정당시되고 합리성을 띠게 됨이다.

이렇게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빌 1:21],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고후 5:15]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갈 2:20] 것으로써 항상 균형을 잡아 나가고 있기 때문에 내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것이니 비로소 순수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일로서 어린 아이라도 믿고 구원될 수 있는 지극히 간단명료한 이치다.

믿음으로 베드로가 주님만을 바라보며 물 위로 걸어 주님께 나아가던 것과 같다. 물 위로 걸어갈 때 천신만고의 노력이나 애씀 같은 것은 전연 없었다. 오히려 찰랑찰랑 물 위로 걷는 재미에 발바닥은 즐겁다고 소리 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주위 풍랑을 보고 베드로의 마음에 의심이 들어 믿음에서 벗어나기 시작할 때 발은 당장 물 속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삶이 이와 같다. 땅의 것을 찾지 않고 위의 것을 찾으므로 육신에 관한 일 즉 땅에 속한 일은 덤덤하게 지내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아내가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없어도 있는 것처럼(고전 7:27-31), 남편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없어도 있는 것처럼[그러나 이것은 '남편과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과는 별개다], 돈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없어도 있는 것처럼, 건강해도 건강하지 않는 것처럼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것처럼 하는 것이다. 왜냐면 건강이 주님께 있고 주님께서 건강이 되시고 돈이 되시고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의 결과가 이런 풍족함, 풍성함이다. 나를 부인하는 대신 주님의 모든 것을 나의 풍성과 충족으로 한껏 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의 것을 찾는 마음 즉 사람 살리는 일에만 천하 없는 보람으로 느끼며 거기 묻혀 세월 가는 줄 모르게 된다. 바울처럼 매를 맞고 매질에 살이 터져도 그 뿌듯한 보람은 주체할 길이 없게 된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아 그 아픈 몸을 추스르면서도 한밤 중에 감사 찬송을 하였다.

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증거로 옥 터가 움직이는 등으로 해서 빌립보 간수가 구원에 이르는 지식에 접하게 된다[행 16:30].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는 것은 바울과 실라가 그리스도의 하실 일을 대행(代行)해서라기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그들이 동참(同參)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동참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일을 함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는 바울과 실라를 통해 그 남으신 고난을 받고 계셨음이다. 그 결과가 빌립보 간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의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이니,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 받는 의미다.

그리스도 복음(福音, 희소식, 복된 좋은 소식)의 개요

①창조주 하나님의 실존(實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한다. 눈에 안보인다고 한다. 안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없다 한다. 자기의 영원한 운명이 걸려 있을지도 모를 사안의 심각성에 비하면 경솔하기 짝이 없는 태도다. 하나님이라고 하면 조물주 또는 창조주, 창조신[創造神]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피조물이라고 할 이 우주는 너무 방대하여 우리가 그 규모를 가늠할 수조차도 없다. 이 우주의 창조신은 우주보다 크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그 피조물인 우주도 제대로 가늠 못하면서 그보다 더한 조물주는 어떻게 가늠하겠다기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 존재를 부정한다는 말이 합리적인가.

이런 편협하기 짝이 없는 인생들이니, 제대로 된 판단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거나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님이 우선 분명해진다. 다시 말해서 그런 주장이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결론부터 내리게 되니 아주 싱겁게 되어 버린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는 그 만드신 만물 즉 그 피조물을 통해서 확증된다고 하는 성경의 설명을 잠자코 수긍하는 것이 겸허라고 우선 일러 주고 싶다. 무엇이든 그 이치를 규명하는 데에는 오만이 첫째 장애물인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오만함으로써 진리에 접근하려는 이는 하나님 친히 내치신다. 하나님이 친히 외면하시는 터에 누가 감히 진리를 믿을 수 있겠는가. 진리를 믿는 것은 구원으로 통하는 지름길로 접어들었다는 뜻인데 하나님이 친히 막으신다면 누가 감히 엄두라도 내겠는가. 이는 그런 눈밖에 벗어나는 사람은 얼마든지 무신론자로 만드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똑똑해서 하나님 따위는 안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상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무신론자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 인생들을 조종한다고 했는데 이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통하여 그렇게 만드시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하나님 앞에서 로봇처럼 움직인다는 말은 아니다.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 모든 피조물은 그 스스로 마음 먹은 대로 행할 수 있다. 그 목적 달성 여부는 물론 예외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모든 악한 피조물의 행동을 제약하시거나 그 이룬 결과를 무위(無爲)로 돌리시는 그런 일은 아니하신다. 오직 원리원칙대로 하시되 악한 자들의 목적이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을 미리 아신다는 것뿐이다. 이 미리 아시는 것은 모든 제조자[인간도 포함해서]가 공통으로 지니는 특점이다. 미리 예상하지 않고서 그 누구 감히 무엇을 제조하려 들 것인가. 하나님의 창조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만물을 보고 그 만드신 이를 안다는 것은 또 극히 과학적[논리적]인 결론이기도 하다. 만물은 인과율에서 벗어남이 없다. 삼위일체의 원리가 이 인과율을 말하는 것이다. 즉 대립되는 개념은 예외 없이 주종(主從), 대소(大小), 인과(因果) 관계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 삼위일체의 원리다. 인간도 따르지 못하는 고도의 지능적, 지성적 행동을 미물인 거미나 개미 등 곤충들도 나타내는 것을 보라는 것이다. 그들 자신의 지능이나 지성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장치되어 그런 작용을 할 수 있도록 된 구조가 지적이고 이성적이라는 그 뜻이다.

즉 그런 행동을 그들 스스로 알아서 나타내는 것이 아니니, 인간의 고안으로 만든 제조품인 로봇에다 제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장치를 해두는 것처럼 그런 장치를 해두었기 때문에 나타내는 작용이므로 그 장치를 해놓은 주인공이 인간도 아니고 그 동물 자신이나 식물이 아니라면 조물주 외에 누가 있는가.

②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이렇게 조물주가 존재한다면 반드시 그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 자기 뜻을 여러 가지로 나타낼 것이 분명한데 그런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처하고 있는 성경을 보자. 그 성경이 그런 조물주의 뜻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객관적인 증거가 무엇인가. 고고학적 또는 생물학적으로 기타 여러 가지 면으로 증명이 가능할 수밖에 없지만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가장 확실한 것은 그 내용 자체가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하고 있다는데 있다.

이보다 확실한 객관적인 사실 증명은 없다. 그 자체 증명의 사례들은 다른 데에서 여러 차례 반복하여 밝히고 있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단 한 통로로 나타나는 것이지 여러 갈래로 나타날 필요도 없다. 왜냐면 불필요한 혼돈을 야기시킬 수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리 만무하다. 다시 말해 세상 종교를 통해서는 절대로 그 뜻과 말씀을 나타내시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유일한 메시지는 바로 성경이라는 확고한 결론에 이르는데, 이 성경의 핵심되는 내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③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며 어떤 내용의 인물인가. 바로 조물주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인생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계시는 모습 그대로 보자는 것보다 반드시 우리와 같은 피조물 형태 또는 상태로써만 보여 달라는 좀 복잡한 의미 더 명확히 말하면 무리하기 짝이 없고 극히 오만한 요구가 되어 버리는데 그 요구가 실제 사실로 나타났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는 하나님 친히 그런 시건방진 일부 인간들의 요구를 들어 주시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인생을 불쌍히 보시는 오직 어버이 심령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목적으로 그런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친히 이루어 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사람[피조물]의 모습으로 볼 수 있게 된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시다. 나를 구원하시려고 나와 같은 인간이 되어 주신 것이다.

사람은 원래 창조되기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어졌었다. 즉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을 사람이라는 형체로 나타내시는 의미이셨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일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나,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존재하는데도 친히 그런 피조물이 되신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인 것이다. 사람으로서 나와 하나되심으로써 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사람과 사람이 하나되지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될 수는 없음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 많은 비밀스러운 진실과 진상이 알려진 바가 되었는데 그 하나가 조물주 하나님의 계시는 모습이다. 즉 아버지와 아들로서 계시는데 그 아들께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여기서 대칭(對稱, 相稱, 대립) 원리에 의한 인과율(因果律)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삼위일체의 원리다. 바로 이 원리로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인데, 바로 이 원리로 된 현존하는 만물이야말로 다름아닌 하나님의 작품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둘이 하나로' 계시는 원리를 따라 만물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계심이 바로 그것이다.

④하나님의 인간 구원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되심은 우리 인생의 구원을 위하심이다. 이렇게 사람되심을 인하여 비로소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계심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만유의 생성과 존립의 기본 원리[삼위일체의 법칙]가 밝혀진 셈이다. 인생 구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빚어진 현재의 인간 불행에서부터의 탈출을 말함이다. 다시 말해 범죄하기 이전의 아담의 상태로 회복시켜 원래 인간이 애초 창조되었던 그 처음 위치로 되돌려놓는 의미이다.

이는 아담 한 사람을 위함이 아니라 아담 이후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생들에게 아담과 동일한 내용의 기회 즉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여 영원한 세상에서 생명이냐, 죽음이냐 하는 문제를 가름하도록 틈을 공평공정하게 주심이다. 아담 한 사람이 범죄했는데 그 때문에 모든 인간이 그 죄벌을 받는다는 것은 불합리이기 때문이다. 범죄하기 전의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義人)이었다. 우리가 의(義)롭게 된다는 것은 바로 그 당시 상태로의 회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천국에 곧장 들어가는 것만을 말함이 아닌 것이다. 곧장 들어가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에 많은 사람이 중도에 마음을 변하는 수가 있기 때문에 그 최종 결과를 살펴볼 필요가 있어서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 능력의 소관사가 아니라 피조물 각자에게 달린 순종의 의지 여하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아담 역시 생명 가운데 있다가 그 스스로의 선택으로 죽음에 이른 결과로 우리에게 구원의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다[롬 5:12].

산 자가 되게 하시고 다시 나게 하심, 새로 창조하심으로서의 구원의 측면만이 하나님의 능력에 속한 것이다. 창조의 영역이다. 그러나 이제 새 창조가 완료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 단계는 피조물 자신 곧 우리 각자에게 있다. 피조물 자신에게 있다는 그 나머지 측면이 무엇이냐 하면, 악령들이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그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악령들이 되었고, 아담 역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지만 이 사실이 무색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버림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인생 비극을 자초한 결과이니 다시 말해 산 자로 창조되었으나 현재 죽은 자가 되어 있음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가는지의 여부는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마 7:21] 그 여하에 달린 것임을 명백히 하셨다. 아담은 그 뜻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어 우리 역시 죽은 자가 되어 있으므로 이는 당연하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바로 이 뜻을 행하도록 '생명력을 주심'이다. 구원의 목적이 그러한데 이 목적을 내 스스로 무시하면 나의 구원 자체가 무의미하다. 있으나 마나 한 구원이니 이 경우 구원 자체가 소멸된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어야"[빌 2:12]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이것이 자기 행위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님은 이미 앞에서 구원의 정의(定義)를 내린 그대로다. 즉 이미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결과로서의 그 토대 위에서 "구원을 이루는" 것이므로 시종일관 은혜이고 그리고 믿음이다. 이렇게 "각자가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것도 처음 믿음이 지켜지지 않으면 구원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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