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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운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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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6) 사랑의 특성 등록일 2016.02.25 20:38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288

 

"은혜로 얻은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시다. 곧 나와 그리스도의 둘이 하나된 새 피조물로서의 구조이다. 이 구조는 앞에서 지적한 바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계시는 바로 그 원리를 따른 것이다. 그 원리를 따라 만물도 지으시고 이 새 창조 또한 이루셨다. 이 둘이 하나 되는 형태 또는 원리를 떠나서는 그 어떤 창조도 이루실 수 없는 하나님 역사(役事)의 일관성과 통일성 그리고 철저한 원리원칙주의를 나타낸다.

처음 창조에서의 그 완벽했던 체제를 아담 자신이 깨뜨려 버렸으므로 그것을 또다시 적용하면서 새 창조를 이루실 수 없는 없다. 이는 하나님의 원리원칙주의에서 나타나는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다. 고로 부득불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심을 통하여 '사람되신 그리스도'와 '사람인 나'와의 하나됨을 통한 새로운 체제의 새로운 시작이다. 이로써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아들들[이번에는 독생자 하나님과의 하나되심이 아닌], 즉 "많은 아들들"[히 2:10]과의 하나됨이 새롭게 이루어진 것이다.

⑥육신대로 살면 죽고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롬 8:13]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나님은 첫 창조에서 당신의 "형상과 모양"인 아담에게 경고하셨다. 오늘날 새 창조에서는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고 당신의 아들들인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이 경고의 내용도 이 둘이 똑같다. 즉 자기중심에 대한 경고이다. 이 "육신"이란 것은 다름아닌 자기중심적인 삶 즉 동물적 생명의 본능을 가리키는 것이다. 아담이 먹지 말아야 했던 선악과도 그 성격이 이와 동일하여 하나도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왜냐면 그 선악과를 먹으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돌아가 육신의 관장(管掌)과 그 지배 아래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 혹은 유혹도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죽지 않는다"는 것이니 곧 "육신대로 살아도 천국에는 들어간다, 이 세상 사는 동안은 육신으로 사는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내용과는 명백히 다르고 반대되는 내용이다. 즉 "죄 짓지 않고는 이 세상 못사는 것이니 죄는 지으나 영생을 얻음에는 아무 하자가 없다"는 소리다. 이는 에덴낙원에서 죽는다고 경고하신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는다"고 설득시켜 성공한 그것과 하나도 다름이 없다.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죄는 육신을 따르는 모든 행위라는 것이다. 육신은 자기중심, 자기 본위, 자기 위주의 모든 언행심사를 말함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결론은 요한 사도(使徒)나[요일 3:8,9], 바울 사도나[고전 15:34], 베드로 사도나[벧전 4:1-3] 일반으로 강조하는 바로서 위의 그런 주장은 이와 전연 배치되는 것이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중심으로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중심,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15] 했고,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으니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하여 죽는 것으로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기 때문"[롬 14:7,8]이라고 명백히 한 것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다.

⑦삼위 일체 하나님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성령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이다. 막연히 하나님으로 알고 있으면 곤란하다.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러나 아버지와 하나로 계시기 때문에 "성령"이시라 칭한다. 항상 하나로 계시기 때문에 이를 두고 아버지시라 할 수도 아들이시라 할 수도 없다. 그리고 나의 구원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친히 내 안에 계셔 나와 함께 사시는 영원하신 선물[요 4:10/행 2:38]이시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이요, 이렇게 하나되시기 때문에 즉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고전 6:17]으로 존재하므로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요 그 죽으신 이후 되어진 모든 일들 즉 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현재가 모두 다 내 것으로 내가 향유하는 것이어서 내가 현재[요일 3:2]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삼위 일체로 계심을 좀더 알기 쉽게 풀이하면 일시이원삼위일체(一始二元三位一體)다. 처음 하나님 한 분[一始]으로 계시다가 자기와 같으신 자기 형상으로서의 또 하나의 존재를 당신 자신을 소재(素材)로 하여 만드시니 즉 낳으시니[그래서 성경에 독생(獨生)하신 하나님 곧 외아들 하나님이시라 한다] 곧 아들이시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다. 같은 본질이시므로 아들께서도 하나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둘[二元]이시지만 하나[一體]로 존재하시니 원래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一始]로 계시던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낳으셨으므로 둘[二元]이 되신 것뿐이다. 이렇게 둘이 하나로 계심을 가리켜 사랑이라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랑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할 때는 바로 이 원리로 계심을 말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히 12:29]이시라 할 때. 이 "사랑이시라"는 사실과 상충되지 않으니 사랑은 무턱대고 상대를 위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생명의 법칙에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를 말하기 때문이다.

아들이 계심으로써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로 계심으로써 이와 같은 영원한 사랑과 생명의 법칙이 확립된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심이 바로 이 원리원칙에서 나오는 것이다[딤후 2:12/마 10:32]. 따라서 이 생명의 법칙을 지키지 않을 때 나타나는 결과가 있게 마련이요 그래서 이 경우 범법자(犯法者)를 처리하는 필연성에서 "소멸하시는 불"이 되심이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사랑으로 하나되심과 같은 양면성 또는 동시성의 이치이기도 하다.

즉 '사랑'과 '소멸하는 불'로서의 대립 개념이다. 자비와 무자비, 구원과 심판, 생명과 죽음 등 거의 무한정으로 관계와 관계는 여기서부터 이어져 나가게 된다.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부인하시니["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 7:23] 이 경우에는 더 다시 우리에게 구원자가 아니시고 심판자이시다[고후 5:10/요 5:27/눅 3:17]. 이것이 그리스도의 양면성이시다.

하나님의 이 양면성을 가리켜 바울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될 것이다"[롬 11:22] 하였다. 오늘날 소위 "교회"라 하면서도 단지 세상의 종교 중 하나가 되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 양면성을 곡해하고 사랑 일변도로만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려놓은 그림'의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에 있다.

성경의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초대 교회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위로만 아니라 주님을 경외(敬畏)함 가운데에서["the comfort of the Holy Spirit and the fear of the Lord"-행 9:31] 두 가닥의 레일 위를 힘차게 달린 것이나 오늘날은 "성령의 위로"라는 외가닥 레일이므로 교회라는 열차가 달릴 수가 없다. 그래서 종교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중용(中庸, 中正)을 지켜야 하는데 극좌, 극우 어느 쪽으로든 한 쪽으로 치우쳐 있음이다.

한 쪽은 "엄위"쪽으로만 치우쳐 마리아까지 의지하고[천주교] 다른 한 쪽은 "인자"쪽으로만 치우쳐[개신교] 사랑 일변도로만 하나님을 착각하니 "선을 행하라, 의를 행하라"[요일 3:7,10/2:29/고전 15:34/요삼 1:11/롬 2:7,10]는 성경의 경고는 완전히 무시하는 마당에 무슨 복음[복된 좋은 소식]이고 구원이고 있겠는가. 지금까지 절대 다수가 빈 껍질만 붙들고 있는 셈이다. 자기 기만만 아니라 남까지 속이고 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모든 것의 핵심은 하나님의 계명[사랑과 생명의 법칙] 지킴에 있으니[고전 7:19/롬 13:9/요일 2:3,4/3:22-24/5:2,3/계 12:17/요 14:15,21,23/15:10,12/13:34], 많은 사람이 마치 모세의 율법처럼 "계명"을 착각함이다. "모세의 율법"을 성경이 때때로 "계명"으로 표현했어도 전후 문맥을 살피면 하나도 혼동할 필요가 없는데도 이를 구별을 못한다. 이러한 모든 착각, 오류, 혼돈 속에는 항상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 배경, 배후가 되어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⑧대칭성 원리에 의한 인과율

이렇게 둘이 하나로 계시는 원리가 곧 사랑의 원리요 생명의 법칙이다. 둘이 하나로 계시므로 이를 가리켜 "아버지"시라고도 "아들"이시라고도 못하니 아버지도 아니시고 아들도 아니시고 동시에 아버지도 되시고 아들도 되시어, 이렇게 '하나'로 계시는 모습[둘의 모습이 아닌]을 제3의 존재처럼 부르고 가리키는 일이 불가피해지므로 여기서 "성령"의 "이름"이 탄생하는 것이다[마 28:19]. 그래서 갑[甲]과 을[乙] 외의 병[丙]이라는 이름으로도 존재하므로 갑, 을, 병의 삼위(三位)다.

'하나'로 계시므로 이를 아들이시라고도 아버지시라고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오묘함이 있다. 왜냐면 둘이 "함께 한다, 함께 존재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기 때문이다. '둘'로서가 아니라 '하나'로 존재함이어서 뜻이 아주 다르다. 삼위일체 원리에 의해서만 설명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둘이지만 하나로 계시는 까닭은 원래 하나로 계시던 그 본디의 상태를 유지 보존하시고자 함이다. 둘이면서도 여전히 하나로, 그리고 하나이면서도 둘로서 존재하는 지혜이시다.

바로 이렇게 계시는 모습을 따라 만물도 지으시니 이것이 대칭(對稱, 상칭, 대립, corresponding) 원리에 의한 인과율(因果律)로서 곧 삼위일체의 원리[법칙]이다. 이미 아버지께서는 인(因)이시고 아들께서는 과(果)이시라, 아버지와 아들이시라는 대칭성을 이룬 인과 관계가 되어 계심이다. 만유의 창조 원리 그리고 존립의 원리[유지 보존의 원리]가 이 대칭성에 의한 인과율이고, 따라서 만유가 짝으로 되어 있지 않음이 없으니 만유를 관장하고 있는 이 원리야말로 이 우주가 하나님의 작품 곧 피조물임을 입증함이다.

곧 하나님의 제조표(製造票, make mark)로서, 이 제조표가 찍히지 않은 것이 없다. 다시 말해 만상, 만물, 만사가 모두 대칭 원리 곧 짝의 개념 또는 양면성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삼위일체 원리를 증명하는 것이 3운법칙[trini homo]의 희한한 구조임을 이미 설명했다. 이미 설명했지만, 3운법칙의 3가지 유형에서 그 뼈대를 형성하는 숫자가 7, 3, 4, 1, 19, 5인데, 이 밑 뿌리가 되고 있는 것이 인생들의 생애가 56 아니면 57개 마디로 정해져 있다는 사실에 있다.

3운법칙의 구조 자체가 삼위일체의 원리를 도식(圖式)으로 나타내고 있는 바로 그 모양새라는 것인데, 이렇게 형성하고 있는 '그림[도식]'에서 56이라는 숫자가 일시(一始) 또는 일체(一體)에 해당하는 병을 상징하고 57은 이원(二元)으로서의 갑과 을을 상징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그림'은 나타나는 것이니 '병'에서 '갑'과 '을'이 나왔고 그리고 이 둘이 처음 모양새를 그대로 지속시키기 위해 하나로 되어 있는 모습이 또한 '병'이므로, 이와 같이 '같은 본질'이면서도 '둘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병은 56마디[또는 마디사이]이나, 갑과 을은 모두 단 1이 더 많은 57개 마디[또는 마디사이]로 되어 있어 그 차별화를 드러내고 있음이다. 단 하나 차이의 56과 57이다.

여기서 갑, 을, 병이라 하는 것은 삼위일체 원리를 말하는 갑[a], 을[b], 병[c]의 3각(脚) 구도(構圖)에서 거기게 각기 해당되는 OT유형[갑에 해당], SN유형[을에 해당], FS유형[병에 해당]을 말함이고, 이 3가지 유형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다. 56개 마디[또는 마디사이]를 품고 있는 병 즉 3운법칙에서 FS에 해당되는 유형의 인간 생애는 한결같이 7등분으로 나타나는데, 활동기간[Lively Period; LP(약자)]이 4/7그리고 그 나머지가 3/7으로서 비활동 기간[Dull Period; DP(약자)]이 된다.

생애를 7등분 해서 LP와 DP의 비율이 4:3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상식 수준"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7등분 해서 4와 3의 비율로 나타나는]이 나머지 갑과 을에 해당되는 OT유형[갑에 해당]과 SN유형[을에 해당]에만 있는 JP기간[인간 생애에서 유청소년(幼靑少年) 기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갑과 을이 병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역시 '그림[도식]'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된다.

이런 JP기간이 FS유형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왜 JP가 FS형의 축소판이 되느냐 하면, 이 JP기간[태어날 때부터 LP 또는 DP가 시작되는 시점까지의 기간]에도 역시 LP기간과 DP기간으로 나누어져 나타나는데, 그 기간을 통해 비교적 고생스러웠던 때 예컨대 부모 한 쪽이 사망함으로써 어릴 적 생활이 어려웠을 때가 DP가 되고 나머지가 LP가 되는 바, 이 LP와 DP의 비율이 4:3[물론 JP를 7등분했을 때]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갑과 을의 이 57이라는 숫자는 갑과 을의 성격을 역시 '그림'으로 나타내는 데에 아주 결정적인[이에 비해 병의 56이라는 숫자는 생애를 7등분할 수 있다는 것 외에 달리 특별한 의미는 없다] 중요 역할을 한다. 왜냐면 을의 경우 57을 19등분하여 3을 얻은 값으로 그 특징을 이루고, 갑의 경우 바로 그 도치(倒置, inversion, reverse)된 '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을과는 반대로 57을 3등분하여 19라는 값을 얻어 그 특징으로 삼기 때문이다.

즉 활동기가 7/19, 비활동기도 7/19, JP 기간 그 나머지 5/19다. 반면에 갑은 일률적으로 모두 균일한 1/3이다. 이렇게 19와 3이라는 숫자로써 갑과 을의 이원성(二元性)을 훌륭하게 '그림[도식]'으로 그려 놓고 있다. 이런 절묘한 구조를 이루는 19와 3이라는 숫자가 57에서 나오고 그리고 이렇게 해서 나누어지는 활동기간[또는 비활동기간]은 갑의 활동기간[전체 생애의 1/3]과 견주어 그 길이[기간의]가 거의 비슷하다.

상당한 격차가 나지 않고 근접하여 비슷해야 갑과 을의 성격에 부합하는 것이다. 똑같이 57등분을 하면 갑은 19/57, 을은 21/57이니 겨우 2의 차이다. 그리고 갑[OT유형에 해당]은 나머지 두 유형 즉 을[SN형]이나 병[FS형]과는 달리 LP, DP, JP가 균일하게 1/3로 나타나 제일 외모가 반듯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으니 이는 갑, 을, 병 셋 중 핵심이 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면 갑이 애초 병으로 있다가 을을 파생시킴으로써 스스로 갑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갑의 옛 모습이 병인 것이다. 그리고 현재는 갑과 을의 이원(二元)처럼 되어 있으나 처음의 병(一始)으로 있던 때를 유지하려는 것이 또한 현재의 병(一體)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3운법칙의 구조가 빈 틈이 없다는 뜻이다. 꼭 있어야 할 바로 그 숫자가 제 자리에 그대로 박혀 있다는 의미로서 다른 숫자가 대신 들어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니, 이것은 이 세 가지 유형 외에는 달리 다른 유형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 3운법칙을 증명하기 위해 역사적 인물의 모든 생애를 들쑤실 필요가 없다는 의미요, 앞으로 태어날 모든 인생들의 생애를 살펴볼 필요성 역시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다.

3운법칙의 구조 자체가 의미 있게 이와 같이 조립(組立)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 이상, 이는 당연한 결론이다. 다시 말해 이렇게 조립되어 있는 현상은 삼위일체(三位一體) 원리의 도식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모습을 취하도록 이미 이 법칙의 설계자[고안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짜임새를 나타내도록 해두셨음을 확증하는 것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 3운법칙이 어느 때[바로 현재] 인간 세계에 나타내어지도록 처음부터 정하셨다는 바로 그 의미가 되기도 한다.

⑨에덴낙원은 자연계가 아닌 영계

또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담이 있었던 그 에덴낙원은 이 자연계가 아니라 영계였다는 사실이다. 영계는 이상 양면(兩面) 구조[corresponding system]에서 필연적이다. 자연계가 있으니 영계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다시 말해 범죄함으로써 이 자연계의 육체로 환원되어 버린 것이 오늘의 우리 육체 즉 육신인 것이요 그리고 현재와 같은 "죽음"의 상태다[롬 5:12].

그래서 죽었다고 하신 것이고[마 8:22] 바울도 역시 이 말씀을 따라 우리 인생을 죽었다고 한 것이다[엡 2:5]. 인간의 본디 생명은 영원한 것으로서 그래서 영계에 거처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 자연계의 육체로 되돌아와 자연계 동물들의 생명처럼 되어 버리니 한시적(限時的)이라 이는 곧 인간에게는 죽음일 수밖에 없다. 선악과 즉 선(善, 좋은 것)과 악(惡, 나쁜 것)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시한성(時限性)과 습성(習性)으로 되돌아가 버렸다는 것을 말함이다.

이는 사람이면서도 완전히 짐승처럼 되어 버렸다는 의미이다. 수명(壽命)도 그렇고 삶의 습성도 그러하니 곧 짐승들의 본능과 같은 자기중심이다. 육체 역시 그러하니 자연계에 속한 흙의 육체로 되돌아온 것이다. 짐승의 습성은 최우수 품종으로서의 종족 보전을 위한 기계적인 '자기중심'의 본능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짐승처럼 되어서야 되겠는가. 인간은 인간다워야 인간이다. 바로 이 "육신"[롬 7:5-8:13]은 짐승처럼 사는 모든 욕구를 말하는 것이고 이를 따름이다.

영물들 가운데에서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이러한 동물적 욕구를 따름으로써 악령들이 생긴 것이고 이로써 범죄가 구성됨이다. "동물적 욕구"라 하는 것은 상급 세계의 인격성을 지녀 자유 의지를 구사하는 특권을 행사하는 영물이나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그런 것은 하급 세계인 자연계에 속한 기계적인 작동만을 하게 되어 있는 동물들의 생활 습성을 말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죄 자체가 이런 상급 세계의 피조물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동물적 욕구"라는 말도 그런 경우에는 제대로 된 표현이라 할 것이다.

이런 욕구는 자연계에 속한 짐승들에게는 최우수 종족을 물려 주기 위한 기계적인 육체의 작동인데, 이것이 인간에게 적용될 때는 죄악의 온상(溫床)처럼 되어 있는 것이므로 인간의 이러한 죄성을 밝히기 위한 설명의 필요상 "육신"[flesh]이라 이름 붙이게 된다. 최우수 품종을 남겨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 아래 기계적으로 작동되는 것이니 만큼 자연히 적자생존, 자연도태의 방법이 적용되는 것이 동식물의 세계다.

그래서 내가 적자생존의 최적임자다 하고 서로 다투다가 그 중 가장 우수한 자가 최고로 올라가 씨를 퍼뜨리게 되고 나머지는 나가 떨어지는 방식이다. 이는 합법성과 타당성을 지니는 것이므로 이렇게 해도 그들은 단지 기계적으로 그렇게 하는 까닭에 철저히 이 원리에 순응하고 불평불만이 없다. 모든 것아 평화리에 종결된다. 그렇게 나가 떨어진 자는 그렇게 나가 떨어진 대로 순응한다. 따라서 이런 것이 악[나쁜 것]일 수 없고 선[좋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야 어디 그런가. 기계적 존재가 아니라 인격성을 지녀 자유로운 의지 작용이 절대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자주 독립성을 구가한다. 이는 인간이든 영물(靈物)[천사]이든 영적인 존재의 특성이다. 이러한 영적 존재의 생명은 기계적인 것에 있지 않고 자율성에 따른 선택의 결정권이 있어 생명의 법질서에 대한 순응 여부로써 그 사활(死活)이 정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생하되 그 영생의 조건은 살아 있는 법질서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함에 있다[마 4:4]. 몸과 머리의 관계에서다.

그러므로 "선과 악을 안다"는 말의 뜻은 선과 악을 모르기 때문에 알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선]이기 때문에 좋은 것을 스스로 택하고 나쁜 것[악]이기 때문에 스스로 기피하는 자기중심이 되는 것을 가리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여자]을 꾈 때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창 3:5] 한 것 자체가 거짓말이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로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전적으로 아들을 위하시고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시기 때문에 그런 자기중심이 원래부터 없으시다.

물론 아버지께서 아들을 낳으시기[지으시기] 전에는 그런 저런 것이 필요치 않았으나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로 계시기 시작하심부터 그런 자기중심은 영원히 사라진 터이다. 당시 에덴낙원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로서 즉 아버지의 형상이신 아들께서 아버지를 나타내셨으므로,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아담이나 하나님을 한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라 보아 틀림이 없다. 우리 위해 죽으시는 아들이 나타나신 사실을 두고 성경이 영원 전부터 감추어졌던 비밀이 이제야 나타났다고 했기 때문이다[골 1:26].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opening of the eyes]" 그렇게 된다 하였다. 그러면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았다"[:7]는 것은 무엇인가.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진실을 말했다는 것인가. 표현은 같으나 의미는 별개다.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하나님은 자기에게 좋은 것은 하시고 나쁜 것은 가려내어 하시지 않는다고 즉 자기중심으로 움직이신다고 거짓말을 한 다음에 인간도 그렇게 식견과 안목이 열려져 그와 같이 하게 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비로소 벗은 것을 알게 되었던 그 "눈 밝음[the eyes being opened]"은, 인간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회귀해 버리는 과정에서 지금까지는 그 몸이 신령한 몸으로서 자생적으로 광채로 둘러싸여져 있던 것이었다가 이제는 그 광채를 잃게 되자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벌거숭이가 된 사실에 눈 떴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이제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옷을 입어야 하는[범죄 전 에덴낙원에서 아담 부부가 빛으로 둘러싸인 신령한 육체로 옷 입은 것과는 대조되게] 현재의 실상을 표준해서 나타내는 성경의 표현일 뿐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아감으로써 그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실상을 비로소 보게 된다는 것을 비꼬아서 말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도 자기중심이라고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인간을 속인 것이다. 자기를 중심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아니하시므로 그렇게 거짓말을 하신 것이라고 그럴 듯하게 둘러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에서 설명한 대로 아버지와 아들로 둘이 하나되어 존재하시므로 아들께서도 아버지께서도 자기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시고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위하시는 그런 철두철미한 둘이 하나됨의 관계로서 계신다.

그리고 같은 이치로 하나님으로서는 전적으로 피조물을 위하시는 것이므로 피조물 역시 조물주이신 하나님을 위하도록 되어 있는 체제인데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인간을 속인 것이다. 인간이 영물 중 하나인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이와 같이 쉽게 속아 넘어간 것은, 인간 자신[아담 부부]이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어 신뢰하지 않고 말씀을 전적으로 믿지 않은 어리석음도 크지마는, 영물들의 본래 위임 받은 임무가 사람들을 위해 선[인간에게 좋은 것]과 악[인간에게 나쁜 것]을 조언해 주는 보좌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람 아담은 영물들의 자문을 받아 만물을 다스리는 위치였었다. 비록 아담보다는 나중에 창조되었으나 아담은 그 본질이 자연계에 속한 흙[dust-창 2:7]인 반면[비록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 있기는 하나] 영물들은 그 근본이 영계의 땅[ground-창 2:19]인지라 지식 면에서 월등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방적인 우열이 없이 상호 보완 관계에서 형평과 조화를 이루도록 배려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더군다나 일개 영물인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에 추종하였던 결과로 당장 그 아래 복속되어 버린 것이 오늘날의 인생 비극이니 즉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악령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인간 세계 지배가 이로써 연유된 것이다[눅 4:6]. 당시는 창조의 때였으므로 모든 것이 단 한번에 결정되고 그 결과가 영원히 미치게 되는 그런 특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영물(靈物)들이 인간에게 좋은 말을 해 주고 나쁜 말을 아니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해도, 인간 스스로 판단할 때 하나님을 의심하도록 하는 말이었으므로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은 것은 인간 자신의 허물이요 잘못이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결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죄에 인간도 함께 말려들어가는 꼴이 되니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추종한 결과가 되어 오늘날의 이 인간 세상을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결국 움켜쥐게 되었다.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함께 남자도 여자도 함께 저주를 받은 것이 그 때문이다. 허물은 모두에게 있다. 더군다나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그들 영물들을 다스리게 되어 있는 위치였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자신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게 되었으니 걷잡을 수 없는 내리막길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현재 그러하다. 하나님의 아들들로 새로이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행위의 규범으로 삼을 일이지 세상 지식으로써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이미 세상 지식은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수중에 넘어가 있는 상태다.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그런 지식으로써 인류를 왕창 속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실례를 진화론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⑩자기 부인

고로 "육신"으로 산다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짐승처럼 산다는 의미다. 짐승이기 때문에 짐승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이상 설명과 같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질서를 따라 살지 않는 것이 짐승처럼 사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영물들로서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이하 악령들이 범죄한 것도 이와 동일한 경우다. 그 법질서는 다름아닌 사랑의 원리를 말한다. 이를 다른 말로 생명의 법칙이라 한다. 사랑이 곧 생명이고 생명이 바로 '사랑으로 하나 됨'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둘이 하나되는' 것인 바, 삼위일체의 원리가 인격성을 지닌 모든 존재에게 적용되는 것으로서, 바로 하나님 계시는 모습[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로 계심]대로 모든 것이 구성되니까 그런 것이다. 즉 사랑과 생명의 본원(本源)이시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이시라[요일 4:8] 하고 또 하나님은 생명 그 자체이신 것이다. 사랑의 정의는 "둘이 하나됨"이다. 단수끼리든 복수끼리든 또는 단수 대 복수든 어쨌든 그 결과는 하나로의 귀일(歸一)이다.

양자(兩者) 관계로서의 귀일이다. 따라서 조물주를 부정하면서 사랑을 논하는 것 자체가 비논리적인 것이요 때문에 그 모든 결론이 허구일 수밖에 없다는 증명이 된다. 세상 종교의 실상이 그러하다. 사랑은 그 시원[始元]이 조물주이시기 때문이다. 만물이 대칭성의 원리를 따른 인과율에서 벗어남이 없듯이 이것이 인격성[人格性]을 지닌 존재끼리의 관계와 결부되어 나타날 때에는 "사랑"으로 나타나는 까닭이다.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죽으심을 가리켜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안다"[요일 3:16]고 했다. 그래서 그 결론으로 말하기를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사랑이고 그리고 자기 부인이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 하신 그대로다. 자기 부인이 없이 사랑을 논하는 것 역시 허구일 따름이다. 자기 부인과 사랑은 이같이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이 "목숨을 버리는 것"을 사랑의 원리 즉 그 법리(法理) 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갑은 을을 대하고 있고 을은 갑을 대하고 있다. 갑의 눈에 비치는 것은 을이지 갑 자신이 아니다. 실제 갑은 자기 모습을 온전히 볼 수가 없다. 을도 그러하다. 그러면 이 경우 어떻게 되느냐 하면 둘이 서로를 보아 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임을 알게 된다. 이 '본다'는 것은 '위한다'는 것으로 직결된다.

나는 보니까 나의 상대를 위해 손 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는 자기를 볼 수 없으니까 손 쓸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한다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정착되는 것이다. 갑이 을을 위하고 을이 갑을 위하니까 갑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할 필요가 없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니까 숫제 자기를 위할 생각을 않는다. 자기를 잊어 버린다. 의식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상대방이다. 그래서 상대방을 위하게 되는 것이 자연 순리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나의 상대방은 그리스도시다].

이런 관계는 대등한 둘이 서로 합의하에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면 개성이 각각이므로 이 경우 상대를 서로 신뢰하는 것이 기본 바탕이어야 하는데 그 신뢰가 문제이다. 서로 믿어야 하는데 믿지 못하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다. 이론은 있으나 실천은 없음이니 공리공론으로만 그친다. 고로 이것이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소 관계, 주종 관계, 상하 관계가 명확한 둘 사이의 관계라야 하는 것이다.

왜냐면 한 쪽이 시범을 해[보여] 주어 상대에게 믿음을 주어야 할 필요성에서다. 이 본을 보임은 당연히 큰 쪽에서 작은 쪽에게 보이는 법이요 그것이 순서다. 이것이 대소, 주종 관계다. 즉 절대로 평등할 수가 없다는 얘기다.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본질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이 그 근원이라고 앞에서 결론 내린 것이다. 왜냐면 이런 관계는 반드시 먼저 본을 보이며 인도하여 이끄는 쪽과 이 본을 따르고 이끌림을 받는 즉 따라가는 쪽 두 편으로 나누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관계는 반드시 아버지[어버이]와 아들[자식] 관계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해 갑은 을을 낳아야 하고 을은 갑에게서 파생(派生) 되어 나옴으로써 이루어지는 숙명을 지닌다는 그 뜻이다. 그래야 큰 자는 작은 자에게 신뢰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자는 또 자기라는 존재가 큰 자로부터 나온 까닭에 큰 자를 신뢰할 수 있음이다. 다시 말해 무슨 운동이든지 그 시동(始動)을 거는 쪽이 있게 마련인데 이런 작용, 반작용이 되풀이하여 나타나는 것으로 해서 만물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런 면으로 고찰해도 조물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그 논리의 빈약성과 허구성만 스스로 폭로하는 것밖에 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시는[요일 3:24]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됨은 바로 이같이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는" 바로 그런 관계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주시니 나 역시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다름아닌 앞에서 인용한 바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고후 5:15]의 골자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처럼 살고 짐승처럼 살지 않도록 처음부터 구조적으로 이렇게 내 안에 성령의 선물로 주심으로써 완전한 토대로 장치해놓으신 것이 우리의 구원 즉 새 창조다. 그러니 "육신"을 따라 사는 자는 성경의 선언과 같이 믿음 자체부터 없는 것이라고 우리는 단정하게 된다. 고로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함은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아 줌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관계에서 도무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까닭에 나의 상대를 위하여 내가 죽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기꺼이 죽을 정도로 오직 상대만을 위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완전히 망각 상태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나를 위하는 것은 물론 나의 상대다. 그 역시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림이다. 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오로지 상대를 위해서만 내가 존재함을 가리킨다. 그래서 주님 말씀하시기를 "내 살은 너희 먹을 양식이요 내 피는 너희가 마실 음료라" 하신 것이다[요 6:53]. 바로 이런 삶의 원리, 생명의 법질서를 말씀하신 것이다. 나의 전체가 나의 상대를 위한 것이니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니다.

머리와 몸이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머리는 전적으로 몸을 위하고 몸[의 각 지체]은 머리를 위한다. 전적으로 상대를 위하니까 목숨을 다 바침이요 거저 줌이요 그래서 상호간 각자는 상대의 소유물[선물]이 되어 있다. 우리를 주님께서 피로 사시어 자기 것으로 삼으셨다, 즉 우리가 모두 주님의 것이다[롬 14:7-9], 또는 우리에게 선물로서 자신을 주셨다는 등의 표현이 모두 이 사실을 가리킴이다.

⑪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요 최종 선언이시다. 핵심은 여기에 있다. 어린 아이가 이해하는 언어는 '사랑'이다. 이상과 같은 설명을 어린 아이는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랑의 언어는 만국 공통어일 뿐 아니라 연령의 구별 없이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언어다. 따라서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감지한 아이든 어른이든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모든 뜻과 말씀에 순종하기를 지체하지 않는 이는 구원 얻고 천국에 들어가는 일에 아무 하자가 없다.

"육신"이란 말이나 "자기 부인"이라는 말 등을 몰라도 또 들은 적이 없어도 좋다. 사랑 하나면 충분한 의사 소통이 되기 때문이다. 단 이상과 같은 단어들을 나열하면서도 그래서 성경에 해박한 지식이 있다고 자처하면서도 육신대로 살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의 '입에 발린' "사랑"만은 아니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성령은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시기 때문이다[행 5:32].

하나님의 아들되는 가장 핵심 요건이 바로 이 사랑에 의한 순종인 것이다. 사랑 없는 순종은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만일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즉 스스로 영생 얻기 위한 목적의 종교행위일 따름이다. 그리 되면 그리스도의 구원이 은혜로 믿음으로써 얻는 데에 있다고 아무리 큰 소리쳐도 그에게는 한낱 종교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행위[종교 행위]로 구원 얻고자" 함이 된다. 즉 믿어야 구원된다니까 그 믿음을 나타내기 위한, 사랑해야 순종해야 된다니까 그 사랑과 순종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의 일체의 행위가 종교 행위다.

사랑으로 우러난 순종은 그런 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즉 자기 구원과 결부시키지 않는다. 결과론적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 되기 때문에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것이지 구원 이룸을 의식하고 목적으로 삼을 때는 자기 구원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마음을 푹 쏟아놓는 것이 사랑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잠 23:26]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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