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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7) "집에 있는 교회" 등록일 2016.02.25 20:45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430

집 교회 운동-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CITHM'의 기본 잣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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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그리스도인의 고난

에덴낙원에서 아담은 하나님 같이 되려다가 시험에 빠져 범죄하고 죽음에 이르렀다. 생명의 낙의 최고 절정을 다 누리며 살아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욕심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그렇다면 "죽는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전히 이전처럼 "죽지 않는다"고 속이는 이 세상 신(神-고후 4:4)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오늘날은 무엇으로 시험하는가. 앞에서 설명한 대로 근본적으로 이런 죽음 가운데 처해 있는 인생들이므로 "죽기를 무서워하는"[히 2:15] 그 약점을 파고 드는 수법을 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무서워할" 이유가 없는데 믿음이 없으므로 무서워하게 된다.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한다는 것은 죄에게 종 노릇한다는 그 뜻이다. 고난과 고통은 죽음의 영역이다. 생명에는 없다. 따라서 이런 고난에서 탈피해보려는 욕구가 누구에게나 있어 다시 말해 각종 욕심이 죄를 형성하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죄를 척결하는 것이 앞에서 말한 자기 부인이다.

고로 이 세상에서의 자기 부인은 고난을 의미한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이 그 대표적인 예다. 생명의 세계에서는 자기 부인이 생명의 낙 그 자체이지만 이 세상에서만은 그렇다.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지기를 부인해야 "내 몸에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채우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할 수 있음이다. 이미 앞에서 이 세상 삶은 인간 삶의 본디 영역이 아님을 밝혔다. 삶[생명]이 아니라 죽음의 영역이니까 고난을 피할 수 없음은 당연지사다.

동물들만이, 동물들이라야 정상적으로 사는 것이 되어 있는 자연계에서 어찌 인간이 정상적으로 살기를 바라겠는가. 아니, 살 수가 있는지부터 자문자답해볼 일이다. "고난이든 죽음이든 개의치 않고 오직 인간답게[이제는, "하나님 아들답게"] 처신하기를 바랄 뿐이다" 하고 답을 내려야 하지 않는가. 수치라든가 부끄러움이라는 것도 고통에 속하고, 고통인 만큼 생명의 영역은 아니다. 주님께서는 그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 고난을 참으셨다[히 12:2].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죽음을 개의치 않는 것이 육신대로 살지 않는 것이요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고전 9:27] 것이다. 잠깐 동안의 이 세상에서의 죽음을 더 이상 무서워 할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어 새 피조물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친히 먼저 고난 받으신 주님의 본을 따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자기 본분을 다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이 세상에서의 고난 받음이다.

따라서 이렇게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죽음의 고난이 때가 이르면 영광으로 변환되는 것은 당연하다[고후 4:17].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렇게 영광으로 변환한 실례[곧 그리스도의 부활]를 익히 아는 터에, 이 확신에서 조금도 흔들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야곱의 형 에서처럼 한 때의 팥죽 한 그릇을 위해 고귀한 장자(長子)의 명분을 파는 것과 같은, 이런 죽음을 무서워하고 기피하는 행위는, 올바른 것을 따라 살지 않고 당장 눈앞의 욕구만을 위해 사는 '자기중심'에서 우러나는 악이요 죄이다.

어떤 경우든 이런 자기중심의 존재는 하나님의 피조물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고난을 통해서 온전하게 되고 완벽하게 입증되는 것이지 순탄한 환경에서 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고 볼 수 있기에 주님께서도 "아들이시라도 그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완전하게 되셨던"[히 5:8]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죽음의 고난을 통해 자신의 '자기 부인'이 명실 상부한 것이고 명불허전임을 실질적으로 입증하는 절호의 기회를 우리가 모두 맞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이다.

⑬이 세상의 구조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 신(神-고후 4:4)이요 실질적인 지배자로서 인간을 노예화하여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될 일이다. 모든 인생[그리스도에 속하여 자유인이 되어 있지 않은 한]이 그 쇠사슬에 억압되어 구금되어 있는 상태다. 아담 부부가 첫 자식들을 세상에 내어놓기가 바쁘게 이 "악한 자에게 속한"[요일 3:12] 가인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의인 아벨을 억압하고 핍박하여 결국 그를 죽여 없애는 것으로써, 그 증거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이런 구조는 첫 사람 아담이 이 세상 신(神-고후 4:4)에게 속아 그에게 자기 권위를 넘겨 줌으로써[눅 4:6,7] 현실화한 것이니, 이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주님의 광야 시험에서 세상 부귀 영화와 권세를 보이면서 "이것은 내게 넘겨진 것이라" 한 그대로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먼저 범죄하였고 그런 범죄에 인간 스스로 동조함으로써 결과론적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추종한 결과이다. 그리고 창세기에 기록된 바와 같이 이들 악령들은 이런 사태를 기화로 스스로 인간 육체로 변신하여 "사람의 딸들"과 불법적인 접촉을 함으로써 자기 소생들["네피림"-창 6:4]을 인간 세계에 많이 퍼뜨렸다.

불법이지만 어느 정도 용인되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인간 스스로가 모든 영물들 위에 군림하던 자리를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양도해 버린 격이 되어[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추종한 결과 그 지배 아래 듦으로써] 합법이 아니면서도 합법적인 것처럼 되어 있음이다. 이런 불법은 이 세상이 망해서 없어져야 함께 없어질 그런 성격을 지닌다. 그래서 그런 존재들이 인간으로서 났다가 죽은 뒤의 영혼들을 "더러운 귀신"이라 하여 주님께서 인정하신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영혼이 아담의 씨[후손]가 아니라고 해서 인간이 아니지는 않다. 그리스도께서도 영원히 계시는 '영이신 하나님'이시나 인간의 육체를 입으심으로써 이제는 영원히 사람으로 존재하시는 것과 같다. 그 영 그대로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냥 육체만 입으심 즉 여자의 태를 통하여 인간 세상에 나신 것뿐이지만 우리와 다름 없으신 완전한 사람으로 지금 존재하심이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누가 그런 악령들의 후손인지 누가 아담의 씨인지 분간하는 분별력은 부여되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처럼 "모든 피조물들"[to every creatureㅡ막 16:15]에게 복음만을 전할 의무만 지고 있다. 이런 이질적인 인간 종족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나 이 세상 신(神-고후 4:4)이 처음부터 자기 책략대로 꾸민 일인만큼 따라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믿어도 좋을 듯하다. 게다가 아담의 씨 가운데에서도 믿지 않는 이들이 상당수가 있을 것이고 보면 이들과 합친 세력이란 것은 실로 어마어마하여 성도들을 위압하기에 충분하며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직,간접으로 방해하는 데에는 충분한 환경 조성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이루었다 할 것이다.

바로 이 목적으로 이 세상 신(神-고후 4:4)은 그런 "더러운" 짓을 감행한 것이다. 더러운["unclean", "foul"] 짓이므로 "더러운 귀신"이라 하신 것이다. 우리로서는 이 정도의 지식까지야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덕이 될 것이다. 대세(大勢)를 잡고 그 쪽으로 분위기를 몰아가는 강압 상태에 직면해서 그 압박의 실상을 아는 것이 중요하니, 적을 알아야 적에게 대응할 수 있듯이 이 세상 신(神)의 정체를 제대로 알아야 그에 대한 효과적인 방비책을 세울 수 있음이다.

⑭공동체 의식-한 몸 의식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죽어 좋은 데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니니, 현재 새로 창조하심을 입은 피조물이 되어 '그런 피조물로서 마땅히 살아야 하는 삶의 법질서'대로 살기 시작하는 '일상생활'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법을 가르치는 필수적인 기본 바탕의 도리를 알리는 기쁜 소식 그 자체이다. 물론 그렇게 올바르게 살면 영생이다. 또 영생을 누리는 산 자이기에 그런 올바른 삶을 영위하겠다는 굳은 결의가 우러나게 된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어도 일단 새 창조로 다시 나서[出生] 새 생명으로 출발하는 것이므로 그와 같이 살지 않고 여전히 이전처럼 살고자 할 경우 "회개"[행 17:30/2:38] 자체가 되지 않으며 따라서 믿을 수가 없고[믿지 않으니 구원도 물론 불가능이다], 회개하고 믿은 후라도 지속적으로 그렇게 살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거짓말한 것이고 속인 것이 드러나므로 당연히 그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은 자명하다[마 7:21/25:45].

하나님을 머리로 하고 모든 인간 피조물이 한 가족을 이룬 '한 몸으로서의 삶'을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 복음의 골자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말하는 '공동체 의식' 바로 그것이다.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인간 사회에서 가장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리사욕이다. 이는 하나님을 믿든 안믿든 공통으로 지니는 인간의 보편 심리다. 남은 그렇게 지탄하면서도 정작 자기가 관여하게 되면 태도가 갑자기 달라지는 것이 인간의 자기중심적 특성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 안에 장치해 두신 "양심"이라는 측정계(測定計 )로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상식이 이 공동체 의식이다. 인체의 온도를 측정하는 것은 온도계고 사람 마음을 스스로 측정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양심이다. 이 모두 한 하나님의 피조물됨에서 연유되는 것이다. 양심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아도 이 양심이라는 장치가 인간 스스로에게서 난 것이 아님이 입증되는 것이다.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증거다.

이런 공동체 의식과 그렇지 않은 사리사욕에 물 든 두 인간형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도출시키느냐 하는 그 역사적 산 증거가 임진왜란 때의 이공(李公) 순신과 '나'원균으로 대표되는 사례(史例)인 것이다. 이공은 유달리 이런 공동체 의식으로 철두철미하게 그 일생을 장식한 인물이다. 상관이 오동나무를 사사로이 쓰겠다고 베어 달라는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고 강압적인 상사의 인사 청탁에도 굽히지 않았던 그 신념이 나중에 나라를 홀로 위기에서 구출하게 되었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에 반해 '나'원균은 이공보다 월등한 군사력을 갖춘 국방의 요지(要地)에 있으면서도 승산의 기회가 없다고 미리부터 판단, 스스로 그 병력을 해산시키고 무기와 배들을 모조리 바다에 수장시키고 육지로 탈출하려던 위인으로서, 그 한 가지 행동으로 나라는 완전히 바람 앞에 촛불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라의 관문을 지키던 임무를 팽개치고 완전히 적 앞에서 등을 돌림으로 완전히 절망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었으나, 이공의 철두철미한 공동체 의식이 개입하여 나라를 구출하게 된다.

죄를 짓지 않아야 하는데 그 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 의롭게 살아야 함을 성경이 명령하는데 그 의로움이 어떤 것으로 나타나느냐, 즉 죄와 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가장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이 두 인물의 대조적인 삶의 자세에서 그리고 그러한 삶의 결과가 진정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극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 '나'원균의 자기중심 즉 개인주의[이기주의]요, 이공의 그런 공동체 의식인 것이다.

남이야 어떻든 나는 나의 할 임무를 다하겠다는 것이 공동체 의식의 특징이다. 반면 자기중심주의는 전체의 이익은 아예 불문에 붙이고 자기의 개인에게 유익이냐 무익이냐 그것만을 따져 행동한다. '나'원균이 볼 때 과거의 여러 차례 전투보다는 이번 전쟁[임란]에서는 승리를 기약할 수 없음이 뻔했다. 그래서 지체함이 없이 그와 같은 행동을 한 것이다. 이런 똑같은 일이 두 번씩이나[그 두번째는 칠천량 해전에 이은 명량 해전] 두 사람 사이를 교차하면서 되풀이되는 것이다.

이공과 같은 철저한 공동체 의식이 없는 한, 일반적으로 우리 모두가 그러하니 우리를 거기 대입시켜 내가 바로 원균일 수 있다는 역사적 인식의 자성론(自省論)에서, 원균 한 사람만을 매도하는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로 잡기 위해 '나'원균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원균에게 돌을 던질 사람은 이공과 같은 극소수 외에는 없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여자[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린]를 돌로 치라" 하심과 같다.

주목하게 되는 사실은, 이런 이공 유형의 신념에 찬 생활이, 국가적 위기로부터의 극적 구출이라는 좀체로 만나기 힘든 그 한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한 평생 완전히 이 세상에서는 그 가치가 묵살되고 도리어 갖은 수모와 멸시와 따돌림의 대상으로 응달 아래에서의 볕들 날 없는 삶으로 일관했다는 엄연한 현실이다. 이공이 바로 그렇게 되어 임란 당시까지만 해도 일개 현감[정읍]으로만 전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런 미증유의 국가적 불행이 없었더라면 이공의 일생은 무영(無名)에 그쳐 역사상 두각을 나타내지 못함은 물론, 융통성 없어 가족들만 고생시키는 한낱 볼품 없는 못난이로 취급 받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옳고 마땅한 사람 사는 도리로서의 '우리' 의식, '한 몸' 의식은, 하나님의 직접 말씀에 의한 법질서로든 세상에서 통용되는 일반적 상식으로 인식되는 공동체 의식으로든, 이 세상에서 자기 당대(當代)에서는 절대로 환영받지 못한다는 특징이 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이 세상의 구조[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 지배자가 되어 있어 행세하는]가 그러하고 자연계의 육체로 환원되어 버린 비극의 주인공으로서의 인간 본성["육신"이라는 굴레]이 그러하여 이 사실은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 변할 수 없다. 그러나 이공 유형의 인생은 그냥 그 의미대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가 교훈을 삼는다는 그 의미일 뿐이다. 그렇게 살면 그것이 곧 인간 구원으로 통한다는 그런 것은 아니다.

오직 죄가 무엇이냐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일목요연하게 배울 수 있다는 그것뿐이다. 그리고 몸과 머리의 관계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로서 그렇게 한 몸 의식으로 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이공의 그와 같은 한 몸 의식 즉 공동체 의식이 일조유사시에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를 배움으로써 족하고 그런 삶이 또한 평상시에는 찬밥 신세가 되고 개밥에 도토리 격이 되는 것을 다시 확인하면 그로써 충분한 것이다.

그런 이순신 유형의 인물이 만일 당시 그리스도의 복음에 접했더라면 믿었을까 아니 믿었을까 하는 문제 역시 별개다. 안믿을 수도 있고 믿을 수도 있고 그것은 그 개인의 자질에 달린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그 자유 선택과 의지에 달린 것이다. 원균 유형의 인물이 역시 그런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이순신 유형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무반응일 때 원균 유형은 반대로 열렬하게 환영하여 믿음에 들어설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런 구원 문제를 떠나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새 피조물됨으로써 진정한 공동체 의식 즉 한 몸 의식으로 생활하는 것이 언제 어디서나 통하는 생명의 법질서인 사실이 입증된다는 뜻이요, 그래서 죄와 악의 상대적 개념을 이로써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요, 동시에 이 세상이 악하여 원천적으로 좋은 것[善]을 버리고 나쁜 것[惡]을 선호하는 그런 세상의 특성을 재차 확인하게 되는 교훈을 얻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리고 이 교훈의 가치는 막대한 것이다. 왜냐면 성경에서 가르치는 죄가 무엇이며 의가 무엇이냐 그리고 이 둘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는 것을 아주 간단한 예로 대조시켜 극명하게 나타내 주는 까닭이다. 죄가 무엇이냐. 공동체 의식,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을 무시하는 개인주의라는 즉답을 이러한 실례로써 입증할 수 있음이다. 즉 자기중심 다시 말해 "자기를 위해 사는"[고후 5:15] 모든 것이다.

그런 죄와 악의 결과가 실제 어떤 양상으로서 종국적으로 나타나는지를 알려면 가장 명확하게 그것을 가름해 보여 주는 것이 임진란의 이공과 '나'원균의 행적이라는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교과서는 없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 의식이, 일조유사시의 특별한 때가 아닌 보통 때에 이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전란 이전의 이공의 불우한 삶이 훌륭하게 증명해 주는 것이니 거기서 배우고 확인하면 충분하다.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의를 따르는 믿음 생활이 이 세상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를 이공의 반평생이 그 증거로 나타내어 주기 때문이다. 공자도 사람 사는 도리로서의 극히 상식적인 것 즉 누구나 그 양심상으로는 다 아는 사실을 가르치려 천하를 주유(周遊)하였으나 실망 끝에 마침내 낙향해 버렸다. 그것이 옳다는 것은 다 알지만 그 원리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공의 삶이 그와 같은 것이다.

세상 거의 모두가 그렇게 살려고 하지 않는데 이공 홀로 외로이 그렇게 살기로 철석같이 결심했고 또 역시 그렇게 냉대만 받아오다가 제 때가 이르자 즉 미증유의 국가적 위기에 접하자 그런 신념의 삶이 정작 생명의 원리임을 만천하에 증명해 준 것이다. 공자는 그런 것을 증명해 줄 기회를 잡지 못했으나 이공은 만만다행으로 여지없이 증명해 보여 준 그 점에서 둘은 차이가 있다.

행정가요 정치가로서의 주공 단도 공자의 기림을 받았으나 이공처럼 그 결과를 세상 앞에서 역력히 드러내어 주지는 못했으므로 우리는 더욱 이공과 '나'원균의 교훈을 유달리 주목하는 것이다. 물론 이공이나 주공이나 공자나 맹자만이 그런 신념으로 산 유일한 부류라는 말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 똑같은 삶을 살았으나 단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더군다나 이공과 같은 뚜렷한 역사적 결과물을 낸다는 것은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하늘의 별 따기에 빗댈 만큼의 희소 가치이기에 그렇다.

이공 역시 그런 국난이 없었더면 앞에서 지적했지만 이름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두 사람이 그런 공동체 의식과 개인주의의 두 유형으로 대별되는 인간 삶의 대표 역할을 하고 있기에 거론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공자 역시 그 사상을 널리 세상에 펴고자 한 점에서는 분명 실패자다.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자가 만일 성경이 밝히는 여러 가지 사실들 즉 원천적으로 이 세상이 악령의 수중에 있다는 현실을 깨달았다면 그런 시도 즉 삶의 올바른 도리를 정치 현실에 반영시키려는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했을 것이다.

왜냐면 악령이 지배하고 있는 한 악령의 세상이므로 그런 인애(仁愛)라는 것이 처음부터 거국적(擧國的)으로 먹혀 들 리가 없음이다. 최소한으로 그런 정신을 가진 소수가 적재적소에서 활동하면 사회는 어느 정도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런 정도의 목표는 가상할 만하다. 그런 정도이 희생 정신은 상찬 받아 마땅하다. 그런 것이 없으면 어찌 세상에서 소금 맛을 볼 수 있으리요. 그런 점에서 '이순신 정신'을 선양함은 국가적 차원에서라도 아주 바람직하다. 

자기중심의 세상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이란 존재할 수 없고, 있다면 모조리 이기적인 자기 위주의 사랑뿐이니 그것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사랑이 아님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구원[영생] 차원에서 하는 것이니, 인생 삶을 보다 윤택하게 데에서야 거짓 사랑이고 진정 사랑이고 따질 것 없이 이공처럼 철저한 공동체 의식으로 과감히 나아가는 그런 생활 자세를 보배로 여기고 고무 격려함에서야 누구나 다 공동으로 축원하는 바가 아니랴.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이 진리를 수용하고 않고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를 수용하는 이는 언제나 극소수임이 우리의 일상생활의 경험으로도 입증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항상 그 극소수에 속해 있음을 성경 역시 미리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경고라는 것은 그런 극소수로서의 모든 불이익과 고난을 각오하고 결단코 이 때문에 요동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성경은 항상 이런 올바른 삶의 주인 의식, 한 몸 의식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천하의 이공 순신들이여, 그리스도께 나아오라. "의[올바름]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으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라"[마 5:6] 하셨다. 그리고 "의[올바름]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으니 천국이 저들의 것임이라"[:10] 하셨다. 모든 옳고 바르고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 근본이요 근원이시다. 인생 최고의 덕목인 공동체 의식은 하나님 정하신 삶의 기본 질서인 몸과 머리 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천국은 그런 올바른 삶의 자세를 가지고 그런 세계를 동경하는 사람들의 나라다. 그러므로 모든 정의, 공의(公義, 공정한 도의)를 사랑하고 불의, 불법을 미워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기치(旗幟, 깃발) 아래로 모이라. 그리스도께서는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셨다"[히 1:9]고 했다.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이들은 절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데가 천국이다. 오직 의인들만이 들어가는 곳이다.

죄인은 절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천국이다. 아담은 죄를 지은 죄인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생명 세계에서 쫓겨난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불러 천국에 보내시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오직 세상에는 의인도 선을 행하는 이도 없으므로 그렇게 죄인인 줄 알고 결코 자기는 의인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을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의인으로 만들고자 하여 오신 것이다.

그리고 "육신"[롬 7:14-8:13]에 사로잡혀 스스로 '나'원균이라 자처하는 이들도 다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오라. 그리스도 친히 당신의 "죄의 몸을 멸하여"[롬 6:6] 주실 것이다. "죄와 사망의 법"[8:2]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이공 순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여 그것을 자기의 의(義)로 내세우고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니 하나님 앞에서는 의인도 선인도 없다는 성경의 말씀을 믿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인간의 의라고 멸시하시거나 무시하시는 것은 아니다.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도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기"[행 10:35]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임을 성경은 명시하고 있다. 단지 그리스도 없이 자기의 의로써 구원 받을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의를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은 참으로 의인이 될 수 있기에 의인이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단정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이 불의의 세계이고 의로운 사람들이 핍박을 받는 곳임을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의를 행하는 이들은 "참고 선을 행해야"[롬 2:7] 하는 것이다. 자기 부인을 말씀하시면서, 망대를 세우는 자가 먼저 앉아 예산을 셈해보고 전쟁에 나가는 왕이 먼저 승산부터 따져보듯이 하라고 경고하심도 그 때문이다[눅 14:28,31]. 자기 부인에 대한 이 세상에서의 혹독한 대가를 충분히 각오하고 있으라는 말씀이시다. 이런 경고를 완전히 무시하고 처음부터 자기 부인을 말살하도록 부추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충동질에 끌려 온 것이 "육신대로 살아도 구원은 얻는다"는 인위적 교리의 해독이다.

육신대로 살면 죽고[멸망] 성령으로 육신을 쳐서 이겨야["몸의 행실을 죽여야"-롬 8:13] 산다[영생]는 성경의 경고를 정면으로 배척하는 데에서 무슨 구원이 있고 생명이 있으리요.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좁은 길, 좁은 문이 어느 시대에서든 영생에 이르는 특징이라 하셨고 심지어는 이를 알고 들어가려 하나 "못하는 자가 많다"[눅 13:24]고 하셨다. 주님의 말씀처럼 "들어가려고 힘쓸"[:24] 일이지, 인위적으로 그 길과 문을 '넓히려고' 왜 되지도 않을 일을 시도한다는 말인가.

이공 순신이나 주공 단이나 공자나 이런 인물들의 공통점은, 인간이 마땅히 품어야 할 생각 즉 혼자 살고자 하는 것이 절대로 도리가 아니고 여럿이 공동으로 함께 사는 삶이 정상(正常)이라는 주장을 하고 또 그대로 살아 왔다는 데에 있는데, 또한 세상이 이를 알아주지 않았다는 이 사실에도 있다. 오히려 그런 그들을 비소하고 조롱한 것이다[주공 단만은 일인지하(一人之下)에 있어 그런 일은 없었지만]. 따라서 이 세상의 특성이 이들의 생애를 통해 재확인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 안에 장치해두신 양심대로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이며 도리이고 정상적인 사람 삶의 원리인 줄 알아 그대로 실천했으나, 이를 세상은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동의는 충분히 하면서도 그래서 같은 생각은 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실생활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외면한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것도 동일한 근거다. 물론 더 있으니,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증오할 뿐 아니라 그들이 하는 하나님의 일을 사력을 다해 방해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다.

그러나 평시에는 외면하였지만, 정작 사활이 달린 사태에 임해서는 그런 자세가 유일한 구제책이요 해결 방안임을 이공의 생애로써 그 짧은 7년 간의 전쟁 기간이지만 세상에다 훌륭히 입증해 주고도 남음이 있었다는 이 사실에서 그 교훈의 가치는 가히 세계적이요 인류사적이고 기념비적 금자탑이라 이를 것이다. 왜냐면 그런 괄목할 만한 역사적 실례를 찾아보기가 수 쳔년 세월을 통해서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눈에 확 들어오도록 승패로 가름되는 전과(戰果)로써 드러내어진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기에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한(韓)민족은 참으로 복 받은 역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리라. 그만큼 역사적으로 부과된 책무도 크다. 인간 범죄의 해악(害惡)을 논함에서 어찌 궁색하게 이상 두 인물의 대조에서만 찾으리요. 우리가 일상 접하고 또는 당하고 있는 거의 모든 일들이 그 증거가 아닌가. 단지 여기서 역점을 두고자 하는 것은, 그런 모든 범죄의 온상(溫床)이 되고 있는 자기중심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 그리고 그 반대인 자기 부인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것의 차이를 밝히려는 것뿐이다.

일조유사시에는 온 세상이 이공과 같은 삶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것과 같이, 이 세상이 끝나면서 혹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종료되면서 찾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평소에 외치고 경고하던 하나님과의 관계다. 결국 그 쪽으로 모든 것은 회귀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부질없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회유책에 말려들어 딴전을 피워 그렇지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올바르게 사람 사는 도리인 것이다. 올바르게 살아야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알아야 총기(銃器)가 비로소 소용에 닿는다는 그 소리다. 쏠 줄도 모르는 총을 누가 준다던가. 잘못 손을 놀려 남도 죽이고 자기도 죽을 일을 왜 맡기겠는가. 살 줄도 모르는데 영원히 사는 천국에다 보내면 어떻게 하려고 천국에 들여놓겠는가. 살았으니 그냥 움직인다고 그것이 사는 것이 아니다. 사는 법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 사는 법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서는[:15] 안된다는 것이다. 반드시 머리를 위하고 그리고 그 머리의 지시를 따라 그 함께 지체(肢體)가 되어 있는 이웃을 위해 살아야 그것이 사는 방법이다. 방법도 모르면서 사는 것 즉 영생에만 욕심을 내는 자들을 하나님이 방치하실 리 없으니, 절대로 천국에 들여보내시지 않는다.

이공과 같이 공동체 의식에 철저한다고 하여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기준에서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비록 그렇더라도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우리 모두는 그 몸을 이룬 각 지체 역할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 한 몸 의식을 나타내는 공동체 의식에 입각한 삶의 정신이 이 세상 삶에서도 그와 같은 위대한 결과를 나타내고 그 상대적인 의미의 자기중심[이기주의]은 '나'원균에서 보는 바와 같은 파멸 그것임을 실증해 주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귀한 교훈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와 의(義)의 개념에서 그 뿌리를 논하는 것이니 곧 '한 몸'의 구조, 둘이 하나 됨을 지키는 것이 의요 선이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자기 부인이다. 따라서 의를 행하려면 철저히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으려면 아주 죄를 근절하지 않고는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 함이다. 죄를 짓지 않는 것으로 말하면 미봉책이 아니라 근절을 말함이다. 의를 행하려면 철두철미하게 100프로 의를 행해야 하는 것이니 그래서 자기 부인의 절대적 필요성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은 이런 인간 세상에서 나타나는 또는 나타내는 모든 것보다 더 확실하고 철저하고 완전한 생명의 원리와 그 법질서를 나타내어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 생명의 영원한 원리와 더불어 영원 불변의 생명의 확고한 기반과 토대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役事)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확립되어졌으므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능력[예수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우리 각자 안에 우리의 영혼 격으로 계심으로써]을 선물로 주심으로 얼마든지 우리가 그 법질서를 따라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인류 최대의 희소식인 것이다.

단순히 영생 하나만을 공짜로 값없이 선물로 은혜로서 받기만 하면 된다는 그런 것이 절대로 희소식일 수 없음을 명심할 것이다. 그런 것은 유치한 철부지 생각일 뿐이다. 생명의 법질서대로 행할 능력을 주심을 말한다.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능력,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이길 수 있는 능력, 애초 인간을 창조하신 그 인간으로서의 최고 가치를 따라 구김 없이 주름살 없이 산뜻하게 살 수 있는 생명력을 '공짜'로 주신다는 내용이 성경에서 말하는 희소식[복음]이다.

그러나 아무리 공짜로 주시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을 아니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 "회개하라는 명령"[행 17:30]이시다. 제대로 활용한다는 것은 절대적 순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명령에 순응하면 우선은 이 선물을 받을 만한 유자격자다. 앞으로 어떻게 행할지 그런 것은 따지지 않고 무조건 베푸시는 "선물"이니, 그래서 "은혜"요 "믿기만 하면 되는 구원"이다.

그러면 과연 제대로 그 약속대로 이행하는지는 점차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그 이후의 행함을 통해 진단하게 된다. 약속을 제대로 이행해야 그 자격 있음을 스스로 입증함이다. 그래서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 함이다. 이루되 앞에 설명한 생명의 영원한 법질서대로 자기 부인으로써 이루는 것이다. 자기 구원을 이루라 한다고 자기 구원만을 의식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므로 자기 부인일 수가 없으니, 생명의 법질서를 지키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그리스도의 자기 위해 죽으신 의미부터 모르는 것이므로[고후 5:15] 거꾸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조차도 안된 상태다. 그런 사람은 지금까지 믿노라 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성경대로 믿어 제대로 구원부터 얻을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이니 모두가 다 하나님의 나라 아닌 데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곧 생명의 나라가 아닌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굳이 쓰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곳 즉 생명의 하나님에게서 벗어나고 떠나 있는 데가 분명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증거다. 곧 이 세상이다. 형언할 수조차도 없는 비정상의 기형적인 세계다. 그 특징이 자기중심이다. 이런 데에서 구원 받으니 자기 부인인 것이지, "구원"이란 말이 달리 쓰여질 수가 없다.

⑮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 통치[맺음]

그리스도께서 다시 세상에 오시는데 그 때는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본연의 모습 그대로 이 세상의 주인으로 오시는 것이다. 처음 오실 때 우리와 같은 죽은 자로서의 모습이셨으므로 정상의 모습이 아니셨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모습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온갖 위의(威儀)를 갖추고 그 영광 가운데 오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영광 가운데 오시는 것부터 먼저 바랐기 때문에 그를 배척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알아보지 못한 것이니, 그리스도를 모르고서 어찌 그를 영접할 수 있으리요.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영생부터 탐내는 것이 바로 그러한 무지(無知)에 속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부터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니 순서를 제대로 따를 일이다. 그래서 영생은 약속이 되어 있음을[요일 2:25/약 1:12/2:5/히 10:36] 알아야 하는 것이니,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함과 같다. 순종이 바로 영생을 사는 방법인데 이 순종부터 "고난을 통해 배우는"[5:8,9] 것부터가 선결 과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시자마자 마지막 심판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오실 필요가 없다. 왜냐면 마지막 심판 때 모든 인생들이 그 재판장의 자리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를 뵐 터이니까 굳이 세상에 나타나실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나타난 대로의 천년 통치 기간이 마지막 심판 전에 남아 있을 것은 당연하다. 오늘날의 이 세계는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범죄 후 땅[지구]이 저주를 받아 현재의 상태로 전락했는데, 이렇게 전락해온 과정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회복하는 양상으로 단계를 밟아 올라가며 끝나는 것이다.

즉 아담이 신령한 세계인 에덴낙원에서 추방된 후 이 자연계에 속한 세상에 거처하게 되면서 이루어진 상황을 되짚어 올라가면서 끝나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답다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세계가 처음 창조 당시부터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심이다. 처음부터의 세상 그대로라면 현재의 세상이 끝나자마자 곧장 마지막 심판으로 돌입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지만, 인간[아담]의 범죄로 된 결과가 현재의 이 세상이기 때문에 정상으로 회복되는 단계를, 지금까지 비정상으로 되어 버린 순서를 되거슬러 밟아감으로써 나타낸다는 것은 실로 합리적인 것이다.

이런 점 역시 성경의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는 확고한 증거이다. 다시 말해 아담 이후 노아 홍수 때까지 인간은 천년 가까이 생존했는데 바로 그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이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으로서, 아담이 애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세계를 다스리게 되어 있던 바로 그 위치에 복구하심은 당연하다. 이제까지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불법적으로[과히 그렇게 불법이라 할 수 없는 것은 아담 스스로 그와 같은 결과를 빚어내었기 때문] 이 세상을 지배해왔는데, 이제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 애초의 아담의 위치를 회복하심은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그 마지막 아담으로서 마땅히 첫 사람 아담이 자리 잡았어야 했던 위치에 오르심이니 곧 세상의 지배자로서의 천년 통치다. 왜 천년 통치이냐 하면 위에서 지적한 대로 아담 이후 인간이 천년 가까이 생존하였던 당시 상황으로 다시 회귀하는 상징성을 띠기 때문이다. 그런 상징적인 의미로서 천년이면 충분하고 더 이상 지속될 필요는 없으니, 원래 인간의 거처는 이런 자연계가 아니라 영계[에덴낙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친히 이 사실을 여러 말씀으로 확인하셨던 대목이 성경 곳곳에 발견된다. 열두 제자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린다 하신 말씀이 그 중 하나다. 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린다는 것은 천국을 두고 하신 말씀은 아닌 것이다. 왜냐면 거기에서는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누구를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는 그런 관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년 기간 사이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된다는 그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이사야서 등 구약 예언에 보면 장차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희소한 보석처럼 희귀하게 되고 육식 동물들이 소처럼 모두 풀을 뜯게 된다고 한 것이다. 이는 천국에서의 양상을 말한 것이 아니니 인간이 그런 희소 가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위에 지적한 대로 아담 이후 인간이 노아 홍수 때까지는 천년 가까운 수명이었고 그리고 그 세상이 홍수로 망하여 인간이 불과 8명으로만 남아 노아의 직계 가족뿐이었던 것을 되짚어 올라가는 상황임을 말하는 것이다. 적 그리스도의 때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써 종결되면서 노아 홍수 당시의 심판처럼 극소수만 제외하고는 모두 멸절되어 파멸을 맞기 때문이다[계 19:21/살후 2:12].

그리고 그리스도 통치 기간 중에 동물들이 모두 초식(草食)이라 함은 이미 지적한 대로 노아 홍수 이전에는 동물들이 모두 초식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노아 홍수 이후에 비로소 육식 동물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리고 노아 홍수로 전체 인류가 멸망한 것은 장차 나타날 적 그리스도로 인하여 거의 모든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어 멸망하게 되어 있는 것과 맞물리는 것이다. 왜냐면 극소수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 "짐승의 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는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매매할 수 없도록 만든다 했으니 첫째로 생활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노아 홍수 당시처럼 모두가 다 그리스도께서 임하실 때 죽음을 맞아 멸망으로 들어가게 된다. 무론 아직도 마지막 심판은 아니다. 적 그리스도의 세상도 이와 같이 망한 후 마치 노아의 일가족 8명과 같은 극소수만 남아 천년 기간에 인생 종자를 퍼뜨리게 된다. 이는 노아 가족 8명으로 인해 현재의 인류가 증식되었던 것과 같은 자취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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