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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8) 집에 있는 교회 등록일 2016.02.25 20:51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571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무저갱으로부터 잠시 놓여 당시의 세상을 미혹하게 된다. 이는 마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을 받아 [에덴낙원에서]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여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전락되어 죽은 자가 되어 버린 상태를 나타냄으로써 위에서 지적한 되거슬러 올라가는 회복의 최종 단계의 의미가 된다. 따라서 이로써 이 세상은 종료되고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지며 모든 일은 끝난다. 즉 그 때부터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새 창조[우리의 구원 즉 다시 출생하는 것]와 어울리는 것이다.

처음으로 창조된 첫 사람 아담이 영계인 에덴낙원으로 진입했던 바로 그 순서를 최종적으로 밟게 됨이다.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 창조된 인생들이 새 에덴낙원과 같은 그런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한 치 오차 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성경 자체의 내용이 보여 줌으로써 그 확실성과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처음부터 지어낸 황당한 이야기이고 거짓말이라면 이런 순서로 세상이 진행될 것이라는 내용을 이렇게 세세한 경로로까지 지어낼 리는 만무한 것이다. 진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기록되어 있을 따름이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많은 존재들이[인간과 영물을 막론하고] 영원한 고난의 멸망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마음 한 쪽으로 찜찜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가 현시점에서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답이 있으니,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시어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막 14:33]고 토로하신 사실이다.

이는 아버지와 하나되신 그대로 아버지의 마음을 나타내신 것이니 바로 아버지의 모습이셨던 것이다. 자, 하나님 친히 이렇게 고통을 당하신 것을 우리가 확인하는 마당에서 우리의 할 말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산 자로서 죽음에 들어가는 슬픔과 고통을 친히 맛보신 하나님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전적으로 당신 자신을 위하심이 없고 오직 그 피조물을 위하시는 하나님이신데도 그런 멸망에 들어가는 이들이 절대 다수라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도 불가항력이신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속수무책, 어찌 하실 수 없는 불가항력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시던 사실에서 입증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지전능의 대명사로 인식하고 있지만 여기서 보듯이 그렇지 않으시다. 물론 능력 면에서는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말씀 그대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원리원칙을 중심으로 움직이시므로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엄위(嚴威)와 인자(仁慈)가[롬 11:22] 상충(相沖)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동시에 여기서도 주종, 대소, 인과 관계가 적용되니 큰 것은 작은 것을 따른다.

즉 나중 있는 것이 먼저 있는 것을 따라 스스로를 일치시키고 조화시킴이다. 먼저 있는 것이 하나님의 엄위다. 왜냐면 사랑 곧 인자라는 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지으심으로써 비로소 생기게 된 하나님의 품성이시기 때문이다. 홀로 계시면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도 사랑은 조물주를 반드시 전제하지 않고는 인식될 수 없는 조물주의 실존에 대한 증거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면 저절로 났다면 단 하나만이 저절로 생겨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같은 '저절로 생겨나는 예'를 따라 다른 것도 역시 저절로 생기는 법이다. 저절로 생기되 오직 단 하나만이 생겨났다는 주장은 조물주께서 만유를 지으셨다는 논리보다 말도 못하게 뒤진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한정된 이지력(理智力)으로도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먼저 존재하시는 분[아버지]이 나중에 존재하게 되는 더 정확히 말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신 그 또 다른 존재[아들]와 상관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라고 확정 지어 단정하게 되는 것이다.

저절로 생겨난 것끼리는 절대로 그런 사랑이 생겨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 되면 그것은 계약 관계인데 전혀 남남끼리 그런 사랑이라는 약속이 가능하다면 왜 오늘날 같은 인간끼리도 그런 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거의 밤낮 없는 개인간, 집단간, 국가간의 전쟁이 끊일 날이 없는가. 사랑은 반드시 먼저 본을 보이고 그리고 그 본을 보이는 상대를 신뢰함으로써 그 본을 따름으로 이루어지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남녀 사랑도 아무리 동시에 사랑의 감정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먼저 신호를 보내는 쪽이 있게 마련이고 그 상대는 그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반응을 보여야 가능한 것이다.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신호를 무시하면 그만이다.

아버지께서 보여 주시는 사랑을 아들이 확인하게 되는 과정에서, 자기를 낳으신 아버지이시니까, 아들은 아버지를 신뢰하는데 아무 지장을 느끼지 않는다. 또 아버지께서 보실 때에도 자기의 아들이니까 자기를 신뢰하리라는 것을 모르실 리 없다. 아무리 자유 의지를 주셨다 하더라도 그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기를 따르게 될 것을 모르실 리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예 처음부터 아들을 만드시지 않았을 것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해서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으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생명은 사랑에 있으니 조물주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있고, 피조물에게 자유 의지를 주심으로써 피조물 또한 조물주를 사랑하는 가운데에서 상호 교제하는 관계를 형성하도록 함으로써 더 "풍성한 생명"[요 10:10]을 누리시게 하는 것이 있으니, 인간은 그 후자에 속하고 전자에 속하는 것이 자연계에 속한 기계적 활동의 생명체들이다. 곧 동식물들인 것이다. 이 "풍성한 생명"이 무엇이냐 하면 몸과 머리의 관계를 이룬 하나됨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그 몸의 한 부분이라면 몸 중에서 내가 최고로 미미한 존재라 하더라도 머리를 위시하여 모두가 다 나를 자기 자신처럼 위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나'라는 극도의 미미한 존재는 머리를 비롯해 온 몸 전체가 마치 '내'가 되어 있는 것처럼 조직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몸 전체가 의미하는 그대로의 확대, 확장, 확충된 나 자신을 누리는 삶이니 이것이 곧 풍성한 삶이 아니고 무엇인가 .내 스스로가 노력해서 이런 굉장한 결과를 거둔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이런 한 몸 체제에서 마땅히 하게 되어 있는 자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 즉 내 나름대로의 자기 부인에만 힘쓴 열매다. 내가 그렇게 하면 머리를 위시해서 다른 모든 지체 역시 그렇게 한다는 의미인즉 그들이 모두 나를 위해 존재하고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이는 불교에서, 소극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만 의미를 한정시켜, "내 것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하고 무리하게 전제한 다음, 만물을 내 마음대로 못하니 내 것이 아니다, 생로병사도 내 마음대로 못함이 입증되었으니 내 것이 아니다, 몸에 병이 생겨도 이를 내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몸이 죽어도 죽지 않게 못하니 내 것이 아니다, 그러면 내 육체도 마음대로 못하니 내 것이 아닌즉 내가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나가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성경에서의 하나님의 가르치심은 그와는 반대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임이다. 즉 만유(萬有)가 즉 무릇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내 것이라는 데에 있다[고전 3:22]. 왜냐면 하나님 지으신 하나님 안에 되어지는 모든 것 일체가 내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요 내 것은 아버지의 것"[요 17:10]이라는 말씀 그대로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는 것은 위의 설명대로 몸과 머리의 관계로 둘이 하나되어 있음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은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 관계 즉 만물의 아버지로서의 창조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데에서 옆 길로만 고집스럽게 뻗어나간 결과이니, 아무 것도 실체라고는 없는 허공을 향해서만 뻗어가는 것인즉 맞부딪칠 데가 전혀 없어 내처 무작정 나아가는 것이 그 정도로 빗나간 것이다. 하나님의 어버이 사랑만 단순하게 겸허한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인정하면 모든 것을 내 것으로 포용할 수 있는데도 이를 억지로 외면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내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으로써만 한정해서 스스로를 가두어 놓았으니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를 면하지 못함은 당연하다. 죽으라 하고 힘써 달려보아도 사시장(四時長)철 가야 돈 짝 만한 하늘만 올려다 보이는 것뿐이다. 왜 그렇게 땅만 내려다보는 것인가. 시야를 바꾸어 하늘을 쳐다보라는 것이다. 안목을 넓혀 주위 사방을 둘러보라는 것이다. 자유의 세계가 전개됨을 보지 않는가.

이와 같이 생명의 핵심은 사랑이고 사랑은 자유 의지에 있고 자유는 말 그대로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것이므로, 피조물 스스로가 택하여 사랑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는 데에서 하나님의 속수무책 곧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눈물의 의미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약하심이라 할까, 하나님의 미련하심이라 할까[고전 1:25]. 그러나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 우리의 판단 한계 밖이라고 결론 짓는 것이 무난하고 제일 안전하다.

여기서 지나치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보인 바와 같은 오만과 교만으로 빠지게 된다. 우리가 현재 자연계에 속한 육체에 속하여 사물에 대한 인지 능력도 한껏 제한되어 있는 마당에 섣불리 무엇이든 속단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정상적으로 우리의 신령한 몸을 회복한 다음 모든 것을 알아도 늦지 않다는 느긋함을 지금은 한껏 누려야 마땅한 때이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셨다는 사실 하나만 우리 마음에 깊이 각인(刻印)되게 하라. 그래서 내 스스로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는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두렵고 떨게"[빌 2:12] 된다.

내 스스로 그렇게 택하니까 하나님께서도 부득불 내가 택한 대로 영원히 조처하실 수밖에 없다는 그 뜻이니, 여기서 예수님은 우셨고 나는 두렵고 떨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성경의 이 "두렵고 떨라"는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매여 있다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교리를 믿고 있는 까닭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라는 것이니 누가 인간의 교리를 믿으면 구원된다고 했던가.

사람의 교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착각한 결과다, 이는 각자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아 하나님의 계시로 인한 가르치심을 너무나 경시하고 있은데 대한 당연한 응보다. 이다지도 성경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말인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홀려도 여간 단단히 홀린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죽 답답하셨으면, 어린 아이들의 노는 것을 비유하여,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때 동무를 불러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다" [마 11:16,17] 하신 그대로다.

성경에서 무슨 옳은 말씀을 하시든지 그것을 곧이곧대로 수용하지 않고 자기 입맛 따라 해석해 치우고 변명해 치우고 전혀 엉뚱한 것으로 둘러대고 하는 그런 식이다.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시니 그 하나님의 능력을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하는 대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힘으로 그런 능력을 행한다고 하고 죄인과 함께 잡수시니 죄인이기 때문에 저런다 하고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출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이와 같은 전세계적인 "배도"[살후 2:2] 현상을 보면서 이런 탄식이 절로 나오게 된다.

§  마지막 심판 역시 첫 사람 아담이 하게 되어 있는 역할이었다. 범죄하지만 않았다면 아담이 자기 허리에서 나온 인생들과 및 자기를 돕기 위해 창조되었던[창 2:18,19] 영물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그러나 범죄하여 그 자신이 도리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아래에 복속(服屬)됨을 인하여 이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자리에 앉으시는 것이다[요 5:27]. 그리하여 악령들과 악인들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불 못에 처분하는 일을 하실 것이다.

그리고 천년 통치 기간에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도 현재의 우리와는 여러 가지 면으로 다른 양상을 띠게 될 것은 물론이다. 우선 그 때는 시험하는 자가 없다. 물론 개중에는 악한 자가 없지 아니하여 이웃을 시험하는 경우야 있을 것이지만 오늘날 같은 환경은 아닌 것이다. 우선 보기에는 그 때는 참으로 태평성대인 것이다. 인류는 처음으로 사람[마지막 아담]의 지배 아래에서 사람의 세상[지금까지와 같은 악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기간이 종료되어 갈 즈음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 갇혀 있던 무저갱에서 풀려 나게 되는데 이전처럼 이 세상에서 활동하게 되어 많은 사람을 대대적으로 시험하여 자기 아래에 모여들게 만든다. 그 무리의 수가 "바다 모래 같아 지면에 널리 퍼져"[계 20:8,9] 있다 했으니 대단한 기세일 것이 분명하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렇게 "싸움을 붙이는" 이유는 딴에는 승산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만 하면 마지막 심판 때까지 무작정 시간을 끌 수도 있고 따라서 자기 계획도 실현시킬 수 있다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어서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우선 우리가 알기에는 당시에서도 구원 얻는 이들을 일정 수효 제한시킬 수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임은 분명하다. 말하자면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는 잘 믿어 왔으나 시험을 하는 등으로 해서 밀어붙이면 상당수가 그 믿음을 배반하고 버리는 경우 그렇게 된다고 그는 자신하는 것이다. 이 경우 "믿는" 것은 우리가 현재 믿는 것과는 양상이 약간 다른 것이다. 우리는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처럼 믿는 것까지 우리의 믿음에 포함되어 있으나, 그 때에는 마치 에덴낙원에서 아담이 모든 것을 보면서도 스스로의 판단과 선택에 의해 범죄하게 된 경우와 같은 상황이 재개(再開)된다.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으로 통해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것은 에덴낙원에서 아무 악도 해도 없는 태평세월에서의 인간의 반응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나타내는 적응 여부다, 첫 사람 아담은 그 스스로 그 부적격을 드러낸 것이다. 바로 그 때의 상황을 이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은 재연(再演)하는 것이다. 우리는 역경 중에 믿는 것이나, 그 때에는 실로 에덴낙원과 같은 환경과 분위기 속에서[단지 영계가 아니라 자연계라는 차이만이 있을 뿐] 믿는 것이므로 우리와는 전혀 상황이 다르다.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천년 왕국이므로 그리스도의 나라요 의인들의 나라다. 천국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 세워지는 그리스도의 나라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다"[사 11:9] 함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잠시 놓여 나와 미혹할 때에는 허다한 무리들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따를 것이라 예언하고 있으니 기가 찰 일이 아닌가.

하나님의 사랑을 몰라서 거역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 하나님을 몰라서 범죄하고 영원 멸망에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자로서 누가 과연 하나님을 배반하면 그리스도를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랴 하지만 현실이 그러한 것이니, 오직 "조심할"[고전 10:12/8:9] 것밖에 없으니 성경은 조심하라고 거듭 경고하고 있다. 항상 복종하기를 힘써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고 한 성경의 경고 앞에 겸손할 일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그 뜻을 순종하는지 여부를 다루어보는 것은 우리와 같은 경우의 자연계에서나 아담이 당시 처해 있던 영계에서나 하등 다름이 없고 차이가 없음을 그 때에 가서 입증되는 것이다. 아담이 갑자기 그와 같은 사태에 이르러 마음이 변했다고 보는 것보다, 평소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남달리 애착이 없었다가 불시에 그런 시험의 순간이 닥치자 평상시 조심 않고 지내며 준비하지 않고[하나님께서 경고하셨으니 당연히 항상 경계를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있었던 상태가 그대로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라 봄이 옳다.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도 그러하다. 악마가 붙잡혀 무저갱에 들어가[계 20:3] 있을 때는 첫 사람 아담으로 치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직 시험하기 전의 상태를 이룸이다. 그래서 무사하고 태평스럽고 다 선남선녀처럼 보이고 다 하나님 앞에 의인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다가 마귀가 무저갱에서 풀려 나와 인간들을 시험하게 될 때는 과연 어떻게 되는가. 이는 에덴낙원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여자를 꼬기 시작한 그것과 맞불린다. 즉 앞에서 설명한 대로 지금 그 때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의 일환인 것이다. 왜냐면 이 일이 있은 뒤로 이 세상은 완전히 접고 마지막 심판으로 돌입되는 까닭이다.

상황과 환경을 바꾸어 그 반응을 보는 것과 같다 하겠다. 아담은 영계에서, 우리는 이 자연계에서 그러나 이 자연계에서도 두 가지로 나누어 현재의 우리와 같은 처지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그리스도의 통치 기간]과의 구별이 있음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구원 얻는 '믿음'의 특질을 파악하게 된다. 즉 자진 자발적인 순종과 사랑을 말함이니, 환경과 여건에 구애되지 않는 주인 의식에 의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러한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을 통해서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즉 단지 영생만을 안겨 주시는 것이 우리의 구원의 의미가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경우 어떤 시험이 와도 한결같이 그 사랑이 변하지 않는 자세를 우리는 '구원 얻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특정 사실을 사실로서 수긍하고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참고 선을 행하는 자가 영생에 들어간다는 성경이 표현이 옳다[롬 2:7,10]. 그래서 그런 확고한 주인 의식이 없이 피동적으로 분위기에 휩쓸려 겉으로는 선을 행하던 많은 이들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직접 나서서 시험에 임하자 "바다의 모래 같이" 휩쓸려 넘어가게 된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여기서도 확인된다. 천국에서는 그런 시험하는 일이 없으므로 시험은 오직 이 세상에서만 한하는 일인데, 이렇게 한번 시험하게 되면 그래서 사정이 한번 여의치 않게 돌아가게 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언제 내가 하나님을 믿었던가 하는 것처럼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것을 우리는 구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동적으로 움직이고 적극적으로 주인 의식으로 나서지 않고 일에 임하지 않는 모든 이들이 이 세상에서 걸러내지는 것은 당연하다.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서는 즉 소극적이고 피동적으로 타율로 움직이는 이들을 걸러내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고난이라든가 그리고 위협과 회유는 필요악이 되어 있음이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자율형인 인간으로 만들되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기준이 명확히 서 있는 인간형을 스스로 만들어 개척하도록 함에 있음을 단정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고는 누구도 구원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거룩함이 없이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뵙지 못한다 한 그대로다[히 12:14]. 죄를 짓는 자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는 구원의 대상이 아니니 "육신대로 사는 자는 죽는"[롬 8:13] 것이다.

§  죄는 자기중심이니 곧 공동체[몸과 머리의 관계] 의식의 결여다. 고로 그리스도의 구원에 관한 일체의 것은 한 몸 의식에 의한 공동체 의식을 가르치는 것이기에 실생활에서의 사람 사는 원리요 법질서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르침이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원천적으로 악하다[자기중심이라는 뜻]는 것은, 공자나 이공 등이 모두 상식에 속하는 이 '사람 사는 이치'를 설파하고 실천한 것에 불과하건만, 세상이 이를 용납하지 않고 귀 담아 듣지 않았다는 것으로써도 훌륭히 그 증거가 되고 있음을 다시 강조한다.

고로 의롭게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사람들이 양심상으로는 예외없이 공감하고 찬동을 하면서도, 당장에 나타나는 세상에서의 불이익[다시 말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 말미암은]을 인하여 쉽게 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세상 신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책동에 놀아나 그런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행위 자체를 미워하며 이 의(義)의 도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은 당연하고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공(李公)은 전란 때에도 왕[그 왕이 잘 났든 못났든 간에 한 집단의 중심이라는 그 위치의 중요성을 알므로]에 대한 충성심을 변하지 않았다. 공동체 의식은 ①한 몸 의식이므로 공동체에는 반드시 머리가 있어 이를 중심으로 하여 구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공은 ②그 자주성(自主性)이 철저하여 바로 이것이 그러한 국난에서 나라와 민족을 구원해낸 원동력이 된 것이다. 자기 신념을 따라 일을 스스로 알아서 만들고 처리하여 만사에 대비한 것이다.

이는 공동체 의식에서의 핵심인 주인 의식이다. 따라서 세상의 그 어떤 불이익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초지 일관하는 강인함을 보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희소식]이 나타내는 내용은, 이상 사실과 같은 모든 것이 상징하는 바로 그 실체인 것이니, 만사만물이 하나님의 계시는 모습을 따라 '대칭성에 의한 인과율[삼위일체의 원리]'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듯이, 만유(萬有)의 최초 원인으로서의 창조신(創造神)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고 바로 이 하나님을 머리로 하는 한 몸 체제에서 모든 공동체 의식이 발현되는 것을 우리는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우리 각 개인과 하나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어 계시는 하나님 아들]를 알지 않고는 이 삶의 원리요 법질서인 한 몸 의식에 따른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한 것이고 따라서 영원성이 보장되는 삶도 행복도 없다. 다시 말해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하나님의 새 창조가 없이는 인류를 억압하는 이 세상 신(神) 곧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 악한 자와 같은 운명으로 떨어지는 비극에서 영원히 해방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공이나 공자처럼 우리 각 사람이 이 공동체 의식으로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의 영원하신 대칭(對稱) 곧 '짝'으로 계시니 대칭성에 의한 인과율이라는 불변의 철칙을 따라 그 바람직한 '결과'를 맺기 위해서는 그 '원인'을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므로, 바로 이 최초의 '원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인간 세상의 실질 지배자인 이 세상 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갖은 수단 즉 유혹과 회유, 핍박과 탄압의 죽음의 위협으로써 이를 방해하는 것은 당연하므로 이를 대비하고 각오해야 하지만, 이런 장애 요소가 우리의 이 신성한 사업을 무너뜨리지 못하는 것이다.

비로소 우리는 진정 사람 사는 '방법'과 그 '원리'를 온 세상에 널리 알려 퍼뜨리게 되는 것이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복음이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구원이요, 이 세상 신의 세력으로부터[행 26:18] 우리를 지으시고 어버이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감이다. 비극에서 탈피하여 영원한 행복에로 진입하는 구원이다. 짐승 같은 처량한 몰골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의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는 구원이다. 비천한 데에서부터 고귀하고 신성한 것에로의 회귀가 구원이다.

불행의 원인을 알면 행복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게 마련이다.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아름다운 미래를 건설하는 초석이 된다. 적을 바로 알아야 적에게 제대로 대응하여 승리를 기약할 수 있다. 우리는 현재의 이 인간 불행을 그 원인부터 살펴 바로 알고 현실에 제대로 접근하여 우리의 적이 과연 누구이며 어떤 술법을 쓰는지 그 비밀을 낱낱이 바로 알기에 이른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써 밝혀진 비밀이다.

우리는 이 복된 좋은 소식을 만천하에 알리는 선각자(先覺者), 선구자(先驅者), 전파자(傳播者)가 됨으로써 인생으로서의 가장 시급하고 절박한 매듭을 풀어주는 보람 있는 일에 몸 바쳐 우리의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어도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鄭夢周] 하는 "독야청청(獨也靑靑)"[成三問]의 일사각오(一死覺悟)로, 그리고 "상유십이 미신불사(尙有十二 微臣不死)"[李舜臣]의 기개로 임하는 것이다.

선견지명이 있어 선각(先覺)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남 앞서 믿음으로써의 선지(先知), 선견(先見)이니 자연 남 앞서 그 진리를 따라 행동하게 되고 앞서 달려 나가는 까닭에 선구자요 선각자다. 말씀을 믿음으로써 이 세상이 장차 사라져 없어질 것을 알고 그리고 멀지 않은 장래에 불 못이 전개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을 미리 알고, 그 아는 지식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므로 그리고 그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므로 선지자, 예언자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캄캄한 바다를 비추는 등대다.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하신 그대로다. 그래서 길을 밝혀 주는 것이요 위험을 알리는 것이다. 도저히 살 맛이 나지 않는 세상에서 확실히 소금의 맛을 주는 역할을 함이다. "이리로 오라, 여기가 길이다", 혹은 "저 쪽으로 가라, 여기는 위험하다" 등으로 명확하게 길과 방향을 제시해 주는 길잡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이시요 진리요 생명이심"[요 14:6]을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로 순탄한 길, 평안하고 수월한 것을 말하지 않고 약속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피와 땀을 무지하게 흘려야 할 것을 미리 경고하고 있는 것이니 정직하게 현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가시밭길이요 아무도 찾지 않는 데임을 숨김 없이 솔직하게 알리는 것이 성경이다. 세상에서 사형수가 자기가 사형 당할 형틀인 십자가를 지고 들어가는 것과 같음을 미리 알리는 것이 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모든 것을 버려야 함을 있는 그대로 알리는 것이다.

이런 데에서는 거짓은 없다. 일부러 속이는 것은 없다. 이렇게 미리 알리는 데에서야 속인다고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귀를 기울여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일수록 더욱더 진실되게 접근하지 않고서는 그래서 그 진실성 자체에 감동되지 않고는 절대로 사람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야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바로 그러한 태도를 취하셨으니 이는 당연하다.

즉 "자기 부인을 하지 않으면 절대로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어떤 공사(工事)든지 이를 시작하는 이가 먼저 그 예산을 세워보고 하고 그리고 전쟁에 임하기 전에 그 승패를 먼저 가늠해보지 않고는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는 예를 들어서 강조하신 것이니 이보다 더 진실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믿는 자 즉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자에게도 반드시 '득'과 '실'(得失)이 있을 것이니 미리 셈해보고 단단히 각오하여 다짐해두라는 경고를 꺼리지 않고 거리낌 없이 다 말씀하신 것이다. 또 우리고 그렇게 전달하고 가르치라고 본을 보이신 것이다.

'실'이라고 해보아야 단지 이 세상에서 당하는 것뿐이니 이 세상 삶이 무의미 그 자체인 줄 아는 다음에야 '실'이라 할 것도 실상 없다. 그러나 '실'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정녕 '득'은 아니다. 다시 말해 억지로 오라고 강제하지도 않고 감언이설로 유혹하지도 않고, 오직 본인 당자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라는 것이니, 여기에는 원천적으로 아무 거짓도 속임수도 있을 수가 없다는 증거다. 거짓말은 '억지로 믿도록 만드려는' 수단이다. 이것이 거짓의 속성이다.

이에 반해 성경은 그 정반대다. 절대로 억지로 믿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충분한 위험을 미리 알려 주어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거짓, 속임수 운운" 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반이성적인 상태에 있음을 스스로 노정시킴이다. 악령이 완전히 그 이성과 지성을 마비시켜 놓았다고 진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말하여 죄수가 그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처럼 이 세상을 보내라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면 절대로 그 누구도 발설할 수 없는 것임을 다시 강조한다.

이런 사전(事前) 경고를 충분히 말함이 없이 무조건 믿으면 복 받는다는 식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랍시고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쟁이요 속이는 자로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사주되고 있다는 증거다. 자기의 이득만 챙기는 위선자요 이기주의자다. 죄인이요 악인이다. 본의 아니게 이 세상 신의 주구 노릇을 하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일꾼은 아닌 것이다. 오늘날 소위 기복(祈福) 신앙을 말하는 이들이 그러하다.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고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도시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하라. 보라, 주 하나님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다. 보라, 상급(賞給, reward, 영생)이 그에게 있고 보응[멸망의 죽음]이 그 앞에 배설(排設)되어 있다. 그는 목자(牧者) 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실 것이다"(사 40:9-11).

"주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 하나님께서 내게 기름[oil, 성령의 능력]을 부으셔서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다. 나를 보내셔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주 하나님의 은혜의 해[sun]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vengeance]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a crown of beauty]을 주어, 그 재[ashes]를 대신하며 희락[gladness]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praise]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righteousness]의 나무[oaks] 곧 주 하나님께서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사 61:1-4).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도시들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重修, to rebuild)할 것이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들으라, [이는] 너의 파수꾼들의 소리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주 하나님께서 시온[Sion, Zion]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봄이다.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하라. 이는 주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다. 주 하나님께서 열방(列邦, 천하 만국)의 목전에서 그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모든 땅 끝까지도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너희는 떠나라, 떠나라, 거기서 나오고 부정(不淨)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 가운데서 나올 일이다. 주 하나님의 기구(器具)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하라. 주 하나님께서 너희 앞에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 호위하실 것이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여 행하지 아니할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이르신다. '보라, 내 종[그리스도-註]이 형통할 것이니 받들어 높이 들려 지극히 존귀하게 될 것이다.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列邦)을 놀랠 것이며 열왕(列王, 모든 지배자들)은 그를 인하여 입을 다물 것이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다"[사 52:7-15].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을 전후한 자리에 우리는 현재 위치해 있다.

이상 성경 인용(引用)에서 "주 여호와", 또는 "여호와"를 흠정영역[KJV]에서 대문자로 "the LORD"이라 번역 표기한 것처럼 "주 하나님"으로 고쳐 썼다. 흠정영역에서 이렇게 한 것은 유대인들이 성경[구약]을 필사(筆寫)할 때 이 이름을 접할 때면 여러 수십 차례라도 그 이름이 나올 적마다 번번이 경건하게 손을 씻은 다음 다시 필을 들은 사실에서 유래한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이같이 "주 하나님"으로 번역하는 것은 그런 의미보다도 신약성경에서 한번도 이 이름으로 하나님을 나타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가리킬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또는 "아버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므로 이에 따른 것이다.이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사람으로 나타나셔서 우리가 볼 수 있게 됨을 인하여[요 6:46/14:9] 상황이 구약시대와 아주 판이하게 달라진 때문이다. 주님께서도 하나님을 가리키실 때 "내 아버지"(마 7:20) 그리고 "너희 아버지"[마 10:20]로서 강조하여 나타내신 것과 일치하도록 하는 의미도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고만 하셨지 단 한번도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신 적이 없다. 구약 성경을 인용할 때에만 인용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여호와"로서의 명칭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역사적 의미가 있다. 단지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가 되신 친근한 이름으로 하나님을 인지하고 인식하고자 함이니, 구약에 명기되었다 하여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만 그것이 마치 무슨 옳은 도리인 양 착각하는 이가 많기에 하는 말이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아버지와 아들을 통틀어 구약 시대에 나타내셨던 것으로서 이제 아들께서는 영원히 사람이 되시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시니 사람으로서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그리스도"는 그 칭호)로 충분하다.

또한 보다 현실적이니 신약성경처럼 통일된 개념으로서의 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여호와"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칭호이므로 아들 역시 포함되는 까닭이니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심을 가리키셔서 그렇게 나타내신 이름이다. 이제 아들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영원히 사람으로 정착되어 계시니 그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고로 "여호와"의 이름이 하나님의 "올바른 이름"이라 해서 즐겨 부르는 것은 타당서이 없다. 신약성경에서 사도들이 목회 서신을 쓸 때처럼 하면 되는 일이다. 지금 우리는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있음이다. 아버지를 당연히 "아버지"라 부르지 무슨 딴 호칭이 필요하리요.

이왕 죽을 수밖에 없는 몸 값지게 죽으리. 나라 위해 또는 대의명분을 위해 순국하고 순절하는 이들도 역사에는 수두룩한데 우리는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분을 위하여 그리고 그 분과 더불어 함께 받는 고난으로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니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는 것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롬 9:1-3]를 원하는 대로 함이니 그 어떤 죽음보다 행복한 죽음이 아니며 행복한 고난 받음이 아닌가.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여 그들을 건지기 위해 노심초사하여 일신을 다 바쳐 수고함이니 얼마나 보람찬 일이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분을 위해 우리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이 세상 아니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왜냐면 그 증명은 순탄할 때가 아니라 역경일 때 이뤄지는 성격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과 더불어 주님과 함께 고난 받는다는 것은 결코 빈[헛된] 말이 아니니,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 몸을 그 성전(聖殿)으로 삼고 계시는 까닭이다.

내 육체가 그 계시는 '집'이니 집 두고 어디에 계시겠는가. 그러나 사람이 손으로 지은 집에는 계시지 아니하신다[행 7:48-50]. 반면, 하나님 친히 지으신 사람의 육체와 그 마음에는 말씀으로 정결하게 되어 있는[엡 5:26/요 15:3] 조건에서는 얼마든지 계시는 것이니 이에 아무 하자가 없다. 내가 몸으로 느끼는 고통은 곧장 주님께서 당하시는 것으로 변환, 전환, 전이(轉移)되는 것이니, 이는 아들께서 고난 받으실 때 그 몸을 성전으로 삼고 함께 계시던 아버지께서 아들이 당하시던 그 모든 고난에 동참하신 사실과 같은 이치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핍박으로 일관해야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으로 굳혀져 가인이 의인 아벨을 타살함으로써 확정된 것이니, 인류 역사 벽두에 일어난 현상으로서 그 상징하는 바는 향후 전개될 인간 역사의 성격과 특징을 한마디로 일괄 요약해 줌이었다. 아담 부부가 처음 인간이란 존재를 생산하면서부터 인류 역사는 이렇게 피 비린내로 시작된 것이다. 한마디로 이 세상은 동물적 생명의 동물적 습성에 젖은 인간의 약육강식의 살벌한 세계인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주님은 비둘기 같이 유순하고 뱀 같이 지혜로우라 하셨다. 그 충분한 힘의 배경을 주님 친히 우리 안에 이루어 주셨기에 이 분부를 하신 것이다. 교회사의 초창기가 피 흘리는 박해의 사건으로 얼룩지기 시작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아벨의 살인 사건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고난을 상징하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의 말씀에 "세상이 나를 핍박하였으니 너희도 핍박하리라" 하신 것과 같이, 원천적으로 의인은 이 세상 신(神-고후 4:4)의 장악 아래 있는 불의한 세상에서 고난을 받게 되어 있는 운명임을, 다시 말해 이것이 하나님 뜻임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 때이기에, 또 인생들의 구원이 목적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달려 나가면 지칠 듯이 보이는가. 우리가 구원 받은 결실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내심 받은 대로 복종함이니, 엘리야가 하나님 능력으로 갈멜산까지 달린 것처럼[왕상 18:4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3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이 자연계는 짐승들의 서식처일 뿐]
인자(人子, 그리스도만 지칭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 또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곧 인생 모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7] 하신 대로 이 세상 자연계는 인간의 삶의 고장이 아니니 비정상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신 대로
그 비정상의 내용인즉 세상은 죽음이요 우리는 산 자이니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61] 하신 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청하라"[10:2] 하신 대로,
오직 이 세상은 일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고 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데에 있다. 쉬엄쉬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으니 전대[knapsack]나 주머니[money bag]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3,4] 하신 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다"[딤전 6:8].
홀가분한 복장으로 달음박질해야 우승한다. 구질구질한 세상 관심사를 털어 버리고 오직 일하는 자로서 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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