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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9) .집에 있는 교회 등록일 2016.02.25 21:57
글쓴이 김일동 조회 505

집 교회 운동-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CITHM'의 핵심은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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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HM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그 클라이맥스를 이룸과 동시에 세상 끝까지 지속되는 의인의 모든 환난을 대표하는 아벨의 죽음은 악령의 지배 아래 조종되는 이 세상사의 특성을 그대로 예고하여 전달함이다. 예언서 아니면 역사서 또는 전도서(傳道書)로서 그 특징을 이루는 성경에, 특이한 부분이 끼어 있음을 보는데 그것은 아가서요 또 하나는 욥기이다. 전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랑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후자는 이 세상에서 필수불가결인 의인의 고난 받음에 관한 의미이기에 그렇다.

의인의 환난에 관한 내용은 욥기 하나로 그칠 리는 없다. 성경에 요셉의 일대기가 있는데 그런 극적인 내용을 성경에 양념 삼아 넣기 위해 그렇게 상세하게 기록한 것은 아니니 역시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 고난과 의미를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요셉의 고난이 전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함이었음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고난도 구원 받을 모든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에 동참함인 것이다.

그리고 이같이 고난 받은 요셉이 이스라엘을 혹심한 기근에서 구원해냄과 아울러 그 자신 영화로운 자리로 나아가게 된 것과 같이, 우리가 받는 모든 고난은 장차 우리가 받을 영광의 밑바탕도 되는 것이다[고후 4:17]. 그리고 요셉 자신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뿐 아니라 그 자신으로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연단을 받는"[시 105:19] 개인적인 축복을 아울러 받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고난 받음은 주님께서 "그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신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런 은혜의 자리로 나아감이 된다.

성경에 말씀하심과 같이 "아들들처럼"[히 12:7] 우리를 정식으로 대우하심이다. 요셉만 아니라 다윗의 고난, 아브라함의 고난, 이삭의 고난 등이 다 그러하다. 아브라함은 당시 철옹성을 쌓고 국가를 건설하여 세력을 떨칠 수도 있었지만 평생토록 세상에서 나그네로 자처하며 자기 아내와 자신이 묻힐 땅 한 자락도 없어 돈 주고 매입하지 않으면 안되는 생활을 스스로 택했었다. 이들 믿음의 선조들만 아니라 구약시대 대부분의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였으니, 능력을 나타내어 왕권으로도 손대지 못했던 엘리야 같은 이들은 극소수고 태반은 이런 고난 가운데서 세월을 보낸 것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역대 악한 왕들 아래에서 모진 핍박을 받은 사실을 성경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히 11:36-38]. 예레미야도 그 중의 하나다. 오히려 그런 고난없이 평생을 보낸 이는 처음에 아무리 믿음 좋아 큰 은총을 입었어도 그 믿음이 고난을 통해 연단 받지 못함으로써 세상의 유혹 앞에 놀랄 정도로 무기력해지는 사례를 솔로몬 왕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의인의 고난과 이 악하고 음란한 (성경에서 음란하다고 말하는 것은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조물주이신 하나님을 떠나 다른 데-종국적으로는 그 뿌리가 자기 자신이지만-에 마음을 두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서 교회가 받는 핍박은, 이 세상이 존속하는 동안은 다시 말해 구원 얻을 사람 다 구원 얻음으로써 이 세상이 그 마지막 무대의 막을 내릴 때까지는 불가피한 필요악임을 성경은 일관하여 밝히고 있다.

이왕 죽을 수밖에 없는 몸 값지게 죽으리. 나라 위해 또는 대의명분을 위해 순국하고 순절하는 이들도 역사에는 수두룩한데 우리는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분을 위하여 그리고 그 분과 더불어 함께 받는 고난으로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니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는 것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롬 9:1-3]를 원하는 대로 함이니 그 어떤 죽음보다 행복한 죽음이 아니며 행복한 고난 받음이 아닌가.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여 그들을 건지기 위해 노심초사하여 일신을 다 바쳐 수고함이니 얼마나 보람찬 일이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분을 위해 우리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이 세상 아니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왜냐면 그 증명은 순탄할 때가 아니라 역경일 때 이뤄지는 성격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과 더불어 주님과 함께 고난 받는다는 것은 결코 빈[헛된] 말이 아니니,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 몸을 그 성전(聖殿)으로 삼고 계시는 까닭이다.

내 육체가 그 계시는 '집'이니 집 두고 어디에 계시겠는가. 그러나 사람이 손으로 지은 집에는 계시지 아니하신다[행 7:48-50]. 반면, 하나님 친히 지으신 사람의 육체와 그 마음에는 말씀으로 정결하게 되어 있는[엡 5:26/요 15:3] 조건에서는 얼마든지 계시는 것이니 이에 아무 하자가 없다. 내가 몸으로 느끼는 고통은 곧장 주님께서 당하시는 것으로 변환, 전환, 전이(轉移)되는 것이니, 이는 아들께서 고난 받으실 때 그 몸을 성전으로 삼고 함께 계시던 아버지께서 아들이 당하시던 그 모든 고난에 동참하신 사실과 같은 이치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핍박으로 일관해야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으로 굳혀져 가인이 의인 아벨을 타살함으로써 확정된 것이니, 인류 역사 벽두에 일어난 현상으로서 그 상징하는 바는 향후 전개될 인간 역사의 성격과 특징을 한마디로 일괄 요약해 줌이었다. 아담 부부가 처음 인간이란 존재를 생산하면서부터 인류 역사는 이렇게 피 비린내로 시작된 것이다. 한마디로 이 세상은 동물적 생명의 동물적 습성에 젖은 인간의 약육강식의 살벌한 세계인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주님은 비둘기 같이 유순하고 뱀 같이 지혜로우라 하셨다. 그 충분한 힘의 배경을 주님 친히 우리 안에 이루어 주셨기에 이 분부를 하신 것이다. 교회사의 초창기가 피 흘리는 박해의 사건으로 얼룩지기 시작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아벨의 살인 사건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고난을 상징하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의 말씀에 "세상이 나를 핍박하였으니 너희도 핍박하리라" 하신 것과 같이, 원천적으로 의인은 이 세상 신(神-고후 4:4)의 장악 아래 있는 불의한 세상에서 고난을 받게 되어 있는 운명임을, 다시 말해 이것이 하나님 뜻임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그 클라이맥스를 이룸과 동시에 세상 끝까지 지속되는 의인의 모든 환난을 대표하는 아벨의 죽음은 악령의 지배 아래 조종되는 이 세상사의 특성을 그대로 예고하여 전달함이다. 예언서 아니면 역사서 또는 전도서(傳道書)로서 그 특징을 이루는 성경에, 특이한 부분이 끼어 있음을 보는데 그것은 아가서요 또 하나는 욥기이다. 전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랑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후자는 이 세상에서 필수불가결인 의인의 고난 받음에 관한 의미이기에 그렇다.

의인의 환난에 관한 내용은 욥기 하나로 그칠 리는 없다. 성경에 요셉의 일대기가 있는데 그런 극적인 내용을 성경에 양념 삼아 넣기 위해 그렇게 상세하게 기록한 것은 아니니 역시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 고난과 의미를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요셉의 고난이 전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함이었음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고난도 구원 받을 모든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에 동참함인 것이다.

그리고 이같이 고난 받은 요셉이 이스라엘을 혹심한 기근에서 구원해냄과 아울러 그 자신 영화로운 자리로 나아가게 된 것과 같이, 우리가 받는 모든 고난은 장차 우리가 받을 영광의 밑바탕도 되는 것이다[고후 4:17]. 그리고 요셉 자신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뿐 아니라 그 자신으로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연단을 받는"[시 105:19] 개인적인 축복을 아울러 받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고난 받음은 주님께서 "그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신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런 은혜의 자리로 나아감이 된다.

성경에 말씀하심과 같이 "아들들처럼"[히 12:7] 우리를 정식으로 대우하심이다. 요셉만 아니라 다윗의 고난, 아브라함의 고난, 이삭의 고난 등이 다 그러하다. 아브라함은 당시 철옹성을 쌓고 국가를 건설하여 세력을 떨칠 수도 있었지만 평생토록 세상에서 나그네로 자처하며 자기 아내와 자신이 묻힐 땅 한 자락도 없어 돈 주고 매입하지 않으면 안되는 생활을 스스로 택했었다. 이들 믿음의 선조들만 아니라 구약시대 대부분의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였으니, 능력을 나타내어 왕권으로도 손대지 못했던 엘리야 같은 이들은 극소수고 태반은 이런 고난 가운데서 세월을 보낸 것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역대 악한 왕들 아래에서 모진 핍박을 받은 사실을 성경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히 11:36-38]. 예레미야도 그 중의 하나다. 오히려 그런 고난없이 평생을 보낸 이는 처음에 아무리 믿음 좋아 큰 은총을 입었어도 그 믿음이 고난을 통해 연단 받지 못함으로써 세상의 유혹 앞에 놀랄 정도로 무기력해지는 사례를 솔로몬 왕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의인의 고난과 이 악하고 음란한 (성경에서 음란하다고 말하는 것은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조물주이신 하나님을 떠나 다른 데-종국적으로는 그 뿌리가 자기 자신이지만-에 마음을 두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서 교회가 받는 핍박은, 이 세상이 존속하는 동안은 다시 말해 구원 얻을 사람 다 구원 얻음으로써 이 세상이 그 마지막 무대의 막을 내릴 때까지는 불가피한 필요악임을 성경은 일관하여 밝히고 있다.

마지막 아담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육체를 물려받았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 "육[육체]으로 나는"[요 3:6] 결과다. 그러면 마지막 아담으로부터 영[성령]을 "물려받음"으로써 "영으로 나는"[:6] 것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의 영을 닮고 영을 닮으니 그 삶을 닮고 생활을 닮는 것이다. '구원 얻는 믿음'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와 같이 행하므로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핍박한 것과 같이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히 1:9] 우리도 당연히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을 최 우선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 죽음의 세상에서의 하나님 교회를 그리스어로 에클레시아(ekklesia)라 하는데 이 말은 '시민들의 집회', '의회'를 의미하였고 교회를 가리키는 여러 나라의 단어들은 그리스어 키리아케(Kyriake:'주님께 속한다'의 뜻)가 그 원뿌리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께 속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공동체로서의 회집"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그런 집회 자체를 교회라고도 할 수 있고 그 구성된 공동체를 교회라 할 수도 있으나, 엄격한 의식과 체제와 서열을 갖춘 종교적 집단으로 정의되어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공자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유한이 없다]"(朝聞道 夕死可)고 했듯이 아침에 구원을 받았으면 저녁에 박해를 받아 죽는다 해도 무슨 여한이 있으리요. 박해자가 고통을 더해 준다는 의미에서 가령 목숨이라도 더 붙여 주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도록 기도할 것이니 이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구약시대에도, "더 나은 부활을 위해 악형(惡刑)을 받아도 구차하게 면하려 하지 않았다"[히 11:35] 했으니 이왕이면 더 나은 부활을 사모해서가 아니랴.

더 나은 부활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는 것이기에 그러하며,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더 큰 은혜가 됨을 뜻한다. 머리와 몸은 하나로 통해 있는 까닭이다. 교회의 기본 자세는 사람들을 건져냄에 있고, 사람 살리는 데에는 제사장으로서의 기도와 말씀 전달과 그런 모든 봉사의 밑바탕이 되는 희생 제물로서의 고난 즉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에 대한 동참이 필요불가결이다. 때

문에 주님의 말씀에, "세상이 나를 미워하였으니 너희도 미워할 것이요" "나를 핍박하였으니 너희도 핍박할 것이다" 하셨다. 주님의 지상 생활이 그런 고난 일색이었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기까지 항상 그 생명의 위협이 떠나지 아니한 것이다. 언제나 죽이고자 애썼으나 단지 때가 되지 않아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게 벼르고 벼르다가 때가 닥치니 그들은 일사천리로 살인행위를 주저없이 실행했었다.

머리되신 주님께서 그런 처지였으니까 그 몸된 교회야 말할 것도 없다. 항상 위협을 받고 있으며, 때가 되지 않아 손을 못댄다는 것뿐이지 어느 때 어느 순간에든 교회의 모든 형적마저 말살하려는 기도(企圖)가 끊임없이 수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핍박의 때가 이르면 교회를 분쇄하려는 세상의 악랄한 수법이 여지없이 동원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지배하는 세상과 그에 맞서는 교회는 이렇게 발뒤꿈치를 무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창 3:1]과 그의 머리를 짓밟아 으깨는 "여자의 후손"과의 악연이다[:15].

이 세상에서는 "발 뒷꿈치를 물리는" 그 첫 단계로서의 순서를 따름이다. 그 다음 단계 즉 마지막 단계는 그 머리를 으깨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남자의 후손인데도 그리스도를 '여자의 후손'이시라 한 것은 인간으로서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시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계시는 독생자 하나님이시라 처녀의 태에 오셔서[安着] 그 태에서 나오시는 과정을 거치시는 터이므로, 남자의 후손 곧 인간의 씨라는 의미의 표현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 오시기까지는 따라서 세상에 군림할 수가 없다. 주님께서 세상 계실 때의 그런 "약한"[고후 13:4] 모습으로 항상 지속되는 것이다. 중세기 유럽에서 기독교란 이름으로 세상 군왕(君王)들 위에 군림한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세상 종교라는 것을 증명함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교리가 그 증거다. 마리아를 그들은 "Mother of God"이라 한다. 얼마나 불경스러운 표현인가.

신성모독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복음의 기초부터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이신 사실을 그들은 그들의 고백과는 달리 실질적으로 부정하고 있음이다. 사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모친"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인자(人子ㅡ사람의 아들 곧 사람)"라 하신 사실과 어울리게, 사람되신 측면에서의 그 생모(生母)라는 의미일 뿐이다.

요한은 이를 분명히 가려, 주님께서 마리아를 "어머니"라 부르시지 않고 "여자"라고 부르신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인간이시지만 "남자의 씨"라 하지 않고 "여자의 씨"라고 한 창세기의 기록과 같이 세상에 오직 한 분밖에 없는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특수성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불경을 극한 신성모독을 끝까지 합리화하는 속임수를 위해서 성경의 사실까지 왜곡하여 "동정녀[virgin] 마리아"라고 하니 이것이 복음일 수가 없다.

성경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명백히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아우들, 누이동생들을 정면 부인하고 있는 것이니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의 권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마리아라는 한 여인의 태에서 나왔으니까 "아우들, 누이동생들"이라 부르는 것이지 어떻게 부른다는 말인가. 이렇게 성경 기록 자체를 믿지 않는 터에 무슨 성경적 구원관이 세워질 수 있는가. 이미 답은 분명하지 않은가. 성경을 어떤 것은 믿을 수 없고(예컨대 예수님께 그런 남녀 형제들이 있었다는 대목) 어떤 것은 믿을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자의적 해석에서 모든 이단 사설들이 태동하는 법이다. 그들이 처음부터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금하다가 지금은 자유로 성경을 읽게 한다 하나 그런 편파적 시각으로 성경을 백독, 천독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요한 계시록에 "성령과 교회는 오라 하신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불가분성을 말한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낳으셨다"[약 1:18] 한 대로 교회는 말씀으로써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구원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그 성경이 진실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구원도 불가능하고 교회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럴진대 성경 기록대로 믿지 않는 그 종교 집단은 이름은 기독교라 표방하지만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함이다.

모조품이 진짜보다 세상에서 더 인정을 받고 더군다나 거대한 규모로 집단화되어 있다는 것은, 성경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의 신(神))이요 주관자[우리말 번역, "임금(prince)"]라는 의미다. 그런 존재가 실존한다는 성경의 증언을 그대로 입증하는 것이다. 왜냐면 이런 거짓과 속임수가 거대한 규모로 세상 세력화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때문이다. 인간을 초월한 마력(魔力)임을 증명함이다.

세상 모든 종교의 마력이 또한 그러하다. 종교적 독재 아래 무조건 그 종교를 맹신하는 노예로 자처하고 있는 것이 일반 대중이다. 천주교가 그런 세상 종교집단으로서, 이슬람교 이상으로 국가들 위에 올라 앉아 세상에 군림하였기 때문에, 그런 이단을 믿지 않는 이들도 그런 비성경적 관념에 사로잡혀 교회를 국가 권력과 결부시키고 세상 나라 위에 능히 군림할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었으니 칼벵이 스위스에서 나타낸 행적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이 자리에서 그런 특정 종교단체를 지목하여 지적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지금까지 많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그 손으로 처형해 왔고 탄압해 왔으면서도 '그리스도의 교회'로 세상에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교회가 아니고 교회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하는 까닭이다. 교회는 절대로 세상에 군림할 수 없다는 성경적 사실을 선포하려니 부득불 나올 수밖에 없는 언급이다.

현재 북한 지하교회 및 중국의 지하교회, 그리고 과거 로마시대 카타콤 지하교회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환란과 핍박 속의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유형과 본을 따라, 또 장차 세상에 나타날 "짐승"[beast, 계 11:7]이 "자칭 하나님이라 하며"[살후 2:3-12] 세계를 지배할 환난에 대비하여 성경적인 교회관을 바로 확립하기 위해 이런 지적은 불가피한 것이다. 성경을 읽지 않고 믿지 않는 점에서는 개신교도 마찬가지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데"[롬 10:17] 오늘 우리가 읽는 성경이 그 말씀이다. 이 성경을 잘 읽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도 구태 의연한 고어(古語)투의 문장과 잘 쓰지 않는 단어들로 성경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현실이 그 증거다.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선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은 차세대 주역인 젊은 이들이 많이 읽어야 하는데 젊은 학생들이 읽도록 하려는 열의가 조금이나마 있어도 성경을 이 지경으로까지 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잖아도 성경커녕 독서도 잘 하지 않는 세대인데 하물며 어린 학생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거늘, 시어[詩語]도 아님에도 "하나니라", "하옵소서", "할지어다" 등등이 성경 전체를 뒤덮고 있다. 요즘 들어 현대어 판이 나왔기는 하지만 그 번역의 정확성, 실용성 여부는 차치하고도 그조차 대부분의 교회에서 외면당하고 있다. 성경을 직접 읽을 것 없이 그 성경을 '대신' 읽고 성경을 풀이해 주는 교역자들의 말만 들으라는 태도다, 이는 앞서 지적한 그리스도 복음의 '종교화'에 박차를 가하는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심지어는, 교인이 성경에 능통하게 되면 설교 무용론까지 대두될 판이라 그들의 '직업'이 위협 받는다는 해괴한 생각까지 하는 직업 교역자들도 있는 판에 현재의 교권화한 체제 속에서 어찌 믿음의 발전을 바라겠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같이 교인들로부터 차단시켜 놓고 어찌 성령의 역사하심을 기대할 수 있으랴.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돌아감이니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성령의 역사 없이 무슨 구원이 있으리요.

구원의 역사 없는 교회는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등과 같은 세상 종교의 하나로 그칠 따름이다. 한 가지 예를 더 든다면 복음 전도 못지 않게 전통적으로 그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할 <가난한 자 구제> 활동이 오늘날 교회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잊혀지다시피 되어 있다. 이는 성경 표준에서 벗어난 기형적 교회 형태와 체제에서 비롯된 당연 귀결이다. 오늘 이 시간 여기가 초대교회 시대라 간주하고 교회도 세우고 운영도 해야 하는 것이니 이 세상 지배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극심하게 박해하던 로마 제국 시대에 지금 우리가 처해 있다 생각하고, 그 로마시대보다 더 심한 박해를 받았고 지금도 계속 받고 있는 북한 교회를 눈앞에 두고 있는 현실에서, 이 땅이 중국 또는 북한이라 간주하고 교회를 시작하자는 것이다. 이 주장에 무슨 하자가 있는가. 이 논리가 비정상인가. 소위 신교(信敎)의 자유가 보장된 세계라 해서 이 땅에서만은 이 세상 신(神-고후 4:4)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만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치외법권 지대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소위 자유세계에서만은 마귀가 휴가를 간 것도 아니고 잠을 자는 것도 아니니 오히려 박해 받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회유책에 휘말려 더 빈사지경에 빠져 있다는 현실을 직시할 일이다. 따라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건실한 교회로 남아 있는 핍박 받는 북한이나 중국교회의 모양을 본 따자는 것이다. 이 '중국교회'란 중국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거기서 "불법단체"로 규정되고 있는 지하교회를 말한다.

미국도 유럽대륙에서의 박해를 피해 온 청교도 후손이 창건한 후 수 백년간 신교의 자유를 누린다 하고 있으나, 이 세상 신의 회유책이 박해와 핍박으로 급선회하여 그 전술이 바뀌는 것은 언제나 시간 문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비유에서 우리는 이 세상 신의 이상과 같은 양대 책략을 간파하고 있지 않는가. 즉 핍박 아니면 회유다. 성경이 예언한 그 "불법한 자", "멸망의 아들"의 출현 역시 지금은 오직 시간 문제다.

지금까지의 모든 질서가 송두리째 무너지려는 순간에 온 듯한, 하나의 큰 획을 긋는 시발점이 오늘이다. 이를 입증한 것이 불과 얼마 전에 일어난 미국 심장부에서의 9.11 테러사건이다. 국가[그것도 이 경우 최대 강국]가 '한 개인'을 통제할 수 없는 일종의 무법천지를 내다보고 있는 놀라움이다. 다니엘이 예언한 바, "사람의 지식이 더하며 빨리 왕래하게" 된 오늘날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전체 국가를 상대하고 전세계를 상대해서라도 무법 폭력을 자행하고 대량 인명 살상을 할 수 있는 이런 혼돈과 혼란은 이제까지 인류가 알아왔던 그 어떤 방법으로든 그 누구든 수습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초자연적 능력의 '절대자'의 군림이라고 소리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자존(自尊)하여 "하나님"이라 하며 하나님 "성전(聖殿)에 앉는" 자 곧 적 그리스도 출현의 필연적 예고다[살후 2:3-12]. "성전에 앉는다"는 것은 하나님이라 자처한다는 뜻이다. 당장은 핍박과 환란 아래 있지 않으나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치고 교회생활을 하자는 취지가 우리의 주장이다. 어차피 당할 핍박이라 예행연습이라도 해둘 판인데 하물며 교회 원형으로 돌아감에 있어서랴.

핍박의 때를 당해 허둥대지 말고 미리부터 대처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지혜로운 일이다. 교회 초창기나,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오늘 이 시기나 교회는 핍박 받는 모습으로 일관함을 다시 강조한다.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머리를 발로 짓밟기 전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발뒤꿈치를 물려야 하는 순서다. 영광 이전에 먼저 고난의 형태를 취함이 교회 본연의 모습인데 그 모습으로 다시 돌아감이 잘못인가. 그리고 이 초대교회 형태와 운영체제야말로 현재 핍박 받는 교회가 위치한 국가 국민에게 시급히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거기서 교회를 운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함을 재삼 강조하는 바이다.

예컨대 광활한 중국, 그리고 전세계 무슬림 국가들 및 북한, 베트남, 라오스 등이 그런 절박한 곳인데, 많은 인구를 수용하고 있는 그런 곳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 초대교회로의 환원에 의한 교회 운영법인 줄 확신하여 마지 않는 것이다. 가장 합리적인 대처 방안이 이 지하 교회 형태와 체제로의 신속한 전환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성전"으로서의 건물이 필수적이라면 초대교회 당시부터 그랬어야 한다.

그러나 당시 그런 건물이 필요 없었기 때문에 또한 그런 건물을 지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짓지 않았고 그 후 계속 그러했다. 오히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은 성령을 통해 그와 반대되는 내용으로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외쳤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處所)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었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니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하셨다' 함과 같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 조상이 그랬던 것과 같이 너희도 항상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행 7:46-51) 한 것이다.

스데반을 통한 성령의 이 말씀도 예배 장소 곧 유대인들이 신성시하던 예루살렘 성전과 거기 따르는 모세의 율법에 관한 것이 발단이었다(6:14). 때문에 스데반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는다"고 선포함으로써 그 결론을 맺은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이미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곳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진리와 성령으로 예배할 때가 왔으니 지금 이 때다" 하고 선포하심과 맥을 같이 한다. 같은 성령의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성직자라는 특정 직위가 필수적인 것도 아니다. 믿는 사람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들이요 왕들이다. 그리고 우리 중 누구든지 "형제"라는 사실 외에는 "선생"이라든가, "지도자"라든가, "아버지"(영적인)라든가 하는 특수 호칭을 사용하지 말라고 금하셨다(마 23:10). 왜 그런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사람 주님께서 성령으로 친히 우리 가운데 계시므로 그 모든 역할을 온전히 담당하시기 때문이다. 이중으로 둘 필요가 없어서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왕으로 하나님 친히 이스라엘을 훌륭히 다스리고 계셨는데도 "보이는" 왕을 요구했던 옛 이스라엘의 악함과 어리석음을 되풀이 말라는 경고이시다. 장로(감독)나 집사는 봉사를 위한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봉사하고 후자는 재정적 측면에서 일하는 것만 다를 뿐이다. 주장하는 자세는 무의미하다[벧전 5:3]. 마땅히 금한다. 교회 가운데 그 중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여" 본이 되어 있는 사람들을 그런 목적을 위해 세우면 되는 것이다.

자격 요건은 오직 그런 믿음과 성령 및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는 지혜 충만, 그리고 본이 되는 것, 그것뿐이다. 지식이나 사회적 지위나 경력이나 재산이나 그런 것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 이해는 계시로 말미암는다. 이 역시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는 것이지 세상 학문과는 전연 상관이 없는 일이다. 학교에서 가르침으로써 주어지는 자격이 아니다. 그리고 진리는 알고 보면 아주 단순하고 간단명료하다.

학문처럼 여겨 또는 무슨 심오한 뜻이 있어 보통 사람들은 알아듣기 힘든 것도 아니다. 워낙 성경이 체계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았고 또 "영적으로라야 알"[고전 2:14]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로서 "말씀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야 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측면은 있다. 그러나 영적으로라야 알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또는 거창하게 체계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 봉사는 하나님의 일로서 사람의 지식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닌 성령으로 말미암는 즉 "성령의 은사"로 이루어지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계시로만 말씀의 듯이 알아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는 인도와 지도를 따라 되는 것이지 인간으로 말미암는 것은 단 하나도 없고 하나님께서 이를 용납하시지도 않는다. 이 사실을 명심할 일이니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미워하심이다. 왜냐면 인간의 교만, 인간의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은 곧바로 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일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인간의 요소가 가미되는 것을 용납하시겠는가.

그렇다고 무조건 세상의 교육제도를 배척하고 사갈시(蛇蝎視)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을 하더라도 오로지 성령의 인도와 감화를 사모하는 가운데서 하라는 것이다. 그런 은혜를 첫째로 우선시해야 제 궤도를 따라 정상 운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인간적 제도 병행을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할 때 함정이 있다. 그렇잖아도 모든 일에 유혹이 많고 온전하지 못한 인간의 일인지라 결국은 인위적인 것에 치중하여 흐르고 성령의 일에서는 멀어지는 경향이 됨은 위의 옛 이스라엘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그리고 교회사를 살필 때 불을 보듯 뻔하다.

교회사적으로 보아도 하나님의 것에서는 점점 멀어지는 실례를 우리는 누차 보아오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요점은 그런 인간적 제도라고 무조건 물리치지는 않는 대신에 그런 인간적 요소를 전혀 배제한다고 해서 그것을 요사스럽게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원래는 그런 인위적인 것이 비정상이요 원형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다만 형편에 따라 주님의 일을 촉진하는 일시 수단으로써 그런 인간의 제도나 방법을 활용한다는 차원에서 오직 고려해보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다음에 하나님을 섬기는 또는 예배하는 일은 특정일을 정하여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니 곧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요 20:21]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각자가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데에 있다[4:34]. 매일의 삶에서 일상생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림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이상으로 더 큰 예배는 없다. 그래서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이 합리적 예배라" 했다[롬 12:1].

우리말 '영적 예배'는 오역[誤譯]이니, 흠정영역으로는 "reasonable, rational"이다. 우리 몸을 살아있는 제물로 삼고 매일을 살아가는 것이니 곧 희생제물로서의 죽음 즉 "자기 부인"의 삶 자체, 생활 자체를 말함이다. 이것이 이치에 맞는 예배다. 이래서 오로지 살든 죽든 주님을 위해 산다는 일념으로[롬 14:6-10/고후 5:15] 하나님의 사업에 헌신할 때 그것이 "예배"다. 필요할 때 언제든 어디서든 모이는 것이 교회 곧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회집(會集)이다.

"영적"이지 않은 게 대관절 어디 있다고 새삼스럽게 "영적"이란 말을 강조했겠는가. 그렇지 않고 특정일, 특정 장소에 국한하여 일정 의식에 맞추어 하는 것은 그런 행동을 하는 본인들이야 만족할지 모르나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 만족하실까 자문자답해 볼 일이다. 당신 스스로 하나님의 입장이라 여기고 생각해보면 당장 답이 나올 것이다. 위의 말씀에서 실제로 나타내는 의미는 자기 부인인 것이다.

다시 말해 특정일에만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날로서 그래서 자기 부인하고, 나머지 날은 내 날처럼 여겨 불가불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처럼 살아도 즉 자기 부인을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인정되어 그 특정일 예배 때에 "회개"만 하면 된다는 그런 종잡을 수 없는 종교행위로 자신을 속이지 말 것이다. 이런 것은 가장 눈에 뜨이는 종교 체제로서의 폐단 중 하나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종교 체제화하여 특정인으로 구성된 사제단(司祭團)에게 모든 것이 일임되면, 오늘날처럼 한 특정인만이 언제나 강단에 서서 지겹도록 그 소리 또 그 소리만 청중이 듣게 된다.

듣는 이나 말하는 이나 이는 다 같이 고역이니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설교자는 매일처럼 무슨 말할 재료를 찾아야 하고 재탕 3탕은 다반사가 될 수밖에 없다. 새롭게 내용을 바꾸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 각 사람의 사정이나 마음을 두루 살피시는 성령의 감동으로 된 말씀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할 수 있는 말씀이 없을 때는 그 때는 침묵이 최상이요, 다른 이에게 감동이 임할 때 그는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왕들이요 제사장들이라는 것은 형제 각 사람이 그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어 평등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지체로서 지체로서의 역할만이 있을 따름이다. 머리의 지시를 따르는 지체로서의 임무다. 초대 교회 때에는 말 그대로 처음 시작되는 교회로서 사도의 역할이 절대적이었고 전파되는 말씀의 확고한 윤곽이 명확히 정해져야 했던 때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개개인이 성경을 소지하고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지금은 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 친히 성령으로 계시를 통해서 각자에게 가르치시는 터이다. 또한 각자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시므로 각종 기능을 베풀어 한 몸의 지체로서 교회에 봉사하도록 하심이다. 이와 같이 지체는 많으나 오직 머리는 하나이시니 주님 홀로 머리시다. 머리 홀로 이 모든 지체를 조화시키고 통할하시는 것이다. 북한 교회에서 하는 대로 하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북한 교회에서 어떻게 하는가,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고 오직 모이는 것밖에 없다. 그러면 북한 교회를 감히 교회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인간이 정해놓은 신학교 졸업자, 그래서 인위적인 전형 과정을 거쳐 목사로 위임된 사람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셔서 그 사람에게만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를 주시리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대로 하시는 것이지 사람의 도움을 요청하시지도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적으로 누적되어 있는 자료를 통해 연구해서 깨닫는 학문이 아니라 성령으로 친히 가르치시는 계시에 의해서만 알도록 되어 있는 아주 특수한 분야인 것이다.

고로 그렇게 "교육 받은" 한 사람에게만 말씀 봉사의 은사를 인정해 주는 것은 사람의 일이지 하나님의 일은 아니며, 사람의 일이기 때문에 종교 형태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시한 바와 같이 그리고 실제 그렇게 했던 대로, 모든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받은 대로 교회로서 모일 때 서로 봉사하는 형태를 취함이 정상이다. 한 사람에게만 그런 특정 일을 위임할 수밖에 없는 세상 종교와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이런 기본적인 차이에서 세상 종교와 그리스도 교회의 형태가 달라지기도 한다. 육체라는 한 몸의 구조에서 각 지체가 역할을 분담하는 것처럼 성령의 각기 다른 은사로써 각자의 지체 역할로 운영되는 교제 위주의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교회다. 그리스도를 목자장(牧者長-벧전 5:4)이시라 한 것처럼 목자는 있다. 그러나 오직 본[모범]으로서의 의미만 있다[:3]. 세상 종교처럼 예배 위주가 아니니 삶 자체가 "예배"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림이 합리적[reasonable] 예배"라 한 것과 같다. 그리스도 당시나 오시기 전의 유대인 회당 운영도 그러했다. 누구나 모인 청중들 앞에서 말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 즉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는 자유롭게 앞으로 나아가 말할 수 있었으니 이는 유대인들이 성령의 감동을 믿은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일자 무식자로 여겼던 예수님도 앞에 나아가 말씀을 전하실 수 있었고 그 후 바울 사도가 각지 유대인 회당에서 전도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체제를 따른 까닭이다.

오늘날 소위 기독교계는 그런 아주 초보적 전통 하나도 제대로 모방하지 못하는 완전히 세상 종교화한 것이다. 이는 아주 바람직하지 못하니 시급히 개혁할 대상이다. 교회당을 신성시하고 강단을 신성시하고 교역자를 신성시하여 교역자가 아니면 강단을 점거해서 청중을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종교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은 개개인이 다 하나님 성전으로서 성별화되고(신성시되고) 있어 공통의 머리를 모심으로써 한 몸을 이룬 지체 역할을 강조함에 있다.

그래서 "성도"[성인(聖人)들, saints]라 불렀다. 말 그대로 하나님께 바쳐져 하나님을 위해서만 생활하는 성인들인 것이다. 종교화한 오늘날은 그냥 아무 직분 없는 초신자들을 오히려 이런 이름으로 부른다. '신성하다'는 것을 감히 범접 못하는 그런 것으로만 편견을 갖는 것은 여기서 금물이다. 자기중심으로 나가지 않고 오직 주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곧 거룩함이다. 주님은 거룩하신 이시다. 그러나 제자들은 언제든지 친근히 주님께 나아갔다. 오직 그 거룩하심에서 오는 감동을 받았고 그 지혜의 말씀에 대해 경외하며 심복(心服)하였다.

왜냐면 거룩함이란 것은 하나님 중심의 일상 삶이기 때문이다. 거룩하다고 해서 거북한 것으로[성경 표현대로의 "육신"의 관점에서 보면 이 이상 가는 거북함도 없을 것이지만] 착각해서는 안될 일이다. 육신과 거룩함은 항상 상극이다. 그래서 육신에게는 거룩함이 거북해질 수밖에 없다. 육신은 자기중심이요 거룩함은 자기 부인에서 오는 하나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화가 되지 않으므로 육신은 하나님께 원수가 된다[롬 8:6-13].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주님과의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사랑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이란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여기서 개인적이라 함은 삶 그 자체라는 말도 된다. 다시 말해 존재 그 자체임을 뜻한다. 나 한 개인으로서의 존재는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으니까 그렇다. 사랑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것이니 그러므로 믿음 또는 구원이라는 것을 생활의 한 선택적 사항으로서의 별도의 개념으로 종교로 인식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이와 같은 종교가 아니라 삶 그 자체를 의미함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바로 그와 같은 생명 자체 즉 삶의 법칙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전도요 사람 건져 올리는 어부의 일 곧 하나님의 사업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종교"와 차별화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희석화하려는 이 세상 신(神)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도가 세상 여러 종교의 특성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에, 이와 구분하고 구별을 두는 것은 시의적절하며 실상 둘은 본질적으로 '기름과 물'이기 때문이다. 진품은 진품[眞品]이지 그 이상 이하도 아니며 모조품과는 근원적으로 다르다. 

이미 우리는 세상 종교를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유사품 또는 사이비로 규정한 터이다. 그러나 세상 종교를 이 세상 신의 짓거리라 하여 단지 그 이유만으로 복음의 진실성을 밝히려 들 필요는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할 일이다. 바울의 전도 자세도 당시 횡행하던 이방 종교의 허구성을 밝혀 주는 데에 있지 않았다. 진리를 말하면 사이비는 자연 드러나는 것이며, 진실을 말하면 거짓은 걸러지게 되어 있다.


(김일동과 kwontayseek은 동일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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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with all perseverance"-英譯]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저 굴려 올라가던 '일[work]' 덩어리를 제 위치에 올려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핍박을 받아도 온갖 불이익을 당해도 목숨을 버려도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의 일은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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