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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0) 집에 있는 교회 등록일 2016.02.27 21:16
글쓴이 김일동 조회 458

집 교회 운동-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의 핵심은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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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

이미 설명한 바 있지만,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에 익숙해하지 못하는 이 많다. 어머니와 딸이라는 말과 자꾸 겹쳐져 연상되어 오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사람으로 오실 때 남자로 오셨다. 인간 세상이라 그렇다. 이 세상 끝나고 영원한 세계에 이르면 이런 혼돈은 아주 없어진다. 남자로 오신 것은 남성우월주의가 아니라 이것이 피조물 세계에서의 현재의 질서이기에 그렇다. 영원세계에서는 죽음만 아니라 노소(老小)도 없다. 늙고 젊음은 흙으로 돌아와 버린 인간의 죽음의 결과로 빚어진 부산물이다.

아담을 지으실 때 태 속의 애송이로 처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완전한 성인(成人)으로 지으신 사실과 같다. 그 첫 사람으로부터 또 하나의 사람을 만드시니 거기서 남녀 구분도 생겼다. 우리가 장차 들어갈 그 영원세계는 각자가 그런 아담의 위치로 회귀해 있는 상태다. 바로 이런 기준으로 하나님을 "아버지"["어머니"가 아닌]라 칭하신 것이고, 역시 같은 기준으로 "아들"이시라 하는데, 이상과 같은 남녀 생성의 원리로 따져 말하게 되니 자연히 그 첫 사람 아담을 기준해서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아담이, 여자가 생김으로 비로소 남자가 된 것뿐이다. 고로 "어머니" 하나님이란 말은 없다. 예수님께서 처녀 마리아의 태를 통해 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때는 영이시니 하나님은 영이시다) 곧 성령께서 사람(처녀)의 태에 오심으로써[영이시니까] 그 태로부터 나오시니 인간 육체를 입으심으로써 사람이 되셨다는 그 뜻이다. 무릇 사람의 태에서 나온 존재는 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소의 태에서 나오는 것은 소요 고래의 태에서 나오는 것은 고래인 것과 같은 이치다.

즉 사람의 태를 빌려 핏덩이 곧 영아로서 그리고 그 영아가 자라나 어른이 되고 하는 과정을 충실히 따르심으로써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런 다음에 그 모태의 주인공이었던 마리아는 남편과 동침하여 그 똑같은 모태로 사람[남편]의 종자(種子)를 받아 [마귀의 종자를 받으면 "네피림"이 된다-창 6:4] 아들들을 낳았는데 그것이 그리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가. 같은 태에서 나오니 형제간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것이 어째서 이상한 일인가[막 6:3]. 아들은 물론 딸은 왜 못낳겠는가. 남동생만 아니라 누이들도 있다고 성경은 알려 주고 있다.

그러나 단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요한은 빠뜨리지 않고 기록해두고 있다. 즉 그 모친을 결코 "어머니"라 부르시지 않고 당시 일반적으로 여자가 호칭되던 것처럼 "여자"로 부르셨음을 밝혀둔 것이다. 요한만이 그렇게 기록해두고 있다. [요한은 주님이 운명하시기 직전의 분부대로 줄곧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고 있었다. 때문에 마리아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고 각별한 것이었다]. "여자"라 부르실 수밖에 없는 것이, 마리아의 태를 잠시 빌려 세상에 나셨고 우리처럼 아버지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그런 관계가 아니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주님께 마리아는 "어머니"가 될 수가 없다. 어머니가 아닌데[존재하지를 않는데] 어찌 "어머니"라 부르시겠는가. 아버지도 육신의 아버지는 물론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하늘의 아버지뿐이시다. "아버지"도 존재 않는데 "어머니"는 존재하겠는가. 만일 주님께서 "어머니"라고 부르시면 그 상대적 개념으로서의 "아버지"도 있다는 의미가 되고 그것은 곧 사생아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사복음서 기록에서 그 "모친"이라고 마리아를 지칭하고 있는 것은 성경에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시리라 하면서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한 대로 여자가 낳은 유일한 "사람"이시므로 그렇게 낳음을 받으셨으니 성경에 마리아를 두고 "그 모친"이라 지칭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지칭하지 않고 그냥 마리아라 한다면 "마리아"는 너무 흔한 이름이라 혼동될 것이다.

"여자가 낳은 유일한 사람"이시라 했는데 모든 인간은 원천적인 남자의 자식[씨]이다. 이 또한 상당한 설명을 요하므로 다른 데에서 충분히 밝히고 있어 여기서는 생략한다. 단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의 계보를 밝히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다"고 한 점이다. 아브라함이 여자는 아닌 것이다. 예수님께서 물론 이 마리아의 슬하에서 그 젖을 먹고 자라나셨지만 모든 인간은 창조주의 슬하(膝下, 무릎의 아래라는 뜻으로 곧 부모 곁)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닌가.

영원부터 계시던 분이 만물을 지으셨고 이제 잠시 여자의 태를 빌려 나셨고 자라셨는데 그 태의 주인공이 어찌 그 어머니인가. 사실이 이럼에도 무리하게 "어머니"임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어머니"[Mother of God]라는 호칭을 써, 이런 불경스러운, 신성 모독을 극한 언어를 농하여 공공연히 교리로 삼아 가르치는 그 종교가 이 세상에서 많은 성도를 핍박하는 주역이 되어 있었음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마리아 역시 12살의 어리신 주님께서 성전에 남아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마땅하다" 하신 말씀을 마음에 두었다 했으니[또 탄생 전에 있었던 모든 사실들을 상기하면서], 그 이후에는 비록 어리신 주님이시지만 경외의 대상으로 자세를 고쳐 잡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어른이 되신 뒤로는 한번도 "내 자식"이라 생각하지 않고 오직 이스라엘의 구주시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을 것은 명백하다.

또 "어머니" 아닌 "여자"라는 호칭을 들었을 때도 충격커녕 자연스러운 현실로 이해했음이 분명하다. 성경은 마리아를 두고 '믿음이 있었다"고 했고 또 그 믿음 때문에 그런 육신의 영광을 입은 마리아다. 때문에 마리아 자신을 두고 "복이 있다"고 성경 그 어느 곳에도 말한 적이 없고 찬양한 데가 없다. 마리아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복이 있다"는 말을 했을 뿐이다[눅 1;48]. 그런 복이야 우리 믿는 사람 모두가 하나님의 망극하시고 막중하신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므로 스스로 "복이 있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기 외의 다른 이가 성령의 말씀의 권위로 성경에서 복이 있다 하는 것과 자기가 스스로를 복이 있다 하는 것과는 차이가 현격하다. 따라서 어떤 여인이 주님더러 "선생님을 밴 태와 선생님을 먹인 젖이 복이 있습니다"[눅 11:27] 했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28] 하신 것이다. 그 잘못된 인식을 정정해 주신 것이고 그런 복을 인정하지 않으신 것이다. 마리아 자신으로서는 주님께 전혀 특별한 의미가 없음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성경은 오직 "믿은 여자가 복이 있다"고 했으니[1:45] 무릇 "믿는 자는 복이 있다"는 일반적인 찬사였을 뿐이다. 오직 믿는 자가 복이 있다는 사실이 마리아를 통해서도 재확인되었다는 일반적인 사실 이외에, 성경이 특별히 우리에게 마리아에 관해 지적해 주는 바가 없음은 당연하다. 장차 다시 나타나실 주님은 불신자가 아닌 "믿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기이하게 여김(영어로는 찬탄-to admire)을 받으시리라 하셨으니 그 영광의 아름다움이야말로 필설로 형용 못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세상 그 어느 인간도 지닌 적이 없는 아름다움과 고운 자태와 늠름한 위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최고의 모습, 피조물로서의 최고 걸작, 그 최대의 영광의 극치로 나타나실 것이니 누구도 그 열린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도 그와 같이 그와 같은 모습으로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 바로 그 분이 지금은 보이시지 않으나 당신 곁에 당신과 함께 그리고 영원토록 당신과만 함께 계시고 함께 사시는 줄 안다는 것은 크나큰 복이요 은혜이다. 서로만을 사랑하는 영원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당신과 함께 사심, "깨든지 자든지 주님과 함께 사는 삶"[살전 5:10]이 당신이 성령을 선물로 받아 모신 의미이다.

현재처럼 흙으로 돌아가는 육체 가운데 우리가 살 때는 남자와 여자로서 한 몸되어 사는 인생 삶이다. 그러나 영원세계에서 당신과 하나되어 계신 분이 누구이신가. 그러기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기쁘게 해주고자 함이 당연한데도,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런 것을 세상에 속한 것이라 하고 "세상 일을 염려함"이라 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고전 7:33]. 그렇다고 주님의 일 한다는 핑계로 자기 가정을 팽개치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다.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것은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고 했다[딤전 5:8]. 그것은 믿음이 아니니, 왜냐면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아내에게 다하고 아내는 아내로서의 의무를 남편에게 다하라는[고전 7:3] 성경의 명령을 거역하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 일에 속박되지 않으려거든 처음부터 결혼을 하지 않았어야 하고 이왕 결혼했으면 그 아내나 남편에게서 놓이기를 바라서는 안된다고 못박은 것이다[고전 7:27].

또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말 가운데 남편 없는 사람을 위로한다면서, "주님을 남편으로 생각하고 살라"는 당치도 않은 표현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마치 세상에서 흔히 머리를 길게 기른 한 남자를 두고 예수님이라 하는 것과 같은데,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은 남자나 여자와 같은 성별(性別)을 지니신 흙의 육체로는 더 이상 계시지 않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가장 가까운 사이를 상징하는 말로서야 무슨 말을 하든 상관은 없다.

단지 주님이 남자만이시라는 선입관념은 불식할 일이다. 여자가 생기기 이전의 아담이 에덴 낙원에 있을 때의 그런 상태의 몸으로 계시는 것이다. 우리도 장차 그런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니 남녀 구별이 없는 천사들과 같은 그런 몸이다. 우리는 너무 남녀라는 선입 관념에 젖어 있기 때문에 이 점이 이해하기 힘들지 모르나 실상은 반드시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인식 전환에 달렸다.

그리고 혹 "남녀 관계가 없어지면 무슨 맛으로 사나" 할 사람이 있다면, 남녀 관계가 그런 낙이 되어 있는 것은 원래 하나였던 인간 육체[아담]가 둘[남자와 여자]로 나누어짐으로 해서 그 나누어진 두 개가 원래의 그 하나로 있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작용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임을 안다면 신비스럽게 여길 이유도 없다. 그렇게 하나가 되어야 자식들을 생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생리작용을 위한 것이니, 그러나 이제 인간이 인간을 낳는 일이 종료된 마당에서는 그렇게 쓸모 없는 것이 되어 버려 사라질 것 중의 하나가 이 남녀 형태다.

 남녀 결합의 낙[즐거움]이라는 것은 자녀 생산을 위한 것이므로 그런 생산 작용이 사라지는 마당에 그런 낙이 있을 리 없다. 그런 낙이 없어지면 새로운 낙을 하나님께서 만드시면 되는데 새 하늘 새 땅에서 사는 낙이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시기에 달렸다. 그리고 에덴낙원에서의 아담의 남녀 짝으로서의 낙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와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신령한 몸으로 있었으므로 신령한 몸으로서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범죄하여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면서 신령한 몸에 관한 부분은 완전 상실하게 된 것이다. 낙 자체로 말하면 앞에서 지적했듯이 영계에 속한 낙은 이 자연계에 속한 낙과 감히 견줄 수도 없다. 자연계와 대칭이 되는 영계는 이 자연계와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한 세계다. 따라서 그 삶의 쾌락도 이 자연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가령 대칭적인 비교에서 '영원함'과 '일시적인 것'을 감히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음과 같다.

더군다나 이렇게 '흙의 육체' 상태에서 자녀를 생산하는 것도 모세 율법에 보면 부정한 것으로 여겨(남아는 7일간, 여아는 14일간) 그런 생식을 위한 생리작용도 정결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있는 데에서야 더 말할 여지도 없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자녀 생산이 범죄의 결과에서 나온 것이요 또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던"[딤전 2:14] 사실을 인함이다.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 것을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함"(고전 7:34)이라 했으니, 그렇다면 결혼하면 상대적인 의미에서 "거룩하지 않은" 상태가 됨은 물론이다.

물론 이는 영적인 의미에서의 거룩함 즉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육체적 측면에서의 거룩함이라 할 것이니, 이는 다름아니라 우리의 이 자연계에 속한 모든 것이 범죄의 결과요 죽음의 영역에 속하는 것임을 대변한다 할 것이다. 육체 자체만을 두고 "거룩하다, 하지 않다" 하는 것은 죄와는 상관이 없고 구원과도 상관되지 않는다. 또한 여기서 "몸과 영이 다 거룩하다"는 것은 모두 주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의미다[고전 7:23].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사신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 함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니 하나님의 소유요 따라서 거룩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 아내 아닌 여자는 창녀와 관계하여도 한 몸이 되어 버리는 행위로서 죄로되[고전 6:16] 남녀가 결혼하는 것은 육체가 한 몸되는 것이므로 (창 2:24) 죄는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을 여자[혹은 남자]의 것으로 돌리니[고전 7:4], 나의 몸과 영이 주님의 것이라는 측면에서는 "거룩하지 못한" 것이라 할까. 그렇다면 결혼하는 것은 거룩하지 못하고 독신으로 지내어 동정(童貞)을 지키면 거룩하다 하니 차이가 있지 않은가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이 자연계에 속한 모든 것이 범죄의 결과로 인한 죽음의 영역이므로, 생리작용도 부정하다, 남녀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부정하다 하는 마당에 "부정한 것"이 "거룩한 것"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의미에서의 범죄와 결부시키는 거룩함과 거룩하지 않음과 차별을 두어야 한다. 즉 범죄의 결과로서의 현재의 자연계에 처한 실상을 지적할 뿐으로,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나 구원에 연관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해야 옳다.

그래서 흙의 육체로서의 이같은 남녀 결합이므로 혹 오해할까 싶어 바울은 "그러나 결혼하는 것이 <죄짓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이기를 잊지 않았다. 역시 이런 말의 이면에는 "죄짓는" 것은 아니지만 할 수 있다면 그런 일을 않는 것이 좋다는[고전 7:1] 행간(行間)의 의미를 담고 있음은 분명하다. 때문에 "천국을 위하여 고자된 자도 있으니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 하신 것이다. "천국을 위한다", 그리고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 등의 말씀은 이상 바울의 지적에서 재확인되는 것이며, 때문에 주님께서도 누구나 이 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 하셨을 뿐이다.

이런 순리적인 남녀 관계도 그러한데, 소돔 고모라의 멸망으로 후세에 엄중한 경고를 하시고 있는 소돔[고모라]의 죄('동성 성행위')는 인간이 아닌 악마의 추악한 탐욕에 충동되어 일어나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소돔의 죄"가 성경을 안다는 이른바 '기독교 국가'들로 분류되는 구미 제국에서부터 성행한다는 것은 "멸망의 자식"의 날이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박두해옴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뜻

나는 왜 이런 질병에 걸려 고생합니까?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하여 고통스럽게 삽니까? 등등의 질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나는 왜 갓나서 죽고 10, 20, 30대에 죽어 다른 이들처럼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합니까?" 하는 것이어야 하리라. 왜냐면 앞서의 그런 질문은 그렇게 일찌감치 세상을 하직한 사람보다 비교적 좀 더 오래 세상에서 살았기에 그 결과로 나오는 불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인생들에 비할 때 형평성을 잃은 것이므로 덜 근원적이라 할 수 있음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에 반드시 뒤따르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많습니까? 다른 이들보다 더 저주를 받고 태어난 것입니까?" 하는 것이리라. 이에 대해 하나님 주시는 대답은 무엇인가. "회개하라, 회개하고 복음[희소식,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하여 죽으셨다는]을 믿어 먼저 산 자부터 되라. 그래서 죽은 자의 위치에서 한시 바삐 벗어나라"는 것이 된다. 다른 말씀을 주실 것도 없고 주실 이유도 없다.

곧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를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아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말하지만, 아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할 것이다"[눅 13:2-5] 하신 말씀의 뜻이다.

그러면 산 자가 되면 어찌 되느냐. 산 자가 되었다고 즉 살았다고 이 세상에서 삶의 낙을 즐기면 되는가? 상식으로 판단할 일이다. 내가 그렇게 회개하여 구원되는 것이 시급한 급선무였다면 다른 사람 역시 시급한 것이 그 자신의 구원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회개하라"[행 17:30]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뜻 곧 그 명령을 전달하는 것이 최우선으로 할 일이다. 왜냐면 이것이 이 세상 존속의 전체 의미이기 때문이다.

내 고장에서 그 임무를 다 마쳤으면 땅 끝까지 이르러서라도 끝까지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행 1:8]. 왜냐면 이것이 구원 받은 사람의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면 당연히 신령한 몸을 입어 우주 유일의 천하무적의 막강한 위력을 나타냄이 옳다. 그러나 현실은 이 나약한 자연계에 속한 육체 그대로다. 이것이 그 증거다. 다시 말해 일하기 위해 즉 고난 받기 위해 이 세상에 머물러 있다는 확고한 사실의 증명이다.

이런 몸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살고자 하는 것은 미쳤다기보다 전연 믿음이 없다는 자체 증명이다. "오직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즉 우리가 구원 받으면 우리가 권능을 받고 즉 산 자가 됨으로써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라도 이르러"[:8]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하시고 하늘로 오르셨다. 따라서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는 그 남으신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우며 그 남은 사업을 승계하여 사람 살리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 이와 같이 회개하도록 하나님은 오래 기다리시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우리의 죽음이 "망하는 것"이 되지 않게 하려면 하루 빨리 산 자가 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산 자가 되면 죽는 것도 유익이 된다[빌 1:21]. 따라서 이제는 산 자로서,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죽은 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눅 13:6].

현재의 인생을 "죽은 자"라는 사실 이상으로 의미를 두지 말며 따라서 인생이 죽는 것을 "망하는 것" 이상으로 의미 부여를 하지 말라는 경고이시다. 망하지 않으려면 회개하여 믿고 이후부터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 살리는 일에 신명을 바치는 것 외에 의미가 없다.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더구나 소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잘 살 수 있다는 것은 세상 종교보다 더한 미신이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게 주신 선물이시므로 나의 것, 나의 소유이시다. 동시에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그 흘리신 피 값으로 나를 사셨으니 이제 나는 주님의 것이다. 때문에 "그가 모두를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고후 5:15], 바로 그 의미이다. 왜냐면 이것이 처음 창조 때부터의 무릇 모든 삶이 정상 궤도이기 때문이다.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위하며 주님은 몸을 위하신다"[고전 6:13]든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라"[살전 4:3]든가, "인간의 범죄마다 몸 밖에 있지만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한다"[고전 6:18] 등의 말씀은 특별히 이상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나의 육체이기 때문이다. 여러 번 강조했지만, 내가 만일 이 사실을 부담으로 여기고 구속(拘束)으로 느껴진다면 나는 믿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가 아는 대로의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적 욕구는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에덴낙원에서 남녀로 있었지만 아담 부부는 육체적 욕구를 느끼지 않았다고 할 것이니 영계에서의 신령한 몸으로서의 교감(交感)으로 인한 행복감이 너무 월등했기에 굳이 그런 욕구를 느낄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육체의 정욕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에 한정되는 것이라 하겠다.

영계에 속한 육체의 낙은 별개의 것으로서 완전한 것이니 생명에 들어가는 이들은 그 낙을 향유할 것이다. 영원한 불 못에서의 영원한 고난 역시 신령한 몸으로서의 고난으로서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거기서는 일체의 낙이 허용되지 않는다. 낙이란 것은 생명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고통이 죽음의 영역에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실상 우리가 영계나 영적 실상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으므로 갑론을박할 필요는 없다.

아담이 만약 범죄하지 않았다면 에덴낙원에서 자식들을 생산했을 것인데, 영계에서는 이 자연계와는 달라 남녀 두 육체가 상호간에 끄는 매력이 없이 자생적(自生的)인 즐거움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므로 우리가 아는 대로의 육체적 욕구는 별달리 필요치도 않았으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본연의 이 신령한 육체를 박탈 당한 다음의 자연계에 속한 육체라 부득불 자연계의 일반 동물들과 같은 이런 특별한 욕구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 덕에 자녀 생산이 가능해지게 된 것이다.

고로 몸의 구속을 받아 신령한 몸을 입게 되어 영계에서 지내게 되면 모든 것은 자연계에 있을 때와는 완연히 달라지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아담이 범죄하지 않아 에덴낙원에 살면서 자식을 낳았다고 가정한다면 남녀 교접이 아닌 다른 영적인 방법이 있었으리라 판단되는 것이다. 남자가 아닌 여자가 그런 생산에 직접 관여하는 것이야 이 자연계와 차이가 없다 하겠다. 여자가 받게 되는 저주로서 "잉태하는 수고를 더하게 된다"[창 3:16] 하셨기 때문이다. 그 영적인 방법이 어떤 것인지는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알 수도 없거니와 알 필요도 없다.

그리고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바 "시집 가지 않은" 또는 "처녀"라는 우리말 번역은 원래 여자들만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라 남녀를 통틀어 각자의 동정(童貞, 곧 결혼하지 않은 상태)을 가리킨 것이다. 그리스 원어로는 자기 딸을 그렇게 한다고도 읽을 수 있고 자기의 동정 상태를 말하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양면으로 해석될 수 있는 표현인데 우리말은 일방적인 것으로 못을 박고 있으므로 잘못 번역한 것이다.

영역(英譯)에서도 일정하게 정해진 공통된 것은 없고 번역자가 임의로 해석하고 있음을 본다. 바울이 남자를 위주로 말했기 때문에[남자를 말할 때는 항상 대표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영역도 이에서 별반 벗어남이 없다는 그 뜻이다. 그러나 전체 문맥상으로 볼 때도 맞지 않는 것은, 그렇게 번역해 버리면 아버지가 자기 딸의 인격 또는 그 인생의 장래를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 세상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딸자식의 결혼 자체를 부모 마음대로 금하는 것이 되므로]을 성경이 시키는 꼴이 된다.

성경이 무엇을 하라 또는 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릴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발적인 행동 곧 자율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모의 강제에 의해 자식들의 믿음이 좌우되거나 하는 일은 용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측면에서도 그 부모가 자기 믿는 자녀들의 장래[결혼에 관한]를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딸 자식의 장래 일을 부모가 강제하는 듯한 이런 번역이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 하면, 성경은 그렇게 케케묵은 전근대적 발상으로 쓰여진 것이니 오늘날에 와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하는 이 세상 신(神)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선전거리가 되어 버린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여지없이 훼손하려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계략에 이용당할 것이 자명하므로 이런 것은 분명히 밝혀둘 필요가 있다.

다시 그리스도 구원의 윤곽을 정리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간단명료하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과 인간을 만드셨다. 이 만드셨다는 것은 존재하게 했다는 의미만이 전부가 아니다. 마치 사람이 무엇을 제조했을 때 혹은 자식을 낳았을 때 그 만든 것 또는 낳은 자식에게 자기의 전체 관심이 개별적으로 가 있듯이, 그런 '사랑'과 '절대적인 관심'이 그 만드신 피조물에게 함께 쏠려 있으시다는 이 사실이 중요하다. 이를 가리켜 주님은 "아버지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셨다.

그런데 왜 이러한 어버이 같으신 하나님을 몰라 보느냐. 이 세상에 신(神)으로 군림하여 인간을 노예화하고 있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때문에 그리고 동시에 우리 인간의 미련함과 악함 때문이다. 이 세상 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보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인간 스스로 보려고 애쓰지도 않는 무관심 때문이다. 또는 조물주를 자기중심의 인간처럼 착각하여 이기적인 신(神)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자연 만물을 위시해서 무릇 인간이 접하고 있는 모든 것 곧 그 지으신 만유(萬有)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인데도 단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비이성적일 수밖에 없다. 그 지으신 이 우주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데 그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이야 더 크실 것이니 당연히 보지 못할 것인데도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고로 하나님의 실존을 부정하는 증거보다 오히려 존재하심에 대한 증거가 더 많고 확실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비롯한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리고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시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대관절 왜 이렇게 사람 삶이 고달프고 괴롭고 슬픈가. 인간은 원래 영원한 존재로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명의 법질서를 지키지 않음으로 현재의 이 비극을 자초한 것이 그 이유다. 이렇게 된 것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계략 때문이기는 하나 인간[아담] 스스로 범죄한 결과이니 "누구 때문"이라고 말할 것도 없다.

죽게 된다고 미리 경고를 하셨는데도 듣지 않아 마침내 죽게 된 결과이니 인간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다. 그러므로 살았던[영생하게 되어 있던 또는 영생의 삶을 살고 있던 또는 영생하는 자로 창조된] 자가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오늘의 현실에다가, 첫 사람 아담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추종하여 따름으로써 악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니, 이 세상에서는 아무 득(得)도 이(利)도 볼 것이 없고 오직 '원수 같은 것'일 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써 나는 나 자신[자기중심으로 살던 옛 사람]에게 죽었고[갈 5:24] 세상에 대해서도 죽은 몸이다. 세상은 내게 대해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 죽은 것이니[6:14] 그런 원수가 없다. 세상과 원수됨은, 나의 "옛 사람"[롬 6:6/골 3:9/엡 4:22]과도 내가 원수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내가 안죽으면 네가 죽어야 하는' 물과 기름 사이다. "옛 사람"이 살아나면 "새 사람"[골 3:10/엡 2:154:24]은 죽게 되어 있다.

"옛 사람"이 죽어 있어야 "새 사람"은 살아 있다. 그리고 절대로 화합할 수도 타협할 수도 없는 것 역시 이 세상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는 새 생명 가운데 있어 산 자인데 세상은 죽음의 세계이고 나는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하나님 아들인데, 이 세상은 악한 죄 덩어리로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관장하여 임금[절대 독재자] 노릇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 세상이 그의 나라로서 그 명령 일하에 움직이는 것이다.

바로 이런 코앞의 현실을 아는 것이 하나님에게서 "배우는" 것이요 배우려고 하는 이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를 "가르치시는" 것이다[요 6:45]. 이는 배우려는 마음이 없으면 즉 세상을 여전히 사랑하여 좋아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도 "가르치실"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한다. 그래서 이렇게 배우지 않고는 절대로 그리스도께 올 수 없다 하셨으니 "아무나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고 친히 못박으신 것이다[:65].

많은 사람이 "내가 여전히 죄를 짓고 육신에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를 책임 추궁하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뜻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생각하고 그래서 이를 가리켜 "한량 없으신 은혜요 사랑이라, 믿음으로 얻는 선물로서의 구원이라, 그래서 기쁘고 감사가 넘친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데, 착각이고 오해다. 번지 수를 잘못 찾아 든 집이다. 내 집이 아니고 남의 집이다. 나는 여기서 나가야 하고 다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지푸라기 하나라도 건질 것[이득을 볼 것]이 없고 따라서 마음 붙일 수 없고 상종할 수 없다고 마음을 아주 접는 것과, 그렇지 않고 호감을 느끼고 그래서 미련을 끊지 못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이런 차이에서 어찌 동일하게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날 수 있겠는가. 역시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것이 아닌가. 즉 하나는 구원을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이 없는 것이다.

은혜라 하고 거저 얻는 선물이라 하고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은, 내가 '죽은 자'인데 나를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 앞에서 어엿한 '산 자'가 되게 하셨다는 그 의미다. "나는 계속해서 죽은 자인데도 나를 산 자로 여기신다"는 그런 말은 세상에 통하지 않고 그런 법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거의 모두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곡해하는 것이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넣어 주는 생각 곧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바로 그런 속임수에 매여 있음이다.

세상과 결별하면 오로지 마음을 두고 애쓰고 힘쓰는 관심사는 하나님의 일밖에 없다. 보내심을 받은 자는 보내신 이의 일을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딴전을 피우면 보내심 받은[구원 받은] 의미를 박탈당한다. 특정 목적을 부과하여 파송[파견]했으면 그 임무만을 수행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소환당하여 처벌된다. 우리의 구원을 보내심 받는 것과 동일시하셨으니[요 20:21,22] 만일 보내신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수행하지 않을 때에는[4:34] 양식을 먹지 않음과 같아서[:34] 굶어 죽게 된다.

즉 결말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다. 우리 인간의 대표로서 그리고 본[본보기]으로서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명확히 명암(明暗)을 구분하고 구별할 일이다. 바로 이 사실을 그리스도 구원의 핵심이라 해도 좋다. 왜냐면 이런 사실을 하나님께로부터 배우게 되면 반드시 그리스도께 오게 되어 있으며 오는 자는 결코 내쫓지 않는다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내쫓으시게 되어 있다[마 22:13].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생명으로부터 추방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이다[마 7:21]. 예복 입지 않는 것은 영생 하나만을 욕심 내어 달려드는 것을 말한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인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고후 5:15]을 외면함이니, 이는 임금이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누구든지 몰아오게 된 사연 즉 그 목적인 "잔치 자리에 하객 채우는 일"을 외면함과 같다.

예복을 입지 않았는데 무슨 하객인가. 그래서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이지만 "아무나 누구든지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 하셨다. 예복도 각자가 스스로 마련해서 입는 것이 아니라[자기의 공로,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이 아니라] 왕궁에서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을 스스로 가져다 입으면[은혜로 선물로 주시는 구원] 되는 것이었다. 이 "구원"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 탈이다. '곧장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즉 '잔치 음식을 먹는 것 자체'를 말함이 아니라, '하객의 자리에 먼저 앉아 주는 데에 있는 것'으로 바로 알지 못함에서 오는 불찰이다.

제대로 예복을 갖추어 입고 앉아야 앉는 것이지 무턱대고 자기 욕심만 앞세워 앉았다고 해서 잔치 음식을 먹는 자리가 아닌 것이다. 그런 자리는 반드시 무자비하게 쫓겨나 비워 주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롬 14:7-9/고후 5:15]을 따라야지 그렇지 못하면 "예복 입지 않은" 이유로 쫓겨나게 된다. 그 쫓겨나는 곳이 멸망임을 가리켜 "바깥 어두움"[마 22:13]이라 하신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구원을 자기 멋대로 입맛대로 함부로 아무렇게나 생각하지 말 것이다.

오직 성경에 무엇이라고 우리 구원을 정의하셨고 설명하셨는지 세심히 스스로 부지런히 살펴볼 것을 강력히 권유하고 경고하는 바이다. 성경대로, 하나님(의 외아들)께서 친히 사람으로 오셔서 나의 죽음에 함께 하시어 나를 위해 죽어 주시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참새 한 마리에게도 관심을 두실 정도로 개별적인 사랑이므로 '나'를 사랑하신 때문이다[갈 2:20].

이 독자(獨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 대해서도 성경에 모두 다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어 있으면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도 다 소상하게 밝혀져 있는 성경이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을 일이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이치로써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기 때문에, 아들께서 아버지께 대하여 어떻게 하셨는지 요한이 쓴 복음서에 아주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니 그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로 둘이 하나되어 계시니 이것이 짝의 개념이 되어 모든 만물을 이 짝의 원리로 만드셨다. 바로 이 아들께서[또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만물을 만드셨고 그리고 아들께서 오늘날 사람이 되어 계신다. 나와 같은 사람이 되셨으니까 '나'를 위하심이요 영원부터 하나님이시니까 나와 똑같이 '모든 사람'을 위하심이다. 이는 하나님이시니까 가능하고 사람만이셨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나만 아니라 누구든지 그 분을 믿는 이는 사랑하신다. 그리고 구원하신다. 그리하여 이러한 '구원'의 화신(化身)으로 아들께서는 자기 자신을 나를 비롯한 각자에게 선물로 안겨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철저히 원리원칙주의로 일하시니 조물주이신 까닭이다. 고로 "내게 주신 선물"로서의 사람이시므로 영원한 나의 사람이시고, 그리고 사람으로서 당신의 전부를 다 내게 선물로 주셨으니 그 분의 모든 것이 모두 다 나의 것, 나의 소유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은 내가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셨기 때문이라는 오직 그 이유 때문이다[요이 1:9]. 그 분의 하나님도 나의 하나님, 그 분의 아버지도 나의 아버지, 그 분의 생명도 나의 생명, 그 분의 영광도 나의 영광이다. 이것이 당신 자신을 내게 선물로 주신 엄청난 의미이다. 내게 주신 영원한 선물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위하신다. 그러니까 내가 나를 사랑할 필요 없이 나는 그 분만 사랑하고, 내가 나를 위할 것 없이 나를 위하시는 그 분을 내가 위하고 섬김으로써 이렇게 나는 그 분을 위하고 그 분은 나를 위하시는 '둘이 하나됨'이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것을 소유하였으니 이것으로 끝인가 하면 아니다. 내 스스로 나의 것을 하나님의 것인 줄 알고 스스로 바치는 데에서 이 구원은 비로소 완결된다. 그래서 회개하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천하 모든 인생들에게 회개하라 명령하시는 것이다[행 17:30]. 회개는 다름아닌 나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겠다는 약속이다. 믿는 순간부터 이 약속은 시행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고 영생이다.

구원은 그러므로 유형 무형의 그 어떤 무엇이 아니다. 오직 '한 사람'이시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한 사람', 구원 받은 나와 함께 현재 사시는 '한 사람'이신 것이다. 이는 계속 강조하지만 내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결과요 대가(代價)다. 값없이 은혜로 선물로 얻은 구원이라 하여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것인 줄로 착각하는 이가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내 것도 내 것, 하나님의 것도 내 것이라는 욕심뿐이다.

그래서 세상에 지독한 욕심쟁이 또는 이기주의자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세상에서 지탄 받고 낙인 찍혀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다"[롬 2:24] 함이다. 내가 그리스도의 것을 내 것으로 소유함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게 하려 하심"[고후 5:15/롬 14:7-9]이라고 대낮 같이 밝혀 주고 있음에도 막무가내다.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은 내 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 있다는 뜻이다. 나를 그 죽으심의 피 값으로 사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어 있는데 왜 이전처럼 내 것인 양 내 마음대로 살고자 즉 나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가. 네 것 내 것도 구분 못하는가. 내 것은 주님의 것, 주님의 것은 내 것이라는 이것이 성경적 구원의 개념이다. 즉 갑은 을의 것, 을은 갑의 것, 그래서 갑은 을을 위해 살고 을은 갑을 위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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