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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1) 석자직 목사 - 2 등록일 2016.02.24 13:48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534

 

현재 보는 바와 같은 교회 체제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길 때에는 아래에 열거하게 될 몇 가지 사항에 유의해야 성경적 기준에서 벗어남을 면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화석화(化石化)된 상태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고로 다음 몇 가지는 현재의 체제와 형태를 선호할 경우다. 현재의 교회 체제-그것이 세상 종교의 모습을 취했거나 않았거나-를 선호하거든 교회당 건물을 크고 웅장하게 지으려 할 이유[필요라기보다]가 없다.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정 집에서 몇 가정이 옹기종기 모여 예배함으로써 시작한다. 바로 그런 형태를 시종일관 유지하면서, 단순히 그로부터 무작정 숫자를 불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숫자가 불어나면 애초의 그 형태를 계속 유지해 나가기 위해 그 불어난 숫자를 쪼개 나가는 방법을 취한다면 초대교회와 같은 형태로서 바람직한 것이다. 오늘날도 핍박 받는 나라에서는 자연적으로 취해지는 방법이다.

그렇게 분리시켜 나가다가 대거 한 자리에 전부가 함께 모일 때는 그 한 때만 사용될 장소일 것인즉 그 목적을 위한 적당한 장소[강당 등]를 빌려 쓰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건물을 스스로 마련해 있을 경우 24시간 개방을 기본으로 하고 기도 처소, 전도 목적 등 다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장로 교회를 예로 들면 "구역 예배"가 있는데 이런 것을 활성화하면 좋을 것이다.

항상 경계할 것은 형식화이다. 형식화는 자기 기만이 되어 자기 자신을 고사(枯死)시키는 원흉이다. 그러니 문제는 그 그룹의 인도자다. 그가 영적으로 완전 무장하지 않으면 앞에서 지적한 바 그런 형식화한 새벽기도회가 되는 것처럼 그 역시 다시 화석화(化石化)하는 것이다. 형식화로 흐를 바에야 그것은 백해무익이다. 왜냐면 철저한 종교인으로 만들어 정작 진리에는 쇠 귀[경 읽기]를 만들어 줄 가능성이 크거나, 아니면 양심의 가책만 부채질하여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에 회의를 느끼고 완전히 교회와 등지게 되는 요인을 만드는 까닭이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의 요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으로 자진해서 기쁨으로 주인 의식이 되어 적극 능동성을 띠는 데에 있고 억지가 개입하게 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종교화가 된다.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 예배당으로서 기존 건물이 있을 경우 1년 365일 개방하여 365일 전도소(所), 365일 기도장(場), 또는 무의탁 노숙자 등의 급식소 등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당치도 않게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여 신성시하지 말 것이니 그 순간 영락없이 종교가 되어 버린다.

1. 이 글을 통해 누차 강조하지만 항상 핍박 속에 있는 교회의 모습이라야 정상적인 형태다. 핍박이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지어 올리는 모든 화려 웅장한 건물의 규모 등은 그 자체만 해도 그 교회가 반(反)성경적임을 자체 증명한다. 비록 이상의 사실을 충분히 납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아래 사실만은 반드시 염두에 둘 일이다. 즉 핍박이 나서 뿔뿔이 흩어져 두어 사람 혹은 서너 사람씩 나누어 모이게 되더라도, 교회당 건물이 없어서, 제도적인 교육을 받은 교역자를 구하지 못해서 그래서 교회 같지 않고 예배 같지 않다고 느껴 세례식도, 성찬예식도 거행하지 않는 그런 상태로는 절대로 이르지 않도록 구성원들을 단단히 교육시킬 것, 이 점이다.

그런 건물, 교역자 등은 원래부터 불가결한 것은 아니니, 오늘날 북한과 같이 복음활동을 철저히 탄압하는 그런 환경 가운데 핍박을 받을 때나 아니 받을 때나, 한결같이 우리는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변함없이 받으신다는 사실을 믿는 가운데에서 그 믿음의 양심에 손상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2. 사도시대 교회의 기본 유형을 따르는 교회 형태로서 건물을 필수로 여기지 않고, 세상에서 인정하는 그런 교육기관으로서의 구비 요건을 갖춘 신학교를 통한 목회자 양성을 필요로 하지 않고, 목회자는 반드시 회중으로부터 생활 안정에 대한 보장을 약속 받아야 하는 것을 필수 사항으로 여기지 않는다 해도[국내 복음 전도자나 해외 선교사는 예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건물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규모로 짓거나 매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도 절대로 그런 건물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는 부르지 말 것을 거듭 강조한다.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되어 있을 때, 건물을 두고 “성전”이라 인식하게 되면 아주 바람직하지 못한 혼란과 혼동이 오게 됨은 필지이다. 이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못할 일이다. 예배 건물과 정규 신학생을 둔다고 해서 또는 안둔다고 해서 이단이다 아니다 하는 따위의 논쟁을 할 정도로 지금 우리 시대가 한가롭지 않다.

세상과 싸우는 교회로서의 전투 형태가 합당치 못할 때는 과감히 개선하는 것이요 효과적이면 끝까지 그 방식을 고수하면 될 일이다. 초점은 여기에 맞추어질 일이다. 그리고 개성이 있고 견해의 차이가 있을 것이므로 이를 획일화하려는 것처럼 미련한 것도 없다. 자기 소신을 따를 일이다. 비록 시행착오라도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사는”[고후 5:15] 일념이라면 주님 친히 인도하실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과 선례로 보아서는 건물을 가짐으로써 교회가 거의 질식사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 현실일진대 과감히 그 형태를 탈피해보려는 시도는 바람직한 것이다. “목자(牧者)”로서의 소임을 제도화시키는 데에서 오는 폐단이 그렇지 않은 경우의 폐해보다 더 심할 때는 전자를 과감히 버리고 후자를 취택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의 지혜다. 하나님의 양 떼들을 치는 일이 개인의 밥그릇으로 변질 타락했을 때는 그럴 위험이 보다 덜한 방법을 취택하는 것이 상식이다.

회중들의 숫자가 필요 없이 대형화함으로써 그 폐단이 클 때는 규모를 단출하게 함으로써 전투태세를 완비한 교회로서의 가동성과 침투력과 결속력을 꾀할 일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가장 신뢰할 만한 가치 척도의 기준인 <상식>, 이 상식 선에서 항상 타결할 일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고정 관념으로 교회 생활하던 이른바 기득권 세력은 반드시 반발할 것이다. 거의 대다수가 반발하여 이런 '개혁', '환원' 시도를 아예 싹부터 분질러 버릴 기세로 덤벼 들 수 있다.

언제나 반발하는 것은 이런 기득권 층이니 당장 생의 위협과 불편과 불안을 떨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위해 살고 있는 증거다. 이방인 가운데 세워진 당시 초대교회를 핍박하던 무리들이 일반 불신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이었고 그들이 핍박에 가장 앞섰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그런 핍박이 있다고 주춤해지거나 멈추지는 않는다.

그런 반발 세력이 만만치 않을 때는 그들과 세력 다툼을 하듯이 분쟁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물러나면 그뿐이다. 그 건물을 차지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지장을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 중에 기회를 보아가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해내면 나중에 가서라도 좋은 결과를 볼 수도 있을 것이 아닌가. "서로 싸운다"는 인상은 어떤 경우에도 세상 앞에 보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전도 기회를 가로막는 제1호 걸림 돌이다.

3. "일주일간 범죄한 것을 이 <성전>에 와서 자백함으로써 용서를 받는다"는 것은 종교의 전형(典型)이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을 직접 모시고 사는 삶인데 잘못을 깨달으면 즉시 그 현장에서 주님께 기도하고 회개할 일이지, 그 일을 어떻게 며칠씩 마음에 재어둘 수 있다는 말인가. 재어두었다가 정한 날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 와서 그제야 "통회 자복"할 수 있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런 것이 종교행위의 표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한 삶을 누리기에는 너무나 요원하다. 결코 “이기는 자”[계 2:7,11,17,26/3:5,12,21/21:7]가 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종교가 아니라 삶이요 그리고 악령들과의 전쟁이기 때문이다[창 3:15/계 12:17]. 특정 장소를 "성전"이라 믿기 때문에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성전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성전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에게 '영원한' 선물로 주셨다. 선물이시니 '영원히' 계시는 것인데 그렇게 계시는 곳이 성전이 아니라면 무엇이 성전인가.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 성령으로 계시는 것임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다[요이 1:9]. 주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는 것도 성령을 우리가 받아 모심으로 되어지는 일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께서 그 마음에 계시는지의 여부를 모르면 그는 "버림 받은 자"(고후 13:5)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리스도인 각자가 성전이 아니라 하는가. 물론 깨끗하지 못한 마음에 성령께서 계실 리 없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너희가 깨끗해졌다" 하셨다. 이 뜻은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만을 위해 살게 되는 것을 말씀하심이다[고후 5:15]. 왜냐면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고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 자기중심으로 살 리가 없다. 바로 그런 상태가 "깨끗함"이다. "과연 그럴 수가 있는가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은 성경을 다시 읽고 자기 믿음의 진실성 여부를 스스로 판단할 일이다. 고금을 통해 일관된 진실과 진리는,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하는 상대의 뜻을 자기 뜻으로 삼는 것이요 그 상대의 일을 자기 일로 삼음이다. 진정 사랑할 때 그렇게 된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님을 스스로 입증함이다. 무릇 사랑은 하나됨이기 때문이다. 육체의 사랑은 한 몸됨이다. 그래서 남자의 육체는 더 다시 남자의 것이 아니요 여자의 것이며 여자의 육체도 마찬가지다[고전 7:4]. 이런 것이 “자기 부인”이다. 삶 자체가 그렇게 될 때 이를 가리켜 한 영으로서의 하나 됨이라 한다[고전 6:17].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고 내 계명을 지킨다”[요 14:21,23] 하실 때 이런 평범한 사실을 가리키심이지 무슨 특별한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단지 자상하시고 섬세하신 사랑의 마음으로, 다 아는 사실이지만 한 번 더 말씀해 주신 것뿐이다. "나는 그렇게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만을 위해 산다고 내 양심상 그렇게 말할 수 없다"고 하는가? 항상 문제는 믿음이다. "나는 <믿지만> 그렇게 말은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하면 그것은 교만이다" 할 것인가?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믿는가, 믿지 않는가"의 여부에 달린 것임을 다시 강조한다. 단지 알 것은, 자로 재듯이 혹은 기계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자동적으로 그렇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즉 그 마음의 의지가 문제이다. "나는 여하한 일이 있어도 그렇게 살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을 삶의 유일한 법칙으로 수용하고 사랑하는 것을 말함이다. 사랑에는 만족과 희열이 따르고 그리고 상대의 뜻대로 하겠다는 의지가 따른다. 그 만족과 희열을 아는 터에 어찌 그것을 따를 의지가 없겠는가. 없다면 사랑하지도 않고 그런 만족도 희열도 아무 것도 없다는 증명만 될 뿐이다. "나도 그렇게 사랑하지마는 현실적으로 이야기해서 그렇게 안된다. 내게는 항상 로마서 7장의 체험만이 현실이다" 할 것인가?

인간의 말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2:17] 하는 일이 오늘날만 아니라 바울 생존시에도 많았다. 그렇게 억지로 말을 만드는 사람은 결국 그런 식으로 영원까지 갈 수밖에 없다. 믿든지 안믿든지 구원을 받든지 못받든지 각자에게 달린 일이요 책임질 일이니, 제삼자는 비록 이 세상 신(神)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 하더라도 책임 돌아갈 것은 없다. 세상 사람도 말하기를 "할 수 있다" 하면 실제로 할 수 있게 된다고 말들을 한다.

하물며 엄연한 사실에 기초하여 이를 믿는 믿음의 일에서랴. 더군다나 하나님의 능력이 친히 함께 하시는 일에서리요.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각종 기적을 베푸셔서 병을 낫게 하셨어도 항상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셨다. 양면성이다. 두 손바닥을 마주 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무리 넘쳐 나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오직 그림의 떡일 뿐이기에, 믿지 않음을 보시고 이상히 여기시고 거기서는 아무 능력도 행하실 수 없었다고 성경은 분명히 못박고 있다[막 6:5,6].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책임질 일은 그 스스로 책임 추궁을 당하지만(에덴낙원 당시처럼은 되지 않으니 이미 그는 저주를 받은 상태로서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런 짓을 하기 전에 아예 이제는 제거되어 버릴 것이므로 영리한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런 짓을 할 리도 없다) 적어도 나의 구원에 관해서만은 나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성경 중의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못믿는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이 한가지 사실만은 명심해둘 필요가 있다. 믿으면 다 믿는 것이어야 하고, 한 말씀이라도 안믿으면 모두를 안믿는다는 증명이 될 뿐이다. 믿어지는 것은 믿고 안믿어지는 것은 안믿어도 된다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중국의 석자직 목사

헛슨 테일러의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석자직(席子直, 1835-1896, 山西省 출생: 구미인들에게는 "Pastor Hsi[또는 Xi]"로 알려져 있다) 목사는 귀신을 잘 쫓아낸다는 명성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본명보다도 그가 명하면 귀신이 여지없이 쫓겨간다 하여 석승마[席勝魔, 중국 발음으로 "시셩모"] 목사라는 별명으로 중국 사람들 간에 알려져 있었다.

그의 삶의 특징은 매사 주님께 반드시 여쭙고(잠 3:6/수 9:14/시 73:24) 일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한번은 귀신 들린 청년이 교회 안에 들어와 난동을 피우니 급히 와 달라는 전갈이 왔다. 목사가 당도하니 청년은 이미 기가 꺾여 풀이 완전히 죽어 있었다. 그래서 안수 기도하니 금시 조용해지므로 문제는 해결된 줄로 알고 일단 그 자리를 떴다. 때마침 거기 와 있던 한 여선교사가 믿음으로 운영하는 석목사의 복음사업에 보태 쓰라면서 당시는 적지 않은 액수인 50 달러를 쥐어 주기에 상황이 다급한 때라 그랬는지 목사는 그 때는 주님께 여쭙는 것도 잊고 그 돈을 그대로 받아 넣었다.

그런데 그 때 청년이 다시 난폭해져 더 소란해졌다고 누가 급히 달려 와 알려 주는 것이었다. 청년이 다시 난동을 피우는 자리로 돌아와 보니, 청년은 길길이 날뛰며, "방금 전에는 네가 하늘처럼 높아 보이더니 이제는 발 밑의 먼지만도 못하는구나!" 소리치며 기고만장으로 고래 고함을 지르며 험악해져 있었다. 즉각 사태를 감지한 목사는 얼른 그 자리를 떠나 돈을 선교사에게 도로 돌려준 다음 조용한 곳에 가서 주님께 무릎 꿇고서 '주님께 먼저 아뢰지 않고 돈 받은 것'을 회개했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와 청년에게 붙은 귀신을 쫓아냈다는 좀처럼 듣기 힘든 진귀한 간증이 있다.

석목사가 "귀신 잡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듣게 된 것도 자기보다 늦게 복음에 접한 아내가 가정 예배를 볼 때마다 심한 욕설을 퍼붓는 등 귀신 들린 것이 분명해서 사흘을 금식 기도한 후 안수하면서 귀신에게 물러가라고 주님의 이름으로 조용히 명령한 결과 귀신이 복종하는 것을 보고 거기서 힘을 얻어 귀신 들린 사람들을 구출해 주면서부터였다.

석목사는 선교사의 복음 설교나 전도를 듣고 믿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라 40세쯤 되어 그 곳에 온 선교사를 통해 성경[신약]을 직접 읽고 거기서 믿음을 얻은 사람이다. 당시는 아편을 피울 때인데 아편을 피우면서 몇 시간이고 성경을 읽었다 한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는 장면에 와서 크게 감동하여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울면서 자기 죄를 자복(自服)하고 기도한 후 전적으로 주님께 의뢰하는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석목사가 회개하던 당시 영국의 한 연로한 부인이 이 석목사 거주지 인근 지역에 나와 있는 선교사를 위해 아무쪼록 그 선교 사업에 큰 열매 맺혀지기를 전에 없는 간절함으로써 기도를 드리고 있었으므로[이 사실은 그가 죽은 다음 그 선교사에게 보내기로 하고 써놓은 편지에서 확인되었다] 그 선교사는 이 석자직의 회개가 바로 그 기도의 힘인 줄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아편을 끊는 것이 그토록 힘든 것이지만[아편에 손댄 것도 그가 그리스도의 진리를 알기 전 생로병사 등 인생 문제에 대해 극심한 고민 끝에 건강을 해치게 된 것을 본 누군가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날 석자직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얼마든지 아편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들면서 살아 생전에는 도저히 끊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던 아편을 끊고 그 이후로는 이런 아편 중독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내어 믿게 하는 운동에 여생을 바친 것이다.

아내는 여자 중독자들을 상대로 하는 등 부부는 합심해서 이 일을 전개해 나갔다. 때로는 부부가 모두 즉각적으로 일어나 기도하기에 바빠 한 3년은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드는 일이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중국내지(內地)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헛슨 테일러가 세우고 직접 운영한 이 선교부는 초교파여서 어느 특정 교단에 속하지 않았다] 선교사들과 개인적인 친교를 맺고 헛슨 테일러 목사가 그를 목사로 안수했지만, 그 선교부는 그 어느 다른 선교부 아래에서도 일한 것이 아니고 독자적으로 복음 활동을 이어간 것임을 앞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다.

그래서 석목사는 20년간 전심전력을 다하던 하나님 일을 뒤로 하고 일에 지쳐 기진맥진한 채 운명하였다. 금식 기도 등 많은 기도 중에 여생을 오직 주님 위해 충성하였다. 유복한 환경의 유학자 집안에 태어나 학문이 깊었던 석목사는 처음부터 성경의 하나님은 중국 고대로부터 추앙되어 오던 상제(上帝)를 가리킴이라 믿고 이제야 비로소 그 자세한 내용이 중국 땅에 전해진 것을 못내 아쉬워했기 때문에, 성경에 밝혀진 대로의 초대교회 양식대로 하면 된다고 믿어 굳이 서양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그 어떤 특정 형태에 구애받지 않았던 것이 그의 복음 활동의 특징이었다.

그래서 교회 운영에서 선교사들의 지도를 따라야 된다는 마음은 아예 없었다.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왓치만 니처럼 자주 정신으로 오직 성경에서 인도하는 대로만 나아가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그만큼 그가 성경 읽기를 좋아하고 전적으로 거기에 매달려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가 아편에 손대기 시작한 것도 인생 문제를 고민하다 지쳐 그 고통 속에서 헤매는데 누군가가 와서 아편을 사용하면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기에 그 유혹에 빨려든 것이 발단이었다.

그런 만큼 이제 성경을 통해 그토록 고민하던 인생 문제가 한꺼번에 풀리게 되자 그 감격은 그로 하여금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열정적 복음 활동가로 변신하게 만든 것이다. 이와 같이 석목사처럼 매사 주님을 인지하여 반드시 주님께 여쭙고 일을 결정하는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산다고 누가 감히 말하겠는가. 주님을 위해서만 산다는 굳은 결의가 있기에 그런 생활 태도를 지닌 것이 아닌가. 때문에 성령 충만하여 귀신도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께서 석목사의 "사사건건 기도하여 여쭙지 않음"을 보시고 분명히 섭섭히 여기신 것, 다시 말해 우리가 이와 같이 매사 매건 기도하여 주님께 여쭙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가 여기서 명백히 입증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면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일거수 일투족이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으므로 그리고 주님 친히 내 앞에서 계심을 알면서도 어찌 주님의 인도를 바라지 않겠는가.

그래서 매사 여쭙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골 3:17] 것도 이 뜻이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것도 같은 의미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직이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벧전 4:10,11]도 같은 맥락에서 하는 말이다.

때문에 귀신의 눈에도 그 사실이 그와 같이 단박에 드러난 것이다. 석목사의 그런 기도 습관을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이제 알게 된 우리로서는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요 20:21,22]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온전히 이룸으로써[4:34] 어떻게 하든지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목적일진대(고전 7:32),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줄 알면서도 석목사와 같은 그런 일도 해드리지 못한다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 할 수가 없음을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남이야 무엇이라 하든 나의 일은 내 양심이 더 잘 아는 것이다. 항상 주님께 이런 말씀을 매일 매시 드리는 것이 옳다. "주님, 저의 삶은 제 자신의 삶이 아니고 주님의 삶이고 주님께서 제 안에 사시는 삶입니다. 이 육체도 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인즉 주님의 뜻대로 원하시는 대로만 활용되도록 하는 것이 저의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인도해 주십시오. 무엇이든 어떤 경우에든 주님의 뜻대로 행하겠습니다. 주님의 뜻이 제게는 최고, 최상, 최선의 것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그 무엇이 어떻게 되든지 그런 줄로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구원 얻는 믿음"이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뜻과 의지와 생활의 목적이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어 있음은 이제 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고후 4:4]. 이제는 이것이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되어 있는 까닭이다. 원래부터 사람 삶은 자기 뜻대로 마음대로 원하는 대로 살게 되어 있는 것이니 왜냐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생명의 법칙대로 정상대로 살 수 있는 것이기도 하나 동시에 그와는 정반대로 죽음을 택할 수 있는 자유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그리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이것이 "자유"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유를 주셔 놓고도 그 자유를 따라 자기 마음대로 자기 중심으로 살았다고 해서 죽음으로 형벌하신다는 것이 과연 합당하냐"는 말은 있을 수 없다. 마음대로 즉 자유를 충분히 누리면서 살아도, 생명의 법칙을 사랑하여 그 한도 내에서 살아야지 그 한계를 벗어나는데, 생명이나 생명의 낙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한도"와 "한계"를 '속박'으로 보는 것이 교만이요 범죄 행위인 것이다. 머리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위해 정하신 것이니 모두가 좋은 것[선]이고 올바른 것[의]이라고 판단하여 그대로 행하는 것이 자유의 전정한 의미이고 따라서 정상인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감히 주제넘게 생각하는 것이 교만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정해진 것을 부자유로 인식하고 여기서 벗어나려는 것이 악[좋지 않은 것]인 것이다.

고로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 한 몸의 체제에서 각자 부과된 지체로서의 역할을 사랑하여 충실히 함에 있으니 곧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일절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 오직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살기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원하시는 대로, 기뻐하시는 대로 살도록 되어 있음이니 머리로서의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하심이기 때문이다. 머리이신 이상 머리는 반드시 몸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도록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아담]은 이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형상 역할이었다. 어차피 이런 형상은 있게 마련이니 그런 머리의 형상을 두신다고 해서 인간[아담]이 머리는 아닌 것이다. 머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시므로 머리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면 누구는 잘 나고[월등하게 창조되고] 못난[열등하게 창조된] 구별이 없음이다. 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니 머리 역시 몸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구조이다.

따라서 이런 체제가 다양성 속의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여럿이 존재하게 되면 제각기 특색이 있으므로 모두가 한결같이 똑같을 수가 없는 것은 필연이다. 이렇게 같지 않으면서도 같게 되려면 서로가 서로를 위함이 최고 방책이요, 그래서 하나가 되면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대신 머리를 비롯해 몸의 모든 지체들의 위함을 받게 되며 이렇게 위함을 받는 데에서는 모두가 똑같으니 문자 그대로의 완전 평등이다.

불공평 불공정이 있을 수 없게 된다. 치우치고 쏠리는 일이 없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 누구도[머리를 위시해서] 자기를 위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밝힌 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고후 5:15].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데 머리 역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입증해 보이신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인 것이다. 머리 자신부터 나를 위해 자신을 내게 다 주심을 확증하셨다[갈 2:20].

그래서 처음부터 선언하시기를,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눅 22:27] 하신 터이므로 모든 지체가 당연히 나를 위하고 나에게 자신을 다 주는 구조요 체제다. 다시 말하면 나는 이 한 몸 체제에서 주인이니 그 증거가 이렇게 머리를 위시해서 모든 피조물이 다 나에게 자신을 바치고 있지 않는가! 이보다 더 큰 상전(上典, 더 많은 섬김을 받는)이 어디 있는가. 이 세상에는 없다. 그러나 천국에는 있다.

있어도 나만 아니라 모든 이가 모두 똑같이 그렇다. 모두가 주인이다. 동시에 모두가 종이다. 주인이면서 종이요 종이면서 주인인 이런 기막힌 상황은 하나님 친히 우리의 머리가 되심으로써 그와 같은 확정적인 본을 보여 주심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요 실제로 이루신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내 피를 마시고 내 살을 먹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 하신 것이다.

즉 "내 살과 피를 너희 모두를 위하여 제공한다"[요 6:48-59] 하시니 바로 이상과 같은 의미로 말씀하심인데 많은 제자들이 이를 듣고 반발한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신 줄 알고 그 제자가 되었으면 겸손하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응하고 따르겠다는 각오로 임할 일이지 자기 중심으로 입맛 따라 고르겠다는 태도 자체가 교만인 것이다.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다고 할 것이다.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알아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께서 죽으라 하시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임하는 것이 아브라함이 나타낸 믿음이요[히 11:17,19] 베드로의 고백에서 또한 나타나는[요 6:68] 것이다. 이것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받으신다"는 의미이다. 왜냐면 그렇게 고지식하게 다소곳이 귀를 기울여 따르겠다는 겸손이 없으면 부질없이 교만으로 흘러 자멸할 소지를 그 스스로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지는 확고하시고 불변이시므로 그렇게 교만한 이들은 아무리 구원한다 해도 효과가 없으니 처음부터 그런 자들은 가려낼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에덴낙원에서 인간[아담 부부]을 거짓말로써 죽음에 몰아넣고 가인이 인간이라고는 아벨과 자기네 부모와 단 넷뿐인데도 그 아우를 주저 없이 없애 버린 것이 그런 교만의 증거다. 이런 사태를 하나님이 아니시더라도 어느 누가 방치하려 하겠는가.

그 가려 내는 작업의 첫 단계가, 누구든지 믿는 자에 한해서만 구원이 나타나심이다. 그래서 믿어야 구원이다. 다음 단계는 그렇게 처음에는 믿더라도 중도에 그 믿음을 버리는 경우 역시 구원에서 제외됨에 있다. 빛을 미워하고 어두움을 더 좋아한다[요 3:20] 즉 악을 선호한다는 뜻이므로 그 원하는 대로 될 것뿐이다. 그렇게 빛을 미워하고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이들은 진리를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심판도 심판대로 반드시 될 것이라는 사실조차도 믿지 않는다고 보아야 정확하다.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과 맞물린다.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왜 믿지 않(았)느냐 하면, 자기 계획대로 하면 반드시 목적 달성이 불가능한 것만 아니라는 믿음, 딴에는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한번 그런 능력을 주신 이상 반드시 그 능력을 강제하시거나 간섭하시지 않는 분이라는 판단만은 정확하다. 백방으로 생각해도 그렇게 원칙에 어긋나게 하실 수는 없다는 '믿음'만은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집요함은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에서도 드러나게 된다[계 20:7].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안다"[12:12]는 것은 자기의 활동 기간이 그만큼 단축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는 뜻이지 자기의 때가 마지막 심판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정한다는 그 뜻은 아닌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계심을 믿지 않는 것과 대동소이하지 본질적으로 다르지는 않다.

인간들도 나름대로의 여러 가지 판단으로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지 않는 것뿐이나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까지도 믿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인간이나 못믿을 무슨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 꾀에 자기가 빠져든다는 말도 있듯이 그 악한 마음이 스스로를 미련하게 만드는 것임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롬 1:22]. 이는 분명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손에 빠져드는 현상이다[히 10:31].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따라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내 원하는 대로 하되" 그것이 정상으로 흐르지 않고 그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죄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흘러갈 때 이는 죽음의 길인 것이다. "불의를 좋아한다"[살후 2:12]는 것이 바로 이를 가리킴이다. 반드시 머리를 위함으로써 머리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그 몸된 지체로서의 당연지사일뿐더러 지혜인데도 이를 버림이다. 그런즉 이런 삶의 체제를 사랑하여 기뻐하는 것이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함"[히 1:9]이니 불법 곧 범죄 행위는 이런 가장 이상적인 삶의 지혜를 무시하고 어리석게도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을 고집함이다.

에데낙원에서처럼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넣어 주는 생각에 내 스스로 동의, 동조할 때 범죄가 성립된다.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가룟 유담이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어 주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요 13:2]. 유다는 거기에 동조한 것이다. 주님의 광야 시험에서 주님께 만일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넣어 주는 각종 생각에[눅 4:3-10] 동조하셨더라면 주님은 범죄하셨을 것이다. 또 베드로가 "그런 약한 말씀 마십시오, 절대로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막 8:33] 했을 때 그 말에 동의하셨더라면 범죄하셨을 것이다.

범죄는 다름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함이다. 아들을 위하시는 것은 아들이 아니시고 아버지시다. 아버지 친히 위하신다. 이것이 '둘이 하나됨'이다. 따라서 아들께서는 반드시 아버지를 위하시고 자기 자신을 위하심이 없다. 만일 위하시게 되면 범죄가 구성된다. 나 역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는 이상[이것이 구원이다],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야지 나를 위하게 되면 범죄다. 나를 위하시는 이는 그리스도이신데도 내가 나 자신을 위하니 사랑과 생명의 법칙에서 벗어남이요 따라서 범죄다. 한 몸이 되어 있는 생명의 구조에서 벗어남이니 그 마땅한 결과는 죽음이다.

에덴낙원에서 여자는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에 동조, 동의하고 남자[아담]는 여자의 말에 동의한 것이다. 엄청난 비극이다. 아담 당시에는 설마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렇게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 줄이야 미처 알지 못했다고 치더라도, 우리는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정체를 알고 있으므로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을 구분하여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생각을 간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떻게 이를 식별할 것인가. 무조건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 자기 자신을 위해 살도록 하는 일체의 것이 내 것이든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생각이든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일단 속한 것이다.

석자직 목사 사후(死後)에는 그 후계자로 나섰던 목사가 아편이 수입성이 좋다는 이유로 아편을 재배하게 된다. 아편 중독 치유 운동에 나서놓고는 도리어 그 아편을 통해 안정적인 교회 재정을 도모하고자 한 어리석음이었다. 석목사의 후계자라고는 하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석목사의 기도 생활[모든 일 전에 반드시 기도로써 여쭙고 확신 가운데 조심스럽게 내딛는 생활의 지혜]은 물려받지 못한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예상대로 되어 교회 수입은 좋았다.

사업 확장도 하고 점포들도 새로 개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연한 결과로 교인 중에 아편 중독자가 생기고 증가하게 되자 결국 이 일로 석목사가 주도한 아편 중독 퇴치 사업은 사양 길에 접어들게 된다. 이 세상 신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절대로 게으르거나 잠자는 자가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이므로[벧전 5:8] 이 사업이 석목사 이후 불행히도 중단된 사례에서 우리는 전에 없이 경각심을 일깨우게 된다.

결코 흔히 들을 수 없는 석목사의 이 진귀한 간증을 통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니 우리 역시 이 본을 따라 모든 일에 주님께 여쭙고 일을 결정하는 일상 습관을 들여야 할 것이다. 기도 응답으로 세계적으로 이름이 난 캐나다의 프레스턴[Ann Preston, “Holy Ann”] 역시 거의 평생 가정부로 있으면서 일일이 기도하고 행동했다. "주님, 오늘 저녁 반찬거리는 무엇으로 할까요" 하는 정도였다.

점장이들이 사사건건 그들의 귀신들에게 묻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들이나 그들을 부리는 귀신들이나 모두 자기 개인적 욕구에 사로잡힌 자기 추구이지만 우리의 기도는 그 원동력이 사랑과 생명의 법질서를 따름이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차원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도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데에 삶의 목적과 의미가 있으므로 그래서 모든 일을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니 즉 주님께서 친히 하시는 것으로 행하는 것이 되어야 하므로 마땅히 여쭈면서 일하고 [주님과 함께 일하기 때문-고후 6:1] 그렇게 즐겨 "쉬지 않고 기도하게"[살전 5:17] 된다.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일을 한다 하면서도 실상은 나 자신의 욕심을 따라(즉 내 자신 좋아하고 싫어함에 따라) 행할 가능성으로 인해, 여호수아의 경우에서 보듯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계략에 휘둘릴 수도 있으므로[수 9:14] 반드시 주님의 뜻을 따라 하기 위해 그리고 촌음을 아껴 허송세월하거나 시간 낭비를 하지 않는다는 결의 아래 그렇게 사사건건 주님께 여쭙는 기쁨이니, 반드시 주님께 기도할 필요성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느끼고 즉각 실천할 수 있는 지혜이다.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에 대한 중요한 것 또 하나

성령께 대한 언급이 나왔으니 여기 더 곁들일 것이 있다. 세상의 왕들이나 권력자들 앞에 불려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말을 할 기회가 있을 때 미리부터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연구해두지 말라고 주님께서 경고하신 것이다. 우리 스스로 말하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 친히 말씀하실 수 있는 귀한 기회는 소멸될 수 있다는 경고이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적절히 무슨 할 말이든 성령께서 친히 주실 것이니 단지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면 된다는 것이니, 이 또한 성경이 그 스스로의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는 대목의 하나다.

생각해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말 한마디 잘하고 못함에 따라 큰 영향을 나타내어 중대 결실을 맺거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그런 경우인데, 사람의 일이라면 어찌 감히 미리 연구하지 않고 연습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용의주도한 답변을 하기 위해 어찌 미리 준비하지 않겠는가. 마구 살고 아무렇게 행동하는 미련한 사람이라야 그런 순간에 태무심 태평으로 지낼 것이다.

백이면 백 사람 다 사전에 철저히 대비해 가서 입을 열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일체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시니 "너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 때문"[눅 12:11-14/21:13-15/마 10:18-20/막 13:11]이라 하신 것이다. 만일 실존하지도 않는 하나님을 가상해서 지어낸 거짓말로 하나님이 존재하는 듯이 꾸며댄 것이 성경이라면, 그리고 당신이 그런 거짓말을 둘러대고 있는 장본인이라 가정할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감히 이런 내용을 지어낼 수 있겠는가. 어림도 없는 일이다. 당연히 이런 경우 각자는 자기 최선을 다해 미리 연구하고 깊이 생각해서 가장 확실한 대답을 준비하도록 힘쓰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하나님이 더한층 지혜와 구변(口辯)을 더하실 것이라고 강조해둘 것이다. 왜냐면 그런 중대한 경우 더군다나 권력자 앞에서 그 "종교"를 변호하는 자리인데 보통으로 신경 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때 그렇게 잘 설득시키느냐의 여부에 따라 그 나라 혹은 그 지역에서의 포교(布敎, 그리스도 복음이 한낱 종교의 하나에 불과하여 사람이 지어낸 것에 불과하다고 가정했을 때) 활동의 사활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만 아니라 천 사람 만 사람 다 앞에다 불러놓고 이런 똑같은 질문을 던져도 위와 똑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인간이 아니라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지어낸 종교라 하더라도[사실은 세상 종교 치고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관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절대로 그런 식으로는 신도들에게 권유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다. 고로 명백히, 이것은 성경의 모든 기록과 말씀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하나만 두고서도 넉넉히 그 입증이 된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이 이렇게 모든 진실로써 넘쳐 나는 증거로 자리잡고 있는 이상, 이런 대목이 기술된 성경이야말로 바로 이같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을 기록한 것이라는 증거가 되며, 이 성경과 반대되는 내용의 모든 것은 모두가 거짓이라고 무조건 판단할 수 있게 되는 훌륭하고도 충분한 근거, 귀중한 잣대[尺度]가 된다.

따라서 이런 자체 증명들은 아주 중요하니 이를 터전으로 하여 성경에 대한 확고부동의 믿음을 변치 말 것이다. 왜냐면 장차 적 그리스도 등 여러 가지로 거짓됨과 속임수가 판치며 횡행할 때, 무조건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면 "저것은 거짓이다" 하고 단정 짓게 하는 최고의 지혜가 되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여러 모로 따져보느라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다. 성경의 잣대를 갖다 대면 순식간에 그 거짓을 간파해낼 수 있음이다.

또 이와 같이 하나님 계심이 분명해진 이상 성경상으로 나타난 모든 기적에 관한 기술들은 진실이 아닐 수 없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왜냐면 하나님 살아 계심이 분명해진 이상 하나님께서 그런 기적 정도를 나타내시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오히려 이상한 일이 되기 때문이니 이 역시 순전히 상식에 속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심이 확증된 이상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리가 없다는 것이야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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