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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2) 교역자, 안식일 등록일 2016.02.25 08:49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477

집 교회 운동-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CITHM'의 기본 잣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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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매일 손 가까이 함께 사시는 하나님

또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각 사람과 함께 하시는 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절대로 이같은 말씀을 하실 리 없다. 성령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심을 이런 말씀 하나로써도 충분히 확신할 수 있지 않은가. 곧 우리 몸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엄연한 성전(聖殿)임을 증명함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이 "세미한 소리"[왕상 19:12]이시다. 고요한 가운데에서도 대낮 같이 청명한 확실한 논리와 조리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기중심으로 살지 않을 수 없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삶에 미련이 있기 때문이다. 남달리 세상에 대한 미련이 강한 이 세상에서의 높은 사람, 있는 사람, 지혜 있다고 자타 인정 받는 사람, 강한 그런 사람들보다, 비천하고 없고 약하고 미련하다고 여김 받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택하신다는 사실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얻을 바도 없고 잃을 것도 없는지라 오직 소망을 하늘에 두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데에 낙을 두고 있는 까닭에, 자기를 부인하고[눅 9:23] 이 세상에서의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말라는[요 12:25] 말씀에 대해 상대적으로 아무 꺼려할 것이 없다. 반면에 세상 삶에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낙을 느끼고 있는 부류는 예수님께 영생의 길을 묻던 부자 청년처럼 좁은 문과 좁은 길을 택하기에는 너무나 걸림이 많다.

비록 그 길을 스스로 택한다 하더라도 들어가지는 못하는 이가 “많다”[눅 13:24]고 주님 말씀하신 그대로다. "모든 것을 다 버리지 않으면 결단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33]고 말씀하신 것처럼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직 이 덧없는 세상에서 주님의 일 곧 영혼 구원하는 일에만 심신을 바쳐 열과 성을 다하면 간단해지는 일을 두고 괜히 사서 고생하는 것처럼 어렵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탈이다. 주님의 말씀에 반[反]하여, "모든 것을 버리기"를 싫어하는 오직 이 한 가지 이유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 심판에 이르러 이 모든 일의 결말에 대해 내려지는 판결은 "믿지 않았다"는 것일 수밖에 없다. 동인(動因)은 갖가지일지라도 뿌리는 오직 하나뿐, 즉 믿지 않음이다.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 삶에 대한 강한 애착으로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이 세상이 죽음이요 이 흙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육체가 신령한 몸에 비하면 죽음의 몸이요 이 세상문화가 다 이 세상 신(神)이 지배자 노릇하는 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믿지 않고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게 해로울 줄 뻔히 알면서도 그런 것에 손을 대는 자는 그 해롭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즉 믿지 않기 때문임과 같다. 이유는 그 단 한 가지다. 우리에게 해로운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염려하셔서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버릴 마음이 없다. 그것이 믿지 않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사람에게 해가 될 것을 아시고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는데도 그대로 따먹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 ‘믿지 않음’이 아니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생각을 감히 하겠는가. 그래서 이 세상 신(神)은 다시 속임수를 쓴다. "그 말씀들은 액면 그대로 지키라고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 도달하지 못할 줄 잘 아시면서도 '은혜로 선물로서 거저 얻는 구원'의 은혜가 상대적으로 지극히 크다는 것을 일깨워 주시려고 짐짓 하시는 말씀이라"는 등의 거짓말이 그것이다. 생명과 같은 "자기 부인"을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양 설명해 치우는 것이다.

도대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심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예복을 입지 않아 쫓겨나는"[마 22:11,12] 사람의 신세가 될 것이 뻔하니 아예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복음은 알은 체도 말고 입도 뻥긋 하지 말 일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고전 2:9/약 2:5/1:12].

다시 단정적으로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을 당신이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2차 대전 당시 나치스가 한창 득세할 때 남편이 수용소에 끌려가는 것을 본 그 부인이 남편이 갈 바에야 나도 가겠다고 자원해서 남편과 함께 같은 수용소에서 수용소 생활[물론 여자들만이 수용된]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받을 고통을 함께 받겠다는 뜻이었다. 그리스도께 대하여 우리가 그런 사랑도 없는가.

그리스도를 위해 나를 전체로 희생할 그런 마음도 없다면, 내가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차원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를 의사가 없다면, 나는 아직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 분을 사랑하는 것임을 반드시 마음에 새길 일이다. 그래서 요한은 단정하기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요일 3:16] 하였다.

4. 자녀의 신앙 교육은 그 부모들이 맡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자녀의 믿음에 관한 한, 구원에 관한 개인적인 지식보다는 부모의 믿음 생활을 직접 본보기로 삼아 형성되어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념할 것은, 유년주일학교 같은 것을 통하여 어린 아이들에게 전도하고 간접적으로 그 불신 부모들까지 교회로 인도하겠다는 어설픈 생각은 하지 말 것이다. 그런 것은 이제까지 설명한 종교적 발상에 의한 종교행위에 그칠 뿐이다.

그런 새싹들이 믿음에 들어올 경우 만일 그 부모가 반대하여 그 자녀의 의지를 꺾기 위해 핍박하여 가정에서 축출하는 등의 사태가 벌어질 때 그 쫓겨난 아동들을 믿음의 가정적 분위기로 보호 육성할 정도의 재력과 수용 능력이 가능할 때만 한해서 할 일이니 이것은 보통 벅찬 일이 아니다. 그런 핍박에 대한 대처 없이 그 어린 심령으로 하여금 주님을 배반하게 만든다면 처음부터 전도하지 아니함만 못하다.

이 세상에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같은 악령이 존재하지 않고 믿지 못하게 사력(死力)을 다하는 일이 없으면야 얼마든지 좋다. 어린 아이에게 전도함은 그들로 믿도록 즉 성령을 받아 모시도록 함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어린 아이라고 해서 이를 간과거나 좌시할 리가 없다. 믿는다는 것 자체를 많은 사람이 어설프게 이해하기 때문에 그런 어설픈 발상이 나오는 것이다.

믿는 것은 생사의 기로에 서서 이를 스스로 좌우지하는 것이고 영원한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요 주님 말씀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의미하고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눅 14:25-33]. 아이들에게 이런 것을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고로 어린 아이의 일은 그 부모가 책임지게 하는 것이 성경적이라 할 것이다.

5. 교회당을 단장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설교자의 강대상 쪽을 화려하게 또는 장중하게 꾸미지 말 것이다. 값비싼 생화를 들여놓는 것도 좋지 않다. 평범한 일상생활의 모습 그 이상을 나타내는 것은 기피할 일이다.

6. 목자(牧者)는 소위 가운을 걸치는 등 특수 복장을 하지 말 것이니 이야말로 종교화의 표본이다. 찬양대원도 마찬가지다. 따로 찬양대석도 만들지 말 것이니 앞줄에 앉았다가 찬양을 할 때만 나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찬양대는 교회 집회의 필수요건은 아니다. 교회 구성원 수가 아무리 많아도 그렇다. 웅장하고 값비싼 악기 등을 비치하거나 연주할 필요가 없다. 소위 교회 임원들이라 해서 좌석을 특별히 마련할 필요도 없다.

헌금

7. 헌금한 내역을 공개하지 말 것이니, 누구는 얼마를 내고 어떤 일에 현금을 내고 등등으로 알리는 일은 백해무익이다. 헌금도 복음전도와 구제 이외에는 어떤 용도에도 써서는 안된다는 원칙에 충실해야 할 일이다. 물론 건물 관리 유지비 정도는 좋다. 비록 그런 비용도 교회에 걸림 돌이 되거든 무시해 버릴 것이다. 건물 자체를 처분해 버릴 일이다. 기백 명 담임의 어느 교회 목사는 헌금 들고 남미 모처로 날아가 땅 사놓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전쟁 나면 교인들을 그 곳으로 소개(疏開)시키려 그랬다고 한다.

목사 말이라면 무조건 '좋고' 권위 있는 줄로만 아는 무식한 교인들의 미신이 그런 일을 저지르게 만드는 온상이 된다. 바울 같이 능력 있는 사도의 설교도 당시 청중들은 과연 그러한가 하여[행 17:11] 성경을 상고했음을 성경이 칭찬하고 있듯이 그런 습관을 들이도록 교인들을 훈련하는 목회자가 이상적인 목자다. [CITHM의 목자(牧者)는 원칙적으로 바울처럼 자기 생업이 있어 교회로 하여금 그 생활을 부담하지 않도록 함을 기본으로 한다].

그런 마땅한 생업이 없을 때는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고전 9:9]라고 했듯이 사례비를 받는 것이야 흠될 아무 이유가 없다. 단 성경대로 먹을 것이 있으니 족하고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면 있는 것을 만족하는[히 13:5/딤전 6:8] 본을 보일 일이다. 삶의 안락을 위함이 아니라 일하는 자로서의 최저 경비를 위함이다. 이런 기본 원칙을 세우고 자녀 교육 문제 등을 해결할 일이다.

성경의 표준대로 양심의 척도대로 하되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 모두는 자체적인 생활['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일하는 것']을 꾸려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목자들은 자기 자신만 그렇게 살 뿐 아니라 교회 구성원들도 그렇게 살도록 가르치는 터이므로 그 자신 그런 생활의 표본이 아니 될 수 없다. "교인들의 평균 수준"이니 하는 말들은 종교 단체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일하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지 않는 한 그는 사이비요 "삯꾼"[요 10:12]이다. 즉 자기중심의 생활 방편의 하나로 교회에 들어온 이들이다[딤전 6:5]. 이 세상이 사람 살 만한 곳인데도, 억지로 즉 시험하고 다루어보는 차원에서 살려고 하지 말고 일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 살 수 없는 황야 곧 광야가 세상이라는 실상을 아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배우는 것이요[요 6:45], 그렇지 않고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는[:65] 것임을 명심할 일이다.

진리에 "눈 뜨는"[행 26:18] 것은, 바로 이런 실상을 제대로 아는 것도 포함된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할 때는 정녕 자신을 속이는 것이니 스스로 경계할 일이다. 모든 진상을 꿰뚫고 있던 바울은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 복이 있다 하였다[고전 7:1-40]. 오죽하면 아내/남편이 있는 자는 없는 것처럼, 없는 자는 있는 것처럼 하라고 했을까[:27,29].

있으면 없음과 같이 하라 했으므로 없으면 있는 것과 같이 하라는 뜻이니 "아내를 구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바울 개인의 사사로운 견해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한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40]. 단지 누구나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함이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자진해서 이 말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 인식 전환이 관건이니, 그런 것이면 그런 줄로 알 때 그렇게 감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실제는 그렇지 않아도 그런 줄로 알면 마치 그런 것과 같이 여겨지는 것인데 사실 그대로를 그런 줄로 아는 데에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실상대로 인식하는 차원에서의 인식 전환이다. <"font-family:cn?eeceececeece?ececeece?ece?e>모름지기 목자는 '지식'이 아닌 '기도'로 목회하는 것이다. 옛적에는 성경을 각자 수시로 접할 수 없었기 때문에[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아] 오늘날과는 달랐으므로 일일이 말씀을 가르쳐야 했지만 오늘은 말씀을 얼마든지 가까이할 수 있으므로, 주로 기도로써 하는 것이다.

고로 이런 기도의 목회(牧會)는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시고 역사하시는 사람이면 특별한 자질과 특수 교육이 필요치 않다. 성령의 일은 원래 인위적인 것으로 교육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타 필요한 것은 수시로 강의를 듣거나 인쇄물 등을 통해 정보에 접하면 되는 일이다. 설령 목회자가 지금까지의 유형대로 설교하는 방식을 선호하더라도 적어도 그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는 것이라면 자기 양 떼 개개인을 상대로 그와 같이 [불철주야] 기도할 수 있을 정도이어야 그런 결과를 나타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기도의 대상으로서는 감당치 못할(건성으로 기도한다면 누가 못하랴. 적어도 자기 양떼들이라 생각한다면 그 개개인의 모든 사정을 어느 정도 샅샅이 알고 있어야 함이 기본이다) 숫자를 구성원으로 확보하는 것은 극히 온당치 못하다는 점을 다시 역설하지 않을 수 없다. 300명도 그런 수준에서 과하다 싶으면 250명, 또는 200명 이하로도 과감히 축소시켜야 한다. 그래야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양떼의 목자이다.

8. 헌금은 각자 자기 믿음대로 하게 하되 초대교회 때 성도들이 자기 집과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 앞에 가져왔던 것처럼, 그리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고 진력하기 위해 집사들이 따로 선출되어 그 재정 일을 전담했던 것처럼, 그런 "집사" 역할로서의 7인 위원회[7명의 집사를 선출한 성경의 예를 따른 명칭, 거창하게 무슨 '재무위원회' 같은 이름보다 나을 것이다] 같은 것을 구성하되 그 위원들은 목자에 못지않은 믿음의 본으로 인정되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하여 헌금을 사용하는 일에 전적으로 책임지는 대표 기관으로 정착하게 할 일이다.

목자는 따라서 그런 일에 일절 관여할 일이 아니다.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일만 해도 시간이 벅찬데 무슨 여유가 있어 그런 일에 참견하랴. 헌금하는 방법도 요즈음은 온라인 망을 통하는 편리한 송금방법도 많이 개발되어 있으므로 그런 편을 이용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한 일이다. 반드시 모여서 헌금을 해야 한다는 성경상의 어떤 규례(規例)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헌금을 하는 마음[정신]이 중요하고 그리고 그 헌금을 어떻게 어디에 쓰느냐가 핵심이다.

[10명 또는 12명씩 모이는 그룹 교회 또는 "집 교회"의 경우, 각 그룹 교회들을 총망라(網羅)하여 목자 못지 않게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을 선출함으로써 7인위원회를 구성하고 "집사" 역할을 담당하게 하여 헌금의 용도를 결정하고 구제나 복음사업에 유효 적절하게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기관은 대표적으로 한 개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이 기관은 수시로 그 입출금 내역과 용도를 발표해야 함은 물론이다. 헌금과 관련된 일에서는 절대적으로 투명성이 요구됨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상 모든 일은 기도 중에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니 주님께서 친히 지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한 이들을 집사로 선출하는 것은 기도와 말씀으로 전적으로 헌신하는 장로[감독, 목자] 못지 않게 중요한 직무인즉 목자들 중에서 선출함이 좋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 가룟 유다의 빈 자리를 채울 때 성령의 친히 인도하심에 일임하여 제비 뽑기로 결정하였던 사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투표 등과 같은 방식으로써 선출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외지에 나가 생업 없이 전도(선교)하는 이들이 있을 경우 그들을 돕고 그리고 가난한 형제나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에 성도들의 헌금은 쓰여져야 한다. 교회당 건물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 이에 신경을 쓰지 않으므로 막대한 유지보수비도 필요치 않다. 따라서 교회건물 유지를 목적으로 재력가를 책임 있는 자리에 앉혀 교회 일을 좌지우지하게 하거나 형제들 간에 위화감을 조성할 요인도 없다.

또 그런 재력가가 교회 내에서 발언권이 세어지는 입김 센 언동을 할 수도 없다.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들의 믿음의 모본이 되지 않으면 앞장 서는 자리에 위치할 수가 없다. 교회 타락과 속화가 부채질 되고 있는 것은, 교회 건물을 위주하다보니 자연히 재력가가 그런 신앙의 솔선수범과 관계 없는 세속적인 힘을 교회 내에서도 과시하게 되어 세상과 똑같은 모습을 띠게 되는 데에도 원인이 있다.

기존 건물이 있으면 그 건물을 그냥 버림이 대수가 아니니 잘 활용하도록 하되 가장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데에 의미가 있고 건물을 치장하는 것과 같은 일은 전적으로 무시해도 좋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리스도 친히 교회의 머리로서 항상 지치실 줄 모르게 활동하시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도 중에 행하면 하나님을 위해 아름다운 사업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교역자(목자)

9. 설교[말씀 전달 또는 대언(代言)]라는 것은 성령의 인도와 주관하심을 따라 되어져야 하므로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것으로서 충분한 기도 중에 준비할 일임은 상식이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을 전할 때 두려워하고 떨었다고 했다. 찬송은 미리 정하지 않는 것이 좋고 누구든 이 찬송이 좋다고 싶으면 선창하는 것으로 시작되면 어떨까. 미리 정하면 형식으로 치우친다.

여기서 말하는 "형식"이라 함은, 내용은 없이 형식만 남는 경우를 말하는데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이런 것은 극력 경계할 일이다. 몸 전체로 퍼지는 암과 같은 독소로서 그런 것은 아무리 미미한 것이라도 방치해 두면 분위기가 냉각되기 십상이다. 여기 나열되는 것은 무슨 규범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상식 수준이다. 어떻게 하면 성령을 기쁘시게 해 드릴까 하는 여기에만 맞추어지면 대과가 없다.

10. 교회 구성원 수는 목자(牧者)가 일일이 방문해서 각 가정의 사정을 통찰할 수 있는 정도로 제한하고 그 이상은 회중을 따로 분리시켜 독립체제로 운영케 함이 옳다. 즉 분가(分家)시키는 것이다. 목회자는 '지식'으로 양 떼들을 먹이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은 이천 년 전과는 달리 성경을 누구나 소지하여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시간에 얼마든지 읽을 수 있고, 또 믿음 생활의 요결은 한 권의 책 정도로 엮어 수시로 읽으면 되고, 나머지는 "기름 부으심이 너희와 함께 하시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한 대로(요일 2:27) 하나님 친히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고로 목회자의 설교는 원칙적으로 자기 자신 몸소 각 가정을 방문하고 얻은 정보와 결과를 토대로 하는 종합적인 것이어야 하고 기도 중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 그대로 성령의 대언자(代言者)가 되어야 함이다. 그리고 목자가 명실 상부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가 되려면 12사도들이 본을 보인 대로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여기에는 개인전도 활동도 포함된다]"에 전념함이 마땅하다.

11. [CITHM 교회에서는] 목자 한 사람만 발언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서신에 밝힌 대로 회중 가운데 누구든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은 대로 말함을 원칙으로 한다. 왜냐면 한 몸의 지체 역할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성령의 은사[gift]"를 주심이니 상호간 지체(肢體)로서 봉사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고린도 서신에서 바울 사도가 밝힌 초대 교회 예배의 진행 양식을 참작하면 된다.

즉 누구든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피차간의 믿음에 덕이 되는 내용을 말할 수 있고 차서를 따라 말하면 된다. 성령께서 주재하시면 일절 무질서나 혼돈은 야기되지 않는다. 만일 그런 사태가 있으면 그것은 영적이 아닌 육적인 것임을 입증함이므로 각자는 자기 믿음을 점검할 일이다. 지금까지는 어느 교회에서나 대개 목회자 개인의 원맨쇼[one man show]로서 설교 위주로 일관하다시피 했는데, 이는 성경적이 아니다.

성령 받은 이는 누구나 그 안에서 주님 친히 역사하셔서 그에 알맞게 은사[선물, gift]를 주심으로 역할 분담[한 몸 구조에서 지체 역할]을 시키시는 까닭에 그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의 메지지를 막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공동체 의식, '우리' 의식은 다시 말해 '머리' 의식이니 항상 머리의 지시를 몸의 각 지체는 받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곧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 의식, 그리스도 의식을 말함이다.

이러한 머리로서의 그리스도 의식은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으로써 나타난다. 물론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16,18]. 그리고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 것으로 또한 나타난다.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늘 분별하기를 힘써야 하기에 그렇다[롬 12:2/엡 5:17].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히 13:15]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엡 5:19,20] 함과 같다. 

머리 의식만 아니라 지체 의식이니 이와 같이 우리 각자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의 상대인 '머리 의식', 함께 지체된 우리의 '이웃 의식'으로 시종일관함이니 곧 '한 몸' 의식으로 사는 것이다[고후 5:15/롬 14:7-9]. 이 '한 몸 의식'으로 사는 것이 영원히 사는 방법 곧 삶[생명]의 법질서를 지킴이다. 이 이웃 의식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내용으로 역시 나타난다.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성경은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엡 6:18].

"내가 첫째로 권하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requests]와 기도[prayers]와 도고[intercession]와 감사[thanksgiving]를 하되 왕[국가 최고 권력자]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godliness]과 단정한[holiness, reverence, dignity] 중에 고요하고[quiet] 평안한[peaceful] 생활을 하려 함이니 이것이 우리 구주[Savior]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으로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심이다"[딤전 2:2-4].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권력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사람들 자신이 권력을 쥐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고 같은 뜻이 아니다. 그리고 권력자들의 비호를 받아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말 것이다. 피조물 인간의 권력의 힘을 빌려 인생 구원 사업을 하시지 않으니 착각하지 말 것이다. 하나님은 홀로 얼마든지 모든 일을 하시고도 남는다. 따라서 권력을 통해서 교회 일을 하겠다는 망상은 버릴 일이다.

초대 교회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행 2:42]고 한 대로 그리고 "내가 주님을 힘입어 너희를 명령하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살전 5:27] 한 대로, 오늘날은 성경이 이 "사도의 가르침"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당시 사도들의 가르침이 필요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과 말씀하신 모든 것을 듣고 본 증인으로서의 증언이었기 때문에 그 위치는 확고부동이었다.

오늘날은 그런 증언이 신약성경으로 문서화하여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므로 우리가 진리를 아는 데에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보다도 세밀하시고 철저하신 분이신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해진 성경이 함부로 다루어지도록 방치하셨을 리 없다. 이와 같이 복음서와 각종 서신(書信)들이 기록으로 남아 우리에게 전달된 것으로써 우리가 알아야 할 정보로서는 충분한 것이니 왜냐면 성령께서 그런 내용으로 짜여진 성경을 교과서로 하여 친히 가르치시는 선생님이시기 때문이다. 

유능한 교사는 교과서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까지 세밀히 풀어서 가르칠 수 있음이니 성령께서 바로 그러하시다.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 4:13] 함과 같다. 초대 교회가 전적으로 힘쓴 것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고[성찬식 거행] 기도하는 것"[행 2:42]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각자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은 내용과 생활 체험을 교회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여럿 앞에서 말함으로써 모든 형제들을 가르칠 수 있다.

'사람'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성령' 친히 가르치시는 자리가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 모두 이 세상 편안하게 삶의 낙을 누리는 차원이 아니라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및 악령들을 상대하는 전쟁 차원이요 땀 흘려 일하는 차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서 나가시는 대장이시다. 명령 일하에 차질없이 움직일 따름이다. 머리의 지시를 따라 우리가 일사불란하게 하나같이 움직이는 것이 이 전쟁에서 가장 긴요한 대목이 된다.

능력 있는 장수는 상부의 무능한 명령에 고분고분하지 않는다. 정유 재란 당시 소서행장이 가등청정을 무찌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처럼 속여 조선 조정에 흘린 간계를 조정은 그냥 믿고 이를 이공에게 하달했으나 이공 순신은 적의 흉계에 말려드는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명령 불복죄로 체포되어 간 결과 왜군의 계략대로 우리 수군이 전멸당했다. 이와 달리 2차대전 당시 롬멜은 히틀러의 시답잖은 명령은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우리의 이공처럼 화를 입지 않았다.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음에도 우리의 경우에는 이와 달리 그런 상식마저 통하지 않았다.

인간인지라 그런 어리석은 명령을 얼마든지 내릴 수도 있고 따라서 무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의 경우 우리의 머리되시고 지휘관이 되시는[사 55:4] 그리스도의 명령은 진리 그대로이니 오직 절대 복종만이 있을 따름이다. 전투 현장에서 지휘자의 명령에 불복하는 것은 즉결 처분 감이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적을 치지 아니함이라"[삿 5:23] 함과 같다.

이 세상은 우리가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치열한 전쟁 중에 있는 현장이므로 함께 싸우지 않고 지휘관의 지시에 불응하는 자는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영원한 불 못으로 처분되는 것은 마땅한 것이다. 생명의 일에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죽음의 일을 스스로 선택한 결과를 따름이다. 함께 싸우지 않음으로써 전력에 손상을 일으켜 아군이 멸절 위기에 봉착할 수 있었음을 감안한 정당한 조처다. 싸움은 결코 즐거운 일도 아니고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현실을 무시할 수 없으니 전쟁 중이기 때문이다. 전쟁할 때는 전쟁 중인 그대로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올바른 처신이다. 전쟁 중임에도 마치 태평세월인 것처럼 착각하고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은 전투 현장에서는 마땅히 걸러져야 하고 솎아져 추려 내져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이마다 이와 같이 걸러 내어져 천국에 들어가는 이들의 대열에 함께 끼일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의 전쟁은 일단 전쟁을 수행하는 자로서의 마땅한 자세만 취하고 함께 싸움에서 자기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때면 반드시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전쟁 중에서도 항상 기뻐하고[빌 4:4] 모든 일에 감사 충만한 것이다.

성령 친히 우리의 천하 무적의 막강한 능력의 지휘관이 되어 계시기에 그렇다. "두렵고 떤다"[2:12]는 것은 전쟁 중의 긴장감인 것이다. 아무리 용맹한 자라도 바짝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일거에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기에 그렇다. 이 세상에 있을 동안은 항상 이와 같이 긴장함으로써 모든 적의 공격에 대비함이 정상이니 이런 정상적인 자세를 어찌 감히 흐트러뜨릴 것인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12. 여자는 목자가 되어서는 안되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위치에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사회에서나 말하는 이른바 '양성평등'이니 '가부장제 사고방식'이니 하는 논쟁이 교회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만일 이런 일을 들고 나오게 되면 그는 형제가 아니니 분리는 불가피하다. 왜냐면 우리의 모든 삶의 기준은 성경이니, 성경에 어긋나는 것은 그 무엇이든 용납할 수 없는 까닭이다.


'여권(女權) 신장(伸張)'에서 접근해도 될 일을 왜 '평등' 차원에서 다루어 무리 수를 두는가. [하나님의 말씀이신데 감히 자기의 개인 사정으로 인해 수용 못하고 변명이나 핑계로 일관할 때 그 사람은 희망이 없다]. 아담에게서 여자가 나왔으므로 여자는 남자를 위함이니[고전 11:9]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성령으로부터 나올 리 없다. 진정한 평등은 한 몸의 체제에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가르쳐야 하고 영적(靈的) 소경을 인도해야 하고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도리어 세상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세상이 "가부장제"니 "남성우월주의"니 하며 성토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남자들이 자기 본분은 다하지 않고 여자로서의 본분만 강요한 반(反) 성경적 자세가 자초한 불행한 결과다. 여자가 남자에게 순종하는 것과 똑같이 남자는 자기 몸처럼 여자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 그 본분임을 성경은 가르치는데도 이를 어기기를 항다반사로 해온 자업자득이다. 그러나 여자들이 남자들의 그런 횡포를 막는다고 가부장제를 뒤엎어 버리려는 것은 빈대가 집에 들끓는다고 집까지 불살라 버리는 것과 진배없다.


그리 되면 여자마저 남자처럼 악한 것으로 똑같이 취급될 수밖에 없다. 남자들의 회개가 문제인데. 남자가 당장 회개가 되느냐 하겠지만, 그렇다고 빈대 때문에 집을 살라 버릴 것인가  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다. 한 가정에서 머리는 남자다[고전 11:3]. 가부장제는 인간이 만든 낡은 인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의 질서다. 교회가 하나님의 질서를 앞장 서서 깨뜨려서야 되는가?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기에 그런 발상도 한다 치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다는 교회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라면 가부장제니 양성평등이니 하는 것부터가 애당초 필요 없는 것이 아니던가. 사랑은 서로 종 노릇하는 것이니 서로가 상대에게 자진해서 종이 되고자 하는 데에서야 다툴 이유는 없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하는 소리일진대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있도록 문제 해결의 방편을 거기서 찾아야지, 엉뚱한 데에서 찾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의 어리석음이다.


의회민주제든 군주제든 무슨 상관이 있는가-통치자가 국민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내놓을만한 사랑으로 국민을 대한다면 군주제 할아비라도 좋다. 평등은 한낱 이론일 뿐이니 실제상황으로는 그런 것이 실존할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질서에 비추어볼 때 명확히 드러난다. 무질서에 의한 와해(瓦解), 공멸(共滅)을 면하려면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하고 질서는 크고 작음이 정연한 데에서 그리고 그것이 조화하는 데에서 유지된다. 크고 작음이 엄연히 구별되되 그 둘이 하나로서의 구조를 이루어야(인간으로 말하면 사랑으로) 한다는 절대적인 전제가 붙는다.


똑같아 서로가 평등하면 그런 질서나 조화로서의 구조가 불가능하다. 만유의 생성[창조] 및 존속의 원리인 삼위일체의 법칙이 말하는 대칭 개념은 반드시 대소, 주종 관계 즉 인과율을 그 뼈대로 한다. 대등이니 평등은 짝[대칭, 상칭]의 개념으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아 왔다. 여자가 남자와 동등해지려 하여 서로 다투다가 부득이 남자가 여자 아래에 굽혀 드는 짝이 날 때의 모습은 추(醜)하다 못해 악하다.


왜냐면 조화를 잃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부조화란 것은 흉하고 추한 법이다. 조화의 아름다움은 질서에서 온다. 큰 것은 커야 하고 작은 것은 당연히 작아야 하는 것이다. 큰 것 두 개가 버티고 있으면 보기 싫은 '추'이다. 완전 질서 속에서 조화가 갖추어진 모양새를 우리는 '미(美)'라고 부른다. 이 우주만물은 그런 크고 작음의 질서 속에 그 둘이 조화됨으로써 그 특유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물며 한 몸을 이루는 남녀관계가 그런 크고 작음이 없다면 그것은 무엇이 되는가. 한 마디로, 머리가 둘인 괴물의 형상이다. 혹은 쌍둥이가 등 짝이 붙은 채 태에서 나오는 것과 같다.  떡을 떼거나 세례를 베푸는 일을 남자들만이 할 수 있게 함은, 바울의 서신에서 가르치는 대로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란 질서를 따름이다. 여자들만이 모여 그런 12명 씩의 핵분열 방법으로 인원수를 확장해가는 경우, 남자가 그 목자 임무를 맡는 것이 당연하다.


여자는 동성(同性)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목자 '일'을 할 수는 있으나(모든 그리스도인은 피차에 대하여 다 목자 구실을 한다) '목자'로서 인정되지는 않는다. 천국에서는 남녀 구분이 없어지나 현재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을 때는 남녀는 엄연한 대소, 주종, 인과 관계에 있다. 질서는 어디까지나 질서다. 소수(小數)가 매일 모일 때는 동성끼리만 모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다가 일주에 한두 번 정도 다수의 남녀가 [그렇게 그룹별로 모이던 사람들이] 함께 모이면 되지 않는가.


초대 교회 당시도 세상 사람들은 남녀가 모여 음란한 짓을 한다고 모해(謀害)하는 말을 퍼뜨리기도 했었다. 요한 웨슬레의 복음 운동에서도 기도회로 모일 때에는 동성끼리만 모이도록 조처한 것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것이 지혜다. 그러나 다수가 모일 때는 그럴 필요가 없다. 한국 부흥을 시작한 당시 장감(長監) 선교사 20명은 남녀 혼성이었다. 가족이 아닌 남녀 단 둘로서 연속적으로 모이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이러한 소위 "양성평등"은 수천년 전통 관념을 깨뜨리는 것이므로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지배자인 용으로부터 난 것이니 남자가 여자의 머리요 아담에게서 여자가 나왔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그 권위를 훼손 손상시키려는 술책의 일환임이 명백한 것이다. 고리타분한 봉건사상으로 성경이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그래서 현대의 개화되지 못한 시대에 뒤처진 골동품처럼 인식되게 만들어 성경을 가급적 멀리하게 하려는 것임을 간파해야 하는 것이다. 


안식일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구하는 대목이 있다. 우리가 에덴낙원에 있으면 이런 먹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나 인간의 범죄로 인해 저주를 받아 이렇게 수고하고 힘써야 먹을 것이 비로소 생기기 때문에[창 3:19] 하나님께 날마다 먹을 양식을 구하게 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이 외에도 우리가 마땅히 생각하는 것은 젖먹이가 엄마 품속에서 매일 젖을 먹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다는 차원에서도 그러하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먹는 사람은 나로 인하여 산다"[요 6:57] 하시고 친히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라"[:55] 하신 것이다. 먹고 마시는 것은 매일 하는 일과다. 그래서 말씀의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한 것이다[벧전 2:2]. 이와 같이 매일 먹고 마셔야 하는 일이므로 우리가 모이는 것도 이런 영적 성장과 직결되어 있어 필요불가결하게 매일 모이는 것이다.

13. 집회는 매일 여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낮에든 저녁에든 수시로 모이는 것을 정례화하는 것이 좋으니 성경에 처음 초대교회가 매일 모였고 또한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勸勉)하라"[히 3:13] 했기 때문이다. 단지 종교 의식 등 종교행위 차원이라면 매일 모일 필요가 없다. 왜냐면 종교 행위는 일상생활과는 별도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 얻는 믿음' 생활은 일상생활을 말하는 것으로서 삶 자체이다.

그러므로 필요성에서 모이는 것이다. 따라서 일상생활 차원에서 매일 모이는 것이다. 우리의 이 세상 삶 자체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에 있기 때문이다[요 20:21,22/요 4:34]. 각자는 자기 형편에 따라 개인적으로 가장 적당한 시간대에 참석할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안에서는 이른바 '안식일'만이 예배하는 날이라는 것은 통용되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두고 주님을 비방할 때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으로 대응하셨다. 다시 말해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천지창조후 쉬셨다는 사실을 근거로 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무의미함을 말씀하심이다. 새 창조에 임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쉬시는 것을 포기하시고 현재 일하시는 중에 계심이다[고후 6:1].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으심을 당하셨다고 하나님의 일하심은 끝난 것이 아니니 그 몸된 교회를 통하여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친히 일하고 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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