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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3) 교회 운영자는 성령 곧 아버지와 하나되어 일하시는 그리스도 등록일 2016.02.24 14:18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513

 

그리고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시고, 안식일 개념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함이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날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식하여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어 우리의 남은 생애가 하나님의 것이 되어 시종 하나님의 일을 하는 여생이 된 이상, 안식일이란 것으로 속박될 필요성도 이유도 없음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안식일에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주 7일 모든 날이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하여 주님을 섬김으로써 주님께 예배 드리는 나날이니 특별히 어떤 날을 지정하여 바울의 말처럼 "중하게 여길"[롬 14:6] 이유는 하나도 없다. 특별한 날을 중히 여기면 자연히 그것은 특별한 장소를 중히 여기게 되는 것으로 연결되고 그래서 특별한 사람을 구별해서 그 날 그 장소에서 "대리로" 봉사하게 만들어 결국 세상의 종교 형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지적한 대로, 한 날을 중히 여기거나 또는 모든 날을 똑같게 여기거나 그런 것으로써 믿음의 있고 없음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해도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저렇게 해도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므로 마음에 확정한 대로 하면 그것으로 문제는 해결됨이니, 이런 것으로써 형제를 판단하는 죄악을 범치 말라는 바울의 경고를 우리는 귀 담아 들을 일이다.

14. 신학교를 세워 무엇하리요. 단기 강습 정도는 좋다. 선교(전도) 학교 같은 것도 필요하다면 운영할 수는 있다. 필요에 따라 응하면 되는 것이다. 일률적으로 무조건 철폐하고 규제하거나 아니면 무조건 수용해야 하는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신학교 운영도 지금까지 해왔으면 계속할 일이다. 그것을 철폐해야 복음적이고 그냥 두면 복음이 아니라는 그런 이분법은 하나님의 생명 사업에는 통하지 않는다. 단지 인위적인 것은 철저히 배제할 일이요 철두철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를 일이니 그렇지 못하면 이 세상 신의 사자(使者)들만 양산(量産)하는 꼴이 된다.

15. 신학박사와 같은 신학분야에서의 어떤 학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신학자(신학교수)라는 이름을 용납하거나 인정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세상 따라 하는 일이니 무의미한 것이다. 세상이 교회를 따라 와야지 교회가 세상을 따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 것은 로마카톨릭이라는 세상 종교가 생기면서부터 또 그 이전에도 점차 그런 탐탁치 않은 기운으로 무르익어 가기 시작했을 무렵 나타나기 시작했던 현상이었다.

신학교든 신학박사든 그런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신학교는 무조건 배척하고 무용지물이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신학박사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오직 복음 전파에만 매진하는 것이 우리 각자의 임무다. 신학교를 세움으로 복음전도에 유용하다면 얼마든지 세울 일이요 신학자를 배출하는 것이 교회에 유익되다면 얼마든지 할 일이다. 외형적으로 잣대를 들이대어 맞으면 되고 틀리면 잘라내는 따위의 일이 생사가 달린 문제는 아닌 것이다. 이 점 재차 강조한다. 

16. 교회 교류는 상호간의 정기적인 합심 기도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기도 집회 외에도 목자와 모든 성도 누구나 참석하는 '교회 회의'[행 15:4-28]가 있을 수 있다. 그 외에는 어떤 이름으로든 이른바 '상부(上部) 기관'이 존재할 필요는 없다. 이 세상 신은 조직화, 체계화, 계열화가 그 전술이다. 독재 권력에는 필수이다. 권력의 최고정상에 자기 사람을 심어놓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그러면 손쉽게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있음이다.

산지사방으로 흩어짐을 막자고 바벨 탑을 쌓는 인류에게 언어의 혼란을 주셔서 흩어지게 하신 것도 이 때문이다. 12사도 중에 가룟 유다가 끼이게 하신 것도 이에 대한 경고이다. 핵심 위치라 해서 반드시 신뢰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경고가 된다. 항상 판단 기준은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때문에 이런 독재 체제에 대응하여 교회는 그 반대인 분산과 자주[독립]로 그 특징을 이룬다. 이것이 '그룹 교회' 또는 '집 교회'의 특성이라 할 수도 있다.

17. 고로 교회는 비(非)조직 비체계적인 운영을 함으로써 이 세상 신의 책략에 대응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왜냐면 주님 친히 모든 교회의 지도자로서 군림해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구난방 식의 무질서가 아니라 한 몸으로서의 철저한 삶의 질서이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어 자진 자발적으로 사랑의 법질서라는 철칙 속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사람' 주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교회의 머리이시고 주인이시다. 이런 형태는 그러므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만이 채택할 수 있는 것이지 세상은 감히 엄두도 못낼 일이다. 세상이 만일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자체적인 와해 그리고 무기력화는 시간문제다. 그러므로 "성령과 우리"[행 15:28]는 항시 애용되는 표현이어야 함은 당연하다.

18. [CITHM 교회] 목자는 교회 구성원 중 해당 지역 주민 출신이 선출됨을 기본으로 한다. 여기서 목자라는 것은 6-12명 단위로 모이는 그룹에서 믿음의 본이 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반드시 12명이라는 숫자로 못 박을 필요는 없다, 환경과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그 이상이라도 모일 수 있고 그 이하로도 가하다. 그런 많은 사람이 모일 경우 거기서 목자를 뽑을 때는, 바울이 "감독"과 "집사"를 뽑는 기준으로 정해놓은 것을 철칙으로 삼고, 후보자가 다수이어서 필요한 때는 사도들이 "제비 뽑아" 12사도 중 결원을 충당했던[가룟 유다의 자리를 대신 채우는] 그런 방법도 좋다.

19. [CITHM 교회] 자기가 전도하여 모은 사람들로 구성된 회집일 때 본인이 목자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목자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의 앵무새는 아니니(행함이 없는), 누구나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솔선수범자라야 하는 것은 베드로가 그 편지에서 이미 강조한 바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숫자가 그렇게 12,3명 선으로 불어난다고 반드시 자동적으로 6명 단위로써 나누어지는 데에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축성이 있어야 함이니, 아무리 숫자가 불어나도 목자 자질이 있는 사람 다시 말해 타인에게 본이 될 만한 인물이 없을 때는 숫자가 아무리 불어나도 분가(分家)시킬 수가 없음이다. 영적으로 어린 아이들을 집 바깥으로 내모는 것밖에 되지 않는 까닭이다. 또 12,3명 숫자가 채 되기 전에도 목자 자질을 현저히 나타내는 이들이 생겨날 때는 [이런 목자 자질로서의 믿음 성령 충만은 지역마다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지역은 없고 어떤 지역은 넘쳐 날 수도 있기에] 12,3명으로 채워지기도 전에 2,3명으로라도 분가시키거나 아니면 단독으로 내보내어 전도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모으고 역시 같은 방법으로 확산 운동을 하도록 함이 옳다.

그러므로 융통성 있게 운영할 것이니 사람을 많이 모으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고 단 한 사람이라도 똑똑히 교육시켜 올바른 한 사람의 목자로 양성함이 목표인즉 이에 유념해서 진행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내가 관장하는 그룹에서 목자 자질의 인물이 나타나지 않고 사람들만 불어나게 될 때는 다른 데에서 목자들[이 경우 이런 사람들은 '전도 목자의 은사'를 받은 사람일 것이다]을 불러 와서 "양떼"[요 21:15-17/행 20:28,29]들을 맡겨 분가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항상 경계할 것은, 많은 사람들이 쉽사리 모여들었다고 기존 종교 형태처럼 화석(化石)화하는 것을 선호하는 마음이 생길까 함이니 목자된 자는 스스로를 부단히 채찍질할 일이다. 그런 이탈자들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므로, [그렇다고 낙심할 일은 아니다] 각자는 "두렵고 떨림으로 항상 복종하여 자기 자신과 자기에게 듣는 자들을 구원하고[딤전 4:16]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빌 2:12] 마음 가짐을 확고히 해야 할 것이다.

에베소 교회를 하직할 때 목자["장로"]들을 불러 모으고 말하기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안다"[행 20:29] 하였으니, 바울이 장로들을 세울 때 여간 주의하고 조심해서 인선(人選)을 했으랴마는 그래도 그 중에서 그런 사악한 마음을 품는 자가 생긴다 했을진대, 과연 우리가 얼마만큼 "두렵고 떨림으로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는" 힘씀과 애씀이 필요한지 이런 사실에서도 역력히 드러난다. 

성경은 그런 이탈자 즉 사이비 곧 양의 탈을 쓴 이리 중에 전형적인 것으로 디오드레베[요삼 1:9]를 거명하고 있다. 그 특징 중 하나를 가리켜 "저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한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리 그럴 듯하게 가르치는 듯 보여도[왜냐면 이런 거짓된 자는 듣기만 하고 그래서 지식은 있어 비단 같이 말은 잘해도 행하지를 않는 이들 중에 많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으뜸되기를 좋아할 때 그는 사이비 목자이니 그에게서 돌아설 일이다.

고로 각자는 목자에게 자기의 영혼을 맡기려는 나약하고 나태한 경향을 버리고 자기 스스로 "더욱 힘쓰지"[벧후 1:10] 않는 한 "실족한다"[:10]는 사실을 엄히 마음 가운데 아로새겨 둘 일이다. 이와 같이 목자된 자는 반드시 그 행함이 있고 열매가 있어 본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니, 지식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겨진 이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함과 같다.

목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내가 더 다시 둘이 아니요 하나이며 따라서 나는 나 홀로가 아니라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둘이라는 사실을 믿는 자는 항상 피차간에 대하여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됨과 같이 당신은 나를 본받으라" 하고 바울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그렇게 우리 각자가 바울처럼 되는 것이 "나를 본받으라" 한 바울의 경고의 의미가 아니면 무엇인가. 다시 강조하거니와 우리 각자는 피차간에 대하여 목자(牧者)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심은 베드로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실진대 이는 당연히 그러하다.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요, 희생 제물이요, 성전이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 입교한 자는 제외시킬 것이니 교만해져서 마귀를 단죄하는 그 단죄에 빠질까 함이요...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라"[딤전 3:10,11]는 경고도 교회는 당연히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 머리되는 이는 그 어느 누구도 아닌 항상 그리스도시고, 목자가 아닌 형제라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인즉,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할"[엡 5:21] 것이다.

20. 구원의 기본 원리는 교회에 나오면서 차츰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숙지한 다음에 세례도 받고 교회 봉사도 하는 것이다. 기본 사항 외의 세부적이고 좀 더 심오한 것은, 물론 믿음 가운데 자라면서 성도들 간의 교제를 통해 그리고 직접 주님 앞에서의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또 각자 성경을 읽음으로써 배우게 된다.

21. 십일조만 주장해서는 안되고 소유의 100프로가 주님의 소유임을 확신해야 한다. 무엇이든 자기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믿음이 출발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십일조도 "행하고 버리지 말아야 한다"[눅 11:42] 하신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기 전이므로 아직도 모세 율법 아래에 위치해 계심을 나타내시는 말씀으로서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형체와 그림자[모세 율법]의 것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는 그 그림자로서의 역할은 분명 확립되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22. 초대 교회에서 형제들이 자기 재산을 아무도 자기 소유라 하는 이가 없고 모두 공동으로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맨 앞에서 소개한 그 보헤미아의 '그룹 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공동생활을 했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런 방향으로 지향해 나갈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원칙이 있으니 이런 삶을 강제할 수 없다는데 있다. 성경에 밝힌 대로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후 9:7] 함과 같다.

한 몸 구조에서 자기 부인을 강조함과 같이 하나님의 뜻은 한 몸으로서 모두가 "평균하게 하려 하심"[8:13,14]에 있는 것이니 누구는 잘 되고 누구는 못되고 누구는 잘 살고 누구는 못사는 것은 한 몸 체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너희의 여유 있는 것으로 저들이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들의 여유 있는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8:14] 함과 같다.

물론 어디까지나 자진해서 자발적으로 그렇게 평균되게 하려는 의지가 작용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으니 강제해서 될 일은 아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비극은[행 5:1] 억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한 데에서 빚어진 불행이다. 억지로 하는 것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시고 내치시게 된다.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 없이 영생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 것이다. 하나님 주신 생명은 한 몸의 체제에 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가 시작될 때 "믿는 사람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공동으로 사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고 그 중에 궁핍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이나 집이나 있는 자는 그 재산과 소유를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므로 저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다"[행 2:44,45/4:32,34,35] 한 것이다.

그리고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사람들을 구원해내기 위해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므로[요 20:21] 일하기 위해 최소한의 먹을 것 입을 것 등만 필요하지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히 13:5/딤전 6:8]. 그러므로 그 나머지 즉 "여유 있는 것"은 "나누어 줌"이 당연하다. 교회는 이와 같이 구제하는 일을 하나님의 말씀 전파와 더불어 주력한 것이다[행 6:1/4:35/엡 4:28/갈 2:10].

그러나 교회가 이렇게 구제에 힘쓴다고 해서 놀고 먹는 것을 교회는 용납하지 않고 스스로 벌어서 자기 양식을 먹을 것을 강력히 권계(勸戒)하고 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령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는 것은 종용히[차분하게 정착하여] 일함으로써 자기 양식을 먹도록 하라는 것이다"[살후 3:10-12] 함과 같다.

당시 사도들처럼 전적으로 기도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 전달하고 가르치는 일에 진력한다면 또 외국에 나가 그렇게 한다면 "자기 양식을 먹기 위해 일할" 시간이 없으므로 교회의 보조를 받는 것은 정당하다[고전 9:6-19].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본을 끼치기 위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으로써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했던"[살후 3:8,9] 것이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라"[고전 9:18] 함과 같다.

여기서 "상"이라 하는 것은 일정 목표를 세워 노력함으로써 얻는 그 결과[reward]를 말함이니 바울이 연이어 말하는 대로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처럼 하라"[:24,25]고 했을 때의 그 "상 얻는" 것과 같은 의미다. 개인적인 영달이나 영예를 위한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우리를 보내신[요 20:21]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4:34] 자나깨나 우리의 목적인 것이다. 바울이 "상"이라 함은 바로 이와 같은 목적 달성을 말함이다.

어떤 집단에서 하는 것처럼 신도들로 하여금 모든 재산을 교단에 헌납하게 하고 본인들은 무일푼이 되어 교단에서 정해 준 일정 지역에서 집단생활을 하게 만드는 그런 것은 어떤 형태든 용납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내생에서의 구원을 위하여 그런 것도 감내(堪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 받아 '현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있는 신분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들이다. 일하는 자로서의 최소한의 경비 조달이다.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런데 유의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구원 받은] 것은 약속에 의한 것이고 우리의 공로[행위]에 의한 상급도 아니며 처음부터 사람을 차별하여 미리 택하심으로써 된 하나님의 의지 하나로 되어진 것도 아닌 것이다. 약속이라 함은 첫 언약[구약] 때나 현재의 언약[신약]에서나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경우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함이다[출 24:4-8/히 9:19]. 따라서 우리로서는 회개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한 약속을 끝까지 지켜야[히 3:6,14]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약속 불이행으로 판단될 때는 어제까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가 오늘은 전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 특징이자 속성이다. 왜냐면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내 안에 모심으로써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데, 성경은 엄중 경고하기를 여차할 경우 내가 "다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스도를 밟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함"으로써 완전히 파탄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 것이다[히 6:6/10:26,29]. 바로 이 점에 유의해야 하므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어야"[빌 2:12] 하는 것이다.

그런즉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현재 위치이니,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지 않음은 당연하고 [왜냐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는데 이 세상의 일반 인생들처럼 이런 초라하고 나약한 육체로 사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런 만큼 이 세상 살기 위해 자기 재물을 쌓아놓거나 아끼거나 할 필요가 없다. 한 아버지 아래 한 식구가 되어 있는데 자기 혼자 편안하려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것은 그 한 식구로부터 자기를 분리시키고 그 한 식구와는 남남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한 식구로서 한 솥 밥을 먹는 의미인데 평균되게 똑같이 먹는 것[혜택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이래서 초대교회에서 "자기 재물을 조금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나누어 쓴" 것이다. 이렇게 나누어 쓰며 네 것 내 것 없이 함께 사용해도 이런 식으로 해서 이 세상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하기"[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위한 것이요 하나님 아들답게 사는 본을 보여 주는 것이므로 스스로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모두가 "평균되게"[고후 8:14] 함에 있는 것이다. 똑같이 사랑하시니 누구는 덜 여기시고 더 여기시는 것이 없고 한 몸을 이루고 있으니 평균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에서 한 쪽이 여유가 있으면 다른 한 쪽의 부족한 것을 채우는 방법으로[:14] "밭과 집이 있는 이들은 그것을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면 그것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므로 그 중에 궁핍한 사람이 없었다"[행 4:34,35]고 한 것이다.

따라서 재산상 여유가 있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부족한 것을 채워 주라고 그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 이치를 모르고 자기에게 내려 주신 개인적인 축복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전연 그런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모두 고통 중에 있는데 [또는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이 절대 다수인데도] 홀로 풍부함 속에 있는 사람은 위로를 미리 받아 버린 것이라고 화가 있다 하셨으니 장차 돌아올 위로가 없다 하심이다. 때문에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막 10:28-30] 하신 것이다.

또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은, 주님의 광야 시험에서도 보듯이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내게 절하면 이 세상 부귀영화를 네게 줄 것이다"[눅 4:6,7] 한 대로,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절하지 않는 경우 언제든 핍박을 받아 가진 바 모든 재산이 어느 때든 "빼앗길"[히 10:34] 수 있기 때문에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내게 계속 붙어 있지 않는 것이다. 세상과 원수가 되어 있고 원수된 세상에 발을 붙이고 있는 터에 우리의 목숨까지도 온전히 붙어 있을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다.

그러므로 재산을 붙들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제대로 유지 보전될 것도 아니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한 몸의 함께 된 지체들에게 나누어 줌이 합당한 것이다. 한 몸의 구조에서 자기 부인이 핵심이어서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은 항상 상대방에 준다는 의미이다. 주어야 결국 그것이 내게로 흘러 들어오게 마련인 순환의 법칙이다. 순환은 들어오는 대로 계속 흘러 보내는 것이 핵심이다. 내 스스로 움켜쥐는 성질의 것이 아님이다.

받기 위함이 아니라 주기 위한 본이므로, 스스로 선한 직업을 가져도 구제하려는 것이 목적이다[엡 4:28].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자각과 의식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마귀가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인 세상에서 일관되게 일하는 자세로 임할 때는 바울의 권고대로 혼자 지내는 것이 복이 있다[고전 7:1-40]. 그렇지 않으면 바울의 경고와 같이 "육신에 고난"[;28]과 "환난"[:26]이 있고 바울이 "너희를 아껴서 하는 말이라"[:28]고 한 대로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음을 성령 안에서 예고한[:40] 그대로일 것이니 이를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만유를 상속한 주인이므로 이 모든 일은 억지로 시켜서가 아니라 그 스스로 기뻐서 하는 일이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자기의 전 재산을 주님의 말씀대로[부자 청년에게 주신] 가난한 자에게 모두 주어 버리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요 자기 스스로가 맡아 있으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적절히 나누어 주는 것도 합당하다[딤전 6:17-19]. 어느 경우에서든 "자기 재물이 자기 것이 아니라"[행 4:32]는 데에서는 변함이 없다.

자기 재산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그리스도의 것이지 자기 것이 아니므로 자기 소유는 없는 완전 무소유인 것이다. 무소유이면서도 그러나 모든 것[만유]을 소유함이니 곧 자기 것이로되 그런 것을 누리는 때는 지금이 아니고 지금은 일하는 때로서 이 일이 끝난 다음에야 순서대로 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그 장차 받게 될 위로를 앞당겨 스스로 누리는 자는 화가 있다 하셨다[눅 6:24,25/16:25].

언제나 자기 부인이 영원히 살게 될 하나님의 피조물[비단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더라도]로서는 영원히 변함없는 생활수칙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우리의 대표이신 주님께서 광야 시험을 받으실 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일진대" 하고 다가선 것이다[마 4:3,6]. 이 세 가지 시험으로 말하면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모든 시험의 개략[줄거리]이 된다. ①사랑과 생명의 법칙에서 자기 부인 곧 오직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②그러므로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신다는 것을 의심 없이 믿을 것이니 이것이 사랑의 동시성이다. 이상 두 가지를 무너뜨리고자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사력(死力)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부귀 영화를 보일 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생략하고 단도직입으로 "내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한 것이다③. 즉 이 세상이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있으므로 이 세상의 부귀영화와는 완전히 등져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면 그 결과는 자연적으로 그 반대 현상인 고난, 고초밖에 없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우리의 신분이 언급되지 않는 것은,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항상 "사람[人子]"이심을 강조하신 것처럼 그리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람이 되시도록 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이제는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있으니 같은 위치와 모양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일하는 자로서의 자세는, 죽은 자의 세계인 이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취할 것이 없으니[눅 9:58], 마땅히 ①세상 삶을 백안시하고 무관심으로 시종일관할 것이며, ②세상 모든 일은 죽은 자의 일이므로[:60] 이제는 산 자로서 산 자가 할 일에만 몰두할 일이요, ③이와 같이 지금은 오로지 일하는 때로서 일하는 자가 이것저것 세상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는[:62] 것을 마음에 새김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하나님의 아들들이되 이 세상에서는 도리어 사람으로 지내야 함이 강조되는 까닭에 우리 자신 하나님의 아들되어 있음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으니 이를 극력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항상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식 속에서 일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마음을 지키라", "마음을 굳게 하라"[잠 4:23/약 5:8/행 14:22/살전 3:13]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계시게 하라"[엡 3:17], 또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삼으라"[벧전 3:15]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하나님이셨으므로 사람이심을 강조하셨으나 우리는 처음부터 사람이므로 하나님의 아들임이 강조되어 마땅한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항상 기뻐하는"[살전 5:16] 것이요, "모든 일에 감사하는"[:18] 것이요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다[:17].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빌 4:4] 하고 거듭 강조함도 이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된 까닭이다.

23. 각 교회는 자체 내에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뽑아 전임 전도자를 만들어 국내외로 파송하고 그 재정적 후원은 그 교회 단독 또는 인근 교회와 협동으로 할 수 있다. 그런 전도자는 각처에 교회를 세우고 본교회와 합력하여 목자를 세우고 양성할 수 있다.

24.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특정일을 정해서는 안된다. 삶이 예배이다.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성령과 진리로 예배한다 하셨다[요 4:24]. 예배의 장소를 지정하시지 않았다는 것은 날짜도 정함이 없음을 의미한다. 일상생활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요 하나님의 일을 함이니 곧 하나님 섬김이다. 다만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기를 힘쓰며 그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그렇게 함으로써 그 예배[하나님 섬김]를 보다 충만한 것이 되도록 힘쓰는 것이다[히 10:25]. 구성원 모두가 각기 하나님의 성전임을 철저히 가르쳐야 함을 재삼 강조한다. 구성원 모두가 각기 ‘제물’과 ‘제사장’이요 ‘성전’임을 주지시켜야 하는 것이다.

25.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내가 거기 있다" 하신 이 말씀이 이상 모든 사실을 뒷받침한다. 또 모이는 것을 중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뜻은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엇이든 내 이름으로 구할 때 내가 이룰 것"이라 약속하신 말씀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초대교회처럼 매일 모이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개인적으로는 형편을 따라 하고 억지나 무리가 되지 말아야 하며 오직 사랑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자생 자발적인 것이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26. '그리스도의 교회' 개념은 '그리스도를 중심(머리)으로 하는 한 몸' 됨에 있고 그런 삶의 사랑의 교류가 그 핵심이다. 이는 이 세상, 이 지구상에서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무궁토록 변하지 않는 '사람 삶의 원리요 모습'이다. 교회는 그런 영원한 삶이 지상에서 나타나지는 그 축소판 또는 원판(原版)이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광야교회 당시의 성막(聖幕)이라든가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세운 성전이란 것이 모두, 그리스도께서 오신 다음의 그 본체(本體)가 되는 '실질적인 인생 삶'을 상징하는 그림자 형태로서의 의미였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제 본체적 삶을 살면서도 과거 그림자 형태에 불과한 것을 그대로 유지하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할 때, 그 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다보면 본체적인 삶을 살다가도 옛 형태로 되돌아가려는 혼동을 빚게 된다. 이는 철저히 방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가령 내 몸이 성전이라는 사실과 눈에 보이는 건물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는 강조나 인식이 병존할 때 둘 사이의 상충(相沖)이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느 한쪽을 더 여기고 덜 여기는 그래서 결국은 자기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실질적이고 본원적인 의미를 희석시키는 위험을 낳을 수 있다. 오늘날 교회 형태가 바로 그런 위험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처음부터 의도한 바였다. 성령을 모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그 이름으로 모일 때에 언제 어디서든 어느 것이든 그것은 교회이다. “교회”의 성경적 의미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한 몸 체제라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모여도 거기에는 머리께서 엄연히 계시니 한 몸의 체재 즉 교회다. 나 한 개인만 해도 주님은 머리시고 나는 몸의 역할이다. 그리고 영혼과 육체와의 관계다. 그러나 나 한 개인을 두고 "교회"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일 뿐이다. 고로 사람과 사람이 모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어 한 몸을 이루는 집합체가 교회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내가 거기 있다" 하신 말씀을 왜 일부러 하셨겠는지 생각해보면 그것이 답이다. 즉 그것이 교회라는 말씀이시다.

27. 새벽기도는 적당한 장소(교회당 건물이나 기타 장소)가 있으면 힘써 모이는 것이 좋다. 금식 기도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성도들이 단 둘이라도 만나거나 모이면 합심 기도를 원칙으로 삼을 일이다. 우리는 이 세상 삶의 낙을 누리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일하기 위함이다.

28. 찬송가는 누구든 충실한 것으로 다시 고쳐 쓰거나 직접 작사하는 것을 시도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그 중 나은 것을 골라 보편화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예배시간이라고 하면서 불신자에게 전도하는 내용의 곡을 부르는 것은 일개 종교의식으로서 형식화의 본보기다. 기계적으로 부르는 것이므로 당연히 금할 일이다. 전도용은 따로 분리해서 엮는 것이 좋고, 예배시에는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 노래로써[엡 5:19]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것이므로 내용도 명확히 그런 것을 골라 애창할 일이다.

29. 성경이 오늘날처럼 보급화된 때에는, 믿는 도리의 기본만 정확하게 주지시키면 나머지 일은 각자와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모든 일을 전담하시는 것임을 재차 강조한다. 따라서 오직 성경을 부지런히 읽도록 독려할 것이다. 목자는 하나님 말씀의 ‘앵무새’가 아니라 '대언자(代言者)'다.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니, 이는 목자만 아니라 교회로 모일 때면 누구든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고전 14:3-40]. 특별히 목자는 누구나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솔선수범으로 지켜 행하여 본을 보이는 데에[딤전 3:5/벧전 5:3] 그 '목자 자질'이 있음을 재차 강조한다[딤전 3-13].

"믿는 도리의 기본"이 무엇인가, 조지 뮬러, 헛슨 테일러, 찰즈 피니, 다니엘 네쉬, 석자직(席子直) 목사, 북한의 79세 난 "21세기 바울" 형제, Miss Ewan Helen, "Holy Ann"[Ann Preston] 등의 증언이나 생애를 통해 볼 때 그리고 신약 성경에 나타난 대로의 사도들의 서신(書信)을 통해 결론을 내리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영생[구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하나님과의 동행(同行)"[walking with God]을 말한다.

에녹이 그러했고 노아가 그러했고 아브라함이 그러했다. 선지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좋은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으니,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公義)를 행하며[to do justly] 인자[mercy, lovingkindness, constant love]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to walk with/to live in fellowship with] 것이 아니냐"[미 6:9] 하심과 같다.

다시 말해 한 몸 구조에서의 머리 역할을 하나님 친히 하시는 것이니 한 몸으로 있는 것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없고 머리와 몸[의 각 지체] 관계보다 더 친숙한 것이 없다. 여자와 남자의 관계도 한 몸 관계이면서 또한 머리[남편]와 몸[아내]의 구조인 것이다. 피조물과 조물주 하나님께서 그 차이가 하늘과 땅과 같지마는 친히 피조물 속으로 들어오시어 자기 몸으로 삼으시고 그 머리 역할을 하심이다.

남녀 한 몸의 사이가 가까운 것이라면 피조물과 주물주 사이는 그보다 원래 더 가까운 것이니 그와 같이 친히 머리로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라"는 말씀이면 족한 것을 그것만이 아닌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즉 함께 머리와 몸 관계로 사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는 데에 전연 지장이 없고 어색함이 없음은 에녹이나 노아, 모세, 엘리야 등의 생애를 통해 입증된 것이다.

그런 에녹이나 엘리야 등이 당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받지 않고도 그들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했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치 않았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그들에게 나타난 모든 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전제로 하여 그것을 근거로 그렇게 된 것이다. 단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그와 같이 하나님과의 원숙하고 원활한 삶이 즉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햔 것이었다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라고 해서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은 실제로 모두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이 해서 마치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것과 같이 친밀한 교제 속에서 아무 막힘 없이 자연스럽게 살았던 것이다. 이런 충분한 삶이 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는 데에 그 의미의 중요성이 있다. 성경은 아내/남편의 머리와 몸의 관계보다 더 밀접한 몸과 머리의 관계로서 그리스도와 우리 각자와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어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한다"[고전 7:32-34]는 대목 같은 데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머리와 몸은 더 이상 가까운 관계가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최고도로 가까운 불가분성을 지니는 것이다.

영생이 바로 이런 관계[하나님과의]를 말하는 것이다. 구원은 이런 관계로 완전 회복된 것을 말함이다. 이전에는 이런 관계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 죽은 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었으므로 얼마든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물론 앞서 지적한 대로 역대 믿음의 조상들은 그런 믿음과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충분한 결실을 유감없이 거두었다. 그것은 특례로서 우리에게 그런 삶의 모본을 보여 주심에 있었다.

그런 본을 보여 주심에서도 충분한 근거가 있으니 모든 것의 핵심이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음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믿음으로 인한 결과요 당시의 그들도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나타낼 수 있는 의(義)의 열매였던 것이다. 단지 차이는 당시 그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이루어질 것을 믿음에서, 우리는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을 이루어진 그대로 믿음에서 나타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다시 역설하거니와, 하나님 주시는 영생이 무엇이며 그리스도의 구원이 무엇이냐. 영생이라고 해서 어떤 특정한 것을 받아 챙겨 누리는 것 즉 죽지 않고 살게 되는 것 또는 이 세상에서 죽은 다음에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 오는 세상에서 살게 되는 단순히 그런 것으로 오해하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는 이 시간부터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머리와 몸 관계를 이루어 사는 일상생활 곧 삶 자체인 것이다.

살기야 오늘도 살고 내일도 살 것이다. 그리고 믿기 전인 어제까지도 살아 왔다. 같은 삶인데 무슨 차이가 있느냐 할 것이나,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어제까지는 하나님과의 머리와 몸 관계에서 살지 않고 내 자신이 머리요 몸이요 전부로서 착각하고 살았었다. 그러나 믿은 오늘부터는 그리스도께서 나의 머리시요 나는 그 몸[의 한 지체]이라는 관계 속에서 둘이 하나되어 있는 삶인 것이다. 그 증거가 내가 세례 받음으로써 죄 용서가 되고 성령의 선물을 받아 모심이다.

용서된 것은 과거 죄요[롬 3:25/히 9:15/벧후 1:9], 바로 이 몸과 머리의 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이 관계를 가리켜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대신하여"라는 우리말 번역은 번역자의 신학적 편견의 선입관으로 인한 오류]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15] 한 것이다. 즉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롬 14:9/고후 5:15]인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목적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그 즉각 시행되는 특징이 있으니 왜냐면 "새 창조"[고후 5:17], "다시 출생함"[요 3:3], "새 사람"[골 3:10/엡 2:154:24], "새 생명"[롬 6:4]의 특성을 지니는 것이 우리 구원이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것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그런 상태 다시 말해 '몸과 머리의 관계'로 돌입하는 까닭이다. 낡은 옛 것이 그대로 지속되면서 그것을 "새 것"이라 하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는 것은, 옛 생활 그대로 살면서 즉 세상 사랑하고 세상에서 하나님 축복 받은 삶을 어느 정도 누리고 그래서 육신에 매여 허덕이며 고민하며 지내면서 구원 받아 천국 가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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