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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4) 빛은 동방에서 등록일 2016.02.25 08:50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40

집 교회 운동-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CITHM'의 기본 잣대-빛은 동방에서-'이순신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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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도리의 기본

로마서 7장의 육신 가운데 있어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있는 것을 바울 자신의 믿은 후의 체험이라고 여기는 모순투성이의 인간이 지어낸 교리에 현혹되지 말 것이다. 바울 당시나 지금이나 사정은 마찬가지로서 그런 '사람이 만든 교리'가 횡행하므로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것이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한다"[고전 15:33,34] 한 것이다.

30. [CITHM 교회] 모일 때의 숫자는 주님께서 열 두 사도를 택하신 대로 12명 정도를 표준으로 하면 좋을 듯하다[인도자까지 합치면 13명]. 모세가 광야교회를 이끌 때는 그 장인의 권고를 따라 10부장, 50부장 등으로 나누어 분담시켜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게 했다. 교회 운영도 그런 형태를 따름이 좋을 것이다. 교회가 직제화하여 체계를 갖추는 종교 형태가 되면 이 세상 신은 얼마든지 자기 사람들을 그 핵심부에 심어 두어 그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음을 앞에서도 지적했다. 그런 경고 차원에서도 가룟 유다가 12사도 중 하나로 정해진 것이라고도 하겠다.

주님께서 그 12제자 가운데 장차 주님을 배신하여 팔게 될 가룟 유다를 미리 아시면서도 두신 까닭은 단순히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는 수박 겉 핥기 식 해석보다, 그렇게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교회의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이 세상 신(神-고후 4:4)이 임금 노릇하는 이 세상에서는 불가피하게 나타나지는 현상임을 주지시켜 이에 대비하도록 미리 경고하시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얼마든지 거짓 형제들이 있고, 거짓 사도, 거짓 선생이 있어 교회의 내부적 교란을 획책하는 이 세상 신의 흉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경고다. 교회가 많은 숫자로 조직화되면 될수록 이러한 경우 그 입히는 해독이 크다. 그 중심부가 헤게모니를 잡고 이단 사상을 슬며시 끌어들이면 그런 이단 사상으로 온 교회가 집단적으로 한꺼번에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교회로서 모이는 숫자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 끼치는 해독 또한 한정되거나 차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불미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대략 그 모이는 숫자에만 그치고 그 주변 정도에만 미치므로 다른 많은 그룹에는 영향을 덜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보화가 되어 있는 오늘날 사회에서 그런 파급이 국한된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룹별로 모이게 되면 개개인의 동향을 어느 정도 꿰뚫을 수 있기 때문에 목자는 회중을 장악할 수 있어 그릇되게 나가는 일을 막기가 비교적 손쉬워지는 것이다. 교회에 그런 사이비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초대교회 즉 사도들이 생존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이비가 우후죽순처럼 창궐했던 사실로 미루어보아 재언의 여지가 없다.

36. [CITHM 교회] 모임의 명칭을 반드시 교회라는 말을 써야만 한다는 것도 없다. 편의상 무슨 이름이든 가하다. 가령 '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운동[바영사회]'이라는 이름을 사용해도 좋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교회 소유로서 건물을 갖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럴 경우 365일 문호를 개방하여 어느 때 어느 시간이든 집회를 여는 장소로 활용하는 것을 당연시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때는 타기할 종교행위로 간주할 일이다. 소위 "성전"이라 하여 신성하게 여기기 때문인데 이는 종교행위의 전형적인 것이다.

성경에 보인 대로의 하나님 교회 운영을 하자는 뜻으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교회제도를 무시한다 해서 그것이 비진리라는 등식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주장은 초대교회의 모습, 그 원래의 모습으로 복귀하자는 데에 있으니 이 글의 처음부터 강조해온 그대로다. 다시 강조하지만 핍박과 환란 가운데에서 악령들과 싸우는 교회의 운영법이다.

37. [CITHM 교회] 거듭 강조하지만 현 제도권 내의 교역자가 목회하는 교회를 무조건 백안시하거나 사갈시할 필요는 없다. 생명체는 그 형태에 구애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규격화되어 있지 않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다. 오직 판단 기준은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안다는 주님의 말씀에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한 대로 오늘 이 시각 극렬한 교회 핍박 속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고 교회 운영을 한다면 현재 북한에서처럼 한 가정 집에 모이는 숫자로서 12,3명 정도가 최적일 것이니 그 숫자가 차게 되면 다시 나누어져 모이는 것으로 일단 기본 원칙을 정해놓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면 5,6명으로 재출발하게 되고 거기서 다시 전도하여 12,3명으로 차게 되면 다시 핵 분열하는 식으로 나가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번져 나간 그룹별로 모이되 필요하면 그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모일 수도 있으니 그런 특수 목적만을 위해 며칠 동안 적당한 건물을 빌려 쓰든가 어디까지나 용도에 따라 적절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전도 목적을 위해 한 달 간이라도 임차해 쓸 수 있을 것이다.

대형교회당 건물을 보유하면서도 그런 운동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가령 천명의 등록인 수를 가진 교회이면 그 천명 가운데 혹은 천명 전부를 철저히 믿음의 도리로 교육시킨 뒤 그 결과를 따라 선별하여 그런 12,3명의 그룹별 '집 교회 목자'들로 세워 자체 성장하게 만든다면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게 될 수도 있다. 현재 있는 그대로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지혜이다. 그래서 특별 집회 때는 남의 건물을 빌릴 필요도 없이 24시간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38. 교회절기 같은 것은 무의미한 종교행사요 종교의식으로서만 그칠 뿐이므로 그런 것에 관심을 둘 일이 아니다. 예컨대 부활절이니 성탄절이니 하는 것들이다. 건물을 성전이라 하면 내 몸이 성령의 성전인 사실을 상대적으로 희석시키는 악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그런 절기를 만들어 주님의 부활이나 세상에 오신 사실 등을 유독 강조하는 식으로 나가면 그 기본 사실을 일상생활의 기본 틀로 삼고 살아가는 삶의 기본 자세가 흐트러질 결과밖에 초래할 것이 없다. 모일 때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39. [CITHM 교회] 목자들이 모이는 '목자들의 회집(會集)'이 있어 정기적으로든 사안에 따라서든 모이는 것도 바람직하다. 지역적인 그런 회집의 대표가 다시 전국적으로 모일 수도 있고 세계적으로 모일 수도 있다. 목자들의 모임이라 해서, 목자 아닌 사람들이 참석해서는 안된다는 규정을 둘 필요도 없다. 누구나 참석할 일이다.

40. [CITHM 교회] "집 교회 운동"이라 해서 반드시 집에서만 모여야 한다는 그런 형식론도 우리는 경계한다. 집이 우선 가장 간편하게 택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뿐, 넓적한 별도의 장소가 있으면 더욱 좋다. 혹은 교회당 건물도 대환영이다. 혹은 야외에서의 집회도 얼마든 가능하다. 요한 웨슬레는 이런 야외 집회를 많이 활용했다. 성공회에서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생명력은 어떤 일정 형식에 구금되지 않는 것이 특색이니 이 점에 유념할 것이다.

41. 세례(洗罪禮式)는 성경대로 하면 물에 몸을 담그는 것[immersion]이나, 교파에 따라서는 물을 뿌리기도[sprinkling] 한다. 반드시 전자의 방식을 택해야 구원이 된다는 그런 것은 없다. 오직 자기 양심의 판단대로 할 일이다. “한 날을 중히 여기고 또는 여기지 않는데 대한” 바울의 지침을 따를 일이다. 즉 주님을 위해 살고 일절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그 점만 “마음에 확정할”[롬 14:5] 일이다.

또 과거 세례 받은 것은 종교적 의례에 의해 받은 것이라 하여 또는 성경대로 세례를 받고 싶다 하여 다시 세례를 받으려 할 때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확신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요 이를 비판할 필요는 없다. 또 아니 받는다고 해서 역시 이를 판단할 것도 없다. 그러나 처음 믿음에 들어오는 이들은 성경대로 반드시 세례를 주어야 한다. 세례 받는 의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함께 하여 옛 사람이 무덤에 함께 장사 지내진 것을 의미하므로 그 의미만 확실히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성경대로 세례 받았다 하더라도 그렇게 확신하지 않는 삶일 때 그 세례 자체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교회로서 모일 때에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구원을 주제로 삼아 논할 것이 아니니,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에 순종하여 이를 행하고 주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일에 힘쓰는 자답게 그에 관한 것을 중심으로 서로의 견해를 교류하며 상호간 보완해 가는 것이다.

사랑 가운데 있으면 자기 사랑하는 상대를 사랑하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럴 여지도 없다. 믿음을 지키고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갈 길을 마치면 되는 것이니,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세상에 보내심 받은 사명을 완수하고 주님을 변함없이 사랑하여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순교의 노래는 교회의 노래


"기꺼이 죽으리라 주님을 위하여"(핍박 받는 중국교회의 노래)

그리스도의 교회는 전통적인(전통과 정통(正統)이 되어 있는) 노래가 있다. 핍박과 환난 중에 부르는 노래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밤 감람산에 기도하러 들어가실 때도 일행은 찬미를 불렀다[막 14:26].

1. 초대교회 세워지던 오순절 그 날부터 주님을 따른 이들 한 사람 한 맘 같이/스스로를 제물 삼아 기쁨으로 희생했다 "이 한 몸 죽고 죽어 희생 제물됨으로써/구원의 기쁜 소식 널리 멀리 퍼진다면 아, 이상 더 무엇을, 무엇을 바라리요/생명의 면류관이 우리를 기다린다" 죽기까지 성도들은 이같이 충성하여 그 절개 일편단심 변할 줄 몰랐었다

2. 사도들은 최후까지 주님을 사랑하여 기쁨으로 주님 따른 십자가의 길이었다/스데반 첫 순교자 군중들의 돌팔매에, 페르샤 땅 마태는 칼에 맞아 숨져 갔고/마가는 말에 끌려 양다리가 찢겼었다 누가는 참혹하게 목 매달려 숨져 갔다/ 베드로와 빌립은 십자가에 매달렸고 시몬 역시 십자가에 매달린 채 숨져 갔다 /요한 사도 귀양 가니 밧모라는 절해고도

3. 바돌로매 산 채로 껍질이 벗겨졌고, 인도 땅 도마는 다섯 필 말 사이에/사지가 찢긴 채 영광으로 들어갔다 야고보는 헤롯왕이 머리를 잘랐었다./또 한 사람 야고보는 톱에 켜져 숨져 갔다 주님 동생 야고보도 돌에 맞아 순교했다/기둥에 결박되어 화살 맞은 유다였고, 예루살렘 성도(聖都)에서 머리 잘린 맛디아다 로마 황제 네로 때에 바울 역시 순교했다

4. 아아, 희생양 길을 따른 사도들 뒤를 이어 기꺼이 나아 가리, 십자가 나도 지고 /고난의 길을 택한 사도들의 자취 따라 영광 중에 들어가리, 십자가 나도 지고/천만 영혼 구원하는 밑거름이 된다면은 전부를 내던지고 내 모든 것 다 버리고 /기쁨으로 주님 위해 목숨 바쳐 순교하리 /내 모든 것 다 바치고 목숨도 내 버리고 기쁨으로 주님 위해 영광 중에 순교하리
 

To Be a Martyr for the Lord
[Sung by persecuted Christians in China]

From the time the early church appeared on the day of Pentecost, the followers of the Lord all willingly sacrificed themselves. /Tens of thousands have sacrificed their lives that the Gospel might prosper. As such they have obtained the crown of life. /Those apostles who loved the Lord to the end, Willingly followed the Lord down the path of suffering. /John was exiled to the lonely isle of Patmos. Stephen was crushed to death with stones by the crowd./Matthew was cut to death in Persia by the people. Mark died as his two legs were pulled apart by horses. /Doctor Luke was cruelly hanged. Peter, Philip and Simon were crucified on a cross. /Bartholomew was skinned alive by the heathen, Thomas died in India as five horses pulled apart his body,/The apostle James was beheaded by King Herod, Little James was cut up by a sharp saw./James the brother of the Lord was stoned to death, Judas was bound to a pillar and died by arrows, /Matthias had his head cut off in Jerusalem. Paul was a martyr under Emperor Nero./I am willing to take up the cross and go forward, To follow the apostles down the road of sacrifice. /That tens of thousands of precious souls can be saved, I am willing to leave all and be a martyr for the Lord. /Chorus: To be a martyr for the Lord, to be a martyr for the Lord, I am willing to die gloriously for the Lord.
 

주기철 목사 순교가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영문 밖에 비추누나/ 연약하신 두 어깨의 십자가를 생각하니/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자줏빛 옷/ 힘없이 걸어가신 영문 밖의 길이라네/한발자국 두발자국 주 걸으신 자국마다/뜨거운 붉은 피 가득하게 괴었구나/간악한 유대 병정 포악한 로마병정/걸음마다 자국마다 갖은 포악 지셨구나/눈물 없이 못가는 길, 피 없이 못가는 길/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영생복락 얻으려면 이 길만 걸어야 해/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아픈 다리 싸매주고 저는 다리 고치시니/ 칠전팔기할지라도 제 십자가 바로 지니/보지 못한 눈이 열려 영생 길이 보여지네/ 골고다의 높은 고개 나도 가게 하사이다/상한 이 몸 고쳐 주고 상한 마음 위로하니/ 칠전팔기 용기 얻어 백절불굴 신앙으로/ 십자가의 그 길이 제아무리 어려워도/ 주님 가신 길이오니 내가 아니 가오리까/주님 제자 베드로도 거꾸로 갔사오니/ 고생이라 못가오리 죽음이라 못가오리/내 십자가 바로 지고 주님 같이 가려 하니/ 골고다의 본을 받아 나도 가게 하옵소서
 

손양원 목사 순교가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님, 언제나 오시렵니까/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님 언제나 오시렵니까/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 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님 언제나 오시렵니까/내 주님 자비한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 들고 찬송 부르는 주님 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님 언제나 오시렵니까/신부되는 교회가 흰 옷을 입고 기름 준비 다 해놓고 기다리오니 도둑 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 주님 언제나 오시렵니까/천년을 하루 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 오 주님,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순교가 1

산곡의 백합화 성도들이여 하늘의 저 나라를 바라보아라/ 영광의 광채 속에 열 두 진주 문 우리를 위하여 예비되었다/세상에 있는 날이 험할지라도 하룻밤을 지난 듯 잠깐이로다/ <"font-family:cn?ece?ece?eecece?eeceececece?e>영원무궁 신천신지 평화의 세계 거기가 우리가 살 참 본향이다/들리네 들리네 큰 나팔소리 공중에 주님께서 나타나셨네/ 환난 중에 고대하던 혼인잔치로 오늘에야 하늘 문이 열리었구나/올라 가자 올라 가자 구름 타고서 천사들의 옹위 속에 높이 더 높이/ 천군천사 나팔 불어 환영하구나 할렐루야 이 하루를 기다렸구나/하늘 공중 바라보니 두 팔을 펴고 신랑 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네/ 신망애(信望愛, 믿음·소망·사랑)의 정조(貞操) 줄로 단장을 하고 승리의 흰 옷 입고 올라가노라/좌우에 천군천사 들러리 서고 앞뒤에 하늘 군대 옹위하도다/ 세상의 시달림도 이제 그치고 최후의 대승리는 이것이란다

순교가 2

깨어라 성도여 징조를 보라 신랑 예수 구름 타고 오시려 한다/ 환난과 핍박이 늘 기다리니 믿음으로 이길 준비 단단히 하세/[후렴]깨어라 주님 재림 가까웠으니 주님 위해 살다가 주님 위해 죽자/ 육신의 힘으로는 약할 뿐이라 주님도 십자가를 지고 가셨네/성령의 능력 내게 충만케 되어 성경대로 살다가 죽게 하소서/ 마귀는 네 믿음 빼앗으려고 사망 권세 가지고서 위협을 하나/강하고 담대하여 두려워 말라 승리자 예수님이 나의 것이다/ 주님의 이름 위해 옥에 갇히고 갖은 고생 다하다가 죽을지라도/십자가의 큰 은혜 생각할 때에 아직도 내 고생이 부족하구나/ 성경과 기도로 무기 삼으니 불타는 나의 소원 일사각오뿐 /죽도록 싸우다가 쓰러진 후에 천국 집 영광 중에 편히 쉬리라

순교가 3

아름답다 예수님 나의 좋은 친구 날 위하여 죽음과 날 위하여 사셨네/ 나의 모든 일체는 주님의 것 되고요 주님 모든 일들은 나의 것이 되도다/예수님 내 주님 내 중심에 오시니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 예수님 없는 사업 성공 같되 실패요 예수님 계신 생활 만사 유익합니다/예수님은 내 생명 또한 나의 기쁨이니 예수님 없는 생명 잠시도 못사네/ 아침에는 예수로 눈을 뜨게 하시고 저녁에는 예수로 잠을 자게 하시네 /밖에 나가 일할 때 주님 감독하시고 집에 홀로 있을 때 주님 사랑 한없네/ 물을 떠난 고기가 혹시 산다 하여도 예수 떠난 심령은 사는 법이 없어요/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린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천국 내 천국/사모하는 천국 집 지금 찾아 가오니 영원무궁하도록 주님 함께 살리라/ 거룩함과 인내로 신혼 신부 단장해 공중 혼인 그 날만 매일 고대합니다/예수님 내 주님 내 중심에 오시니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 날마다 나는 죽고 십자가 매일 지며 주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노라/강함은 약한 데서 영광은 고난에서 탄생하는 이 진리 만고 불역이로다
  

CITHM에 의해 전파되는 그리스도의 복음

구원을 이루라고 한다 해서 항시 자기 구원만 생각하는 것은 자기 사랑, 자기 자신을 위함일 뿐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것이 아니므로 결코 있을 수 없다.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이 세상이 시험 무대요 시험하는 자가 항상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으므로 방심 않고 그에 대비하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아들되어 만물을 상속 받은 주인이니 주인으로서의 일을 하라는 것이다. 스스로 하는 것이니 강제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아버지의 일이 나의 일이 되어 있으니 그대로 충실히 하면 될 일이다. 내 스스로 기뻐하여 즐거워서 하는 일, 마땅히 할 일이라고 하여 하는 일이므로, 일을 함으로써 어떤 상급을 바란다거나 일을 아니할 경우 그 보응이 두려워서 한다거나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자나깨나 생각할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뿐이다[고후 5:9,10]. 구원 받은 특징은 항상 넘치는 평안과 기쁨에 있다.

그래서 구원을 이루라 하면서도 바울은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강조하거니와 기뻐하라"[빌 4:4] 한 것이다. 또 항상 기뻐하고 넘치는 평안 속에 있되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려는" 결의가 없을 경우 그것은 인위적인 것이거나 세상으로부터 난 것이지 성령으로 난 것 즉 구원 받은 증거일 수가 없다. 양자는 항상 병행, 평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느 일방적으로 나타나면 그것은 구원과는 전연 무관하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사실만 의식하면 될 일이다. “심은 대로 거둔다”[갈 6:6,7]는 사실만 인식하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우리 인간의 세상이지만, 범죄함으로써 악한 자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건네준 또는 “넘겨진”[눅 4:6] 것으로서 현재는 그래서 적지(敵地)가 되어 있는 세상이다. 하나님께서도 때문에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나그네되셨다고 한 것이다[레 25:23]. 나그네로 있으면서도 마치 내 세상, 하나님의 세상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세상 사람들까지 우리의 원수라는 말이 아니니,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포로되어 있으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심각한 상황에 있음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체험을 기준하여 이제야 보고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임무 또는 사명은 이런 사람들을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마수에서 구출하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구금되어 있다가 이제 해방되어 있으므로 그들의 처참한 실상을 잘 알고 있음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땅은 나의 소유이나 너희가 이 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있으므로 나도 너희를 따라 너희와 함께 나그네로 있다”[레 25:23]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현재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 증언하신 바와 같다.

빌라도가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다”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하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왕이다.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으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는다”[:37] 하셨으니, 이는 “진리를 따르는 자[진리를 행하는 자, 진리대로 사는 자]는 빛으로 나오고”[3:21] 그 외의 사람은 “빛이 세상에 왔으나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여 악을 행하는 까닭에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한다”[:19,20] 하심과 같은 뜻이다.

다시 말해 진리대로 행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나라의 왕이신 것이다. 이 세상은 진리대로 행하지 않는다. 죄는 불법(不法)인데 그런 무법자(無法者)들의 세계로서, 진리와는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세계인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를 행하는 또는 행하도록 되어 있는 피조물 인간을 애초 만드셨으니, 고로 당연히 진리대로 행하는 것 즉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원하시며 따라서 순종을 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내 나라는 여기[현재의 이 자연계에 예속된]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신 대로 신령한 세계가 인간 본연의 삶의 터전이지 이런 자연계가 아닌 것이다. 진리를 행하지 않는 세계로서도 이 세상이 비정상인 것처럼 영계가 아닌 자연계이므로 인간이 사는 세계로서는 부적합하니 역시 인간 삶으로는 정상이 아니다. 비정상적인 데에서 사는 것이 삶일 수가 없다. 원래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대로의 세상이 아닌 것이다.

이런 비정상적으로 되어 있는 세계가 그리스도의 나라일 수는 없다. 이런 비정상의 세계인 현재의 세상에 대비된 영계, 그리고 진리가 확립되어 있는 세상이 “천국[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다. 그러므로 이런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서 진리 아닌 불의, 불법, 죄와 악 가운데 살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완전히 땅에 끌어 묻고, 그런 다음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써, 이제 “다시 나고[출생하고]” “새로 창조된” 하나님의 나라 사람들 곧 하나님의 아들된 이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순종하는 자 즉 죄 짓지 않는 자이므로 그런 자라야 들어가는 곳이 천국이다.

정상적으로 살고 빛 가운데 살고 순종하고 하는 모든 것이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머리의 지시를 따라 한 몸의 지체된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삶의 행복에서의 최대치를 구하는 것을 말함이다. 여기서 머리되시는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우리 자신들을 위하신다. 우리가 그 한 몸에서 지체들을 형성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한 몸의 견지에서 보면 머리를 비롯해 모든 지체가 바로 나 자신 격이다. 남남이 아니다. 왜냐면 머리를 위시해서 모든 지체가 바로 나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살아 주니 바로 나 자신이지 나 자신이라 해서 별다른 의미이던가.

과거 진리를 모를 때에는 즉 악마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속아 있을 때에는 내가 나 자신의 전부인 줄 알고 내가 나를 위하는 데에만 전력을 다해 왔다. 그래서 죄를 짓고 악을 행해 왔었다. 이웃은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먼저 나부터 살고 보자는 식이었고 실상 남들 역시 나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모두 자기 자신들을 위하니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인간 사회는 오로지 각자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살벌하기 짝이 없는 각축장으로서 불행 그 자체였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안 다음부터는 그런 어리석은 모든 행위를 버리고 빛으로 돌아온 것이다. 과거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나를 사로잡이 이 진리에 눈 뜨지 못한 것은 이와 같이 맹목적으로 자신만을 위해 줄달음질 치는 것밖에 몰랐던 나로 인한 즉 내 스스로가 만든 결과를 따름이었다. 내 스스로 빛을 따라 의를 행하기로 결심하면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나를 강제해서 악을 행하게 못하는 것이다.

인간이 동조하고 동의하기 때문인 것이다. 아담이 그렇게 동의해서 범죄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동조하는 데에는 그 스스로 빛을 미워하여 하는 것이 있고 빛에 대한 지식이 없어 그러한 경우로 나누어진다. 하나님의 구원은 후자를 상대하는 것이다. 전자가 제외되는 것은 억지로 강제해서 무엇이든 하실 수 없는 까닭이다. 왜냐면 처음부터 자유를 완전히 보장해 주셨으므로 그 자유 선택에 따른 행동을 하나님께서 만일 간섭이나 강제를 하신다면 모순된 일을 하심이 되는 까닭이다. 그렇게 되면 자유를 주신 의미를 하나님 친히 번복하심이 되므로 이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진리를 따르는 자[진리를 행하는 자, 진리대로 사는 자]는 빛으로 온다”[요 3:21] 하셨는데 이는 무엇인가. 이 말씀과 대립되는 말씀으로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20]이라 하셨고, 이 "행위가 드러날까 함"에 대립되는 것으로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셨으며, 또 "빛을 미워하고 어두움을 좋아한다"는 말씀을 하셨으니, 종합하건대 "진리"는 "빛"의 속성과 관련이 있다.

어두움은 어두워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과 더불어 감추려 하고 감추어져 있고 실상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거짓된 것과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창조 그대로 나타나 있는 실상 그대로의 사실과 진실을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의지력으로 진리를 따라 행하는 순종 여부를 말함이 아니라[아직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므로], 그렇게 진리를 따라 행할 수 있는[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경우] 속성 여하에 따른 구별이니, "진리를 따른다"[:21]는 것이 바로 이런 속성을 의미함이다.

실제로 순종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려는 의지가 충분히 있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킴이다. 그러면 왜 이제까지 순종하지 못했느냐 하면 로마서 7장에서 설명하는 대로 육신에게 사로잡혀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죄와 사망의 법에서 그런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인 것이다[롬 8:2].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무덤에 묻힘으로써 죄 용서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으로써 그리스도와 실질적인 하나 관계를 이루어 머리와 몸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본성적으로 어두움을 좋아하는[이는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셔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자유 선택에 의한 결과로] 자는 올바르고[의롭고] 선한 것을 행하라고 명령하시는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항상 강조하는 것이지만 "믿음"의 정확한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순종이 수반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이다. 순종의 의사나 의지 없이 그냥 지적(知的)으로 특정 사실을 사실로서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 아닌 것이다.

인간 삶에서 모든 믿음이 그러하듯이 믿으면 행동이 따르게 마련이다. 지식이 있으면 그 지식대로 행하게 되어 있고 그러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있으나 마나이다. 어떤 사실을 알기는 알지만 그것을 믿지 않으면 그 지식 따라 행동하지 못함이다. 믿음은 특정된 지식의 행동화인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의미하는 믿음이 따로 있고 우리의 일상 삶에서 의미하는 믿음이 따로일 수가 없다. 성경은 보편적인 인간의 언어를 따라 나타나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이다.

내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아담의 첫 창조와 같은[범죄하기 전의] 바로 그런 위치에 있음이니 성경은 이를 가리켜 새 창조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담이 에덴낙원에서 신령한 몸으로 있었음과 같이 현재 나도 과연 신령한 몸으로 되어 있는가 할 때, 이미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마지막 아담]와 하나 되어 있으니 나 역시 새 창조에서 원천적으로는 신령한 몸이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하나 됨으로 인하여 나도 부활하여 승천하고 난 다음에 아버지의 영광의 보좌 우편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는 현재의 상태이다[엡 2:6]. 그러나 우리 인간이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임과 같이, 그리고 그리스도 친히 사람이시면서 하나님,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이중 구조이신 것처럼, 그리고 현재 사람의 육체로는 하늘에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위치이시고 영[성령]으로는 지금 이 세상에서 역사(役事)하시며 내 안에 또한 계심에서 역시 이중 구조이신 것처럼, 나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이중 구조로 존재한다고 하면 적절한 표현이 된다.

즉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에 내 안에 성령으로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것이므로 그 이중적인 의미의 또 하나의 양상이 하늘에서 신령한 몸으로 계시는 그리스도와의 나의 하나됨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양면으로 나는 내 모습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이 세상에서의 이 육체와 함께 함이요 다른 하나는 또한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써의 신령한 몸이다. 왜냐면 이제는 영구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나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계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로는 하늘에, 영으로는 이 땅에, 따라서 나는 육체로는 이 땅에, 영으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위치해 있다. 나의 영이 현재 그리스도의 영과 합하여 한 영으로 되어 있는 까닭이다[고전 6:17]. 그리스도와 나라는 '이중성'이 다시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중성'으로 되어 서로 교차해 있는 양상이라 하겠다. 육체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으나 그리고 영혼은 이 육체 안에 있어 육체와는 불가분이나, 영혼 자체로 말하면 얼마든지 그 상상력을 동원하여 우주 어디든지 임(臨)할 수 있으므로 나의 영혼의 위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면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바로 현재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그리스도 바로 그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으로 얼마든지 이 사실은 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중성으로서의 하나 되어 있는 절묘한 구조는 절대로 기계적으로 다시 말해 일방적으로 되어지는 일은 아니니 반드시 내 쪽에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살"[고후 5:15] 때 한해서 유지되는 '둘이 하나됨'이다.

그리고 내게 관한 한 '그리스도'라는 의미는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항구적으로 나를 위해 자신을 영원하신 선물로 주신[갈 2:20] 바로 그 위치 또는 상태에서 영원하심이다. 그러므로 서로가 밸런스가 맞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 역시 같은 자세에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시므로 나도 그리스도를 위해야 서로 맞아 떨어지는 둘의 하나됨이다. 만일 내가 나 자신을 위한다면 서로 하나가 될 수 없고 그리스도와 나는 남남이고 따로따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분명히 사람으로[항상 '사람의 아들(人子 )"이라 강조하신 것처럼]서 계셨으나 한편 아버지와 하나되신 까닭에 아버지께서 하나님이시니 그리스도 역시 여전히 하나님이셨던 것과 같다. 동시에 아버지로서는 친히 그 성령으로 항상 아들과 하나로서 함께 계셨던 이치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 누차 강조하셨다. 아버지 친히 그 말씀을 하시고 아들을 통해 모든 일을 하시는 것이라 밝히신 것이다.

그런즉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이 세상에 다시 임하신[오순절의 성령 강림으로 당시 제자들 각각에게 임하여 오심] 의미는, 내가 오늘날 성령을 받아 모심 즉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영접해 모시는 때에도 똑같으니, 바로 오늘의 내게 해당되는 오순절 성령 강림인 것이다. 이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는 나 역시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위치로서의 의미가 됨이니 곧 현재의 나의 구원된 육체요 삶이다. 이 육체는 하나님의 아들 친히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오신 바로 그 육체 즉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다.

다시 말해 세상에 보내심 받았다는[요 20:21,22] 것은 사람들 구원해 내기 위함이요, 인생 구원에는 고난 받음이 필수이기 때문에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죽음과 고난이 필연이므로 내가 이 육체 가운데 그대로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고난을 목적하여 그리스도 친히 그러하셨던 것처럼 나도 이런 육체를 입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 뒤의 영광이니[눅 24:26], 영광은 영계에 속한 신령한 몸으로서의 영광이므로, 이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 다음에 신령한 몸”이라는 순서와도 같은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보내심을 받았다”[요 20:21]는 것은, 고난 받기 위해 이런 육체로 잠시 머물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사람들을 구원해 내려면]을 말함이다. 즉 고난 받기 위해서다. 살기 위해서 즉 삶의 낙을 누리기 위한 육체가 아닌 것이다. 살기 위해서라면 마땅히 신령한 몸이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전체적인' 의미의 교회로서도 고난 받기 위한 태세가 완비되어 있는 형태라야 하는 것이지, 지금까지 지내온 것처럼 단지 종교 행위의 한 형태로서의 모습이라면 그리스도의 생명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선고밖에 더 받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인한 하나님의 일을 함도 반드시 나의 자발적인 의사로 행해지는 주인 의식으로서의 의지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아무 의미가 없다. 절대로 이를 강제하시거나 간섭하심으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내 스스로 움직일 때의 그 나의 '의지'와, 그렇게 나의 의지를 따라 움직일 때의 그 '능력'은 분명 차원이 다르다. 즉 하나님의 능력이니 내 능력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능력은 풍성하게 주셔도 내 스스로 이 능력으로 움직이려는 의지가 없는 한 그 능력이 무익하고 무용하다. 이런 분명한 차이가 있다. 강제, 간섭을 결단코 하실 수 없다는 것은 일체가 사랑이기 때문이고 사랑은 자유 의사, 자유 선택이 그 핵심인 까닭이다. 오직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좋아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이루기를 바라시되, 그러나 그렇게 일을 이룰 수 있는 모든 필요한 능력만큼은 하나님 친히 공급하신다는 의미이니 내 안에 계시는 성령[아버지와 하나로 존재하시는 그리스도] 친히 그 권능이 되어 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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