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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5) 빛은 동방에서 - 2 등록일 2016.02.24 14:28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67

 

따라서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는 오직 사랑이 그 뿌리이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반드시 우리 역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달갑게 응하고 자진 자발적으로 마음을 내는 의지력(意志力)에 좌우되는 것임을 명심할 일이다.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리 저리 하여 주리라 약속하여도 너희가 이를 위하여 직접 기도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하시는 것이다[겔 36:37]. 우리가 직접 기도해야 한다는 뜻은 다름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위하시니, 우리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 주시기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구해야 마땅하다는 뜻으로서 이것이 생명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법칙대로 즉 진리대로 행하기를 바라시고 그렇게 요구하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으레 나를 지켜 보호해 주시겠지 할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쉬지 말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영광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내 자신 매일 매시 매사 매건 하나님께 그 인도를 구함이 마땅하다. 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동시성이다.

그래서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득(利得)을 보겠다 하는 사람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니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님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헛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다”[약 4:1317]라는 경고가 있음은 당연하다.

자기가 자기를 위해 사는 자랑, 자기를 위하는 자랑이니 다 악한 것으로서 반드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위하고 그 영광을 돌리는 것이 동기가 되어 움직이지 않으면 선을 행할 수 있음에도 행하지 않는 것이므로 죄가 된다. 죄는 무조건 자기를 위하는 것,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요 의(義, 올바름)는 오직 하나님[우리의 머리되시는]을 위해 사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머리와 몸 관계다. 이것이 생명의 '한 몸' 체제에서 옳고 당연하고 순리이고 진리인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은 머리로서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고 당신 자신을 위하심이 없는 까닭이다. 나를 친히 더욱 더 잘 위하시므로, 따라서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어 위하지 않는 것이고, 그 대신 오직 나[몸으로서 혹은 몸의 한 지체로서]의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위함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위하지 않으니 이것이 틀린 것이고 그래서 불법, 불의라 하는 것이니 곧 죄요 악[모든 좋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는데 왜 내 스스로 나 자신을 위하려는 부질없는 짓을 할 것인가. 하나님을 위함으로써 그 뜻을 받들어 전체를 위하고 이웃을 위함으로써 다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힘을 도리어 엉뚱하게 자기 자신을 위하는 데에 소모하니 이것이 어찌 법에 어긋난 것이 아니고 옳은 도리를 따라 행함인가. 악[좋지 못한 것]인 것이다. 나의 모든 힘은 머리되신 하나님을 위하고 같이 함께 한 몸 이루어 지체가 되어 있는 나의 이웃을 위한 봉사의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어째서 이를 나 자신을 위함으로써 허비하는 미친 일을 할 것인가.

이런 미련함의 고집불통이 죄이다. 죄의 정체를 정확히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 지킴”[고전 7:19/계 12:17]이 바로 이런 올바른 도리를 따라 사는 것을 말함이다. 왜 사는 방법을 버리고 죽으려고 환장을 하는 “미친 마음”[전 9:3]을 품을 것인가.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이런 것을 모를 리가 없는데 괜히 제물에[제 바람에] 넘쳐 스스로 높아져 우쭐해져서 교만해짐으로써 엉뚱한 욕심과 고집을 부림으로 악령이 된 것이다. 악하니 악령이고 사람도 악한 짓을 하니 악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심이 다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은[고후 5:15/롬 14:9]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 당연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과거에는 이 당연한 일조차 하지를 못한 것이니 “육신” 때문이었다. 이 “죄의 몸”[롬 6:6]이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통해서 완전히 와해된["to be destroyed"-6:6] 것이다.

육신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자기 스스로 악이 좋아서 죄를 짓는 이들이 있다[요 3:19]. 그런 사람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롭 8:2]되는 일도 없다. 그 스스로 해방되기를 원하지 않는 까닭이다. 당연히 구원에서 제외된다. 천국에 들어가보아야 능력만 받고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될 것인데 차라리 그런 사람 구원할 바에야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구원되어 마땅할 일이 아닌가. 그래서 구원의 대상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에 한정된다[고전 2:9/약 2:5/1:12/행 5:32/히 5:8].

그러나 그런 구별은 우리의 소관사도 아니고 그런 지식은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불특정 다수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쉬지 말고 기도하는 중에-살전 5:17] 전달하여 알려주는 소임만을 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믿어야 구원”이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인류가 다 자동적으로 구원될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누구든지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요 3:16] 말씀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으로서의 “누구든지”이다.

그들이 "진리대로 행함(to do the truth, 진리를 좇음-요 3:21)"이다. 빛을 사랑하여 빛으로 오는 자이다. 빛을 미워하고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자는 해당되지 않음을 주님 친히 명백히 하셨다[:18-20]. 그래서 "아무나 누구든지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6:45,65]고 처음부터 명백하게 하셨다. 이 “누구든지”를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크게 착각하게 한 것이다. 즉 심지어는 믿지도 않으면서도[즉 순종하지 않으면서 그래서 죄를 지으면서도] 믿는다고 자처하게 만드는 것이다.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죄를 짓는 측면에서는 다른 믿지 않는 사람보다 아무 것도 나은 것이 없다는 양심상의 가책과 자책감을 무마하는 구실을 찾는 데에서, 하나님 친히 구원 얻을 자 멸망할 자를 처음부터 택정해 놓으시고 구원하셨다는 그런 말도 안되는 오직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만이 지어내어 퍼뜨릴 수 있는 이단 사상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지배해 오고 있다. 그것도 소위 유수한 신학자들의 이름으로 그 ‘권위’를 과시하고 있다.

성경은 이미 선언하기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살후 3:2/고후 4:3,4] 하였다. 때문에 주님 친히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미리 못 박으셨다. 따라서 “많은” 제자들이 물러갔다고 했으니[요 6:66] 자기 부인을 강조하시고 가르치시는 주님의 말씀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영생만을 욕심 내고 진리를 따라 살기를 거부한 군상들이다.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역시 당연히 그런 부류의 피조물이었다.

범죄함으로 이와 같은 인생 불행의 비극이 왔으니 이제 구원하시면 그런 범죄자를 솎아내는 차원에서의 구원일 수밖에 없다. 당연한 일관성이다. 이런 일관성이 없으면 법질서 자체의 존립이 불가능하다. 그러면 어째서 그런 범법자가 있어 멸망에 이르는 자가 생기고 영생에 이르는 자도 생기는가 할 때 말 그대로 ‘자유’ 선택에 의한 스스로 정한 결과다. 영생이냐 멸망이냐 하는 그런 선택이 아니라, 선을 행하느냐 즉 의를 사랑하느냐 불법, 불의를 좋아하느냐 하는 자유 선택이다.

그러면 피조물에게 그런 완전한 자유를 주신 것이 잘못인가? 그러면 그 질문은, 사랑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도록 하신 것이 잘못인가 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그러면 그 질문은 다시 “무조건하고 이성적(理性的)인 피조물을 만드신 것부터가 잘못이냐?” 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밖에 없다는 왕창 어리석은 결론 아닌 미궁에 빠지게 된다.

악령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존재도 기정사실이고 아담의 범죄도 기정사실이다. 이미 이렇게 확정되어 있는 과거로부터 현재와 미래는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나 자신의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 이것은 내가 나 자신을 위하는 것과는 별개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은 성경을 앎으로 인한 지식의 결과이다. 이제 나 자신의 문제라는 것은, 이 올바른 지식을 따라 행동하느냐의 여부에서 그 최종 단안을 내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시점(時點)에 위치해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아야 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 하는 삶의 진리를 알았으므로 내 자신 이를 기꺼이 수용하느냐 않느냐 하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런즉 위와 같은 의문 제기와 같은 것으로써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기타 악령들 또는 멸망 중에 있는 악한[결코 회개하지 않을] 인생들을 생각할 여유도 없고, 실상 필요도 없다. 내가 무슨 하나님이라고 그런 존재들을 가엾게 여겨 그들을 대변하려는 주제넘은 생각을 할 것인가. 나 자신부터 문제 해결을 할 일이다.

그리고 또한 현재 우리의 지각[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은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을 판단하고 판별하기에는 한없이 역부족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신령한 몸이 되어야 능히 다루어질 수 있음이다. 하나님은 원래 인간을 신령한 몸으로 만드셨으나[처음에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지으셨지만] 그래서 모든 지식을 수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체제였으나[천사들의 도움을 입어], 스스로 범죄하여 이런 불행 속에 들어 왔으니 이런 현실을 감안해서 지나쳐 분수에 맞지 않는 생각은 지혜롭게 일단 접어두는 것이 정상이요 지혜이자 상책이다. 우리가 장차 영적인 몸으로 변환될 때는 모든 것을 자동적으로 알 수 있게 될 것이니 그 때까지 기다려도 손해될 것은 없다는 결론이다.

우리가 자연 환경의 아름다움에서 확인하듯이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이 아름다움뿐이다. 모든 아름다움은 '조화되어' 있음으로써 즐겁고 좋은 느낌을 줄 때 이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제대로 자리잡아 위치해 있을 때 우리는 이것을 아름다움이라 한다. 사람의 얼굴이나 신체 구조도 이렇게 조화되어 있는 것을 가리켜 미인(美人)이라 하듯이 팔이나 다리 또는 이목구비가 아무렇게나 붙어 있다든지 길고 짧음이 불규칙으로 부조화를 이룰 때 이를 아름답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럴 경우 미(美)가 아닌 추(醜)이다.

이 조화의 아름다움을 이룸에는 대칭 원리가 그 근간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구원하시는 이로서의 사랑 일변도만 아니라 하나님은 "재판장"[행 10:42]으로서의 "소멸하시는 불"[히 12:29]이심은 위에서 지적한 그런 조화미에 속한다. 사랑만 있으면 그 자체가 '추'가 된다. 그 '추'는 혼란과 혼돈을 야기시키고 질서 정연함의 '미'를 결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임이다. 엄정함이 함께 깃들여 있을 때 그 사랑은 기막힌 아름다움을 조성해내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원리를 증명하고 있는 3운법칙도 그런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다. 그 3가지 유형으로서의 구조 자체가 이미 그런 기묘한 형태를 구성하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개개인의 인생 삶을 어김 없이 그런 법칙으로써 그와 같이 묘사해놓으시는 것만 해도 하나의 예술 작품이 아닐까. 창조하신 모든 것이 어느 하나라도 예술품이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만물은 다 아름다우나 사람의 마음이든 악령의 마음이든 정도에서 벗어나 있을 때 그 마음이 거짓되어 부패하고 더럽고 추한 것으로서 우주 천하 만물 중에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하였다[렘 17:9].

빛은 동방에서  삼위일체 3운법칙

바울 사도가 아시아 쪽으로 복음을 전하려 할 때 성령께서는 이를 금하시고 마케도니아로 향하게 하셨다. 그로부터 복음은 동쪽이 아닌 서쪽 즉 유럽 방면으로 방향을 틀어 갔고, 거기서 일시 멈추어 있다가 다시 서진(西進)하여 아메리까 신대륙으로 넘어가 거기서 뿌리 내려 번지기 시작한 복음운동은 세계 선교의 깃발로 나부껴 마침내 다시 서진을 계속하여 한국에까지 미쳐 1907년 온 세계 교회가 놀란 "한국 부흥", 세계에서 가장 지능지수가 높은 민족의 한국 땅에서 마침내 그런 부흥역사가 탄생하였다.

이 장엄한 역사(役事)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국 주재 선교사들이 4개월[9-12월] 합심 기도에 의해 탄생시킨 것으로서 이런 합심 기도에 의한 성령의 역사는 교회사의 측면으로 볼 때 일대 기념비적인 것이다. 가히 세계 선교의 본이 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제 한국에서 복음은 CITHM을 통하여, [바울이 애초 시도하려다가 미래를 내다보시는 주님에 의해 그 코스가 변경되어 일시 보류되었던] 광활한 아시아 아프리까 정복을 위한 대장정으로서 위에 지적한 그런 전통적 '서진 패턴'을 이어받은 한국 교회에 의해 본격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바울의 복음 전도를 동방이 아닌 서방으로 방향을 고쳐 잡게 하신 것은 이미 동방으로는 페르시아 당시의 '조로아스터'교를 위시해 인도에는 불교 등이 왕성하고 중국에는 완고한 조상 숭배의 유학이 성행함에 비추어 볼 때 비교적 장애가 없는 서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복음 전파는 산지사방으로 진행되는 것이지, 일정한 방향이 있어 환경 여건이 좋은 데만 골라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시대적 구분으로 보면 동방에서 서방으로의 흐름인 것만은 분명하다.

"빛은 동방에서부터"라 할까. 창세기에서도 에덴낙원 역시 "에덴의 동방[eastward in Eden]"에 창설하셨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아담 내외를 에덴낙원에서 추방하실 때도 "그 동쪽에 그룹들과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에 접근하는 것을 막게" 하셨다 했으니 "에덴낙원의 동쪽"이다. 이제 우리는 이 역사적 진행 방향을 따라 주로 아프리까,  아시아 대륙을 향하여 복음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나아가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사도시대에는 모든 진리를 제대로 알고 있었으나 300년간의 박해 기간을 거치면서 그리고 이후 배도(背道)하는 일이 있는 등의 세월을 보내며 몇 가지 핵심 진리가 왜곡된 채 현재까지 이르렀다. 그 첫째가 삼위일체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을 가리켜 구약에 '엘로힘'이란 말의 복수로 지칭되어 있음과 같이 성부(聖父), 성자(聖子)로 계시는 정도는 알고 있으나 이에 대한 해석이 중구난방이었다.

심지어는 말하기를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세 가지 측면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라 말하기도 했었다. 올바른 지식에 터전을 둔 확신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해야지, 그렇지 못한 불확실한 지식으로는 오히려 하나님 사업에 걸림 돌밖에 안된다. 불확실한 지식은 자연 불확실한 믿음을 만들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각종 이단사설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둘째는 인류 시조가 살았던 에덴낙원에 대한 몰이해다. 이에 대한 부정확한 지식은 죽음에 대한 그리고 이 세상의 실상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낳아 성경 말씀에 입각한 능동적 복음 사업에 적잖은 지장을 자초하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에덴낙원은 이 자연계의 일부가 아니라 영계로서, 이 세상의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거기서 인간을 위해 창조된 영물 중 하나인 것이다[창 2:19].

셋째는 이상과 같은 핵심적 사항에 대한 부정확한 지식으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가 또 있으니,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핍박 받는 것을 정상적인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하지 않고 어쩌다 일어나는 불행한 일 즉 비정상적인 사태로 보는 그릇된 안목이다. 이런 극히 위험한 교회관과 세계관을 가지고는 이 마지막 때를 당하여 향후 교회를 운영하고 복음 전도를 할 때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제대로 진행시킬 수가 없다.

물론 그렇다고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것은 아니고 구원 받기에 지장이 있은 것도 아니니 이런 악조건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꾸준히 줄기차게 진행되었고 많은 사람이 구원에 이른 것이다. 왜냐면 구원은 지식 자체에 있지 않고[지식은 교만하게 할 뿐-고전 8:1,2]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모든 뜻에 순종함에 있는 까닭이다[:2]. 따라서 위에 지적한 그런 지식이 전혀 없어도 얼마든지 구원의 사업은 이루어져 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적 양상이 많이 달라진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살후 2:3-12]. 그러므로 'CITHM'을 통하여, 마지막으로 복음 전도의 막중한 사명을 받은 우리 한민족은 이 역사적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고 그 부여된 자랑스러운 과업을 차질 없이 수행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으니 무엇보다 정확하게 복음을 이해하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하나님 사업을 펼쳐 나가야 하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능지수의 민족답게 우리 조상들은 이웃 중국인들로부터 "군자지국[君子之國]"이라 불려져 예의 바른 민족으로 알려졌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남을 존중해 줄 줄을 알았다는 증거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선교하기 위해 한국에 건너온 선교사들조차 그들 스스로가 놀랄 만큼 개인주의 성향보다 '우리' 의식의 문화를 꽃피워 공동체 의식이 강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강렬한 인상을 받고 훗날 고국에 돌아가 기록에 남겨 두고 있을 정도다. 또 장례(葬禮)를 성대히 치르는 나라 민족으로 일찍이 알려졌었다. 지능지수가 높은 민족답게 인생의 죽음에 대해 남다른 예지(叡智)가 있어 죽음 이후에도 반드시 별도의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인간이 동물들과는 완연히 다른데 그 모든 이치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구명하고자 하는 진리에의 갈구 곧 빛을 사모하는 심정, 이 기풍은 흰 옷을 즐겨 입은 데에서도 드러났다 할 것이다.

백색은 광명을 상징하고 어두움을 배제하는 빛을 나타냄이다. 빛을 동경함은 진리에의 강렬한 욕구를 말하는 것이니, 해 돋는 곳을 향하여 끊임없이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온 그 땅 끝이 바로 한반도였음을 감안할 때 우리 민족의 진리 탐구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빛에 비유하여 말씀하셨다[요 8:12]. 어두움은 무지무식(無知無識)과 통하기 때문에 모든 진실과 진리를 알고자 하는 일심에서 빛을 동경하고 밝음을 추구하는 것이 이런 백의민족으로서의 긍지였었다.

그리하여 나라 이름도 조선(朝鮮)이니 곧 아침의 광명이다. 국민적 기질이 그러하므로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오면 불교대로 남달리 왕성했고 유교가 들어오면 유교대로 흥했고 기독교가 들어오면 기독교가 창성했다. 이런 사실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이는 한국인이 종교성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남다른 진리에의 향수 때문이다. 무엇인가 올바른 삶, 진리대로의 삶, 인간다운 삶에의 강렬한 탐색인 것이요 진리에의 갈망이다.

천재는 예외 없이 종교의 문을 한번씩은 두드려본다는 말도 있듯이 지능지수 높은 민족이기에 이런 성향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바벨탑 불상사 이후 인류는 제각기 자기네끼리 통하는 언어를 따라 끼리끼리가 되어버려 동서남북 사방으로 흩어졌다. 노아가 가르치던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은 어느 새인지도 모르게 까마득하게 잊혀져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을 갈망하여 한국인 특유의 기마민족성은 그냥 그대로 동으로만 말을 몰아 내달리게 한 것이다.

이제 이 민족의 선천적 열망을 완전히 채워주는 진리를 성경 말씀을 통해 접하고 있는 오늘이다. 그 옛날 광명을 찾아 동쪽으로 말 달리던 기상(氣像)은 이제는 그 찾은 바 진리를 한 아름 안고서 당시에 왔던 길을 되돌려 서쪽으로 말 달려 그 찾은 진리를 온 세계에다 광포하고 하나님의 선물을 안겨 줄 수 있는 자기 '때'를 만난 것이다. 징기스칸이 세계 정복을 위해 질풍노도처럼 서쪽으로 말을 몰아 유럽대륙을 석권한 후 동쪽으로 다시 돌아 중원에 안주한 것과는 반대로, 우리는 '세계 정복'이 아닌 정신적 영적 자유를 알린는, 진리를 통한 '인간 정복'을 위해 동쪽으로 미친 듯이 말을 몰았다가 이제 애초의 그 색깔 그대로 칼 아닌 복음을 들고 서쪽으로 말머리를 돌리는 찰나에 이르렀다.

같은 몽골계 인종이라도 징기스칸의 몽골은 무력으로 세계 정복을 시도했으나 그 영광이 오늘날은 단지 허울만 남기고 물거품처럼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우리는 무력이 아닌 정신문화적 측면 즉 진리로써의 세계 정복을 위해 그 장도(壯途)를 펼치려는 것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군대로 완전무장하여 세계 정복의 길에 나선 용틀임 중의 하나가 이 '바영사회'[CITHM] 운동으로 표현된다 하겠다.

즉 "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복음운동의 단초가 되게 하셨고 이제 이 말세지 말에 와서는 세계에서 가장 지능지수 높은 그래서 처음부터 진리를 누구보다 남달리 목말라 하던 우리 한(韓) 민족을 통하여 복음 전파의 대임을 맡기시는 것이라 믿어도 좋다. 한국인은 세계 어느 민족에게도 가장 잘 어울리는 선교 활동가로서의 자질을 두루 갖춘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제 한민족은 하나님 나라의 선구자로서 또는 곧 재림하실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전령사(傳令使)로서 맡은 바 임무에 충성할 일이다. 진리를 찾아 동으로, 동으로 외롭게 말을 몰던 그 시대의 선구자는 이제는 서(西)로 서방으로 회귀하여 말 달리는 이 시대 선구자로 부각되는 마지막 몽골 기마 민족의 후예이다. 이 우렁찬 말 발굽 소리가 사라지면 이 세계도 그 피비린내 나는(형 가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아우 아벨을 죽임으로써 첫 페이지를 연 인류사이므로) 죽음의 무대의 종막을 서서히 내리게 될 것이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면 그 때 세상은 끝나게 된다고 말씀하신 그대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으로 그 역사적 소임을 마쳤다. 세계에서 가장 지성적인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은 인간 삶의 진리에 대해 어느 민족보다 목말라 할 것이 틀림없고 그렇다면 그런 민족을 하나님께서 쓰시지 않을 이유는 없다. 과연 이 마지막 때를 위하여 그런 민족을 이 한반도라는 항아리 속에 보관해두신 것이 아니랴. 이제는 동방의 빛을 발해야 할 때이다.

어찌 보면 이스라엘이 나라 잃은 이천 년이라는 장장 세월을 거치고도 다시 불사조처럼 일어나 세계의 이목을 끎으로써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세계에 알리는 몫[신약의 전주(前奏)가 되는 구약의 역사적 의미와 그 진실성을 입증하는 역할]을 지금도 하고 있는 것과 맞먹는다 할 수 있으리라. 때문에 이 한반도는 수없는 외침(外侵)을 받았지만 그 때마다 그 위기를 면하게 해 주셨던 것이다. 그 최대의 전란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1908년 한국 부흥을 일으킨 20명 주한(駐韓) 선교사들의 하루 4시간 이상 4개월에 걸친 정오기도회를 모든 나라에 가서 실시하면 그것은 단기간 내에 그 지역을 복음화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조지 뮬러의 기도 응답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헛슨 테일러의 중국 대륙 선교 방침을 따르면 역시 단기간 내에 해당 지역을 복음화할 수 있는 역시  지름길이 된다. 그리고 국내 전도는 찰즈 피니와 다니엘 네쉬가 그 본이 되어 있는 기도와 복음 전도라는 양면성의 전략으로 철저히 나가면 역시 짧은 기간 내에 복음화가 가능해진다. 세계 각처로 쏟아져 나가 이상 3가지 방안으로 공략하면 틀림없다.

한국인은 동방으로 말 달려 온 기마민족의 후예답게 이 좁은 땅 덩이 위에 서로 상대의 상투나 쥐고 흔들며 객기를 부릴 일이 아니다. 해외로 나아가 미지의 땅을 개척할 의기와 용기가 넘쳐 흐르는 호기를 부려야 마땅한 자질들이다. 나라의 절반이라도 빠져 나가 국외에서 강토를 넓힐 일이다. 그렇다고 남의 땅을 침략하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본시부터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으로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소리를 듣고 역사를 엮어 온 긍지 넘치는 민족이다. 마땅히 사람 사는 도리를 가지고 세계 공략에 나설 일이다. 일찍이 김구 선생이, "우리는 마땅히 문화로써 세계를 정복해야 한다"고 갈파한 사실을 잊었는가. 

'이순신 정신'

임란 당시 한반도가 일본의 수중에 넘어 갔더라면 일본에 흡수되어 고유의 한민족의 모습은 찾기도 어려웠을 것이라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당시 일본은 풍신수길의 전국 통일에 힘입어 한창 그 침략의 야욕이 어느 때보다 팽배해 있던 때다. 한반도를 석권했더라면 그 충천한 사기와 더불어 한반도란 거대한 보급기지를 수중에 넣은 여력으로 반드시 중원 천지, 그 쇠퇴해가는 명나라에까지 영토를 확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잘하면 중국 본토의 일부 아니면 만주 땅 정도는 관할하는 거대한 일본 제국이 형성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을 것이라 가정한다면 한민족은 더더욱 그 자취마저 찾기 어렵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공(李公) 순신(舜臣) 단 한 사람의 멸사(滅私) 봉공(奉公) 정신이 2회에 걸쳐 그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한반도만 아니라 중국대륙까지 일본의 야수적인 침략행위로부터 구출한 것이다.

이공 단 한 사람이라 함은, 당시 싸움에서 일본 전략의 핵심은 서해를 끼고 돌아 한반도 포위는 물론 중국의 산동반도까지 넘보려는 이 남해 해전(海戰)에 있었던 반면, 해전에서의 인물이라고는 이공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공으로써 충분했다. 한산도 대해전, 그리고 '나'원균의 시기와 조정의 무능 탓으로 이공을 비명횡사시킬 뻔한 그런 바람 앞의 촛불 같은 백척간두의 나라 운명에서도 다시 왜군을 대파한 명량 대해전, 이로써 이 역사적 운명의 기로는 정해지고 모든 일은 제대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조총이라는 당시 최신예의 무기 앞에서는 누구도 감히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런 무기를 일본은 미리 전쟁을 준비하면서 다량으로 생산해 놓았었다. 그럼에도 일본의 이런 신예무기의 막강한 위력이 한반도 점령이나 중국 대륙 공략과 같은 그 애초부터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은 오로지 이공의 해로(海路) 차단으로 인해 보급로가 여의치 못했던 것이 그 유일한 원인이다. 한반도를 석권함으로써 튼튼한 보급기지를 확보한 다음이면 중국 대륙 유린은 오직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한민족을 이 마지막 복음 전파의 때를 위하여 남겨두신 것일까. 여기서 이공과 '나'원균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역사적 진실들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바 죄와 의의 본질을 우리에게 살아 있는 역사적 교훈으로 나타내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죄는 다름 아닌 자기중심이요 죄와 대칭되는 의(義, 올바른 것)는 ‘우리’ 의식 곧 공동체 의식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의식은 간단히 말해 머리와 몸의 관계로 하나되어 있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의의 생활을 함으로써 모든 인류가 다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한 머리로서 모시는 행복한 한 몸으로서의 가족 단위로 행복하고 원만한 삶을 누리고자 함에 있기 때문이다. 이공(李公)이 그 생애 끝까지 지킨 인간 삶의 순결성은, 그 핵심이 왕[잘 났든 못났든]을 중심으로 하여 구성된 국민 전체의 한 몸 의식 곧 공동체적 삶의 정신에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 무공(武功)으로 거둔 국민적 인기를 기반으로 야심을 채우려던 이성계와는 달랐다. 국가 정치를 쇄신하려는 그 어떤 포부도 없었다. 오직 '한 몸' 구조에서 한 지체(肢體)의 역할에 충실하기만을 염원했던 것이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이어지는 그의 시에서도 보듯이 그는 평범한 시인, 평화주의자로 남기를 바랐었다. 그래서 전란(戰亂)의 칼을 거두어 씻은 다음에는 농촌의 한 범부(凡夫)로 돌아가 농사나 지으며 지내면 족하다고 그의 다른 시에서 피력해 놓았을 정도다.

오직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서 자기 임무에 충실히 하겠다는 바로 그 정신이 그런 구국의 위대한 공을 이루어 내게 되는 기틀이 되었고 그 산 증거를 이공(李公)은 제공해 준 것이다. 반대로 '나'원균의 행동은 사사로운 개인적 욕심[이공과 같은 유달리 철저한 공동체 의식이 없는 한 우리 모두가 그러한] 곧 자기 중심이 어느 정도로 인간 삶을 황폐화시키고 파멸로 몰아넣는지를 입증해 주는 구체적인 사례가 되어 주어, 우리는 이 대조적인 두 생애로 말미암아 막중한 인생 교훈을 얻는 것이다.

이공과 같이 그렇게 철저한 공익 정신으로 무장하지 않는 한 우리 모든 평범한 인생들이 누구나 똑같은 범주에 속할 수밖에 없음을 너무나 잘 알기에, 우리는 이 경우 원균을 지칭할 때 '나'원균이라 부르는 것이다. 내가 곧 원균이고 우리 모두가 원균이라는 뜻이다. 내가 당시 원균의 자리에 있었다면 나 역시 똑같이 그렇게 행동했으리라는 판단에서 타산지석(他山之石, 자기의 구슬을 가는 데에는 다른 산의 나쁜 돌도 소용이 되는 것처럼 타인의 하찮은 언행도 자기 지덕(知德)을 연마함에 도움이 된다는 데에서)으로 삼고자 함에서다.

원균은 평범한 보통 사람이지 특별히 악한 것이 아니다. 즉 자기를 위해 사는 인생이니 여기서 우리 모두가 예외일 수 없다. 자기중심이 죄이니 이 자기중심의 엄청난 파괴력을 이 임진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데에만 오직 의미가 있다. 인생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을 하지 않는 한 모두가 똑같은 수준의 죄 가운데 있는 바 그 죄의 역사적 증거를 우리는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 역사적 교훈의 가치는 이 두 상반된 상황이 끝까지 서로 맞물려 전개되는 데에 있다. 즉 '나'원균이 들어 망쳐놓은 나라 운명을 이공이 들어 가까스로 구제해 놓으면, 또다시 '나'원균이 들어 그 모든 것을 도로무공으로 돌려 버리고 그것을 다시 이공이 들어 위기일발의 순간에 그 동일한 공공(公共)정신으로 진력(盡力)하여 국가 운명을 망국의 순간에서 때 맞춰 극적으로 되돌려놓은 것이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정신이 이와 같이 대조되어 그리고 그 상칭적(相稱的) 결과로써 명백히 역사상 수(繡)놓아진 사례가 절대로 흔하지 않다. 전무후무한 것으로 단정해도 좋다. 이런 핵심되는 이면(裏面)의 내용에 눈을 돌리지 못하는 이들은 명나라 원군(援軍) 덕에 한반도가 살아났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이공(李公) 덕에 명나라가 명줄을 잇고 원군이라 하여 거들먹거리고 들어와서는 일본군보다 더한 만행을 저질렀다. 역사 기록에, 명군으로 인한 폐해가 일본군보다 더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관군이 행주성 싸움에서 겨우 위신을 세우고 진주성의 김시민이 충절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2차대전 당시 파죽지세로 몰려든 독일군 앞에 초토화되어 있던 유럽이 독일군도 깨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과 같이, 이공으로 인하여 ‘우리도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공이 아니었다면 명나라는 한반도를 보급기지로 삼은 일본군의 조총의 위력 앞에 맥도 못추고 제물에 붕괴되었으리라 관측하는 것이 정확한 관점일 것이다.

이공의 공동체 의식을 폄훼하여 이공이 '나'원균과 전공을 다투었다는 허황된 말을 퍼뜨리는 일들이 있기에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만일 이공에게 그런 자기 중심의 야심이 있었다면 그 스스로 전쟁의 종결과 더불어 자기도 함께 역사의 무대로 사라지기로 작정하고 초겨울 매서운 바닷바람에도 불구하고 갑옷을 벗고 노량해전[1598. 12.16(음 11. 19)]에서 진두 지휘에 임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드시 살아남아 이성계처럼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의 무능한 조정을 둘러엎고 자기가 왕권을 움켜쥐는 꿈을 실현시켰을 것이다. 이미 이공은 남도(南道) 백성들로부터 "해상왕(海上王)"이라는 칭호를 얻고 있었다. 그러했다면 이공을 막아 설 세력은 누구였을까. 명나라일까. 혹은 도원수 권율일까. 이공이 왕권 탈취의 야심만 있었다면 성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명나라의 당시 상황도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을 것이요 또한 이공의 인기가 백성 중에 워낙 드세고 당시 조정도 민심을 잃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율도 역부족에다 불가항력임을 느꼈을 것이다.

좌우지간 성공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이공의 독무대가 되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당시 선조와 조정이 명령불복 죄로 이공을 잡아다 여차하면 제거시켜도 무방하다는 무모한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이성계의 재판(再版)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초조함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고 보아야 옳다. 때가 때이고 자신의 우유부단함도 함께 작용하여, 유성룡을 비롯해 모두가 꼬리를 감추는 마당에서도 정탁 한 사람의 정정당당한 주장[국가 존망이 걸린 위급한 때 장수 하나라도 없애면 안된다는]에 밀려 이공을 풀어 주었을 따름이다.

이공은 시종일관 공동체 의식에 철저하여 자기 소임을 다하는 데에만 열중하였고 때문에 한 국가 공동체에서 머리가 되어 있는 왕이 무능하건 유능하건 오지 충성을 다한다는 담담한 심정이었기에, 서울로 압송되어 생사를 가닥 잡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 누군가 "뇌물만 쓰면 풀려 난다"는 말로 귀띔을 해 주어도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것이다" 하고 한마디로 잘라 말하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는 임금의 제삿날이 이르면 반드시 북향 재배하여 예를 갖추는 일을 한번도 빠뜨리지 않았음과 직결되는 그의 정정당당한 평소의 멸사 봉공의 자세와 제대로 맞물리는 것이다. 공동체 의식에서 공명정대 공정공평함의 법질서 준수가 요체임을 알아 비록 자기 신상에 결코 이롭지 못할 줄을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여기 개의치 않고 상관의 부당한 청탁에도 일언지하에 굴복하지 않은 의연함과도 맞먹는다.

이 마지막 때 복음을 전할 사명을 지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이 이공과 '나'원균으로 대조되어 극명하게 나타난 역사적 교훈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의와 죄의 개념, 불의와 정의로 각기 야기되는 대조적인 대가(代價)의 두드러진 특성 등을 아주 구체적인 사례의 설명으로 현실적으로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사람 주인공의 그런 올바른 신념에 따라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한 국가 아니 전체 인류를 상대하는 데에까지 파급되는 것으로서 얼마나 지대한 것이고 결정적이 되는 것인지를 보여 주는 증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비록 '한 개인'일지라도 그가 발휘하는 '공동체 의식'의 막중한 가치와 그 위력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골자가 바로 이 공동체 의식의 삶에 있으니, 죄와 악, 불법과 불의를 미워하는 까닭이 죄의 뿌리가 자기중심[이기주의, 개인주의 즉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를 위하는-고후 5:15]에 있어 이를 척결함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즉 머리로 하는 한 몸된 삶의 기본 바탕이, 곧 자기 부인인 것이요 오직 이것만이 유일하게 사는 길임이다.

각자는 오직 자기 역할 즉 눈이면 눈, 귀는 귀, 손이면 손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함으로써 전체에 이바지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종국적으로는 자기 자신도 그야말로 한정 없이 위해지며 결과론적으로 볼 때는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보다 무한대로 더 나아, 확장, 확대된 자아를 실현시킬 수 있는 지혜임이다. 이공은 이러한 철저한 공동체 의식 아래 그 생애의 그늘 진 곳과 양달 진 곳을 양면 다 맛본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철저한 공공(公共) 의식은 평소에는 그로 하여금 그늘 아래에서만 맴돌게 하는 요인이 되었으니 그의 이런 신념에 충실한 삶은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세파에 용납이 되지 않아 항상 따돌림을 당했기 때문이다. 오직 그런 삶이 빛을 본 것은 평화의 때가 아니라 모두가 몸을 사리는 미증유의 전란 때 즉 비상 시국이었음에 주목할 일이다. 올바른 신념의 생활인의 역할이 여기에 빛을 발하게 됨이다.

다시 말해 음덕으로 일관하므로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특성이 있으나 일조 유사시에 제 색깔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전란이 임하자 자기중심으로 날뛰던 소인배들이 모두 몸을 움츠리고[왜냐면 승산이 없는 전쟁 때였으므로, 만일 승산이 확실한 것이었다면 자기중심으로 살던 무리일수록 더 기고만장했을 터] 어찌할 바를 몰라 갈팡질팡 하던 무대에서 홀로 이공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그 삶의 특성으로 해서 자연스럽게 두각을 나타내어 우뚝 서기에 이른 것이다.

이공만이 당시 그런 정신의 소유자였던 말은 아니다. 오직 그 대표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공동체 의식에서 거둔 시말(始末) 또는 시종(始終)을 괄목할 만하게 뚜렷한 경계를 나타내어 유례없이 명백하게 보여 주는 유일한 것이 이공의 생애라는 데에 의의가 있다. 예를 들어, 이공의 휘하에서 함께 싸우다가 부산 몰운대 해역에서 전사한 조운(趙雲) 장군 역시 그런 법과 질서를 따르고 사익을 추구하지 않는 인물임을 역사는 평가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공의 처음 출전(出戰)이, 강력하게 참전(參戰)의 당위성을 조운 장군이 역설함에 기인함이라 하여 마치 이공의 우유부단함을 조운 장군이 힐책한 듯이 하고 있으나, 이공의 평소의 과단성과 충의지심(忠義之心)을 보아 그런 판단은 경솔한 편협된 시각이고 단지 최고 지휘관으로서 그 상황 판단에[조운과 같은 하급 지휘관으로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신중을 기했다고 봄이 옳은 것이며, 조운은 그 부하로서 나름대로의 열혈남아(熱血男兒)다운 기개를 강력히 피력했다고 해야 제대로 된 평가일 것이다.

이공(李公)의 그와 같은 전과(戰果)와 공(功)은 평소 그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정도(正道)대로 살아간 그 강직함에 기인하는 것이다. 평시에는 그런 기질과 신념이 "자신의 장래를 망치고 평생을 불우하게 만드는 융통성 없는 외고집"으로 세인들로부터 멸시를 당하지만, 전시(戰時)와 같은 비상 시국에서는 구국의 전공(戰功)으로 나타남이니, 이렇게 올바름이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고 세상에서 경원시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의미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배우자, 이순신 정신!", "따르자, 이순신 정신!", "키우자, 이순신 정신!" 하며 이 나라 공무원들이 아침마다 일어서서 오른손을 높이 들어 만세삼창하듯이 하면 어떨까. 부정부패가 극도에 달한 공무 정신을 이나마도 조금씩 선양할 수 있지 않을까. 공무원만 아니라 기업체에서든 어디서든 당찬 한국인의 얼을 널리 고양한다는 의미에서도 좋지 않으랴.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 공동체 의식이라는 자기 부인의 규율이 있게 마련이다.

민주 사회는 규율 사회다. 단지 강제가 아니라 자진자발적인 규율 즉 절제로써 스스로를 규제한다는 뜻인데 이런 양면성이 없이는 민주 사회라는 것은 동전의 일면만 유지되어 파행만을 일삼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자기 단련을 목적하는 집단적인 행동이 반(半) 강제로나마 실시되어야 옳다. '이순신 정신'이 나타내는 덕목이라 하면, 자주 독립 정신에서 오는 불굴의 패기, 주인 의식에서 오는 창의성, 부하들과 똑같은 급식(給食)으로 만족해한 친화 단결력 등, 그의 생애만 잠시 훑어도 너무나 다양하다.

이공은 평생에 뇌물을 쓰지 않았다. 쓰지 않는 사람이 받을 리도 없다. 사익(私益)을 멀리 하고 공익(公益)을 추구했으므로 동료들간의 괴리감도 없었고 항상 공명정대 공정공평했다. 원리원칙주의로 나간다고 하여 융통성이 없다는 핀잔을 받았지만 바로 그 정신이 있었기에 나라를 홀로 건지지 않았던가. 지연(地緣), 학연(學緣), 혈연(血緣) 등 연줄에 기대는 것을 미워하고 오직 자기 실력대로 제 자리에 들어서는 것을 생활 신조로 삼았다.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인간의 모든 고난과 직결되어 있어, 올바르게 사는 것을 가르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자기중심으로 뭉쳐진 이 세상에서 멸시의 대상이 되는 것과 같이, 무릇 이 세상에서 옳게 살고자 하는 자는 예외 없이 환영을 받지 못하고 고난의 그늘에서 생애를 마쳐야 함을 보여 주는 좋은 실례가 바로 이공의 전쟁 전의 불우한 위치였기에 더욱 주목거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공의 당시 그런 전과와 국가 수호의 엄청난 결과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세상의 자기중심의 특성에 굴하지 않고 홀로 지켜 나간 인간 삶의 기본 법질서의 정신으로써 얻어진 열매였기에 그러하다. 세상이 종료되고 전혀 다른 새로운 무대가 펼쳐질 때의 그 신천신지(新天新地)가 바로 이런 정의의 세상이요, 바로 그런 정신의 소유자만이 그 새로운 세계가 도래(到來)할 때 그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공과 '나'원균으로 대조되는 이 역사적 사례는 인간 생활에 나타나는 인간 삶의 기본 법칙을 실증(實證)하는 것이요 그 가장 구체적인 증거이기는 하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러내어진 영원한 삶의 원리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명암(明暗)에는 견줄 수 없다. 즉 공동체 의식으로 산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인생 구원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성경에 말하는 죄와 의가 무엇인지 그 개략적인 결과를 그 의미와 함께 나타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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