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HOME

3운법칙

  • 3운법칙 계시판

Home > 3운법칙 > 3운법칙 게시판

제목 (16) 법과 질서 등록일 2016.02.24 14:31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99

집 교회 운동-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CITHM'의 기본 잣대-법과 질서
-------------------------------------------------------------------------------------------------------

법과 질서

하나님께서 만유를 창조하실 때 당신께서 친히 그 머리가 되어 계시는 한 몸의 체제로 모든 피조물[자유 의지를 행사하고 인격성을 지닌]을 지으시고, 따라서 이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나타내어 주는 그대로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공동체 의식의 자기 부인으로 살도록 하려 하심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이다. 비록 이 세상이 죽은 자가 된 인생들의 '죄와 죽음의 세계'이기는 하지만 하나님 지으신 세계이므로, 누구든 공동체 의식으로 살고자 할 때 그 나타나는 결과가 이렇듯이 위대함을 입증하고 있는 흔치 않는 역사적 사례이기에 우리는 이공 순신의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널리 선양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인간 삶이라 해서 영원한 삶의 기본 법칙과 절대로 다를 수 없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모두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본 법칙에 따라 비록 임시적이나마 이 세상에서의 인간 삶도 운영되기 때문이다. '몸과 머리' 관계로서 한 몸을 이루어 사는 삶의 핵심이 공동체 의식이라는 그 내용은 동일하나, 성경에서 말하는 자기 부인은 이 생명의 영원한 법칙에서 그 실체가 되는 반면, 세상에서 인식하고 있는 공동체 의식은 그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나타내는 바 자기중심[성경적 표현으로서의 죄와 악]의 결말과 그 대립 개념이 되는 의로움[여기서는 철저한 공동체 의식]의 그 풍성한 결실이 너무나 대조적인 것으로 나타난 보기 드문 역사적 현실임을 확인하게 된다. 다시 말해 성경에서 말하는 죄와 악은 '나'원균과 같은 결말을 맺는 자기중심을 말하는 것이요, 성경에서 가르치는 의를 행함과 선을 행함[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은 이공 순신의 철저한 공동체 의식에서 나오는 그런 위대한 공적을 가리킴인 것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사람 삶의 기본 도리는 법[law]과 질서[order]를 지킴에 있다. 인간 사회의 안정된 삶이 보장되는 것도 법과 질서를 중시하는 공동체 의식이다. 여기서는 이기주의, 개인주의는 일절 배격된다. 그러므로 이런 기초 지식쯤이야 초등학교 학생이라고 알 만한 것이다. 인간 사회의 모든 문제는 이런 상식 수준의 법 준수를 외면하고 항상 거기서 벗어나보려고 부질없는 몸부림을 하는 데에 있다.

이기주의 즉 자기중심이 그 뿌리다. 이것을 성경은 죄, 악, 불법, 불의라 하는 것이다. 기본되는 삶의 법질서는 한 몸된 가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성경은 의(義, 올바름)라 하고, 선(善, 좋은 것)을 행함이 바로 이 의의 실천인 것이다. 하나님을 머리고 모시고 모든 피조물[자유 의지를 구사하는 인격성 피조물]이 그 한 몸 체제에서 지체 역학을 하는 것이므로 이렇게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것을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것이다.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시는 줄 알고 그 증거가 그리스도의 나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확증되어 있는 까닭에 나는 절대로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직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아"[:15] 그 지시를 따라 함께 한 몸의 지체가 되어 있는 내 이웃[믿음의 형제]을 위함이다. 그렇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이기주의요 자기중심이다. 우리를 위함이 없으니 개인주의다.

이런 것 모두 세상에서도 타기하는 것이고 증오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이 그런 태도를 취할 때에는 인식이 달라진다. 미화(美化)할 정도는 아니지만 변명하기에 급급하다. 그래서 이러한 자기중심의 인간 심성을 가리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눈에 있는 들보[a crossbeam, a girder]는 말하지 않고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은 잘 지적한다"는 말씀으로 책망을 하신 것이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이것이 법과 질서이다. 이렇게 서로를 위할 때는 자기 자신을 절대로 위하지 않는 것이니 이 곧 자기 부인이고 이것이 법과 질서를 지키는 요체요 핵심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절대로 자기를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누누이 강조하신 것이 이 때문이다. 즉 구원 받음이 불가능한 것이다. 자기 부인이 없이 구원받는 것을 꿈꾸는 모든 것이 안개 잡는 것이요 바람 잡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 이 자기 부인은 동의어다. 그렇게 명백하게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 자기 부인을 구원으로부터 분리시켜 인생들을 속이는 데에 성공한 것이 오늘날의 만연된 "배도(背道)"[살후 2:2] 현상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요점이 되는 자기 부인을 쏙 빼 버렸으니 알갱이 없는 빈 쭉정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 부인 없이 자기중심 일색으로 나가면 그 결말은 '나'원균의 행각에서 보듯이 파멸밖에 없다.

모든 인생들이 일반적으로 예외없이 자기중심이라는 말은 '나'원균이라는 뜻이다. 오직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공도 물론 성경적 관점에서는 자기중심이다. 왜냐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당시는 그리스도가 전파되지 않은 때다. 이렇게 전파함을 받지 못한 경우에는 죽은 후에 그 기회가 있음을 베드로는 설명하고 있다[벧전 3:19].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아 모든 인생들과 같이 자기중심의 인간이지마는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이러한 법과 질서를 지켜 철저히 공동체 의식으로 나갔을 때 거두는 결과가 이와 같이 현저하고 그 결과가 엄청난 것이니, 하물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부인이 되어 정식으로 공동체 의식으로 살아가는 천국에서의 삶이야 가히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또한 우리 모두와 같이[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한] 평범한 보통 사람으로서의 자기중심으로 나간 '나'원균으로 인한 폐해가 그토록 전국을 망치게 하고 당시의 중국 대륙까지도 파탄으로 몰아 갈 뻔한 상태였음이 드러났으니 하물며 성경대로의 죄와 악의 실상이야 얼마나 더하랴.

그런 파국으로 치달아 가는 상황을 이공의 철저한 공동체 의식이 들어 막아내고 미연에 방지했으니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함이 얼마나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효과를 내는 것인지 이로써도 충분히 입증이 되기에, 우리는 임진란을 그 배경과 무대로 하여 전개된 이 상반된 대조적인 배역(配役, casting)의 의미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다. 이공처럼 굳은 의지로 신념 따라 철두철미하게 공동체 의식으로 살면 이 인간 사회는 그나마도 한층 더 밝아질 것이요, 그렇지 않고 자기중심의 평범한 삶으로 일관할 때 조만간의 파국은 필연인 것이다.

'나'원균의 자기중심으로 일관된 평범한 삶의 태도는 승전(勝戰) 가능성이 없는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낫다는 그 판단에 있다. 최소한 50 대 50 정도의 승산(勝算) 확률이라도 있어야 싸울 맛이 있다고 평소 그런 생활자세로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런 가능성이 있을 때는 남다른 용맹을 발휘하여 그것이 인정됨으로써 당시 국방의 중책을 일부 맡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숱한 전선(戰船)도 바다 속에다 버려두고 군대는 뿔뿔이 제 갈 데로 가도록 흩어 치우고 그 자신과 심복 부하 몇이나 건사해 줄 전선에 의지하여 육지로 올라가고자 한 것이다.

그도 일개 장수인지라 뒤쫓아오는 왜적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모든 배를 바다 속에다 수장(水葬)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자침(自沈)이다. 그리고 이공 관할의 전라 좌수영에다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싸울 의도가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부하 장수들의 강력한 건의로 육지로 오르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도주하던 뱃머리를 돌려 전라 좌수영 수군에 합류한 뒤에는 싸울 생각은 없이 전라좌수영 군의 전과로 바다에 어지러이 늘려져 있는 적의 시체의 머리(首級) 베기에 바빠 이를 근거로 하여 자기의 전공, 전과인 양 속여 조정에 보고 올리기에만 혈안이었다.

이공 휘하 수군의 혁혁한 전승 앞에서 '나'원균은 자기가 침몰시킨 그 많은 전선들이 이제는 아까워 죽을 지경이었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고 도리 없이 그런 짓거리에나 눈에 불을 켜고 덤빈 것이다. 이기주의의 생활 자세는 항상 이렇게 자기중심의 외곬으로만 흐를 뿐이지 방향 전환은 불가능이다. 이공의 수군을 힘입어 싸울 마음이라도 있었다면 처음부터 그 많은 자기의 병력을 자기 손으로 '묵사발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자기 병력을 그렇게 '묵사발로 만들었다가' 나중에는 이공 대신 3도수군통제사를 차지한 뒤에는 이공이 힘써 가꾸어놓은 이공의 수족 같은 전라 좌수영 수군의 병력마저 '묵사발로 만든다'. 이것이 자기중심 곧 이기주의, 개인주의의 변함없는 결과물이다. 자신의 파괴는 물론 남까지 해를 입히는 것이다.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에덴낙원에서 아담 부부를 죽음에 몰아넣은 것, 인간 세상 처음으로 막을 올리자마자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 등이 그 증거다.

'나'원균이 3도수군통제사로 오른 뒤 전비 증강이나 군대 조련에는 뜻이 없이 최고직에 올랐다는 만족감에 스스로 도취되어 흥에 겨워 나날을 보내는 꼴을 보고 전라우수영 절도사는 "나의 마지막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홀로 탄식했을 정도였다. 이제는 왜적과 대등한 정도가 아니라 그동안 이공으로 인하여 절대적인 우세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만 만족하고 거기 안주하고 있는 터이므로 굳이 힘들이고 공들일 필요가 무엇이냐 하는 안일한 생각에만 사로잡힌 것이다. 자기중심 즉 자기를 위함은 매양 이러하다.

항상 상대적이다. 비교적 우위, 비교적 열세에 항상 민감하다. 남보다 앞서고 위에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더 이상 수고하고 노력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법이다. 공산주의가 국민을 나태에 빠뜨리고 생산성을 현저히 저하시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기중심이므로 남들과 비교해서 그리 열등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이상 구태여 힘들이고 공들일 필요를 느끼지 못함이다. 본질에서 벗어난 형식상의 빈 껍데기뿐인 잘못된 공동체 구조의 결과다.

공동체 의식이 있어야지 자기중심에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진정한 공동체 의식에서는 주인 의식이 요체다. 즉 전체에 이바지하겠다는 결의 아래 자기의 할 역할을 최선을 다하여 하는 데에 있음이다. 자기를 위하지 않고 전체를 위한다는 자발성에서 비롯되므로 그 적극성이 도화선이 되어 한계를 의식 못하고 무한정으로 자기 노력을 경주하여 최선, 최고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산주의가 이상이 아무리 좋아도 자기중심으로 있는 한 다람쥐 쳇바퀴 돌기다. 이상주의에 그칠 뿐이다.

이러한 공동체 의식의 주인 의식으로서의 적극성, 능동성은 이공의 거북선 건조에서 입증된다. 나라에서 시킨 일도 아니고 지원커녕 성원(聲援)도 해 주지 않았다. 당시 국방의 유력자인 신립은 무모한 짓이라고 비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공은 그런 주인 의식에서 신념을 따라 움직였기에 그런 반대 의견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이를 진행시켜 3척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거북선이 한산도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적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놓은 것이다.

올바른 공동체 의식은 자기 역할에 충성하고 충실함에서 드러난다. 승산이 없다고 해서 '나'원균처럼 일찌감치 전의(戰意)를 상실하고 목숨이나 부지하겠다는 궁색한 처신을 하지 않았다. 이기고 지는 것은 하늘에 있고 자기로서는 끝까지 자기의 임무 수행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일념에서 이공은 적을 막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명량 해전을 승리로 이끈 것이다. 이로써 왜적의 야욕은 사실상 완전히 분쇄된 것이다.

이 명량 해전 역시 이공 스스로 그 주인 의식에서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다. 당시는 백의종군하던 때여서 "나를 내치고 원균을 앉히더니 저런 꼴이 되었으니 이젠 알 만하더냐" 하고 보통 사람 같으면 팔짱만 끼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공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주인 의식은 우리 수군 전멸의 비보를 받고 그냥 좌시할 수 없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문초를 당하는 주에 입은 몸의 상처도 아물지 못한 채 그냥 말을 몰아 비극의 현장으로 달려가 상황 점검부터 한 것이다.

그렇게 달려가는 도중에 3도수군통제사로 다시 복직되었으나 군사 없는 장수에게 감투만 씌어 주면 무엇을 하겠는가. 조정은 우리 수군의 전멸 앞에서 안절부절 끝에 바다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 와 싸우라고 명령을 다시 바꾸어 내렸다. 그러나 이공은 적의 해상 침투로 차단의 막중한 의미를 들어 설명하면서 조정을 설득시켰다. 배도 군사도 없는 처지에서 승리할 자신이 있어 그런 자세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하겠기에 그렇게 자청한 것이다.

이공이 자기 일신상의 편안함만 추구하여 자발적으로 이런 주인 의식으로 마음을 다지지 않고 대 찬 기개로 나아가지 않았다면 한산도 대첩에서 왜적의 대륙 침공의 야욕을 꺾은 것도 허사로 돌아가고 한반도의 운명은 결국 완전히 왜적의 수중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세 번째로 이공의 공동체 의식은 일절 개인적인 사사로운 야망이 없었다는 데에서 또한 두드러진다. 전쟁만 끝나면 향리로 돌아가 농사나 짓다가 여생을 마치리라 결심하고 있었던 소박한 심경이 그의 시구(詩句)에서도 완연하게 드러난다.

보통 사람의 욕심처럼 전쟁 동안의 국민적 덕망과 인기를 업고 인심을 잃은 왕과 조정을 둘러 엎어 새 세상을 만들겠다는 욕심은 추호도 없었다. 무장(武將) 이성계가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얻은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안고 새 왕조를 연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주 이씨 대신으로 덕수 이씨 왕조를 세워도 되는 일이었건만 그는 그런 이기주의, 개인주의가 없었다. 때문에 전쟁이 끝나면 필연코 그를 시기하는 왕과 조정의 간신배들에 의해 그 신상이 결코 이롭지 못하리라는 정확한 판단으로, 최후의 전투 종식과 더불어 그 자신도 함께 사라져 버리기를 진정 희구하여 처음부터 갑옷을 입지 않고 진두 지휘에 나선 것이다.

한 조직체 내에는 반드시 머리가 있어 대표성을 띤다. 머리를 중심으로 모든 구성원이 한 사람 같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만물을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의 역할로서 움직이도록 정하신 이치 그대로다. 하나님 친히 그들 모두의 머리 역할을 자임하시어 그렇게 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삶은 이 이치를 따르지 않고는 숫제 영위될 수가 없다. 한 가정이 한 머리와 한 몸으로 구성되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래서 이공은 임금의 제삿날이 닥치면 하루도 한번도 빠지지 않고 그 날을 기억해 두었다가 그 쪽 하늘을 향하여 예를 표했다. 군주야 잘났든 못났든 모든 백성의 어버이 역할인 것이다. 고로 그 어떤 야심을 품어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임금은 머리를 상징하는 것이니 머리와 몸으로서의 관계가 인간 삶의 정상적인 틀이요 그 모습인 것이다. 머리는 곧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모든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벧전 2:17] 했다.

그가 전쟁 전에 일개 현감[원님 노릇]에 지나지 않는 등 출세 길이 험난했던 것은 이미 밝힌 대로 원리원칙에 입각한 대쪽 같은 신념에 찬 삶이었기에 주변의 미움과 방해가 그를 응달 진 곳으로만 돌게 만들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승진하다가도 중도에 좌천당하고 그래서 허구한 날 밑돌기만 하다가 심상치 않게 일본과의 전운(戰雲)이 감돌기 시작함을 눈치 챈 조정이 황급하게 전국적으로 인재를 찾는 과정에서 특별 발탁된 것이다.

물론 어릴 때부터의 죽마고우인 유성룡의 천거를 받아 된 것이지만 이미 오래 전에도 이공을 벼슬길에 올려 주려고 했지만[이공과 먼 친척뻘인 율곡 이이가 이조판서에 있을 때 이이가 직접 이공을 만냐보려 했을 때 유성룡이 그 중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제 실력으로 출세하는 법이지 남의 덕을 보려는 것은 마땅치 않다" 하여 이를 사절했기 때문에 유성룡도 별나고 고집 불통이고 괴짜 정도로 취급해 버려 내 몰라라 했던 것이다.

35세 늦깎이로 무과 고시에 급제한 후에도 이공의 인물됨을 알아본 당시의 병조판서가 자기의 서출(庶出) 딸을 그 후실(後室)로 들여 주고자 했을 때도 이를 사절한 것은 오늘날로 치면 지연, 학연 등 인맥을 따라 벼락 출세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가 아니라 하여 배격하였던 것은 원리원칙을 따라 공명정대하게 집행되는 사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평소의 지론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공동체 의식은 한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을 앞세우지 않는 것이니 이기주의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배격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공의 네 번째 공동체 의식의 특징이 되어 있다.

때문에 상사의 부당한 인사 청탁도 단호히 거절했고 거문고를 만드는데 쓰겠다면서 관사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 달라는 상급 지휘관의 요구도 공공 물건을 사사로운 목적으로 함부로 손대서는 안된다고 하여 당당히 거절한 것은 이공의 투철한 공동체 의식에서나 구현될 수 있는 덕목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이공은 그와 같이 가는 곳마다 이 때 앙심을 품은 전직 상관들에 의해 방해를 받은 것이다. "그렇게 혼자 잘 났다고 큰 소리 치더니 어디 두고 보자꾸나" 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됨은 어릴 적부터였으니, 같이 놀던 유성룡이가 자기 집 담 너머로 뻗어 있는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린 것을 보고 따 먹자고 제의했을 때 어린 이공은, "마땅히 어른에게 말씀 드린 후에 따먹어도 늦지 않다"는 말을 하여 함부로 손대는 것을 말렸다는 것으로서, 이 일이  유성룡의 기억에 오래 남아 있어 후에 세상에 알리게 된 일화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정신이, 나중 국가적 존폐가 달려 있는 절제절명의 위기에서 홀로 이다시피 하여 나라를 건져낸 원동력이 된 것이다.

성경이 바로 이와 같은 올바른 삶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 사사로운 욕심을 내는 정도가 아닌 숫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니 곧 철저한 자기 부인을 강조한다.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 친히 각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하셨다. 그리스도 친히 나의 새 창조의 영혼이 되시고 마지막 아담이 되어 계시고 그래서 나의 머리가 되어 계심이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구원되지 못한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며 영생할 수 없다. 천국은 당연히 선을 행하는 자의 것이다. 이 사실을 바울 사도는 강조한 것이다[롬 2:7-10].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선을 행하려는 마음은 내게 있으나 도리어 죄를 행한 것이다[7:19-21]. 선을 행함이 없어서도 죽은 자이다[:24].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나를 포로로 하여 사로잡았던 "죄의 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음을 인하여 파괴, 와해되어 버린 것이다[6:6].

그런즉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으므로"[롬 8:1] 이제는 오히려 얼마든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킴"[고전 9:27]으로 인하여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게[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된 것이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요일 2:1/3:6-10/5:18/고전 15:33,34/벧전 4:1/히 2:14,15] 뜻이니,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때문이다.

죄는 욕심에서 나는 것인데[약 1:15]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므로 나를 위해 살아야 욕심이 일어나는 법이므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단죄함이 없는"[롬 8:1] 것이다. 죄를 짓지 않는데 누가 나를 죄 있다 하고 죄로 정하겠는가.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데[고후 5:15], 누가 나를 가리켜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있다"고 말하겠는가. 나 자신을 살지 않으니 누가 나를 가리켜 "자신을 부인함이 없다"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머리되시는 주님의 지시를 따라 그 계명을 지키고 그 뜻을 행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등 일체의 일을 하니 선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 악을 지을 수가 없다. 바로 이 사실을 가리켜 "죄의 몸이 멸해졌다"[롬 6:6] 하는 것이며 또 이를 가리켜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요일 3:8]이라 한 것이다. 즉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완벽한, 원래의 '삶의 법과 질서'로 우리는 환원된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죄와 죽음 가운데 있으니 자기중심 일변도라 이기주의로 대개 일관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그렇다. 다 자기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고후 5:15] 그렇지 않은 이가 없다. 말이야 이기주의를 경멸하고 이타주의를 상찬하지만 실상 자기 자신의 일상 행보는 그 반대로 나가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여 위한다. 그래서 미리 경고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눅 13:24] 하셨다.

다시 말씀하시기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님, 열어 주십시오' 해도 집 주인은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사람들인지 알지 못한다. 행악(行惡)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고 대답하게 되어 있다"[:25-27] 하신 것이다. 문이 열려 있을 동안에 많이 주저하고 머뭇거리고 망설이고 있었고 결연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세상 사랑과 자기를 위해 사는 삶을 회개하지 않고 차일피일 지연시킨 비극적 결과다. 이것이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는 데에 해당되는 이유다.

이 사람들은 "우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님은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26] 한 대로 구원에 대한 지식을 충분하다. 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고 사는 것과는 별개임을 우리는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신 경고가 그 뜻이다. 내 의지의 결단과 자유 선택으로 천국은 "침입해서 스스로 빼앗아 차지하는"[마 11:12/눅 16:16]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 경고는 "주님, 구원을 얻는 자가 적습니까"[눅 13:23] 누가 물었을 때 대답하신 것이니, 주님의 가르치시는 말씀을 듣고 난 후의 종합적 결론으로는 지금까지의 보통 생각으로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기보다 여간 결심이 아니고는 안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던진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믿기만 되는 선물로서의 은혜의 구원이지마는 동시에 망대 짓는 등의 비유로써[눅 14:28-33] 모든 것을 버리는 자기 부인의 경고를 함께 내리신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모든 지식에서 앞섰지만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세상 삶에서 손을 끊지 못하고 자기를 위하는 데에서부터 확연히 돌아서지 못함으로 인하여 오히려 나중에 믿게 되는 이들이 더 앞장 서서 천국 길로 줄달음질 치게 되는 현실을 가리켜, "보라,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될 자도 있다'[눅 13:30] 하신 것이다. 이렇게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않은"[계 3:15] 상태에서는 "토하여 내침"[:16]을 당할 공산이 크다. '문이 한번 닫힌" 후에 뒤늦게 황급하게 문을 두드리게 될 이들이 그러하다.

이하의 주님의 말씀은 이와 같은 정상적인 삶의 법과 질서에의 복귀 상태에 이른 우리의 마땅한 삶을 지칭하여 가르치신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poor in spirit] 자 즉 교만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으니 천국이 저들의 것"[마 5:3]이다. 교만하지 않으니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뜻을 행하기에 적극적이 되니 당연하다. "애통하는[to mourn] 자는 복이 있으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4]이다. 이 세상 자체가 모두 애통스러운 일뿐인데 모름지기 현실을 직시하고 당치도 않은 신기루에 들떠 지낼 일이 아니다.

"온유한[meek] 자는 복이 있으니 그들이 땅을 상속 받을 것"[:5]이다. 사람과 충돌하지 않고 남을 먼저 존경하여 지내니 어디서나 더불어 지낼 만한 자질을 갖춤이다. "의[올바른 것]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으니 그들이 만족하게 될 것"[:6]이다. 모름지기 올바르게 사는 것을 희구하고 주공(周公) 단(旦)이나 이공(李公) 순신(舜臣)처럼 살기를 바라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은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긍휼히[merciful] 여기는 자는 복이 있으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7]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으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8]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으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9]이다. "의[올바른 것]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으니 천국이 저들의 것"[:10]이다. 이 세상은 정의가 강 같이 흐르는 곳이 아니다. 따라서 의와 선의 편에 서는 사람들은 이공 순신의 생애에서 보듯이 모든 불이익을 감내할 각오를 지녀야 한다. 주님 친히 망대 세우는 비유로써 이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여 미리 경고하셨다[눅 14:26-33].

그리스도를 인하여 사람들이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된 말로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복이 있으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은 하늘에서 상이 큼이다[마 5:11,12]. 전에 있던 하나님의 대언자(代言者)들 즉 선지자(先知者)들도 세상이 이같이 핍박한 것이다. 사는 도리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세상의 소금 역할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 소금으로서의 제 구실을 못한다면 구원 받은 자로서의 의미도 사라지고 당연히 우리의 구원도 소실(消失)되게 마련이다[:13].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는 말씀이 그것이니 심각하게 생각할 경고 말씀이시다.

소금 역할과 더불어 세상의 빛이다. 빛은 온 누리에 그 존재를 드러내는 법이니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4-16] 경고하심도 같은 뜻이다. "착한 행실"이라 하셨으므로 더 이상 이에 대한 오해의 여지를 남겨 두시지 않았다. 이런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지 않는 모든 소위 "구원 얻은" 사람은 "행함이 없는 고로 그 믿음은 헛것이요 죽은 것"이다[약 2:20,26].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얻는 구원인데 이 말씀을 무시하고서 무슨 "구원 운운" 한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교리를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여 속이는 거짓말에 넘어 갔기 때문에 오늘날 "믿는다" 하고 "구원 받았다" 하는 사람들이 각종 비리와 악행에 연루되어 세인들의 지탄을 받고 있으니 이들로 말미암아 구원에 들어 올 사람들까지도 막는 악역을 하고 있으니 어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감히 진노의 대상이 아니 된다고 스스로 말할 것인가.

그러므로 모세 율법을 철저히 지키기만 하면 구원되는 것으로 착각해 왔던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으면 구원된다고 하는 새로운 사실로 인해 더욱 더한 착각 즉 착한 행실이 없어도 천국 가는 줄로 여길까 하여 처음부터 경고하신 말씀이 곧,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다"[마 5:18] 하셨다. 즉 그 모든 계명의 실상, 실질적인 의미이니, 겉으로만 맴돌던 안목으로 보면 가히 엄청난 것이어서 "과연 구원 받을 사람이 있을까?" 할 정도여서, 구원 받는 사람이 적습니까 하고 주님께 여쭌 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앞서의 설명처럼 더욱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으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셨고 들어가기를 구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 하셨기 때문이다[눅 13:23,24]. 다시 강조하시기를,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지만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룰 것이다" 하셨고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마 5:18,19] 하셨다.

마땅히 "착한 행실"의 열매를 맺어야 함이다. 그리고 또 경고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너희 의(義)가 서기관과 바리새 파 사람들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0] 하셨다. 그들은 지식은 있어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23:3]. 그러므로 "서기관들과 바리새 파 사람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무엇이든지 저들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들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2] 경고하셨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오늘날 그리스도 복음의 전파자 자리에 있지 않고 세상 종교의 종교인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 대체적으로 행하는 것과 똑같은 것으로서 오늘날도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책망과 경고 그대로 유효한 것이니 마땅 귀 담아 들을 일이다. 즉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거나"[:4] "그들의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이나"[:5], "잔치의 상석(上席, 으뜸 자리)과 회당의 상좌(上座, 윗자리)에 앉으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스승]"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6,7] 것이 그렇다.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마 23:13] 역할을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자기네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15] 것도 그렇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인생들의 머리가 되심에서 오는 것이니 이 사실은 현재 우리 구원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심"으로써 이루어짐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조물주이시고 우리는 그 피조물이라 해서 하늘과 땅처럼 차이 또는 괴리(乖離)를 느낄 것이 아니니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인간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심을 처음부터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아담]을 만드셨던 것이니 이는 아버지께서 독생자 하나님을 당신의 형상으로 낳으셨던 그런 수준임을 뜻한다. 단지 아버지 친히 만드신 것이 아니고 아들께서 만드셨다는 차별만이 있다. 그러나 이는 아버지 친히 '아들로 말미암아' 창조하셨다는 의미이다. 아들께서 하시는 일로서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관계가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망가진 것이다. 그래서 인생들을 새로 창조하시고 다시 출생하도록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하는 "새 사람"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으로써 된 결과이고 그 전에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음으로써 무덤에 묻힌 것이다. "죽은 자"[마 8:22]는 옛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하나님 앞에서의 "산 자"[고후 5:15/4:11]라고 하면 "성령으로 출생한 자"[요 3:8]를 가리킴이므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랍비[스승]'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다.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다.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다"[마 23:7-11] 하신 것이다.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하신 것은 옛 사람은 죽어 무덤에 묻히고 다시 출생하였으므로 새 사람으로서의 '산 자'가 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을 강조하심이다. 십계명 중 첫 계명[인간 관계에서의]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이다. 효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다. 올바른 사람 됨됨이는 그 효심(孝心)에서 비롯된다. 왜냐면 천륜(天倫, 부자·형제 사이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을 다함이 인생 삶의 모든 법과 질서의 근본이 되는 까닭이다. 우리에게 삶의 본이 되는 이공 순신은 그 노모에 대한 효심이 극진했다.

그렇다면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단순한 영생하도록 함이 아닌-롬 2:7-10] 그리스도 구원의 목적일진대, 당연히 부모 형제자매 그리고 부부 사이를 원활히 하는 것이어야 하고 이를 명령하여 마땅한데, "그리스도와 및 복음을 위하여"[막 10:29] 혹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눅 18:29]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릴"[막 10:29/눅 18:29] 수 있음은 지독한 이기주의자가 아니냐 할 것이다. 더구나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고 영생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막 10:30].

그러나, 부모 공경의 근본이 우리 모두의 어버이되시는 하나님 공경에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공경의 그림자로서 우리를 낳아 준 부모 공경이 있음이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어버이로서의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인 것이다. 하나님 친히 그런 사랑을 모든 부모의 마음에 심어 주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도록 하려 하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를 위한다면서 보다 근본이 되는 하나님 공경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 자식을 위한다고 자기 부모 공경을 소홀히 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그러므로 성경에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님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다"[엡 5:33/6:1] 하였고,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것이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할 것이라'는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2] 한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딤전 5:8] 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도리를 다한다면서 하나님께 대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으니 이는 다시 말해 하나님께 대한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는 극한 상황의 경우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이니[신 33:9],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또는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눅 14:33] 마음이 없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것이 법과 질서다. 머리를 먼저 위하고 그 다음 순서로 오는 것이 나와 함께 한 몸의 지체가 되어 있는 이웃을 위함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가족을 버린다고 해서 가족을 원수시한다는 말이 아니라[그들이 그리스도를 인하여 나를 원수시하니 원수가 되어 있기는 하나 내 스스로 그들을 원수시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마 10:36] 이러한 머리와 몸의 순서를 따름이니 그러므로 그들을 사랑하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순수하게 또는 적극적으로 능동성 있게 사랑한다는 말이 되기도 하고 여차한 경우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그들과 결별하는 수도 있음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고후 5:15]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목적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한 몸의 체제에서 그 한 몸의 안녕과 복리를 위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산 자'로서의 마땅한 자세이니, 나의 가족이 끝내[현재까지일 뿐이지 미래의 일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 질서에 들어오기를 거부한다고 해서 나도 덩달아 그들처럼 이 진리를 버린다면 나중에라도 혹시 내 가족이 믿음에 들어오는 경우 그러면 나만 빠지는[짐짓 믿음을 버렸으므로 다시는 용서가 되지 않아-히 10:26] 것이 되어 영원히 어리석은 자가 된다.

그리고 내가 끝까지 진리에 남아 있어 충성해야 장차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끌어들일 수 있는 교두보(橋頭堡) 구축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의미로 나라도 먼저 진리에 들어올 때에는 반드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므로 다시 말해 내 가족이 나를 말리고 만류한다고 해서 내가 믿음에 들어오지 못한다면 나는 영원히 진리 가운데는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수도 있는"[마 10:36] 현재의 이 세상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즉 올바른 사람 삶도 법과 질서를 따름이니 이를 무시하고서는 그 어떠한 이상적인 삶도 형성될 수가 없음이다. 법과 질서 없이는 그 어떤 삶도 가공(架空)일 뿐이고 현실성이 있을 턱이 없다.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속이는 자로서 지금까지 갖가지 가공적인 것으로써 실제는 존재할 수 없는데도 존재하는 것처럼 인생들을 속여온 것이다. 바로 그 여파(餘波)다. 하나님께 대한 그릇된 인식도 물론 그 중의 하나다. 즉 인생들과는 피부로는 도저히 그 친밀을 느낄 수 없는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조물주로서의 인상을 심어 준 것이다.

실제로는 그 어느 인간 관계보다 가장 밀접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즉 머리와 몸의 일심동체로서의 교제, "사귐"[요일 1:3]인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다른 인간 관계를 우선시하는 것은, 자기 가족을 버리고 공연히 다른 사람들 틈에 끼여 부질없이 껍적거리는 것과 같음이다. 실제 상황을 근거로 하는 법과 질서다. 하나님이 실제는 그렇지 않으시면서도 그런 것처럼 인생들을 속이시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머리로서 실제로 계시기 때문에 거기 따른 우리의 당연한 자세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이 기본이 되는 인생 삶을 형성하는 첫째 요건이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음'을 책망하신 것이다[요 5:42]. 이렇게 되면 머리 없는 몸이 되어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여기에 생명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자기 부인을 강조하신 것도 이 자기 부인이 한 몸 구조를 이루는 삶에서 필수불가결이기 때문이다. 즉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삶이다.

오늘날 개신교 교리는 믿음으로써 은혜로 선물로서의 구원을 얻었으니 방종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선껏 살면 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그렇게 애매 모호한 말씀을 아니하신다. 법과 질서를 설명함에서 그렇게 아리송하게 말해서는 절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양단간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법과 질서에 거(居)하면 생명이고 거기서 벗어나면 죽음이기에 그러하다.

글쓴이    비밀번호   
보이는 순서대로 문자를 모두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