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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 법과 질서 - 2 등록일 2016.02.24 14:33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77

 

"방종하지 말라"는 애애 모호한 표현이 아닌,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말라"는 단호한 명령이니 곧 자기 부인을 가르치심이다. 오직 그리스도[머리로 영원히 위치해 계시는]를 위해 살라는 것이다. 몸과 머리의 관계다. "방종 운운" 하는 말이 어느 구석에서도 생겨날 틈이 없고 찾아 볼 수 없는 꽉 차게 짜여져 있는 생명의 구조요 체제다. 한 치의 빈 틈도 없다. 자기를 위해 살면 무조건하고 죽음이다.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를 이루는 것이 우리 구원인데 그리스도를 직접 발로 밟고 손으로는 다시 십자가에 못박은 행위인데 그래서 은혜의 성령을 한도 없이 욕되게 함인데 무사할 리가 없다.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그런 무도, 무법한 폭거를 만드는 것이다. 내 죄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이 아닌가. 내가 죄인으로서 죽은 자가 아니었다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그렇게 사람이 되실 리도 없고 고난 받으실 이유도 없다. 나의 죄가 그렇게 만든 것이요, 죄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니 곧 자기를 위하는 "욕심이 죄를 잉태함"[약 1:15]이다. 그러므로 여러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다.

몸과 머리의 관계에서 머리는 몸을 위하는 것이 몸을 사랑함이다. 몸은 또 머리를 사랑하므로 머리의 지시를 따름이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이라 한 그대로다. 이 머리와 몸의 관계를 가르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 22:40]인 것이다.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고 우리는 보이는 일개 티끌만도 못한 존재라고 해서 하늘과 땅처럼 우리와 하나님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첫 사람 아담의 영혼이 하나님 친히 아담의 코에다 그 입으로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 된 것처럼 하나님에게서 우리 영이 나온 것이다[창 2:7/히 12:9/사 57;16/슥 12:1].

그러면 그 이상으로 하나님과 가까운 사이가 없다. 우리가 천사들이라 부르는 영물(靈物)들은 에덴낙원의 땅[ground]을 소재(素材)로 하여 지으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친히 불어 넣으신 하나님의 호흡 즉 호기(呼氣)이시다. 월등한 차이가 있다. 이를 성경은 생명의 숨 곧 생기(生氣, the breath of life)라 했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처음 아담을 만드실 때에도 자연계의 동물들과는 다르게 신령한 몸으로 장차 변환될 수 있도록 만드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신 것이다. 인간[아담]의 영혼 역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걸맞게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숨[우리로 말하면 생명에 해당되는 것이니 왜냐면 살지 못하고 죽는 것을 '숨이 끊어졌다'고 말하지 않는가]이 그 본질이다. 즉 보이지 않으시다는 그 차이뿐이고 우리 각자보다 크시다는 것뿐이지 부모 자식 관계 바로 그대로인 것이다. 이를 몸과 머리 관계로 성경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바리새 파 사람들을 포함해서]이나 오늘날의 우리들이나 불찰은 보이는 인간 관계에만 치중하여 가장 근본이 되고 기본이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등한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버리고 가시적인 가치, 보이는 인간 관계에만 매달려 있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화 있으라, 너희 소경된 인도자들이여, 너희가 말하기를,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 것'이라 하는구나.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느냐.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마 23:16,17] 하신 것이다.

근본적인 것을 버리고 아예 무시하면서 지엽적인 것을 붙들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태다. "마음이 부패해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딤전 6:5]이라 경고함과 같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6] 함은, 세상이 인간 삶의 본 터전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이 탄생할 때 에덴낙원이라는 굉장한 세상의 선물과 더불어 천사들이라는 많은 영물들을 시종(侍從)으로 거느리게 해 주신 것과는 전연 딴판인 것이다.

그 때는 생명을 주신 경우이고 이제는 아담의 범죄로 죽음이 옴으로써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까닭이다[롬 5:12]. 죽음과 생명의 차이다. 그래서 그런 영물들 중에, 아담을 배반한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만 제외한, 나머지 "열 두 영(營)"[마 26:53] 더 되는 천사들은 여전히 인간[구속 받은]을 섬기는 종자로서 활동하고[히 1:14] 있음에는 변함이 없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지막 아담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어 있는 현재 위치다. 온 세상과 만유를 다 선물로 받아 있음이니[고전 3:22] 곧 영생과 영원한 영광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사는 것이 목적일 수 없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몸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룸에 있을 뿐이니[요 4:34] 따라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아는"[딤전 6:8] 것이다. 이와 같이 "지족(知足,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을 아는 것)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한 삶 곧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는 생활이야말로 큰 이익이 되는"[딤전 6:6] 것이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고후 5:17] 한 대로, 다시 출생한 새 생명의 삶, 새로이 창조된 새 사람으로서의 높은 긍지와 보람 찬 일상생활, 성령으로 출생해서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 막강하게 되어 있는 현 위치를 항상 의식하는 것이 긴요한 것이다.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하신 것이 이 사실을 강조하심이다. 강력한 천사들이 끊임없이 수종 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 받음을 달리 표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다시 출생함이요 성령으로 출생함이요 새로 창조됨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출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아 우리가 육체로 태어난 것이니 곧 "육(肉)으로 남"[요 3:6]이요, 마지막 아담의 영[성령]을 "물려받으니" 즉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 곧 아버지의 영[눅 12:11-14/21:13-15/마 10:18-20/막 13:11/롬 8:9-11]을 물려받으니 영[성령]으로 출생함이니 그래서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로 출생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로 출생한 현재의 일면이 있어 이 경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아버지이시고, 다른 면으로는 육으로 출생했으니 즉 땅에 있는 아버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출생한 경우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으니 "땅에 있는 이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음"은 명백하다. 이런 양면성을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양면성에서 주종, 대소, 인과 관계가 분명하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함께 다시 살아나 성령으로 출생할 수 있게 되었음이다.

다시 말해 "육으로 난" 것과 "영으로 난" 것은 내가 전에 "죽은 자"였을 때는 양면성으로서의 의미가 없었으니 죽음으로서의 일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바꾸어 말해 아담이 처음 영혼 없는 육체로만 창조되었을 때 영혼이 없었기 때문에 이중 구조가 아니었었다. 그러나 영혼이 존재함으로 인해 비로소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양면성]가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성령으로 출생한 자가 되니 과거 육체로 출생한 의미가 살아난 것이어서 성령으로 난 것이 인(因)이요 주(主)요 대(大)이며, 육으로 난 것은 과, 종, 소가 되어 있음이다.

그러므로 대표성을 두고 말할 때는 항상 과가 아닌 인, 소가 아닌 대, 종이 아닌 주를 중심으로 말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을 인간과 동일한 의미의 어버이되심을 표현할 때 아담을 인간의 대표로 나타냄에 따라 여자가 생김으로써 아담이 남자가 되었으니 "아버지"라 우리가 부름과 같은 이치다. "어머니"라 하지 않는다 해서 남성우월주의처럼 착각하는 것은 성경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제대로 알고 비판할 일이다.

바로 그런 대표성을 두고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다"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말 그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한 것이니 곧 마지막 아담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출생한 것이다. 이는 다시 강조하거니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결과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 주님과 함께 무덤에 묻혔으니 그래서 자기 부인이 가능해진 사실을 이상의 여러 가르침으로써 확인하게 하신 것이다.

주님 말씀에 "인자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할"[요 1:51] 것이라 하심은 우리 인간의 대표로서의 모습을 나타내심이니 곧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므로 우리 역시 그런 당연한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이다. 광야 시험을 받으신 후에 천사들이 나아와 수종 들었다 하는 것이라든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때 천사가 나아와 힘을 도왔다 하는 등의 내용이 모두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됨이다.

그런즉 십계명 하나만 가지고 우리의 행위를 저울질하는 시대는 지났으니,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 하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보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것"[마 5:21,22]을 천명하심과 같다. 노해서도 안되고 욕해서도 안된다. 악을 악으로 갚아서도 안된다[살전 5:15/벧전 3:9/마 5:39].

간음하면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간음을 마음에 품는 것조차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마 5:27,28]. 이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고후 5:15]의 당연 결과다. 나 자신을 위한 욕심이 없는데 그런 생각이 떠오를 리가 없다. 내 오른 눈이 혹은 내 오른손이 나를 실족(失足, 발을 잘못 디딤 또는 행동을 잘못함)하게 하여 범죄하게 만들면 즉 나 자신을 위해 살게 하여 욕심을 내게 한다면 나는 가차없이 찍어내 버리는 각오가 되어 있어야 정상이다.

왜냐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내 발은 그리스도를 밟기에 이르고 내 손은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손도 자르고 발도 자르고 눈도 뽑아냄으로써 그 결과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한" 것이니 이는 어디까지나 상식 차원이다. 그렇게 눈을 뽑아내고 손을 자를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으니 그렇게 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 때는 반드시 멸망하게 되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니 명심할 일이다.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자기 부인에서 나온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시는 것은"[마 5:44,45]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세상에 한해서다. 마지막 심판 후에도 악인에게 의인과 함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은 구원 얻을 사람 모두 다 구원 얻도록 기회를 벌어 주시는 의미밖에 없으므로 악인도 회개하여 돌아오도록 그와 같이 베푸시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특별히 하나님께서 그 선행을 기억하실 이유가 없다. 선을 행해도 "참고 선을 행해야"[롬 2:7-10] 즉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해야 이 세상에서 그 선행에 대하여 갚는 자가 없으므로 오는 세상에서 갚아진다는 즉 보답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함께 살아 자기 부인이 얼마든지 가능해지는 사람 즉 하나님의 성령으로 출생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 있는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심이, 이와 같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악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참고 선을 행함" 즉 그들을 위해 줌 곧 그들을 사랑함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하는 이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치 않는다"[마 6:1-5]. 남에게 보이려는 목적이면, 남에게 일단 보여져 남들이 알아 주었으니 그 목적을 이미 이룬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선을 행함으로써 영생이거나 영광이거나 그 무엇이든 하나님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받지 못한다. 자기중심 곧 자기를 위해 행한 선이니 이런 선은 영생을 목적으로 한 경우에도 해당되어 행위로 구원 얻지 못한다는 성경적 선언의 골격을 형성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부터 먼저 해놓으신 것이므로 그래서 은혜로 얻는 구원, 믿기만 하면 되는 구원, 선물로 거저 주시는 구원이다. 그러면 그 후 행하는 선은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므로 의와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는 선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인생들로 하여금 구원 얻지 못하게 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를 교묘하게 거짓으로 꾸며 선을 행함이 필요 없는 구원으로 가짜[사이비]를 만든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선[좋은 것]을 행하고 의[올바른 것]을 행함이 필수이다. 그렇지 않다면 악을 행하고 불의, 불법으로써 영원토록 일관하라는 말이 아닌가. 왜냐면 행복하게 살기 위한 조건이 법과 질서인 것이다. 그 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그 어느 쪽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니 곧 자기를 부인함에 있다. 그래서 이런 것이 좋은 것[선], 올바른 것[의]으로 정해진 것이다.

단지 영생이나 구원을 목적으로 하여 선과 의를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중심이 되므로 몸과 머리의 관계를 구현함에서 전혀 거리가 멀어지고 오히려 그 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생을 한다면서 선과 의를 행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악을 행하고 죄를 지으면서 살라는 말이 아닌가. 그 비참한 결과는 지금까지의 세상의 행티에서 충분히 신물 나도록 보아 오고 있는 터이다.

천국에 들어가게 되먄 그 분위기에 젖어 모두가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할 것이 아니냐 한다. 그것이 바로 간섭이요 강제다.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보장해 주신 의미가 사라져 버린다. 만일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모순 당착의 일을 하시게 되는 것이니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음이 자명해진다. 그리고 에덴낙원이 당시로 말하면 천국과 같은데 그런 천국에서 아담이 혹은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범죄를 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들어갈 천국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부터 모든 것은 저울질된다. 그래서 선이 좋아서 의를 사랑해서 의와 선을 행하는 자들과 간섭에 의해 혹은 강제에 의해서나 겨우 선과 의를 행할 수 있는 이들 다시 말해 자기중심을 버리지 못하는 즉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자들을 걸러내시는 것이다.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완전히 뒤집어 오히려 멸망하는 구원의 도를 만들어 냈으니 즉 "참고 선을 행함"[롬 2:7,10]과는 거리가 먼 단지 특정 사실을 사실로서 인정하는 것으로만 의미를 한정시켜 "믿음"이라는 것을 둔갑시켜 놓은 것이다.

오늘날 온 세상이 바로 이런 인간이 만든 교리에 흠뻑 취해 있어 인사불성(人事不省, 정신을 잃어 의식이 없음) 사태에 놓여 있으니 화급하게 성경으로 돌아올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됨이 막연하고 추상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 현실이고 진실임을 이와 같이 성경이 강조하고 있으니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엿보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죄를 지을 수 없으니 이는 죄를 짓는 것이 "마귀의 일"[요일 3:8]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에게 "절하는"[눅 4:7] 꼴이 되므로 죄 짓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요 따라서 우리가 구원 받음이 하나님의 아들됨에 있으므로 역시 구원도 받지 못했음을 스스로 증명한다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여전히 죄 가운데 있어 육신에 사로잡혀 죄인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구원 받았다고 한다면 위의 설명과 같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를 활용하고 있음에 동참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하나님 훼방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는 실상을 그런 사람들은 알아야 하는 것이다. 구원도 얻지 못한데다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악행에 직접 가담하여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으니 이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무사할 리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사람이 내게 어찌하든 나는 오직 하나님과 상관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았으니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만 전심전력을 다할 때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마 6:16-18] .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실 것이다"[:6] 하심과 같다.

몸은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하는 관계에서, 오직 이 한 몸에서의 각 지체 각 부분이 되어 있는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하는 것뿐이다. 그런즉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31] 차원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차원에서 하는 것이니[:33], 하나님께 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이 어두움 가운데에서 마귀가 끌어가는 대로 끌려가는 세상 사람[이방인]들처럼 할 것이 아닌 것이다[:32].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부귀영화가 다르고 세상이 주는 또는 마귀가 주는 부귀영화가 다르다. 후자는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인 마귀가 주는 것이므로[눅 4:7] 마귀에게 절하여 그를 따를 때 가능하니 다시 말해 자기중심으로 살아 죄를 짓고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킴으로써 되는 일이다. 따라서 이와 대립[대칭, 상칭]되게 마귀를 따르지 않는 경우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음을 말함이므로 자연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세상에서 당하심으로 본을 보이신 것처럼 "매일 십자가 지는 고난"이다[9:23].

"영광은 고난 다음"[24:26]이라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름이다. 우리가 마지막 아담의 영[성령]을 받아 모든 면에서 마지막 아담을 따르는 자가 되어 있음이다. 첫 사람 아담을 따라 우리가 그의 육체를 입어 사람이 되어 있고 그가 범죄하여 죽음에 따라 역시 범죄하는 죄인이요 죽은 자가 되어 있었으나, 이제 마지막 아담으로 인하여 마지막 아담과 같이 의인이 되어 있고 산 자가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음이다.

그러면 우리가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아 아담의 아들[사람의 아들, 인자(人子)]이 되어 있는 것처럼 마지막 아담의 성령을 "물려받았으면"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아들들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어찌 아버지의 아들들이 되어 있느냐 하면 성령이 다름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로 계시는 모습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에게 와서 그와 함께 거할[함께 살] 것"[요 14:23]이니, 여기서 우리는 성령으로 오심을 말하는 것이요 곧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의 영"[롬 8:9]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당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 살리신 이의 영"[:11]을 모시고 있으니 곧 아버지의 영이시다. 즉 아버지시다[요이 1:9]. 그러니 아버지의 영을 물려받음도 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아들 곧 아버지의 아들이다[요 20:17]. 항상 작은 자와 큰 자로서의 대립[대칭]으로 존재할 때는 그 대표성으로 말할 경우 "아버지"를 가리킴이다.

또한 아들께서 함께 하시므로 즉 둘[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로서의 성령이시므로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 "영존하시는 아버지"[사 9:6-"Everlasting Father"]라 하시는 것이다. 처음 만유를 창조하실 때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되어 계시는 "성령"[창 1:2]으로 지으셨으므로, 아들께서 창조하셨다[요 1:3/히 1:10-12] 하기도 하고 아버지 친히 아들로 말미암아 지으셨다[히 1:2]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로 계시지 않을 때가 있었으니 아버지께서 아들을 "내어주셨을"[to deliver-fha 8:32] 때로서 곧 아들께 우리 위해 사람이 되시던 때다. 만일 이 때에도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하셨다면 아버지 역시 사람이 되셨을 것이요 그렇게 되면 아들께서 죽으셨을 때 아버지 또한 죽으심이 되어 영원히 다시 살아나시는 일이 없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아들께서 우리 위하여 세례 받으시고 성령을 받으실 때 다시 임하여 오시어 아들과 하나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받아 영원히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모습을 우리의 대표로 그리스도께서 치닣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아들이 죽으셨을 때 역시 하나로 계셨으나 아들과 함께 죽으시는 것이 아니었으니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아들께서는 '한 사람'으로서 죽으신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아들 안에 계시는 자기의 영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다시 살리셨다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다. 우리 역시 같은 양상이니 내 안에 계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살리시는 것이다[요 5:21]. 그리고 이 의미는 아버지 친히 우리를 살리심이 되는 것이니[롬 8:11/요 5:21],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하나로 즉 "성령의 이름"[마 28:19]으로 그렇게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빌 1:29] 스스로 받는 "은혜"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tribulation]이나 곤고(困苦, distress)나 핍박[persecution]이나 기근[飢饉, famine]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屠殺, slaughter, butchery, massacre)할 양(羊, sheep)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함과 같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거니와,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을 것이다'[롬 8:35-39] 함과 같다.

이러한 고난을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부득이 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들 곧 만유(萬有)의 상속자인 주인으로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스스로 받는 것이니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리스도 친히 그 몸된 우리를 통해 우리 육체 안에서 마저 채우시는 일을 친히 하고 계심이다. 그러므로 모든 진상(眞相)을 어설프게 알지 말고 명확히 알아 분명한 자세로 매사 임해야 하는 것이다. 심드렁하게 하는 듯 마는 듯한 자세를 취하기 때문에 이런 경우 그리스도께서는 "토하여 내치신다"[계 3:16]. 사람도 이러한 경우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이시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을 가리켜 성경은 "일한[순종의 행위를 나타낸]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義)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하기를 '그 불법을 용서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님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였다"[롬 4:6-8] 하였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나의 과거 죄가 청산되어 죄가 없기 때문에 나를 의롭다 하심이다.

죄 지은 내가 그 죄 값으로 죽었다면야 나의 의로움과 아무 상관이 없다. 지금 살아 있는 내가 그런 의미가 되어 있으니 나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었기에 이루어진 결과다. 죽어도 '함께' 죽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실 때 '함께' 살아나 있음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 있으므로 둘이 하나되어 있는 상태로 살아나 있는 것이다.

영원히 둘이 하나되어 있는 상태이니 영혼과 육체와 둘이 하나되어 있음이요 머리와 몸이 둘이 하나되어 있는 바로 그러한 관계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소하리요[to bring a charge against].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단죄하리요[to condemn].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이시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이시다"[롬 8:33,34/히 7:25] 함과 같다.

내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법은 없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이는 나와 하나되어 계시는 주님이시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롬 8:26,27] 함이 바로 이렇게 기도해 주심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령 따로 계시고 그리스도 따로 계시는 것이 아니니 혼동하지 말 것이다. 따라서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는 그리스도와 내가 함께 사니 내 나 자신을 위하거나 나 자신을 위해 살 여지, 틈이 없다. 전적으로 주님께서 나를 위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과거 죄를 청산했을 뿐 아니라, 현재 살아 있음이 하나님의 성령을 "물려받아" 성령으로 내 안[혹은 내 위에 계시는-벧전 4:14]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되어 있음이니 나 자신을 위해 살 수 없으므로 "죄를 지을 수가 없다"[요일 2:1/3:6-10/5:18/고전 15:33,34/벧전 4:1/히 2:14,15]. 머리와 몸 관계에서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므로 자기중심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원 받았다 하고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자처하면서 자기중심이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바울은 확언한 것이다[롬 14:7-9].

둘이 하나요,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할 일이다. 이것이 새 생명의 새 생활을 추진시키는 동력이요 그 삶의 방법이다. 그리스도와 내가 이제 영원히 하나요 따라서 그리스도의 모습은 나의 모습 그리고 나의 모습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모습이 되어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아야 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 혼자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는 그리스도와 항상 함께 양면성을 이루어 있음이니 나를 위하시는 이는 그리스도시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자기 부인이 얼마든지 충분히 가능해짐이다.

머리와 몸 관계가 삶[생명, 일상생활]의 법이요 질서임을 명심할 일이다. 이를 나타내는 철저한 공동체 의식으로 대표되는 이공 순신의 역사적 교훈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이순신 정신'으로서 세계 만방에 알리는 것이니 실로 언제 어디 갖다 놓고 이야기해도 훌륭한 실질적인 교훈이 되는 것이다. 죄가 바로 자기중심, 이기주의를 나타내는 것이고 성경의 선과 의는 그와 대립되는 공동체 의식, '하나' 의식, 한 몸 의식을 말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리고 그 둘의 대조되는 현저한 결과가 이공 순신과 '나'원균으로 말미암아 여실히 그대로 드러나져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모든 죄는 다 자기중심이라는 사실에서 볼 때 그리고 이를 치유(治癒)하는 것은 오로지 사심(私心) 없는 공공의식, 한 몸 의식의 자기 부인이라는 점에서 이 대조되는 양면이 빚어내었던 결말로서는 천추에 빛나는 교훈으로 손색이 없음이니, 바로 이공과 '나'원균으로 그 명암(明暗)이 임진왜란이라는 무대에서 명백히 드러나진 것이다.

이같이 이공(李公)의 공익 정신은 사사로운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체 공공(公共)의 복리를 위한다는 점에서 만인의 사표가 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난 삶의 진리를 충분히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기에, 이와 같은 명백한 역사적 실례(實例)를 듦으로써 이 머리와 몸의 관계로 공동체 의식, '하나' 의식, '한 몸' 의식 가운데에서 일관되게 자기 부인[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으로 지향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우리는 온 누리에 전파하는 것이다.

공동체의식이 한 몸됨, 한 몸 의식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몸으로서 각 지체 각 부분으로서 각자 자기 맡은 바 소임을 다하여 결코 자기 개인의 사사로운 욕망을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취지가 자기부인이라는 점에서 이상 역사적 진실은 그리스도와 복음의 내용과 동일한 의미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는, 각자 그리스도와의 하나 관계 즉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시고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관계에서 그 온전함이 구비되어 있고 이것으로 곧 영생과 영원한 영광과 직결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공이 그림자로 나타내어 준 삶의 올바른 정신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다. 이런 희귀한 역사적 실례를 우리 민족에게 안겨 주신 것은 우리 민족에게 부여하신 마지막 때의 복음 전도자로서의 사명에 결부시켜 볼 때 특별히 우리 민족에게 베푸신 은혜라 아니 할 수 없다. 시대에 어긋나는 선민(選民) 의식을 불필요하게 선동한다고 할 필요는 없다. 선민 의식이라는 것은 국민 각자의 의식이 그 중요 포인트가 되는 것이지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특전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선민(選民)"으로서의 의미도, 날이면 날마다 부패 타락해가는 인류 가운데에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인간적' 그루터기[그 혈통을 통해 장차 나타나시게 될-비록 양자(養子)로 말미암을 것이지만)]를 만들어놓으셔야 되는데 인간 종족 중에 그럴 만한 족속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믿음 있는 한 개인인 아브라함을 지목하시고 그 자손을 축복하셔서 이 인류 구원의 경륜과 섭리를 부지런히 가르쳐 그리스도 오심에 대비하도록 하신 것인데,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역사를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그 나물에 그 밥이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미리 택하심을 따른 하나님의 인간 구속의 역사가 무위(無爲)로 돌아갈 리 없어 마침내 그 민족 가운데에서 구세주께서는 태어나신 것이다. "선민"이란 것은 이런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선민' 역시 세상의 잡다한 민족과 똑같게 아니면 그 이상으로 부패 타락해 갔던 것이니, 그러므로 선민으로서의 특권은 누구나 믿는 사람이면 다 누리게 되어 있는 것이요, 선민으로서의 사명의식[책무]은 그 안에 성령을 모신 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여생(餘生)의 유일한 삶의 목표로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어 있는, "꺼지지 않는 제단의 불"[모세 율법에서 제단에서 사용되어지는 불은 항상 꺼지지 않도록 살려두고 있었음과 같이]인 것이다.

각자 은혜를 받은 대로 자기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의 과정들을 살피면 그것이 곧 그에게 임하신 특별한 섭리요 은총임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이, 이 한민족의 성장 과정과 그 동안의 변천무쌍했던 역사의 물줄기를 조명해보고 나름대로의 확신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공과 '나'원균의 대조된 삶은 성경에서 말하는 바 죄와 의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리고 순종과 불순종이 어떤 결과를 낳는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실증(實證)해 보인다는 데에 그 무한한 막중한 의미가 있다.

죄와 의를 막연히 추상적으로 이해하려 드는 데에 결정적 폐단이 있기 때문이다. 죄의 정체가 그와 같은 자기중심의 폐해로 잘 드러나고 있음이다. 그리고 자기 부인은 공동체 의식에 있으므로 그 결과가 일조유사시에 어떤 위력[생명력이라 해도 좋다]을 나타내는지 그 사실이 여실히 증명되어 나타난 것이므로 이공의 생애를 자주 거론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공공의식의 삶의 신념은 평소[유사시가 아닌]에는 세상에서 푸대접을 받는다는 실상을 역시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 이공의 임란 이전의 미관말직(微官末職)으로만 떠돌았던 시기이다.

죄를 짓는 즉 자기중심으로 사는 한 사람[개인]의 망국에까지 이를 수 있는 엄청난 폐단, 그리고 '우리' 의식에 철저한 한 사람[개인]의 일조유사시의 엄청난 구국, 구세적(救世的)인 위력을 입증하는 것으로서 이 두 사람의 대조된 삶만큼 극적인 것이 없다. 더불어 말해 둘 것은, "누구든지 이공과 같은 삶을 살면 구원을 받는가,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더라도 영생하는가" 하는 질문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우리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이 아니고는 절대로 살 수가 없다. 첫 사람 아담과 우리 자신의 죄의 결과로 인하여 현재 흙으로 돌아가는 육체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이런 흙의 몸을 벗어나야 영생이 가능한 것이다. 이 흙의 몸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으심을 내 것으로 하지 않는 한 그리고 생명과 사랑의 법칙을 따른 둘이 하나됨의 이중 구조를 따르지 않고는 한마디로 불가능이다.

고로 그리스도를 믿고 다시 사신 그 분과 '하나' 되어 사는 새로운 피조물의 과정을 갖추어 거쳐야 하는 것이지, 행동만 옳게 한다고 사람이 구원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왜 그 분과 '하나' 되어 사는 것이냐 하면, 그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그 부활을 내가 그렇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으로 수용하여 이를 토대로 사는 것이 되어야 다시 말해 영원히 새로이 창조되어야, 그런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 비로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올바른 삶이 영원한 생명에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관계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특권이요 은혜이니, 곧 그리스도를 맏아들로 하시고 우리 모두를 그 아래의 아들들 즉 양자(養子)들로 삼으시는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모시는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되 당신의 아들들로 삼으시는 방법까지 개의치 않으신 것이다.

즉 우리를 위해 상상할 수 있는 한의 최후의 수단까지 모두 동원하신 것이 그리스도의 우리 위하신 죽음으로 이루신 새 창조의 내용이다. 죄란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살피는 일에서도, 거듭 말하지만 이공과 '나'원균의 사례는 필요불가결하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아주 모호하게 이해하고 있음이다. 적을 이기려면 적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죄에 대한 이해가 애매 모호한데 어찌 그 죄란 원수를 섬멸할 수 있겠는가.

혹자 이런 질문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 '우리'를 위함으로써 내가 위해지는 이치로 자기 부인을 하는 것이라면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취지일 것인즉 배우자가 없는 남녀가 서로 좋아하여 관계를 맺는 것은 상대에게 폐해를 주는 것이 아닌데도 왜 음란하다 하여 이를 금하는가?".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한 몸이 될 때는 남자의 몸은 여자의 것이요 여자의 몸은 남자의 것이라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고전 7:4]. 이것은 둘이 하나 됨의 이치를 따름이다.

공동체 의식은 한 몸 의식을 말하는 것이니 머리 없이 지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상호간 지체로서의 관계는 반드시 머리와의 관계가 선행되어 나타나는 법이다. 머리의 지시를 받아 상호간 위하는 관계이기에 그렇다. 그러면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룸이 피차간에 머리의 보내심 받아 서로 봉사하는 기본이 된다[요 4:34].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항상 생각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핵심이다[히 12:28/고전 7:32,33/고후 5:10,11/롬 12:2].

그러므로 남녀가 관계하는 것은 한 몸 됨이므로[고전 6:16] 반드시 이 이치를 따라 자신들을 하나로 결속시켜야 하는 것이니 곧 결혼이다. 따라서 결혼하지 않고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아무리 서로가 배우자가 없다 해도 그렇게 관계하는 그 순간 각자의 임자를 상호간 만드는 것이 된다. 결혼함으로써 이 관계를 만드는 것인데, 결혼하지 않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 되어 난잡한 행위로 흐를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제대로 법과 질서가 강조될 수 없다.

그런 관계를 할 정도로 서로 가까운 사이라면 결혼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면 정식으로 결혼을 하고 그런 일을 할 것이요 만일 결혼할 사유가 되지 못한다면 그런 행위를 할 사유 역시 없고, 사유도 없이 그런 행위를 한다면 자기 욕심을 따라 행하는 것이 되어 자기중심이므로 불법행위로 처단될 수밖에 없다. 생명 그리고 그 최대한의 행복을 보장하는 데에는 법과 질서가 기본이다. 무질서 속에서는 그 어떤 행복한 삶도 있을 수 없게 된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살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는 것이므로 오직 하나님만[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고-롬 15:1-3] 기쁘시게 함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영원한 법칙으로 둘이 하나 되는 원칙을 정하셨으면, 우리 모두는 이를 사랑하여 이 원칙대로 따라야 옳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일 수밖에 없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다름아니라 죄요 죄의 결말은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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